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화요일
잠들기 전까지 날이 흐려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침 하늘이 무척 맑았다. 몽실몽실한 구름이 바람 따라 살랑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엘리아의 얼굴이 마치 볕 쬐는 새싹처럼 싱그러웠다.
1주일 미뤄진 외출에 맞추어 찾아온 봄 날씨가 반가워, 기쁨이 넘쳤다.
“아가씨, 공작가에서 마차 오기 전에 준비하셔야지요.”
따뜻해진 날씨에 덩달아 들뜬 데이지가 봄옷을 한가득 챙겨 침실을 찾아왔다.
비가 오겠거니 싶어 어제 미리 도톰한 옷을 챙겨 두었는데, 당일이 되니 날씨가 활짝 개어 옷을 새로 꺼내야 했다.
엘리아는 여덟 벌의 옷 중에 가장 최근에 구입했던 샛노란 옷감의 외출복을 골랐다.
“너무 어린애 같은가?”
“머리를 올려서 부풀리면 괜찮을 거예요.”
“어떻게? 어떻게 할 건데?”
엘리아는 옷을 다 입기도 전에 거울 앞에 앉아선 데이지를 채근했다. 손으로 성글게 묶어 모양을 보여 주자, 엘리아가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마음에 드세요?”
“응, 이대로 해 줘. 고마워.”
“지금보다 훨씬 더 예쁘게 해 드릴게요. 아가씨가 수도에서 제일 예쁘시다고 소문날 수 있게요.”
“푸아티에가 막내보다 더?”
“지금도 더 예쁘신데, 그보다 훨씬 더요.”
“음. 암만 그래도 에디한테는 못 미칠 텐데…….”
“공작님께서 잘생기시긴 했죠. 우수에 젖은 조각처럼요.”
“으으. 그 표현 왠지 막 듣는 내가 다 민망스럽다.”
“이건 어때요? 신께서 직접 빚어 내고도 질투해 마지않을 예술품처럼? 아, 어찌나 기품 넘치는 자태이시던가…….”
“아하하, 하지 마. 나 소름 돋았어. 진짜 이거 봐, 팔에.”
엘리아와 데이지의 웃음소리가 4층 복도를 가득 채웠다. 아가씨가 앓아누워 있던 탓에 내내 침울해 있던 로앙가의 저택이, 소란스러운 목소리에 금방 깨어나 활기를 찾았다.
외젠 역시 두 사람이 봄옷을 한가득 꺼내 놓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켜보았다.
‘다행이네. 이제 좀 괜찮아 보여서.’
시간이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엘리아는 촘촘해진 호위에도 비교적 잘 적응해 주었다. 일에 방해가 되니 기사들에게 말을 붙이면 안 된다는 주의를 받고는 ‘너무 비인간적이다.’라며 불만을 토로하긴 했지만.
<방마다 호위들 득실득실한 거 공작가에서 질리게 봤으니까. 그래서 괜찮은가 봐.>
식사는 아직 서툴렀지만, 조금씩 속도가 붙고 있으니 몇 주가 더 지나면 손에 완전히 익을 것이다.
‘어차피 식탁에 오르기 전에 기미며 독 검사를 꼼꼼하게 하는 중이니까, 걱정할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고.’
사실 엘리아는 호위이니, 음식이니 하는 일까지 고민할 겨를이 없기도 했다. 공작가의 보좌관에게 겨우 머리끈 하나 건넨 게 무척이나 속상했는지 며칠을 그 일로 속앓이해야 했으니까.
<엘리, 다른 사람들도 기껏 선물해 봐야 편지나 자수가 전부라니까?>
외젠이 위로해 보려 해도 도통 믿지를 않길래, 대신 데이지가 저택 사용인들을 죄 끌어모아다가 증인으로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중 한 명은 머리를 굴려서, 4층 서고에 있는 책 한 권을 펼쳐 보여 주기도 했다.
<보세요, 아가씨. 여기 남자도 연인에게 편지 보내잖아요.>
<그 아래 아래 줄에 보석 이야기도 적혀 있는데?>
<아이참, 이 남자 애인은 부자라서 그런 보석 선물에는 관심도 없어요. 대신 여기…… 나중에 연인이 남자한테 받은 선물을 다시 떠올리는 장면인데, 편지 이야기만 하잖아요. 사랑하는 사이에 대단한 선물 같은 것보다는 마음이 중요하거든요. 편지 쓸 것도 없이, 그냥 얼굴 보면 좋다고 하고 ‘예쁘다.’, ‘보고 싶었다.’ 말로 해 주는 게 최고예요.>
고집 센 엘리아를 설득하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근데 남들은 다 그렇게 산다고 해도 나는 더 좋은 걸 해 주고 싶은데.>
외젠은 그 시무룩한 소리를 듣곤 답답해 죽겠다고 뒷목을 잡았는데, 그저 제 아가씨 예뻐 죽는 사용인들은 사랑하면 원래 그렇다며 엘리아의 편만 들었다.
