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자각
서점을 나와 엘리아가 향한 곳은, 에드문트가 오르골을 구입했던 상점이었다. 호위의 안내를 받아 상점에 들어서자, 깊은 나무 냄새와 엘리아에게 익숙한 향이 닿아 왔다.
‘물감 냄새네. 채색한 오르골 때문이구나.’
오르골 상점답게 안에서는 반짝거리는 음악 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도 좋아해 종종 흥얼거리곤 하는 자장가였다.
‘오르골이 모두 모여 잠든 나무집 같아. 그리고…… 생각보다 소박하네. 에디가 준 오르골이 하도 고급스러워서, 귀족들만 출입하는 식의 상점일 줄 알았는데.’
오르골 상점은 라스페 공작의 방문 이후 유명세를 치르며 얼마 전 새 단장까지 마쳤지만, 지난 시절을 본 적 없는 엘리아의 눈에는 그저 그런 상점일 뿐이었다.
“귀, 귀하신 분께서……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르골 제작자이자 상점 주인 대신, 새로 고용된 점원이 엘리아에게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엘리아는 아마 젊은 점원이 애써 준비했을 인사말을 웃으며 받아 주었다.
‘그러고 보니 나랑 에디 때문에 손님들 다 쫓아냈구나. 미안해라. 다른 손님도 못 받게 한 귀족이니 많이 쓰고 가겠거니 기대할 텐데 나는 돈이 없고……. 그래도 에디가 다녀갔다고 입소문 나면 도움이 될 테니까. 나 너무 원망 말았으면.’
마음속으로 용서를 구한 엘리아가 오르골 구경에 나섰다. 가장 가까이 있는 진열대부터 찬찬히 살폈다.
크기도, 모양도 가지각색인 수백 개의 오르골 중 엘리아가 처음으로 훑은 진열대는 아기자기한 동물과 꽃을 조각해 올린 오르골로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숲을 표현한 것 같아. 세상에, 이 토끼들 좀 봐. 다섯 마리가 전부 다르게 생겼네.’
엘리아는 특히 앙증맞은 토끼가 조각된 오르골 다섯 개를 발견하고는 좀체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세밀하게 조각된 풀 위에 한 마리씩 올라가 있는 토끼는 앞발로 커다란 귀를 꾹 잡고 있기도 했고, 옹그리고 누워 단잠을 자는 등 전부 제각각이었다.
‘오르골이야말로 즐겨 듣는 노래로 한두 개 있으면 되는 사치품이라고 여겼는데. 돈만 넉넉하면 다 사고 싶다. 아, 지금 내가 갖고 싶은 거 구경할 때가 아닌데.’
어렵게 유혹에서 벗어난 엘리아가 크기가 좀 더 크고 화려한 오르골이 모여 있는 선반으로 눈길을 돌렸다.
‘여기는 전부 악기랑 가구를 조각해 놨네. 언뜻 보면 오르골이라고 생각 못 하겠어.’
아이들이 인형 놀이에 쓴다고 탐낼 법한 작은 가구 모양 오르골을 지나쳐, 엘리아가 선물 받은 것처럼 사람을 조각한 오르골 진열대로 넘어갔다.
“여기 있는 것도 다 오르골인 거지?”
“예, 저기 진열대에 있는 목제 장식품을 제외하면 여기 보신 것들과 나머지는 전부 오르골입니다.”
“그럼 음악은…… 아. 여기 오르골마다 앞에 쓰여 있는 게 악곡 제목이려나?”
엘리아는 오르골 앞에 작게 쓰여 있는 걸 가리키며 물었다. 사물이나 동물 오르골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사람을 조각한 스무 개의 오르골 앞에는 추상적인 단어가 하나씩 있었다.
‘우정’, ‘화목’, ‘그리움’…….
“그건, 제가 삼촌…… 아니, 사장님이 오르골을 만드실 때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를 듣고 붙인 제목입니다. 오르골 제목요. 음악은 각각 다른데, 대부분 피아노 곡을 단순하게 편곡한 거고 원하시는 곡으로 바꿔 드릴 수 있습니다.”
“오르골 제목이라고? 저마다 이야기가 있나 보네.”
“이야기라고 하기보다는 만들 때 느꼈던 감정이라고 해야 할지…… 염원? 그런 쪽에 가까울 듯합니다.”
점원은 엘리아의 앞에 있는 진열대를 하나씩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 갔다.
“예를 들면 여기에 ‘화목’이라는 건, 보시다시피 아이가 혼자 있는 모습이라 이상한 제목처럼 보일 수는 있겠지만, 건강하게 자라 집안에 화목함을 가져다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조각한 거라 이런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럼, 여기 ‘복수’는? 그냥 보기에는 다정한 연인처럼 보이는데.”
남녀가 등을 맞대고 서 있는 오르골 앞에는 ‘복수’라는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생각하시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보이시나요?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혀 닿아 있지 않죠.”
점원이 오르골을 들어 엘리아의 앞에 한 바퀴 천천히 돌려 보였다. 설명한 대로 오르골 위 두 사람 사이에는 작은 틈이 있어 닿아 있지를 않았다.
“그러네. 기대어 있는 줄 알았는데 닿지 않았구나.”
“예, 각자 예쁘게 차려입고 만났건만 정작 등을 돌린 채 얼굴은 보여 주지를 않지, 닿기도 싫은 척 떨어져 있으니 복수이지요.”
“그게 복수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고 있지만 실은 속으로 보고 싶고, 닿고 싶어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그래서 복수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뭐, 정작 만든 사람은 단지 손재주를 자랑하려고 두 사람을 떼어 놓은 모양이지만요.”
엘리아는 점원의 말을 듣고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미간을 훅 찌푸렸다. 그 모습에 점원은 혹시 제가 귀한 분 마음 상하게 했나 싶어서 눈치를 보았다.
“저, 그…… 마음에 차지 않으시면 다른 걸 좀 보여 드릴까요?”
“그런 건 아니고, 종류가 많아서 고민되네. 혹시 추천을 받을 수 있을까? 선물용으로.”
“예, 예! 물론이지요. 혹시 받으시는 분께서는 나이 대가 어떻게 되시나요?”
“스무 살이 좀 넘었고, 침실에 장식할 만한 걸 보여 줘.”
점원은 곧장 오르골 몇 개를 추려 주었다. 무작정 비싼 거만 권할까 싶어 걱정했지만, 다행히 점원은 적당한 가격대의 물건들을 함께 가져와 보여 주었다.
그중 엘리아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날개깃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표현해 기품 있어 보이는 새 한 마리였다.
‘특이하네. 그림이든 조각이든 보통 새라면 날개를 활짝 편 모습이던데.’
날개를 접고 꽃나무에 앉은 매 한 마리는 눈까지 감고 있어 평화로워 보였다. 그가 잠든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아마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이걸로 포장 부탁해. 음악은 자장가나, 다른 조용한 곡이 있으면 그중에서 고르고 싶은데.”
“조용한 곡이라면 몇 가지 있는데, 들려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조용하던 방 안에 잠을 재촉하는 아름다운 노래가 울렸다. 엘리아는 눈을 감고 작은 나무 상자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었다.
