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과거와 현재
엘리아가 특별히 마시고 싶다고 주문한 차는 생각했던 대로 에드문트와 무척 잘 어울리는 향을 풍겼다.
쌉쌀하면서도 사라지기 전 마지막 툭, 하고 남겨 두고 가는 달큼한 향이 도저히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더라.
“향이 정말 좋다. 서고에 배어 있는 나무 향이랑 섞여서 더 좋은 것 같아.”
둥그런 탁자에 에드문트와 마주 보고 앉은 엘리아가 집사가 따라 주는 차향을 음미하고는 연신 감탄을 표현했다.
‘감상적이기도 하셔라.’
공작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에드문트가 ‘좋다’거나 ‘싫다’라는 간단한 감정 표현하는 말 한 번 들을 일이 없었으니, 모두 매일 지겹게 맡아 온 차 향기에 생경한 기분을 느꼈다.
몇 시간째 서 있던 이곳에 나무 향이 배어 있던가? 차향이랑 섞이면 무슨 다른 향이 나고 그러나?
다들 저도 모르게 한 번씩 코를 들썩여 보았다.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손님으로 온 아가씨가 그렇다니 좋은가 보다, 생각하고 말았다.
한스 역시 차향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이 불편한 자리를 어서 나가고 싶은 마음뿐.
집사와 함께 엘리아와 에드문트의 찻잔을 채워 준 한스는 겨우 기회를 만나 작별을 고했다.
“그럼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시고, 저는 이만…….”
“한스, 그러지 말고 여기 앉아요.”
“예? 저 말입니까?”
“그래요. 마침 집사가 잔도 넉넉히 가져왔는데. 에디, 한스 경도 같이 앉아도 괜찮지?”
에드문트야 엘리아가 하고 싶다는 일에 ‘안 된다.’라고 할 리가 없었으니, 한스는 꼼짝없이 에드문트와 겸상해야만 했다.
최대한 느릿하게 의자를 꺼내 자리에 앉으니, 역시나. 상상한 적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불편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리라.
‘하여간 내가 제일 만만하지. 어휴…… 이거 나만 혼자 고통받을 수는 없겠는데.’
둘 사이에 혼자 불청객 꼴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 한스는 고민할 것도 없이 소임만 다하고 떠나려는 집사를 끌어들였다.
“저만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얻어 민망합니다. 혹시 고생한 집사님도 함께 초대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노련한 집사조차도 동석 제안에 흠칫하며 놀란 티를 내고 말았다.
“안 그래도 나, 공작가에 자주 왔는데도 집사랑 이야기할 기회가 없어서 아쉬웠어요. 오래 붙잡지는 않을 테니까, 같이 차 한 잔씩만 들고 일어나요.”
엘리아의 은근한 압박까지 더해지니 집사는 별수 없이 제 몫의 찻잔까지 새로 꺼내 들었다.
집사와 눈이 마주친 한스는 슬며시 그와 눈을 피해서는 따듯하게 데운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리하여 서고에는 라스페 공작과 한스 마이어에, 집사라는 진귀한 조합이 탄생하고야 말았다.
일견 전운이 감돈다고 할 정도로 어색한 풍경이었다. 부득불 함께 차를 마시자고 두 사람을 앉힌 엘리아마저 불편함을 느꼈다.
‘이 네 명이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려나?’
아는 거라곤 서로 이름뿐인 사람들과 다과를 든 게 벌써 언제 적 일이던가. 적당히 앉혀 두면 말주변 좋은 한스가 아무 이야기라도 꺼낼 줄 알았더니만…….
‘생각해 보니까 한스가 에디 앞에서는 주접떠는 거 본 적 없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말하는 걸 좋아해도 에디를 대하는 건 어려우려나. 그렇겠지.’
입을 꾹 다물고는 공작의 눈치만 살피느라 바쁜 한스를 내버려 두고 시선을 돌리자, 막 찻잔을 들었다가 내린 에드문트가 보였다.
‘에디한테 이야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겠지.’
