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 독 (35/79)

35. 독

엘리아의 입에서 독이라는 말이 나오자, 서고에는 시간을 죽여 낸 듯한 침묵이 찾아왔다.

대뜸 본인이 챙겨 왔다는 봉투를 보고는 독 이야기를 꺼내고, 그대로 굳어 버린 아가씨를 보고 대부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곧장 받아들이지 못했다.

‘독이라고? 과자 말하는 건가? 본인이 가져온 과자에 독이 있다고 의심하는 거야?’

그나마 반응이 빠른 건 보좌관인 한스였다. 그는 엘리아가 직전에 중얼거린 말들을 다시 바쁘게 주워 살폈다.

아침에 함께 구웠다는 과자. 사용인이 포장해 건네었다는 봉투. 이중 포장된 흔적. 열기 힘들도록 접은 방식. 대부분 일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로앙 백작가의 사용인들. 일찍이 예정되어 있던 엘리아의 외출.

아마 모두가 알았을 엘리아의 약속 장소. 약속 상대는 라스페 공작.

‘제기랄. 3황자 쪽인가? 아니면 황후가 닐스 튀링겐 때문에 돌아 버렸나? 아니. 일단 나부터 침착해야지…… 독이라고 결론 나온 것도 아니잖아?’

한스는 기괴한 침묵 속에서 어떻게든 평상심을 유지해 보려고 노력했다.

엘리아 아가씨가 가져온 과자에 정말 독이 있을까?

‘라스페가에 찾아올 걸 알고, 엘리아 아가씨가 그날 만든 과자에 독을 넣어서…… 그럼 너무 복잡하잖아. 성공한다면야 로앙과 라스페를 한 번에 위협하게 되겠지만. 그렇게나 무모한 짓을 벌였을까?’

한스는 엘리아가 피곤해서 예민하게 반응했을 가능성에 기대어 보기로 했다. 고작 봉투 접은 모양새가 수상하다는 이유로 의심할 정도로 피곤해서 편집증 증세를 보인 거라고 말이다.

‘당장 중요한 건 그쪽이 아니었다. 공작님이…… 제기랄. 일단 아무 일도 아닌 척 굴고선 잽싸게 저 봉투부터 챙겨 나가야겠어.’

한스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주위를 환기했다.

“그…… 아가씨께서 혹시 불안하시다면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과자를 검사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요. 집사님, 봉투는 이미 열어 보았지요?”

“…….”

“집사님?”

“아, 예…… 잠시……. 죄송합니다, 한스 님.”

“괜찮으십니까? 집사님께서 조금 놀라셨나 보군요. 그럼 집사님도 일단 앉아서 놀란 가슴 진정시키시고, 하하. 아니, 왜 이렇게 다들 놀라 어쩔 줄 모르십니까? 아직 밝혀진 것도 아닌데요. 그렇지요, 아가씨?”

일부러 호들갑스럽게 굴었는데, 사방 어디에서도 반응이 오질 않았다. 마치 꽂혀 있는 책에 말을 건 기분이었다. 심지어 에드문트조차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덩달아 다시 불안해지고 만 한스는 태도를 달리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보려고 했다.

“흠흠. 아가씨께서 로앙가에서 조금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저희가 과자가 아무 이상 없는 걸 확인하고 돌아올 테니…….”

“잠깐, 한스 건들지 말아요!”

“예?”

한스가 집사가 여전히 손에 잡고 있던 봉투를 가져가려는데, 엘리아가 그를 급히 제지했다. 그러더니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은수저를 집어 들었다.

엘리아의 손 안에서 은수저가 제 색을 그대로 뽐내며 반짝였다.

“봉투, 봉투가…… 과자가 아니라…….”

“예? 과자가 아니라고요?”

불안하게 흔들리는 엘리아의 눈이 왼쪽에 자리한 집사를 향했다. 그는 바짝 얼어붙은 채 열다 만 과자 봉투를 잡고 있었다.

“집사, 안에 과자……. 안 만졌죠? 아직 손 안 댄 거죠?”

“……예에. 봉투만 겨우 열어 보았고…… 안에는…….”

“그, 이거 쥐어 봐요. 봉투 만진 쪽으로…….”

식은땀까지 흘리며 더듬대던 집사가 엘리아가 내민 은수저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 주름진 남자의 손이 떨리는 걸 바라보며 에드문트는 먼저 깨닫고야 말았다.

그리고 한스 역시, 굴곡진 수저 안에 집사의 손이 담기기도 전에 모든 걸 예감하고야 말았다.

이미 늦고 말았음을.

* * *

차례 없는 소리가 뒤엉겨 울렸다. 엘리아는 탁자 앞에 앉은 채 모든 소리를 귀담아들었다.

탁자 위로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 기사들의 발소리, 한스가 고함을 내지르는 소리, ‘쨍그랑’ 은을 입힌 식기들이 서로 부딪쳐 나는 소리. 소리. 소리…….

끝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소리 사이에는, 엘리아의 이름도 있었다.

엘리. 엘리아. 엘리아 아가씨. 아가씨. 머릿속에서도 제멋대로 소리가 울렸다. 귓가를 파고들던 에드문트의 목소리가, 한스의 목소리가 옅어지고 높아져선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아가씨’라는 나긋한 음색으로 엘리아를 부르더라.

