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과욕의 대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
닿아 보고 싶다는 연인의 말에 엘리아는 언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누군가에게 소리를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닿아 오겠다는 건 무슨 의미야?’
그냥, 단순히 손 한번 뻗어 보겠다는 뜻일까. 혼자서는 오를 수 없는 마차 앞에서 손을 잡아 줬을 때처럼, 그때처럼 닿아 보겠다는 뜻인 건지.
아니면 장갑 낀 네 손이 잠시 얼굴을, 손을 스쳐 보아도 되냐고 정중하게 허락을 구하는 건지.
아니면, 그게 아니라면…….
‘모르겠어. 네 마음이 뭔지도, 이럴 땐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그저 숨이 막혀서, 담담한 남자의 목소리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얼마든지.’라고 말하면 너무 바보 같을 테고, ‘네가 닿아 와 주면 좋겠어.’라고 말하면?
‘아, 절대로. 절대로 못 해. 너무 부끄럽잖아.’
너는 이렇게나 정중하고, 천천히 내게 다가오려고 하는데. 겨우 손 한 번 닿는 것도 모자라 내 마음은 이미 저 먼 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들키게 되어 버릴 테니까.
장갑 안에 숨은 손, 새파란 눈동자, 아름다운 선이 그린 네 얼굴. 살짝 벌어지는 입술.
찬장 높은 곳에 숨겨 둔 사탕을 탐내는 아이처럼, 안달을 내고 있었는데…… 너무 앞서 나간 욕심을, 아직 들키고 싶지는 않았거늘.
‘차라리 새침한 척을 하며 안 된다고 말해 볼까. 그럼 너는 내가 부끄러워하는 걸 눈치채고 웃어 주려나.’
한데 오해하면 어떻게 하나. 자꾸 제 앞에서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남자가 되고 마는 에드문트가, 상처 받아선 복수하려 들면 어떻게 하지.
더 두꺼운 장갑을 끼고선, 다시는 닿아 주지 않겠다고 스스로를 엘리아에게서 떼어 놓으려 한다면.
‘그럼 나는 욕심이 나서 어쩔 줄 몰라 또 끙끙 앓고 말 텐데.’
끙끙거리며 고민한 끝에 엘리아가 내놓은 대답은, 정말인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응.”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응.”이라는 짧은 대답이 제게서 떨어져 나옴과 동시에, 후회하고 말았다.
‘아, 마지못해 대답한 거라고 오해하면 어쩌지? 오르골 위의 소년처럼, 에디가 손을 뒤로 숨겨 버리면 어떻게 하지.’
엘리아의 고민을 달래 주려는 듯, 에드문트의 손이 천천히 엘리아를 향해 올라왔다. 엘리아는 푹신한 쿠션에 파묻힌 양손을 꾹 쥔 채로 잔뜩 긴장하여선 그의 손이 다가오는 걸 바라보았다.
긴장 때문에 심장이 펑, 하고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분명 남자에게도 터지기 직전인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중이리라.
엘리아는 자신의 가슴께에서 울리는 진동에 휩쓸려 침몰해 버릴 것만 같았다.
“…….”
긴장한 기색은 소리로, 심장 박동을 따라 떨리는 눈동자로, 꾹 다문 입술로 드러났다.
에드문트의 눈앞을 가득 채운 엘리아의 얼굴은 울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가 제멋대로 해석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아주 약간의 기대감도…… 있는 것 같았다.
‘괜찮을까. 조금만.’
에드문트는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손이 멋대로 뻗어 간 뒤였다.
대체 그간 어떻게 참고 견뎠나 싶을 정도로 욕심이 났다. 잠깐 닿아 보기만 하겠다던 손은 더 많은 걸 바라며 여자를 향했다.
새빨간 입술, 한입에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턱, 가느다란 목덜미, 쇄골까지 훤히 드러난 여린 몸.
익숙하지 않은 구도가 그를 자꾸만, 자꾸만 자극하고야 만다.
갖고 싶어.
너무나도.
그렇다면, 거부하지 못하게 만들어. 달아나지 못하게 구속해. 네 한 손으로도 충분히 쥘 수 있는 양 팔목을, 발목을…….
