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 위로 (43/79)

43. 위로

별관을 나온 엘리아는 베르트 경과 저택 본관으로 돌아왔다. 잠시 외젠의 집무실을 들렀는데, 두 사람은 엘리아가 나왔을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잠든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아마 둘 다 한 시간쯤은 더 잠들어 있지 않으려나?’

바닥에 흐른 외젠의 담요를 다시 올려 준 뒤 깨지 않도록 조용히 복도로 나왔다. 3층까지 따라온 베르트 경이 꼭 식사를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덕분에 미뤄 두었던 식사가 생각났다.

“다들 점심이고 저녁이고 다 놓쳤겠네.”

“다들 아직은 정신없어서 배고픈 줄도 모를 겁니다.”

“베르트 경도 그래?”

젊은 기사는 엘리아가 저를 보고 배고파하는 강아지를 연상한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씩씩하게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며칠 굶는 것쯤은 훈련이라 생각하고 넘길 수 있으니까요.”

“기사를 며칠 굶길 수는 없지. 잘 먹여서 일 시켜야 하는데. 침실에서 옷 갈아입을 테니까 집사랑 주방에 세라 좀 불러 줘. 어떻게 돌아가는 중인지 좀 알아봐야겠어.”

“집사와 주방장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4층에 먼저 모시고, 곧장 다녀오겠습니다.”

침실이 있는 4층은 엘리아가 내내 저택을 비운 와중에도 기사들이 착실히 경비를 서던 중이었다.

공작가에서 남겨 두고 갔다는 기사들도 있었고, 또 테오 경을 비롯한 로앙의 기사들이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와 준 덕분이었다.

반면, 4층의 하인들은 엘리아가 올라오자 내내 허둥지둥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아, 아가씨 오셨어요……. 잠시만요. 죄송해요.”

눈에는 조금 전까지 슬퍼 울던 흔적이 역력했고, 엘리아가 지시를 내릴 때마다 바짝 얼어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아. 데이지뿐만 아니라 4층에 있는 아이들 전부가 추궁을 받았겠구나.’

비단 4층뿐만 아니라, 저택을 청소하고 수발을 드는 사용인들은 다들 갈피를 못 잡은 채 방황하던 차였다.

얼마 전까지 함께 웃고 울던 동료의 죽음을, 또 의심받고 서로의 죄를 고발하도록 추궁받은 기억을 쉽게 잊기는 어려웠을 테니까.

“리지, 그러고 보니 인사도 못 했네. 잠깐 다들 모이라고 해 줄래? 각자 방에서 쉬고 있는 사람 있으면 꼭 부를 것까지는 없고.”

“아뇨…… 어제, 그…… 저희들 지내는 별관에는 돌아가면 안 된다고, 그래서 다들 4층에서 잤어요. 그래서 아직 다들 여기에 있어요.”

금방 울음을 터뜨릴 듯한 사용인을 달래 사람들을 모으게 했다. 데이지와 죽은 루아를 제외하니 딱 네 명이 남아 있었다.

“다들 많이 힘들었지?”

한 명 한 명 눈 맞춰 가며 이름 부를 새도 없이, 겨우 그 한마디에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동시에 네 명이 서러운 울음과 함께 두려웠노라 고백했다.

폐쇄한 별관에 끌려갔을 때처럼, 무작정 잘못했다며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기, 기사님들이 저희가 알았어야 한다고……. 매일 같이 있으니까……. 하마터면 아가씨가 큰일 당하실 뻔했는데, 저희는 아무것도 몰라서, 근데 기사님들 말이 다 맞아서…….”

기다리는 내내 원망 한번 않았을 리는 없었으나, 막상 눈앞에 마주하자니 원망할 틈이 없었으리라.

제가 건네는 말 한마디에 또 울음 터뜨리게 될 걸 알면서, 엘리아는 자꾸 우는 또래 사용인들을 보듬고 또 보듬었다.

