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모르는 이야기 4
46. 아홉 살
기적처럼 상태가 호전된 후, 엘리아는 여태 앓았던 게 전부 악몽에 지나지 않았다는 듯 예전으로 돌아갔다.
데이지가 떠 주는 음식을 꼬박꼬박 받아먹고, 며칠 지나니 제 손으로 직접 한 술씩 떠먹을 수도 있었다.
“으으. 이거 너무 써.”
쓰디쓴 약도 뱉어 내는 법 없이 부지런히 삼켰다. 덕분에 정원에 핀 꽃이 지기 전, 엘리아는 혼자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큼 몸을 회복했다.
“꽃이 엄청 많이 피었네.”
따듯한 날을 골라 몇 개월 만에 외출에 나섰다. 데이지의 손을 꼭 잡고선 정원을 거닐며 남은 꽃을 구경했다.
“있잖아. 내년에도 꽃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럼요, 아가씨. 내년 아가씨 생일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필 겁니다. 아가씨가 자라는 만큼 꽃나무도 자랄 테니까요.”
외젠은 엘리아와 정원사가 나눈 대화를 전해 듣고는, 커다란 캔버스를 꺼내 주홍색 꽃을 그려 주었다.
“왜 꽃이 아홉 송이밖에 없어?”
“네 생일 때마다 하나씩 그려 주려고 그러지.”
“음……. 그럼 너무 오래 걸리잖아. 데이지 생일 때도 그려 줘. 오빠 생일에도.”
외젠은 엘리아가 바라는 대로 캔버스 전체를 전부 꽃으로 채워 주었다. 주황색 물감이 모자란 탓에 노란색, 푸른색, 녹색까지 동원해 우스꽝스러운 모양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좋았다. 엘리아는 커다란 꽃나무 그림을 침실 벽에 세워 두었다.
꽃이 전부 떨어지고, 겨울이 왔어도 엘리아는 괜찮아 보였다.
<약해진 몸에 정신적인 충격도 크지 않았습니까. 몇 개월 동안 누워만 계셨던 건, 실은 몸이 서서히 회복하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무슨 이유로 아이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외젠은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로앙의 처지는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다.
외젠은 여전히 친인척들과 치졸한 여론전을 벌이고, 로앙가와 인연을 끊은 상단을 찾아가 다시 거래를 해 달라 부탁해야만 했다.
“외젠! 이거 봐, 내가 그렸어!”
그러나 피로가 쌓인 몸을 이끌고 저택에 돌아오면, 엘리아의 밝은 목소리가 그를 맞이해 주었다.
아홉 살이 된 아이는 어찌나 천진하던지. 또 웃는 모습은 얼마나 예쁘던지.
아프지 않은 모습이, 얼마나 그에게 힘이 되어 주던지. 외젠은 엘리아를 위해 무엇이든 해 주려고 노력했다.
제 옷 지어 입을 돈을 아껴 좋아하는 과일을 사다 주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책상을 바꾸는 대신 엘리아에게 새 옷을 해 입혔다.
애정에 보답하듯, 엘리아는 늘 외젠의 앞에선 밝은 모습만 보여 주었다.
“어때? 잘했지. 데이지가 그린 거랑 똑같이 그렸지?”
“잘 그렸네. 근데 왜 우리 집 앞에 돼지를 그려 놨어?”
“돼지가 어디 있어?”
“여기, 이거 돼지 그린 거 아냐?”
“아니야! 돼지 아니란 말이야. 이게 왜 돼지야?”
“그럼 뭔데. 혹시 엘리 너 그린 거야? 그러고 보니 똑같이 생겼네.”
“씨이, 아니야. 이거는 외젠이야. 외젠 그린 거였어! 이따 집사한테 보여 줄 때도 외젠이라고 말할 거야!”
로앙가에는 더는 엘리아 또래의 아이가 남아 있지 않았다. 몰락한 로앙가를 상대해 주는 변변한 귀족 가문도 없었다.
아이들을 우르르 몰고 다니며 놀던 엘리아는, 이젠 로앙가에 남아 준 사용인들을 제 친구 삼아 시간을 보냈다.
