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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마중 (41/79)

41. 마중

긴 외출을 끝내고 돌아온 로앙가는 적막했다. 생기 없는 풍경에 엘리아는 불이 다 꺼져 싸늘한 화덕을 떠올렸다.

당장 온기가 절실하다 해도 불이 금방 도로 붙을 리 없었다. 당분간은 서로에게 기대어 온기를 구할 수밖에 없으리라.

서로 얽혀 낯선 추위에 바들바들 떨다가 시간이 지나면, 언제 또 그랬냐는 듯 추위는 사라지고 다시 안락함이 찾아오겠지.

“외젠.”

“응.”

엘리아는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내일을 살아야 할 가족의 이름을 불렀다. 멀어지는 공작가의 마차를 바라보던 그가 짧은 대답과 함께 엘리아에게 다가왔다.

구겨진 셔츠가 엘리아의 뺨에 닿고, 이어 커다란 손이 머리를 감싸 안았다. 품에 살짝 기대니 늘 풍기던 차향 대신 새카만 잉크 냄새가 묻어 있었다.

“외젠이 마중 나올 줄은 몰랐어. 데이지는 자?”

“조금 전에 잠들었어. 그리고 너 오는데 당연히 내가 나오지, 나 아니면 누가 나와서 감사 인사를 하겠어?”

말로만 툴툴거렸을 뿐, 외젠은 로앙에 돌아온 제 누이동생을 끌어안고는 도통 놓아주지를 않았다.

엘리아도 외젠을 힘주어 안아 주고는 등을 두들겨 주었다.

“외젠, 다녀왔어. 나 안 아프고 잘 있다 왔어. 혼자 너무 쉬다 와서 미안할 정도로.”

“미안하긴 뭘. 혼자서 많이 답답했을 텐데……. 소식 전하기가 쉽지 않았어. 공작가에서 불편하지 않았다니 다행이네.”

외젠은 품에 파묻히듯 안긴 누이동생의 머리칼에 입술을 눌렀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시절처럼, 어린 동생에게서는 그리운 온기가 담뿍 배어 있었다.

“집사는 많이 좋아졌대. 의식도 잠깐이나마 찾았고.”

엘리아는 외젠과 함께 나란히 걸으며 공작가에서 있었던 일들을 전해 주었다.

시릴이라는 신참 보좌관이 로앙가를 왕복하며 제게 안부를 전해 주었다는 말과 함께, 에드문트의 침실에서 머물렀던 이야기까지 하니 금세 3층 집무실에 도착했다.

“아가씨, 오셨어요…… 저 깨우시지.”

반나절 사이 밀린 상단 일을 돕다가 깜박 잠이 든 데이지가 엘리아를 반겼다. 저 못지않게 잠이 많은 데이지를 꼭 안아 준 뒤 담요를 끌어와 위에 덮어 주었다.

“좀 더 자. 두 시간만 더 자고 다 같이 저녁 먹자.”

“아. 저녁 안 드셨죠. 제가 주방에 가서 간단한 거라도 챙겨 올게요.”

“고집부리지 말고 어서 누워. 그리고 외젠도. 둘이 한잠도 못 잤을 거 아니야.”

엘리아는 두 사람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빼앗아 억지로 소파에 눕혔다.

“그래. 일단 나는 자고 볼란다.”

외젠은 엘리아의 제안을 덥석 물어 눈을 감아 버렸지만, 데이지는 가물가물한 정신을 붙잡아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억지로 뜬 눈이 참으로 고달파 보였다.

“아가씨.”

“응?”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나서요. 아가씨 한창 소꿉장난하는 거 좋아하셨을 때.”

“그게 대체 언제 적이야. 다섯 살, 뭐 그런 때 아니야? 애 보던 기억 떠올리지 말고 눈 감고 자. 얼른.”

외젠은 잠들었는지 인기척이 없었고, 엘리아가 서류 더미를 뒤적여 제가 할 만한 일거리들을 찾는 소리만 분주했다.