<아가씨, 이거 가져가셔야지요.>

‘왜, 왜 그런 거야. 내가 너에게 나쁜 주인이었어?’

<색지 남은 게 있어서 포장해 봤는데, 이상한가요?>

‘너는, 아무것도 몰랐을까. 아니면 전부 다 알고서 내게 건넨 걸까.’

<이렇게, 아래로 잡으세요. 부서질 것 같더라고요.>

‘마지막 남긴 양심이 내가 독 묻은 종이에 손대지 못하게 막아 보려 했니? 아니면…… 그저 네 계획에 내가 없었던 거야? 네 손을 떠난 봉투가 집어삼킬 사람이, 그저 내가 아니었을 뿐일까.’

다시 소리가 시작되었다. 탁자가 엎어지는 소리. 바닥으로 쓰러진 집사를 부르는 소리. 새파랗게 질린 그의 얼굴을 보고 누군가가 욕설을 내뱉는 소리. 독을 발라 꼼꼼하게 닫아 두었던 종이봉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소리, 소리.

갖가지 소리에 파묻힌 엘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의 곁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남자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고 제 곁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살짝 벌어졌으나 비명을 지르지 못하는 입. 눈물 흘리지 못하는 눈동자. 시간을 멈추어 낸 듯한 여자의 굳은 몸.

에드문트는 기시감을 느꼈다. 언제였더라. 언제 저 얼굴을 보았더라?

‘그래, 아마도…… 이전 생에서.’

죽은 기억이, 차가운 석실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 * *

에드문트가 처음 식사 자리에서 독을 만난 건, 다섯 살의 여름이었다.

물론 그전에도 공작가에는 아직 즉위하지 않은 2황자가 1황자 세력인 라스페 공작가를 견제한답시고 보낸 독이 심상치 않게 올라왔지만, 운이 좋았는지 에드문트는 다섯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독을 경험했다.

독이 발견된 건 식사가 슬슬 마무리되어 가는 때였다. 에드문트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후식을 수저로 떠올렸고, 이내 샛노란 과일이 얹어진 은수저가 까맣게 변색되었다.

맞은편에 앉은 어머니의 자리에서, 작은 수저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어 비명이 들렸고, 함께 자리에 앉아 식사를 들었던 이들이 속을 게워 내는 소리가 요란하게 식당을 채웠다.

역한 냄새와 비명이 섞여 식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어서 뱉어! 뱉으라고!>

부모의 윽박에 에드문트도 억지로 먹은 걸 전부 뱉어야 했다. 이미 씹어 삼킨 음식에 독이 있었을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린아이는 부모의 비이성적인 요구를 따라 줄 수밖에 없었다.

창백한 얼굴의 시종들이 식당에 들어와선 귀족들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뱉어 낸 토사물을 치웠다. 에드문트도 토사물과 함께 식당 밖으로 쓸려 나가야 했다.

이후 같은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나마 첫술을 뜨기 전에 독이 발견되면 다행이었고, 주요리가 한창 나오던 중이거나 후식을 자르는 은 식기가 까맣게 변색되면 또 먹은 걸 전부 토해 내야만 했다.

어린아이는 그 일련의 정해진 행위를 혐오했다. 다행히 공작 부부는 당장 본인들이 먹은 음식을 토해 내기 바빴기에, 에드문트는 대충 구역질하는 시늉만 내고 넘어갈 때도 있었다.

<너는, 너는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니?>

아무리 에드문트라도, 처음 독을 마주한 경험은 나름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같은 일이 수없이 반복되니 금방 무감해진 에드문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구역질하는 시늉만 하다가 부모에게 들키고 난 뒤, 에드문트는 아예 흉내조차 내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자신들이 구역질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에드문트를 끔찍해 했다.

<당신도 봤잖아, 저 애가 우릴 어떻게 보는지. 아버지가 석실에서 기어 나와서 우릴 쳐다보는 것 같다고!>

하나 그때 이미 에드문트의 나이가 아홉 살이었으니, 아이는 부모의 비위를 맞춰 주는 대신 그들을 무시했다. 겨우 독이 나왔다고 벌벌 떠는 부모를 에드문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는, 그들이 대체 무얼 두려워하는지 몰랐으니까.’

혐오하고, 무시하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독인 것처럼 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 부부가 사망했다. 에드문트는 이제 식탁 위에 독이 올라와도 구역질 소리와 비릿한 토사물 냄새를 맡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죄, 죄송합니다…… 분명, 확인했는데…….>

<치우고, 전부 내려보내.>

식사를 멈추고는 음식에 손을 댄 사용인들을 감옥에 가둬 추궁하고, 독으로 보복하도록 조처하면 그만이었다.

밤새 비명이 울리고, 다음 날이 되어 무고한 자가 감옥에서 기어 나와 빛을 마주하고, 그리고 나면 에드문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같은 자리에서 식사했다.