새파란 천이 나풀거릴 남자의 침실에 울려 퍼지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맑은 음이 춤을 추다가, 달빛을 받아 깃털이 되어 내려앉았다. 차곡차곡, 곁에 있어 주지 못하는 저 대신 따듯하게 안아 줄 것 같더라.
* * *
황성에서 출발한 마차가 막 오르골 상점 앞에 정차했다. 앞서 도착한 마차에 이어 커다란 공작가 마차가 둘이나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저것도 공작가 마차인데?”
“빈 마차 아니야? 누가 내릴 기미가 영 안 보이잖아.”
구경 나온 사람들이 에드문트가 탄 마차를 두고 수군거리자, 호위들이 나서 사람들을 흩어지게 했다. 그때까지도 마차의 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돌아 버리겠네. 안에서 또 뭘 하고 계신 거야?’
기다리던 한스의 속이 새까맣게 타기 직전이 되어서야 에드문트가 마차에서 내렸다.
“아가씨께서는 아직 상점에 계십니다. 모시겠습니다.”
한스는 기사들과 함께 공작을 상점가로 안내하는 짧은 시간 동안 그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아침보다는 괜찮아 보였다.
“한스, 내가 타고 온 마차는 저택으로 먼저 보내.”
“예, 그럼 이따 두 분 모시는 건 아가씨가 타고 오셨던 마차로 하겠습니다.”
함께 상점으로 가려던 한스가 길을 되짚어 다시 마차로 돌아왔다.
‘아까랑 말이 다르시네. 또 무슨 변덕인지.’
한스는 공작이 내렸던 마차를 보내기 전 안에 내릴 짐이 있는지 확인했다.
기껏해야 서류 몇 장 있을 줄 알았는데, 마차에서 확인한 흔적에 두통이 일어 이마를 짚어야 했다.
‘하아. 이것 때문에 마차를…… 이걸 또 왜 혼자 갈았는데. 이럴 거면 보좌관은 왜 두고 사냐고!’
에드문트의 왼팔에 감겨 있었을 붕대에는 핏자국이 점점이 묻어 있었다. 원래 있던 상처가 벌어진 건지, 새로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한스는 급한 대로 붕대를 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래. 조금씩 나아지겠지. 그러기로 했으니까.’
볼록 올라온 주머니를, 불안한 마음을 애써 잊어 보려고 했다.
* * *
에드문트가 상점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엘리아는 막 선물을 골라 포장을 부탁하던 참이었다.
“에디! 늦는다더니 시간 딱 맞춰 왔네?”
자신을 발견하고는 웃음 짓는 엘리아의 모습이 무척 낯설었다.
지난 1주일 동안 그를 괴롭혀 온 기억에서, 꿈속에서 엘리아는 단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다.
<당신 때문이었어, 전부. 당신이 나를 죽게 한 거야. 사랑 한 톨 돌려주지 않았으면서.>
꿈에서 엘리아는 그를 비난했다. 그는 빌었지만, 용서받지 못했다.
<에디, 나를 죽이고도 사랑하려고 했어? 당신이 아파하고, 갈망한다는 이유만으로 죄 없는 내가 당신을 또 사랑해야만 해?>
어린 엘리아마저 그의 죄를 추궁하고자 했다. 그는 속죄했으나, 구제받지 못했다.
입으로는 벌을 달게 받겠노라 고한 주제에 사랑을 포기하진 않았으니까.
약속한 화요일이 가까워질수록 그는 두려웠으며 죄책감에 어쩔 줄 몰라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갈망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는, 아마도 제게 웃어 줄 테니까.
그는 엘리아 앞에서 죄인이었지만, 죄인이 아니기도 했다.
그가 엘리아를 죽음으로 몰아갔지만, 엘리아는 죽지 않았다.
그러니 에드문트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구걸했다.
서른둘의 죄인이면서, 무고한 스물둘의 약혼자로서. 스물여덟의 엘리아를 잃고도 열여덟 소녀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아픈 건 이제 괜찮은 건가.’
에드문트의 시선이 엘리아의 얼굴 위를 정처 없이 헤매었다.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가.
전에 침실에서 봤을 때보다는 나아 보였다. 한데 왜인지 얼굴이 붉은 듯 보이기도 했고.
열 때문에 바짝 말라 있던 입술이 오늘은 매끄러웠다. 그러나 향유를 발라 아픈 기색을 숨긴 걸지도 몰랐다.
‘아직 아픈 거라면, 지금이라도 저택에 데려다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에드문트는 상점을 나가자마자 곧장 엘리아를 로앙가 저택으로 돌려보내야 하나 고민했다.
1주일 만에 만났다는 것도, 엘리아가 미리 가고 싶은 곳을 골라 두었다는 사실도 잠시 까맣게 잊고 말았다.
* * *
‘왜 빤히 보기만 하지? 내가 이상해 보여서 그런가?’
저를 살피는 에드문트의 시선을 두고, 엘리아는 영문을 몰라 얼굴을 숙여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끈이 풀린 거도 아니고, 어디 주름지거나 얼룩진 곳도 없는데. 내 얼굴이 문제인가?’
상점에는 거울이 없었던 탓에, 엘리아는 달리 자신을 비춰 줄 만한 걸 찾다가 에드문트와 눈이 마주쳤다. 푸른 기가 청량한 눈동자에 엘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바쁜 일은 다 끝났어?”
“……응,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뭘. 나도 구경하느라 나름 바빴어. 여기 정말 좋다. 종일 있어도 좋을 것 같아. 이런 곳을 어떻게 찾았던 거야?”
“지나가는 길에 눈에 띄어서.”
“그래? 눈썰미 좋구나. 아, 나 계산만 하면 끝나. 에디도 구경 좀 할래? 예쁜 거 진짜 많아. 선물 고르느라 진짜 힘들었어.”
“선물?”
“응, 오르골인데 작은 거라서 침실에 두어도 너무 튀지 않을 거야. 음악은 나도 처음 듣는 피아노 곡인데, 정말 예뻐. 잠이 솔솔 올 것 같더라. 아, 포장 다 끝났나 보다.”
종종걸음으로 직원 앞에 다가간 엘리아가 포장을 마친 오르골을 살폈다. 예쁜 리본이 달린 포장이 마음에 든 엘리아가 점원에게 고생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잠시만, 2골드 87펜이었지?”
엘리아는 미리 들었던 오르골 가격을 입으로 중얼거리며 돈을 챙겨 온 주머니를 뒤졌다. 손톱 크기의 작은 동전들 사이에서 엘리아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50펜, 10펜짜리 세 개…… 으음…….”
주머니가 묵직해서 돈이 아직 꽤 남은 줄 알았는데. 어쩐다. 돈이 간당간당할 것 같았다.
‘안 돼! 여기서 돈 모자라면 무슨 창피야!’
끈질기게 주머니를 뒤적거렸지만, 그런다고 없는 돈이 생겨날 리는 없었다.
“흠흠.”
그 광경을 지켜보던 호위 기사 하나가 작은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냈다. 그러곤 에드문트에게 금화 세 닢을 건네었다.
금화를 받아 든 에드문트가 주머니 안에 얼굴을 밀어 넣을 기세인 엘리아에게 다가갔다.
“엘리, 이걸로 계산해.”
“안 돼, 선물인데. 선물이니까 내가 돈 내야지!”
“마차에서 돈 받을게. 어때? 그리고 나도 빌린 돈이야.”