‘그래서 결국 선물로 뭘 골랐나 몰라. 어휴. 어차피 물어봐야 왜 물어보냐고 뭐라 하겠지.’
외젠은 호기심을 채우려다 누이와 말싸움을 벌이는 대신, 복도에서 집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쪽을 택했다.
“외젠 님, 아가씨 단장해 드린 것 좀 보셔요.”
별관 수리 문제를 두고 집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게 끝나갈 무렵, 데이지가 복도로 얼굴을 빼꼼 내밀더니 외젠을 찾았다.
또 예쁘다고 말하라며 채근할 게 뻔했지만, 외젠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싫단 말도 못 하고 엘리아의 침실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샛노란 옷을 입은 엘리아와, 그 옆에서 뿌듯한 표정을 짓는 데이지가 있었다.
“그래. 예쁘다, 예뻐. 됐어?”
“뭐야, 그렇게 말하면 거짓말 같잖아.”
“이따 가서 약혼자에게 실컷 들으면 되잖아.”
놀린다고 한 말도 아닌데 엘리아는 혼자 얼굴 붉히며 외젠을 노려봤다. 내친김에 ‘겨우 사람 꼴 되어 있더니 다시 못생겨진다.’라고 한 소리 해 주고는 도로 복도 쪽으로 몸을 돌리고 말았다.
칭찬을 해 주고 싶어도 막상 보면 꾸민 모습이 영 어색해 보이기만 하니, 예쁘니 뭐니 하는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외젠, 나 공작가에서 마차 올 때까지 침실에서 기다리는 게 낫겠지?”
“왜? 날도 좋은데 밖에서 해라도 쫴. 혹시 모르잖아, 조금이라도 클지.”
“내가 식물이야? 해 보고 키 크게. 그냥 여기 있지 뭐. 괜히 일찍부터 밖에서 서성거리면 사람들 불편할 텐데.”
외젠은 엘리아의 대꾸가 신경 쓰여 한 소리 했다.
“엘리, 그런 것까지 눈치 보지 마. 네가 신경 쓰면 되레 밑에 사람들이 더 신경 쓰게 되니까.”
“눈치 보는 게 아니라, 배려하는 거지. 내가 좀 착하잖아.”
말 한마디 그냥 넘기는 것 없이 뻔뻔하게 대꾸하던 엘리아는 새삼스럽지도 않은 외젠과의 실랑이를 끝내곤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곤 일직선으로 뻗은 대로를 보며 ‘저건가?’, ‘이쪽으로 오려나?’ 하는 혼잣말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틈에 외젠은 잠시 데이지를 불러다 창문과 멀찍이 떨어진 의자에 앉게 했다.
“데이지, 쟤 선물 어쩌고 하던 건 어떻게 되었어?”
“모르겠어요. 괜히 여쭤봤다가 또 속상한 생각 떠올리실까 봐 여쭤보지도 못한 거 있죠.”
“그래. 나도 그것 때문에 같이 고민해 줘야 하나 싶다가도 물어보질 못하겠네.”
외젠은 정작 겁을 먹어 아무것도 못 하는 건 사실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무너졌지만 결국 다시 일어나 주었고, 무섭다던 사람을 정면으로 마주하더니 기어코 자신을 마음에 담게 했다.
갑자기 찾아온 사랑에, 죽음의 흔적에 앓아눕는 듯하더니 떨치고 일어나 주기도 했고.
‘나는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질 못했는데. 네가 무너질까 봐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하는데. 너는 불쑥 찾아오는 크고 작은 고난에도 너 하나만 아프고 말겠다며 홀로 이겨 내려 하는구나. 부딪혀 가며, 상처를 입으면서도.’
어쩌면 강한 건 엘리아이고, 약한 사람은 외젠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너를 위한답시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탓에, 너는 자꾸 혼자 견디는 법에만 익숙해져 왔을지도.’
그래도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이다. 기대는 법을 배우지 못한 엘리아가, 사랑을 하는 덕분에.