화실에 틀어박혀 종일 그림을 그리거나, 데이지를 흉내 내 책 읽는 데 하루를 몽땅 쓰기도 했다. 그래도 행복하기만 하다며, 늘 사람들에게 웃어 주었다.
가끔, 아픈 시절로 돌아갈 때도 있었다.
새카만 구름이 몰려와 비가 쏟아지는 날,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날, 복도에 걸린 부모님의 흔적을 바라보며 그리워하게 되는 날.
그런 날에는 으레 귓가에 빗소리가 들렸다. 죄책감이 만든 환청을 내리 듣다 열병으로 며칠을 앓아누웠다.
“나도 왜 아픈 건지 모르겠어.”
엘리아는 앓고 난 뒤엔 꼭 변명하듯 이야기했다.
열병을 앓기 전에는 꼭 어릴 적 들었던 빗소리를 떠올렸다. 그러니 제가 아픈 건 그 빗소리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빗소리는 왜 자꾸만 생각나는지, 그것만큼은 엘리아도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왜 자꾸 아픈 건지 모르겠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왜 자꾸 아픈 거야.’
열병이 주는 통증은 시간이 지나며 익숙해져 갔다. 그러나 외젠과 데이지의 아픈 표정을 감당하는 건 늘 어렵기만 했다.
<엘리, 제발 아프지 마. 그때처럼 아프면, 나는…….>
제가 조금이라도 아픈 기미를 보이면 외젠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제발 아프지 말라고 빌었다.
데이지는, 입을 꾹 다문 채 잠 한숨 안 자고 엘리아의 곁을 지켰다.
그래서 엘리아는 제가 아플 때마다 괴로워하는 두 사람을 위해 괜찮아지고자 노력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외젠의 집무실에 갔다가 부모의 흔적을 마주하게 되면 엘리아는 옷장 속으로 숨어 버렸다.
그럼 빗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프지도 않을 것 같아서.
<엘리, 이제 아무것도 없어. 데이지랑 내가 다 치웠어. 그러니까 제발 나와 줘.>
외젠은 엘리아의 상태를 눈치채자마자 집 안에 있는 부모의 흔적을 모두 치워 버렸다.
힘이 들 때면 늘 찾던 부모님의 초상화도, 함께 완성한 아름다운 풍경화도. 전부 미련 없이 창고에 밀어 넣었다.
엘리아는 죄책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아니잖아. 죽으면 다 끝나는 건데, 남은 사람만 힘들지 죽은 사람은 아프지도 않을 거고……. 아무렇지도 않을 텐데.’
아홉 살의 엘리아가, 열 살의 엘리아가 스스로를 설득했다.
‘죽으면 다 끝인 거야.’
봄이 되어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비록 죽은 부모를 돌려 달라는,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다는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열한 살의 봄. 엘리아는 부모님의 세 번째 기일을 열병 없이 보낼 수 있었다.
‘그렇구나. 시간이 지나면 점점 괜찮아지는구나. 아마 죽음이 다 가져가 버려서…… 그래서 괜찮아지는 걸지도 몰라.’
부모의 죽음이 가져다준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엘리아는 억지로나마 죽음에 익숙해져 보려 했다.
아프고 괴로운 게 아닌, 그저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끝이라고 여기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엘리아는 죽음을 가장 높은 곳에 두고 올려다보았다.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죽음이 있으니, 고통도 그리움도…… 사랑마저도.
‘전부 죽으면 끝나는 거야. 죽음이라는 건, 아픔도 절망도 아닌 단지 끝일 뿐이니까.’
그 어떤 감정도 죽음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엘리, 네가 보고 싶었어. 너무나도.>
새파란 괴물 같던 약혼자가 열여덟이 된 엘리아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깨달았어. 내가 너를, 에디 너를 정말 좋아한다는 걸.>
그를 사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바람 한 점 없는 날 하늘에 뜬 구름처럼, 반나절을 꼬박 들어야 겨우 넘어가는 해처럼.
로앙가는 천천히 좋아졌다. 느리게 성장했지만, 결코 나빠지지는 않았다.
긴 소송 끝에 외젠은 계승권을 인정받았고, 열아홉 성년이 되자마자 로앙 백작이 되었다.
그의 부모가 사망했을 당시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성취였으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드문트 공자님.>
에드문트 라스페가 크라우제 후작을 위협하는 권력자가 된 현시점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결말이었다.
