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두 개의 밤
새카만 밤이 찾아왔다. 해가 기울고, 노을 지는 시간은 다 어디로 간 건지. 에드문트가 자리를 비운 공작가의 저택에는 어둠뿐이었다.
서늘함과 적막뿐이었다.
엘리아뿐이었다. 여자는 낯선 공간에 저 혼자 외톨이처럼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 빈자리를 기다림으로 채웠다. 구석구석 뚫린 틈은 상념으로 메꿨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에드문트가 내려 준 소파 위에서 흘려보낸 시간이 벌써 한참이었다. 엘리아는 제가 멍하니 시간만 흘려보냈다는 걸 알았지만, 당장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몸이 어딘가에 꽉 박혀 버린 기분이야.’
발이 푹푹 들어가는 진흙탕에 온몸이 들어간 것 같았다. 움직일라치면 더 깊은 곳으로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아 두려웠다.
약한 마음을 더 헤집으려는 듯, 어둠 속으로 숨으려는 엘리아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기억이었다.
<엘리, 마지막으로…… 인사드려야지.>
열여덟이 된 지금, 부모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장례식 때의 기억이었다.
눈을 감은 인형처럼 보이던 두 사람.
그 새하얀 얼굴에 집사의 모습이 겹쳐졌다. 새파랗게 질려 쓰러지는 집사의 얼굴이, 그들과 닮아 보였으니까.
세 사람의 싸늘한 몸이 닿기라도 한 듯, 엘리아가 몸을 흠칫 떨었다.
‘추워…….’
온기가 간절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을 텐데, 몸은 제멋대로 서늘함을 느끼고는 익숙한 온기를 갈구했다.
누가 손을 꼭 잡아 주었으면.
바람이 불어 굳은 몸을 데워 주었으면.
‘……안아 주었으면.’
이기적인 본능이 외치는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엘리아는 억지로 팔을 움직여 제 몸을 끌어안았다.
“괜찮으십니까?”
뒤쪽에서 별안간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한스가 서류를 쥔 채 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여태 혼자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구나.’
엘리아가 혼자 멍청히 앉아 있는 꼴을 본 사람은 심지어 한스 하나가 아니었다. 주변을 살피니 방에 있던 라스페가의 기사들이 전부 제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분명 다들 여자의 움직임에 퍽 안도했으리라.
그러곤 궁금해하리라. 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라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했는지.
‘열여덟씩이나 되어서 죽은 부모를 떠올렸다고 하면 웃겠지.’
엘리아는 자신의 초라함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여 반응했다.
“괜찮아요. 지금 몇 시쯤 되었죠?”
겨우 목을 가다듬고 물으니 에드문트가 떠난 지 대략 서너 시간이 지났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 늦은 시간에 로앙가 저택이 아닌 다른 곳에 머무는 건 처음이야. 심지어 그 처음이 공작가 저택이 될 줄이야.’
오늘 겨우 얼굴을 익힌 기사들, 처음 들어와 본 남자의 침실, 익숙지 않은 시간대의 저택.
낯선 풍경을 담던 눈이 익숙함을 찾아 방황한 끝에 제가 입은 옷 위에 내려앉았다.
엎드려 책을 본다며 한참 굴러다닌 탓에 여기저기 주름이 져 있었다.
<아가씨, 전에 끊어 온 천으로 새로 지어 봤어요. 극장 갔을 때 보니 이렇게 허리선을 높여 지은 옷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하지만 처음 입고 나온 옷인지라, 이마저 익숙지가 않았다. 얽힌 기억이라곤 전날 완성한 거라며 자랑스레 보여 주던 데이지의 목소리뿐.
데이지의 손에 들린 채 나풀대던 옷자락에는 언제 튀었는지 찻물이 점점이 찍혀 있었다.
‘찻물은 얼룩 빼기 힘들 텐데.’
바보 같은 걱정이었다. 어차피 돌아가 봐야, 겨우 아가씨가 칠칠찮게 묻혀 온 얼룩에 관심을 가질 사람은 없을 테니까.
새하얀 옷에 묻은 얼룩을 빼는 일보다 훨씬 힘든 일을 겪어 지쳐 있을 텐데.
돌아간다면…….
‘몇 명이 남고, 또 몇 명이 사라졌을까.’
엘리아는 독이 나왔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는 배우지 않았지만, 학술원에 있을 적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들은 건 있었다.
<대부분의 가문이 한 번씩은 겪었겠지요. 여기 있는 이들 다 황권 다툼이 한창이던 시절에 태어났으니까요.>
1황자와 3황자로 나뉘어 가문들끼리의 견제가 극심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독살 위협에 시달린 가문들도 제법 많았다.
<유모요? 저는 없어요. 어릴 적에 누가 음식에 독을 타서, 기미를 보던 유모가 저 대신 죽었거든요. 유모 말고도 사용인들이 스무 명 넘게 죽었고요.>
<스무 명이나 독을 먹고 죽었다고?>
<그게 아니라요, 독을 넣은 게 누군지 알아내려고 했는데 다들 저 아니라며 잡아떼고, 증거는 하나도 없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사람들은 다 내쫓거나 감옥에 가둬야 했대요. 원래 그렇게 하는 거라던걸요?>
<어쩔 수 없죠. 생각해 보세요. 매일 가족들 식사며, 의복이며, 잠자리에 목욕물까지 사용인들 손 타잖아요. 저 같으면 한 명도 안 남기고 새로 구했을 텐데.>
<독살 시도가 진짜 원수진 사람 독 먹고 죽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잖아요. 주변 사람들 의심하다 말라 죽으라고. 그거 노리고 하는 거라던걸요.>
<그건 맞아요. 저희 부모님도 그때 이후로 아직도 식사 초대받으면 본인 식기에 기미 볼 사용인들까지 대동하시거든요.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인데.>
범인을 가려내지 못해서 결국 다 감옥에 가두거나 죽였다는 말. 엘리아는 그 이야기를 곱씹으며 대략 연관되었을 거로 추정되는 사람 수를 세어 보았다.
최대한을 가정한다면, 몇 명일까.
‘아, 너무 많다. 너무 많아.’
과자를 구웠을 때 곁에 있던 주방 하인들, 제가 침실에 두었던 봉투에 몰래 접근할 수 있는 4층 사용인들……. 두 손을 다 쓰고도 모자라 접은 손가락을 다시 펴야 했다.
‘스물이 훨씬 넘는데. 그 사람들을 다 고문해서 입 열게 하는 거겠지.’
하필 오늘 아침에 그네들 얼굴을 하나하나 머리에 애써 새겨 둔 터라 한 명씩 꼽을 때마다 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조금만 주의했으면……. 아니. 의미도 없는 후회는 하지 말자. 그보다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게 나을 테니까.’
엘리아는 일단 지저분해진 옷을 갈아입고 세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굳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새 다리가 풀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가씨!”
놀란 기사들, 그리고 엘리아의 모습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한스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일으켜 드리겠습니다. 잡으십시오.”
동정 어린 시선이 엘리아를 향해 왔다. 한심한 꼴을 보인 스스로에게 화가 나는 바람에, 남들의 걱정이 그리 달갑게 다가오지 않았다.
“됐어요. 내가 일어날 수 있어.”