“미안해해야 하는 건 나인데. 왜 너희가 미안해해. 응?”

“아가씨가 저희한테 왜 미안해하세요…….”

“음. 나 실은 새 옷 입고 가서 얼룩 묻혀 왔거든. 이거 설마 얼룩 안 빠지진 않겠지?”

젖은 눈으로, 미소 지을 수 있을 때까지. 지친 기색 없이 위로해 주었다.

* * *

“아가씨, 부르셨습니까.”

사용인들을 달래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집사와 주방장이 침실에 도착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몸도 마음도 성하지 않았을 텐데, 연륜을 무시할 수 없었으니 다른 이들에 비해서는 엘리아 앞에서 지친 내색을 하지 않으려 했다.

“1층 연회장에 사람들 전부 모아 줘.”

“연회장에 전부 모으란 말씀이십니까?”

“응. 내가 얼굴이나 보려고 부르는 거라고, 다들 괜한 걱정하지 말라고 꼭 알려 주고. 그리고 세라, 주방은 어때? 끼니 거르는 사람들 많지?”

“평소대로 순번 돌아가며 식사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지만 기사단 몇 분을 제외하고는 찾아오는 사람이 드뭅니다.”

공작가에서 한스한테 전해 들은 대로, 독살이라는 말에 사용인들까지 음식을 기피하는 모양이었다.

엘리아는 괜한 일을 벌이는가 싶어 갈등했지만, 한편으로는 제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 훌훌 털어 낸 4층 사용인들을 떠올렸다.

‘그래. 지금 안 하면 다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아침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 그랬다간 혹시 안 좋은 생각 품는 사람도 나올지 모르고.’

엘리아는 짧은 고민 끝에 제 계획을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럼 남은 음식 연회장에 다 차려 줘. 우리 식기는 전부 은으로 교체했지?”

“예, 지난주에 전부 교체했습니다. 음식은 옮겨 내기만 하면 되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도착하는 대로 식사부터 하라고 해.”

엘리아는 이어 기사들에게도 사용인들을 1층에 모아 식사하는 자리를 마련할 테니 병사들을 배치하라고 전했다.

“아가씨, 무얼 하시려고요?”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용인이 눈물 덜 마른 목소리로 호기심을 표해 왔다.

불안감이 많이 가신 상태에 엘리아가 짧게 미소 지었다.

“너희들도 먼저 내려가 있어.”

“예? 저희 먼저 가 버리면 아가씨는요……? 데이지 씨도 없는걸요.”

“옷도 갈아입었고 더 부탁할 일 없는걸. 정 일 있으면 기사들한테 잠깐 부탁해도 되고. 그러니까 어서 가 봐. 가서 나 잘 도착했다고 먼저 말 전해 줘.”

4층의 사용인들까지 먼저 내려보낸 뒤, 엘리아는 침실에 있는 작은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후우. 벌써 돌아온 지 몇 시간은 되었는데, 침실 와서 누우니까 이제야 진짜 돌아온 기분이 드네.’

소파는 에드문트의 침실 가구보다 형편없이 작았고, 또 딱딱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익숙함에 기대어 잠시나마 휴식을 취했다.

멍하니 누워 있으려니 뜬금없게도 마부석에 앉아 졸겠다던 한스의 말이 떠올랐다.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교대하듯 탔으니까, 가는 내내 서류를 들여다보아야 했겠지.’

말 많은 보좌관이야 알아서 눈치껏 쉴 테고, 엘리아의 걱정은 당연히 에드문트뿐이었다.

그가 체력적으로는 며칠 밤을 새운들 문제가 없다 해도, 감정 변화로 쌓인 피로는 휴식이 필요할 게 분명했다.

한번 쌓이기 시작하면 좀체 덜어 내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그 증거로, 에드문트는 자신을 데려다주기 위해 나왔을 때 다시 장갑을 착용한 채였다.

‘장갑은 거짓말을 상징하는 건가? 내게 숨기고 싶은데 들킬까 봐 겁이 나서?’