“……에디 네 돈 아니고 빌렸어?”
“호위에게 빌렸어.”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올려다보자, 그가 옆에 서 있는 호위 한 명을 가리켰다. 나이 지긋한 기사가 살짝 묵례해 보였다.
“그럼 실례 좀 할게.”
엘리는 결국 손에 야무지게 챙겼던 10펜 동전들을 도로 주머니에 쏟아 내고는 에드문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얀 장갑을 낀 에드문트의 손이 엘리아의 손 안으로 금화를 하나씩, 떨어뜨려 주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따라 엘리아가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어, 아까 서점에서…….’
엘리아는 금화를 건네받으며, 모자를 건네던 손과 살짝 닿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손을 뻗었던 것, 손이 뻗어 왔던 구도가 분명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에드문트의 손은 모자를 건네던 닐스의 손과는 달리 닿질 않았다.
마치, 엘리아에게 닿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 조심스럽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까 전에 마차에서 장갑을 봤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는데.’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다. 장갑으로 꽁꽁 감싼 남자의 손이, 엘리아에게 닿아 온 적이 있던가?
‘마차에 오르내릴 때도. 벨젠 경이나 마부였거나 한스 경의 손이었지.’
물론 가깝게 지내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특별히 잡아야 할 일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닿은 적이 아직 없었나 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예, 3골드 받았습니다.”
금화를 받아 든 점원이 거스름돈을 챙겨 주는 사이, 엘리아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어리둥절하게 했던 오르골을 바라보았다.
서로에게 복수한답시고 옷깃 하나 닿아 주지 않은, 등을 돌려 버린 연인들의 모습을.
대체 왜 닿지 않은 두 사람의 모습을 두고 ‘복수’라는 제목을 붙였는지 조금 전만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복수이구나. 그렇구나.’
꽤 따끔한 복수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가깝게 다가온 남자의 손을 새삼 자각하고. 그 손에 처음으로, 닿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이해하고야 말았으니까.
겨우 손 한 번 스치지 못한 거로 마음이 이렇게나 애끓을 수 있음을 깨달았으니까.
* * *
겨우 계산을 마친 선물을 끌어안고, 엘리아는 에드문트와 함께 공작가의 마차로 향했다.
아직 에드문트가 타고 왔던 마차가 출발하지 않아 마차 두 대가 좁은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두 대가 정말 쌍둥이처럼 똑같네. 일부러 똑같이 만든 걸까?’
호위들이 굳게 잠가 둔 마차의 문을 열어 주는 사이, 엘리아는 두 마차를 번갈아 가며 관찰했다.
“아.”
엘리아는 정제되지 않은 감탄사를 내뱉더니, 오르골을 들지 않은 손으로 옆에 서 있던 에드문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저기 봐, 에디. 아주 똑같을 줄 알았거든? 근데 마차 지붕이 약간 달라. 오른쪽이 좀 더 마감이 둥글어. 그치?”
“다른 게 있는지 찾고 있었어?”
“응, 똑같이 만들려고 해도 사람 손으로 한 거니 조금은 다르지 싶어서.”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실없는 시간 때우기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냥 입 열지 말걸.’
머릿속에서 생각만 하면 될 걸 굳이 왜 에드문트에게 알려 주었을까. 에디는 마차 두 대가 지붕이 살짝 다르게 생겼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을 텐데.
“기다리시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다행히 민망함과 어색함 탓에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지던 차에, 마차에 모시겠다는 말이 들려왔다. 엘리아가 에드문트와 나란히 걸어 문을 연 마차 앞으로 향했다.
에드문트가 먼저 마차에 오르기 위해 발 받침에 한 발을 올렸다. 그러나 마저 올라가질 않고 엘리아를 살짝 돌아보았다.
“엘리.”
“응?”
“들고 있는 짐 이리 줘. 올라갈 때 불편할 테니.”
“……아, 응. 여기.”
엘리아가 두 손으로 아래를 받쳐 에드문트에게 주자, 그가 한 손으로 가볍게 오르골을 들고 마차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차가 왜 저렇게 쓸데없이 높은 건지 궁금했는데, 에드문트는 혼자서 잘만 올라가네. 마차가 높은 게 아니라 내가 짧았나 보네.’
혼자서 마차에 오르려고 했다간 체면만 구기게 될 엘리아가 신체적 열등감에 빠져 있는 사이, 호위 기사가 쐐기를 박듯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계단 난간 삼아 잡아야 할 낯선 기사의 손을 보니, 여기저기 자잘한 상흔이 있었다. 기사에게는 노력의 흔적이겠지만, 엘리아는 손이 맞닿는 순간 흰 장갑을 떠올렸다.
‘에디도 상처가 나서 장갑을 꼈나?’
한번 생각이 미치고 나니 계속 신경이 쓰였다. 왜 에드문트는 한 번도 마차 오를 때 손을 내어 준 적이 없었을까? 잡을 일이 없다 보니 계속 닿지 않아 온 걸까.
‘아니면 닿는 게 싫은 걸까? 그래, 장갑 끼기 시작한 시점도 그렇고. 아무래도 닿는 걸 꺼리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왜지? 왜 피하는 건지 모르겠네.’
상념은 마차가 출발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으니, 에드문트에게는 꼭 엘리아가 아픈 것처럼 보였다.
“엘리, 괜찮아?”
“응, 으응. 미안해 잠시 생각 좀 하느라.”
“아직 더 쉬어야 할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저택에 데려다줄게.”
“뭐? 안 돼! 나 멀쩡해. 아파 보여? 아까부터 아픈 줄 알고 빤히 쳐다본 거였어? 나 안 아파.”
갑자기 저를 저택에 돌려보내겠다는 에드문트의 말에 엘리아가 손사래를 쳤다. 한데 에드문트의 표정이 좀처럼 변하지를 않는다.
엘리아는 자신이 정말 멀쩡하다는 걸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에디, 나 정말 멀쩡해. 내가 아직도 아팠으면 안 나왔지. 나도 내 몸 소중한 거 아는걸? 아프면 나만큼 주변 사람들이 고생해야 하는 것도 알고. 그리고 에디 너도 신경 쓸 거 아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겨우 몇 분 되지도 않았고, 나는 같이 있고 싶은…… 데…….”
급한 마음에 생각나는 말을 전부 꺼내 놓던 엘리아가 뒤늦게 제가 뱉은 말을 자각하고는 말을 더듬었다.
같이 있고 싶다니! 불과 한 달 전의 엘리아가 들었으면 기겁하고 뒤집어졌을 소리였다.
그래도 사실인 걸 어쩌겠는가. 매일 바쁜 에드문트와 귀한 시간 쪼개서 만난 건데, 겨우 오르골 하나 쥐여 주고 헤어지면 너무 아쉽잖은가.
“정말 괜찮겠어?”
“그렇다니까. 대체 어디가 아파 보인다는 거야?”
엘리아는 작은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들어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눈도 정상. 코도 정상. 얼굴은 조금 붉어졌는데 이건 부끄러워서 그런 거니까 넘어가고. 입술은…… 아차.’
입술에 발라 두었던 향유가 야무지게 지워진 채였다. 급히 데이지가 챙겨 준 병을 꺼내 없는 솜씨로 입술에 발랐다.