도움을 거절한 엘리아는 이를 악물고 탁자를 짚었다. 경련하는 다리를 혼자 꾹꾹 눌러 버티게 하고 겨우 몸을 곧게 세워 보였다.
따가운 시선을 못 본 체하고, 겨우 눈높이가 맞아떨어진 한스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눈치껏 표정을 갈무리했다.
“좀 씻어야겠으니 안내 좀 해 줘요.”
“예,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한스의 안내를 받아 침실에 딸린 욕실에 가니, 이미 데워 둔 목욕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사용인 두 명이 뒤따라 들어와선 바지런을 떨었다. 보아하니 목욕 시중을 들 모양이었다.
“시중까지 들 필요는 없으니 준비만 끝나면 나가.”
낯선 사람들 손에 몸을 맡기느니 차라리 직접 씻으려고 거절했더니, 사용인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밖으로 나갔다. 남은 준비는 한스가 대신 이어받기로 했다.
“저들은 앞에 대기시켜 둘 테니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건 뭔데요?”
“목욕물을 확인할 때 쓰는 도구입니다. 공작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한스가 욕실 한쪽에 있던 상자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 주었다. 물 온도라도 재는 건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불빛을 반사해 반짝반짝하는 재질이 다른 공예품과 달랐다.
“은을 입힌 건가 보네.”
“예, 물속에 넣어서 안전을 확인합니다. 바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한스의 손을 떠난 둥그런 은제 세공품이 욕조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욕조 물에 파문이 일었다.
“문제가 있으면 색이 곧바로 변합니다.”
뽀얀 물 아래에 가라앉은 세공품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은색이었다.
사실 한스도 듣기만 했지 직접 사용하는 건 처음이라 색이 변하지 않는 걸 확인하고선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가 불안해하실까 봐 창고에 처박혀 있던 걸 털어 왔는데, 이 장난감 같은 게 효과가 좀 있으려나 모르겠네.’
확인을 끝낸 한스가 허리를 다시 곧추세웠다. 욕조 안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엘리아가 한 박자 늦게 시선을 떼어 한스를 바라보았다.
“아, 옷은 공작님 가운 중에 적당한 거로 골라 두었습니다. 혹시 불편하시면 다른 의복으로 챙겨 드릴까요?”
“입어 보고 불편하면 말할 테니 이만 나가 봐요.”
한스가 나가자마자 엘리아는 세안용으로 준비된 차가운 물에 얼굴을 처박았다. 새파랗게 차가운 물이 사방에 흠뻑 튀어 흩어졌다.
학술원에서 생활할 적 졸음이 쏟아질 때 써먹던 방법이었는데, 옆에 시중드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 못할 짓이었다.
‘하아…… 좀 살겠다.’
지하에서 따로 떠 왔을 시린 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옷이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얼굴을 꾹꾹 문질렀다.
찬물에 적응할 때쯤 얼굴을 들어 젖어 엉망이 된 옷을 끙끙거리며 벗었다. 수선스럽게 씻고, 탈의하고 겨우 욕조 안으로 들어갔을 땐 몸이 전보다 더 녹초가 된 뒤였다.
따듯한 물을 만끽할 새도 없이 엘리아는 커다란 욕조에서 몸을 꾹꾹 눌러 경직된 근육을 풀었다.
‘이쯤 하고 끝내야겠다. 더 씻다간 탈진할 것 같아.’
마지막으로 풀어진 몸 위에 비눗물을 내어 씻으려는데 바닥에 넣어 둔 공예품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비눗물 때문에 상할지도 모르니까 꺼내 둘까.’
뿌연 목욕물 속을 손으로 더듬은 끝에, 독이 있는지 확인한다며 넣어 두었던 은 장식품을 꺼내 올릴 수 있었다.
‘그냥 꽃 모양인 줄 알았는데 해독제로 쓰는 꽃 모양이네. 쓰임이랑 모양새를 맞춘 모양이지.’
두 손에 가득 들어오는 장식은 커다란 꽃잎이 다닥다닥 붙어 탐스러웠다. 관리를 잘한 건지, 매끄러운 표면에 엘리아의 얼굴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더운 목욕물에 발갛게 열 오른 볼, 아직 붓기가 빠지려면 한참인 눈두덩이. 그리고 눈동자까지.
눈동자를 보며, 엘리아는 에드문트를 떠올렸다. 제 눈에는 훨씬 더 아름다운 하늘을 품고선 다정한 말을 해 주던 남자를.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제 인생에서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귀한 보석이었지요.>
그리고 그를 더없이 아껴 주던 노인의 목소리를.
‘소원이라도 빌어 볼까.’
어릴 적, 혹시 돌려받을 수 있을까 해서 내내 두 손 꼭 쥐고 부모를 간절히 바랐던 것처럼. 손에 든 은 꽃이 마치 신이라도 되는 듯.
소원을 빌어 볼까. 모두 무사하게 해 달라고.
매끈한 꽃잎에 맺힌 물방울이 엘리아의 손으로 미끄러져 톡, 떨어졌다.
동그랗게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는 들리지 않았다. 은색 꽃이 가라앉고, 욕조의 물이 찰랑대고, 거품을 씻어 내는 물소리만 요란했다.
‘아니. 이제 지긋지긋해.’
소원을 빌지 않았다. 어차피 여덟 살 때 확인하지 않았던가. 간절히 빌어 봐야 죽은 부모는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옷장 안에 웅크린 채 제발 이 지독한 죄책감을, 상실감을 죽여 달라고도 빌었었다.
결국 좁고 어두운 옷장 밖으로 제 발로 나왔으나, 소원을 빈 덕분이었던가?
<엘리, 제발 부탁이니까……. 제발, 제발 너까지 가 버리지 마.>
엘리아를 끌어낸 건, 자신의 소원이 아니었다. 하나뿐인 오빠의 간절함이었고, 다정한 데이지의 눈물이었다.
소원은 그저 자신을 방치했을 뿐이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눈 감고 기도하면 현실이 되리라는 헛된 희망을 품게 했다.
시간만 낭비하게 했다.
‘결국, 아무리 빌어도 해결되는 건 없었잖아. 단 한 번도.’
엘리아의 부주의와 사용인의 배신, 그리고 라스페와 로앙이 죽길 바라는 크라우제 후작 일파의 악랄함 역시. 기도한다고 복수할 수 있을 리 없다. 이미 쓰러진 집사를 구할 수도 없었다.
낯선 향이 남은 몸을 커다란 가운으로 감쌌다. 에드문트의 옷이었으나 체온은 없었다. 그러나 괜찮았다.
<엘리. 엘리아, 약속할게. 네가 다치지 않게, 위험하지 않게 내내 너를 지켜 줄게.>
그가 주었던 마음이, 사랑이 남아 있었으니까.
‘에디, 나도 너를 지킬 거야. 네가 홀로 슬퍼하지 않도록.’
새하얀 장갑에 기대어 두려움을 숨기던 남자를 혼자 버티게 하지 않으리라.
지금까진 저택에 틀어박혀 침묵하는 것 외에는 방법을 몰랐지만, 더는 나약함을 변명 삼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공허한 소원을 빌듯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건 이제 그만해야지.’
문을 열자, 고여 있던 욕실의 습기가 빨려 나가듯 움직였다. 덜 마른 머리칼에 작별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모르는 척해 대고, 이루어지지도 않을 소원이나 비는 거. 전부 끝낼 거야.’