<예전에는 다들 며칠 입에 아무것도 못 댔는데 말이야.>

<아무렇지 않으신 건지, 아닌 척을 하시는 건지.>

<어려서 겁이 없는 걸지도 모르지.>

사용인들은 그 기괴한 고요함을 두려워했지만 어쩔 수 없이 적응해야만 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공작 부부의 ‘죽어 버리고 싶다.’라는 중얼거림을 들으며 억지로 게워 낸 토사물을 치워 내는 쪽보다는 몸과 마음이 편했으니까.

엘리아가 공작가에 들어온 뒤에도 라스페가의 식탁에는 꾸준히 독이 올라왔다.

하여 결혼한 지 두 달째 되던 날이던가. 엘리아와 함께 저녁을 들던 중에 식탁에 독이 발견되었다.

<마님, 안 됩니다!>

<무슨 일인데?>

당시 엘리아는 자신의 은 식기를 살피는 법도 몰라서, 끄트머리가 새카맣게 변색된 식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입 안에 집어넣으려 했다.

다행히 마침 곁에 있던 집사가 먼저 발견하고는 급히 엘리아를 저지한 덕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미 신물 나게 같은 일을 반복해 온 라스페가의 호위들이 곧장 상황을 정리했다. 엘리아의 손에 들려 있던 식기를 빼앗듯 챙기고, 식탁 위 음식들을 전부 치우고, 사용인들을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는 소리가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비명, 울음이 섞인 토악질 소리, 역겨운 냄새. 그런 건 어디에도 없었다.

스무 살의 엘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고요한 반응에 의아함을 느끼지 못했다. 도리어 약간의 만족감마저 느꼈다.

몸을 섞은 여자, 자신과 매일 같은 식탁에 앉아 마주 보아야 할 여자가 부모와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에.

‘만약 그때 엘리아가 울었더라면. 이미 삼킨 음식을 게워 내며 무서워했다면.’

사실 엘리아는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두려움을 느끼고, 왈칵 눈물을 터뜨려도 되었다.

겨우 스무 살이었고, 로앙가에서 사용인 한 명 데려오지 않아 홀로 공작가에서 지낸 지 고작 두 달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아마 독을 겪은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겠지.’

그러니 이참에 속에 쌓아 두기만 했던 불안감과 공포를 모두 터뜨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

하나 엘리아는, 본능적으로 제 두려움을 받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알아챘다.

누구도 엘리아가 죽을 뻔한 일을 새삼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화를 면하셔서 천만다행이라고 위로해 주지도 않았으니까.

에드문트는 눈으로만 아내가 무사함을 확인했다. 독이 닿지 않았고, 하여 무사하니 충분하다고 여겼다.

<집사가 제대로 가르치게.>

식탁이 깨끗이 비워지고, 사용인들이 모두 끌려가 조용해진 식당에 남자의 말 한마디가 엘리아를 스쳐 지나갔다.

직접 향해 온 것도 아니었고, 여자를 장애물인 양 비껴가선 집사에게만 닿았다.

그건 마치 엘리아가 잘못했다는 말처럼 들렸으리라. 네가 몰라서 무서워하는 것이며, 무지함 때문에 하마터면 네가 죽어 버릴 뻔했노라고.

명백한 그의 실수였다. 그가 말을 가려야 했는데. 자신의 말이 여자의 오해와 뒤섞여 책망한 꼴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

그저 아내가 독을 확인하는 법에 무지한 듯해서, 그래서 집사에게 ‘가르치라.’라고 특별히 당부한 에드문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지하 감옥으로 향하려다가, 변덕이 일어 뒤를 돌아봤을 때.

‘그때 얼굴을…… 여태 잊고 있었는데.’

열여덟 소녀의 얼굴을 보니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와 같은 얼굴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크게 뜬 눈, 살짝 벌어진 입술. 미동 없는 얼굴. 무슨 의미인지 몰라 외면했다.

멍청한 새끼. 대체 왜 몰라줬던 걸까.

어째서 괜찮으냐는 말 한마디라도 건네지 않고선. 그대로 뒤돌아 지하 감옥으로 가 버렸던 걸까.

스무 살의 아내는, 대체 그날을 홀로 어떻게 견뎠을까.

* * *

바닥에 쓰러진 집사가 급히 처치를 위해 별관으로 옮겨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접촉한 곳은 손뿐이지만, 아직 무슨 독인지 모르니까 조심하고. 봉투도 전부 가져가서 처리해.”

“융단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표시만 해 둘까요.”

“왜, 닿은 곳 표시해 놨다가 오려 내고 다시 쓸래? 어? 시키지도 않은 데에 신경 끄고 당장 필요한 일이나 해!”

한스가 에드문트를 대신해 뒤처리를 지시하는 동안, 벽에 걸린 시계는 겨우 분침 몇 번 찔끔거렸을 뿐이었다.

하나 누군가에게는 영원 같은 시간이었다.

맨손으로 독 묻은 봉투 입구를 만지고 중독 증세를 보인 집사. 지척에서 사람이 쓰러졌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로앙가의 아가씨.

그리고, 여자의 곁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에게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아, 제기랄.’

대강 수습을 마친 한스는 탁자가 엎어져 난장판이 된 서고에서 욕설을 뇌까렸다.

두 남녀가, 마치 오래된 장서처럼 굳어 있었다.

엘리아의 모습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눈앞에서 제가 가져온 거나 다름없는 독에 사람이 쓰러졌으니,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이리라.

