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비밀
사용인들이 함께 울고 불며 불안감과 죄책감을 털어 내는 모습을 지켜본 뒤, 엘리아는 준비해 둔 식사 꼭 하라는 당부까지 하고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제대로 된 교육은 나중에 데이지랑 집사를 통해서 다시 해야 할 테고. 나는 아무 피해 없이 돌아왔다는 거 보여 주고, 그럼 된 거지 뭐.’
사용인들 모아 두고 벌인 ‘귀족 노릇’은, 아무리 곱씹어 봐도 제가 보기엔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제가 하는 말이면 다 옳은 줄 알고 깜빡 죽는 사용인들만 모아 놓았으니 저지를 수 있었다.
만약 외젠이나 데이지가 함께 있으려 했다면 낯부끄러워서 시도도 못 해 보고 포기하고 말았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저지르고 나니 속이 후련하네. 라스페가에 있었을 때부터 나까지 나설 일인지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할지 계속 고민했는데.’
공작가에서 내내 돌아와서 할 일을 떠올렸으니, 엘리아는 그때 적은 일과표를 들고 하나씩 지워 나가는 기분이었다.
죽은 이들과 마주하고, 사용인들을 다독여 가며 외젠의 일을 덜어 주었으니 이제 엘리아가 다짐했던 마지막 일이 남아 있었다.
‘더 늦추지 않기로 했잖아. 외젠이랑 데이지한테 털어놓아야 에드문트한테도……. 말할 수 있을 테니까.’
타고난 지위와 능력, 성격까지. 엘리아는 어느 하나 에드문트와 같은 선상에 설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엘리아는 에드문트와 자신이 연인으로서만큼은 평등하기를 바랐다.
그에게 정직함을 요구하기 전에 제가 정직해지고자 했고, 그에 대해 알고 싶었기에 엘리아도 자신의 비밀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다.
‘잘될 거야. 잘되게 노력해야지.’
엘리아는 4층에 올라와 직접 그린 그림으로 꽉 채운 복도를 응시했다.
붓질 하나하나가 어설펐던 시절의 그림이 맨 끝에 걸려 있었다. 엘리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도통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며 그림을 가르쳐 주는 외젠에게 투정 부렸던 시절을 떠올렸다.
<나중에, 한 달이나 두 달 더 기다렸다가 그때 비교해 봐. 얼마나 변했을지.>
<변하기는 하는 거야?>
<그렇대도.>
외젠의 말대로, 시간순으로 배열해 둔 그림에는 성장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엘리아의 서툰 사랑도 하루가 지날 때마다 조금씩 성장해, 한 달이 지나고 1년이 지나면 언제 미숙했냐는 듯 완연히 꽃 피어 있으리라는 믿음을 주었다.
“리지, 서재에 잠깐 들어가려고 하는데 불 좀 가져다줄래?”
“네, 아가씨.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작은 초를 넣은 등불은 문 앞에 내려 두고, 엘리아가 자신의 서재 안쪽 깊숙이 들어섰다. 불빛이 작아 책장 앞은 빛이 들지도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엘리아는 팔을 뻗어 익숙한 서재 책장을 뒤적였다.
‘여기…… 이쪽에 분명 다 밀어 넣어 뒀었는데. 아. 여기서부터였구나.’
누구도 관심 없어 손대지 않은 경제학 논문 다발을 전부 책장에서 끄집어내니, 숨겨 두었던 서류 봉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섯 개의 서류 봉투에는 각각 엘리아가 그간 모아 둔 서적과 정리한 글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하나, 둘……. 다섯 개. 다 가져갈 필요가 있으려나.’
잠시 고민했지만, 오늘을 마지막으로 아마 다시 이곳에 숨겨 둘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엘리아는 혼자 들기 버거운 다섯 개의 봉투를 끙끙거리며 전부 꺼내 들었다.
‘계속 쌓아 두기만 했지, 누구 보여 주기는 처음이네.’
차곡차곡 높게 쌓은 서류 봉투 위에 긴장, 그리고 약간의 기대감을 얹어 서재를 빠져나왔다. 스스로에게서 망설일 시간을 빼앗기 위해 지체 없이 3층으로 향했다.
오늘 하루만 해도 몇 번이나 계단을 오르내리는 통에 다리가 아팠다. 그뿐만 아니라 품에 가득 안고 내려온 봉투가 시야를 가려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외젠의 집무실 앞에 선 엘리아는 겨우 몇 걸음 만에 진이 다 빠지고 말아, 그저 전부 탁자에 내려 두고 앉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여기, 누구 없어? 나 문 좀 열어 줘.”
