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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원망 (42/79)

42. 원망

두 사람의 대화는 한 시간을 훌쩍 넘긴 뒤에야 끝이 났다. 엘리아와 테오는 이야기가 모두 끝난 뒤 지체 않고 복도 끝 방을 나섰다.

못질한 창틈으로 새어 흐르던 노을이 희미해졌으니, 두 사람은 손에 든 등불에 의지해 어둑한 복도를 거닐었다.

“심문에 쓴 방은 반대편 복도에 있다고 했지?”

“예. 저쪽, 끝에 있는 대연회장입니다. 그리고 시신은…… 바로 오른쪽 방에 두었습니다.”

시신이 있다는 말을 들은 탓일까. 맞은편 복도는 엘리아가 서 있는 곳보다 훨씬 어둡고 음산해 보였다.

“테오 경은 먼저 나가 봐. 이야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밖에 기사들이 걱정하겠네.”

독살 사건의 전모를 전해 들은 엘리아는 별관에 보관해 둔 메리와 루아의 수급을 직접 확인하겠다고 했다.

“나는 많이 안 걸릴 테니까. 알았지?”

기사들조차 악몽에 시달릴 정도로 끔찍한 광경일진대, 엘리아는 심지어 테오를 먼저 별관에서 내보내고자 했다.

<테오. 끝난 게 아니라, 이제 시작이잖아. 첫 시도가 실패로 끝났으니 오히려 3황자 측에서는 이보다 더한 짓을 벌일 게 분명해. 그러니까 앞으로의 일을 위해 나도 봐 두고 싶어. 나 혼자서.>

단순히 호기심을 앞세워 오기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엘리아는 두 사용인의 끝이자, 스스로의 시작점이 될 죽음을 마주하며 각오를 다지길 원했다.

그러니 테오도 엘리아를 만류하지 않았다. 로앙가의 기사로서, 그는 주인으로 대우해야 마땅할 아가씨의 축객령에 기꺼이 따랐다.

“예,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혹시 갖고 가시는 등불이 먼저 꺼질 수도 있으니, 이건 여분으로 두고 나가겠습니다.”

“응, 나갈 때 내가 챙겨 갈게.”

기사가 떠나고, 까만 어둠 속에는 불빛이 발자국처럼 남았다. 엘리아는 제가 든 불빛과 등대처럼 세워 둔 작은 등불에 의지해 걸음을 옮겼다.

먼지만 가득하던 반대편과는 달리, 대연회장 근처 복도에는 채 닦지 못한 핏자국과 사람들이 강제로 끌려가며 먼지를 닦은 흔적이 길게 남아 있었다.

엘리아는 본능적인 공포에 주먹을 꾹 말아 쥐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쉬지 않고 내디뎠다.

비명이 가득했을 연회장을 지나, 마침내 두 사람의 시신을 둔 응접실 문 앞에 도착했다.

‘……별관에 들어왔을 때 맡았던 냄새가, 이거였구나.’

닫힌 문 너머로 시신의 흔적을 감추기 위한 약초 냄새가 진동했다. 문을 열어젖히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독한 향이 터져 나왔다.

엘리아는 짙은 풀 향 속에 섞여 있을 시신의 흔적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소맷자락으로 입과 코를 막고서야 겨우 정면을 응시했다.

약초를 욱여넣은 관 위에, 두 개의 수급이 엘리아를 향해 놓여 있었다.

두 사용인의 얼굴이, 지독하게 낯설었다. 5년이 넘는 시간이었고, 엘리아가 2년 전 학술원에서 돌아온 뒤로는 하루도 안 거르고 봤던 얼굴이었는데.

비단 저것이 숨이 끊어진 수급이라는 이유 때문일까.

이미 머릿속에 배신자라는, 원망해야 할 사람이라고 낙인찍은 것 때문은 아니고?

“메리. 루아.”

엘리아는 눈 감은 얼굴을 향해 이름을 불렀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차례대로 제 이름이 불릴 때마다 눈을 뜨고 반응해 올 것만 같았다.

<엘리아 아가씨, 다녀오셨어요?>

입 열어 이름을 불러 댈 것만 같았다. 아마 살아 있었다면 제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했으리라.

지금 엘리아에게 들리는 환청처럼 말이다.

그러나 죽은 이들은 대답이 없었다.

엘리아는 몇 번이나 이 순간을 상상했다. 과거를 복기하며 후회하는 건 무의미했으니, 돌아간 뒤에 죄를 자백한 두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내 고민했는데.

“왜 그랬어?”

대답은 없었다. 물어볼 말들이, 확인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는데.

이미 죽어 버린 바람에, 엘리아에게는 기회조차 없었다.

배신을 비난하고, 설움을 토해 낼 기회를 박탈당한 채 안전한 곳에 처박혀 있었을 뿐이었다.

<에디, 나 한 번만 안아 주면 안 될까?>

품에 안겨 제 슬픔을 알아 달라 징징대다가 돌아왔을 뿐이었다.

화가 치밀었다. 그걸 전부 침묵하는 두 사람을 향해 쏟아부었다.