문제는 에드문트였다. 그는 집사가 눈앞에서 독에 당한 상황을 두고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그답지 않았다.

아마 이전의 에드문트라면 집사가 쓰러지자마자 곧장 반응을 보였으리라.

쓰러진 집사의 생사를 확인해 처치를 받도록 하고, 독 묻은 봉투를 조사하도록 명령하는 건 전부 한스가 아닌 에드문트의 몫이 되었으리라.

하나 그는 굳어 버린 엘리아를 흉내 내고 싶기라도 한 건지, 한스와 호위에게 명령을 내리지도 않고 쓰러지는 집사의 모습을 그대로 눈에 담았으면서 반응하지도 않았다.

그 모습이 한스에게 끔찍하게 보인 이유는…….

에드문트의 자해를 하기 직전의 전조 증상이, 딱 지금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발. 이 상황에서 미쳐 버렸다고는 하지 말아 달라고!’

한스는 식은땀이 맺힌 손을 바지춤에 닦으며 에드문트 라스페를 살폈다.

그가 자해하는 꼴을 본 게 벌써 몇 번째였던가. 지금처럼 가만히 굳어 있다가, 갑자기 황후의 사람을 죽이겠다고 짐승처럼 날뛰었더랬지.

석실. 그 빌어먹게 추운 곳에 처박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더니 기어코 지하 감옥에 산 채로 죽어 가는 인간의 비명이 울려 퍼지게 했었지.

‘그냥 독이잖아. 당신 여자 멀쩡하다고…… 응? 어차피 당신한테 의미 있는 거 저 어린 여자 하나뿐인 거 아니었어? 아니면 설마, 설마 약혼자가, 사랑이 죽을 뻔했다느니 하는 식으로 받아들여서는 미친 꼴 보이려고?’

에드문트 라스페가, 엘리아 로앙을 잃을 뻔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또 무슨 미친 짓을 벌이려나.

분명 말도 해 주지 않던 악몽에 시달리던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를 게 뻔하잖은가.

한스는 일전에 석실에서 그가 검을 집어 올렸던 순간을 되새기며 정말로, 그냥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심경이 들었다.

에드문트 라스페가 죽어 버리든 말든, 일단 저부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침착하자. 그냥 튄다고 목숨 보전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일단 공작께서 검을, 가지고 있었던가. 제기랄. 하필 벨젠 경이 자리를 비워서는!’

한스가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기사 한 명이 한스와 눈을 마주치자, 다행히 그가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부터 정해 둔 그들만의 신호였다.

‘좋아. 검은 안 가지고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당장 다짜고짜 누가 죽어 나갈 일은 없겠네. 설마 저치들이, 공작가의 기사씩이나 되어선 검을 빼앗기지는 않을 테니까.’

적어도 그가 검을 빼 들어 스스로든 다른 누군가든 찔러 피를 낼 일이 없음을 깨닫자, 한스는 다리가 풀릴 것 같은 안도감을 느꼈다.

하나 여전히 상황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하필 독에 당한 게 집사라서, 미쳐서 무너지기 직전의 에드문트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방법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게 되었다.

마른침을 삼키던 한스가 다시 에드문트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그러던 중, 남자의 몸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여자를 떠올렸다.

<다음에는 머리끈 말고, 나를 달라고 해요. 도저히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은 때가 오면요.>

이어 엘리아의 부탁을 상기했다. 모르겠다. 정말 효과가 있을까?

한스가 알기로, 에드문트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건 두 가지 중 하나를 벌인 뒤였다.

자해해 통증을 느끼든지, 엘리아의 흔적을 찾아 각인하든지. 그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곤 했다.

‘되려나. 아니면 안 되려나…….’

고민할 틈이 없었다.

“엘리아 아가씨.”

당신 앞에 있는 여자의 이름을 기억하라고, 사랑하지 않느냐고. 그 감정으로 다시 버텨 내라고 에드문트를 밀어붙이는 게…….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한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니까.

* * *

굳어 있던 엘리아가 한스의 목소리에 움찔거리며 반응을 보였다. 동시에 에드문트도 기억에서 깨어났다.

불편한 옷을 껴입고 식당에 앉아 있던 스무 살의 아내 대신, 누워서 책을 읽는 걸 좋아하는 열여덟 소녀가 눈앞에 있었다.

그는 천천히 현실로 돌아왔다. 뭘 하고 있었더라.

‘……기시감. 그래, 엘리아의 얼굴을 보다가 과거를 떠올렸었지.’

그날은 처음 엘리아가 식당에서 독을 발견했던 날이었고, 에드문트는 엘리아를 내버려 둔 채 지하 감옥으로 향해 사용인들을 죽였다.

그날따라 명확한 물증이 발견되지 않고, 오로지 심증뿐이었던 터라 에드문트는 결국 그날 독을 넣었을 가능성이 있는 사용인들을 모두 죽여야 했다.

넷이었나, 아니면 여섯이었던가.

그가 지하 감옥에서 피를 흩뿌리는 동안, 스무 살의 아내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너는 혼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어떻게 버텼던 걸까.’

