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모르는 이야기 3-32. 협상 (32/79)

나만 모르는 이야기 3

32. 협상

겨우 하늘 끝까지 치솟다 바닥을 드러냈다 파도치던 감정을 가라앉히고 나니, 어색함이 몰려왔다.

‘에디는 이제 좀 괜찮으려나?’

엘리아는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에드문트의 눈은 별다른 감정을 비치지 않고 있었으나, 장갑 낀 손은 여전히 엘리아에게 있었다.

커다란 손이 턱을 살짝 쥔 채, 눈물로 살짝 젖은 뺨 언저리를 천천히 쓸어 주었다. 멈추지 않고서.

‘으음. 간지러워.’

보드라운 장갑이 여린 살을 스칠 때마다 간질거렸다. 당연히 기꺼웠으나, 가만히 두었다가는 에드문트가 내내 엘리아의 눈가만 매만질 것 같았다.

아쉬움에 잠시 눈을 감고 감각을 더 깊게 느껴 본 뒤, 닫아 두었던 입을 열었다.

“우리, 뭐 좀 먹을까? 나 점심 제대로 안 먹었더니 좀 배고픈 것 같기도 해서. 따듯한 거 먹고 싶다. 나 올 때마다 후식으로 내주던 차 있잖아.”

정말로 배가 고픈 건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 마땅히 꺼낼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변명한 것뿐.

엘리아의 말에 에디가 손을 멈추고,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저녁 시간이 한참 남았음을 확인한 에드문트는 서재 안으로 집사를 불러들여 적당한 간식거리를 챙겨 오도록 했다.

엘리아는 잠시 서재로 들어온 집사를 피해 에드문트의 뒤로 숨어 버렸다.

‘창피해. 이게 또 무슨 꼴이야.’

눈물을 떨구느라 붉어졌을 얼굴이 뒤늦게야 부끄러웠다. 감정이 격해질 때마다 눈물을 보이고 마는 천성이 그 어느 때보다 야속했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집사가 살짝 드러난 엘리아의 얼굴을 모른 척해 주었다.

뒤이어 들어와서 에드문트에게 서류를 건넨 한스 역시, 누가 봐도 사람들 피해 얼굴을 숨기려 드는 행색인 엘리아를 보고는 일부러 아는 척 않고 홀랑 서고를 나가 버렸다.

‘흐음. 두 분이 서고에서 무슨 난리를 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서류 가져왔다고 홀랑 들어오지 않길 참 잘했네.’

연달아 열렸다 닫았다 하는 문소리가 울리고 나니 서고의 적막이 한층 더 크게 느껴졌다. 엘리아는 또다시 침묵을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애써야 했다.

“……아, 아! 나 책 한 권만 빌려 가도 될까? 추리 소설 말고. 데이지가 읽고 싶다고 한 책이 있어서. 차 기다리는 동안 찾아봐야겠다.”

“도와줄까?”

“그래 줄래? 내가 혼자 찾으면 종일 걸릴 것 같기는 해. 무슨 책이냐면, ‘이롬 시대의 철학 집단의 실증론과 허상론에 대한 고찰’이라는 건데…… 알아. 데이지 취향이 좀, 이상하지?”

“이롬 시대 철학에 관심이 있대?”

“배부르고 등 따신 애들이 의외로 머리 쓸 줄 안다지 뭐야.”

두 사람은 일단 다섯 개로 나누어진 서고 목록을 훑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엘리아가 자꾸 책을 넘기다가 우두커니 멈춰 버리는 일이 반복되어 도저히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철학서는 책장 몇 군데만 뒤져 보면 될 테니까, 서고 목록이 지루하면 직접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에드문트의 제안에 두 사람은 철학서가 가득한 책장 앞에 서서 엘리아가 아래쪽을, 에드문트가 위쪽에 놓인 책들을 살폈다.

그래 봐야 여전히 책을 찾는 건 에드문트뿐이었고, 엘리아는 자꾸 책을 찾는 일이 아닌 다른 생각에 열중하고 말았다.

