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만약에 : 남겨진 사람들
비가 내렸다. 시작은 며칠 전부터였으며, 파란 하늘 본 지가 까마득할 정도로 그칠 기미 없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죽은 엘리아 로앙과 에드문트 라스페의 관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하늘에서부터 내달려 와 유려한 조각으로 장식한 관의 표면을 치받고, 빗방울이 부서진 자리에 또 다른 빗방울이 머리를 처박아 가면서.
어느 한 군데 마른 곳 없이 빼곡히 적셔 냈다.
엘리아와 같은 사고에 휘말렸던 마부, 그리고 함께 타고 있던 다른 사용인들의 관 위에도 비가 내렸다.
평등함은 마치 죽음과 같아, 나란히 누운 세 개의 관도 흠뻑 젖어 들었다.
죽은 자를 깨워 보려는 듯, 다소 거센 빗줄기가 관을 쉼 없이 두들겼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빗소리만 요란했다.
“엘리아 님께서, 저희 상점의 화구를 정말 좋아하셨습니다. 결혼하시고 난 뒤에도 직접 찾아오시곤 하셨지요.”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생각나더라며 공작가 저택에 초대해 주셨는데……. 저희 모두, 다시는 엘리아 님께서 좋아하시는 음악은 기쁜 마음으로 연주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엘리아 님께서…….”
“마님께서…….”
“참으로 좋은 분이셨는데…….”
마지막 가는 길을 보겠다며 참 많은 이들이 찾아왔거늘 어째 와 줘서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않는 건지.
딱딱한 관 안에서 빗소리를 감상하느라 바쁜 걸까. 아니면 마침내 찾아온 죽음에 깊이 잠들고 말았는지.
비 내리는 소리뿐이었다. 눈물 흘리는 소리조차 집어삼키는 세찬, 빗소리만 요란했다.
‘비가 그칠 생각을 않네.’
라스페 공작의 보좌관, 한스 마이어도 공작가 소유의 너른 초원에서 비를 맞았다.
둘씩 짝지어 안치한 네 개의 관을 바라보며 본 적 없는 20년 전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한스는 20년 전, 이 비 오는 들판에서 선대 로앙 백작 부부와 라스페 공작 부부의 장례식이 치러졌음을 알고 있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에 에드문트 라스페, 당신이 서 있었을까. 당신의 아내가 될 어린아이가 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당신 부모 가는 길을 배웅했으려나.’
하면 당신도 허무했을까.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까.
한스는 열두 살이었을 에드문트의 모습, 그리고 일곱 살…… 혹은 여덟 살쯤 되었을 엘리아의 모습도 상상해 보려고 했다.
엘리아는 아마 지금 내리는 비처럼 울었으리라. 그 어린 나이에도 부모를 잃은 상실감을 깊이 느끼는 바람에.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을 에드문트는…….
‘울었을 리는 없지. 이혼하고 떠난 아내가 사지가 찢겨 돌아왔을 때도 당신은 눈물 보이지 않았으니.’
울지 않는 대신 죽어 버렸지.
여자의 시신 아래에 새빨간 꽃을 바치고. 또 조각처럼 아름다운 시체를 제물로 바치고.
혹여 부족할까 봐 검 한 자루까지 제 몸에 박아 넣었지.
‘죽을 거라고, 에드문트 라스페라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인간이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는데.’
에드문트의 시신을 가장 먼저 목격한 건 한스 마이어였다. 공작의 곁에서 무려 14년을 버텼던 그가 에드문트의 죽음을 목도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던가.
예상한 적 없는 죽음을 목도한 공포, 반복된 상실로 인한 좌절, 혼란…… 그리고 의문.
대체 왜. 당신마저 죽어 버린 건지. 언제부터 그렇게 사랑했다고.
‘제기랄, 잃어버려서 죽을 정도였으면 말을 했어야지. 잃고 아파할 줄 아는 인간이었으면, 진작 붙잡았어야 할 거 아닙니까. 제발 떠나지 말라고, 실은 사랑했노라고 말을 하기는 했습니까?’
만일 뒤이어 석실에 들어온 이들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한스가 홀로 에드문트가 엘리아를 추모한 결과를 목도했다면.
어쩌면 그 역시 검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충동에 휩쓸려 아무렇게나 검을 휘두르고 이미 숨이 끊어진 이를 향해 욕을 퍼부었을지도 모르겠다.
한데, 에드문트의 죽음을 보고 사람들이 뭐라 했던가.
<한스 경, 경! 괜찮으십니까? 맙소사. 공작께서……!>
<대체, 대체 누가 이렇게 끔찍한 짓을…….>
<아직 근처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당장 수색을 할 테니 한스 경도 여길 당장 나가십시오, 한스 경!>
다들 뭐라 떠들었던가.
<분명 3황자파 잔당들 소행일 겁니다.>
<예, 아무리 라스페 공작이라 해도 아내의 죽음에는 충격을 받아 빈틈이 생길 거라고 기대한 모양입니다.>
살해당했다고 생각하더라.
누구도, 에드문트 라스페가 엘리아 로앙을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 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더라.
사람들은 있을 리 없는 침입자를 찾겠다고, 에드문트가 스스로에게 박아 넣은 검을 빼앗아 어디론가 가져가 버렸다.
한스 마이어는 그렇게 남겨지고 말았다. 시체에 불과해져 누구도 관심 두지 않는 공작의 시신과 함께 한참이나 방치되어 있어야 했다.
하여 한스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곧장 새하얗게 탈색된 그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 * *
에드문트 님.
부디 당신의 죽음을 두고 모두가 오해했음에 억울해하지는 마시길. 전부 당신 업보였으니까요.
당신이 라스페 공작이셨으며, 악마라고까지 불리는 잔혹함을 일삼고도 감정 한번 내비치지를 않았잖습니까.
하여 에드문트 라스페의 죽음이 슬픔이 자초한 비극이라고 여길 줄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라스페 공작이 자진이라니, 당치 않다. 분명 살아남은 잔당의 소행일 터인데! 작위를 계승할 후계를 찾는 일과 별개로 죄인을 찾아낼 때까지 조사단을 해체하지 않을 터이니, 계속 보고 올리거라.>
당신이 황제로 옹립한 사촌 누이조차 우리에게 ‘살인자’를 찾으라 독촉하시었고, 공석이 된 라스페 공작 대신 장례를 주관하시는 동안에도…….
에드문트 라스페의 사인이 자살로 결론 난 데에 대해 의구심을 품으셨습니다.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요.
심지어 당신이 그렇게나 사랑한 여자도, 만일 대답할 수 있다면 그럴 리 없다 부정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나는 확신하기를…….
<한스 경, 잘 있어. 원망하고 싶으면 원망하고, 비난하고 싶으면 비난해도 좋아. 떠나는 나를 향해 욕을 퍼부어.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믿어 주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분명 나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에드문트 라스페의 죽음에 슬퍼한 사람 말입니다.
안타까워한 사람이야 있었겠지요. 당신은 퍽 잘난 인간이었고, 누구나 선망하는 삶을 사는 듯 보였으니까.
하나 슬퍼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조차도요. 내가 왜 당신 죽은 거로 슬퍼했겠습니까.
“빌어먹을…….”
슬프지 않았습니다. 원망만 했습니다. 죽은 당신을 다시 지옥에서 끌어와서 검을 꽂아 넣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면전에 배신감을 토해 모욕을 준 다음 어떻게든 상처 입히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당신이 살아 돌아와야 하니, 나는 당신이…… 살아나 주기를 바랐습니다.
모두가 당신의 죽음을 수용하는 동안 나는 점점 섭리를 역행하여, 당신의 죽음을 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가 어땠을지는, 아마 짐작하시겠지요.
당신을 죽인 사람을 찾으라는 황명에도 나는, 멍청하게 앉아 석실을 지켰습니다. 누구도 감히 지우거나 할 엄두를 내지 못한 핏자국 앞에서 멍하니 그날을 생각했습니다.
또 장례를 준비하며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는 귀에 담지도 않고 저택 복도를 배회하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저택 복도에 엘리아 님께서 걸어 둔 그림이 남아 있던 덕분에…….