손발에 시야까지 자유롭지 않은 탓에 엘리아는 무작정 사람을 불러 문을 열어 달라 재촉했다.
다행히 근처에 있던 베르트 경이 냅다 쫓아와 엘리아를 살폈다.
“제가 열어 드리겠습니다. 들고 계신 것 먼저 주십시오. 안에 옮겨 드리겠습니다.”
“아니야. 이건 내가 들 테니까 문부터 열어 줘. 외젠은 일어났지?”
“예, 조금 전에 나가셨다가 다시 들어오셨습니다. 잠시만, 바로 열겠습니다.”
베르트 경은 엘리아가 하도 위태해 보인 탓에, 그만 문을 열기 전 집무실에 있는 외젠에게 엘리아가 도착했음을 고하는 걸 잊고 말았다.
팔이 아파 마음 급했던 엘리아 역시 당장 문이 열리는 기색에 제 몸 밀어 넣기에만 바빴고 말이다.
그리하여 엘리아는 하필 자신이 끼기엔 퍽 어색한 순간에 외젠의 집무실에 쳐들어오고 말았다.
“외젠!”
그의 집무실이야 눈 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으니, 엘리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도 용케 탁자를 찾아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일어났다며? 데이지는……?”
그리고 잠시 숙였던 몸을 일으킨 순간…….
“…….”
엘리아의 눈앞에는 묘한 기류에 둘러싸인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서 있었다.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어…… 혹시 둘이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나 이따 다시 올까?”
너무 놀란 나머지 바짝 굳어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겨우 정신이 들었다. 엘리아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웃음소리 덕분이었다.
‘……뭐지?’
다행히 상황이 어색한 건 엘리아 하나뿐인지, 두 사람은 밝게 웃으며 엘리아에게 자리를 권했다.
“아니야. 앉아.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하게 들어와?”
“아, 으응. 여기 앉아도 되지? 둘은 그쪽에 앉아.”
엘리아가 서류 봉투 뭉치를 쏟아 낸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다.
“잠깐만. 데이지 너 손목……. 조심해야지.”
외젠은 심지어 데이지의 손목이 꺾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바꿔 쥐더니, 무릎 위에 편히 두도록 배려해 주었다.
데이지 앞에서 얼굴 붉히는 건 여전했지만 평소보다 훨씬 대하는 태도가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 광경을 보며 엘리아가 떠올린 건, 아주 오래전의 어느 날이었다.
<외젠, 외젠은 데이지랑 결혼할 거야?>
서로 좋아하면 결혼하는 거라고, 그런 말을 어디서 주워들은 엘리아가 외젠의 무릎 위에서 종알거렸던 적이 있었다.
열두 살 생일을 갓 지난 외젠은 제 누이의 천진한 질문에 얼굴을 짙게 붉혀야만 했다.
<왜 대답 안 해. 결혼하기 싫어?>
<아니……. 그게, 만약에 데이지가 기사가 되거나 하면……. 아니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로앙 백작이 되면. 그럼 결혼할 수 있어.>
<왜? 그냥은 못 해?>
<백작이 되면 아무하고 결혼 못 하는 거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근데 외젠은 데이지 좋아하잖아. 데이지는 외젠 좋아할 텐데.>
<그건…… 그건 나는 잘 모르겠는데…….>
매일 저 구박하던 오빠가 얼굴을 붉히며 말까지 웅얼거리는 모습에, 엘리아는 외젠의 마음도 모르고 깔깔 웃어 버렸다.
<데이지 좋은데 백작 하면 결혼 못 하는 거야? 그럼 외젠이 백작 하지 마. 아빠가 계속 백작 하면 되지. 아빠는 벌써 엄마랑 결혼했으니까 괜찮잖아.>
<바보야. 그럼 나중에는 누가 하라고. 아빠가 그만하고 싶어지면.>
<그럼 내가 대신해 줄까? 아니면 그거 남한테 주자.>
실없이 말했던 우리의 미래. 한때는 가능성을 재어 보며 행복에 젖어 있을 수 있던 시절.
그러나 예고 없이 닥쳐온 비극으로 인해, 결코 현실이 될 수 없었던 소망들.