세 사람이야 옆 사람이 차를 삼키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침묵이 계속 유지되어도 상관이 없겠으나, 엘리아는 라스페 공작가의 미덕이라도 되는 듯한 침묵이 무척이나 불편했다.
‘다들 제발 말 좀 하란 말이야.’
어색한 침묵을 해결하는 건 온전히 엘리아의 몫이 되고 말았다. 진하게 우려낸 차를 두 번이나 더 머금었는데도 도통 꺼낼 만한 이야기가 생각이 나지 않아 애가 탔다.
애꿎은 차만 계속 들이키느라 배가 부를 지경이 된 엘리아가 억지로 이야깃거리를 찾아냈을 땐 이미 찻잔이 바닥을 보였다.
“그…… 러고 보니까. 흐흠.”
엘리아는 마치 기수의 신호를 받아 출발하는 말처럼, 에드문트가 들고 있던 잔이 소리 없이 탁자에 내려앉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쌉싸름한 침묵을 들이마시기 위해서.
“전에 에디의 주치의가 왔을 때 말해 준 건데, 집사가 공작가에서 가장 오래 일한 사람이라던데? 얼마나 일한 거죠?”
“3년 뒤면 50년이 됩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가장 오래되었겠군요. 아마 그다음이 주치의인 제니스 님일 겁니다. 제가 저택에 오고 2년쯤 뒤에 공작가에 오셨으니까요.”
기껏해야 20년 정도를 예상한 엘리아가 50년이라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다들 그 얼굴을 보며, 볼이 통통하던 흰 토끼 그림을 떠올렸다.
“50년이라니, 한스는 얼마나 되었다고 했죠?”
“저 말입니까? 50년 뒤에 말하기 부끄럽습니다만 이제 4년 차입니다.”
“한참 멀었네요. 에디는 이제 스물두 해니까, 그래도 20년 넘게 일한 사람이 열 명은 안 넘겠지?”
“기사들은 대부분 일찍 퇴역하고, 오래된 가신들은 꽤 있지만 사용인 중에선 많지 않아. 아마 열 명 남짓이겠지.”
“그럼 에디가 열 몇 번째겠네. 나는 로앙가에서 다섯 번째는 될 텐데. 데이지가 태어났을 때부터 로앙가에서 지냈으니 제일 오래됐을 테고, 외젠이 데이지보다 생일이 몇 달 늦으니 두 번째. 그리고 정원사랑…… 더 없네. 내가 네 번째겠다. 아! 그러고 보니 집사는 데이지 어릴 적에 봤겠네.”
손가락을 꼽아 대며 순서를 세어 보던 엘리아가 데이지가 예전에 지나가듯 말해 준 이야기를 떠올려 물었다.
외젠이 어릴 때 낯을 많이 가려서, 부모님께서 외출할 때면 꼭 데이지를 데려가곤 했다고. 그래서 어린 시절 황궁 빼고는 안 가 본 곳이 없었다니 아마 공작가 저택에도 따라 왔으리라.
“예, 로앙 백작께서 방문하실 때 늘 또래의 여자아이가 동행했지요. 그 아이 이름이 데이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때는 선대 공작님께서 결혼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다들 공작가에 아이 웃음소리가 들리는 걸 무척 신기해했습니다.”
“아이가…… 그렇구나. 라스페가의 인척 중에서도 우리 또래 아이는 없으니까. 벨레노아 백작님께서 그나마 어린 축이실 테지만, 그래도 에디랑은 나이 차이가 꽤 있지?”
“내 사촌 누이는 로앙 백작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그럼 에디가 라스페 공작가의 인척 중에서도 제일 어리겠구나. 나는 아마…… 모르겠다. 사촌들 본 지가 오래되어서.”
이야기가 어쩌다 보니 가족에 관한 쪽으로 돌아가자 엘리아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나도 참, 하필 친척 이야기를 또 꺼내서 대화가 다시 끊기고 말았네.’
로앙 백작가 쪽이나 라스페 공작가 쪽이나 친인척 복이라고는 전혀 없어서 당연히 좋은 대화거리가 아니었다.
‘그나마 라스페 공작가는 세력이 약화되면서 불가피하게 연이 끊긴 거지만…… 로앙가는, 어후.’