<한스 경, 잠깐 시간 되면 여기로 오겠어? 보여 줄 게 있어.>
<무슨 일이십니까.>
<이거 봐. 어제 그린 거야. 에드문트가 작년에 북부에 다녀오겠다는 이야기 들었을 때 생각나서 시작한 그림이었는데 이제야 완성한 거 있지?>
<마님께서 북부 풍경을 그리셨다고요?>
<뭐야, 가 본 적도 없으면서 그렸다니까 웃겨? 그럼 풍경화라고 않고 상상화라고 하지 뭐. 한스 경이 그때 같이 다녀왔으니까 감상 좀 얘기해 줘. 조금이라도 실제와 닮았는지.>
목소리를 떠올리고, 추억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있잖아, 한스 경. 북부에서 말이야, 혹시 에드문트에게…… 안 좋은 일은 없었어? 만약 그가 별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남은 곳이라면, 이 그림은 그냥 팔아 버릴까 싶어서.>
한데 먼저 죽은 마님 목소리를 떠올리자니, 에드문트 님 당신에게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더군요.
<나는, 라스페 공작가에서 엘리아라는 사람은 여기 복도에 걸어 둔 그림 같아. 걸어 둔 뒤에 잊어버리고 마는 그림 한 점. 그러다 누군가 예고 없이 걸음을 멈추어 살펴봐 주면…….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알아? 착각하고 말아.>
<착각…… 요?>
<혹시 나를 좋아해 주려나. 내가 긴 시간 벽에 걸려 있었는데, 드디어 당신의 눈에 띄어 의미 있게 되는가. 그런 착각을 하게 돼.>
착각이라고 여겨 결국 사랑을 체념하고 만 여자의 목소리가, 돌이켜 보니 너무나도 외롭게 들려서 말입니다.
대체 왜 그분을 그리 외롭게 방치했나, 스스로를 걸어 둔 그림 취급하게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과거의 저 자신에게도 화가 치밀어 벌을 받고 싶은 심경이 들더군요.
한데, 더 고통스러운 점이 뭐였는 줄 아십니까?
“한스 님,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이게 대체 무슨 꼴입니까. 이러다 당신도 큰일 나겠습니다.”
죄를 지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는데 용서 구할 사람을 잃었다는, 그 점을 자각하고 나니 정말 미치겠더군요.
에드문트 님, 당신도 나와 같았을까요.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 말 한 번 못 한 여자를 잃은 당신과, 10여 년간 모셔 왔던 두 명의 주인을 동시에 잃은 내가.
우리의 심정이. 같았을까요?
“벌을…….”
“예?”
“벌을 받고 싶으셨는지. 아니면, 무슨 감정이셨을지.”
“…….”
“10년을 넘게 곁을 지켰는데, 제기랄. 모르겠다고. 대체 무슨 생각이셨는지…….”
함께 보낸 세월이 참으로 아깝게도, 저는 엘리아 님의 시신 앞에 선 당신이 어떤 심경이었을지 짐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다만 상상하기를…….
말로 다 표현 못 할 상실감이, 아픔이. 지독한 감정이 만약 나와 다르지 않았다면.
당신의 선택은 아마도, 스스로에 대한 징벌이었겠지요.
영영 떠나보낸 사람 앞에서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고 말았겠지요.
아주 지독한, 벌을.
* * *
장례식이 끝나고, 하루가 더 지나고 나서야 비가 그쳤다.
한스 마이어는 주인 잃은 라스페 공작가의 ‘임시 대리인’이라는 괴상한 직책을 맡아 손님을 맞이했다.
엘리아의 시신을 가져가고자 찾아온 로앙가의 사람들이었다.
라스페 공작가와 로앙 백작가는 가신들이 서로의 가문을 왕래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으니, 찾아온 이들은 하나같이 낯선 사람들뿐이었다.
그나마 딱 한 사람, 백작가에서 엘리아의 호위를 맡았다던 기사 한 명이 눈에 익었다.
“엘리아 님께서 지내시던 방으로 안내하도록.”
“예? 주인마님께서 쓰시던 방 말입니까.”
“백작님께서, 그분의 흔적은 단 하나도 공작가에 남겨 두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그리고 경고하건대.”
한쪽 눈의 핏줄이 터져 있는 테오 경은 라스페가 집사의 반문을 듣더니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언사를 주의하도록. 라스페 공작가는 자격이 없으니, 한 번만 더 엘리아 님께 더러운 호칭 갖다 붙였다가는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1주일 전까지만 해도, 엘리아는 집사를 비롯한 모든 공작가 사람들에게 주인마님이셨거늘.
로앙가에서 온 기사는 그들에게 바뀐 호칭에 적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실례했습니다. 유의하지요.”
‘마님’이라는 호칭을 들먹이는 바람에 죄인이 된 집사가 방문객을 2층 침실로 안내했고, 한스가 그 뒤를 따라갔다.
침실 문이 열리자마자 로앙가 사람들은 부지런히 엘리아가 사용했음 직한 물건들을 찾아 챙겼다.
즐겨 입던 실내복, 늘 곁에 두고 읽던 책, 로앙가에서 챙겨 온 자잘한 소지품들…….
끝도 없이 쏟아졌다. 끝도 없이.
한스가 그 광경을 보고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이렇게나 많이 두고 가셨을 줄은 몰랐네.’
마치 곧 돌아올 사람처럼, 당장 몇 달 여행 떠났다가 돌아올 사람처럼 엘리아는 자신의 짐 상당수를 공작가에 그대로 두었더라.
전부, 외로웠을 결혼 생활과 함께 다 버리고 가고 싶었던 걸까.
혹은, 다른 뜻이 있었던 건 아닐까?
8년을 알고 지낸 엘리아보다는 14년을 곁에서 지켜본 에드문트에게 마음이 더 기울고야 말아서, 한스는 누구에게도 동의받지 못할 생각을 떠올렸다.
‘어쩌면 엘리아 님께서…… 에드문트 님을 영영 떠나갈 생각은 없었던 게 아닐까.’
아마 착각이리라 자조하면서도.
“복도를 비롯하여 다른 방도 전부 확인해야겠군. 다들 엘리아 님의 서명이 있는 그림은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싣도록.”
하나하나에 사연을 담아 그렸을 수십 점의 그림들, 아직 지나지 않은 계절을 위해 미리 맞춰 둔 옷, 엘리아조차 가지고 있었던 줄 몰랐을 펜이며 빈 편지지…….
그리고 ‘주인마님’이라는 호칭까지.
전부 떠나 버리는 광경을 바라보며, 한스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자신의 마음도 모두 로앙가로 떠나는 마차에 실어 보내고자 했다.
‘드디어, 떠나시는군요. 전부 다 가져가 버리십시오.’
관을 실은 커다란 마차를 바라보며, 뒤늦게 이별을 고했다.
‘혹시 말입니다. 죽은 사람들 모여 사는 곳이 있다면. 그래서 두 분 같은 곳에 가시고야 말았다면. 만나지 마십시오. 다시는, 만나지 마십시오. 두 분 서로 상처만 됩니다.’
사랑하지 마십시오. 이름도 곱씹지 마시고, 같은 세상에 다시 태어나시지도 마십시오.
나도. 나도 더는 당신들 만나지 않으렵니다. 이렇게 영영 이별을 고하고 말렵니다.
죽어 버린 당신들, 다신 내 삶에 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살아서도. 죽은 뒤에도.
우리 다시는,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고 그리워하고. 그런 아무런 의미 없을 짓은 하지 맙시다.
* * *
장례가 끝난 후, 라스페가의 공작 작위를 이은 건 에드문트의 먼 친척이었다.
<나더러, 라스페가를 이으란 말인가. 내가 그자를 태어나 단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건 알고 있는가?>
<예. 달리, 그게…….>
<다 죽었던가?>
<……당신께서, 유일하십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라스페가가 멸문하기를 원치 않으셔 어떻게든 작위를 이을 사람을 구하려 하실 테고요.>
대부분 정쟁에 휘말려, 혹은 에드문트의 손에 죽어 버린지라 각고의 노력 끝에 찾아낸 ‘새 공작 후보’는 사실상 에드문트와는 친척이라 하기 민망할 정도의 사이였다.