에드문트가 아래를 흘끗 내려다보니 엘리아는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괴상한 제목의 철학서를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좋아하는 책이라도 발견한 거려나.’

에드문트는 엘리아를 내버려 두고 혼자 책장 두 개를 훑은 끝에 철학서를 찾아내었다.

“엘리아.”

“아, 아 미안해. 이거 너무 재미있어 보여서…… 어? 책 찾았어?”

“응, 해설본이지만.”

“해설본이면 충분해. 진짜 고마워, 에디. 나는 하나도 도움 안 되고 에디가 다 찾았네.”

“또 필요한 책 없어?”

“괜찮아. 나는 이제 아까 그거…… 목록 읽어 보려고.”

대화가 끊기니 또 어색함이 몰려왔다.

그때, 다행이라 해야 할지 서류를 전해 주고 나갔던 보좌관 한스가 서재에 다시 찾아왔다. 어딜 뛰어갔다 온 건지 그 잠깐 새에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라스페 님, 잠시 벨젠 경이 말씀드릴 게 있다고 합니다. 요 옆 응접실에서 이야기 나누시면 될 것 같습니다.”

벨젠 경이 따로 대화를 요청해 왔다는 말에, 심상치 않은 일이라 짐작한 에드문트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바로 옆에서 에드문트의 표정을 살피던 엘리아가 그의 반응을 보고는 에드문트의 등을 떠밀었다.

“급한 일인가 보네, 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괜찮아. 다녀와. 너무 늦진 말고.”

“응, 금방 올 테니까. 한스와 같이 있어.”

에드문트가 다시 손을 뻗어 뺨에 붙은 머리칼을 살짝 떼어 주었다. 백금색의 머리칼을 모두 거두어 주고 난 후에도, 한 번 닿은 손길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불안해 보여. 일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 아까 나눴던 대화 때문에…… 그렇겠지? 아직 제대로 마무리된 것도 아니고. 그냥 서로 모른 척 덮기로 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것 같더니 에드문트의 속도 지금 엘리아와 다를 바 없는가 싶었다.

실은 엘리아도 해맑은 척을 열심히 해 보려 했지만, 대화가 끊길 때마다 자꾸만 아까의 일을 곱씹고야 말았다.

장갑, 비밀, 불안, 접촉.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엉망으로 뒤엉겨서, 당장 풀어내고 싶어도 엄두가 나질 않았다.

‘시간을 줘야 해. 내가, 내가 또 조급해하다가는 더 일이 꼬일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에드문트의 불안감을 진정시켜 주는 게 우선이었다. 하필 지금 시점에 두 사람이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억지로 잡아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어쩌면 서로 잠시 얼굴 보지 않는 틈에 마음이 정리될지도 모르잖아?’

웃어 주면 좀 안심할까 싶어 엘리아가 어색하게나마 배시시 웃어 보였다. 에드문트 역시 평소처럼 살짝 마주 웃어 주었다.

겨우 미소가 되려다 만 표정이라, 예쁘다는 감상보다는 애잔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녀올게.”

“응, 차 먼저 안 마시고 기다리고 있을게.”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그를, 기다리겠다는 말로 배웅해 주었다.

* * *

바로 옆 응접실에 다녀올 사람에게는 과한 배웅을 끝내고, 엘리아는 한스와 둘이 서재에 남았다.

물론 여전히 멀찍이 떨어진 문 앞에는 호위들이 있었다. 엘리아는 문가를 흘끗 바라보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 거리에서는 대화는 들리지 않을 테니까. 벽이 보이지 않는 방에 각자 머문다고 생각하면…… 하아. 그래도 신경 쓰이는걸.’

에드문트와 엘리아가 나누는 대화는 분명 들어도 못 들은 척하며 절대 다른 사람들한테 누설하지 않겠지만 엘리아 혼자 있을 때는 분명 사정이 다르리라.