“자, 봐 봐 에디. 눈도 핏줄 터진 거 없이 멀쩡하고. 코가 막히지도 않았지. 입술은, 봄이라 건조해서 그래. 그래서 이거 바르는 거야. 그리고 얼굴. 이거는, 날씨가 너무 따듯해서 조금 덥네. 더워서 그래. 데이지가 또 나 꽁꽁 싸맸지 뭐야? 이게 얇아 보여도 속에 엄청 껴입은 거라서. 이제 알았지? 아주, 아픈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는 얼굴이야.”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손까지 쓰며 짚어 주는 얼굴을 꼼꼼히 확인하더니, 마차 앞쪽에 작게 난 창을 열었다.
“한스, 원래 목적지로 마차 돌려.”
에드문트의 지시를 들은 엘리아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맙소사, 이미 출발할 때부터 나 돌려보낼 생각이었구나?’
다시 자신을 귀가시킬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엘리아는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거나 주워 말을 붙였다.
“내가 오늘 책 산 거 보여 줄까? 잠깐만. 여기 있다. 일단 둘 다 소설책이야. 나 소설 안 좋아하는데 오늘은 특별히 사 봤어. 어떤 내용인지는 몰라. 나는 책 살 때 그냥 제목만 보고 사거나, 표지 그림이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 오거든.”
에드문트의 시선이 엘리아의 옆에 있는 책 두 권에 잠시 쏠렸다. 그의 눈짓을 읽은 엘리아가 표지가 잘 보이도록 책을 들어 주었다.
“이 책은 표지도, 제목도 이상한데 굳이 왜 골랐냐면, 서점에 있는 소설책 중에서 얘가 제일 두꺼웠거든! 봐 봐. 이걸로 사람 때리면 바로 끝장날 것 같잖아.”
엘리아는 손목을 양껏 꺾어 대며 에드문트에게 책 여기저기를 구경시켜 주었다. 팔목보다도 두꺼운 책을 양손으로 쥔 모습이 위태하게 보였다.
다행히 엘리아는 에드문트가 책을 대신 들어 주겠다고 말하기 전에 옆에 내려 두고 다른 책을 들어 올렸다. 두 번째 책은 한 손으로도 가볍게 들 수 있을 정도로 얇았다.
“반대로 이 책은, 서점에 있던 소설책 중에 제일 얇은 거라서 골랐어. 웃기지 않아? 어차피 전쟁하면서 사랑하는 이야기, 가문을 지키면서 사랑하는 이야기, 상단 운영하면서 사랑하는 이야기 뭐 그런 사랑 이야기 써 놨을 텐데, 왜 누구는 이렇게 쓰다 만 것처럼 끝맺고 누구는 사람 질릴 정도로 길고 길게 적었는지. 그게 궁금해서 샀어.”
책 이야기로 시작한 수다는 이내 목적성을 잃었다. 엘리아는 오랜만에 꺼낸 책 이야기에 흥분해서 제목과 두께만 놓고 추측한 책 내용을 장황하게 풀어놓았고, 에드문트는 제법 서사를 갖춰 지어낸 엘리아의 말소리에 귀 기울였다.
아프지 않은 모습.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 본인의 이야기에 푹 빠져 눈을 반짝이는 눈동자. 간간이 에드문트의 반응을 살피는 표정.
남자의 기억에 그 천진한 모습이 차근차근 쌓였다. 불안에 휘청이던 마음이 쌓인 기억에 점차 균형을 잡아 갔다.
눈물을 흘리던 모습, 떠나던 뒷모습이 요동쳐 그를 흔들려 해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학술원에서 제책 방식이 궁금해서, 학자 몇 명을 불러서 이야기 나눈 적 있거든. 그때 배운 건데, 이 책처럼 위쪽에 마감을 끈으로 조이는 게 서남부 방식이래. 혹시 비슷한 거 본 적 있어?”
“서남부 출신 귀족들이 작성한 보고서 마감도 그런 식이야.”
“아, 보고서! 그렇겠네. 근데 서남부 출신 귀족 중에 수도에 올라온 사람도 있어?”
엘리아의 목소리 덕분에 에드문트는 안정을 찾았고, 덕분에 이야기에 대한 반응도 조금씩 늘었다. 엘리아도 그의 달라진 태도를 눈치챘다.
입을 꾹 다물고 시선만 맞추던 부자연스러운 모습에서 벗어나, 적당한 대답을 하면서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엘리아에게 보여 주기 위해 만든 환한 미소 대신 잔잔한 호수 표면 같은 웃음이었다.
‘에드문트가 딴생각 못 하게 막으려고 시작한 거였는데.’
시선을 맞춰 주며 경청해 주는 에드문트의 모습이 좋아서 엘리아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드문드문 고개를 움직이거나 눈썹이 조금씩 움직이는 게, ‘그래서?’, ‘그렇게 생각해?’라고 되묻는 것처럼 보였다.
남들과 말 섞는 걸 즐기지 않던 에드문트만의 대화 방식이라고 생각하니까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귀엽다니. 저렇게 커다란 남자한테 귀엽다는 생각을 할 줄 몰랐어.’
엘리아는 책 이야기를 다 마치고도, 좀 더 에드문트의 반응을 보고 싶어 다시 대화거리를 찾았다.
“그리고 있잖아. 오늘 마차 타고 오면서 한스 씨한테 들은 이야기 말해 줄게. 뭐였냐면, 나도 처음 들은 곳이긴 한데 2번가에 있는 굉장히 유명한 의상실에서 일어난 사건이래. 그 의상실 직원이…….”
의상실 직원의 도주 사건이라면 이미 황성에서 손해를 입은 귀족들이 떠드는 걸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에드문트는 내색하지 않고 엘리아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어차피 르페브 백작이 옷값의 7할에 달하는 400골드를 선금으로 지불했다가 큰 피해를 보았다느니 하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평소보다 들뜬 엘리아의 목소리가 마차에 가득 울리는 게, 음을 높게 잡은 악곡 연주를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언젠가는 음악이 끝나 버리고 말리라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에디 생각은 어때? 사장인 척 사칭해서 선금 들고 도망간 의상실 직원 말이야. 어디로 도망쳤을까?”
“금액이 많으니 수도에서 멀리 달아나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치! 나도 아직 그 직원이 수도에 있을 것 같아. 금화 5천 닢을 무슨 수로 갖고 다니겠어? 보석으로 바꾸면 가능하겠지만 그랬다면 벌써 소문이 났을 거고. 그리고 다른 이상한 점도 많아.”
엘리아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책을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추리를 이어 갔다.
“내가 의상실 직원이었으면 그냥 의상실에 쌓인 돈 등쳐 먹…… 빼돌려서 도망갔을 텐데, 귀족가 여섯 군데에 5천 골드나 사기를 치다니. 너무 과한 돈이잖아.”
“조력자와 몫을 나눠야 하지 않는 이상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5천 골드라는 돈을 손에 넣어야 할 필요는 없었겠지.”
“맞아, 그 말이야!”
에드문트가 맞장구를 쳐 주자 엘리아가 잔뜩 들떠선 목소리를 높였다. 매일 같은 사람들이랑 비슷한 이야기만 하다가 에드문트와 대화하니, 심드렁하게 넘어갔을 이야기도 흥분할 정도로 재미있었다.