오르골 위 인형인 줄 알았겠지만. 뱅글뱅글 제 자리만 지키며 춤을 출 줄 알았겠지만.
엘리아는 한 걸음, 나아갔다.
아무도 좁혀 주지 않던 거리를 천천히 좁혀 나가기 위해서.
* * *
엘리아가 욕실을 나서자, 여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용인들이 꾸벅 인사하고는 침실 밖으로 사라졌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신지, 목욕은 잘 마치셨는지. 평범한 사용인들이라면 으레 했을 법한 질문은 없었다.
스스로 자신들의 쓸모가 끝났다고 판단해 물러갈 뿐이었다.
‘아마 공작가에서 교육한 탓이겠지. 공작님께 일일이 여쭈어 가며 번거롭게 하지 말고, 알아서 처신하라고.’
엘리아는 사용인들의 태도에서 에드문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드문트도 본인 직관만 신뢰해서 움직이지, 누군가에게 따로 의견을 구하는 법은 없었으니까.’
본인 성격이 그러니, 아랫것들에게도 자연스레 비슷한 태도가 요구되었으리라.
<에드문트의 공작 작위 승계식에 가면 벨레노아 백작님도 뵐 수 있는 거지? 나 이번에 처음 뵙는 거라 긴장돼. 외젠은 뵌 적 있다고 했던가?>
<만난 적이야 있는데……. 그분은 오시지 않기로 했다더라.>
<그새 벨레노아가에서 답이 온 거야?>
<아니, 공자께서 결정하고 일방 통보하셨다더라. 굳이 새로 결집시킨 가문에게 공작가가 벨레노아 백작을 재지지할 거라는 뜻을 상기시킬 필요는 없다면서.>
<뭐어? 그런다고 일방적으로 오지 말라고 통보했다는 거야? 그럼 벨레노아 백작님 입장은 뭐가 돼? 사촌의 승계식에도 초대 못 받은 꼴이 되잖아! 적어도 의견은 들었어야지. 하여간, 제멋대로에 피도 눈물도 없어!>
예전에는 에드문트를 독선적이라며 비난했지만,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에드문트는, 말수 없는 가주를 대하는 사용인들처럼 애초에 남에게 답을 구한다는 선택지 자체를 포기했던 것 아닐까?’
열두 살에 가문을 혼자 짊어진 에드문트에게 누가 제대로 된 조언을 해 주었겠는가.
그를 낮잡아 보는 가신들, 어린 공자를 돕는 척 거짓 조언을 일삼는 사람들 틈에서 에드문트가 기댈 수 있는 건 오직 제 직관뿐이었으리라.
<엘리,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다는 말과 함께 엘리아를 찾아왔을 때조차, 그는 제멋대로였다.
누군가에게 의견을 구했더라면 분명 말해 주었을 텐데. 당신 약혼자가 아마 까무러치게 놀랄 거라고.
그래도 보고 싶다며 찾아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땐 미쳤는가 싶을 정도로 막무가내였으니까.
‘지금은 달라지려고 노력 중이긴 하지. 그때 엄청난 꽃 선물을 마지막으로 멋대로 구는 것도 자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푸른색 꽃을 그린 선물을 들고 라스페 공작가에 찾아왔던 날, 에드문트는 전과 달리 엘리아에게 의중을 구해 왔다.
당시에는 눈치챌 겨를이 없어 몰랐는데. 되짚어 보니 딱 그때부터였다.
<허락해 주면 안 될까.>
일방적이던 선물과 초대장 대신, 바래다주고 싶은데 허락해 달라는 말로 형식이나마 갖추어 엘리아를 배려했다.
분명, 엘리아의 반응을 의식해 태도를 바꾼 결과였다.
‘내가, 네 일방적인 선물에 놀라 당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어서. 그래서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던 걸까.’
어쩌면 울었다는 것까지 들었을지 모르겠다.
대체 누가 잽싸게 일러바쳤는지는 차치하고, 엘리아는 그간 사람들이 늘 자신을 배제하고 결정하려는 태도가 제 업보였음을 인정해야 했다.
에드문트의 머릿속에 여자가 아직 어려, 보살펴야만 한다는 생각이 쿡 박이고 말았을 테니까.
‘미루지 말고, 겨우 닐스 튀링겐에 대해 아는 체만 하며 뜸 들이지 말걸. 그랬다면 오늘 같은 날 곁에서 도울 수 있었을 텐데.’
결심을 미루었던 걸 이렇게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당장 후회된들 돌이킬 수는 없으니 머리를 빼꼼 내밀려는 자괴감을 무시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 지금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한스에게 에드문트의 사정을 알아내지 못했어도, 로앙가의 상황이 어떤지…… 집사는 괜찮은지. 라스페가에 다른 피해는 없었는지. 그 정도는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커다란 가운을 한 번 더 고쳐 맨 후, 엘리아는 침실로 향했다. 소파가 있던 침실 중앙까지는 얼마나 멀던지. 욕실과 중앙 침실을 잇는 긴 복도를 걷는 데 한참이 걸렸다.
바닥에 끌리는 가운을 치맛자락처럼 잡아 쥐고 겨우 침실에 다다르니 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랑 이야기하는 거지?’
침실 바로 앞에 있던 기사가 엘리아를 보고 아는 척을 하려 하길래, 급히 조용히 해 달라며 입술 위로 손가락을 붙였다.
덕분에 한스와 대화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벨젠 경께서는 뭐라 하시던가?”
“이야기 나눌 틈도 없었습니다. 조금 늦게 도착해 오셔서 바로 합류하셨으니까요.”
“추가 인력 요청은 없었다는 거고?”
“예, 없었습니다. 저는 일단…….”
여자의 말을 막은 건, 한스의 손짓이었다. 누가 눈치 좋은 줄 모를까 봐 엘리아가 숨죽인 채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는 걸 금방 알아챈 탓이었다.
“흠흠. 시릴, 남은 이야기는 잠시 후에 나누지.”
한스는 엘리아를 의식해 목소리를 낮추더니, 대화를 중단시켜 버렸다.
‘나한테 숨기고 싶은 이야기는 나중에 자리 옮겨서 따로 하겠다는 거겠지?’
엘리아는 한스가 호들갑 떨기 전 선수를 치기 위해 그를 향해 걸어 나왔다. 들키지 않았으면 내내 자리에서 엿들었을 생각이었지만, 뻔뻔하게 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길래 나 왔다고 입을 꾹 다물어요?”
“별일 아닙니다, 아가씨. 시릴 보좌관과 잠시…….”
“아까 에드문트와 함께 간 보좌관 중 한 명이겠군요. 맞나요?”
덥지 않은 날씨에 땀이 흥건한 모습을 보고, 그가 어디서 왔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엘리아가 드러내고 아는 체를 하자 당장 자리를 피하려 했던 시릴이 꼼짝없이 붙들리고 말았다.
“예, 공작님의 제2 보좌관 시릴 버나드입니다.”
“로앙가에서 왔을 테죠? 지금 어떤 상황인지 이야기해 줘요.”
직설적인 요구에 시릴이 취한 태도는, 제 직속상관인 한스의 눈치를 살피는 일이었다.