‘내가 혼자 있을 때 무얼 했는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분명 에디한테 보고하겠지?’

엘리아는 커다란 서고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대화뿐이라면, 굳이 서고 끝까지 가지 않아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대강 어디쯤이 좋을까 위치를 정한 뒤에 엘리아가 문 근처에서 멀뚱히 서 있는 한스를 불러냈다.

“한스 경.”

“예, 예에?”

“왜 그렇게 놀라요?”

“죄송합니다. 제가, 일 생각을 하느라…… 무슨 일이십니까?”

“잠깐, 책 고르는 것 좀 도와줄래요? 여기 책이 너무 많아서요.”

“물론이지요. 어떤 책을 찾으십니까?”

“음. 혹시 최근에 읽었던 책 없어요?”

엘리아는 책장 근처까지 걸어온 한스를 자연스럽게 서고 중앙까지 이끌었다. 의심 없이 다가온 한스가 책장 앞에 멈춰 선 엘리아 곁에 나란히 섰다.

“소설책 몇 권을 읽기는 했는데 아가씨 취향이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 취향이 어떨 것 같은데요?”

“어디 보자. 제가 한번 맞춰 볼까요?”

한스는 근처 책장을 둘러보더니 딱딱한 문체가 도드라진 경제서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엘리아가 먼저 책 표지에 적힌 제목을 읽었다.

“‘빈곤과 풍요의 지표’ 좋네요. 딱 내 취향이에요. 저자가 남동부 학술원 출신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아. 자생학파는 좋아하지 않으시나 봅니다. 주류학파가 취향이 아니시면…… 그럼 이쪽은 어떻습니까?”

“세상에. 주류학파가 싫다고 했다고 급진적 사상을 가진 인간이라고 의심하는 거예요?”

“이상하네요. 아가씨께선 절대로 온건파는 아니실 텐데.”

능글능글한 대꾸에 뾰로통한 척하던 엘리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설프게 화난 척했더니 금방 들통나고 말았다.

“맞아요. 나 급진파거든요. 남동부의 고루한 사상들 너무 싫어요. 평야 좀 넓다고 으스대면서 사람은 어디서 태어났는지로 부유할 성향과 빈곤할 성향이 결정된다니 어쩌니 떠들잖아요.”

“라스페 공작가도 실은 선대까지는 자생학파 지지자였는데요?”

“알아요. 그러니까 이건 우리 둘끼리의 비밀이에요.”

눈을 찡긋하는 엘리아를 보며 한스는 귀엽다는 생각보다는 섬뜩하다는 느낌을 받고 말았다.

“……그리고 또, 어떤 비밀 이야기를 하실 겁니까?”

“한스 경은 정말 눈치가 좋네요.”

심상한 이야기나 하는 것처럼 굴었는데, 비밀이라는 단어 하나에 한스가 예민하게 반응해 왔다.

엘리아가 책 이야기를 미끼로 자신을 기사들로부터 멀찍이 끌어왔다는 사실보다는, 에드문트가 나가기 직전 두 사람이 보인 태도가 심상치 않았던 점 때문이었다.

“한스 경.”

“그냥 한스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엘리아 님.”

“그건, 나랑 비밀 이야기 하는 거에 동의하겠다는 말로 받아들이면 되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큰일 날 소리를 하시는군요. 저는 엄연히 라스페 공작가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한스는 들고 있던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 넣은 후, 마치 엘리아와 책 이야기를 계속 나누는 것처럼 다른 책을 뽑아 엘리아에게 펼쳐 주었다.

아무렇게나 꺼낸 책은, 우연히도 계약서 작성에 관한 책이었다. 비밀 엄수 조항에 관한 유의 사항이 낡은 종이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지금 우리의 즐거운 대화도, 결국 영원히 비밀이 될 수는 없겠지요.”

“내가 급진파라는 것도요?”

“그건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미 공작님께서도 아실 텐데요. 전에 보내 주신 보고서에 너무 뻔히 보였으니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나 속이 잘 보이게 썼다고요? 나름 객관적으로 썼다고 생각했는데.”