화려한 식탁 앞에 앉아 있던 기억 속 모습과 달리 엘리아는 부서진 탁자 앞에 있으며, 에드문트는 뒤돌아 외면하는 대신 곁에 서서 엘리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명백한 차이가 존재했으나 에드문트는 왜인지 자꾸 과거의 엘리아를 훔쳐보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의 너도, 지금처럼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굳어 있었을까.’

다시, 과거와 현재가 엉망으로 뒤엉긴다.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눈앞의 엘리아는 현실인가? 아니면 또 제가 지긋지긋하다며 떠나갈 환상인가.

죽어 버린 여자가 그를 죽여 버리기 위해 돌아왔는가. 아니면 한 번 죽어 버렸던 그가 숨긴 비밀을 헤집겠다고 다가오던 여자가 제 눈앞에 있는 걸까.

“……엘리아, 엘리.”

에드문트는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에는 그를 떠난 여자를 생각하며. 두 번째에는 지금 그가 서 있는 이곳이 여자가 살아 있는 현실이기를 바라며.

엘리아, 그리고 엘리. 같은 사람임과 동시에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는 이름을 한 번씩 불렀다. 누군가는 대답해 주기를 바라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시 죽어 버린 걸까. 아니면 꿈속 어딘가를 헤매고 있던가.

“엘리아.”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아마 정상인이었으면 당장 여자에게 손을 뻗어 끌어안을 생각을 했겠지만, 에드문트는 그런 방법은 몰랐다.

할 수 있는 것, 할 줄 아는 건 그저 이름을 부르는 일뿐이었다.

“엘리아, 엘리. 엘리…….”

이번에는 반응을 보였다. 작은 몸이 차가운 비를 맞은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이내 에드문트를 향해 서서히 몸을 돌렸다.

빈 캔버스처럼 창백해진 얼굴이 딱 절반만 드러났다. 마치 남은 절반은 짓이겨진 터라 보여 줄 수 없다는 듯.

에드문트는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을 어떻게든 억눌러 보려 노력했다.

독. 죽음. 엘리아. 누군가에겐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을 그 담담한 단어의 배열이 에드문트를 미치게 하려 했으나, 죽어 버렸던 여자를 떠올리게 했으나 참고 견뎠다.

“엘리.”

스물여덟의 엘리아가 아닌, 눈앞의 엘리. 어린 소녀의 이름을 재차 불렀다.

엘리. 엘리…….

여자의 이름은 남자에게 거울 대신이었고, 날을 갈아 둔 단검 대신이었다.

스물둘의 얼굴을 확인할 거울도, 저를 찔러 상처 낼 단검도 없는 서재 안에서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이름만으로 버티어야만 했다.

살을 에는 노력은, 다행히 보답받았다.

“……에디.”

지척까지 다가왔던 석실의 서린 냉기가 여자의 목소리에 밀려 순식간에 흩어졌다. 기억에 잡아먹히는 대신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분명 아까는 어둠에 잡아먹혀 보이지 않던 절반의 얼굴이, 지금은 모두 드러나 있었다.

에드문트를 올려다보는 얼굴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지.’

하나 그를 부르던 목소리와 달리 엘리아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들어 올린 얼굴 덕에, 가까스로 눈물이 추락하지 않았더라.

쏟아 내지 않으려고, 고개를 치켜들고 버티고 있었다.

에드문트는 깨달았다.

‘아. 너도 전부 버티고 있구나.’

무섭다고 말도 꺼내지 못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전부 혼자 감당하려 하고 있음을.

‘대체 왜, 그냥 울어 버리지. 눈물 흘리며 무섭다고 말하면 여기 있는 모두가 너를 다독여 주고 안전하게 보살필 텐데. 너를 보호하는 데 실패한 모든 이들을 치죄하고, 목숨을 받아 내어 네게 바치고야 말 텐데.’

혼자 버티는 건 힘들 텐데.

“엘리아.”

이제는 그 외로운 기분을 나도 알고 있는데.

엘리아. 나는, 차라리 모르는 채 살았던 시절을 그리워하고야 말게 하는 이 아득한 두려움을 이제는 너와 공유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어.

너를 버려두고 떠나기 전에, 죽음을 만들기 위해 뒤돌아 나가기 전에 네 이름을 부르고, 두려움에 공감해 줄 수 있어.

이제는 너를 그저 버려두지는 않을 거야. 나 역시 너만큼 두려운 줄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나 역시 무섭노라고, 너를 잃을까 두려워 아득한 공포에 빠졌노라 고백하지는 않을 거야.

두려움에 떠는 네게, 어찌 내가 느낀 감정까지 얹어 줄 수 있겠어. 설사 네가 이미 눈치채었더라도, 나는 아닌 척을 해야지.

괜찮다고 말해야지.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 하니까.

“엘리, 괜찮아.”

괜찮아. 너에게 너무 기대지 않고도, 나는 전부 버텨 볼 테니까.

* * *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공포를 이겨 낸 것처럼, 여자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공포로부터 조금씩 벗어났다.

엘리아. 엘리.

길게 부르는 이름 뒤에는 미약한 떨림이 있었으며, 다정하게 부르던 애칭은 확인을 구하는 듯 끝이 살짝 올라갔다.

모두 자신의 이름이었다. 아마도.