황제의 앞에 충성을 맹세하고, 몇 가지 서류에 서명하는 간소한 절차만으로 그는 라스페 공작이 되었다.
<한스 경, 내 공작 노릇에 수도 생활에까지 무지하니 자네가 내 보좌관으로서 옆에서 힘써 주게.>
본래대로라면 겨우 남작 자리나 물려받았을 여자는 공작이 되고도 그다지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렇다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운을 버거워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먼저 이쪽 저택 수리 계획서부터…….>
<저택은 수리 없이 그대로 두지. 딱히 거슬리는 게 없으니.>
새 주인을 맞이해 대공사를 계획했지만 공작의 말 한마디에 전부 무산되었다.
하는 수 없이 내부 장식은 그대로 살리되, ‘선대 공작 마님’의 그림을 떼어 자국이 남은 부분만 새 액자로 가려 두었다.
<공작님, 전부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해도 주인이 바뀌고도 사용인 한 명 교체 없이 고용하는 일은 전례가 없습니다.>
<어차피 대다수 사용인이 5년도 채 되지 않았던데. 그 정도면 새로 뽑은 거나 다름없지.>
주인이 바뀌면 으레 사용인들도 갈아 치우는 계 관례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공작은 원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일할 수 있게 해 주기도 했다.
사용인들은 새 공작님께서 보이신 관대함에 매우 감격했으나, 한스가 보기엔 그건 윗사람이 보이는 아량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저 무관심이었을 뿐.
한스 마이어는 그 점이 참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조금, 에드문트 님과 닮은 것 같기도 하네.’
잠시 스쳐 갈 뿐이었던 감상은, 조금씩…… 여자의 곁을 지키면서 더욱 세를 불리고 말았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사소한 습관, 피상적인 단어로만 존재하는 무의미한 공통점이 자꾸 한스의 머릿속에 갇혀 빠져나갈 줄을 몰랐다.
‘이래서 사람들이 피가 무섭다고 하는 걸까. 조금이나마 에드문트 님과 피 섞인 분이라서……. 그래서 닮은 구석이 자꾸 보이는 거려나?’
언제부터였던가. 아마 한스가 기억을 되짚어 본다면 금방 알아챌 수 있었으리라.
처음 본 순간부터였다는 걸.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먼 친척인 그에게서 에드문트의 흔적을 집요하게 찾아 헤맸음을.
하나 한스는 자신의 행동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자각하지를 못했다.
“한스 경.”
“예, 공작님.”
“……그거 아는가? 자넨 늘 내 속에서 죽은 사람을 보려 해.”
하여, 어느 날. 공작의 조용한 지적을 들은 한스는 수치를 느꼈다.
이미 진즉 떠나보냈어야 할 사람을 내내 그리워했음을 뒤늦게 깨닫자니 죽을 만큼 창피했다.
* * *
며칠 후, 한스는 라스페 공작의 보좌관직을 그만두었다.
“……한스, 자네가 떠나길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어.”
공작가를 나가겠다는, 그 단순한 말을 수십 장에 걸쳐 써낸 한스의 사직서를 두고, 한스의 ‘새 공작님’께서는 한참 뒤에야 말문을 열었다.
“예, 공작님. 알고 있습니다.”
그간 눈치 하나로 보좌관 자리를 지켜 온 한스 마이어가, 죽은 사람은 그만 잊고 저를 봐 달라는 말이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한스는 여자의 눈빛을 보고도, 말 못 한 심경을 읽었음에도 라스페가를 떠나겠다 말했다.
“자네 말대로 할 걸 그랬어.”
“어떤 일 말씀이십니까.”
“저택을 수리하고, 사람들을 다 갈아 치우고. 그럴 걸 그랬어. 그랬다면, 자네가 금방 잊을 수 있었을지도.”
“……아마,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결국, 한스는 어떻게든 남은 흔적을 찾아다녔을 테니까. 어느 창고 방에 수북이 쌓인 먼지를 두고도 혹시 두 분 살아 계실 적 흔적이 아닌가 하고 욕심냈으리라.
“죄송합니다.”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한스는 기억 속 모습과 다르지 않은 저택을 떠났다.
에드문트가 엘리아를 따라 죽은 지 딱 4년째 되던 날이었다.
공작가를 떠나는 한스의 짐은 무척 단출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 옷으로 멋 부리던 남자는 이제 유행보다는 격식 차리는 옷이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고, 누군가와 애틋한 사랑이 시작되기를 꿈꾸기에는 너무 지친 뒤였으니까.
그래서 옷 몇 벌과 처음 공작가 봉급을 받아 구매했던 펜대, 죽은 집사가 제게 남긴 유품. 그게 전부였다.
다른 것들은 전부 두고 와 버렸다.
잠시 동했던, 마음까지도.
가방 몇 개로도 충분한 짐을 챙겨 한스는 4번가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한 달에 겨우 서너 일 머물던 터라 늘 그렇듯 뽀얀 먼지가 쌓여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창문을 열고 청소 도구부터 꺼냈다. 청소만큼 상념을 떨쳐 내기 좋은 일이 없으니까.
계절에 맞지 않는 침구는 전부 걷어 내고.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는 먼지를 쓸어 담고.
청소는 한참을 해도 끝날 기미가 없었다.
‘아으으. 죽겠네, 책상물림 십몇 년 했다고 몸이 다 굳었나. 좀 움직이라는 기사들 잔소리 좀 들을 걸 그랬지.’
잠시 뻐근해진 허리를 곧게 폈을 때였다.
눈앞에 그림 한 점이 불쑥 들어왔다.
하필 벽지와 비슷한 색의 액자라서 뒤늦게 위화감을 느끼고 말았다.
<이거 가져가, 한스. 여기 앉아 있는 작은 새 말이야. 그리다 보니까 당신이랑 닮은 것 같더라고.>
그건, 엘리아가 ‘언젠가 남부에서 보았던 풍경’이라며 그려 준 풍경화였다.
걸어 두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는데. 내내 저택 안에서 찾아 헤맨 흔적이……. 제집에 남아 있었을 줄이야.
한스는 저도 모르게 먼지 쌓인 그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흠칫 놀라선 닿기 직전까지 가까워졌던 손을 거두고 말았다.
<라스페 공작가에서 엘리아라는 사람은 여기 복도에 걸어 둔 그림 같아.>
너 역시, 나를 잊고 말았구나. 방치해 두었구나.
그런 비난을 닮은 목소리에 한스는 밀려났다. 거부당하고 말았다.
‘아니, 그럴 리가요. 제가…….’
벽에 걸어 둔 그림처럼, 소중히 여겨 줄 것처럼 소유하고는 잊지 않았느냐고 책망하는 환청에 한스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피가 흐를 지경이 될 때까지 입술을 짓씹고, 닿지 못한 손으로 제 옷자락을 쥐어뜯어 댔다.
그리고 먼지가 떠다니는 방에서 수도 없이 되뇌었다. 잊었다니요.
“내가 어떻게, 어떻게 당신들을 잊었겠습니까.”
잊어 보겠다고 지껄였으나, 잊으려 해도 차마 잊히지 않아서 내내 그리워했다고.
작은 액자를 벽에서 내려 소복한 먼지 닦을 새도 없이 끌어안고서 고백했다.
차마 손 뻗을 수조차 없었던 두 사람의 시신을 대하듯 몇 번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기도 했다.
채 다하지 못해 남아 있던 그리움을, 보듬고 또 보듬어 가며 추억했다.
* * *
돌이켜 보면, 그다지 떠올릴 만한 추억이 없었다. 한스는 늘 에드문트와 함께였으나, 에드문트가 늘 엘리아와 함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공작은 매우 바빴고, 공작가 저택에 머무는 시간보다 멀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래도 한스는 알고 있었다. 에드문트의 확언은 없었으니 결국 짐작일 뿐이었지만, 제 짐작은 늘 대부분 사실로 귀결되고는 했으니 확신해도 무리가 없었다.