그의 본능이 자꾸만 이성을 삼키려 들었다. 두려우면서도 두려워할 줄 모르고, 거짓인 줄도 모르고 너를 기꺼이 사랑하려 드는 순진한 여자를 마음껏 탐하라고.
그 음습한 마음에 목줄을 메어 구속한 건, 가을꽃을 닮은 엘리아의 눈동자였다.
그를 짐승처럼 갈망케 한 천진한 아름다움이, 동시에 그를 꼼짝도 하지 못하게 하더라.
다행이었다. 그의 본심을 드러내기 직전에 재빨리 숨길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안도감을 느끼며 심호흡을 했다. 조금이라도 더 완벽한 거짓말을 위하여.
얼굴을 향하려 했던 커다란 손이 차츰 움직였다. 시선은 동그랗게 뜬 주홍색 눈동자에 고정했다.
‘어디로 가는 거야?’라고 천진하게 물어 오는 눈동자에 욕망을 참아 낸 미소로 답했다.
욕심을 지워 낸 손이, 숨을 참느라 새빨개진 엘리아의 뺨 대신 하늘하늘한 머리칼에 닿았다. 살짝 헝클어진 머리칼이 장갑과 마찰하여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는 곧 거짓말로 달래는 목소리가 되었다. 안심해, 엘리아.
내가 감히 너를 해치겠어?
짐승처럼 욕망하겠어?
어리석은 남자, 제 욕망을 완벽하게 숨겼다고 착각하고야 말아선. 새파란 눈에 꽉꽉 들어찬 갈망을 여자가 눈치챈 줄도 모르고.
‘너는…… 그렇구나.’
욕심을 내고도 방황하는 손을 본 여자가 알게 되었는데 저만 몰라 착각했다.
‘참는 거구나. 내 반응을 일일이 살피느라, 겨우 허락받은 접촉을 포기하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버리고 마는구나.’
찬찬히 멀어지는 손을, 겨우 머리칼이 아쉬워 굼뜨게 이별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거야? 내가 못내 부끄러운 나 자신을 어떻게든 포장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너도, 그런 거지?
“에디.”
그러지 마. 물론 내 보폭을 맞춰 주는 너를, 좋아해. 상냥한 약혼자가 되어 주는 네가 좋아.
예쁜 선물을 준비해 보내 주고 좋아할 만한 말을 골라 건네주는 너는 늘 나를 황홀케 하잖아.
부끄러움을, 긴장을 눈치채고 고작 장갑 낀 손으로 머리칼 스치는 데에 만족하려는 너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아하지만.
“장갑 말이야. 답답해 보이는데. 벗지 않을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네 배려만 받고 싶지는 않아.
설령 네 마음이,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다고 하더라도, 버거워 보인다고 해도.
‘네 마음을 나에게 맞춰 잘라 내지 마. 그럼 네가 다치잖아. 피를 흘리고 아파하고 말 거잖아.’
조금 버겁더라도 내가 감당하게 해 줘야지. 너를 위할 줄 아는 연인이 될 기회를 줘야지.
너를 위해 울게 해 줘. 아프게 해 줘.
내게서, 네 사랑을 껴안을 기회를 빼앗아 가지 마.
“아니 실은 답답해 보여서 그러는 게 아니고…… 내가, 내가 손 한번 잡아 보고 싶어서 그래.”
빼앗기고 싶지 않아. 전부, 내게 줘 버려. 에디. 에드문트. 나의 약혼자. 나의 연인.
“내가 너 욕심내는 거야.”
못내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은 내가 견뎌 볼 테니까, 부디 너마저 나를 무력하게 만들지는 말아 줘.
장갑에 숨겨 둔 네 마음이 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알려 주면 안 될까?
내가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래도 내게 보여 줘. 엉엉 울면서 너를 붙들고 울지언정 놓지는 않을 테니까.
설령 네가 나를 두렵게 한들 이제 놓을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이제, 너를 사랑하지 않는 나를 상상할 수조차 없어.
다시 외롭던 나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아.
“에디, 너를 알고 싶어. 너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어.”
* * *
엘리아는 에드문트를 그대로 누워 있게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에드문트가 앉을 때 크게 요동치던 쿠션은 엘리아가 꼼지락대며 일어나는 동안에는 꼼짝 않고 두 사람을 받쳐 주었다.