“대체 왜 그렇게 선금을 많이 줬는지도 이상하고. 어쩌면 내부 소행인 거 아닐까?”
“선금을 지급한 집사가 공모하고, 빼돌린 돈을 나눠 받았거나.”
“그렇지. 아니면 말이야. 피해 본 가문이 여섯 곳이잖아? 예를 들면 이런 거지. 각각 다른 가문에 속한 여섯 명이 도박판에서 빚을 잔뜩 지고, 함께 앞날을 고민하다가 생각하는 거야. ‘돈 많은 주인 가문에서 빼돌릴 방법이 없을까?’, ‘누가 그들에게 사기를 쳐서 돈을 빼돌린다면?’, ‘그 돈을 우리가 가져올 수 있다면?’”
“의상실 직원 한 명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뒤로는 돈을 챙겼을 수 있겠네.”
엘리아는 자신의 추리를 매끄럽게 이어 대꾸해 준 에드문트에게 배시시 웃어 주었다.
“재미있지 않아? 나 혼자서 이런 생각 자주 해. 신문에 나오는 기사 한 줄 보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생각해 보는 거 말이야. 그냥 다 내 제멋대로 상상하는 거지만.”
“좋아하는구나. 책 이야기하는 거, 추측하는 것도.”
“맞아. 좋아해, 에디.”
에드문트가 엘리아가 좋아하는 것들이라며 곱씹고 있던 차에, 지워지지 말라고 꾹 도장을 찍어 내듯 엘리아가 한 번 더 이야기해 주었다.
“좋아해.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도. 내 이야기 잘 들어 주는 사람이랑 같이 이야기하는 것도. 그래서 오늘 정말 좋다. 행복해.”
다정한 고백에는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저 기쁜 마음과 확신만이 남아 에드문트에게 지워지지 않는 마음을 새겨 넣었다.
어째서일까. 에드문트는 사랑한다고 애걸한 적 없었는데. 사랑해 달라고 강압한 적 없었는데.
자꾸 죄를 끌어안은 그에게 사랑까지 떠밀어 주는 건, 왜일까.
“……나도 좋아해. 네 이야기를 듣고, 바라보는 시간이 좋아. 너무나도.”
고심 끝에 에드문트가 꺼낸 말은 엘리아를 흉내 낸 것에 불과한 음성이었으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바라고 또 바라 넘치는 이 마음만은, 사랑만은 진심이었다.
알려 주고 싶었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너를 원하는지를.
또한, 알고 싶었다. 그가 지금껏 몰랐던 더 많은 것들을.
예를 들어 엘리아가 무얼 좋아하는지, 왜 제게 웃어 주는지. 어떤 말을 건네고, 어떤 선물을 주어야 마음을 더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알게 되면, 노력할 텐데. 남들 하듯, 남들보다 더 노력해서 너를 기쁘게 할 텐데. 네게 사랑받으려 노력할 텐데.’
* * *
엘리아가 에드문트와 가 보고 싶다고 미리 점찍어 놓았던 장소는, 로앙가 저택 인근에 있는 호수였다.
본래 로앙가에서 대대로 소유하고 있던 땅이었지만 엘리아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로앙가는 일방적으로 엎어진 계약이며 투자 자금을 채워 넣기 위해 다수의 재산을 처분해야만 했다.
이 작은 호수를 품은 땅도 엘리아와 또래인 아가씨가 있는 가문의 소유로 넘겨주어야 했다.
“다행이야. 요즘 수도 인근에 괜찮은 땅은 금제까지 쳐서 출입을 막는다던데. 호수 인근은 들어가 봐도 괜찮다나 봐.”
“남부로 향하는 대로와 인접해 있는데, 인적이 드물어서 그렇게 엄중하게 관리하지는 않을 거야.”
대로에 정차한 마차에서 먼저 내린 엘리아는 저녁 시간에 가까워져 살포시 내려앉은 노을 아래 펼쳐진 호수를 바라보았다.
“정말 지나가는 마차 하나 없네. 시야를 가리는 것도 없고.”
탁 트인 시야 끄트머리에 걸려 있는 호수에는 날이 풀리면 뱃놀이를 하는지, 작은 배 두 척과 나무를 얽어 만든 정박 시설도 있었다.
어쩌면 어린 엘리아도 부모님과 뱃놀이를 즐겼을지도.
“봄꽃이 벌써 다 피었네.”
관리하기 쉬운 꽃들만 골라 심은 저택의 정원과는 달리, 호숫가의 들판에는 계절에 맞는 다양한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 있었다.
사람들이 구태여 이름 붙이지 않는 흔한 들풀들마저 한데 모여 같은 색으로 피어나, 온실에 피는 귀한 꽃들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예쁘다. 그치?”
“응.”
뒤이어 내린 에드문트도 잠시 엘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어 풍경을 바라보았다.
황궁과 라스페가의 광활한 저택에 익숙한 에드문트에게, 탁 트인 공간이 새삼스럽게 느껴질 리는 없었다.
대신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정제된 풍경이라는 점이 시선을 끌었다.
분명 마차로 수도와 영지 등을 오가며 이와 비슷한 풍경을 수백 번은 더 지나쳤을 테지만, 에드문트는 단 한 번도 창문을 열어 바깥 풍경을 바라볼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무척 삭막한 삶이었는데, 아마 남들도 다 자신의 삶에 아름다운 풍경 하나 없음을 눈치채었을 텐데 에드문트 혼자 모르고 있었으리라.
숨 막히는 삶을 사는 남자 곁에서 여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어차피, 끔찍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외젠 말로는 어릴 적에 가족들이랑 자주 이 호수에 왔대. 그래서 어쩌면 에디도 한 번쯤 같이 온 적 없었을까 생각했는데. 어때? 기억나는 거 있어?”
“……미안. 온 기억은 없어.”
에드문트는 무슨 죄라도 진 사람처럼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미안하긴 무슨! 사실 나도 기억 안 나. 저언혀. 이렇게 직접 와서 보면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까 했는데, 그렇지도 않네. 처음 와 본 곳 같아.”
엘리아의 목소리가 살짝 실망으로 잦아들자, 에드문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이럴 땐, 뭐라고 말해야 네가 괜찮아지는 걸까.’
위로를 건네야 한다는 본능적인 생각은 있었으나,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때문에 속상해하는 엘리아를 어떻게 하면 다시 웃게 할 수 있을지 몰랐다.
깜깜해진 심경 탓에 제법 아름답다고 느꼈던 호수 전경에도 섣부른 밤이 찾아온 듯했다. 엘리아를 실망케 한 풍경이라는 감상만 남기고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조금, 가까이 가 보겠어?”
“음? 호숫가에?”
“호수 근처까지 가서 살펴보면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되려나? 음…… 어디까지 가 볼 수 있으려나.”
곁에 죽 사열해 있는 기사들을 향해 묻자, 미리 호수에 와서 경계를 서고 있었던 기사 중 하나가 대답했다.
“숲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만 않으시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아직 풀이 다 자라지 않아서, 걸으실 때 불편하실지 모르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아, 구두가 더러워지거나 넘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네. 음. 그럼 그냥 여기서 볼까 봐.”
“구두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갈아 신을 걸 따로 준비하라고 할게.”