<한스 님, 그거 아십니까? 우리 공작님께서 지난 한 해 동안 저택에 머무셨던 게, 겨우 98일이었습니다. 100일이 채 안 되었다고요.>
<그렇게나 오래 나가 계셨던가?>
<제가 다 세어 보았단 말입니다. 제발 한스 님께서 말이라도 해 주십시오. 이번에만 해도 겨우 마님 생신이라고 오셨기에 좀 오래 계시는가 했는데……. 이렇게 또 금방 가 버리시고.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 알지만요, 참…… 일부러 떼어 놓으시려는 거 같습니다.>
엘리아를 모셨던 하인의 말대로, 에드문트 라스페는 되도록 엘리아에게서 저를 떼어 놓기를 원했다.
자주, 또 오랫동안 그렇게 멀어져 있기를 주저치 않았다.
<벨젠 경은 또 저택에 대기하란 말씀이십니까? 아니, 집 지키는 개도 아니고. 매번 저택에만 두시면 어쩐답니까. 제발 크라우제 후작령 근처에 가실 때만이라도 벨젠 경과 동행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는 늘 능력 있는 기사들은 전부 저택에 처박아 두고는 최소한의 인원과 제국을 떠돌며 피를 뿌렸다.
그렇게 뿌린 피가 에드문트의 생명을, 그리고 공작가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었다.
그리고, 아마도 사랑이었을 에드문트의 마음을 지켜 주었다.
……사랑하기에 떨어져 지냈다는 말은 참, 낭만적이지만 결국 표상적일 뿐이었다. 특히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잔혹하기까지 했다.
엘리아도, 에드문트도 서로가 처음이었을 테니 사랑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쌓을 새도 없이 여자를 위한답시고 격리되어 지냈으니…….
전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분명 사랑이긴 했는데, 비틀리고 말았다. 분명 사랑이라는 것 자체는 존재했는데에도 완성되지 못하고 조각조각 흩뿌려졌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사랑은 미완성된 채 곳곳에 흩뿌려지고 말았으니.
한스는 곳곳에서 희미한 사랑의 흔적을 목도하곤 했다.
* * *
남자가 오랜만에 저택에 귀가할 적에는 걸음이 평상시보다 조금 빨라지곤 했다.
마중 나온 엘리아의 인사를 듣고는 한참 말없이 제 아내를 내려다보곤 했다. 다정한 말 하나 없이, 눈으로만 괜찮은지를 살폈다.
다음 날 남자의 등에 남은 손톱자국이, 여자의 눈가에 남은 부은 흔적이. 사용인들에게 간밤에 있었을 열기를 상상케 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식당에 감도는 분위기가 여느 때와는 미묘하게 다르기도 했다.
식사 시간 내내, 여자는 남자를 흘끔거리다가 기어코 눈이 마주치곤 했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말 거면서도 짙푸른 눈동자에 대고 어색하게 웃어 보이기도 했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 여자의 너머로, 남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고…….
그러나 결국 한 마디 말없이 식사 시간이 끝나고.
또 기약 없이 이별하고.
* * *
사랑이 되다 만 그 흔적들은 두 사람 주변을 겉돌더니 별안간 끝을 만나고 말았다.
이혼 통보와 이별, 그리고 죽음이라는 열매를 맺어 종래에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는 아무런 의미조차 없다. 서로 사랑해야 마땅할 두 사람은 죽어 버리지 않았던가.
한스 마이어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 두 사람의 생은 단 한 톨도 남지 않았다.
그러니 어리석다.
“어디로 모실까요, 손님?”
“리펠제 호수로 가 주게.”
“예? 거긴…… 알겠습니다. 짐은 뒤쪽에 실어 드릴까요?”
“내가 들 테니 신경 쓰지 말게.”
이미 사라진 흔적을 좇으려는 행위도, 후회하고 그리워하는 행위도 전부 어리석기 그지없다.
한스는 어리석게도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을 품에 꼭 안은 채 마차에 몸을 실었다.
* * *
상점이 즐비한 거리를 구불구불 달려 탁 트인 대로를 또 한참 달리고, 세월이 머물러 있는 저택을 지나친 끝에.
한스를 태운 마차가 호수에 다다랐다.
‘도착했구나.’
마부가 도착을 알리는 소리를 듣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한 번도 찾아온 적 없이 서류로만 알던 곳이긴 했음에도 가까워졌음을 알아차렸다.
“저 손님, 다 왔습니다. 저기 보이는 게 리펠제 호수입니다. 근데 여기는 아무것도 없는데…….”
“기다릴 필요 없으니 가 보게.”
“괜찮으시겠습니까? 혹시 호수에 들어가실 거면……. 여기 안쪽에 땅이 질어서 잘못하면 큰일 날 텐데요.”
“천천히 가면 되겠지.”
한스는 자신을 신경 써 주는 마부를 기어코 보내 버리고, 잠시 길가에 선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리펠제 호수 인근은 대대로 로앙가의 소유지였으나, 얽히고설킨 채무 문제 때문에 잠시 다른 가문의 소유로 넘어갔다가 ‘라스페 공작 부인’이 사들이며 소유자가 여러 번 바뀌었던 땅이었다.
<한스, 이 서류 보여? 혼자 힘으로 벌어서 산 첫 재산이야. 물론 이것저것 따져 본다면 전부 내 힘은 아니고, 공작가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아주 장하십니다, 마님.>
<오늘은 기분이 대단히 좋아서, 한스가 그렇게 짓궂게 구는 것도 들을 만하네.>
<그렇게나 좋으십니까?>
<좋아. 비록 서랍 안에 쌓아 둔 보석 하나만 갖다 팔아도 쉽게 가질 수 있는 값싼 땅이었지만. 로앙에게는 의미가 있는 곳이니까. 그리고…… 내 힘으로 벌었잖아. 내가 살아 있고, 인정받았다는 기분이 들어. 고작 이 서류 하나 덕분에 말이야.>
그림을 그리고, 신분을 숨긴 채 글을 쓰는 잡일을 해 가며 모은 돈으로 사들인 땅이었으면서.
그렇게 악착같이 얻어 낸 재산이었으면서, 엘리아는 만 하루도 되지 않아 그 소유권을 로앙 백작에게 넘겼다.
그러고는 며칠 내내 기분이 좋으신지 헤실헤실 웃고 다니는 모습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지.
한스는 마차에서 내린 자리에 박힌 채, 아마도 보이는 곳 전부 공작 부인의 소유였을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청량한 겨울을 전부 걷어 담아 놓은 듯 시리고 아름다운 호숫가에는, 옅은 가을이 서려 처연하고도 아름다웠다.
아마 지은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작은 오두막이 함께 어우러져, 목가적인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좋은 곳이네. 진작 알았으면…… 한번 구경 가실 생각은 없으시냐고 물어보기라도 했을 텐데.’
한스는 천으로 꼼꼼히 감싼 액자를 품에 안고 걸음을 옮겼다. 마부의 말처럼 땅이 질었으나, 대신 주홍빛 낙엽이 군데군데 흩어져 디딜 만한 곳을 만들어 주더라.
한스는 색색의 낙엽 위로 한 발 한 발 신중히 나아갔다.
마침내 작은 오두막에 도착했을 땐, 등이 전부 땀에 절어 있을 지경이었다. 다행히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등을 금방 식혀 주었다.
“후우…….”
서늘한 바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긴장도 해소해 주면 좋을 텐데. 한스는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는 긴장감 탓에 액자를 꼭 끌어안았다.
심호흡 세 번을 한 뒤에야, 내내 그의 앞을 지키고 있던 작은 오두막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나무 문 울리는 소리가 나자, 오두막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오늘 찾아오기로 한 사람은 없었는데.”
“또 호수 구경하다가 호기심에 문 두드리는 사람이겠지. 내가 나가 볼게.”
대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달각거리며 문고리 잡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입니까.”
대답해야 하는데, 순간 준비해 둔 말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늘 단정하던 모습, 백금발의 젊은 청년의 모습은 어디에 가고.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남자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림을 그리다가 나온 모양인지 낡은 셔츠에 물감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누구신지 모르겠습니다만 호수 구경 오신 거라면 마음대로 보고 가셔도 됩니다. 저기, 뒤에 울타리 쳐 둔 곳이나 창고 건물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상관 않습니다.”