나지막한 소음이 연신 잠을 재촉했으나 데이지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왜 갑자기 아가씨 어릴 때 기억이 떠오른 걸까.’

억지로 잠을 미루던 데이지가 겨우 답을 찾았다. 뒤늦게나마 공작가에서 양 갈래로 땋아 온 머리칼을 발견한 덕분이었다.

‘아. 저 머리칼 때문에. 어렸을 때 저렇게 여러 갈래로 땋아 드리는 거 좋아하셨지.’

답답함이 가시고서야 데이지가 후련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고민을 거듭하느라 뒤척이는 소리가, 데이지의 의식과 함께 잠이 들었다.

‘이제야 잠들었나 보네. 무슨 고민을 하느라 잠까지 꾸역꾸역 참은 건지.’

엘리아는 데이지가 잠든 걸 확인하고는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토목 공사 서류를 꺼내 추가 예산을 계산해 적어 넣고, 비슷한 서류 하나를 더 꺼내 숫자 계산을 끝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난 뒤였다.

다들 깊이 잠들어 엘리아가 참고 자료를 찾는다고 수선 떠는 소리에도 깨어날 줄을 몰랐다.

두 시간에 걸쳐 제 할 일을 모두 끝낸 엘리아는 곤히 잠든 데이지에게 다가갔다.

다갈색 머리칼을 시작으로 몸을 꼼꼼히 살펴보니, 얼굴이나 목덜미에는 작은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선을 아래로 한참 내리자 소매 틈으로 발갛게 부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깨우지 않게 조심하며, 상처가 심하진 않은가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약이라도 좀, 바르지.”

어쩌다 생긴 상처인지는 너무도 뻔했다. 실은 공작가에서, 에드문트에게 데이지를 부탁했을 때 이미 예감한 일이었다.

<제가 실수해서 외젠 님과 엘리아 아가씨께 폐 끼치게 되면, 지금 힘든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 테니까요. 제가 노력해야죠.>

부재한 백작 부인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데이지는 늘 스스로에게 가장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곤 했으니까. 죄인을 구금할 때 사용하는 결박 도구를 자청하는 것쯤이야.

전부 본인이 감당해야 할 의무라 여겼겠지.

‘특혜라니. 다들 네가 어려서부터 로앙 때문에 희생했다고만 생각하지, 우리 남매한테 특혜를 받아 편히 산다고 생각 안 할 텐데.’

그 모습을 보며 외젠은 또 얼마나 속이 탔을지. 가문을 이끌어야 할 제 탓이라고 여기며 자책했으리라.

다행히 잠에 빠진 두 사람의 얼굴은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엘리아는 꿈꾸는 두 사람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부디 아팠던 시간, 슬펐던 기억 전부 꿈속에 두고 돌아오길.

* * *

3층 집무실을 나온 엘리아는 복도에 나오자마자 기사를 붙들고 테오 경의 위치를 물었다.

“아……. 그게, 테오 부단장님은 저택 밖에 계십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밖이라면 별관 말하는 거지? 알았어. 수고해, 베르트 경.”

“네? 아가씨, 어디 가십니까?”

“별관에. 아, 집무실에 데이지랑 외젠이랑 둘 다 겨우 잠들었으니까 괜히 깨우지 마.”

별관에 간다는 대꾸에 기사들이 급히 엘리아를 만류하려 했지만, 제 저택을 돌아다니겠다는 아가씨를 막아 낼 방법은 없었다.

별관 앞에 있던 테오는 엘리아와 그의 뒤를 졸졸 쫓아오는 기사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올 게 왔구나 하는 심정이었다.

“테오 경, 나 안에 들어갈 거니 정 걱정되면 따라와.”

“아가씨, 안에 아가씨께서 보실 만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테오 위겐 경.”

“……오늘은 시간도 늦었고, 정 들어가셔야 하면 아침에 주인님과 동행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데이지나 외젠 못지않게 오랜 시간 동안 엘리아를 겪어 왔으니, 테오는 강경하게 엘리아를 막아 내는 대신 애원하는 쪽을 택했다.