“만물에 하늘이 정한 주인이 존재한다고 주창한 학자를 아주 신랄하게 까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아주 온 힘을 다해서.”

“그 사람 싫어한다고 무조건 급진파는 아니잖아요. 외젠은 내가 쓴 글 아무리 읽어도 죽어도 눈치 못 챘으니까. 한스 씨가 눈치가 좋은 덕분인 듯한데.”

평범하던 엘리아의 목소리가 조금씩, 계단을 내려가듯 낮아졌다.

“그래서…… 내가 무슨 이야기 하려는지도 알고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고.”

책장을 넘기던 한스의 손이 멈추었다. 엘리아는 굳어진 한스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들고는 커다란 책 뒤쪽에 제 손을 숨겼다.

한스는 방패를 뺏긴 병사의 심경으로 빈손을 달싹거리다가, 저항을 시도했다.

“아가씨, 저는 비밀을 지켜 드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로앙의 사람이고, 한스가 공작의 사람이라서?”

“예, 아가씨께서는 라스페 공작님께 무척 중요한 분이시지만, 그건 공작님의 우선순위입니다. 제 최우선순위는 라스페 공작님이십니다. 그러니, 아가씨께는 뭐든 대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이미 그렇게 극렬한 반응을 보이는 시점에서 얼추 대답이 되기는 했는데.”

“그래도, 제 입으로 떠든 것과는 다르니까요. 죄송합니다.”

“한스 경.”

“예, 엘리아 님.”

“에디가, 장갑 착용한 게 언제부터였어요? 저 없을 때는 벗어 두기는 하나요? 불안해 보이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죠?”

그는 엘리아가 갑자기 나열한 질문에 어지간히 놀랐는지, 표정이 정말 엉망이 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오시는군요. 저는 대답 못 합니다. 그리고 지금 물어보신 것도 전부…….”

“한스, 한스 마이어 경.”

벗어나려고 용쓰던 한스는 급기야 눈을 감고 말았다. 채근하는 목소리를 피하겠다고 귀를 막을 수는 없었고,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식의 눈이 너무…… 매서웠으니까.

‘둘이 아주 좋아 죽을 때 알아봤어. 제기랄, 아주 똑같잖아.’

마치 공작이 생김만 달라져서 저를 노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에드문트와 꼭 닮은 눈빛을 피해 숨은 한스는 제가 스스로 만든 어둠 속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한스 경.”

“…….”

“흐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요? 아주 잠깐은 기다려 줄게요. 어디 보자. 한 스물까지 세 주면 되려나?”

숨바꼭질을 원하면 응해 줄 테니 어서 해 보라는 엘리아의 태도에 한스는 속이 타 죽을 지경이었다.

‘이게 무슨 봉변이야. 나는 그냥, 잠시 혼자 계실 아가씨 말동무나 하려고. 수다나 떨라고 서재에 남았던 건데……!’

한스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침을 삼켰다.

빌어먹을 장갑, 그거야 언젠가 들킬 줄 예상했다. 로앙가 아가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으니까.

한데 며칠 새에…… 제법 아가씨 앞에서 멀쩡히 구는가 싶더니, 결국 그의 정신 상태까지 들키고 말았나 보다.

‘언제부터? 대체 공작님께서 뭘 어쨌길래! 설마 반쯤 돌아 버렸다는 것까지 다 걸린 건가?’

어떻게, 어디까지 알게 되었건 한스는 죽어도 엘리아의 의심에 확신을 심어 줄 고발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공작이 어떻게든 제 약혼자에게만큼은 숨기고 싶어서 발악해 대는 게 뻔히 보이지 않던가. 한데 한스 마이어가 입 털어서 완전히 들키기라도 했다간, 공작이 저를 가만히 두겠는가?

에드문트가 자신을 올리버인가 올리브인가 하는 놈처럼 만들 수도 있다는 위기감은, 결코 농담거리로 치부할 일이 아니었다.