“엘리 너도 학술원에 가면 알게 될 거야. 에드문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말이야.”
에드문트는 그의 나이 겨우 열여섯에, 라스페 공작가를 크라우제 후작과 대적할 유일한 세력으로 키워 냈다.
“이미 중립파 귀족들 상당수가 라스페 공자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했어. 크라우제 후작가에서 독식하고 있던 재판장들까지 라스페 공작가 편으로 돌아섰고. 에드문트가 아니었으면 우린 소송에서 이길 수 없었을 거야.”
그의 압도적인 지략과 행동력에 외젠은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에드문트가 아니었으면, 로앙은 작위를 지키기는커녕 살아남지도 못했을 거라는 말과 함께.
그러나 자기주장 확고한 열두 살 소녀로 거듭난 엘리아는, 외젠의 ‘에드문트’ 찬양에 핏대 세우며 반발했다.
“왜 그렇게 말해? 외젠도 노력했잖아! 데이지랑 루카스도. 다들 고생했는데 왜 에드문트 때문에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 취급받아야 해?”
무엇보다 엘리아는 외젠이 일부러 제 앞에서 에드문트를 찬양한다는 걸 눈치챈 탓에 더욱 화가 났다.
<엘리, 공작가에 혼담을 넣었어. 에드문트도 승낙했고.>
몇 주 전, 엘리아와 에드문트의 약혼이 성사되었다. 성년이 지나면 엘리아는 에드문트와 결혼해 라스페 공작 부인이 되어야 했다.
‘공작 부인이라니. 나는 내가 로앙 백작이 될 줄 알았는데.’
마차 사고가 없었다면, 엘리아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후계자 교육을 받고 있었을 테고 외젠은 원하던 예술가의 길을 걸었을 텐데.
에드문트가 엘리아의 ‘유일한 선택지’가 되지도 않았을 테고 말이다.
입을 비죽거리는 엘리아를 보며 외젠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원래도 보통내기가 아니긴 했지만, 열두 살에 접어들고부터 엘리아의 부모 노릇이 더욱 버거워졌다.
“엘리, 라스페 공자가 그렇게 싫어?”
“싫어. 사람 같지도 않게 굴잖아. 지난주에 같이 저녁 먹었을 때도 우리한테 한마디 대꾸도 안 하고 죄다 무시했잖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원래 말수가 없어서 그래.”
“그래도 싫어.”
열두 살. 학술원 입학을 앞둔 엘리아는 장례식에서 보았던 에드문트와 같은 나이가 되었다.
하나 죽음 앞에서 에드문트가 비현실적인 초연함을 보였던 반면, 엘리아는 여전히 비가 올 때마다 짧은 몸살을 앓는 처지였다.
만약 엘리아의 처지가 달랐다면 그에게 호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에드문트는 적어도 외양만큼은 무척 아름다웠으니까.
하나 엘리아가 열등감을 느끼는 이상, 남자는 엘리아에게 있어 자신의 나약함과 무능력함을 일깨우는 존재일 뿐이었다.
‘사람들이 에드문트 찬양하는 것도 듣기 싫어. 나 같은 애한테 에드문트는 과분하다는 말처럼 들린단 말이야.’
그러니 약혼을 했다고 갑자기 없던 호감이 생길 리 없었다. 약혼 후 첫 식사 자리에서조차 엘리아를 무시한 소년을, 좋아하게 될 리도 없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열두 살 엘리아는 그저 에드문트가 두렵지 않은 척하고, 동시에 질투할 뿐이었다.
“어차피 에드문트가 착해서 우리 도와준 게 아니라 자기들도 한몫 챙길 생각으로 한 거잖아. 그러니까 에드문트한테 빚진 것처럼 굴 필요도 없는 거 아냐.”
“엘리.”
외젠이 표정을 굳히며 엘리아를 불렀다. 잔소리하겠다는 예고였다.
“에드문트가 우리를 구했어. 과거에도,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더러 걔한테 무조건 착하게만 굴라는 거야? 에드문트가 그래? 로앙이 빚졌으니까, 우리가 납죽 엎드려서 개처럼 빌어야 한대?”