‘어쩌지? 한스 님이 엘리아 아가씨를 보자마자 입 다물게 한 걸 보니 말하면 안 되는 모양인데…….’
왜 아가씨에게 로앙가의 일을 전하면 안 되는가는 시릴이 따져 궁금해할 게 아니었다. 말단인 그는 위에서 시키는 것만 하는 데에도 벅찼으니까.
문제는 입을 열라는 아가씨 명령과 전하고 싶지 않은 한스의 의중 중, 어느 쪽을 따라야 하느냐는 점이었다.
‘명령을 따를 의무는 없긴 한데, 그래도 엘리아 아가씨는 예비 공작 부인이시잖아?’
한스 역시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은 탓에 시릴과 시선만 주고받았다. 두 사람이 망설이는 모습이 엘리아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갈등한다 이거지. 그럼 딱히 누가 입막음한 게 아닐 테니, 그대로 밀어붙이면 가능성 있겠구나.’
엘리아는 제대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문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소파에 앉았다. 커다란 방 안에 여럿의 기사와 두 보좌관을 두고 상석을 차지하려니 기분이 묘했다.
“한스.”
겨우 이름 부른 거로 남자가 몸을 움찔 떨었다. 이미 한 번 경험한 엘리아의 집요함이 떠오른 탓에 어쩔 수 없었다.
엘리아가 기민하게 그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점심에 저녁까지 걸렀더니 배가 고프네요. 씻고 나오면 당연히 준비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가서 다과라도 좀 가져와요.”
“예? 다과, 말입니까?”
“다과든 뭐든, 대강 끼니를 해결할 수만 있으면 돼요. 설마 라스페가에서 나를 굶길 생각은 아니겠죠?”
뻔뻔한 거짓말을 들은 한스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졌으니 멀쩡한 사람이라면 식사 생각이 날 리가 없었다.
‘공작님이라면 또 모를까. 나도 물 한 모금 입에 대기 겁나는데 아가씨는 어림도 없을 텐데.’
이건 분명 배고프다는 핑계로 한스를 쫓아내고선 시릴을 닦달할 속셈이리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옆에 얌전히 입 다물고 있던 시릴이 존재감을 뽐냈다.
“그럼 제가 나가서 아가씨 드실 만한 걸 챙겨 오겠습니다.”
시릴은 저라도 먼저 몸을 빼낼 생각이었다. 어차피 한스는 아무것도 못 들었다고 잡아떼면 될 테니까. 하지만 입 열기가 무섭게 엘리아의 논리에 가로막혔다.
“마음만 받을게요. 오늘 같은 날에는 당신처럼 처음 보는 사람에게 식사 준비를 맡기고 싶진 않아요.”
엘리아가 가볍게 시릴이 도망갈 퇴로를 차단하자, 한스는 한숨을 쉬고는 항복을 선언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드실 만한 걸 챙겨 오겠습니다.”
“한스 당신 몫이랑 여기 기사님들 몫까지 챙겨 와요. 시간이 좀 걸려도 상관없으니까.”
엘리아는 나간다는 한스의 등 뒤로 ‘괜히 일찍 돌아와서 방해할 생각 말라.’는 첨언까지 덧붙였다. 뒷일은 하늘과 시릴에게 맡기고 한스가 침실을 나섰다.
이제 남은 건 겨우 1년 차에 접어든 어린 보좌관, 그리고 익숙지 않은 일을 내내 겪어 피로한 백작가의 아가씨뿐이었다.
“시릴, 아까 질문의 대답을 못 들었는데.”
누구 흉내인지, 낯선 목소리가 부르는 이름에서 무게가 느껴졌다. 시릴은 긴장한 채로 대답을 짜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과 함께 백작가에 동행하였다가 잠시 돌아온 게 맞습니다. 간단한 상황 전달 목적인지라 바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그럼 그 상황 전달이란 거 나한테도 해요. 전부.”
“예?”
“한스 경에게 말한 것, 말하지 않은 것까지. 로앙가에서 보고 들은 것 전부 사실대로 이야기해요.”
“그건 한스…….”
“당신이 나를, 보좌관 아랫급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면요.”
퇴로를 막는 엘리아의 화법이 시릴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처음 얼굴 본 아가씨한테 협박까지 당할 줄이야.
‘힘든 일 겪어서 예민해지신 모양인데 이럴 때 내가 괜히 머리 써 봐야 악효과만 나지 않을까?’
시릴은 엘리아를 설득하느니 스스로를 설득하는 쪽을 택했다. 한스가 눈짓으로 당부한 게 있었지만, 어차피 아가씨도 다 알게 될 내용이지 않은가.
자신을 향한 설득은 어렵지 않았다. 붉은 기가 서린 아가씨의 눈을 바라보며 시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작께서 저택에 도착했을 때, 이미 로앙가의 사용인들이 자체적으로 사용인들을 구금한 상황이었습니다.”
“설마 로앙가에서도 독살 시도가 있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로앙가에서 저희가 도착하기 전에 사용인들을 구금한 건, 이번 독살 시도의 주동자들이 자살 시도를 하다 발각된 덕분이었습니다.”
엘리아는 배신자가 한 명이 아니었다는, 심지어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들었다는 말에 가운을 쥐어뜯었다.
시릴은 엘리아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설명을 이어 갔다.
“발각된 이들은 2층 담당 사용인 메리, 그리고 4층의 사용인 루아였다고 합니다. 추가 공모자는 파악 중이나, 일단 크라우제 후작 일파에게 회유되어 배신한 건 그 두 사람뿐인 걸로 추정됩니다.”
“그럼 그 두 사람이 발견된 시점은요?”
“저희 쪽, 그러니까 공작가에서 출발한 기사들이 도착하기 직전이었다고 합니다. 공작가에서 독이 발견되었을 즈음 자진을 시도했던 셈이지요.”
왜 엘리아가 떠난 직후가 아니었을까.
‘……기다렸겠지. 자신들의 죽음이 너무 성급하면 독이 쓰임을 다하기도 전에 발각될 테니까. 그렇다고 시간을 지체했다간 모진 고문을 당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았을 테고.’
엘리아는 자꾸만 떠오르는 메리의 얼굴, 루아의 목소리를 외면하려 노력했다.
감정을 최대한 죽여, 그들을 소설 속 끔찍한 범죄자들처럼 대해 보려고 했다.
‘시간이…… 사용인들이 교대할 무렵이었을 테니까, 별관을 순찰하던 기사가 먼저 발견했겠구나. 그리고 뒷수습은 데이지가 나섰겠지.’
엘리아도, 외젠도 자리를 비운 저택에 데이지라도 남아 있었으니 로앙가로서는 다행이었지만, 혼자 모진 일을 떠안았을 데이지 생각에 심장이 죄일 정도로 아팠다.
“그럼 그 두 사람 외에는 무사하다는 말인가요? 혹시 사용인 중에 저항하거나 탈주를 시도한 일은 없었고?”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은 제가 알기론 없었습니다.”
“……저항은 있었다는 거군요.”
시릴은 부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독살 시도 후 절차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할 공작가의 사용인들조차 기사들에게 제압되어 큰 부상을 입는 경우가 왕왕 있었으니까.
아무 일도 없길 바라는 건 기적을 비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은요. 로앙가의…… 혹시 오라버니도 만났나요?”