그리고 거짓말. ‘괜찮다.’라는 말뿐인 위안이 들려왔다. 괜찮을 리 없는 상황과 사람들의 소리 틈을 파고들어 눈을 가리려 했다.

엘리아는 있는 힘껏 고개를 가로저었다. 치켜든 얼굴에 고여 있던 눈물이 흩어지고, 덕지덕지 붙어 있던 조금 전 광경이 모래처럼 흩날렸다.

‘부정하려는 게 아니야. 괜찮지 않다고 화를 내는 게 아니고, 나는 단지…….’

그저 귓가에 자꾸 파고드는 소음을 떨쳐 내고 싶을 뿐이었다.

내심 괜찮다는 헛된 위로도 함께 떨어져 나가길 바랐으나, 에드문트의 괜찮을 거라는 위안을 모조리 부정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에디 너는, 괜찮아? 미안해. 나 때문에 집사가…… 내가 로앙가에서…….”

결국, 엘리아도 에드문트에게 괜찮냐는 의미 없는 질문이나 하고야 말게 되니까.

진실과는 별개로 네게 괜찮다는 말로 안도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은, 다르지 않을 테니까.

괜찮을 리 없는 상황에서, 괜찮냐고 확인하고 괜찮을 거라고 다독이는 말들은 잔인할 뿐인데.

“엘리, 괜찮아. 집사도 괜찮을 거야. 전부 다 괜찮을 거야.”

그저 달래기 위한 대답인 줄 알면서도 안심해 버리는 건, 비겁할 뿐인데.

“일단 자리를 옮기자. 일어날 수 있겠어?”

“으, 으응. 잠깐…….”

몸을 일으키려다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엉망진창이었다. 깨진 접시가 나뒹굴었고, 집사가 토한 핏자국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다시,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깨지는 소리, 고함치는 소리, 비명,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일어나야, 여기서 나가야 해.’

엘리아는 외면하고 싶은 기억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 봐도 풀린 다리가, 떨리는 손이 엘리아를 방해했다.

이를 악물고 몇 번을 시도했지만, 팔걸이를 붙잡지 못한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아, 제발.’

당장이라도 다시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엘리아를 압박했지만, 몸은 야속하게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엘리, 잠시만.”

손잡이를 붙잡는 데 온 신경을 쏟던 엘리아의 위로 어둑한 그림자가 지나 싶더니, 몸이 훅 들렸다.

“어, 어?”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에드문트의 품 안이었다.

겨우 손 한 번도 쉽게 허락해 주지 않던 남자가 엘리아를 번쩍 들어선 품에 끌어안았다.

언제였더라.

처음은, 당연히 부모였겠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마지막은, 언제였는지 어렴풋이 기억난다. 아홉 살 때이던가. 일곱 살 많은 제 오빠가 마지막이었다.

<엘리, 괜찮아. 꿈꾼 거야. 응? 제발. 제발 울지 마.>

악몽을 꾸는 바람에 울면서 깨면, 외젠이 어린 저를 안아 들고는 한참이나 방 안을 서성였다.

죽은 부모를 대신해 보겠다고.

<우리 아가씨, 무서운 꿈 다 사라져라.>

가끔 데이지가 교대하여 저를 안아 주기도 했다. 엘리아를 달래겠다고 안아 든 외젠이 같이 눈물 쏟는 바람에.

울지 않게 된 이후부터는 누가 저를 풀쩍 안아 들 일이 없었다.

그래서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처음은 아니었다.

“미안해. 조금만. 조금만 참아.”

분명 처음도 아니었는데, 낯설었다.

“엘리.”

에드문트의 목소리가 귀 언저리를 간질였다. 엘리아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는 남자의 말에 그저 눈을 끔벅거리기만 했다.

현실감이 없는 상황이 낯설어 마치 꿈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모두 현실이었다.

크라바트를 매지 않은 남자의 목덜미가 마치 여자를 위해 깎아 놓은 것처럼 뺨에 밀착되었고, 몸이 들린 순간 무심코 붙잡은 셔츠가 작은 손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전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자각하는 순간 몸이 바짝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에드문트의 팔이 엘리아의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마치 품에 가둬 버리려는 듯.

결박된 몸에 전율이 일었다. 환희였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엘리아는 떨림이 멎을 새 없는 팔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그의 목에 감아 매달린 순간…….

격정 어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름과 함께.

“에디, 에디…….”

마치 눈을 깜빡이듯, 숨을 쉬듯 자각하지도 못하고 하는 움직임처럼 에드문트의 이름을 불렀다. 부를수록 간절해지고, 안타까워 멈추지를 못했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달아오른 마음은 이미 차지한 체온마저 욕심냈다. 자각할수록 더 욕심날 뿐이라 세게 파고들었다.

그의 품 안은, 푸르른 호수 앞에서 감싸 주던 옷과는 비할 데 없이 따듯했다. 품 안에서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따듯해. 내가 전부 다 녹아내릴 것 같아.’

마음이, 불안감이 전부 다 녹아 버려서는 끈적한 단물이 되어 뚝뚝, 떨어지고야 말 것 같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고 만 엘리아가 에드문트에게 더 절박하게 매달렸다.

“에디.”

