47. 학술원
엘리아가 입학한 제국 중앙 학술원은 수많은 귀족가 자녀들이 몰리는 곳이었다.
물려받을 작위가 없는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모아 둔 곳이니, 또래 친구 하나 없이 지내 온 엘리아는 학술원 생활에 기대가 컸다.
‘어차피 같은 학생인 입장인데, 일일이 가문 따져 가며 지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외젠은 소속 가문을 따져 가며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며 몇 번이나 잔소리를 했다. 엘리아는 그의 걱정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엘리아는 학술원 첫날부터 제가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아……. 내가 낄 틈이 없네.’
아이들은 부모의 교육을 통해 누구와 어울려야 하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엘리아가 다가가기도 전에, 이미 다른 아이들이 엘리아를 배척하기로 정한 상태였다.
‘학술원에 가면 에드문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알게 될 거라더니…….’
엘리아는 에드문트가 대단한 게 아니라 제 앞길을 콱 가로막는 장애물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그렇다고 엘리아가 제멋대로 그 장애물을 뛰어넘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고.
강제로 고독한 생활을 하게 된 엘리아에게 갑자기 사람들의 관심이 몰린 건, 입학 한 달째 되던 날이었다.
“엘리아 님.”
크라우제 후작의 둘째 손녀로 차기 사교계의 중심으로 점쳐지던 자작가 아가씨가 엘리아를 찾아왔다. 열 명이 넘는 제 무리와 함께.
“라스페가의 공자님과 약혼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그렇긴 한데. 왜?”
엘리아는 그제야 전날 제 약혼이 정식으로 공표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비슷한 상황이 몇 번이나 일어났다. 일일이 대꾸해 주기 귀찮아진 엘리아는 저택에서 슬쩍해 온 약혼 증서를 학술원 본관에 붙여 놓아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했다.
‘귀찮아 죽겠네. 다들 왜 이렇게 약혼에 관심이 많은 거야.’
엘리아는 사람들의 관심이 근래 흔치 않은 정략결혼의 당사자를 향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웬 남작가 아가씨가 얼굴을 발그레 붉히고 찾아오기 전까지는.
“엘리아 님, 라스페 공자님 말이에요. 그럼 가까이서 본 적도 있겠네요?”
“본 적이야 있는데. 그게 왜 궁금한데?”
“그야, 그 라스페 공자님이시잖아요! 저는 딱 한 번 황실 무도회에서 뵈었는데 멀리서 봐도 반짝반짝 빛이 나던걸요.”
“……뭐라고?”
중립파 피사로 백작의 조카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녀는, 에드문트가 지난해 황실 무도회에 참석한 뒤로 대단한 관심과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다들 엘리아 님이 부럽다고 난리예요. 제 또래 중에는 에드문트 님을 빼앗겼다고 우는 아가씨들도 있는걸요.”
‘부럽다’라는 일차적인 감정이 시기와 질투, 분노로 퍼져 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엘리아는 약혼이 알려지자마자 ‘에드문트라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운 좋은 귀족’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다.
“앞날은 모르는 거잖아? 예를 들어 라스페가 로앙이 아닌 크라우제와 혼맥을 맺어 세력을 통합시키게 될지도 모르지. 그럼 한미한 백작가와의 약혼쯤이야 있었다가 없어지는 거고.”
“그 공자께서 스스로를 팔아 로앙 백작가보다 훨씬 더 실속 있는 가문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 할지도 모르고 말이야.”
엘리아는 저 들으라는 듯 지껄이는 잡담에 화가 뻗쳤고, 동시에 에드문트에게 분노했다.
자신이 학술원에서 무얼 하든, 어떤 사람이든 간에 에드문트 라스페라는 이름으로 전부 덧씌워져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나를, 죽여 버리는 것 같아.’
제게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 이전까지 어울리던 사람들, 지나갈 때마다 자신을 흘끔거리는 이들과 수업을 빌미로 접근해 오는 학자들까지.
엘리아는 다들 자신이 아닌, 제 위에 껍데기처럼 씌워진 에드문트의 흔적을 보러 접근한다고 여겼다.
제게 그런 흔적이 있을 리가.