그를 이해하고 싶었지만 만남은 늘 짧고 단서는 너무나 한정적이었다.

에드문트의 목소리, 표정, 예민하게 반응하는 단어……. 그런 조각난 그림에 상상력을 덧대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엘리아는 하늘 높이 팔을 뻗어 제 손을 바라보았다. 피부에 밀착되어, 벗을라치면 꼭 뒤집히고 마는 예장용 장갑을 착용했을 때를 애써 떠올려 보려 했다.

‘아무리 좋은 천으로 만든들 장갑은 답답하고, 감각이 둔해지면서 사람 피곤하게 만들 텐데. 굳이 장점을 찾자면…… 단절감 정도일까?’

외부로부터 자신을, 혹은 자신에게 닿아야 할 무언가를 지켜 내는 기능적인 면을 떠올리며 엘리아는 동시에 몇 가지 단어를 유추해 냈다.

거짓말. 그로 인한 죄책감. 보호…….

‘손으로 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그걸 나한테 드러내기 싫어서 장갑을 끼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거라면. 그럼 손으로 할 만한 게 뭐가 있으려나. 서류에 서명하는 거? 아니면…….’

엘리아는 그의 맨손에 닿았던 감각을 떠올려 보려 노력했다. 이마를 쓸어 주는 손은 언제나 다정했지만, 굳은살이 박여 촉감만은 거칠었더랬다.

‘검을 쥐느라……. 그래, 검. 이번에도 분명 잡은 적이 있다고 했지.’

엘리아는 어렵지 않게 그가 검에 능숙하다던 증언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만약에 가는 길에 도적 떼라도 나타나면, 저는 당장 공작님 뒤에 숨을 겁니다. 제일 안전할 테니까요.>

<공작께서 말입니까? 예. 몇 번은 직접…….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저희가 할 적에 실수가 있어서 피가 많이 흘렀는데, 눈 한 번 깜박 않으시더군요.>

피. 그 단어로 넘어가는 동시에 소파에 누워 있던 엘리아가 벌떡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작은 문을 열자마자 분홍빛 꽃을 연상시키는 향이 감돌았다.

그건, 에드문트가 머금고 돌아왔던 로앙가의 흔적이기도 했다.

‘검을 쥐느라 피가 옷이며 장갑에도 묻었을 테고. 악취도 만만찮았겠지? 별관에 잠깐 있다 나온 나조차 약초 향이 밴 것 같아서 불쾌했으니까.’

만약 엘리아가 당장 에드문트를 만나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혹시 제 몸에 악취가 배어 있지는 않을까 신경이 쓰였으리라.

특히나 그 상대가, 죽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엘리아 같은 사람이라면 말이다.

<반나절 동안 심문을 했으니까. 그런 날은, 몸에 밴 것들이 잘 지워지질 않아.>

몸에 밴 죽음이 지워지지 않아서. 네게 묻어 있을까 봐?

마음이 아팠다. 그런 거, 저는 신경도 안 쓸 텐데. 4층의 사용인들이 엘리아가 어딜 다녀왔건 상관 않고 팔에 엉겨 눈물 쏟았던 것처럼 말이다.

<두려웠어.>

에드문트. 너는 혹시 죽음이 두려운 걸까.

아니면, 그 죽음이 내게 묻어올까 봐. 그게 두려운 거였을까.

‘죽음이 묻어서……. 내가 죽을까 봐? 그런 게 두려운 건가? 아닌데. 그보다는 좀 더…….’

<엘리. 엘리아, 약속할게. 네가 다치지 않게, 위험하지 않게 내내 너를 지켜 줄게.>

‘……한 번 경험해 본 상처 대하듯, 마치 이미 한 번 실패했던 사람처럼 두려워했는데.’

조금만. 조금만 더 생각하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리아가 견고하게 쌓아 올린 벽을 더듬어, 기어코 온전한 모습을 깨치기 직전이었다.