엘리아는 벌써 10여 년째 친인척들과의 상속 재판으로 묶여 있는 재산을 떠올리고 홀로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하니 또 속 쓰리네. 우리 남매가 재산이랑 작위 물려받는 꼴이 보기 싫다고, 저들이 가지지도 못할 재산을 전부 다 묶어 놨으니…… 재판만 해결돼도 재정적으로 숨통이 팍 트일 텐데!’
괜한 생각을 떠올린 엘리아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고 다른 이야깃거리를 짜내려고 머리를 굴렸다.
‘아이고. 그러게 왜 우리까지 끌어들여선 괜한 고생을 하시나. 두 분이 그냥 정답게 이야기나 나누시지.’
그 애잔한 모습을 보다 못한 한스가 선심 쓰듯 오지랖을 부려 주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아가씨께서 라스페 님 어린 시절이 궁금하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주 어릴 때 말입니다.”
“음…… 맞아요. 내가 그랬죠. 궁금해했는데…… 에드문트 어린 시절, 음. 본인 앞에서 물어봐도 되려나? 에디, 집사한테 물어봐도 돼?”
대관절 어린 시절 이야기는 왜 물어보는 것이며, 굳이 에드문트에게 허락을 구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에드문트는 집사에게 엘리아가 원하는 대로 대답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요, 예전 일이라면…….”
공작의 허락을 받은 집사는 손등을 가리기 위해 길게 뺀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옛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막 태어나셨을 때가 제일 먼저 생각나는군요.”
“막 태어났을 때?”
“예, 그때가 동트기 직전이었는데 한참 하늘을 보며 기다리다가 도련님을 뵈었지요. 그때 본 눈동자가 하늘빛과 꼭 닮아, 넋을 잃고 바라봤습니다.”
당시의 공작이었던 에드문트의 조부가 직접 막 태어난 아이를 안아 들고 집사에게 보여 주었다.
<라스페가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아이라네. 한번 안아 보겠나?>
자식이 없던 집사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작은 도련님을 보고 놀랐고, 마침 반짝 눈을 뜬 에드문트의 눈동자에 말문을 잃고 말았다.
안아 보기는커녕,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주저되어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감정 표현이 드문 에드문트의 조부조차 그 모습에 미소를 지었더랬다.
<자네는 아마, 이 아이가 공작이 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겠지.>
<그때가 되면 제가 아주 나이가 많아, 장성한 도련님께 되레 폐만 끼치고 말 텐데요.>
<……그건, 모를 일이지.>
손자를 안은 채, 그는 어떤 미래를 예견했던 걸까.
집사는 당시 이미 마흔을 앞두고 있었기에, 아마도 도련님이 무럭무럭 자라 결혼을 하는 것까지는 볼 수 있어도 라스페가를 이어받는 모습까지 보는 건 어려우리라고 생각했다.
강보에 싸인 작은 아이가 공작 작위를 물려받는 게, 겨우 12년 뒤에 닥칠 일이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거늘.
어쩌면 그분께서는 제 유약한 자식 내외가 에드문트를 두고 일찍 죽게 되리란 걸…… 미리 짐작했던 건 아니었을까.
“동트기 전 하늘빛이라니, 아름다운 표현이네. 지금은 굉장히 짙은 색이 되었는데.”
조도를 높이지 않은 서고에서 에드문트의 눈은 그저 새카만 어둠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집사는 갓 태어났을 때 지니고 있던 푸르름을 떠올렸으며, 엘리아는 짙은 청색의 꽃을 떠올렸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은 에드문트 역시 그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모두 한 번 죽었던 사람들의 눈동자였다.
에드문트의 업보가 살해한 여자의 눈은, 늘 그렇듯 가을빛을 한 움큼 쥐고 있었다.
그리고 50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었던 집사의, 여태껏 의식해 본 적 없던 눈동자 속에는 녹음을 닮은 녹빛이 스며 있었다.
에드문트는 돌연 숨이 막혔다.
뜨끈한 차가 아직 다 넘어가지 않은 탓일까. 드넓은 서고가 갑자기 갑갑해졌을 리는 없는데.