“예. 백작님께서는 공작님보다 한 시간 늦게 도착하셨고, 그분께 독살 시도가 벌어진 정황은 없었습니다.”
로앙 백작의 안부를 끝으로 시릴은 더는 저도 아는 일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에드문트가 떠난 지 이제 겨우 너덧 시간 지났으니 사태 파악과 안전을 확인한 것 이상의 성과를 바라는 건 무리였다.
‘2층의 메리도 공범이었는데 외젠에게 아무 일 없었다는 건……. 두 사람 다 에디만을 노렸다는 걸까.’
독살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엘리아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흐름이었다. 사용인을 둘이나 회유했으면서, 한 일이라곤 봉투에 독을 묻힌 것뿐이라니.
<이렇게, 아래로 잡으세요. 부서질 것 같더라고요.>
봉투를 떠올리며 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엘리아 아가씨, 좋은 꿈 꾸세요.>
기억도, 목소리도, 그들이 제게 건넨 끔찍한 기억도.
전부 부서지길 바라며. 손에서 떨쳐 낸 봉투처럼, 사라지기를 바라며.
* * *
엘리아는 시릴이 이야기를 전부 끝냈음에도 입을 다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뒤늦게 시릴도 엘리아가 가운을 세게 쥐어 가며 마음을 꾹꾹 다잡아 누르는 걸 눈치챘다.
‘뭐, 마음 안 좋기야 안 좋으시겠지. 처음 겪는 일이니 어려울 테고.’
시릴은 그런 엘리아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이 죽어 나가고, 하나뿐인 가족과 약혼자가 뒤처리를 하고 있다는데 마음이 편할 리 없잖은가.
‘괜찮으시냐고 물으면 별로 안 좋아하시겠지?’
눈치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시릴은 울 것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괜찮냐는 물음이 그리 도움 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하는 수 없이 멍청히 서서 자리만 지켰다. 힐끗거리며 아가씨 구경도 좀 하고.
‘처음에 봤을 땐 저 가운 때문인지 훨씬 더 연약해 보였는데.’
한스를 쫓아내고 꼬치꼬치 캐물을 때는 조금 놀랐다. 첫인상과는 달리 딱 자존감 높은 귀족처럼 굴었으니까.
지금은, 커다란 인형 하나를 앉혀 둔 것만 같았다. 어린애들 가지고 노는 사람 모양 인형 말고, 다 커서도 쉽게 떨치지 못하는 봉제 인형 말이다.
시릴이 느낀 엘리아의 인상이 그러했다.
‘게다가, 좀 외로워 보이네. 슬퍼 보인다고 해야 하나?’
정확한 단어를 찾기 어려웠는데, 시릴이 느낀 감정은 잊고 살았던 인형을 찾아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괜스레 죄책감을 몰고 오게 하던. 엘리아는 방치된 인형 같았다.
“시릴.”
한창 엘리아를 두고 잡생각을 하느라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놀라 눈만 끔뻑였다. 엘리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시릴, 다시 로앙가에 갈 건가요?”
“예, 예. 한스 경에게 마저 이야기를 전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저택에서 뭘 어쩌고 있는지도 전할 테죠?”
“아, 예. 실은 공작님과 로앙 백작께서 아가씨가 걱정되신다며 괜찮은지 소식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내 소식을 궁금해했다고요? 그쪽에서 혹시 내게 전하라는 말은 전혀 없었고요?”
“예, 딱히 없었습니다.”
별생각 없이 대꾸했는데 어쩐지 엘리아의 표정이 바짝 굳어졌다.
“그럼 이제 가면 뭐라고 전할 생각인가요?”
“어…… 잘 계신다고,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대꾸하고 나서야 제가 거짓말을 했음을 깨달았다. 엘리아의 말투가 아까와는 달리 날이 서려 있었다는 것도.
제 거짓말이 바로 들통났다는 것 역시 말이다.
“정말로요? 내가 에디가 떠난 후로 해 질 때까지 멍청히 앉아 있다가, 겨우 씻고 나와선 당신에게 로앙가 사정을 캐물으며 불안해했다는 이야기는 안 할 거라고요?”
“…….”
안 할 리가 있나. 시릴은 에드문트의 보좌관이었다. 당연히 한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부터 제가 보고 느낀 걸 그대로 전할 생각이었다. 지금 이렇게 제게 화내는 것까지 말이다.
애초에 시릴이 왜 굳이 공작가에 돌아왔겠는가? 두 명의 용의자가 자진을 시도했다느니 하는 진척 상황을 한스에게 전하러?
명령권자도 아닌 한스에게 상황을 알려 준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물론 한스야 공작이 혹시 착란 증세를 보이진 않았는가 궁금해하긴 했지만.
그건 시릴의 의무가 아닌, 한스의 개인적인 궁금증일 뿐이었다.
애초에 경과보고라는 말은 전부 핑계였다.
<시릴, 엘리아의 상태를 확인하고 오도록.>
시릴은 그저 엘리아가 괜찮은지 한스를 통해 확인하고 곧장 라스페 공작과 로앙 백작에게 돌아갈 예정이었다.
엘리아 역시 이미 그쯤은 눈치챘으리라.
“시릴, 당신은 본 것 들은 것 그대로 가서 공작에게 보고하겠죠. 엘리아 로앙 꼴이 형편없었다고.”
잘 지낸다고, 그러니 제발 험한 일 하는 와중에 제 걱정까지 하진 말라고 당부하고 싶었다.
협박이라도 해서 거짓말을 전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약속하지 않았던가.
<에디. 조금 서운한 일이 있어도, 내가 속상할 일이 있어도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러면 나 더 속상하게 될 거야.>
상대를 위한답시고 거짓말을 하진 않겠다고.
“밖에, 한스 경 도착했으면 들어오게 해요.”
엘리아가 시키는 대로 침실 문을 열자 복도에 한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다과 대신 고소한 향이 나는 유동식, 그리고 기사들 몫으로 챙겨 온 가벼운 요깃거리가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맛있겠네요. 앉아요, 둘 다.”
한스, 그리고 침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함께 식탁에 차려 낸 음식의 안전을 확인했다. 엘리아가 두 사람에 이어 삼키는 것도, 토해 내는 것도 쉬울 유동식을 한 수저 떴다.
“시릴은 공작가의 보좌관이 된 지 얼마나 됐죠?”
“이제 1년 조금 넘었습니다. 저, 저는 아직 준 남작 작위를 받지는 못하여서…… 말씀 편히 해 주십시오, 아가씨.”
“그래? 알았어. 평민이면 라스페 영지에 있는 학술원 출신인가?”
수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틈틈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주로 엘리아가 묻고, 시릴과 한스 중 한 명이 대답하는 일방적인 의사소통이었다.
“기사들은 호위 중엔 음식도 입에 대지 못하는 건가요?”
“예, 실은 규정이 그렇습니다.”
“아, 호위할 사람들이 독이라도 먹으면 곤란할 테니까? 알겠어요. 강요하진 않을게요. 시릴?”
“예, 아가씨.”
“당신은 호위도 아니잖아. 로앙가에 돌아가면 내내 굶어야 할 텐데. 뭐라도 좀 먹어.”