에드문트는 여전히 엘리아에게 관심 한번 보이지 않았다.
자랄수록 그는 점점 더 차가워지기만 했기에 엘리아는 공작가에 다녀올 때마다 푸른색 괴물이 나오는 악몽을 반복하기에 이르렀다.
어릴 적부터 이어져 온 악몽 속 괴물은 어느 순간부터 에드문트와 동일시되었다.
<엘리, 네가 성년이 되어서도…… 그때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나도 더 욕심부리지는 않을게. 그러니까 노력해 줄 수는 없을까?>
하나 외젠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으니, 엘리아는 견딜 수밖에 없었다.
‘지긋지긋해.’
에드문트는 엘리아 로앙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그를 라스페의 약혼자라고 특별 대우했다.
동시에 에드문트는 엘리아를 ‘에드문트의 약혼자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격하시켰다.
도피처가 필요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나는 평생 에드문트에게 갇혀 있다가 죽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엘리아가 도피처로 선택한 건, 외젠의 집무실을 뒤지다 발견했던 종이 한 장이었다.
‘어쩐지 낯이 익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부모님 필체인 것 같아.’
적힌 글은 일목요연한 서술이 아닌 단어와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낙서였다.
엘리아는 안타깝게도 글의 절반도 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해 보고자 했다. 처음 보는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을, 펜으로 종이가 찢어져라 그어 둔 흔적들의 의미를, 부모가 종이 한 장을 빼곡히 채우며 느꼈을 심정까지.
‘1황자 전하가 죽은 게…… 몇 년 전이더라? 결탁이라는 건 무슨 의미지?’
엘리아는 부모의 흔적을 이해하기 위해서 오래전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2황자가 1황자 황태자 책봉 직전 그가 벌인 뢰이유 문화 운동에 문제를 제기하며 반대 의사를 피력하면서…….>
‘뢰이유 문화 운동은 또 뭐야?’
책을 하나 펼쳐 읽다가, 모르는 게 튀어나오면 다시 책 한 권을 펼치고……. 엘리아는 도서관에서 제가 머무는 기숙사까지 쉴 틈 없이 책을 꺼내 날라야 했다.
책상으로는 자리가 부족한 나머지 가져온 책을 바닥에 내려 두어야 했다.
‘황제가 위독했을 때 3황자는 너무 어렸고, 1황자의 책봉이 공식 발표만 남겨 두고 있었는데 하필 발표 이틀 전에 1황자가 죽어서, 그래서 2황자가 황제가 되었다는 거네. 딸인 벨레노아 백작께서 승계할 수는 없었나?’
하나를 이해하면 모르는 것 열 가지가 튀어나오는 상황이 반복되었으니, 엘리아는 답답한 마음에 도움이 될 만한 수업을 골라 신청했다.
열다섯 살, 열여섯 살 학생들에게 권하는 수업에 막무가내로 끼어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자리를 지켰다.
‘중앙 집권화 양상을 보이는 현 제국에서 황권과 영주의 권한이 충돌할 시에…….’라는 장황한 주제로 토론이 벌어지면, 아직 기초 지식이 부족한 엘리아는 중앙 집권이 뭔지부터 막혀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학자가 수업이 끝난 후 엘리아를 따로 불러냈다.
“엘리아 양, 어려운 게 있으면 따로 질문해도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혼자 할 수 있어요. 선행 수업 없이 테레사 경의 수업을 들은 게 저 하나뿐인 것도 아니잖아요.”
엘리아도 원래는 모르는 것들을 한가득 종이에 적어 틈날 때 학자들에게 질문할 생각이었다.
<라스페 공자가 열한 살 때 학술원에 잠시 다녔다더라. 반년 만에 졸업 시험까지 통과해서 떠나 버렸지만.>
학생들이 저들끼리 떠들던 이야기를 우연히 엿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에드문트가 저보다 어린 나이에 수업을 들었다는 말에 엘리아는 자신도 혼자 할 수 있다며 고집을 부려 대던 중이었다.
연륜 있는 학자에게는 그런 엘리아의 속내가 너무도 투명하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엘리아 양께선 라스페 공자와 친분이 있으셨지요. 그분도 비슷한 연배에 제 수업을 들었는데, 궁금한 게 참 많은 분이었습니다.”