크라바트도 매지 않은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데, 목줄 메인 것처럼 조여 숨이 가빴다. 단추라도 풀면 조금 나아지려나.
“나도 아주 어릴 적은 당연히 못 봤지만, 예닐곱쯤의 에디를 본 기억이 나. 그때 눈도 밝은 푸른색이라서 정말 보석이 반짝이는 것 같았는데.”
“예. 정말,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제 인생에서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귀한 보석이었지요.”
그리움이, 그리고 애정이 묻어나는 표현에 자꾸 숨이 막혔다.
집사의 죽음이 어땠더라.
50년의 인생을 쏟아부은 공작가를 위해 죽어 버렸을 때, 에드문트가 그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 주었던가.
슬퍼했던가. 그의 녹빛 눈이 어둠에 잠기는 모습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잃기 전에, 소중한 걸 알았더라면…… 그런 일이 가능했더라면.’
가능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라 위안 삼아 보아도, 후회는 어쩔 수 없다.
다만 바랄 뿐이다. 밟았던 궤적을 피하여 달아날 수 있기를. 아무도 잃지 않고, 지켜 낼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함께 모여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는 찰나의 시간을 다시 한 번 누릴 수 있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 * *
예순이 넘은 집사는 이어 조금씩 자라 목을 가누고, 제힘으로 아장아장 걸었던 어린 시절의 에드문트를 이야기했다.
“사용인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늘 작은 도련님 얼굴 한번 보려고 방문 앞을 기웃거렸습니다. 어디 가서 이렇게나 예쁜 아가님은 못 볼 거라면서요.”
“와. 얼마나 예뻤길래? 혹시 초상화 그린 거 없으려나?”
“화가를 몇 번 초청했는데, 다들 그림이 실물만 못할 거라며 포기하더군요.”
“세상에…… 그 정도였다고?”
십수 년 전 과거를 회상하는 집사의 이야기는 에드문트조차 생소했지만, 딱히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공작께서 무얼 대단히 잘하셨느니, 어쩌느니 하는 일차원적인 이야기뿐이었으니까.
‘어휴. 미안해라. 내가 우리 집사님한테 못 할 짓을 했네. 본인 앞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늘어놓게 하다니.’
만약 에드문트가 없었다면, 말수 없는 집사도 마치 제 손자 아이를 자랑하듯 어린 시절의 에드문트를 실감 나게 그려 냈을 텐데. 당사자를 의식하지 않고 옛적을 회고하는 건 노련한 집사로서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아흐…… 언제쯤 끝나려나. 벌써 차를 석 잔은 마셨는데.’
집사도 집사였지만, 옆에 앉은 보좌관 한스도 관심 있는 척 관심 없는 이야기를 듣느라 고역이었다.
공작님 잘난 거야 다들 아는 사실이고, 그게 심지어 타고난 거였다는 말도 딱히 신기할 게 없었다. 되레 공작의 어린 시절 무용담은 한스에게 깊은 자괴감만 안겨 줄 뿐이었다.
‘다들 재미없나?’
엘리아는 잠시 차를 마시느라 시선을 돌리고 나서야, 집사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작 먼저 ‘공작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낸 한스는 찻잔이나 만지작거리고 있고,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정말 그랬어?’라고 물어볼 때만 ‘그랬던가.’, ‘그랬어.’라는 짧은 대답 하는 게 전부였고.
‘네 명이나 같이 앉아 있는데 즐거운 사람이 겨우 나 하나뿐이라니. 너무 비효율적이네.’
그렇다고 엘리아가 나서서 ‘다른 이야기 할까요? 나만 재미있는 것 같아.’라고 말하면 세 사람 모두 고개를 저을 게 분명했다.
어차피 모두가 행복해질 대화 주제를 찾는 건 요원했으니까.
‘재미있는데. 부럽기도 하고. 나는 어릴 때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엘리아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 주는 건 겨우 외젠이나 데이지 정도였으니, 기껏해야 같이 무얼 하고 놀았는지 정도의 이야기뿐이었다.