“아가씨, 1층에 전부 모였습니다.”

기사의 명랑한 소리에 얇은 긴장이 깨어지고, 정답에 가까울 것만 같았던 엘리아의 상념도 금방 허물어지고 말았다.

“응, 금방 나갈게.”

답을 몰라 헤매던 이가, 스스로 정답에 가까웠음을 알아채는 건 불가능했다.

다시 정답 가까이 돌아올 수 있을까?

그조차 알 수 없었으니 엘리아는 침실을 쭉 가로질러, 협탁 앞에 멈추어 설 뿐이었다.

‘오르골 태엽을 감으면 음악이 울리듯, 네 마음도 이렇게나 간단하게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뒷짐 진 소년을 손에 담아 태엽을 감았다. 엘리아가 손도 다 떼지 않았는데 성급하게도 연주를 시작했다.

오르골을 내려놓은 엘리아가 침실을 떠나기도 전에 멈추어 버렸다.

오르골 안 톱니바퀴가 어그러지며 만들어 낸 작은 소음 따위는, 등 돌려 떠나기 바쁜 여자에겐 들리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오르골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곯은 속이 겉으로 드러나고서야, 망가져 추한 꼴이 드러나고서야 알 수 있으리라.

사실 아주 예전부터 망가져 있었음을…….

* * *

외젠이 부족한 잠을 채워 일어나니 엘리아가 돌아온 지 한참이 지나 있었다.

‘둘, 셋…… 다섯. 다섯 시간을 내리 잔 거야?’

엘리아를 마중 나가 함께 집무실로 돌아온 게 저녁놀 어스름할 적이었으니 밖은 이미 한밤중이었다.

‘어쩐지 일어나자마자 몸이 가뿐하다 싶더니 평소보다도 길게 잤네.’

소파에 웅크리고 있던 몸을 움직여 가며 집무실 안을 살피니, 방 안에는 데이지뿐이었다. 제 맞은편 소파에 누워 잠든 모습을 보아 아직 한참 더 자야 일어날 성싶었다.

중간에 놓인 탁자에는 서류 더미가 어수선하게 쌓여 있었다.

‘저건 분명 엘리아가 손댄 흔적인데……. 그보다 얘는 우리더러 잠깐 자라고 눕히고선 깨우지도 않고 혼자 침실에 올라가 버렸나?’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우선 탁자 위부터 가지런히 정리했다. 원래는 저녁 시간을 빌려 사용인들과 이야기라도 나눌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너무 늦고 말았다.

‘답답하겠지만 괜히 다시 들쑤시는 것보다야 각자 쉬도록 내버려 두는 게 낫겠지. 일단 엘리아가 괜찮은지 좀 보고 와야겠다.’

아까 왔을 적에는 괜찮다 했지만, 밤이 되어 또 열이 올라 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외젠은 서류를 대강 정리한 후 집무실을 나섰다.

“주인님.”

곧장 4층 계단을 향하려는데,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급히 외젠을 불러 세웠다.

“혹시 엘리아 아가씨 찾으시는 거라면 4층에 안 계십니다.”

“4층에 없다고? 자러 간 거 아니었어?”

“아니요. 지금 1층에 계십니다.”

“거긴 왜……. 아. 아까 저녁이 어쩌고 했던 것 같긴 한데.”

“식사하러 가신 건 아니고, 실은 아가씨께서 1층 대연회장에 사용인들을 전부 불러 모으셨습니다.”

“엘리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고?”

집무실을 줄곧 지키고 있었던 기사로서는 아가씨의 속내를 알 길 없었으니, 외젠이 직접 쫓아가 상황을 살피는 게 최선이었다.

‘대체 무슨, 얘는 혼자서 뭘 하려고 든 거야?’

계단을 하나씩 내려갈수록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것도 울음이 군데군데 섞인 소음이 점점 크게 들려왔다.