“에디가, 아니 공자께서도 질문했다고요?”
“어떨 땐 저를 두 시간 동안 붙들고 설명을 시키기도 하셨지요.”
물론 에드문트는 단지 학자가 당시 준비하던 논문 내용이 알고 싶으니 앞에서 말로 읊으라고 시켜 댄 거였지만.
학자는 경쟁의식을 불태우는 엘리아가 에드문트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럼 다음 수업 끝나고, 그때 나도 궁금한 게 생기면 몇 가지 물어볼래요.”
* * *
학술원의 모든 학자가 정치학자 테레사 경처럼 친절한 건 아니었다. 아직 다수가 황제와 3황자의 권력에 빌붙어 있었던 만큼, 엘리아를 배척하는 분위기도 만만치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태도는 양극단으로 치달았다.
“베르디에 자작가가 기어코 라스페 공작가로 세력을 옮겼다지? 크라우제 후작가의 보복은 대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담.”
“그만큼 공작가에서 특혜를 약속한 거 아니겠어? 베르디에가 첫 배반자를 자청해 준 덕분에 공작으로선 눈치 보던 귀족가들 빼 오는 게 더 수월해질 테니까.”
“듣기로는 베르디에 자작 부부를 설득하는 데 반나절도 안 들였다던데?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멀쩡한 부부가 쌍으로 어린 공작에게 미친 거려나.”
“몸으로 꼬신 거 아니야? 라스페 공작께서 아주 날이 갈수록 죽여준다고…….”
“뭐가 그렇게 죽여주는데?”
상황이 만만치 않았지만 열셋이 된 엘리아도 만만치 않아진 건 매한가지였다. 이제 엘리아는 에드문트를 두고 지저분한 농담을 하던 학생들 사이에 천연덕스럽게 낄 줄도 알았다.
“뒤낭 자작가의 둘째랑……. 다른 쪽은 처음 보는 것 같네. 어디 얘기해 봐.”
“아니, 그게…….”
“왜? 밤마다 내 약혼자가 어떻게 몸으로 베르디에 자작가 가주를 꾀었을지 상상해 댄 거 아니었어?”
“…….”
“당사자 앞에서 지껄이지도 못할 더러운 소리 하고 다닐 시간에 교양이나 쌓아.”
엘리아의 신랄한 지적에 학생들은 아무 대꾸도 못 하고 속으로만 씨근덕거려야 했다.
그 뒷배에는 에드문트 라스페가 있었다.
라스페 공작가의 위상은 날이 갈수록 더욱 높아졌고, 엘리아는 학술원 내에서 그 파급 효과를 절절히 실감했다. 누구도 그의 약혼자인 엘리아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이제 엘리아는 그 점을 적당히 이용할 줄 알았다. 짧은 자괴감을 대가로 얻는 권력의 위세는 달콤했다.
‘기생 식물이 된 기분이야.’
열셋의 엘리아는 외젠이 예전에 제게 했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로앙은 라스페에게 빚을 진 것뿐 아니라 그가 절실히 필요했다.
‘에드문트에겐 로앙을 대체할 가문이 너무나도 많지만, 로앙에겐 에드문트뿐이야.’
그는 로앙에게 방패였고, 검이었으며, 그늘을 만들어 주는 커다란 나무였다. 엘리아는 그 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를 자청했다.
‘다음 황권 다툼은, 단순한 세력 경쟁이 아니라 서로 죽고 죽여야 끝나는 전쟁이 될 테니까.’
세 형제간에 벌어진 지난 황권 다툼이 너무나 극심했던 탓에 가문 간 메울 수 없는 깊은 골이 만들어졌다. 모두들 다음 황권 다툼을 복수의 기회로 삼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에디가 독하게 세력을 확충하는 게 그냥 권력욕이 있어서 그런 건 줄로만 알았는데.’
엘리아의 세계가 조금씩 넓어질수록, 조금은 에드문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여전히 사람 같지 않게 굴었지만, 적어도 세상과 맞서는 모습에는 명분이 있었다.
에드문트가 원하는 건, 아마도 생존이리라. 다음 대의 황위 다툼이 일어날 때 살아남기 위해 세력을 넓히는 것이리라.