“엘리, 그런 말이……. 엘리!”
엘리아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와 제 침실로 가서 문을 걸어 잠갔다.
‘짜증 나. 그놈의 에드문트 라스페.’
그가 조금이라도 약혼자인 자신을 다르게 대했더라면, 백작이 된 외젠에게 최소한의 성의를 보였다면 엘리아도 이 불합리한 약혼에 순응할 수 있었다.
귀족가에 태어난 이상 로앙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전부 할 각오를 했으니까.
한데 에드문트는 에드문트였다. 정말 한 톨도 변함이 없었다.
<에디, 아니 에드문트. 이 팔찌 선물해 줘서 고마워. 로앙에서도 선물을 준비할 생각이었는데, 정식 공표 때 교환할 줄 알고 미처 준비하지 못했대.>
1주일 전, 엘리아는 공작가에서 약혼 증서와 함께 보내 준 선물을 착용하고 공작가에 찾아갔다.
결혼은 아직 먼일이니 그를 특별하게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기대했었다.
<…….>
그러나,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말한 ‘선물’을 가볍게 훑더니 공작가의 집사를 바라보았다.
<……저희 측에서 아가씨께 선물로 보낸 게 맞습니다.>
입 한번 여는 것도 아깝다는 듯 눈짓으로만 설명을 요구한 에드문트는 집사의 해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게 끝이었다.
직접 준비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 잘 어울린다는 상식적인 대답은 없었다.
‘사용인들한테 선물을 고르게 하고, 그걸 그대로 전달하는 거. 그럴 수 있어. 그럴 수는 있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엘리아는 선물 받은 팔찌와 어울릴 만한 옷을 찾겠다고 데이지와 하루를 꼬박 들여 옷 방을 뒤졌는데.
그걸 또 제 사용인들이 며칠 밤을 새워 수선해야 했는데.
……에드문트에게 전할, 고맙다는 인사말까지 고심해서 준비했는데.
‘너무 무례하잖아. 나를 얼마든지 무시해도 되는 인간 취급한 거잖아.’
에드문트는 변함없는 오만함으로 열두 살 엘리아에게 더없는 수치를 안겨 주었다.
만약 엘리아가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눈 한번 마주치는 것조차 식은땀을 흘려야 할 지경이 아니었으면 면전에 대고 욕이라도 퍼부은 뒤 저택을 뛰쳐나왔을 텐데.
<엘리, 왜 그래. 입맛이 없어? 혹시 어디 아파?>
<아니. 이거 다 맛없어서, 그래서 먹기 싫어.>
엘리아가 할 수 있는 건 저녁 식사로 나온 생선찜을 한 입도 대지 않는, 그런 유치하기 짝이 없는 복수뿐이었다.
당연히 에드문트는 저녁 식사를 손도 대지 않는 엘리아에게 관심 하나 없었다. 그 태도를 통해 제가 무의미한 존재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해야 했다.
‘나는 에드문트한테 외젠처럼은 못 해, 하고 싶지도 않고!’
그때의 수모를 간신히 참고 로앙가에 돌아온 게 겨우 1주일 전 일이었는데, 외젠마저 그에게 순응해야 한다고 말하니 엘리아는 악에 받쳤다.
다음 날, 엘리아는 외젠이 황궁에 간 틈에 그의 집무실에 몰래 숨어들어 갔다.
‘약혼 증서를 분명 여기 어딘가에 숨겨 놨을 텐데…….’
학술원에 에드문트와의 약혼 증서를 가져다 놓고, 만약 그가 또 자신이나 외젠에게 무례하게 굴거든 에드문트의 눈앞에서 찢어 복수할 계획이었다.
“씨이, 대체 어디 숨긴…… 아, 아후. 깜짝이야.”
급하게 책장을 뒤지던 중 꼬깃꼬깃 접은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잠깐 놀랐던 엘리아는 내용을 확인해 제자리에 돌려 둘 생각으로 떨어진 종이를 펼쳤다.
‘……이게 뭐야?’
그건, 엘리아의 부모님이 적은 문서 일부였으며…….
‘1황자 시해…… 2황자, 크라우제 후작 개입 정황? 이게 다 뭐지?’
어린 엘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던, 모든 비극의 시작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