혹여 사용인들이 떼 지어 몰려 엘리아에게 울분을 토하고 있는 건가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잠이 덜 깨 휘청거리는 다리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지만, 한 번에 두세 칸씩 뛰어 내려가 봐도 거리는 마음만큼 좁혀지지 않았다.

울음소리만 곱절로 커져 그를 더욱 불안케 했다.

겨우 계단을 내려왔으나 1층 복도 끄트머리에 있는 대연회장까지는 아직도 한참이었다. 곧게 뻗은 복도를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피부가 한 겹씩 벗겨져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정작 닿고 싶어 안달했던 대연회장 앞에 도착했을 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제, 아니 이제 이틀 전이 된 과거에 그랬듯이.

<백작님, 당장 수도 저택으로 귀환하셔야 합니다. 공작가에서 독이 발견되었는데, 출처가 로앙가라고…….>

무슨 일이 생길라치면 심히 놀라고, 남들보다 정신 차리는 데에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성격은 스물을 훌쩍 넘긴 지금도 고쳐지지 않았다.

사실 고치는 게 가능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외젠이 나 닮아 그렇지. 너무 신경 쓰지 말렴. 남들보다 자주 놀라면 그냥 놀라면 되는 거고, 시간이 필요하면 남들보다 더 시간 들이면 되는 거잖니. 누가 더 잘났고, 못났고 하는 게 아니고 각자 맞는 방식으로 살면 그만인 일이야.>

그의 아버지는 늘 남과 비교하지 않아도 된다며 어린 그를 달랬지만, 외젠은 여전히 제 유약한 꼴에 속이 쓰렸다.

엘리아의 소지품에 독이 묻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선 출발이 지체될 만큼 몸이 굳어 버렸지 않았던가.

지난밤, 공포에 질려 자신을 도련님이라 불러 대는 사용인들 앞에서 방해꾼으로 전락하여 쫓겨나지 않았던가.

‘이 멍청한 꼴을 고치는 약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스스로를 원망하며 잠시 대연회장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으니 테오 경이 쫓아와 외젠을 맞이했다.

“주인님.”

“테오 경. 엘리가, 여기에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고 하던데.”

“예, 아가씨께서 사용인들이 불안해하는 것 같다고 모으셨습니다. 방금 들어가셨고요.”

“근데 엘리아는…….”

외젠이 질문을 덧대려는데 문 안쪽에서 엘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작님?”

“아, 아니. 나는 여기 있으면 돼. 그냥 엘리가 뭘 하려는지 잠깐 보기만 할 테니까…….”

어쩐지 냉큼 들어가기는 망설여져서, 대신 문 가까이 다가가 안을 살폈다.

안에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음식 앞에 사용인들이 앉아 있었고, 엘리아는 연회장 끄트머리에 있는 단상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말을 했으면 결과가 달라졌을 거야.”

사용인들을 대할 때면 으레 풀어지던 다정한 목소리는 어디로 가 버린 건지.

피로에 젖은 목소리는 외젠에게조차 낯설게 들렸다.

“그래. 두 사람이 원해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 하지만 입 다물고 있지 않았더라면, 누구한테라도 말했으면 결과는 달라졌을 거야. 나에게든, 외젠에게든.”

“그, 그렇지만 만약에 이야기하면 죽인다고 협박하면요? 메리랑 루아도 협박당했다고…….”

“왜 협박하겠어. 들키면 자신들의 계획이 모두 끝나 버리니까 입막음하려는 거잖아. 애초에, 사람 죽이겠다고 협박해 대는 인간들이 약속을 지킬 거라고 생각해?”

인질을 살려 두지 않는다느니, 설령 독살이 성공해도 뒤처리를 위해 모두 죽일 거라느니…….

엘리아는 그런 구체적인 이야기로 사람들을 겁주고 싶진 않았다.

다만 설득하고 싶었다. 지켜 줄 수 있다고.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겠지만, 로앙은. 너희들이 우리 가문의 사람이 된 이상 절대로 놓지 않을 거야. 어떻게든 너희를 지켜 낼 거야. 이건 귀족과 귀족의 싸움이고, 서로의 것을 뺏는 전쟁이고, 로앙은 그 사이에서 가진 것들을 전부 지켜 보일 거니까.”