‘제기랄. 당신들한테는 무슨 사랑싸움, 그딴 거겠지만 나는 생명이 달렸다고!’

한스가 속으로 소리를 치워 낸 비명을 지르는 사이, 엘리아는 적당한 시점을 기다렸다가 그를 다시 재촉했다.

“한스 경, 비밀 지켜 줄게요. 그러니까. 응?”

한스는 엘리아가 도발할 때마다 재깍재깍 반응해 오기를 반복했다. 그는 기사가 아니었고,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는 일에 그다지 익숙한 사람도 아닌지라 동요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발. 넘어와라. 좀 넘어와 줘.’

실은 커다란 책 뒤에 숨은 엘리아의 손도 긴장 때문에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아는 백작가의 여식으로 자라 왔으니,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어도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었다.

떨리는 손은 책 뒤로 숨기고, 눈빛이 흔들리고 숨이 막힐 것 같으면 느긋한 척을 하며 말을 늘어뜨리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실은 조급하면서.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면서.

‘역시 에드문트한테 뭔가 있는 거야. 장갑도 그 일환일 테고, 불안해 보이는 모습도 내 착각이 아니었던 게 분명해.’

선대 공작 부부의 장례식 때에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는데. 대체 무엇이 그를 불안케 한 걸까.

‘어쩌면 그때도 실은 괜찮지 않았을지도 몰라. 괜찮은 척을 해 오다가, 이제는 버티는 게 어려워진 걸지도.’

숨기고 싶은 비밀을 가지고 산다는 게, 혹여 드러날까 봐 두려운 심경이 어떨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마음을 엘리아가 어떻게 모르겠는가.

‘그래도. 에드문트는 아무도 없었잖아. 어쩌면 혼자 앓느라 모를 수도 있는데…… 지금도 혼자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해.’

상처가 고통스럽다고 무작정 붕대를 감아 억지로 숨긴들, 사라질 리가 없다는 걸. 저절로 나아질 리도 없음을.

그는 알고 있을까.

일찍 죽은 부모가, 그를 그저 가문을 이끄는 공작이라고만 여기는 사람들이. 알려 준 적 있을까.

‘엉망으로 찢어진 살갗이 점점 더 벌어지고, 터진 상처가 곪아 고통을 더하고…… 그렇게 되면, 나중에 수습하려고 해도 절대 돌이킬 수가 없는데. 마음도 다르지 않아서, 나중에 위안 받으려 해도 돌이킬 수 없어지고 말 텐데.’

나아지지 않은 채, 계속 아프기만 할 거라고 에드문트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언젠가는.

‘그렇다고 당장 장갑을, 그 안에 상처를 숨겨 두었다고 억지로 빼앗았다가는 에디만 더 힘들게 만드는 셈일 테니까.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해. 그러려면 조금이나마 무슨 상황인지 알아 두어야 하고.’

희망은 한스가 유일했다. 한스가 그랬듯, 엘리아도 그가 쓴 보고서를 통해 한스의 성격을 어림짐작한 바 있었다.

원칙주의자인 척하지만, 감정이 기우는 곳이 있다면 한스는 제 양심이 허락하는 선에서 융통성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엘리아는 그의 감정에 호소함과 동시에 적당히 타협할 만한 변명거리를 안겨 주고자 했다.

“한스, 미래의 공작 부인에게 줄 선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머지않을 미래에 모실, 공작 부인에게 빚을 지워 놓을 기회잖아요.”

“그게 제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내가 당신을 음해하여 공작가에서 쫓아낼 기회는 많겠지만, 당신이 내게 빚을 지울 기회는 이번뿐일 테니까요.”

“공작께서 저를 내쫓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요. 아니, 쫓겨나기도 전에 공작님 손에 죽어 버릴 것 같은데.”

스스로 공작 부인 운운하느라 멋쩍어하던 엘리아가, 한스의 투정 어린 반응에 다시 낯을 굳혔다.