커다란 쿠션에 편히 앉은 엘리아가 여전히 자신의 머리칼 근처에 머물러 있던, 에드문트의 오른손을 쥐었다.
한 손으로는 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탓에 오른손으로는 그의 엄지손가락을 감싸 쥐고, 두꺼운 책을 쥐듯 왼손으로 그의 팔목께를 받쳤다.
‘이걸 어떻게…… 그냥 당기면 되나?’
엘리아가 장갑을 어떻게 벗겨야 할지를 두고 고민하는 동안, 에드문트는 옴짝달싹 못 한 채 엘리아를 기다려야만 했다.
‘고집 세다고, 로앙 백작이 지나가듯 이야기했지. 그걸 듣기는 했는데.’
남매끼리의 실없는 소리라 들어 넘겼을 뿐, 에드문트는 단 한 번도 엘리아가 고집 세다고 여겨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에드문트는 아주 절절히 깨달았다. 저 누우라고 마련해 준 쿠션에 꼭 같이 누워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급기야 자그마한 손으로 에드문트의 장갑을 직접 벗겨 내겠다고…….
“잠깐만, 에디. 내가 할 테니까 기다려. 응?”
에디의 손 하나를 빼앗아 쥔 엘리아는 정작 어떻게 장갑을 벗겨 내야 할지 몰라서 허둥지둥했다.
‘이게 내 것 같은 기성품이 아니라서 그렇구나. 손에 딱 맞게 만들어서 그냥 잡아당긴다고 벗겨질 것 같지가 않은데. 어쩌지?’
엘리아는 양손에 꽉 들어찬 남자의 손에 긴장감을 느끼던 것도 잠시, 장갑을 벗겨 내고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열심히 손을 꼼지락거렸다.
예민한 손바닥을 긁는 작은 손길에 에드문트가 움찔거렸다. 하나 벗어나지 못한 채 그는 엘리아의 앞에 무력해야만 했다.
거절했어야 했는데 거절하지 못한 죄로, 숨겨야 했는데 숨기지 못한 죄로 벌을 받아야 했다.
당연히 후회했다.
‘어리석은 욕심 품지 말았어야 했는데. 장갑을 신경 쓴다는 걸 눈치채고도 안일하게 굴고 말았으니…….’
물론 후회와는 별개로, 황홀했다.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은 뜨거웠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불길에 살갗이 녹아내린 흔적이 남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렬하여 괴로워질 정도였다.
‘황홀함만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어리석게도.’
멍청한 자신을 아끼지 않고 비난했다. 야트막한 쾌락이 끝없이 계속 이어지는 건 고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견디지 못하고 목소리를 쥐어짜 엘리아를 불렀다.
“엘리.”
“잠깐만, 에디. 내가 할 거야. 내가 해 줄게.”
“……단추부터. 풀어야 해.”
엘리아의 앞에서, 그는 창피할 정도로 자제력이 부족함을 실감해야 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자신이 직접 하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거부할 줄을 몰라서, 감당치도 못할 쾌락에 굴복하여 저항하는 법을 잊고 말았다.
반쯤 체념한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조금이라도 빨리 장갑을 벗겨 주기만을 바라며 손목을 꺾어 주었고, 단추의 존재를 알려 주었다.
“아, 여기 손목에 있는 단추 때문이었구나! 어쩐지.”
수줍음은 집중력으로 모조리 이겨 낸 엘리아가 에드문트의 손을 제 무릎 위에 끌어 놓고 그의 소맷자락을 들추었다. 단단한 팔목 위에 백금에 보석까지 박아 반짝이는 단추 세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르골 생각나네. 보석 어마어마하게 달린 거.’
엘리아는 혹시나 보석에 흠집이 날까 봐 아주 천천히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맨 끝에서부터 한 개, 그리고 두 개째.
그의 팔을 감고 있던 천이 엘리아의 손길에 풀어질 때마다 에드문트는 해방감과 함께 지독한 갈증을 앓아야 했다.
분명 엘리아의 손은 제 팔목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데, 따끈한 손길이 목덜미까지 지분거리는 환상통을 느껴야 했다. 욕망을 구속하기 위해 목에 감아 둔 사슬이 하나씩, 하나씩 끌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익숙한 감각이 그를 덮쳐 왔다. 두려움이었다.