그들이 만일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포기한 채 침묵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어떠한 일이 생겨도 침묵이 아닌 고백이, 믿음이 그들을 지켜 주리란 걸 잊지 않기를 바랐다.

“너희 스스로를 포기하지 마. 너희를 협박하고 누군가를 살해하려는 인간들, 그런 것들 말고 우리를 믿어. 너희가 나를 믿어 주고, 너희 주인을 믿어 줘야지. 그래야 로앙가도 너희를 믿고 지켜 줄 수가 있잖아.”

엘리아의 말을 듣던 사용인들 몇 명이 울음을 터뜨렸다.

답답함을 토로하느라 힘이 들어가 있던 엘리아가 그들의 눈물 위에 한숨을 섞었다.

이어 터져 나온 말은, 애원이었다.

“제발……. 제발 혼자 앓지 마.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도 못하게 꼭꼭 숨겨 놓고, 홀로 고통을 떠안고 있지 마. 너희들 멋대로 아파하다가 죽으려 들지 마. 그걸 보며 나를, 다른 사람들까지 아파하게 만들지 마.”

“…….”

“너희는 제발, 제발 그러지 마.”

두려움에 떨다 자멸해 버린 두 사용인을 향한 때늦은 한탄이었고, 남은 이들이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길 바라는 부탁이었다.

<도망가지 마. 에디. 무서워하지 마.>

두려움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연인에게 몇 번이고 다시 해 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외젠은, 엘리아가 자신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침묵하고, 방치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죽은 이들과 외젠은 다를 바가 없었다.

같은 죄를 저지른 셈이었다.

“아가씨, 너무 무서웠어요. 저희 안 그럴게요. 저희는 진짜 안 그럴게요.”

“메리가 아무한테도 말 못 한 거, 저 때문인 것 같아요. 매일 힘들다고 제대로 이야기 들어 주지도 못해서…….”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 잘못했어요. 저희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어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설움을 지켜보던 외젠이 등을 돌렸다. 그때 옆을 지키고 있던 테오 경이 그에게 짧은 대화를 청해 왔다.

“외젠 님. 아까 아가씨께 말입니다, 전부 말씀드렸습니다.”

“……말을 해 주다니, 무얼?”

“루아와 메리의 일 말입니다. 아가씨께서 꼭 아셔야겠다고 하셔서요. 그리고, 별관에도 오셨습니다.”

“별관이라면…… 폐쇄한 별관을, 엘리아가 다녀왔다고?”

“예,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걸, 그걸 보고 왔다고.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그래. 알겠어.”

경황이 없어 보이는 외젠의 모습에, 테오 경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괜찮으신지를 물어 왔다.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집무실에 가십니까.”

“가야지. 이곳에서는, 내가 더 할 일이 없으니까.”

엘리아가 제 몫까지 사용인들 다독여 주었으니 그가 할 일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도 못하게 꼭꼭 숨겨 놓고, 홀로 고통을 떠안고 있지 마.>

누이동생의 책망만이 그의 몫으로 남았기에, 품에 가득 끌어안고 돌아왔다.

혹여 조금이라도 흘릴까 봐 내내 곱씹었다.

‘알아줄 수도 없게 숨기지 말고, 혼자 아파하지 말라고…….’

한데 이상하지. 혼자 감당하기 버거울 것만 같던 엘리아의 원망이, 곱씹을수록 가벼워졌다.

비난이 아닌 알아주고 싶다고, 함께 아파하고 싶다는 위로처럼 들리는 건, 착각일 뿐이었을까.

* * *

외젠이 집무실에 도착하니, 막 잠에서 깬 데이지가 엘리아와 외젠의 소식을 전해 듣는 중이었다.