<엄마랑 아빠는, 에디네 부모님은 왜 죽은 거야? 왜 우리만 놔두고 죽어 버렸어?>
<마차가…… 마차 때문에. 사고가 났어. 그래서 돌아가신 거야.>
<마차가 엄마랑 아빠 죽였어?>
<…….>
<오빠 가지 마, 오빠도 마차 타지 마. 오빠도 마차가 죽이면 어떻게 해. 나 혼자 두고 가지 마. 가지 마…….>
<안 갈게. 아무 데도. 누구한테도 너 안 보내고, 데이지도. 우리 같이 있을 수 있게 내가 노력할게.>
간절하던 바람은 전부 뽑아내고, 대신 그 빈 자리에 견고한 벽을 쌓아 올렸다. 외젠은 엘리아와 데이지를 위해. 데이지는 부모를 잃은 두 남매를 위해.
<데이지, 엘리아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아무 일도 아니에요, 아가씨. 도련님, 아니 외젠 님 금방 선물 사서 오실 거예요.>
그리고 엘리아 역시, 제 남은 가족인 두 사람을 위해.
<이제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나도……. 모르겠어. 왜 그랬는지. 그냥 계속 울고 싶었어.>
서로를 지키기 위해 쌓아 올렸으나 결국 외면하기 위해 등 돌린 거나 다름없어졌으니, 지금이라도 돌이키고자 했다.
엘리아는 우선 가장 맨 위에 올려 두었던 서류 한 뭉치를 꺼내 두 사람에 건네주었다.
“일단 이건 아까 두 사람 잘 때 만든 새 고용 계약서랑 인적 사항 기록표야.”
“인적 사항 기록표?”
“공작가의 서류랑 비교해 보니까 우리 쪽은 사용인들 신상에 관한 자료가 너무 적어. 길게 일하면 평생을 같이 지내는 사람들인데. 게다가 심문할 일이 생기면 사람들끼리 교차 대조하는 것보단 미리 서류를 받아서 검증해 두면 절차를 간소화할 수도 있고.”
엘리아는 서류를 한 장씩 넘겨주며 간단히 설명을 덧붙였다. 양이 많아 보였지만 어차피 내용이 특별할 건 없었으니 설명은 금방 끝났다.
“어때? 물론 집사랑도 상의해 보고 수정해야 하긴 하겠지만.”
“음……. 서류 작성하는 게 꽤 시간이 걸리겠는데, 그래도 한번 해 두면 도움이 될 것 같아.”
“날 잡아서 며칠 몰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되고. 고생 많았네, 엘리.”
“응.”
첫 번째 서류가 끝났음을 의식한 엘리아가 유달리 짧은 대꾸를 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왜 그래?”
“아가씨, 뭐 걱정되는 일 있으세요?”
잠깐 어색하게 입 다문 거로, 두 사람은 금세 엘리아를 염려해 댔다.
‘둘이 아직도 손잡고 있네.’
서류 보는 데 불편했을 텐데, 한번 쥔 손이 아쉬웠는지 두 사람의 손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엘리아는 단단히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을 보고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했다.
“나 두 사람한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야.”
“뭔데?”
“그 전에……. 먼저 보여 줄 게 있어.”
엘리아는 탁자 위를 정리한 뒤, 가장 낡은 봉투를 열어 속에 담긴 종이를 하나씩 끄집어냈다. 엘리아가 열두 살에 만든 자료들이었다.
두 번째 봉투를 열자 색이 바랜 종이 뭉치, 그리고 어설픈 필기체로 적은 자료가 줄지어 나왔다. 열세 살, 엘리아가 막 무지함에서 벗어난 시절의 자료들이었다.
그리고 열넷, 열다섯.
곧게 정돈된 글씨로 적은 연표, 학술원의 서고에서 베껴 적은 10년 전의 사건 기록들, 큰돈을 주고 사 모은 크라우제 후작가, 그리고 튀링겐가와 관련된 정보들.
사라진 줄도 몰랐던, 당연히 외젠이 집무실에 보관해 두었다고 생각한 부모님의 기록들. 그리운 필체로 적어 낸 1황자 시해 사건의 전말.
“그리고 이게 마지막……. 학술원 나왔을 때 조사해서 정리한 거야.”
엘리아가 마지막, 다섯 번째 봉투를 열어 자료를 일렬로 죽 꺼내었다.
열여섯의 엘리아가 학술원을 나와 북부와 남부를 혼자 방황하며 적었던 일지가 시간순으로 차곡차곡 두 사람 앞에 쌓아 올려졌다.
“……엘리. 너…… 너 설마……?”
엘리아가 꺼내 주는 서류를 하나씩 읽던 외젠의 손이 무참히 떨렸다. 데이지 역시, 탁자 위 서류 하나를 손에 쥔 채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외젠, 데이지. 미안해.”
“전부……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
경악한 두 사람을 두고, 엘리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엘리 아가씨, 뭐 하세요?>
여덟 살. 천진하던 시절.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하루 전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