그는 지척까지 다가온 해방감에 비이성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말았다. 혹시, 장갑 아래에 그때의 피가 아직 묻어 있는 건 아닐까.
‘다정한 남자의 손을 기대했을 텐데, 어떻게 해도 죽음이 떨어져 나가지 않아 새빨간 손을 보고 네가 두려워하면 어떻게 하지.’
혹은 모두 알아채고 만다면. 실은 남자가 지금껏 여자를 속여 왔을 뿐, 스물여덟의 여자조차 감당하지 못할 끔찍한 죄를 지어 왔음을 알아챈다면.
‘너는 어떻게든 알아내겠지. 장갑을 벗으라는 말, 서점에 다시는 가지 않겠다는 말이 그저 우연일 리 없으니까.’
닐스 튀링겐에 대해서도, 제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마저 알아챈 엘리아가 진심으로 에드문트를 알고자 한다면.
그는 얼마나 더 거짓을 버틸 수 있을까?
‘대체 왜, 어째서 나를 알려고 하는 거야.’
에드문트 역시 엘리아에 대해 알고 싶어 하기야 했다.
죽음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보고서에 부모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조금씩 담아 보여 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 건지.
하지만 그건 여자가 도망치지 않도록 신중하게 접근하기 위해서였으며, 다른 사람의 사랑을 흉내 내서라도 다정한 연인이 되기 위함이었다.
반대의 상황이 일어나리라는 가정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네가 나에 대해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 나는 그저 네가 나를 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혐오하여 그의 곁을 떠나는 대신, 에드문트를 향해 웃어 주고 이름을 불러 주는 게 그가 바라는 사랑이었다.
엘리아 로앙이 에드문트 라스페를 사랑하게 되면, 아마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 주겠지. 편지를 보내면 사랑스러운 인사와 함께 답장을 전해 주고, 가끔은 작은 손에 닿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줄지도 모르지.
바란 건, 겨우 그뿐이었는데.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게, 내가 너를 원하듯 너도 나를 원하게 된다는 의미인 줄은 몰랐어. 너도 나를 궁금해하고, 닿아 보고 싶어 하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그래서 평생 숨길 자신이 있었던 건데.’
평생 엘리아에게 거짓된 연인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엘리, 나의 사랑스러운 연인. 너는 나를 사랑한 게 아니잖아. 네 애칭 한번 부른 적 없던 무심한 약혼자를 좋아해 본 적이 없잖아. 내가 너를 욕망하여 다정한 연인인 척 굴고 나서야 나를 허락했잖아. 좋아한다고 말해 준 건 진짜 내가 아니잖아.’
그를 알고 싶다니. 장갑 아래에, 여자의 눈을 피해 남자가 무엇을 숨겨 두었는지 짐작도 못 할 거면서.
‘너는 결국 도망갈 텐데. 내 본모습을 본다면, 끔찍해하며 떠날 거잖아. 그러니 나를 위하는 길이고, 결국 너를 위한 일이기도 해.’
에드문트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너를 위한 일이야.
너를 위한 일이야…….
마침내 세 개의 단추가 모두 풀어지고, 엘리아가 그의 손 전체를 쓸어 올리듯 장갑을 벗겨 내자마자…….
“아, 읏.”
작은 손을 세게 잡아챘다. 엘리아가 성취감에 미소 짓기도 전에.
“에디? 왜……?”
그는 꽉 다물린 입 대신, 창백한 손으로 비명을 질러 대었다.
제발, 엘리. 엘리아. 나를 알려 하지 마. 나를 드러내게 하지 마.
장갑이 벗겨진 그의 맨손이 엘리아의 양손을 억세게 옥죄었다. 본능적으로 벌인 일이었지만, 그가 생각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했다.
뭐든 붙들지 않았다면 자유로워진 손을 스스로 감당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
한데 에드문트는 원하는 바를 이루고도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아, 읏…….”
갑작스러운 악력에 엘리아가 신음을 내뱉었음에도, 그 애처로운 목소리를 듣고도 에드문트는 제 손으로 엘리아의 작은 두 손을 씹어 문 채 놓아 주려 하질 않았다.
잡아먹힌 손을 타고 그대로 올라오는 떨림은, 마치 짐승이 제 손을 문 채 울음 우는 듯했다.
‘이대로 계속 있어 줘야 하려나? 일단 조금만…….’