“외젠 님, 조금 전에 1층 내려가셨다더니 벌써 올라오셨어요? 엘리아 아가씨는 같이 안 오셨고요?”

“데이지, 잠깐만……. 다들 자리 좀 비켜 줘.”

그는 심각한 얼굴을 하곤 집무실에 함께 있던 기사들을 내보냈다. 하나, 둘만 남고 나서도 외젠은 좀체 입을 떼지 못했다.

불편할 정도로 긴 침묵이 이어진 끝에야 그가 말문을 열었다.

“데이지.”

“네, 말씀하세요.”

“엘리아에게 말해야겠어. 말하고 싶어.”

갑작스러운 선언에 데이지가 굳고 말았으니, 외젠이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건지 바로 알아차린 탓이었다.

외젠은 그 위에 쐐기를 박아 데이지를 더욱 놀라게 했다.

“부모님 일, 그리고 우리가 그 앨 위한답시고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들 전부.”

“……전부 다 말씀드리려고요?”

“당장 오늘은 안 되더라도……. 엘리아를 보면서 깨달았어. 그 애는 늘 혼자서라도 감당해 보려 애써 왔는데. 나는 이기적이었을 뿐이었다고.”

사랑해서 아프게 했다는 말이, 얼마나 상처가 될지에 대해 조금만 더 일찍 생각해 보았어야 했는데.

전부 외젠의 탓이었다.

그리고 죄를 깨닫게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가 용서를 구해야 할 엘리아였다.

“분명 원망하겠지만, 왜 저만 여태 모르게 했느냐고 화를 내겠지만. 그건 전부 내가 감수할 수 있어. 마땅히 감수해야지. 공작께서 침묵하신 것도 전부 내가 고집을 부린 탓이라고 설명해야 할 거고. 그게, 진실이니까.”

“외젠 님…….”

마주 보고 서 있던 데이지가 어느새 흘러넘친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따듯한 눈물이 손가락을 지나 엘리아가 얹어 준 연고가 남은 팔목으로 흘러내렸다.

“저랑 같이 말씀드려요. 긴 이야기가 될 테니까요.”

외젠은 목이 멘 탓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감정을 억누른 뒤에야 눈물에 젖은 입술을 움직일 수 있었다.

“데이지, 엘리아가 원망하거든 내가…… 데이지 너는.”

“매번 같이 키웠다 하시면서, 꼭 이럴 때면 혼자 차지하겠다고 하시고. 저는 그렇게는 하기 싫어요.”

원망마저 나누어 받아 주겠다는 말에 벅찬 감정이 차올랐다. 눈물을 닦아 주던 데이지의 손을 잡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이, 손을 타고 그대로 전달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전부 들킨다 해도.

이미 서로 자각한 마음이 전해질 뿐이었으니까.

“데이지, 고마워. 같이 있어 주겠다고 해서.”

“외젠 님께서 말씀하시면, 언제든지 곁에 있어 드릴 거예요.”

늘 한결같은 마음이, 변주곡처럼 새 옷을 입고 흘렀다.

<데이지, 정말 안 갈 거야? 공작가에…….>

<아마도요?>

<‘아마도’는 또 뭐야? 간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누가 저더러 ‘가지 마.’라고 말해 주면, 안 간다고 마음 굳힐지도 모르죠.>

외젠은 마음을 전했다. 꼭 잡은 손을 통해서. 그리고 그때는 다 말하지 못한 말을 꺼내어서.

“곁에 있어 줘, 데이지.”

제 수줍은 감정에, 그 어떤 때보다 활짝 웃어 주는 모습에 외젠도 함께 웃음 지었다.

충만한 순간을 잃고 싶지 않아서,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외젠! 일어났다며? 데이지는……?”

예고도 없이 엘리아가 집무실에 들이닥쳤을 때도.

두 사람의 모습에 넋을 잃은 엘리아를 보고 그만 웃음을 터뜨렸을 때조차, 두 사람의 손이 서로를 붙잡아 헤어질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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