자꾸만 파고드는 움직임에 남자의 몸은 뻣뻣하게 경직되었거늘, 그 굳은 품 안에서조차 엘리아는 안락함을 느꼈다. 좋다는 막연한 감각을 그의 이름을 불러 표현했다.

에디. 에드문트. 읊조릴 때마다 제 입술이 그의 목덜미에 닿아, 절절한 숨으로 그를 적시는 줄도 모르고. 그때마다 남자가 턱을 악물어 견디어 내는 줄은 몰랐으니까.

‘지금보다 더, 더 세게 안아 주면 좋겠어.’

숨을 쉬기 버거울 정도로 안아 주었으면, 너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세게 끌어안아 주면 좋을 텐데.

“……금방, 내려 줄 테니까. 조금만. 잠시만 참아 줘.”

들어 본 적 없는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마치 심장에 대고 울리는 듯 무거웠다.

서고를 빠져나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거닐고, 화려하게 치장한 계단을 오르는 내내 그는 같은 말을 읊조렸다.

“미안해. 조금만…….”

참아 달라고.

‘뭘 참으라는 거지? 모르겠는데.’

몸을 감싸 주는 단단한 팔이 아프게 느껴질까 봐 걱정되는 걸까. 뺨에 닿은 그의 체온이 너무 따듯해서, 그래서 미안하다는 걸까?

셔츠 너머로 전해지는 맥박, 심장이 뛸 때마다 흐드러지게 퍼지는 옅은 체취가 엘리아를 힘들게 한다고 착각하나.

그래서 귓가에 재차 스미는 목소리가 자꾸 참아 달라고 애원하는 걸까.

그럴 리가. 아마 참아 달라는 건, 당장 그의 셔츠를 적실 엘리아의 눈물을 말하는 것이리라.

엉엉 울며 눈물 쏟아 내고 싶은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참아 내라는 뜻인가 싶어, 엘리아는 더욱더 남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눈치챘을까. 옷자락에 매달려 자꾸 품에 닿아 오는 여자를 위해.

견뎌 달라던 목소리는 점차 희미해져 가고, 성급하게 내딛던 발소리가 ‘쿵, 쿵’ 점점 느려져서는, 맞닿은 체온이 이별해야 할 장소까지 두 걸음, 세 걸음.

살짝씩 늦어지고야 말았음을.

* * *

“공작님, 렌 경이 먼저 로앙 백작이 있는 곳으로 출발했습니다. 저는 로앙가에 갈 사람들을 마저 소집하겠습니다.”

“한스, 너는 여기에 있어.”

엘리아의 곁에 있으라는 공작의 말에 한스가 잠시 주춤했다. 마뜩잖은 명령이었지만 실랑이할 새가 없었으니, 그래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 대신 시릴과 조제프가 가도록 조처하겠습니다. 벨젠 경은 지금쯤 연락을 받고 로앙가로 향하고 있을 겁니다.”

에드문트가 엘리아를 데려온 곳은 짙은 색으로 치장한 침실이었다. 엘리아를 소파에 앉혀 준 에드문트는, 뒤따라온 한스에게 지시를 내리고 나서야 다시 제가 품에 안아 보았던 여자를 살필 수 있었다.

엘리아가 몽롱한 표정으로 에드문트를 올려다보았다. 감당하기 힘들었을 기억, 그의 체온에 취했던 여운에 엉망으로 휘감겨 있었다.

붉어진 눈가, 그의 목덜미에 짙은 흔적을 남겼던 말랑한 뺨. 살짝 벌어져 다물릴 줄 몰라서는 당장이라도 제 이름을 담아 줄 듯한, 에드문트를 받아 내 줄 것 같은 새빨간 입술.

“…….”

달려들어, 집어삼키지 않기 위해 에드문트는 한 걸음 물러났다. 한 걸음으로는 모자라 다시 한 걸음 더 멀어졌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선을 그어 내듯 기사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에드문트는 제 손을 바짝 그러쥐어 통증을 만들어 냈다.

“엘리.”

“……으응.”

“로앙가에 다녀올게. 여기에 있어.”

로앙가에 간다는 말에 엘리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로앙가에 다녀오겠다는 에드문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곧장 짐작한 것이리라.

엘리아는 무릎 위에 아무렇게나 팽개쳐 두었던 손으로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눈앞에, 로앙가에 불 피바람이 그려졌다.

“에디. 나도, 나도 데려가. 내가 가야…….”

“엘리, 지금은 공작가에 있는 게 안전해.”

“그럼 데이지는, 데이지랑 외젠이…… 외젠은 저택에 없어. 데이지가 혼자…….”

“로앙 백작에게 바로 연락을 넣었고, 조금 있으면 저택에도 연락이 닿을 거니까 두 사람은 괜찮을 거야.”

입 안을 깨물어, 엘리아는 다시 터질 것 같은 눈물을 참았다.

로앙가에서 사람을 해칠 독을 옮겨 온 주제에 눈물이나 보인다면, 죽고 싶을 만큼 한심해지리라.

그러나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로앙 백작가에 갈 인력을 추려 낸 한스가 돌아와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공작님, 이제 가셔야 합니다.”