엘리아의 권유에 마지못해 시릴이 과일 하나를 베어 물었다. 한스도 제 몫으로 챙겨 온 음식을 꾸역꾸역 밀어 넣어야 했다.
불편한 자리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불평하는 법 없었다.
엘리아가 수저를 놓을 때까지, 모두 기다려 주었다.
* * *
“저는 이만 로앙가로 돌아가겠습니다.”
식사가 끝났음을 확인하고 시릴이 자리에서 일어나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아가씨께서 피곤해 보이셨지만 식사까지 하셨고, 한스 경과 대화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고 전하겠습니다.”
시릴은 제가 본 대로 에드문트에게 전하겠다고 했다. 내내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엘리아가,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가 정 걱정되거든 어서 일 마무리하고 돌아오라고도 전해 줘.”
“예,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에드문트의 침실을 꼭 제 응접실처럼 차지한 채, 엘리아가 시릴을 배웅했다.
당신의 연인이, 하나뿐인 가족이 걱정처럼 구석에 웅크리고선 엉엉 울고 있지는 않다고. 적어도 괜찮아 보려 노력은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 전해 주기를 바라며.
너른 소파에 앉아 여자가 복도로 나가고, 문이 닫혀 소리가 차단된 방 안에서 애써 발소리를 들어 보려 했다.
‘지금쯤이면 저택 밖으로 나갔을까.’
시간을 가늠해 보고는 창가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여자가 말에 올라 정원을 가로질러 떠나는 소리,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으니 대강 상상했다. 지금쯤 말에 올랐겠거니.
어둑한 밤길을 달릴 생각에 말이 잠시 주춤하겠지만, 멀찍이 보이는 어스름한 불빛을 향해 달려가겠지.
지금쯤이면 저택 밖으로 나갔겠지. 한 발씩 더 로앙가에 가까워지겠지.
“한스, 피곤해서 좀 누워야겠어요.”
한참 엘리아의 걱정을 하던 한스가 일단 저라도 일어나 ‘여기 사람 있소.’ 하고 티 낼까 고민하던 차였다.
시릴이 떠난 후 10여 분이 지난 뒤에야 엘리아가 인기척을 냈다.
누워야 한다는 소리를 반가워해야 할지, 아픈 징조인가 걱정해야 하는 건지.
‘젠장. 나는 결국 로앙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들은 게 없으니, 대체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 수가 있나. 설마 시릴이 눈치 없이 누가 죽었느니 하는 말을 전한 건 아니겠지?’
엘리아 아가씨를 두고 대체 어떻게 굴어야 할지 모르겠는 걸 보니 저도 라스페 공작이랑 닮아 가나 보다 하는 헛생각이 들었다.
“……바로 잠자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눕는다고 하셨으니 라스페 공작의 침대에서 주무시라 하면 되겠거니 했다. 약혼자끼리 침대 좀 나눠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은가.
그러나 아가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거절했다.
“누워 잘 생각 없으니 소파에나 적당히 챙겨 줘요. 탁자는 전부 치우고. 나는 좀 씻고 와야겠네요.”
엘리아가 지시를 내리고 몸을 일으키더니 벼락 맞은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먹은 건 환자식이나 다름없었는데,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위장이 쿡쿡 쑤신 탓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동안 치우고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나마 엘리아가 제 한심한 꼴에 짜증 내지 않은 건, 한스 역시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 덕분이었다.
엘리아는 그가 고맙기까지 했다. 엘리아 혼자 별나고 유약한 건 아님을 증명해 준 셈이니까.
혹은 한스도 엘리아와 동류라는 걸 증명해 준 걸지도 모르겠지만.
“한스, 가서 대충 덮을 것만 챙겨다 주고 이건 밖에 사용인들한테 치우라고 해요. 그리고 가서 토하고 와도 뭐라 안 할게요.”
거울처럼 똑같은 꼴을 하며 자신을 걱정해 주는 모습에 한스는 참으로 오랜만에 인류애를 실감했다.
비록 엘리아의 강권으로 먹은 늦은 식사 때문에 제가 이 꼴이 되긴 했지만.
한스는 아파도 제 의무는 다 마치겠다는 일념으로, 엘리아를 멀고 먼 욕실로 데려다준 후에야 침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행히 속을 게워 내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멎어 들었다.
‘후우…… 좀 살겠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엘리아에게 줄 담요와, 밤새 곁을 지키는 사이 읽을 만한 서류를 챙겨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한데 엘리아는 아직 욕실에 있는 건지, 침실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괜찮다고 하시긴 했는데 걱정되네. 설마 드신 것 다 게워 내다 쓰러지신 건 아니겠지?’
앉아서 기다리려니 소파의 빈자리가 못내 신경 쓰였다. 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 쪽으로 향했다.
옷 방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2번가 의상실을 방불케 하는 넓은 옷 방을 지나치자, 문이 열린 욕실이 보였다.
‘안에 계시나? 문은 왜 열어 둔 거지?’
보란 듯이 열어 놨으니 설마 탈의 중이진 않겠다 싶어 안을 흘끔 살폈다. 응접실이라 해도 좋을 화려한 장식 틈바구니에서 엘리아의 흔적을 좇았다.
“엘리아 님?”
“…….”
“엘리아 님! 안에 계십니까?”
분명 기사들 말로는 옷 방 쪽으로 들어갔다고 했는데, 욕실에는 엘리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숨바꼭질하듯 욕조 안이며 허리까지 오는 작은 장식장까지 뒤졌지만 어디에도 여자의 백금발이나 커다란 가운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대체 어디로 가신 거지?’
에드문트가 사라졌다면야 ‘또 말도 안 하고 어디 나가셨나 보네.’라고 생각했겠지만, 한스가 찾는 건 엘리아 로앙이었고 이곳은 라스페가의 저택이었다.
‘당장 기사들한테 알리고 수색이라도 해야 하나? 제기랄. 내가 한눈판 사이에 제 약혼자께서 사라졌다는 걸 공작이 알게 된다면……. 아니, 젠장.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한스는 사라진 엘리아를 두고 무한한 가능성에 직면했다.
‘설마 납치? 사용인들 다니는 통로로 다니다 길이라도 잃었나? 통로가 어디 있더라. 분명 옷 방에 집사가 다니는 길이 있다고 들었는데.’
손을 덜덜 떨며 욕실을 뛰쳐나와 옷 방으로 돌아왔다. 하필 빌어먹게 넓고, 벽을 따라 죽 진열대처럼 놓인 옷장도 환장하게 많았다.
‘갑자기 사라지다니 말이 안 되잖아. 기사들이 통로는 전부 다 감시하고 있는데…….’
정신없는 와중에 따져 보니, 아무래도 옷장 말고는 가능성이 없었다. 이성을 딱 절반 상실한 한스는 기사들한테 도움을 청할 정신도 없이 옷장을 벌컥 열었다.
“아가씨, 엘리아 아가씨?”
가지런히 걸린 옷 사이사이에 손을 뻗어 가며 엘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어릴 적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 잃어버렸을 때 하던 것처럼.
그가 막 세 번째 옷장 문을 열어 엘리아의 이름을 부를 때였다.
“대체 뭘 하는 거예요?”
“흐악!”
막 새하얀 셔츠가 가득한 옷장 안으로 손을 뻗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기겁한 한스가 손 뻗은 자세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뒤에서 그를 잡기 위해 손이 뻗어 왔지만, 효과는 없었다.