동시에 한스도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제기랄, 아무 반응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매번 볼 때마다 속으로 어린 아가씨라고 지칭한 주제에, 은근한 추궁에 홀랑 말려들다니.

“에디가 그 정도로 심하게 나올 수준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심각해요?”

“저는 그냥, 그만큼 신의를 중요시하는 분이라는 말씀을 드렸을 뿐입니다.”

한스는 걱정 때문에 마음이 흐물흐물 녹은 목소리를 외면하고자 마음속으로 귀를 막아 버렸다.

“아가씨, 다정한 분이시니 이 이상 불쌍한 보좌관을 괴롭히시지는 않으실 거라 믿습니다. 저는, 당장 아가씨께서 공작 부인이 되신다고 해도 입 열지 않을 겁니다. 차라리 저더러 죽으라 하십시오.”

한스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고, 여차하면 자리를 피하겠노라 배짱부렸다.

‘아, 처음에는 잘되려는 것 같았는데…….’

그를 이용해서 에디의 비밀을 조금이나마 알아내려고 했는데 금방 넘어와 줄 줄 알았던 한스는 예상보다 강경했다.

엘리아는 침울해지고 말았다. 애써 한스를 꾀어내어 대화를 시도한 결과가 고작, 가설에 조금 더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무형의 증거를 모은 것뿐이라니.

첫 시도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 위안 삼아야 할까.

‘아냐. 오늘이 아니면 또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후우, 조금만 더, 일단 저 극렬한 반응을 보아하니 이대로 모른 척 넘어가면 절대 안 될 일이 분명해. 나랑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틀림없고.’

엘리아는 타협할 뻔한 마음을 다잡았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대체 너는 왜, 두려워할 줄을 몰라.>

<아프게 해서 미안해. 다시는 너를 버려두지 않을게.>

상처를 숨기고 있음을 짐작게 하던, 남자의 의문스러운 말을 떠올리며 다시 각오를 다졌다.

“한스, 곤란하게 해서 미안해요.”

“도움 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다른 일이라면 얼마든지…….”

“음, 오해하게 했나 본데 아직 포기한 건 아녜요. 미안하다는 말부터 한 것뿐이지.”

엘리아는 들고 있던 책을 품에 꼭 안아 들었다. 손이 떨리는 게 한스의 눈에 보이겠지만, 이제 뭐 어떠냐 싶었다.

차라리 어린 아가씨가 대단히 용기 내고 있다는 걸 보여 주어 동정심을 자극하는 게 나을지도.

“전에, 나한테 부탁한 적 있잖아요.”

“제가 무슨 부탁드린 적 있던가요?”

“최근에 로앙가에 왔을 때, 나한테 내가 지닌 물건 선물로 달라고 한 거요.”

“그건 공작께서 빈손으로 돌아온 보좌관 꼴을 보는 것보다야 좋아하시리라는, 단순하고도 충심 어린 마음에서 나온 요청이었을 뿐입니다.”

“좋아요. 당신은 당신대로 변명해요. 나는 나대로 떠들 테니까. 어차피 지금 내가 하는 말, 에디한테 못 전할 거 알아요. 에디가 내가 의심하고, 당신에게 물어봤다는 거 알게 되면 그가 더 불안할 테니까.”

“으음…….”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아마도 당신이 나한테 뭐든지 선물로 줄 만한 걸 달라고 했던 그날. 실은 에드문트가 영지에 내려간 게 아니었고, 저택에서 홀로 불안해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단 말이에요.”

한스의 표정을 보고, 엘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 오늘처럼, 혼자만 알고 있는 두려움을 홀로 버텨 냈던 거구나.

‘아무도 없는 저택에서, 보듬어 주는 이 하나 없이…… 에디 혼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누구도 엘리아에게 강요한 적 없었으나 지독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를 여태 혼자 내버려 둔 지난날들, 숨기고 싶었을 텐데 준비도 없이 제게 드러내게 했던 오늘. 품어 안고 달래 주고 싶을 내일, 언젠가 다가올 날을 생각하면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네게 겨우 머리끈 하나 쥐여 주었다니.’