불쑥 충동이 일고 말았다. 오는 길에 실수하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다짐했으면서.
“백작님.”
한스는, 이미 과거가 된 명칭으로 남자를 부르고 말았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가 곧장 얼굴을 굳혔다. 뒤늦게야 실수했음을 자각하고는 급히 변명했다.
“죄, 죄송합니다. 외젠 님. 저는 그러니까…….”
“공작가의 보좌관이시군요.”
“한스 마이어입니다. 부디 말씀 낮춰 주십시오.”
늘 다감하게 사람들을 불러 인사하던 남자의 목소리는 존재치 않았다.
호수에서부터 불어오던 바람보다 더 시린 적대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제가 어찌. 이제 작위도 없는 평민일 뿐인데요.”
“아닙니다. 저는 이제 보좌관도 아니고…… 그게…….”
“가십시오. 피차 얼굴 볼 만한 사이 아니잖습니까.”
한스가 무어라 항변하기도 전에 오두막 문이 세게 닫혔다.
“……외젠 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발…… 잠시만…….”
문을 다시 두드려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겨우 목소리를 내어 보았으나, 그런다고 문이 열릴 리가 없었다.
한스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다시 문을 두드려 보려 했지만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의 몸이 대신 문을 세게 밀쳐 나무 울리는 소리를 내 주었다.
‘아, 그림이……!’
한스는 아픈 몸보다 품에 안은 액자가 혹여 어디 부딪쳤나 놀라고 말았다. 급히 천을 풀러 안을 살피니 다행히 벽에 걸려 있던 모습 그대로였다.
꼴사납게 주저앉아 있다는 자각도 없이, 한스는 문에 기대어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환영받지 못하리라는 건 분명 각오하고 왔는데. 마음먹은 것만으로는 역시 충분하지 않았다.
아팠다. 정말 많이 아팠는데, 억울해할 수도 없었다. 제가 찾아오는 게 남자에게 고통이 될 걸 알면서도 찾아왔으니까.
‘……돌아가자. 돌아가야겠다.’
넘어지면서 접질렸는지 오른발이 시큰거렸지만, 어찌 일어날 수는 있었다.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천천히 걸어가면 돌아갈 수 있으리라.
돌아가야지. 마음은 그랬는데, 발이 차마 움직이지를 않았다. 염치없는 줄 알아 다시 문을 두드리거나 하는 짓은 못 하고 그냥 주변을 바라보았다. 호수를 보러 온 여행자인 척.
* * *
오두막의 문이 다시 열린 건,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한스 님, 여기서 계속 이러고 계시면 곤란합니다.”
“……죄송합니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그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여자였다. 앞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또 어디서 많이 보았다 싶은 얼굴이었다.
한스는 겨우 기억을 되짚은 끝에 그가 데이지라는 이름의 로앙가 사용인이었음을 기억해 냈다.
“……보좌관을 그만두셨다고요. 설마 그걸 알려 주시려 여기까지 찾아오셨습니까?”
“아닙니다. 그…… 저는…… 이걸 드리고 싶어서…….”
“그 안에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함부로 받고 싶지 않네요. 더 드릴 말씀 없으니 가시지요.”
“아니, 이건 그게 아니고…… 저어. 제가 여기 뒤로 가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봐 주십시오. 엘리아 님께서, 이건 엘리아 님께서……!”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리려던 여자가 ‘엘리아’라는 이름 하나에 순간 굳어 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한스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발…….”
절뚝거리면서도 용케 뒤로 물러난 한스는 액자를 감싼 천을 급히 풀었다.
“이게, 여기 보시면. 엘리아 님께서, 그러니까…….”
“……엘리아 님 서명이네요.”
“아, 알아봐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정말…… 이게 그러니까, 제가 예전에 선물을…… 남부 풍경이라고…… 이걸 못 드려서, 드리고 싶어서…….”
문장 하나도 제대로 못 끝낼 지경으로 더듬어 대더니, 한스는 기어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와중에 행여 그림 위로 제 눈물이 떨어질까 봐, 팔을 쭉 뻗어 그림을 앞세우고는 어린애처럼 엉엉 울어 댔다.
푸른 호수에서 바람이 불어 달래 보려 했는데, 가을빛 낙엽이 흔들거리며 달래 보려 했는데.
비가 오던 그날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 * *
그날 이후, 한스는 늘 똑같은 하루를 보냈다.
“리펠제 호수에 갑시다.”
아침이 밝으면 곧장 집을 나서, 인근 가게에서 빵 하나 사 들고 마차에 올랐다.
처음엔 목적지를 들은 마부들이 하나같이 난감해했지만, 대여 마차 인부들 사이에서 ‘매일 아침 리펠제 호수에 데려다 달라는 손님이 있다.’라는 소문이 퍼진 뒤로는 다들 군말 없이 한스를 태워 주었다.
“손님, 저기…… 일 보시는 동안 여기서 기다려 드릴까요? 이 근처에는 지나가는 마차가 거의 없을 텐데요.”
가끔 마음씨 좋은 마부들은 그가 돌아갈 길을 걱정하며 기다려 주겠다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스는 한결같이 그들의 호의를 거부하고 호숫가로 걸어갈 뿐이었다.
오두막 안으로는, 단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사실 한스는 첫날 이후 오두막 근처에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건들지 말라고 했던 울타리라든가 창고에조차 눈길 한번 주지 못하고선.
‘여기는, 몇 번을 와도 좋네. 푸르고. 그런데도 따듯해 보이고.’
호수만 내내 바라보았다. 아름답던 풍경이 밤하늘 아래에서 잠들어 버릴 때까지.
어둑해지거든, 한스는 천천히 호숫가를 빠져나와 저를 태워 줄 만한 마차가 보일 때까지 내내 걸었다.
운이 좋을 땐 반 시간도 되지 않아 짐마차를 얻어 탔지만, 해가 떠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걸어야 할 때도 있었다.
늦가을이 되어 낙엽이 다 흩어진 뒤에도, 한스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호수를 찾았다.
‘기사들 말대로, 자꾸 몸을 움직이니까 좀 나아지는 것 같네.’
젊은 시절 입었던 옷조차 헐렁할 정도로 살이 쑥 빠져 볼품없어졌으면서, 한스는 제가 기사들 말대로 자주 걷고 움직여서 몸이 괜찮아졌다고 착각했다.
“아이고, 아저씨. 한 달 새에 꼴이 이게 뭐랍니까. 그놈의 빵 하나만 달랑 사 가지 마시고! 여기, 이거도, 이거도! 뭐라도 좀 잡수라니까요.”
보다 못한 집 근처 식당 주인의 핀잔을 듣고 나서야, 한스는 새파란 호수 위에 제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그러네. 꼴이 말이 아니네.’
볼품없어진 제 꼴에는 금방 관심이 사그라들어, 한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르러야 할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비가 오려나.”
어느새 날도 꽤 추워졌는지 몸이 살살 떨렸다. 한스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몸을 일으켜 호수를 등지고 걸었다.
매일 다닌 탓에, 어느새 바닥에는 그의 발자국으로 좁은 길 하나가 만들어져 있더라.
‘이 흔적도 비가 오면, 사라지겠지.’
그러나 전부 사라지지는 않으리라. 두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던 날도 비가 왔지만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발자국도 흐리게나마 흔적이 남아선, 비가 그치고 다시 한스가 그 위를 걷거든 다시 오늘처럼 선명해질 테지.
그리워하는 그의 마음처럼, 순식간에 돌아오겠지.
* * *
다음 날, 가을의 끝을 알리는 세찬 비가 내렸다.
한스는 호수에 가지 않았다.
* * *
지난번 비가 왔을 땐 호수에 갔었다.
<아이고, 이 날씨에 거길 가신다고요? 고집도 세시지.>
평소보다 두 배는 오래 걸려 겨우 호수에 다다라서는, 비를 쫄딱 맞아 가며 호수 수면에 톡톡, 빗방울 튀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돌아왔었다.
운 좋게도 길목에 나오자마자 어느 책방 주인이라는 사람의 호의로 마차를 얻어 타고 집에 왔고, 다음 날에 아무렇지도 않게 또 호수에 갔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비에는 다녀올 자신이 없네. 분명 멍청해 보일 테고.’