물론 저택에서 갑갑하게 지내는 동안 호수에 손이라도 잠깐 담글 생각에 기대가 컸으니,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그러나 고민 끝에 엘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아니, 괜찮아. 어차피 남의 땅이라니까 들어가기도 찝찝하고. 가까이서 보면 지금만큼 예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엘리아는 학술원 정원에 피어 있던 수국을 보러 다가갔다가 개미 떼가 득실한 걸 보고 기겁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멀리서 예뻐 보인다고 다 좋은 게 아니더라. 그냥 여기서 보다 가자.”
에드문트야 엘리아가 하자는 대로 할 생각이었으니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호위를 불러들였다.
“예, 그러면 마차 주변으로 경계 서도록 하겠습니다.”
호위 기사들은 주변 경계를 핑계로 엘리아와 에드문트가 나누는 대화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벌려 주었다.
속내 뻔한 배려에, 엘리아는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괜히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무릎 한참 아래까지 내려오는 옷자락 아래에서 엘리아의 발소리가 콩콩 울리는 동안, 멀어지는 호위들은 검집 흔들리는 소리 한 번 내는 법이 없었다.
‘다들 발소리 하나 안 내고 숨어 버려서, 호숫가에 우리 둘만 남은 것 같네.’
적막한 공간에 해가 지는 모습, 그리고 호수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더해져…….
‘외롭다. 조금.’
외로움이 물씬 올라왔다. 엘리아는 갑자기 찾아온 공허함에 에드문트에게 살짝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오르골 위 연인처럼, 옷자락 하나 스치지 않지만 누가 보아도 다정해 보일 만큼 거리를 좁혔다.
‘……싫어하진 않겠지?’
이미 저지르고서 뒤늦게 긴장이 되었다. 여태껏 함께했던 순간 중에서, 지금이 두 사람이 가장 가까워진 순간이었으니까.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추워서 다가온 줄 알고 말없이 겉옷을 벗어 주었다.
“아, 고마워.”
추운 건 아니었지만 엘리아는 사양 않고 에드문트가 덮어 준 옷에 꼼지락거리며 팔을 끼웠다. 덕분에 황량한 호숫가를 닮은 외로움을 조금씩 지워 낼 수 있었다.
‘따듯하다.’
나무를 태워 만든 온기가 아닌, 남자가 조금씩 조금씩 옷에 담아 준 온기였다. 하여 겨우 겉만 스쳐 가 버리는 벽난로의 열기와는 다르게 마음속까지 따듯하게 품어 주었다.
‘그때, 로앙가에 와서 선물 열어 보라고 옷 벗어서 덮어 줬을 때도 따듯했던 것 같아.’
에드문트가 약속도 없이 찾아와 보고 싶었다고 말했던 3월의 어느 날. 혼란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던 그때의 엘리아조차 어깨 위로 내려앉았던 옷을, 옷에 묻어 있던 에드문트의 체온을 두고 따듯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서로 살을 맞댄 것 같은, 묘한 느낌을 받았음이 기억났다.
절로 마음이 벅차올라, 표현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엘리아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따스함을 에드문트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에디. 전에, 전에 왔을 때도 나한테 이렇게 옷 덮어 줬잖아.”
“로앙가 응접실에서?”
“응, 그때도 따뜻했는데 지금도 따듯하다. 에디는 괜찮아? 나한테 옷 벗어 주느라 셔츠밖에 안 남았는데, 추우면 말해. 알았지?”
“괜찮아. 따듯하다니 다행이야.”
고개를 돌려 에드문트를 살펴보니 들꽃과 닮은 흰색 옷감이 그의 손끝에서부터 단정하게 잠근 셔츠 깃까지 뻗어 나가 감싸 주고 있었다.
멀찍이서 호위 하나가 제 옷을 벗어 건네려 했지만, 에드문트가 손짓으로 거절했다.
‘추운 날씨는 아니니까, 괜찮겠지?’
엘리아는 혹시 에드문트에게 추운 기색이 보이진 않는가 살폈다.
옷감을 좇아 아래에서부터 죽 미끄러져 올라온 엘리아의 시선이 이내 에드문트의 얼굴까지 닿았다.
살포시 다물린 입술. 살짝 닿은 손길에도 흔적이 남을 것만 같은 투명한 피부. 음영 진 눈, 짙은 색의 속눈썹.
그리고 눈동자.
노을 진 호수가 그곳에 있었다. 엘리아가 입은 샛노란 옷이 비쳐, 에드문트의 검푸른 눈동자에 노을이 진 듯 보였다.
그림 같은 풍경을 담은 눈동자에 아름답다고 말해 주는 대신, 엘리아는 오늘 에드문트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에디, 나 매달 한 번씩 가던 서점 오늘도 다녀왔잖아.”
잔잔하던 호수에 바람이 불어왔다.
“오늘이 마지막이었어. 이제 그 서점에는 안 갈 거야.”
담담해 보이던 눈동자에 엘리아의 목소리가 닿아 파문이 일었다. 엘리아에게는, ‘왜?’라고 묻는 에드문트의 목소리처럼 보였다.
“내가 걱정 끼치는 것 같아서. 혹시 나 때문에 걱정했다면 미안해.”
꺼내지도 못한 질문에 되돌아온 ‘걱정 끼칠 것 같아서.’라는 대답은, 모호했다.
에드문트가 왜 걱정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지금 이 따듯한 미소가 숨어 버리고 말까 봐 미루고야 말았다.
“……네가, 원하는 거라면. 원한다면 무엇이든 해도 괜찮아.”
“정말 에디한테 뭐든 부탁해도 괜찮아?”
“정말로. 무엇이든.”
“그럼, 있잖아. 많이 바쁘겠지만, 남는 시간이 생기면 나한테 줄래?”
활짝 핀 꽃 한 송이를 괜히 손으로 톡 건드려 보고 싶은, 그런 천진한 시절의 감정이 일렁였다.
엘리아는 살짝 말을 끊은 다음 제게 집중한 에드문트를 양껏 감상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나 이제 심심해질 거라서. 같이 호수도 보러 오자. 그리고 로앙가에도 놀러 와. 다들 에디 엄청 많이 보고 싶어 해. 처음 너 오고 난 뒤로, 공작님 또 언제 오시느냐고 얼마나 궁금해했는지 몰라.”
“그럴게. 약속할게.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응, 그리고 에디 너도…… 알았지?”
한 번 툭 건드렸더니, 바람이 그리 세게 불지 않는 데에도 꽃잎이 혼자 일렁였다. 다시 손을 뻗어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고자 했다.
“나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고, 그러라고. 그럼 나도 언제든지 찾아갈게.”
주홍빛 아래에서 잔잔히 흐르는 호수의 풍경도. 곁에 있어 주는 모습도.
그리고, 부끄러워선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여자의 모습이, 꿈이 아님을 알았다.
에드문트는 상상해 본 적조차 없는 광경이었으니까. 목이 죄이는 기분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겨우 한숨을 토하듯 고백했다.
“나는 언제나, 언제나 네가 보고 싶을 텐데.”
늘 네가 그리울 거라고.
“그럼 언제든 말해 줘, 에디.”
용기 내 눈을 굳게 감았다가 떴을 때도, 열여덟의 여자가 그의 곁을 지켜 주었다.
“보고 싶다는 말도,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말도. 이야기해 줘. 내가 다 들어 줄 테니까, 에디. 에드문트.”