‘후우. 다행히 더 고집부리시진 않을 모양이네.’

엘리아가 뚱한 표정을 짓고는 홱 뒤돌아 걷는 모습을 보고 테오는 뒷일은 백작님과 데이지에게 맡기면 되겠거니 하며 안심했다.

하나 엘리아는 정면 돌파를 위해 잠시 후퇴했을 뿐이었다.

“베르트, 이거 좀 빌릴게.”

“예? 아가씨! 엘리아 아가씨!”

자신을 따라온 베르트에게서 등불을 빼앗아 들고는, 뾰족한 장식이 달린 등불을 앞세워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길을 열게 했다.

저항도 못 하고 순식간에 등불을 빼앗긴 베르트, 그리고 갑자기 들이닥친 아가씨에게 한심할 정도로 놀라 길을 열고 만 기사들이 충격에 빠졌다.

그사이 엘리아는 이미 별관 안으로 성큼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젠장…….”

성공적으로 돌려보낸 줄 알고 안심했던 테오 역시 갑자기 벌어진 일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었다.

“죄, 죄송합니다. 부단장님. 아가씨가 혹시 다치실까 봐…….”

“됐어. 누가 있었어도 아가씨 못 막았을 거야. 내가 따라 들어갈 테니 다들 여기서 대기해.”

테오는 새로 불을 붙인 등을 챙겨 들고 엘리아의 뒤를 쫓았다. 아직 해가 떨어지기 전이지만 별관 내부는 등불 하나로는 턱도 없을 만큼 어두울 게 분명했다.

‘어두운 데다가 바닥도 다 삭아서 위험한데, 다치기라도 하시면 어쩌시려고.’

그러나 막상 안으로 들어서니 내부는 그리 어둡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그가 쥔 불빛이 닿지 못하는 구석구석까지 쌓인 먼지가 들썩이는 광경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가씨.”

등불을 멀리 뻗으며 먼저 들어간 엘리아를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아가씨. 엘리아 아가씨?”

“여기야.”

답이 들려온 곳은 왼쪽으로 길게 뻗은 복도 끄트머리였다.

몸을 돌리자, 그곳에 노을빛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다. 여자의 발걸음에 맞춰 춤추던 먼지가 창틈을 비집고 들어온 노을과 함께 만들어 낸 풍광이었다.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아 사라지는 안개 너머로 엘리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테오, 이쪽으로 와. 앞에 바닥 조심하고.”

엘리아는 전날 임시 회의실로 사용한다고 치워 둔 방으로 쏙 들어갔다.

잠시 낯선 풍광에 홀려 있던 기사가 사라진 엘리아의 흔적을 뒤좇았다.

가라앉았던 먼지가 다시 주홍빛 안개를 일으켰지만, 안으로 파고든 테오에게는 쿰쿰한 먼지 냄새만 가득했다.

불쾌함 대신 테오는 제 발걸음이 향하는 곳에 있는 방에는 별다른 게 없다는 걸 떠올리며 안도했다.

‘다행이지. 바로 그쪽으로……. 가실 줄 알았는데.’

새벽에 죄인을 심문했던 커다란 연회장. 그리고 죄인을 처형했던 응접실을 뒤로한 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아가 들어간 방에는 옛 가구를 벽 쪽으로 밀어내 만든 공간에 커다란 탁자와 의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 앉아. 등은 바닥에 내려 두고.”

먼저 방에 들어와 있던 엘리아는 등불 놓는 자리까지 지정해 준 뒤, 중앙에 놓인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둥그런 탁자는 아마 저택에서 따로 옮겨 왔는지 주변의 부서진 가구들과 달리 멀끔했다.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자마자 엘리아의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다.

“테오 경, 내가 왜 불렀는지 알고 있지?”

“……어제 일을 제게 물으려 하시는 거지요.”