다시는, 다시는 그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

“다음에는 머리끈 말고, 나를 달라고 해요.”

“아가씨를…… 말입니까?”

“그래요. 다른 이야기는 할 필요 없어요. 그냥 찾아와서 나를 달라고 해요. 도저히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은 때가 오면요.”

에드문트를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져, 품에 안은 책을 더욱 세게 그러쥐었다. 절박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면서도, 눈물만큼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억지로 참아 냈다.

끝끝내 참아 내는 모습이 되레 안타까워 보이는 줄 아는 것처럼.

“제발, 한스. 에디가 힘들 때 혼자 버티게 내버려 두지 말아요. 여태까지 그렇게 해 왔다고, 내내 그를 버려두지 말아요.”

남자의 꼴이 어떤지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방치라느니, 홀로 내버려 둔다느니.

‘어째서 그런 말로 우리를 책망하려 드시나. 무너지는 꼴이 어떤지 아가씨께서는 상상도 못 할 텐데.’

엘리아 로앙이, 에드문트 라스페를 감당할 수 있을까? 석실에서 에드문트가 보였던 모습, 그걸 보고도 엘리아가 포기하지 않고 그를 지탱해 줄 수 있을까.

확신이 없었다. 오히려 당신이 견디지 못하고 그를 버려두고 돌아설 것만 같은 불안감만 지독했다.

‘당신마저 포기해 버리면. 무너져 버릴 게 분명한데, 그럼 내가 죄를 짓게 되는 거 아닌가. 차라리 공작께서 혼자 감당하게 내버려 두고, 아가씨께서는 연인의 좋은 모습만 바라보며 행복해하는 게 옳은 거 아닌가.’

모르겠다. 사랑이란, 얼마나 어려운지.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다는 것이 그렇고, 도무지 답이 없다는 점에서도, 어렵기만 했다.

한스는 제 것도 아닌 사랑 사이에 끼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는 결국 확답을 피했다.

“만약에, 제가 당신께 머리끈을…… 구하고 싶은 일이 생기거든.”

손에 쥔 적 있는 낡은 머리끈을 떠올리며 주먹을 쥐었다. 서고가 더운 것도 아니었는데, 땀이 송골송골 맺혀 미끈거렸다.

마치 긴장감이 녹아 밖으로 흘러내린 듯했다.

“그때는 저를 위한 선택을 하겠습니다.”

“믿을게요. 올바른 선택을 해 줄 거라고.”

“너무…… 저를 신용하지는 마십시오.”

“믿을 거예요. 나에게도, 에디에게도 당신뿐이니까.”

두 사람에게 믿을 수 있는 게 한스 마이어뿐이라니. 지극히 부담스러운 엘리아의 말에, 한스는 눈가를 찌푸리면서도 입으로는 웃고 말았다.

엘리아도 그의 얼굴을 보고는 같이 따라 웃었다. 마치 책 이야기를 하던 중 공통 관심사를 발견해 기뻐하는 사람들처럼.

“한스, 이것 말고 책 좀 더 골라 줄래요?”

“제가요? 아가씨의 기대를 충족시켜 드릴 자신이 없는데요.”

“자신감 가져요. 나는 한스의 안목을 믿으니까.”

엘리아는 제가 말해 놓고는 깔깔대며 웃더니, 눈가에 살짝 고여 있던 물기를 훌훌 털어내 버렸다. 이번에는 한스가 엘리아의 맑은 웃음을 따라 미소 지었다.

‘강한 사람이구나.’

온전히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버텨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강한 것 같다. 아마 버텨 주실지도.

그래도 한스는, 아가씨를 시험하게 될 날이 영영 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부디 이 두 사람, 사랑을 깨친 후에는 눈물 흘릴 줄 모르고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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