갈 곳 잃은 화가 다시 제게 돌아올 걸 알면서도.

“다 죽었어. 너희들이 다른 누군가를 죽여서라도 돌려받고 싶었을 사람들.”

“…….”

“메리 네가 살리고 싶었을 연인도, 루아가 구하려고 했던 동생도. 너희가 독을 건네받기도 전에 이미 죽었단 말이야.”

살아 있었다면 그 어떤 고문보다 잔인한 말이 되었겠지만, 이미 죽은 자들이었으니 엘리아는 거리낄 게 없었다.

제가 느낀 울분과 분노를 그들에게 모두 쏟아부었다.

<메리는 만나던 남자와 그 가족을 인질로 잡혔고, 루아는 북부 학술원에 유학 중인 동생을 빌미로 협박해 왔다고 합니다. 독살에 성공하면 무사히 돌려보내 주겠다고요.>

<메리의 연인이라면, 7번가에…… 그 사람이랑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는데?>

<조금 전, 공작가를 통해 전달받았습니다. 유기된 시신을 찾았는데 이미 죽은 지 며칠 된 것으로 보인다고요.>

가족이나 지인을 납치해 살해한 후, 살아 있다고 속여 독살을 종용하는 방식은 크라우제 후작가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메리와 루아 모두, 이미 죽은 이들을 구하겠답시고 버둥거린 셈이었다.

<각자의 방에서 머리카락과 신체 일부를 발견했습니다. 자백에 따르면 그걸 보여 주며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더군요.>

메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그 가족을, 루아는 어린 막냇동생을 인질로 잡히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엔, 몰랐어요. 우리가 같은 처지라는 걸.>

크라우제 후작 일파는 두 사람이 각자 공포에 빠져 무력해지길 기대했으리라.

그러나 두 사람이 같은 협박을 받고 있음을 눈치챈다는 건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루아가 제게 먼저 털어놓았어요. 끔찍한 일을 앞두고 있는데 어떤 선택을 해도 자기는 감당 못 할 거 같다고. 그래서 저도 같은 처지라고 했고……. 그렇게 알게 되었어요.>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깨닫고 말았으니까.

<제가 주인님의 소지품에 묻혀야 할 독을, 루아가 엘리아 아가씨와 약혼자분을 해칠 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요.>

공포와 죄책감에 짓눌린 두 사람이 같은 처지임을 알게 된들 사정이 달라질 리 없었다.

그저 밤마다 서로를 끌어안고 숨죽여 울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왜 그렇게 미련하게 버텨 댔어. 말을, 말을 했어야지.”

엘리아는 때늦은 비난을 퍼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을 이해하고 말았다.

소중한 사람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목숨까지 저당 잡혔으니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했을 리 없다.

두 사람에게 협박범들이 내건 제한 시간은 고작 이틀. 각오를 다잡지 못한 채 두 사람은 운명의 날을 맞이했다.

<루아. 나중에……. 네 방에서 다시 만나자.>

<기다릴게.>

메리는 외젠의 외출 준비를 돕기 위해 먼저 숙소를 나섰고, 병을 꼭 쥔 채 밤을 지새운 루아가 그를 배웅했다.

<루, 루아……!>

그리고 몇 시간 후 메리가 다시 숙소에 돌아왔을 때, 루아는 바닥에 쓰러진 채 죽어 가는 중이었다.

옆에는 빈 독약 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봉투 안쪽에 바르면, 아가씨는 무사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근데, 그게 아니었어. 전혀 괜찮은 게……. 아가씨가 보는, 앞에서 약혼자, 분께서…….>

어쩌면 엘리아가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 함을 뒤늦게 깨달았으니, 루아는 방으로 돌아와 절반을 남겨 둔 독을 삼켰다.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스스로에게 형벌을 내렸다.

어리석었다. 이미 저질러 놓고 후회한다니. 그러나 메리는 그 심정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루아. 나는, 나는 아무것도 못 했어. 너만큼 용기가 없어서…….>

피를 토하는 루아에게, 메리는 독이 든 유리병을 보여 주었다. 제 연인의 머리칼과 함께 전달받았을 때 그대로였다.

두 사람의 선택은 달랐으나, 결말은 같아야만 마땅했다. 메리는 루아와 공범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나 때문에 억울하게 죽을 사람들 돌려받지도 못하고, 백작님께서 떠나셨으니 아무것도…… 그러면서 네게, 네게 같이 자백하자고 설득하지도 못했잖아…….>

<……메리.>

고통에 떨리는 입술이, 간신히 ‘괜찮아.’라는 말로 메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런 루아를 위해, 메리는 바닥에 흩뿌려진 핏물 위에 나란히 누웠다.

<그러니까 내가, 곁에 있어 줄게. 무섭지 않게. 너 가는 거……. 무섭지 않게. 나는 이렇게나 많이 있으니까…….>

자신들의 목숨으로 갚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은 떠올릴 수가 없었기에, 비겁하게 달아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던 탓에…….

<아마 금방, 끝날 테니까. 금방 뒤따라갈게. 우리 죽어서, 죽어서 죄지은 거 같이 갚자.>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 죽음을 기다렸다더라.