언제나 보고 싶을 거라는 말에, 대체 언제 그의 외로움이 스몄던 건지. 엘리아는 차마 말 못 한 간절함을 알아주었다.
“…….”
사랑한다는 말이, 너를 매일 욕심내어 평생을 같이 있고 싶으니 떠나지 말아 달라는 절절한 애원이 나올 줄 알았는데.
“고마워, 엘리.”
어렵게 말로 지어 꺼내 보인 마음은, 고마움이었다.
“곁에 있어 주어서 고마워.”
사랑한다는 말이 다른 모든 감정에 앞선다고 하지만, 가끔은 사랑한다는 말로도 충분치 않을 때가 있음을.
고맙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
아름답다는 말. 그리고 행복. 지금 내 눈앞에 네가 있어 행복하다는 말을 전했다.
혹시나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할까 봐 걱정했는데.
“나는 아직 해 준 게 없는데. 그럼 미리 인사받은 거로 생각하면 될까?”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살짝 비켜 가고 만 네 눈동자가 말해 주기를…….
“그때는 또 고맙다고 이야기할게. 몇 번이든, 곁에 있어 줘서 고맙다고 말할게.”
네게 어울리도록 다듬고, 또 다듬어서 건넨 내 마음이 마음에 든다고, 그렇게 말하더라.
* * *
겨우 손바닥만 하게 보이는 호수에 이름 없는 들꽃 깔린 전경에서, 엘리아와 에드문트는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대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데이지가 말했던 것처럼 만나서 얼굴 보고, 직접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두 사람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또 호수와 가깝게 맞닿아 핀 들꽃을 감상하며 바람이 스치면 날아갈 심상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해가 꺾여 어둑해졌다.
호위들이 돌아갈 채비를 시작하여, 엘리아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풍경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아름답다. 그치?”
“응, 좋은 곳이네.”
“어릴 때 왔던 기억은 결국 떠올리진 못했지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라. 안 그랬으면 어차피 흐릿했을 기억을 억지로 끌어오느라 바빠서 이 좋은 걸 다 놓치고 말았을지도 모르니까.”
엘리아의 말대로 눈앞의 호수는 아름다웠다. 어쩌면 함께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혹은 오늘이 두 사람의 처음일지는 모르겠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는, 현실의 아름다움에 침범해 오지 않았다.
“과거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슬퍼도 잠시나마 잊고. 또 놓아 주어야 할 때도 있을 테니까.”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목소리에 과거를, 기억을 떠올렸다.
“……그게, 언제라고 생각해?”
구원을 갈망했다.
“음. 지금 현재가 아름다울 때, 그리고 행복할 때? 그럴 때는 과거는 시간 속에서 잠들게 내버려 두어야 하지 않을까. 왜냐면…… 모든 과거는 한때 현재였고, 우리의 지금도 모두 과거가 될 테니까.”
엘리아는 돌연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게 못내 어색해, 시선을 몇 번 내렸다 올렸다 하며 부산스럽게 굴었다.
그러나 결국 에드문트에게로 돌아왔다. 바람이 불어 빗줄기가 휘청인들, 결국 땅으로 내려앉는 것처럼.
“우리가 자꾸 아름다웠던 과거를, 슬펐던 기억만 떠올리려고 하면 한눈판 사이 지금의 행복이 시간에 휩쓸려 떠내려가 버릴 텐데. 그럼 또다시 반추해야 하는 과거가 되어 버릴 테고. 그게 자꾸 반복되면 현재의 행복 대신 돌아볼 시간도 부족할 만큼 수많은 과거만 쌓이고 말 테니까.”
과거의 슬픔을 그리고 현재의 행복을 찬찬히 곱씹으며, 에드문트는 낯선 말을 이해해 보려고 했다.
‘열여덟의 너를 두고, 내가 자꾸 스물여덟의 너를 떠올리면 너도 다시는 돌려받을 수 없는 과거가 되어 버리게 될까. 네가 주는 이 행복이 시간에 파묻혀서, 색이 바래게 될지도.’
하필 엘리아의 말이 그에게 너무나 위안된 터라, 제멋대로 이해한 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일었다.
하나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옳을 거라 믿기로 했다. 의심 때문에 과거를 곱씹다 현재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아쉽지만 이제 돌아갈까? 벌써 해가 다 지려고 하네.”
“엘리.”
“응?”
“다음에 또, 함께 올 수 있을까?”
보고 싶다는 말, 그리웠다는 말. 늘 그런 담담한 고백뿐이던 남자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욕심을 담아 향해 왔다.
다시 오고 싶다는 말. 함께 와 달라는 부탁.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겨우 다시 오고 싶다는 말 한마디였는데.
‘에디, 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내가 너를 밀어내다가, 기어코 욕심내게 되었을 때. 만나고 싶다고 마음을 드러냈을 때 이렇게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까. 어쩌면 좋지? 나는 이러다 정말 울어 버릴 것 같아…….’
에디한테는 정말 미안했지만, 눈물을 떨구고 말까 봐 엘리아는 대답을 제대로 못 하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이미 눈물이 한가득 고이고 말았지만, 다행히 남자를 위해 고개를 끄덕여 주는 거로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고인 눈물을 마저 지워 낼 수 있었던 건…….
“엘리.”
마차에 오르려던 에드문트가 손가락으로 발 받침을 가리켰다.
“응? 발 받침이 왜?”
“아까 마차랑 다른 점. 발 받침 색이 달라.”
“아하하. 설마 여태 찾고 있었어?”
“나도 알려 주고 싶어서.”
제게 시선을 맞춰 준, 남자의 한마디 덕분이었다.
* * *
호수에서 로앙 백작가 저택까지는 마차로 금방이었다. 엘리아는 조금씩 느려지는 마차 속도로 작별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눈치챘다.
“아쉽다. 오늘 정말 좋아서 시간이 금방 가 버렸어.”
“호위 때문에 많은 곳에 데려가 주지 못해서 미안해.”
“에이. 괜찮은데. 만나서 뭘 하느냐보다 같이 있다는 게 제일 중요한 거래. 그래도 마음 써 준 거 고마워. 나도 더 많이 해 주고 싶은 마음 아니까…… 오르골도, 사실 보석 야금야금 물려 있는 거 고르고 싶었는데. 점원이 말해 준 가격 듣고, 놀란 걸 티도 못 내고 혼자 끙끙거렸지 뭐야.”
엘리아의 설명에 에드문트는 곧장 상점에서 스치듯 보았던 커다란 오르골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음악이 나오는 받침대부터 커다란 나무 세 그루 조각 위에 핀 꽃까지 보석으로 치장한 고가의 제품이었다.
갖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걸지도.
‘로앙가에 도착한 뒤에 지시하면 잠들기 전에 전달할 수 있겠지.’
두 사람의 시선이, 속내가 잠시 엇갈렸다.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고르고 싶었다는 오르골을 언제 선물해 주는 게 좋을지를 고민했고, 엘리아는 잠시 제가 고른 오르골이 에드문트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만큼 비싸진 않지만, 내가 고른 것도 꽤 예뻐.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엘리아가 그간 에드문트의 선물을 생각해 내느라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던가. 특히 그 바보 같은 머리끈 선물을 만회하고 싶어서 며칠을 앓고 또 알았으니.