‘에드문트도 좀 알아주면 좋겠다. 과거에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 지금까지 곁에 함께 있어 주는 게 얼마나 특별한 건지.’
엘리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드러나질 않는 에드문트의 표정을 잠시 살피다가, 다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집사는 이제 겨우 다섯 살 때로 접어든 에드문트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중이었다.
“다섯 살 때 고대어를 다 끝냈다고?”
“못 믿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다들 공작님께서 글 익히시는 속도에 놀랐지요.”
“나는 다섯 살 때 뭐 했지? 한스, 다섯 살 때 뭐 했어요?”
“어디 보자…… 아마 제가 집 뒤에 있던 나무 타다가 넘어져서, 여기 다쳤던 게 다섯 살 때 같습니다. 그러고는 낫자마자 또 그 나무에 올라갔다가 다리가 부러졌지요.”
엘리아는 한스가 아마 적당히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 과장을 섞은 말일 거로 생각했다.
엘리아가 에드문트의 어린 시절이 궁금하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에도 마치 언젠가 말한 적 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대화의 포문을 연 것처럼.
“음, 나도 저택 뒤에 있던 나무에 올라갔다가 못 내려와서 울고불고 난리 친 적 있는데. 지금은 베어 버리고 없는 것 같아. 에디, 혹시 기억나? 어릴 적에 내가 그 앞에서 놀자고 졸졸 쫓아다녔던 거.”
에드문트는 잠시 생각하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건조한 반응에 괜히 옆에서 민망해진 한스가 참견해 왔다.
“두 분이 어릴 적에 자주 어울리셨나 봅니다.”
“그보다는 내가 맨날 에디 괴롭혔지.”
“도련님, 아니 공작님께서는 주로 책을 읽거나 로앙 백작님과 체스를 두며 시간을 보내곤 하셨지요. 그 때문에 엘리아 아가씨께서는 심심하셨을 겁니다. 워낙 활달하셨으니까요.”
“으음.”
“한스, 내가 활달하다는 말 뒤에 붙여 낸 그 ‘으음’은 무슨 뜻이죠?”
“아니, 아무 뜻도 없고…… 그냥 추임새였는데요! 아이고, 사람이 많아서 간식거리가 벌써 똑 떨어졌네요. 아직 저녁 드실 때까지는 한참 남았으니, 제가 주방에 가서 좀 더 챙겨 오겠습니다.”
한창 어떻게든 자리 뜰 생각만 하고 있던 한스가 마침 빈 접시를 발견하고는 냉큼 일어서려던 참이었다.
엘리아는 수가 뻔히 읽히는 한스의 행동이 우스워서 ‘이쯤 했으면 그만 괴롭히고 보내 줄까.’ 생각하다가 저택에서 들고 왔던 과자를 떠올렸다.
“내가 저택에서 과자 들고 왔는데, 여태 잊고 있었네. 아침에 저택 사람들이랑 같이 구우면서 여기 가져오려고 따로 챙겨 두었거든.”
“그…… 러셨군요. 하하. 아주 꼼꼼히 챙겨 오셨습니다?”
“칭찬 고마워요. 다들 입에 맞으면 좋겠는데. 에디한테는…… 어떠려나? 나도 너무 단 과자는 안 즐기는 편이라서, 식감 살려 먹는 거로 구워 왔어. 차에 곁들이면 괜찮을 거야.”
“직접 구운 거야?”
여태 본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도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던 에드문트가, 엘리아가 주방에 들어서서 과자를 구웠다는 말에 즉각 관심을 보였다.
엘리아가 음식에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아서 보인 반응이었는데, 속사정을 모르는 엘리아는 ‘내 솜씨가 미덥잖다고 생각하나?’라는 작은 오해를 하고 말았다.
‘분명 외젠이 또 할 말 없다고 에디한테 내가 손재주가 없느니 주방에만 들어가면 아까운 식자재를 다 망친다느니 하는 말로 흉본 게 분명해. 다들 저처럼 한 번에 다 잘하는 줄 아나? 손재주 없긴 해도, 배우면 곧잘 한단 말이야.’