엘리아는 에드문트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를 시험하듯 잡힌 손을 꼼지락거려 보았다.
그 작은 움직임에 에드문트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마치 이로 문 주인의 옷깃을 잡아채듯 엘리아를 끌어당겼다.
“아, 에디. 잠깐만!”
강한 힘에 엘리아가 휘청거리자, 에드문트가 몸을 일으킨 동시에 엘리아의 손을 높이 들어 올려 무너지려는 몸을 잡아챘다.
강풍에 휘날리는 듯 풀럭거리던 작은 몸이 몰아치는 파도로 인해 강제로 중심을 잡았다.
“…….”
여전히 손을 쥔 채, 그는 제 어깨에도 미치지 못하는 엘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이렇게나 작고, 여려 보이기만 하면서.’
분명 두려울 만큼 놀랐을 텐데.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에드문트의 무례함에 화를 내야 마땅했으니.
그는 기다렸다.
체념한 채. 늘 잠들었을 때 만나던 엘리아의 모습이 현실이 되어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래, 엘리. 차라리 두렵다고 말해. 지긋지긋하다고. 그럼 나도 네겐 거짓이 소용없음을 깨닫고, 네가 알길 바라던 모습을 전부 보여 줄 테니까.’
차라리 다행일지도. 그가 다정한 연인인 척 기만한 기간이 길지 않았으니, 배신감으로 멍들 상처도 그에 비례해 주지 않을까?
엘리아를 더 아프게, 그와의 관계를 더 엉망으로 만들기 전에 연극이 끝나게 되었으니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 보려 했다.
‘비록 내가 네게 고백한 말들, 네게 뭐든 해 주고 싶다는 약속은 모두 진심이었지만. 네게 중요하지는 않을 테니까.’
에드문트는 기다렸다. 아픔이 공포가, 두려움이 분노가 되어 눈에 나타나기를.
잠시나마 아름답게 피어났던 꽃이 자신의 손 아래에서 으스러지는 광경을 기대했다.
“에디.”
그러나 들려온 목소리에 스민 건, 지독한 슬픔이었다.
엘리아는 그저 슬퍼했다.
붙들린 손을 놓아 달라고 하소연하지 않고, 그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다만 연민하려 들었다.
‘내가 무지하여, 착각하나. 네 감정을 옳게 살피지 못하는 걸까.’
의심했지만, 재차 살펴봐도 엘리아의 얼굴에는 자신을 향한 두려움이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화가 나고 말았다.
“대체 너는 왜, 두려워할 줄을 몰라.”
에드문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가 치미는 자신의 감정이 이해되지 않았으나, 꽉 막힌 목소리로 화를 표출하는 것만큼은 참아 낼 수 없었다.
말간 눈동자에 차라리 원망이 스며들어야 했다. 자신을 헤집는 대신, 두려워하게 되는 나머지 한 걸음 물러나야 할 텐데.
엘리아의 반응은 에드문트에게 지극한 혼란을 주었다.
“내가 왜 무서워해야 해?”
하나 의구심을 느낀 건 마찬가지였는지,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간 엘리아의 얼굴이 그에게 물어 왔다.
대체 왜, 제게 그런 감정을 강요하느냐고.
“무섭지 않아, 에디. 나는 네가 무섭지 않아.”
그를 무서워하기는커녕 다독여 주려고까지 했다. 경직된 몸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어르려 했다.
“그러니까 너도 제발, 무서워하지 마.”
오직, 그의 슬픔과 두려움만을 꿰뚫어 보고 도닥여 주고자 했다.
“에드문트, 괜찮아. 당장 말해 달라고 너를 괴롭게 하지 않을 테니까. 응?”
장갑 아래에 숨겨 둔 욕망을, 거짓을 당장이라도 벗겨 낼 듯 굴었으면서.
‘……내가 네게, 화를 냈는데.’
그의 일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긋지긋하다며 그를 떠났던 스물여덟의 여자에게조차, 에드문트는 화를 낸 적이 없었다.
한데 다정한 연인인 척 굴던 남자가 비이성적인 화를 터뜨리는 걸 목도했음에도, 엘리아는 그를 용서했다.
“약속할게, 에디.”
에드문트는, 열등감을 느끼고 말았다.