죽어 가는 루아, 그 손을 꼭 붙잡고 있던 메리가 발견된 건 엘리아가 떠나고 몇 시간 뒤의 일이었다.

루아는 심문이 시작되기 전 결국 죽고 말았고, 메리는 살아남은 죄로 모진 고문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살려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본능적으로 나와야 하는 말인데, 한 번도 않더군요. 그저 아가씨께 죄지어 죄송하다고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메리의 얼굴은 독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으나, 생전의 모습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처가 새겨졌다.

한데 이미 죽었다던 루아의 얼굴마저 독 때문에 새카맣게 변색된 피부 위로 상처가 남겨져 있었다.

<메리의 심문은 공작께서 명하시고, 로앙과 공작가의 기사가 번갈아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루아 역시, 형식적으로나마 심문을 했습니다.>

전부 에드문트의 명령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가 느낀 분노가 전부 두 사람의 작은 얼굴에 들어차 있었다.

<공작가의 보좌관 말로는, 평소보다 잔혹하게 구셨다고 합니다. 본래는 자백의 진위를 파악하는 용도로만 고문하시지, 그들이 느끼는 고통 자체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셨는데 말입니다.>

고작 얼굴뿐이었겠는가.

당장 저 수급 아래에 놓인 시신을 꺼내면, 그가 쏟아 낸 분노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리라.

어쩌면, 엘리아가 덜 이기적이고 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면 빼곡한 고통의 흔적을 보며 연민했을지도 모르겠다.

강제로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잃은 채 배신해야 했으니, 용서하자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엘리아가 에드문트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차라리, 나를 죽이려 했어야지. 그렇게나 루아 네가 나를 생각했다면, 조금이라도 나를 위하고 싶었으면 차라리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 죽어 버리든지, 시키는 대로 나를 죽이려 했어야지.”

그러나 엘리아는 이기적이었고, 이성적일 수 없었다. 쓰러진 사람이 집사가 아닌, 에드문트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혹은 엘리아가 에드문트의 앞에서 중독되어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일어나지 않은 비극을 떠올리자니, 차라리 연민할지언정 용서할 수가 없었다.

“너희 역시 피해자라는 걸 알아. 원해서 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그저 소중한 사람을 살리고 싶었다는 것도……. 자진할 만큼 죄책감을 느꼈다는 것도. 알아.”

누구의 죄인지 따진다면, 모두의 죄라 우기고 싶었다.

“전부 아는데, 도저히 용서가 안 돼. 나를 죽이려 했다는 것보다 더 용서가 안 돼.”

엘리아는 억지로 걸음을 옮겨 두 사람의 수급 가까이 다가갔다. 겨우 악취에 익숙해진 코에, 시신이 썩어 가는 흔적이 스몄다.

“그렇지만……. 용서하는 것 말고는 전부 해 줄게. 불쌍히 여기고, 복수해 줄게.”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 복수한다는 건, 실은 아무런 쓸모없는 위안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죽어 사라진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복수가 아니었으니.

“죽어 버린 너희에게 나도 용서를 구하지 않을 거야. 대신 복수할 거야. 너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너희 아프게 하여, 결국 나까지 아프게 한 이들에게……. 내가 살아오며 감내했어야 하는 고통, 그 이상을 안겨 줄 거야.”

타인의 목소리로 전해 받은 죽음,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줄 알았는데.

마주하고서야 깨달았다.

엘리아는 그들의 수급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볼품없는 나무 관 앞을 구르던 먼지가 그 틈을 타 엘리아의 옷자락을 더럽혔다.

“나 역시 너희들과 다를 바 없으니까.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달라지는 게 없다는 말로 변명해 왔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도 너희의 공범이나 다름없잖아.”

엘리아는 그들의 썩어 갈 수급을 눈에 새기고 일어났다.

평생, 이 순간을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우린 공범이야. 그래도, 나는 너희처럼 죽어 버리지는 않을 거야.”

더러워진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엘리아가 뒤돌아 걸었다.

순간, 각자의 시신 위에 올라가 있던 머리가 풀썩 쓰러졌다. 마치 인사하듯. 마치 배웅하듯.

관 안을 굴러 머리칼 스치는 소리를 내었다.

구석에 처박혀 멈출 때까지 죽 이어지려는 소리를 남겨 둔 채 엘리아는 문을 닫아 버렸다.

인사도, 배웅도 필요 없었으므로.

* * *

죽음과 마주한 뒤 돌아온 복도에는, 기사가 두고 갔던 불빛이 엘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새카만 무대 위에서 유일하게 빛나던 사랑을 대신해 주려는 듯 희미한 빛을 품고 있었다.

잠시 떠나 있는 사랑 대신, 어둠 속에 남겨 둔 다정함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희미해진 빛을 보며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음이라, 엘리아는 부재한 연인을 생각했다.

‘벌써 보고 싶은데.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리움 역시 필연이라 생각했다. 하여 상념을 하듯 그리워했다.

닫힌 문 뒤에서 영원히 굴러갈 인사처럼, 언제고 끝 모른 채 이어질 줄은 몰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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