하필 바로 직전까지 에드문트가 다섯 살 때 고대어를 읽고 썼다느니, 아홉 살에 이미 학술원 기본 과정을 다 마쳐서 더 배울 게 없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한창 하던 중이라서 엘리아는 약간의 자괴감을 느끼던 차였다.
‘바보같이 나무에 올라가서 징징거렸다는 이야기는 대체 왜 내 입으로 꺼냈담? 아무리 어릴 적 이야기라고 해도 그렇지.’
물론 에드문트 앞에서 엘리아가 ‘나도 잘하는 거 많다.’라고 할 만한 가락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제 점수 깎아 먹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 할 게 아닌가.
‘하여간 나는, 입을 좀 다물고 있을 걸 그랬어.’
엘리아는 조금이라도 만회하고 싶은 마음에, 반듯하게 구운 과자를 빨리 보여 주려고 했다.
겨우 과자 구운 거로 무슨 만회가 되겠느냐만, 적어도 에드문트의 머릿속에서 ‘나무 위에서 내려 달라고 엉엉 우는 엘리아의 모습’은 잠시 지울 수 있지 않겠는가.
“과자는 아침에 재료 챙기는 것부터 구워 내는 것까지 다 살펴봤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럼 제가 바로 꺼내 드리겠습니다. 아가씨께서 가져오신 짐 안을 살펴보면 될까요?”
“아, 근데 잘 부서지는 과자라서 꺼낼 때 조심해야 할 텐데.”
“한스 님, 제가 하겠습니다.”
집사가 일어나려는 한스를 만류하고는 기사들이 내내 지키고 있던 엘리아의 짐에 다가갔다. 간단한 구조를 가진 잠금 쇠를 열자 에드문트가 로앙가로 보냈던 책 두 권과 봉투 하나가 보였다.
물을 것도 없이 집사는 한쪽에 얌전히 놓여 있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단단히 접힌 봉투 윗부분을 잡고 들어 올리니, 무언가 툭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집사의 행동을 주의 깊게 보고 있던 기사들이 움찔거리며 경계를 높였다가, 소리의 정체를 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떨어진 건 로앙가의 사용인이 색지로 둘러 만든 겉 포장지였다.
“이런, 죄송합니다. 포장지가 아래쪽만 감싸고 있는 줄은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두꺼운 색지로 만든 겉 포장지는 집사가 미처 주울 새도 없이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한스가 살짝 몸을 일으켜 탁자 지척까지 굴러온 포장지를 잡아 올렸다.
“신경 쓸 거 없어. 아마 과자 부서지지 말라고 아래쪽에 둘러 놓은 걸 텐데.”
“그렇군요. 음, 다행히 안에 과자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주인님, 일단 여기서 개봉해서 내부를 확인해 드리고 따로 차려 내오겠습니다.”
“그래.”
엘리아의 짐이라는 이유로 따로 내부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혹시 그사이 누구의 손을 탔을지도 모르니 집사는 에드문트의 앞에서 봉투를 개봉하고자 했다.
색지가 벗겨진 연갈색의 봉투가 찻잔과 함께 챙겨 온 은쟁반 위에 올라왔다. 그사이 한스는 바닥에서 집어 올린 색지 포장지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엘리아는 양쪽에서 자신이 가져온 봉투를 살피는 두 사람을 보며 뜻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근데…… 저걸 왜 덧씌워 둔 거지? 색이 맞지도 않고. 봉투 위쪽을 잡으면 아까처럼 빠져 버리고 말 건데. 기름 배어 나온다고 한 건가?’
엘리아는 고개를 살짝 돌려 집사의 손에 들린 봉투를 살펴봤다.
‘봉투는 멀쩡해 보이는데. 하긴, 오늘 구운 건 버터가 많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계속 남아 있는 이 불편한 감각은 대체 뭔지. 그러고 보니 저택에서 나올 적에도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더랬다.
평소에는 아무리 가깝게 지내도 엘리아의 물건에 손을 대거나 하는 일은 없었는데.