‘나는 네 마음 한 꺼풀 살피기가 너무나도 힘이 드는데.’
사랑, 애정, 슬픔, 두려움.
그중 어느 하나 에드문트에게 쉬운 게 없었다. 하나하나 살피기가 너무 버겁기만 하여 따라잡는 것만으로도 힘에 겹지 않았던가.
커다란 저택에 약혼자를 데려왔음에도, 다가오라는 말을 듣고도 그는 어떻게 굴었던가.
바닥에 박제된 채 움직이지 못했다. 한심하게도.
<얼른 누워 봐. 응? 딱 한 번만 누워 보고 편하게 있어.>
대체 언제,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몰라서 내내 갈등하고 말았는데.
<에디, 좋아해. 많이 좋아해.>
왜, 엘리아는 그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데에 주저할 줄을 모르는지. 어느새 가깝게 다가와서는 준비되지 않은 마음을 헤집으려 하는 건지.
그조차 자각하지도 못하는 마음을 마구잡이로 꺼내어 내게 들이밀어, 어째서 잔인할 정도로 이렇게나…….
무력하게 만드는 건지.
‘두려워, 그래. 나는 너를 사랑하게 된 만큼 두려워서 어쩔 줄 모르겠어.’
실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사랑받고 싶었던 여자의 앞에서 가죽이 벗겨져 흉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평생토록 속여 내기를 희망했다. 다정한 사람이 되어 내내 사랑받고 싶었으니까.
그러니 제발, 바라건대.
‘나를 알아내려 하지 마. 차라리 검을 치켜들어 이 마음을, 욕망을 잘라 낼 테니까. 몇 번이든 찢어 내다가, 설령 죽게 된다고 해도 괜찮으니 제발 나를 헤집지 마.’
* * *
절박한 남자의 마음은 여자의 두 손을 움켜쥔 맨살에 그대로 드러났다. 거칠한 살갗이 엘리아의 여린 손을 파고들 때마다 그의 마음이 스며들어 따끔거렸다.
제발 내버려 두라고. 혼자 아파할 테니 다가오지 말라고 이를 세우고야 마는, 에드문트의 행위는 짐승의 몸짓이나 다름없었다.
하나 상처 날까 두려워 차마 물어뜯지도 못하고, 다칠까 싶어서 덜덜 떠는 몸짓이란.
얼마나 처연하던지.
엘리아는 그의 모습에 어릴 적 만났던 커다란 늑대를 떠올렸다.
<쟤는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이 근처에 있는 황실 사냥터에서 다쳐서 도망 나온 거겠지.>
<불쌍해. 오빠가 도와주면 안 돼? 어차피 우리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혹여 누가 제게 다가올까 두려움에 떨면서, 두렵게 해 쫓아내겠다고 으르렁대던 짐승은 무섭기는커녕 동정심만 불러일으켰다.
<무슨 소리야. 분명 무서워서 더 사납게 굴 건데. 위험하니까 엘리 너, 어디 가서 저런 거 보거든 함부로 다가가지 마. 알았어?>
천진한 동정심을 드러낸 엘리아를 붙잡고 외젠은 몇 번이나 조심하라며 일러 주었다.
엘리아는 결국 다리 하나가 부러져 무력하게 울던 짐승을 등지고 떠나야 했다.
‘알아. 외젠의 말대로, 그때 다가갔으면 내가 더 많이 다쳤겠지. 제 경고에도 다가온 어린아이가 원망스러워 콱 깨물고 말았을 테니까.’
하나 어린 엘리아는 그 후, 숲길을 지날 때마다 늑대를 떠올려야만 했다.
내내 홀로 떨며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까웠으니까.
“무서워하지 마. 응? 에디. 에디. 에드문트…….”
엘리아는 쉬지 않고 에드문트를 불렀다. 어릴 적 제멋대로 지은 그의 애칭을, 뒤늦게야 사랑을 담아 부르게 된 이름으로.
“에디.”
이름이 반복될 때마다 에드문트의 손에 들이차 있던 두려움이 조금씩 덜어져 갔다.
이제 조금 나아졌을까 싶어 엘리아가 아직 잡혀 있는 손을 살짝 움직이자, 그가 붙들고 있던 엘리아의 손을 토해 내었다.