‘잠깐 머리 아프다고 누워 있다가 오르골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진짜 아직도 선물 뭐 할지 고민했을지도 몰라.’
비싼 걸 주지는 못해도, 나름 의미 있는 거로 골라서 줬으니 엘리아는 에드문트에게 제가 고른 것도 예쁘다며 꽤 생색을 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에드문트가 기대한 반응을 보여 주지 않았다. 당연히 고맙다느니 하는 겉치레 인사라도 할 줄 알았는데.
‘잠깐만, 설마! 내가 말 안 했던가? 아니 그래도, 선물이라고 말했는데! 세상에!’
멈칫한 엘리아가 결국 눈이 꼭 감기도록 깔깔 웃고 말았다. 커다란 남자가 왜 웃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에디이! 아까 내가 산 오르골, 그거 너한테 선물하려고 산 거야!”
“나한테?”
“그래! 내가 너한테 아니면 누구한테 선물을 주겠어? 줘 봤자 데이지한테나 가끔 주고, 외젠? 나 오빠 생일도 잘 안 챙겨서 맨날 헷갈리는걸?”
그의 곁에 둔 오르골에 손을 쭉 뻗은 엘리아가 직접 에드문트의 무릎 위에 포장된 오르골을 올려 주었다.
“자. 에디 네 선물이야. 저택에 가서 풀어 봐. 예쁜 매가 새근새근 자는 모습인데, 보고만 있어도 아마 잠이 솔솔 올 것 같더라.”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응, 잠 안 올 때나 혼자 외롭다 싶으면 꺼내 봐. 물론 매일매일 들어도 좋고. 고장 나거든 돈 열심히 벌어서 새로 사 줄게. 이번에는 내가 맘대로 고른 거니까, 다음번에는 같이 가서 골라도 좋겠다. 그치?”
아주 당연하다는 듯 같이 가자는 말에 마음이 일렁였다. 바람에 휘청이는 호수가 된 기분이었다.
“다음에 같이 가게 되면, 나도 네가 직접 고른 걸 선물할게.”
“응, 좋아. 기대할게.”
곧이어 마차가 완전히 멈추어 섰고, 바깥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좌관 한스가 마중 나온 외젠과 인사를 나누는 목소리,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땅을 쿵쿵 울리는 소리가 작별 인사를 재촉했다.
“아, 옷 돌려줘야지. 고마웠어.”
“그대로 입고 가. 밖에 추울지도 모르니까.”
“춥긴 네가 춥지. 나는 바로 집 앞이잖아. 자, 얼른 입어.”
엘리아가 여태 껴입고 있던 에드문트의 옷을 벗어 돌려주었다. 엘리아의 종용에 에드문트는 마차에 앉은 채로 돌려받은 겉옷에 팔을 꿰었다.
몸에 꼭 맞게 재단된 옷이 주인을 찾아간 모습에, 엘리아가 생긋 웃어 보였다.
“따듯하지?”
따듯했다. 두꺼운 옷 때문이 아니라 엘리아가 남긴 체온 덕분에.
죽음에서 다시 돌아온 뒤로, 아니…… 그가 살았던 모든 생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온몸을 감싸 주는 체온이 정말로 따스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그를 힘껏 끌어안아 주는 엘리아의 온기에 기대어, 용기를 낼 수 있을 정도로.
한 발짝 더 욕심내게 할 정도로.
“엘리.”
“응?”
“마차에서 내릴 때, 내가 도와줘도 될까?”
엘리아는 순간, 부끄러움에 어디로든 꼭꼭 숨어 버리고 싶었다.
‘아, 어쩜 좋아. 내가 자꾸 손 훔쳐보던 거 너무 티 났나 봐…….’
한번 의식하고 난 뒤로 계속 에드문트의 손이 신경 쓰여서, 저도 모르게 계속 그가 낀 장갑 위로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아후. 손 좀 닿고 안 닿고 하는 게 뭐 별거라고 나는, 부끄럽긴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거야…… 나 어쩜 좋아…….’
당장 마차 문을 열어젖히고 어디로든 막 뛰어나가 버리고 싶었다.
그래. 분명 마음은 그랬는데, 뻔뻔한 욕심은 발갛게 열 오른 얼굴을 끄덕여 그를 허락하게 했다.
혹시 에디가 긍정한 걸 못 봤을까 봐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허락해 줘서 고마워.”
“아니, 고맙긴 내가…… 그러니까 고맙다는 게, 내가 내리는 거 도와준다고 해서. 고맙다고.”
대체 누가 믿어 줄까 싶은 서투른 변명 끝에 엘리아는 결국 제 손 안으로 얼굴을 숨겨 버렸다.
어린애 같다고 놀림당할 거라 확신했다. 눈만 가리고선 다 숨었다는 꼴이나 다름없을 저를 보고, 에드문트가 웃음을 터뜨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렵게 눈을 가렸던 손을 떼어 내어 확인한 에드문트의 얼굴에는.
‘저 표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여유가 없었다. 남자의 얼굴은, 엘리아에게는 아직 어려운 감정이 뒤엉겨 있었다.
여러 감정이 뒤엉긴 그 표정을, 그저 긴장이라는 이름 하나로 뭉뚱그려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갈까?”
문이 열리고, 에드문트가 먼저 마차에서 내려 엘리아를 향해 손을 뻗어 왔다.
어둑한 밤을 머금어 짙어진 머리칼. 훌쩍 낮게 선 탓에 새롭게 보이는 얼굴. 그리고, 처음으로 여자를 향해 온 손.
엘리아는 전부 다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에드문트의 손은 장갑에 감겨 있었지만.
‘만일 닿기 싫다는 이유가 아니라면. 그리고 장갑을 벗을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거라면. 나는 괜찮아. 기다려야지.’
시간이 필요한 거라면 기다릴 수 있었다. 마음을 더 주어야 한다면 또 얼마든지. 넘치는 마음을 전부 그에게 줄 수가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마냥 기쁘기만 했다. 살짝 떨리는 손을 그의 손 위에 얹자, 큼지막한 손이 곧장 엘리아의 손을 감싸 안았다.
살짝 닿기만 하려던 손을 저도 모르게 움직여 틈 없이 붙이고야 말았다.
“고마워, 에디.”
온전히 포개진 손이 욕심껏 서로의 체온을 훑었다. 따듯함보다 더 지극하고, 깊은 감각이 포개진 손에서부터 퍼져 나왔다.
충만함. 기쁨. 만족감……. 외로움을 밀어낼 만한 모든 감정이 두 사람에게서 뻗어 나와 각자에게 스미었다. 내내 외로웠으면서도, 어떻게 벗어날 줄 몰라 하던 두 사람에게서.
처음 잡아 본 손은 대체 어떻게 떨쳐 내야 하는지를 몰라서, 그런 핑계를 대면서.
“좋은 꿈 꿔, 엘리아.”
“응, 조심히 들어가고…… 너도. 행복한 꿈 꿔.”
한참을 떨어지지 못하던 두 사람이 서로의 외로움을 녹여 주다 떠났다.
아득한 밤하늘 아래에서 엘리아는 떠나는 마차를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머지않은 날에는, 장갑 없이 서로의 체온을 전할 수 있기를.
그리고 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도, 모두 전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