‘아까 누가……. 루아였던가? 그래, 루아가 색지가 남는다고 둘러 봤다고 했지. 그 애가 저택에 온 지 얼마나 되었더라. 4년 전? 아니, 벌써 5년이나 되었네.’
5년이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엘리아뿐만 아니라 저택 사용인들 대다수가 루아의 가족이 어떤 사람들인지, 왜 고향을 떠나 수도에 와서 로앙가에 자리 잡았는지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알 정도이니까.
“이거 참, 두꺼운 재질이라 접어 모양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신기하게 접었네요.”
“……한스는 포장지에 관심이 많나 봐요?”
“제 형님이 작은 상점을 운영해서, 가끔 일손을 돕곤 합니다. 손님 접대하고 선물 포장하는 건 다 제 몫이지요. 나중에 저 과자 포장한 것도 한번 살펴봐도 될까요? 집사님이 여는 데 애먹는 거 보니 따로 특별한 방식이 있는 모양입니다.”
한스의 말에 아직도 과자 봉투를 열지 못한 집사가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칼을 댈 필요가 없을 줄 알았더니, 가장자리를 여러 번 접어 안쪽으로 고정한 탓에 봉투를 찢지 않고 열기가 어려웠다.
굳이 공작과 엘리아가 있는 곳에서 칼을 꺼내고 싶지 않았던 집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어떻게든 도구 없이 봉투를 열어 보려 했다.
안에 과자가 깨질까 봐 조심스럽게 움직이려니 작업이 더욱 더딜 수밖에 없었다.
“몇 개 깨져도 괜찮은데, 봉투 윗부분 정도는 손으로 찢어서 열 수 있지 않으려나? 보통 그냥 윗부분 몇 번 접어서 봉하는데, 손재주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는……?”
시간이 걸려 죄송하다는 집사의 말에 대꾸하던 엘리아가 갑자기 말을 끊고 굳어 버렸다. 내내 엘리아를 살피고 있던 에드문트가 가장 먼저 반응하여 이름을 불렀다.
“엘리, 괜찮아?”
“아가씨?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너도나도 나서서 이름을 부르는데, 엘리아에게는 그저 머리를 울리는 소음일 뿐이었다.
갑자기 청각이 차단된 것처럼 엘리아에게는 그 어떤 말도 닿아 오지를 못했다.
“그…… 어, 포장을…… 왜 나더러 아래를 잡으라고 했던…… 과자, 부서진다고 그랬으면서. 그래 놓고는 왜 열기 불편하게……?”
“엘리, 엘리아.”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그 애가…….”
에드문트가 재차 엘리아를 불렀지만 반응 대신 혼잣말이 계속 이어졌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에드문트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한스 역시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봉투를 연 집사도 두 사람이 일어나는 기척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제야 갑자기 변한 분위기를 눈치챈 집사가 봉투 안으로 뻗으려던 손을 멈추었다.
엘리아의 시선은, 어느 곳에도 가 있지 않았다.
주홍빛의 눈은 그저 뿌옇게 흐려져 있을 뿐. 에드문트는 자신을 바라볼 줄 모르는 눈동자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엘리아.”
힘이 들어간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여자를 불렀다. 탁자 앞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서고 문 앞에서 호위를 서던 사람들까지 함께 긴장을 입 안 가득 베어 문 채 이름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한스 역시 에드문트를 거들어 엘리아를 재차 불렀다.
“아가씨. 아가씨, 괜찮……?”
“한스, 그거. 그 종이 좀 줘 봐요.”
엘리아는 한스가 대답할 새도 없이 손에 들고 있던 포장지를 빼앗았다. 포장지는 바닥에 떨어지느라 살짝 구겨져 있었지만 두꺼운 색지를 쓴 덕에 사각으로 잡아 둔 모양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엘리아는 저택에서 사용인에게 받아 들었던 것처럼 아래를 받쳐 잡았다. 영문 모를, 아니 어쩐지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한 행동을 바라보며 모두가 다시 기다림의 시간에 들어섰다.
작은 입술이, 열리기를.
“설마 독을, 독을 썼을 리가…….”
그리고 고백하기를.
여자가 떠올린 불길한 추측을 공유해 주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