“아윽…….”
허둥지둥 중심을 잡으려던 한스나, 뒤에서 그를 잡아 주려던 사람이나 운동 신경이 바닥을 기는 처지였으니까.
결국 한스는 옷장 속 선반에 이마를 세게 찧고 말았다.
“아,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중심 좀 제대로 잡지 그랬어요.”
걱정하는 건지, 타박하는 건지 모를 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한스, 머리 깨진 거 아니죠? 피 나나 봐요.”
혀를 차며 제 이마를 살피겠다고 고개를 숙여 온 건, 옷장 안에 숨으셨나 애타게 찾던…….
“다행이네. 소리가 너무 커서 무슨 일 난 줄 알았는데. 한스 경 머리가 튼튼해서 그런지 멀쩡해 보이네요.”
엘리아 로앙이었다.
* * *
정신이 나간 것처럼 옷장 문을 열어젖히던 한스는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엘리아를 보고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정신 좀 차려요.”
“어디, 제가, 여기…….”
“어디 계셨느냐, 제가 찾았는데 왜 여기 계시면서 말도 안 했느냐?”
한스가 숨을 몰아쉬며 웅얼거리자 엘리아가 용케 그의 말을 해석해 보였다.
맞다 아니다 입으로 떠들 겨를도 없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갈아입을 만한 옷 찾는 중이었어요. 입을 만한 걸 못 찾아서 다시 이 가운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근데 그럼 왜 말씀, 대답을 안 하신 겁니까?”
“처음 들어왔을 때는 갑자기 뛰어 들어오길래 욕실이 급한 줄 알았고, 다시 나와서는 옷장 문을 열어 대기에 나랑 이름 똑같은 고양이라도 찾는 줄 알았죠.”
한스는 그제야 엘리아를 다급히 찾아 대는 제 모습을 돌이켜 보았다. 뒤늦은 부끄러움이 몰려와 남자를 어쩔 줄 모르게 했다.
손으로 수치에 젖은 얼굴을 가린 채 변명했다.
“그게, 제가 순간 놀라는 바람에.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 그래서…….”
“알아요. 농담한 거예요.”
“예?”
“한스에게 아는 척해 주는 걸 깜빡 잊었지 뭐예요. 옷장 뒤져 가며 사람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거든요.”
엘리아는 한스에게 뜻 모를 말을 하더니 옷 방 중앙으로 걸어갔다.
옷을 갈아입는 공간인 칸막이 뒤쪽으로 쏙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한스가 부리나케 일어나 뒤를 쫓았다.
칸막이 뒤에는 옷가지들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엘리아가 입을 만한 옷을 찾아 뒤진 흔적이었다.
‘전부 다 외출복이네. 로앙가에 찾아갈 생각이었던 걸까. 아니면 답답하다고 산책이라도 하고 싶으셨으려나.’
한스가 옷가지를 주워 올리는 사이, 엘리아는 뒤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전에는 그 허연 토끼 닮아 보이더니. 오늘은 꼭 고양이 같네.’
아까 엘리아가 저더러 ‘고양이 찾는 줄 알았다.’라고 한 말 때문일까?
젖살만 겨우 매달려 있는 마른 얼굴, 아래로 뻗은 가느다란 목선, 축 늘어진 소매 사이로 드러난 앙상한 팔목까지.
전부 앙상하게 마른 고양이를 연상케 했다.
“한스.”
“예. 예, 아가씨.”
“차라리 옆에 앉아요. 거기서 뚫어져라 보고 있을 거면.”
눈 감고 계셨으면서 쳐다보는 줄은 어찌 알았을까. 한스는 시키는 대로 나란히 놓인 의자에 앉았다.
옷 갈아입는 공간이라고 호위 기사도 없었고, 나란히 앉으니 시선마저 서로를 향하지 않게 되었다.
“조용하죠? 보는 눈도 없고. 혼자 있는 것 같고.”
“그렇군요.”
“밖엔 너무 눈이 많잖아요. 친척 집에 홀로 맡겨진 어린애가 된 기분이더라고요.”
한스는 엘리아의 표현에 대답을 주저했다. 뒤늦은 깨달음 탓이었다.
‘친척 집에 홀로…… 그러고 보면, 라스페 공작가는 아가씨한테 약혼자의 가문일 뿐이니 불편했겠구나.’
명분은 보호였으나, 완전히 남도 아니며 그렇다고 제 사람도 아닌 이들의 흘끔거리는 시선이 편했을 리 없었다.
미처 배려하지 못했다고 사과를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엘리아는 사과를 받는 것보다는 다른 데에 관심이 있어 보였다.
“평소에도 오늘처럼 침실 안에 바글바글해요?”
“호위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최근…….”
한스는 엘리아의 질문에 대꾸하려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휴우. 나도 모르게 라스페 공작이 돌아 버린 후부터 내부 호위까지 한다고 지껄일 뻔했잖아?’
아무래도 엘리아를 찾는다고 한바탕 난리를 친 탓에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그는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호위 관련 일은 아무리 엘리아 아가씨라고 하더라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까 기사들한테 물어보니까, 근래 내부 호위하는 일이 늘었다고 하던데요.”
“……3황자 측 공세가 거세질 테니까요. 예방 차원에서 호위를 늘려 가고 있습니다.”
“한스.”
“예?”
“동지를 만나서 기뻐요. 나도 늦은 밤에 잘 체하고, 거짓말 참 못한다는 소리 자주 듣거든요.”
“비난을 굉장히 고상하게 하시는군요.”
“나도 당신이랑 똑같단 소리였는데 그게 비난이에요?”
다행히 엘리아는 한스가 3황자 핑계를 대며 거짓말을 한 걸 눈치챘으면서 사실을 말하라 추궁하지는 않았다.
‘배려해 주시는 거려나. 적어도 지금은…… 같은 처지이니까.’
여자와 같은 시선에서, 떠나는 남자를 바라보았던 몇 시간 전을 떠올렸다. 그땐 몰랐는데, 알고 보니 엘리아처럼 저도 이곳에 남겨지고 만 셈이었다.
<시릴, 공작님께서는 어떠신가. 혹시 불안해 보이신다거나…… 그런 거 없었나?>
<공작님은 도착하시자마자 바로 심문하러 들어가셔서 그 이후 상황은 저도 모릅니다.>
<그럼…… 아니, 알겠네. 다른 건 요구하신 거 없으시고?>
<예, 로앙 백작께서 엘리아 님 일로 많이 불안해하셔서 제게 아가씨께서 잘 계신지, 그것만 확인하고 오라 하셨습니다.>
<…….>
<한스 님, 공작님께선 괜찮으실 겁니다. 벨젠 경도 있고, 또 조제프 경도 함께 있을 테니까요. 걱정하지 마시고 그냥 모처럼 휴식 시간이라 생각하고 계십시오.>
시릴은 전전긍긍하는 한스에게 잠깐이라도 잊어 보라 했지만, 가능할 리 없었다.
오늘만 해도, 눈으로 보았잖은가. 집사가 쓰러질 때 바짝 굳어 버리던 에드문트의 모습을. 처음 품에 안아 본 여자를 스스로에게서 끊어 내어 뒤돌아 떠나던 모습을.