떨어져 나온 엘리아의 손에는 짐승의 이빨 자국 대신, 붉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남은 흔적에, 엘리아는 지극한 상실감을 느꼈다.
엘리아는 에드문트를 향해 도로 손을 뻗고야 말았다. 잃어버릴까 봐 두려운 아이처럼, 내내 붙잡혀 있느라 얼얼해진 손으로 에드문트의 손을 잡았다.
있는 힘껏 잡아 봤자 형편없는 힘이었지만, 에드문트는 엘리아를 밀쳐 내지 못했다.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꼼짝없이 붙들린 뒤였다.
“도망가지 마. 무서워하지 마.”
두 손으로 겨우 담아 낸 남자의 손이 너무나 차가웠다. 슬픔이 내린 비에 체온을 빼앗겨, 앓고 있었다.
다독여 주고 싶었는데. 겁먹지 말라고 쓰다듬어 주고, 안아 주어 제 온기를 나눠 주고 싶었거늘.
다시 그를 아프게 할까 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붙들고만 있었다.
“대답, 대답해야지 에디. 제발 대답해 줘. 내가 잘못했어.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엘리.”
“도망치지 않겠다고만 말해 줘. 에디,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가지 마. 가 버리지 마.”
“……미안해. 엘리아, 미안해. 도망치지 않을게.”
대답을 듣고서야 엘리아가 에드문트의 손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무릎에 얹힌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엘리아는 내팽개쳐져 있던 장갑을 집어 들었다.
다시 장갑 안으로 숨겨 주기 위하여.
톡, 톡, 톡. 작은 소음을 내며 세 개의 단추가 잠길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드문트의 시선도, 엘리아의 시선도 그저 흰색의 장갑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엘리아는 단추를 모두 잠그고도 잠시 남자의 손에 머물러 있다가, 그를 바라보았다.
허락을 구하듯. 그러곤 조금씩, 덫에 걸려 바르작거리는 짐승에게 남은 마지막 상처를 보듬기 위해 그의 손을 끌어 올렸다.
손끝에, 여자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 동시에 엘리아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르고야 말았다.
“미안해. 미안해, 에디. 억지 부려서 미안해.”
아무리 약혼자라고 해도, 남들에게는 다정해 보일 뿐인 애정 표현이라도. 두려움을 주는 행동이 될 수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는데.
‘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았을 선물에 내가 울고 말았듯, 너 역시 울고 싶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생각했어야 했는데.’
욕심만 앞서지 말고, 배려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욕심부렸어. 미안해.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랬어.”
부끄러워 제대로 고백하지 못했던 말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다.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거 알아. 좋아하면 더 함부로 하면 안 되는데. 그러니까 미안해. 장갑 가지고 고집부린 거 사과할게. 그래도……. 나 미워하지 마. 가 버리지 마. 응?”
“아무 데도, 아무 데도 가지 않을게.”
에드문트는 뺨을 타고 흐르는 엘리아의 눈물 탓에, 입술과 함께 닿아 온 어지러운 목소리에 붙들려 버렸다.
그저 엘리아의 말 끝자락을 겨우 붙들어선, 반복했다.
가 버리지 않을게. 아무 데도 가지 않을게.
“미안해, 엘리아. 아프게 해서 미안해. 너를 두고 가 버리지 않을게. 다시는, 다시는 너를 버려두지 않을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를 사과를 반복할 때마다, 어리석은 여자가 그의 장갑에 입 맞추어 주었다.
거짓이었으나 달콤했다. 아니.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입술이 거짓이기에 달콤하다고 생각했다.
에드문트가 진실을 숨기고, 엘리아가 그의 거짓을 전부 들추지 않았기에 받은 보상이 너무나 황홀하였다.
마치, 그가 마침내 엘리아를 가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엘리아. 절대로 드러내지 않도록, 너를 잊고 달아나지 않기 위해. 내내 네 곁에서 다정한 연인이 되어 너의 가짜 사랑을 지켜 보일게. 지켜 줄게. 이번에야말로.’
장갑 낀 손이 머뭇거리다가 엘리아의 눈가에 닿았다. 입맞춤을 받던 손끝으로 엘리아의 눈물을 닦아 내었다.
어색한 손길에 엘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그의 장갑에 얼굴을 비비었다.
황홀했다.
그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황홀함을 주더라.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