“대강은 공작가 가신들에게 들었어. 메리와 루아였다면서. 어떻게 된 일이었어?”

테오 경은 엘리아의 추궁을 진작 예상했으나, 막상 현실로 닥치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제의 일을 떠올리고, 그 순간순간을 전부 말로 빚어 엘리아에게 전하는 일에는 각오가 필요했다.

망설이는 그의 모습에 엘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테오, 어차피 누군가에게는 듣게 될 일이야. 내가 모른 채 지나가는 게 더 우스운 일이고. 외젠이나 데이지를 붙들고 캐물어도 될 일이지만, 그럼 어떻게 될지 잘 알잖아.”

엘리아의 말대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뻔했다.

외젠이 엘리아에게 이야기 꺼내다 눈물을 글썽이고, 그 모습에 엘리아가 제 감정에 버거워하며 울고, 데이지가 그런 두 사람 달래느라 진이 빠지겠지.

테오가 로앙 백작가의 어린 종기사 시절부터 수도 없이 지켜본 일이었으니, 이미 한참을 슬퍼했을 사람들이 다시 아파하게 되리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테오 경에게 부탁하는 거야. 우리 중에 제일 덜 울잖아.”

“그거야, 제가 울라치면 데이지와 아가씨가 며칠이나 놀려 대셨으니까 울고 싶어도 참을 수밖에 없었잖습니까.”

“오늘따라 다들 옛날이야기를 꺼내네. 테오가 혼자 기사 될 거라고 으스대니까 우리가 샘나서 놀린 거였잖아.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둘 정도로 억울했던 거야?”

“결국 저 울리는 데 성공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두 사람은 마주 본 채 서로 번갈아 가며 웃고 울리며 놀던 시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긴장을 풀어 주려는 의도로 나온 대화였기에, 추억담 대부분은 엘리아의 시선으로 바라본 테오의 유년 시절을 그렸다.

다복한 가정에서 가족들과 어울려 지내다가 낯선 귀족가에서 홀로 살게 되었으니, 10대 초반의 태오는 훈련보다도 그리움에 매일 앓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저를 달래 준 건 이제 만날 수 없는 로앙가의 기사들, 그리고 로앙가의 두 남매였다.

<테오, 여기도 테오 집이잖아. 그러니까 가족들한테 하고 싶은 말 우리한테 해도 돼. 로앙가에서 배우고 작위도 받게 될 테니 가족이나 마찬가지인걸.>

어린 아가씨에게 위안 받아 슬픔을 꾹꾹 삼키던 시절을 함께 되짚자니 부끄럽기도 하고 애틋한 마음도 들었다.

함께 옛 추억을 더듬는 이 순간, 서로가 느끼는 짙은 감정은 분명 가족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유대감이었으니까.

“제가 그렇게나 자주 울었는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이젠 안 울잖아.”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요. 그리고……. 기사가 되어, 지켜야 할 가족도 얻었고요.”

탁자에 올려 둔 등불이 엘리아의 잔잔한 미소를 비추었다. 양쪽으로 곱게 땋아 내린 머리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지만, 동시에 조금 전 복도에서 마주한 광경을 곱씹게 했다.

“맞아. 시간이 많이 지났지. 테오 경에게도. 내게도.”

노을빛으로 물든 복도 때문이었을까.

“그러니까 테오,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이제는 지켜야 할 사람들 생각하며 버틸 수 있으니까.”

“시간이……. 그렇군요.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테오는 처음으로 엘리아를 보며 백작 부인을 떠올렸다. 성년을 맞은 외젠 도련님에게서 돌아가신 백작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던 것처럼.

‘아마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깨닫게 될 날이 머지않았겠지.’

어리기만 하던 아가씨와는 이제 이별해야 함을. 앞서가시거든 넘어지실까 걱정하지 말고, 이제는 믿음을 가지고 뒤따라야 한다는 것 역시 깨달으리라.

테오는 오늘 그 최초의 한 걸음을 딛고자 했다.

“아가씨. 어제 일,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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