‘괜찮을 리가 없을 텐데.’
아마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에디. 나도, 나도 데려가. 내가 가야…….>
혼자 남아야 했던 어린 아가씨의 심정이.
<친척 집에 홀로 맡겨진 어린애가 된 기분이더라고요.>
결국 체념하고 혼자 남겨진 심정이,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조잘대던 엘리아가 어느새 입을 다물었다. 한스는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혼자 남겨졌음을 자각하고, 걱정하고, 체념할 시간을.
괜찮지 않을 엘리아에게 괜찮으시냐며 확인을 구하려고 했는데.
혹시 체하지 않았느냐, 저는 결국 바보같이 체하고 말았더라. 그래도 배려해 주신 덕에 많이 좋아졌다…….
‘말을 하려고 했는데. 하지 않는 게 낫겠지.’
다음을 기약하고는 잠시나마 각자의 시간을 영위했다. 시선이 맞닿지 않으니 혼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기다림의 시간만 남아 외로울 이들을 깊은 밤으로 이끌었다.
* * *
“한스, 두 명이었대요.”
잠시 후, 엘리아의 목소리가 한스를 불러냈다. 한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반응했다.
“로앙가의 배신자 말에요. 에디가 갔을 때 이미 ‘우리가 배신자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지 알아서 죽으려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마치 책을 읽어 주는 듯한 목소리였다.
<한스, 그 책 봤어요? 범인이 두 사람이지 뭐예요?>
죽음을 말하는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단조로웠다.
‘죽음에 대해서…… 공포심을 가지고 있던 거 아니었나?’
한스는 그 이질감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지만, 엘리아의 말이 틈을 주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한 명은 내가 에디한테 말했던 4층 사용인 루아였고, 다른 한 명은 2층 사용인 메리였고.”
“아가씨께서 잘 아는 사용인이었습니까?”
“둘 다 일한 지 5년이 넘었으니까요.”
“그렇군요.”
한스의 단조로운 대답을 마지막으로, 엘리아는 마치 읽던 책으로 돌아가듯 관심을 끊었다.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 화를 입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는 한스가 말문을 열었다.
머릿속에서 내내 쓴, ‘엘리아 아가씨에게’라고 시작해서 ‘한스 마이어로부터’로 끝나는 위로와 격려의 편지글을 낭독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두 명을 배신하게 하는 일은 라스페가에서도 시도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발각될 확률이 극악으로 높아지니까요.”
“하지만 만일 성공한다면, 목적을 이룰 가능성도 극악으로 높아질 테니 그 점을 기대했겠지요.”
“예, 특히나 황실에서 3황자를 제1 계승권자로 인정하려는 상황에서 공작님이나 아가씨가 다치셨다면 문제가 심각했을 겁니다. 다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한스가 위로하겠답시고 끄적댄 말에 엘리아는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위로, 격려, 동정…… 그런 지루한 부분은 빠르게 넘어가 버리고, 엘리아는 제가 원하는 구절을 찾아 읽고자 했다.
“집사는요?”
한스는 대꾸가 없었고, 엘리아는 질문을 반복했다.
“한스, 쓰러진 집사는요. 살펴보고 온 거 아니었어요? 나는 그러라고 한스더러 나가 보라고 했던 거였는데.”
“그, 생각을 못 했습니다. 아마, 괜찮을 겁니다. 괜찮겠지요.”
괜찮을 거라는 말 속에는 변명이 있었고, 그에 선행하는 죄책감이 있었다.
‘아가씨 신경 쓰느라 경황이 없었다는 건 변명이겠지. 원하면 얼마든지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을 테니까. 결국, 나도 무서워서 도망쳤던 거야.’
엘리아는 재촉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려 주나 싶더니 별안간 몸을 일으켰다. 예고 없던 움직임에 놀란 한스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가죠. 둘이서 궁상떨려니 지루하네요.”
가운 자락이 바닥에 질질 끌리도록 내버려 둔 채, 엘리아는 침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소파에 놓인 담요를 밀어내고 자리에 앉고 나서야 한스를 돌아보았다.
“한스, 따듯한 차 한 잔 가져다주겠어요?”
늦은 밤 갑작스레 요구한 차 한 잔에 어떤 의도가 있었겠는가.
“예, 아가씨. 다녀오겠습니다.”
“천천히 다녀와요. 나는 에디 침실 구경이나 마저 할 테니까.”
옷 방을 한참 뒤져 보았지만 결국 커다란 가운 차림으로 남겨진 아가씨의 배웅을 받으며, 한스가 침실을 나섰다.
복도를 지키는 병사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으니 한스의 발걸음은 눈 내린 들판에 찍힌 최초의 발자국 같았다.
향하는 길은 흩날리는 눈에 가려져, 기댈 곳 하나 없었다.
다만 돌아가는 길에는 발자국이 저를 기다려 주리라 믿었다.
돌아갈 때를 그리며 찍어 둔 흔적을 따라 걸어야지.
‘서둘러야지.’
한스는 제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잊어버리고선, 그저 목적지를 찍고 돌아올 생각에만 급급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남겨 둔 발자국을 더듬어 돌아가야지. 다녀왔다는 인사를 드려야지. 그러곤 함께 기다려야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
그저 무사히 돌아오시기만을, 무력함과 함께 기다려야지.
* * *
잠시 후. 문고리가 덜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여자의 몸이 움직였다. 마른 나뭇가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조급한 모양새였다.
“아…….”
동그랗게 떠진 눈에 곳곳에 켜 둔 초가 담겨 반짝반짝 빛났다.
누군가는 그 눈동자를 보며 가을꽃을 떠올렸겠지만, 한스는 희미한 별빛을 떠올렸다.
별관에 가던 길, 맑은 밤하늘에 반짝이던 별빛을.
“한스, 다녀왔군요.”
기대감이 확인을 지나 실망으로 바뀌고, 이내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 다녀왔습니다.”
기대하던 사람이 아님에 실망했을 아가씨에게 모른 척 대꾸해 주었다. 그러곤, 닫힌 문을 뒤로한 채 자리를 지켰다.
물어보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스는 돌아오는 내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해 두었다.
별빛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남겨 두었던 발자국을 되짚으며.
엘리아 님, 배려해 주신 덕분에 별관에 다녀왔습니다. 의원이 말하기로 집사는 늦지 않게 해독 조치를 한 덕분에…….
<몸이 많이 쇠약해지셔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집사님께서도 잘 버텨 주시길 바랄 수밖에요.>
……괜찮을 거라고 합니다.
<팔이라도 성하셨으면 괜찮으셨을 텐데, 대체 어쩌다 난 상처랍니까? 한스 경, 아는 거 없습니까? 왜 집사님이 이렇게나 심한 상처를 그냥 내버려 두었느냔 말입니다.>
준비한 말을 하려고 했는데. 해야 했는데.
“한스, 억지로 그럴 필요 없어요.”
“…….”
“거짓말을 할 거면 그냥 말하지 말아요. 안 물어볼 테니까.”
“죄송합니다. 그게 저…….”
한스는, 용서를 구했다.
“차를 준비해 놓고는 깜박하고 올라왔지 뭡니까.”
죄를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이 행위가,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기를 바라며.
“죄송합니다, 아가씨.”
너무 아파하지는 마시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