한스는 오두막에 사는 남녀에게 시위하려고, 불쌍해 보이려고 호수에 간 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의도가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달리 갈 곳이…….’
호수가 아니면, 한스는 갈 곳이 없었다.
제 발로 떠나온 라스페 공작가는 물론이고, 주인이 바뀐 로앙 백작가에 가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한 달 내내 호수를 찾아갔었다.
‘내일도, 그냥 가지 말까.’
비가 금방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한스는 고민했다. 내일은 가지 말까? 이제는 호수에 찾아가지 말까……?
창가에 앉아 내리는 비를 한참 바라본 끝에, 결심했다.
‘그래. 내일 비가 그쳐도 가지 말자. 이제 그만하자.’
* * *
다음 날, 일어나니 커튼을 달지 않은 창틈으로 해가 비쳐 들어왔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비가 새벽에 그친 모양이었다.
한스는 눈뜨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 헐렁한 외투를 걸치고, 흙 묻은 구두를 신은 다음 집을 나섰다.
“좋은 아침이에요, 한스 씨. 오늘도 빵 하나 드려요?”
“예, 하나 주십시오.”
“저 어제 말이어요. 나오시질 않아서 아픈 줄 알고, 다들 걱정했어요. 비가 많이 와서, 그래서 안 나오셨나 보지요?”
“……예.”
곱슬머리를 가진 식당 주인이 불쑥 말을 걸어 엉겁결에 대답하고는 빵과 작은 과일 하나 값을 치렀다.
주인 앞에서 과일 하나를 베어 물고, 근처에 멈춘 마차를 잡아탄 후에야 제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를 깨닫고 말았다.
“손님, 그 호수 가는 분 맞으시죠? 리펠제 호수요.”
“…….”
“아닙니까? 차림새가 딱 손님이랑 비슷하다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호수 갑니다.”
“예에,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호수에 다신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면서 하루도 지나지 않아 어긴 셈이었지만, 뭐 어떠냐 싶었다.
‘어차피 내가 가지 않기로 한 것도, 아무도 모를 텐데.’
호숫가에 도착하니, 간밤에 비가 얼마나 왔는지 땅이 전부 엉망진창이었다.
한스는 고민하다가 옅은 색의 바지를 둘둘 걷어 올리고, 주변을 굴러다니던 나무 막대를 하나 잡아 땅을 찔러 보며 어렵게 걸음을 옮겼다.
예전에 접질린 뒤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오른발이 자꾸 걸리적거린다 싶더니…….
“흡.”
한스는 기어코 뻘밭이나 다름없는 땅 위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프진 않았지만, 얼굴이며 온몸에 축축한 흙이 들러붙는 감각이 들이닥쳤다. 급히 몸을 일으켜 보려 했는데 진흙이 엉겨 붙어 무거워진 몸이 좀체 말을 듣지 않았다.
“하아…… 제기랄.”
한참 버둥거리던 한스가 일어나기를 포기해 버리곤 몸에서 힘을 빼 버렸다. 얼굴을 옆으로 돌렸는데도 코에 흙이 들이찰 정도로 몸이 푹 꺼지고 말았다.
당장 일어나는 일도 그렇고,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자니 눈앞이 깜깜했다.
호수에 몸이라도 담가 씻어야 하나. 한데 호수에서 다시 길가로 돌아올 때는 또 넘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잡게.”
그때, 들릴 리 없는 말소리와 함께 한스의 눈앞에 손 하나가 쑥 내밀어졌다.
여기저기 물감으로 얼룩덜룩한 게…… 분명.
“도와줄 테니, 손잡게.”
외젠의 손이었다.
* * *
“뭐 하는가. 안 일어날 건가?”
“아니,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불쑥 나타난 외젠이 자신을 도와주려 하자, 한스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허둥지둥했다. 그러자 외젠이 혀를 차며 얼른 손을 잡으라 재촉했다.
도움을 받기 위해 맞잡은 손은, 흔히 ‘귀족답다’라고 일컬어지는 매끈한 손이 아니었다. 마치 땅을 갈아먹고 살던 제 조부처럼, 손가락 사이사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한스 경, 오랜만입니다. 공작 부인께서는 별일 없으신지요?>
<아…… 예, 그렇지요. 별일 없으시다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공작님 일정 위주로 움직이다 보니 마님께 인사드린 지가 오래되었군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늘 제 누이의 안부를 묻고는, 시무룩한 모습을 보였을 때의 그는 어디로 간 건지.
“다리, 어디 다친 건가?”
“조금 불편해서……. 괜찮습니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일단 잡게. 가서 봐 줄 테니.”
아니던가. 사실 사람은 변치 않아, 그때의 다정함은 여전하신 것 같기도 하고.
한스는 외젠의 도움으로 겨우 뻘밭에서 탈출했고, 오두막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도 내내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해서 걸어야 했으며…….
“그…… 제가 그냥 내려서 가겠습니다.”
나중에는 매달리는 것조차 버거워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가야만 했다.
“둘 다 괜찮아요? 도와 드려요?”
“아닙니다, 저기…… 지저분하니까요.”
데이지는 오두막 문을 열어 둔 채 한스가 기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한스가 방 안에 도착해 쓰러지자, 외젠은 어딘가 가 버리고 남은 데이지가 한숨을 푹 쉬며 들고 있던 수건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데이지 님…… 맞으시지요?”
“네, 근데 이거 그건가요? ‘바닥이 없는 세상’에 나오는 장면이었는데.”
“……제가 도박 빚 때문에 집에서 쫓겨났던 소설 주인공으로 보이십니까?”
“아뇨, 그 사람 말고요. 같은 상대에게 네 번인가 실연당해서 흙탕물에 뛰어들었던 사람이요. 결국, 혼자 기어 올라와서 복수를 꿈꾸잖아요.”
“으음. 부정할 수 없군요. 그래도 일부러 이 꼴이 된 건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한테 복수하러 온 건 맞는 것 같은데요. 이따가 바닥은 한스 씨가 닦으실 거죠?”
바닥을 보니 한스의 몸 아래에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는 얼굴을 닦은 수건으로 어떻게든 수습을 해 보려 했지만, 수건만 더 더러워질 뿐이었다.
“하하. 아휴, 어쩜 좋아.”
바보 같은 꼴에 데이지가 기어코 웃음을 터뜨렸다. 짧게 퍼지다 금방 끝나 버리는 평범한 웃음이었지만.
오랜만이었다. 누군가의 웃음소리를 들은 게 몇 년도 더 전의 일인 것만 같았다.
한스는 고개를 살짝 숙여선 낯설어진 소리를 슬쩍 따라 해 보았다. 어색했다.
“일단 먼저 좀 씻어요. 물 거의 다 데워졌을 거예요.”
“그래야겠군요. 욕실 좀 빌리겠습니다.”
“외젠 님, 아니 외젠이…….”
여자가 경칭을 쓰다가 급히 말을 고쳤다. 그러더니 한스가 자신의 말실수를 들었음을 눈치채고 눈을 찡긋해 보였다.
“비밀로 해 주세요. 입에 자꾸 익어서 외젠 님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들을 때마다 속상해하거든요.”
한스는 데이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마주 보며 웃었다.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마…… 제 착각이 아니리라.
* * *
본의 아니게 한심한 꼴을 보이고 말았던 날 이후, 한스는 매일 우두커니 호수를 바라보는 일을 그만두었다.
대신 그는 2, 3일에 한 번꼴로 외젠과 데이지가 사는 오두막에 찾아가게 되었다.
“한스 씨, 이 빵은 늘 집 근처 식당에서 사 온다고 했지요? 곱슬머리가 예쁜 사장님이 하는 식당이요.”
“예, 혹시 맛이 변했습니까? 어제도 먹었는데 괜찮던데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근데, 어제도 갔다고요?”
“예전부터 사다 먹는 게 익숙해서, 끼니는 늘 그 식당에서 때웁니다.”
“흐응…….”
빈손으로 찾아올 수야 없었으니, 한스는 늘 집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요깃거리를 사 들고 왔다.