‘우리의 부모가 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네 파란 눈도 지금과는 다르게 보였을까.’
엘리아는 책을 통해, 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과거를 떠올려 보았다.
1황자가 급사하지 않았다면, 2황자가 제 친형이 남긴 황위를 탐내지 않고 조카인 벨레노아 백작에게 권력을 넘겼더라면.
세상이 지금과 달랐을 테니 에드문트 라스페도, 사람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으려나.
‘우리에겐 비극이었지만 그들에겐 천운이었지. 그래. 2황자가 황제가 되고, 크라우제 후작이 권력을 잡은 과정 말이야. 적절한 시기에 1황자와 황제가 사망했고, 라스페가 무너지면서 권력까지 안정되었잖아?’
엘리아는 방 안에 가득 쌓아 둔 종이를 들추어 보았다. 열두 살, 아직 필기체가 익숙하지 않던 시절 적은 글씨가 남아 있었다.
2황자는 어떻게 황제가 될 수 있었을까, 왜 벨레노아 백작은 황제가 되지 못한 걸까, 크라우제 후작은 3황자 편인데 왜 황제와 친한 걸까…….
열셋이 된 엘리아는 제가 1년 전 남겨 둔 질문에 간단하게나마 답을 할 수 있었다.
‘1황자가 급사하며 무너진 그의 세력이 2황자 측에 흡수되었으니까. 하필 죽은 시점이 책봉 직전이라 벨레노아 백작이 계승 순위에서 불리해졌으니까……. 그래서 2황자가 황제가 되었지. 반대로 1황자가 죽지 않았다면?’
크라우제 후작의 경우는 또 어떻던가. 라스페 공작 부부가 사망한 덕분에 황권에 버금가는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럼 만약 공작 부부가…… 엘리아의 부모님과 함께 죽지 않았다면.
‘2황자의 황권도, 크라우제 후작의 권력도 누군가 죽지 않았다면 없었을 거야. 이게, 정말 우연인가? 신이 하필 그들만을 위해 죽음을 내렸다고……?’
비가, 내렸다. 천둥이 치고 번갯불이 반짝이는 폭우가 쏟아졌다.
엘리아는 벼락을 맞아 불이 붙은 나무처럼 굴었다. 충격으로 전율하였다.
‘종이…… 그때 부모님 필체, 어디 있지?’
에드문트를 향한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발점으로 삼았던, 엘리아가 모르는 말만 잔뜩 적혀 있던 종이를 급히 찾아 들었다.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 마치 누가 그사이 번역해 놓은 듯, 이제 엘리아는 한 군데도 막힘없이 부모가 쓴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시해. 1황자 시해. 왜 사망이 아니고, 시해라고 적었어?’
비가, 쏟아졌다. 새파랗게 시린 물이 차올라 발목, 무릎에 이어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첫 봄, 두 번째 월요일 출발. 첫 봄이면 3월, 월요일. 두 번째 월요일이면 최소 8일에서…… 14일 사이. 부모님이 벨레노아 영지로 떠난 날이…….’
출발일이라는 단어 옆에 적힌 일자는, 엘리아의 부모가 마차 사고로 죽은 날과 시기가 겹쳤다.
단순 급사가 아닌 살해를 암시하는 단어, 2황자와 3황자 세력에 대한 언급, 비가 쏟아지던 궂은 날에도 일정을 미루지 않고…….
<비가 많이 와서 큰일이네. 마차는 결국 수리 못 한 거지?>
<응, 그래서 공작 부부께서 타고 오시는 마차에 합승하시려나 봐.>
하필 로앙가 부부가 타려던 마차는 그날 수리가 필요해 합승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
‘그게 전부 우연이었다고?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때처럼 비가 쉬지 않고 쏟아졌다. 허리까지 차오른 빗물이 어깨를 지나 엘리아를 전부 집어삼켰다.
바닥이 없는 호수에 빠져 익사할 것만 같았다.
‘사고가 아니었구나. 부모님을 죽인 게, 단순한 마차 사고가 아니었구나…….’
엘리아는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빗줄기를 향해 물었다.
‘나만, 몰랐던 걸까? 나 혼자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았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