그 말에 엘리아는 기어코 내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에드문트가 가는 게 슬퍼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아니면, 쓰러진 집사가 걱정되어서? 배신한 로앙가의 사용인 때문에 화가 나서, 두고 온 소중한 사람이 같은 독에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모르겠다. 대체 무슨 감정인지 모르는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바람에, 엘리아는 차라리 전부 외면해 버리려 했다.

“에디, 로앙가, 사용인…….”

눈물도 닦지 못하고 꾸역꾸역 말을 이어 갔다. 손으로는 얼굴을 훔치는 대신 제 옷자락만 열심히 쥐어뜯어 댔다.

“나한테, 나한테 봉투 준 애 이름. 루아. 5년 되었어. 루아는 갈색 머리. 곱슬머리이고…… 키가 나랑 같아. 이름이 루아이고…… 내가, 이름 이야기했던가?”

“응, 들었어. 루아, 갈색 곱슬머리라는 거.”

“5년…… 5년 되었다는 것도, 이야기했어? 우리 같이, 5년 동안 울고 웃고…… 5년이면 4층 식구 중에 여섯 번째로 오래되었어. 동생이 있다고 했는데…… 그 애가. 그 애가 나한테 봉투 준 게, 아래를 잡으라고…….”

달달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받았을 적 손동작을 보여 주려 했다. 하나 제 손조차 지탱하지 못하는 팔이 자꾸 미끄러졌다.

“그 봉투 건넬 때, 위쪽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어?”

에드문트가 허공에서 허우적대는 손을 지탱해 주었다. 그러곤 엘리아가 눈물에 묻어 보내는 소리를 한 자 한 자 더듬어 읽었다.

그는 더 다정하게 말하지 못함에 자책하였으나, 엘리아는 담담한 에드문트의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냥, 나보고 밑에 잡아야 한다고 했어.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모르겠는데. 그리고 데이지가, 데이지가 다 봤어. 그 애가 나한테 와서 주는 거. 그리고 데이지는, 데이지는 아니니까…… 에디, 부탁이야. 그러니까 데이지한테는…….”

“알겠어. 그렇게 할게.”

* * *

한스는 에드문트에게 출발하셔야 한다고 재촉하는 것도 잊고 엘리아의 눈물 섞인 말들을 주워들었다.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실 줄 알았는데. 아무 생각도 못 하시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데.’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진 건 한스조차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조차 당시를 생각하면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 오거늘.

그러나 엘리아는, 죽음을 두려워한다던 아가씨는 아득바득 버텨 앞만 바라보더라.

집사가 쓰러졌을 때 엘리아가 어떤 모습이었던가. 마치 자신이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죽여 버릴 듯 굴었다.

움직이지도 않고, 비명 한 번 내지르는 일 없이 그저 숨을 멈춘 채 지켜볼 뿐이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어.’

강한 건지, 약한 건지. 한스가 보기에 엘리아는 도통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견뎌 내는 것처럼 굴더니 울어 버리고, 눈물을 보이고 말았음에도 견뎌 내려 했다.

“에디, 에디. 제발 약속해 줘. 데이지한테는 너무, 너무 아프게 하지 말아 줘. 아픈 말 하지 말아 줘…….”

“그렇게 할게. 약속할게.”

마치 바빠서 잠시 미뤄 두는 것처럼, 본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무섭다고, 같이 있어 달라는 말을 아무리 기다려 봐도 엘리아는 입에 담지를 않았다. 그저 에드문트에게 괜찮으냐 물어보고, 로앙가를 염려할 뿐.

두고 온 데이지가 독이 발견된 저택에서 으레 이루어져야 할 모진 취조에 상처 입을까 봐 눈물 틈새로 애원했다.

겨우 한 사람이겠는가. 엘리아가 무고하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로앙 백작가에 겨우 데이지 한 사람뿐이겠는가.

하나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들, 전부 다 품을 수는 없는 건 이미 알고 있는 탓에. 잔혹한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엘리아는 고작 데이지 이름 하나만 읊었다.

꺼내지 못한 다른 이름은, 전부 죄책감이 되어 여자의 마음 안에 차곡차곡 쌓이겠지.

“미안해, 미안해 에디. 정말 미안해. 로앙가 때문에, 나 때문에…….”

라스페 공작은, 울며 제게 자꾸 미안하다고 말하는 여자를 내려다보다가…….

돌아섰다. 괜찮다고,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사랑이, 사랑 때문에.’

공작은 여자의 죽음을 상상케 한 이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엘리아는 그가 떠난 곳에서 혼자 죽음을 상상해야 하는 장소로.

각자의 자리로 향하느라 멀어지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한스는 생각했다.

‘사랑이 없었으면. 울었을까. 괴로워했을까?’

보는 사람이 가슴 아릴 정도로 서로를 대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그러니 결국 전부 사랑 때문이다.

‘겪지 않아도 될 슬픔, 고통. 그런 것들 다 사랑이 없었으면 견뎌 낼 필요가 없을 텐데. 당신들은 사랑 때문에, 저버리지도 못할 사랑 때문에 억지로 버텨야 하는구나.’

사랑이 아름답지만은 않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 누가, 괴로울 거라 기대하며 사랑을 시작하겠는가.

미리 알았더라면 사랑하지 않았을 텐데.

꾸역꾸역, 살아갈 필요도 없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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