그래 봐야 본래 아침 장사를 하지 않는 식당에서 살 수 있는 거라곤 늘 똑같은 빵과 과일이 전부였지만.
다행히 외젠과 데이지의 오두막에는 과일이며 치즈 등 빵에 곁들여 먹을 만한 음식이 넉넉하여 아직 지겹다는 말이 없었다.
“데이지 씨, 왜 그렇게 대단히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고 그러십니까?”
“아녜요, 아무것도. 오늘도 두 분 같이 그림 그릴 거죠?”
얼마 전부터, 한스는 외젠과 함께 오두막 옆 창고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한스는 오두막 문을 두드렸음에도 자신을 내쫓지 않는 두 사람에게 그저 고마워서 일이라도 시켜 달라 간청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으로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빨래를 걷어 개키거나 화구를 물에 씻어 말려 두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이걸로 그림이 그려진다니, 신기하네요. 그냥 말꼬리 싹둑 잘라다 붙인 것 같은데.>
<그림 그려 본 적 없는가?>
<전에 마님께서 저 붙들고 한번 가르쳐 주신 적이 있었는데…….>
한스는 외젠의 질문에 무심코 대답하던 중 엘리아의 이야기를, 심지어 ‘마님’이라는 호칭까지 써 가며 꺼냈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는 붓을 쥔 채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잘못을 빌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실언을…… 죄송합니다.>
<…….>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죄송합…….>
<한스, 다시 배워 보겠는가?>
<예?>
<그림 말일세. 가르치는 건…… 누이보다는 내가 더 재능 있었으니까.>
<저한테 그림을, 가르쳐 주신다고요?>
<다른 뜻은 없어. 자네나 나나……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한스, 또 멍하니 무슨 생각해요?”
“아, 예…… 죄송합니다. 예, 오늘도 그려야지요.”
“그린 건 언제 보여 줄 거예요? 외젠한테도 아직 뭘 그리는지 안 보여 줬다면서요. 엄청 비싼 캔버스까지 사 들고 왔다길래 기대 중인데.”
한스는 금방 물감 다루는 법을 익혀 그림을 하나씩 그려 냈다. 명암이 어설픈 과일을 시작으로 뭉툭한 빵 한 덩어리를, 햇빛이 내리비치는 오두막 앞 풍경을.
마지막으로 곱슬머리 식당 주인 여자의 흉상까지 완성한 한스는 그다음 방문 때엔 질 좋은 캔버스 하나를 챙겨 왔다.
<이번에는 도움받지 않고 저 혼자 한번 그려 보겠습니다.>
돈이 궁한 처지는 아니었으니, 한스는 값비싼 물감을 아끼지 않고 캔버스에 치덕치덕 발라 형태를 잡았다. 외젠은 ‘당연히 스승인 본인에게는 볼 권리가 있다.’라고 주장했지만, 20여 년의 보좌관 경력이 어디 가겠는가.
말재간에 밀린 외젠은 결국 완성 전에는 절대 훔쳐보지 않겠노라 약속을 해야 했다.
“한스, 저녁 준비하러 가지.”
“아…… 예, 금방 가겠습니다.”
“오늘 다 완성할 작정인가?”
“예, 보여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외젠은 완성작을 볼 수 있다는 말에, 기꺼이 식사 준비에서 한스를 제외해 주었다.
덕분에 한스는 저녁 준비가 끝났다는 데이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직전 그림을 마칠 수 있었다.
“드디어 다 그린 거예요?”
“예, 근데 저 배고파 죽겠습니다. 그러니 저녁부터 들고 그다음에 보여 드리렵니다.”
“맙소사. 대체 뭘 대단한 걸 그려서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예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 * *
한스가 창고에서 완성한 그림을 들고 식탁 앞에 찾아온 탓에, 식사 시간은 유례없이 짧아지고 말았다.
외젠은 급기야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견과류 케이크를 한입에 털어 넣어 버리곤 식사가 다 끝났다고 한스를 재촉해 대었다.
“자, 두 분 여기 앉으시고. 선생님께서는 입 안에 남은 케이크 좀 어서 삼키시지요.”
아직 접시를 다 치우지도 않은 식탁 앞에 외젠과 데이지를 나란히 앉게 한 후, 한스는 천으로 가려 둔 캔버스를 세워 올렸다.
그러곤 마치 연극의 막을 올리듯, 덮어 두었던 천을 천천히 끌어 올렸다.
“어머, 어머나.”
데이지는 드러난 그림을 보자마자 탄성을 터뜨렸다. 예상보다 훨씬 괜찮은 그림 실력 덕분에 무얼 그렸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설마, 내가 저렇게 생겼다고?”
“잘 그렸는데요? 당신 젊었을 때랑 분위기가…… 정말 꼭 닮았는데.”
캔버스 속에는 윤곽을 선명하게 잡지 않은 두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한스가 기억을 한참 더듬은 끝에 재현한, 외젠과 데이지의 젊은 시절 모습이었다.
그림 속 여자는 저택 생활을 하던 시절이라 지금보다 얼굴 살이 좀 더 붙어 있었고, 남자는 눈썹을 찡그린 표정 대신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 정도면, 신세 진 값은 되지 않겠습니까?”
“잘난 체는.”
“잘난 체 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누구한테 배웠는데요.”
“스승이 좋았긴 했지.”
“잘 그렸는데. 한 번쯤은 칭찬해 줘요, 외젠.”
“못 그렸다고는 안 했어. 잘 그렸네. 당신 저 때도 참 예뻤지.”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자신들의 젊었을 적을 떠올리며 서로의 손을 잡았다. 한스는 그런 두 사람을 잠시 훔쳐보다가, 슬그머니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밖에는 벌써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한스는 대로까지 걸어 나가 하염없이 저를 태워 줄 마차를 기다리는 대신 그림을 그리는 공간이자 손님용 침대 하나가 있는 창고로 돌아갔다.
오늘은 밤길을 걸어 집에 돌아가는 대신 창고를 빌려 하룻밤을 보낼 생각이었다.
한스가 달빛에 의지해 미처 정리하지 못한 화구를 꼼꼼히 씻어 다시 창고로 돌아가려는데, 때마침 오두막 문이 열리더니 양손에 뭔가 들고 나오는 사람이 보였다. 데이지였다.
“한스 씨, 다행히 아직 잠들기 전인가 보네요.”
“그건 뭡니까?”
“포도주요. 같이 한잔해요.”
“외젠 님, 아니 외젠 씨는 안 오십니까?”
“같이 한 잔 마셨는데 먼저 뻗어 버렸어요.”
데이지는 한 손에는 작은 포도주 병 하나, 다른 손에는 술잔 둘을 들고서는 발로 능숙하게 창고 문을 열었다.
한스가 뒤늦게 화구를 챙겨 들어가니 데이지는 이미 물감을 올려놓는 탁자에 술상을 차린 뒤였다.
“한스 씨는 술 좀 해요?”
“그럭저럭합니다.”
“잘되었네요. 외젠은 이거 한 잔도 힘들어하거든요.”
데이지는 술친구가 그리웠는지 잔이 넘치도록 포도주를 따라 한스에게 밀어 주었다. 보통 식사에 곁들이는 종류의 술이 아니었는지 방 안에 짙게 배어 있던 물감 냄새를 싹 덮어 낼 지경이었다.
“후우…… 향이 보통이 아니군요. 평소에도 이렇게 독한 걸 즐기십니까?”
“좋은 날이라 꺼냈어요. 축하도 해야 하고.”
한스는 데이지의 ‘축하’라는 말에 입에 대려던 잔을 멈추고는 피식 웃었다.
“제가 그림 완성한 거 말입니까?”
“네, 드디어 완성했잖아요. 궁금해서 꿈에 나올 지경이었는데, 드디어 보게 되네요.”
“……데이지 씨, 취하셨습니까?”
“그럴 리가요. 겨우 이거 한 병 마시고 왔는데. 저 그림 안 보여 주실 건가요?”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제가 오늘 완성해서 이미 선물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거 말고요.”
데이지는 씩 웃더니 창고 구석에 재활용하려고 쌓아 둔 캔버스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선물로 준 그림 말고, 한스 씨가 저기에 숨겨 둔 거요.”
한스는 순간 손이 떨리는 바람에 포도주를 약간 흘리고 말았다.
“완성작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던데. 어때요? 제게 첫 감상을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시겠어요?”
“대체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요?”
데이지는 한스의 손에서 정처 없이 흔들리는 잔을 빼앗아 탁자 위에 올려주었다.
그러곤 자신의 잔 역시 옆에 내려 둔 후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자리를 잡았다.
“빈 물감 보고 알게 되었어요.”
“물감요?”
“네. 빈 물감 통 정리하는데, 푸른색이 유독 많더라고요. 외젠이 요즘 그리는 건 푸른색이 거의 안 들어가고, 오늘 한스 씨가 우리에게 선물해 준 것도 마찬가지였잖아요. 그래서 알았어요.”
“그러…… 셨군요. 대단하십니다.”
한스는 혼이 나간 듯한 대꾸를 건넨 뒤,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눈은 마시다 만 포도주에 가 있지도 않았고, 캔버스 더미 사이에 숨겨 둔 그림을 향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허공을 배회하는,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만 했다.
“음. 그냥 술이나 마저 마실까요?”
데이지는 생각보다 당황해하는 한스의 모습을 보고는, 그냥 술이나 마시고 말자며 잔을 내밀었다.
붉은 빛깔이 무척 유혹적이었지만, 한스는 망설임 끝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잔을 받아 드는 대신 캔버스 더미로 다가가 꼼꼼히 숨겨 둔 그림을 찾아 꺼내었다. 두 사람에게 선물한 그림보다 훨씬 작은 캔버스였다.
“저…… 이건, 그러니까…….”
그러나 한스는, 기껏 캔버스를 찾아 꺼내고 머뭇거려야 했다. 마치 혼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한스 씨, 괜찮아요.”
데이지가 그를 격려했다. 보여 주어도 괜찮다, 보여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로.
“괜찮으니까, 마음 가는 대로 해요.”
그리운 사람과 무척 닮은 말투를 듣고서야 한스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는 품에 안았던 그림을 천천히 뒤집어 데이지에게 보여 주었다.
작은 캔버스에는 푸른색이 가득 넘실거렸다. 하늘도, 호숫가도, 섬세하게 그려 낸 풍경을 뛰어노는 생명마저 푸르렀다.
“예쁘네요. 푸른 사슴이랑…… 저기 옆에 있는 건 뭔가요? 어두워서 잘 안 보이네요.”
“이건…… 새인데, 저도 이름은 잘 모릅니다.”
“새라고요?”
“예, 근데 어느 그림을 보고 그린 거라서요. 진짜 있는 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디 좀 볼까요? 아. 앵무새네요. 남부에 서식하는 새인데, 재잘대는 모습이 어여뻐 신분 고하 가리지 않고 많이들 키우곤 하죠.”
“그렇군요. 이게 앵무새였군요.”
한스는 제가 그렸으면서도 이름 몰랐던 새를 바라보았다.
‘알록달록한 깃털 때문에 저 생각났다고 말씀하신 줄 알았는데.’
수다쟁이라고 그리 구박을 하시더니. 그래서 새를 보고 저를 떠올리셨으려나.
“전에, 한스 씨가 가져다주었던 그림에 있던 새도 앵무새였겠네요. 엘리아 아가씨 그림요.”
“예, 실은 그 그림에서 봤는데 인상적이어서 따왔습니다.”
“그 새가, 우리 아가씨인가요?”
엘리아를 그렸느냐는 말에 한스가 놀라 그림을 떨어뜨릴 뻔하고 말았다. 그는 겨우 허벅지로 그림을 지탱해 잡고선,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아가씨는…… 한 폭에 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건, 아가씨께서 제가 생각난다고 했던 거라…….”
“그럼 에드문트 님과, 그의 보좌관인 당신을 그린 거군요. 푸른색 사슴은 라스페 공작가의 상징이잖아요.”
한스는 이번에는 캔버스가 찢어질 기세로 그림을 붙들었다.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이 공존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고 말았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여기서는, 그려선 안 되는 그림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그리게 되어서…….”
“한스 씨, 그러지 말아요.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해요.”
“…….”
“우리에겐, 원망스러웠던 사람이지만. 당신에겐 오랫동안 모시던 주인이었잖아요.”
아, 화를 내실 까 봐 무서웠는데. 두려워 내내 앓아 왔는데.
다정한 목소리가 두려움을 녹여 주었다.
울컥 터진 눈물이 떨어져 그대로 캔버스를 적시고 말았다.
푸른색의 수사슴 한 마리, 그 뿔에 앉은 작은 새 위로 비가 내렸다.
“그렇다고 우리의 원망이, 사라졌다는 건 아녜요. 용서했느냐고 묻고 싶었을 텐데. 미안해요.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울지 말라는 사려 깊은 말 대신, 조곤조곤한 말소리가 이어졌다.
“어느 날은, 원망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누구의 잘못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일이 얽혀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도 다시 잠들었다가 깨면, 서로 부둥켜안고서 한참을 울어도 화가 풀리지 않기도 해요. 전부 다, 우리 자신까지 원망스러울 지경이 되어선.”
“……외젠 님과 두 분 잘못이 아니고, 그건 전부…….”
“한스 씨 당신 잘못도 아니잖아요.”
“…….”
“그리고, 당신이 라스페 공작을 그리워하는 것도. 잘못이 아니고요.”
조곤조곤한 말소리에 빗줄기가 더욱 굵어지고 말았다. 데이지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한스에게 건네고는, 비를 흠뻑 맞은 그림을 대신 들어 주었다.
“진심이에요. 예쁜 그림이라고 생각해요. 담은 마음도 마찬가지이고. 그러니 한스 씨, 우리에게 비난받을까 봐 걱정하지는 말아요.”
한스가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손수건을 움켜쥐고만 있자, 데이지는 살짝 웃더니 손에 든 그림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림을 바라보는 척 한스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었다.
“이 그림 속은 아마 여름인가 봐요. 해가 잘 들어 보이네요.”
“……예. 여름이 따듯하니까요. 따듯한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는 울음을 못다 그친 목소리로 대답하기를, 죽은 남자가 그림 속에서라도 따듯하기를 바란다고 고백했다.
에드문트 라스페가 새빨간 꽃을 피웠던 석실은 너무 추웠으니까.
“따듯할 거예요. 분명히. 내 아가씨는 아주 따듯한 곳에서 마음껏 사랑하고, 사랑받고 계실 테고. 한스 씨의 주인께서는…… 따듯한 곳에서 평온할 거예요.”
확신에 찬 데이지의 말이 위안이 되었고…….
‘에드문트 님.’
용기가 되어 주었다.
한스는 소원을 빌었다.
‘만약 죽은 뒤에도 숨 쉴 수 있는 세상이 있다면. 그곳에서 당신이 못다 한 생 새로 살아 볼 수 있게 되거든, 행복한 삶도 한 번 살아 보시길…….’
* * *
나의 젊은 주인님.
당신도 사람이었는데. 못다 한 사랑에 괴로워할 줄도 알았는데.
알아주지 못하는 이들만 이 세상에 넘쳐날 뿐이라서.
당신은 떠나간 자리조차 고독해야 했던 탓에 혼자인 나는 그동안 너무, 너무나도 아팠습니다.
외로웠습니다.
에드문트 님, 비록 당신 그리워하는 사람 이 세상에 나 하나뿐인 듯 보이지마는.
당신까지 너무 외로워는 마시기를.
대신 나 하나가 매일 당신을 연민하겠습니다.
만일 당신께서 지은 죄가 있어 갚아야 한다면. 그거 전부 다 갚으시고, 힘들어도…… 다 갚고 나시거든.
남들처럼 살아 보십시오. 웃어도 보고, 눈물도 흘려 보고. 그런 삶 말입니다.
더 어려운 것도 하셨으니, 아마 그리 힘들지는 않을 겁니다.
한여름 햇볕처럼, 버거워 도망치고 싶게 만들겠지만…….
그래도 당신 따듯하게 할 줄 알아서 겨울이 와도 춥지 않을, 그런 사랑을 하시길.
‘부디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