뒤늦게라도 누군가에게 기대하고, 실망하고, 마음을 주는 법을 배우게 되었으니까.
‘아마 부모들이, 아이더러 저 혼자 알아서 잘 컸다고 말할 때 이런 기분이 들려나. 부모에게도 성취감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는데, 해 준 것 하나 없는데 혼자 커 버린 걸 보니…… 그저 죄스럽기만 하네.’
한참 말없이 엘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곁에 앉아 있던 데이지가 외젠에게 살짝 머리를 기대어 왔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도 같은 느낌을 받고 말았나 보다.
“엘리 아가씨요. 예쁘게 잘 크셨죠.”
“그래. 그러네. 예쁘게 잘 컸네.”
서로에게 기대어, 두 사람은 소원을 빌었다.
부디 따뜻한 햇볕 받으며 살기를. 슬픔이 비가 되어 내려도, 햇살이 내려 흔적 하나 없이 거두어 가 주기를.
* * *
공작가에서 엘리아를 위해 보내온 마차가 도착했다. 마부석에 앉아 온 한스가 부리나케 내려와선 로앙가 남매에게 인사를 올렸다.
“흠흠. 이 미천한 한스 마이어에게, 아름다운 아가씨와 함께 마차에 오를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과장된 몸짓과 말투에 엘리아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깔깔 웃었다. 오늘따라 데이지도 그렇고, 한스 경까지 다들 능글맞게 굴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나와 함께 탈 수 있는 영광을 드릴게요.”
오만한 귀족을 흉내 내며 대꾸해 주자 한스 경이 씩 웃으며 손을 뻗어 왔다. 잉크 자국 하나 없는 깨끗한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서는, 둘이 한참 수다를 떨었다.
‘와. 한스 경 정말 끝도 없이 말하네.’
엘리아도 앉아서 조잘대는 데에는 나름대로 일가견 있었지만, 한스에게는 발끝도 미치지 못했다. 엘리아가 겨우 감탄사 몇 번 뱉는 것만으로도 이미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고마워요. 재미있는 이야기해 줘서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2번가 의상실 직원이 주인을 사칭해 모은 돈을 들고 도주한 일, 가명으로 활동하던 유명 삽화가의 정체가 밝혀지며 뜻밖의 소송전이 벌어진 사건 등…….
한스의 이야기를 듣느라 엘리아는 마차 안에서 선물이니, 서점이니 하는 것들을 생각하며 울적할 틈이 없었다.
“한스 경은 이제 다시 에디한테 가야 하죠?”
“예, 황성에서 지체 없이 모시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늦어져도 괜찮으니까 조심히 와요. 아, 이따가 서점 말고 다른 곳에서 만나자고 전해 줘요. 잠시만. 주소 적어 왔거든요.”
엘리아가 주소를 보여 주자, 한스가 어디를 말하는지 곧장 알아채고 빙긋 웃었다.
“아는 곳이군요.”
“그렇겠네요. 그럼 한스 경 믿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내리는 걸 도와주겠다는 한스를 그대로 앉혀 두고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익숙하고도 낯선 화요일의 풍경이 엘리아를 덥석 끌어안아 주었다.
공예품 상점 문에는 ‘영업 중’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고, 청과물 가게에는 따듯해진 계절에 맞는 식자재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빈손이시네요. 지난번 책이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응, 그리고 이번에는 추억으로 갖고 있을까 해서.”
서점에 들를 때마다 되팔 책을 챙겨 오곤 했던 엘리아가 빈손인 모습에 테오 경이 까닭을 궁금해했더니, 엘리아는 ‘책을 추억 삼는다.’라는 알다가도 모를 답을 주었다.
‘책을 살 적의 추억을 소유하시려는 걸까. 아니면 책을 폈을 적 느꼈던 감정들을 곱씹고 싶어 간직하려는 걸까?’
호위 기사들을 죽 거느리고 서점으로 향한 두 사람이 금세 작은 종이 달린 문 앞에 도착했다.
“테오, 잠깐만.”
서점 문을 열려는데, 엘리아가 잠시 할 말이 있다며 기사를 멈추게 했다.
“나 부탁이 있어. 들어가서 다른 사람이 있는지, 그런 절차 끝나면 앞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지 않을래?”
“……그, 서점 주인과 둘만 남으시겠다고요?”
“응,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어려울까?”
이미 엘리아를 서점에 두고 나왔던 일로 질책을 받았던 터라, 테오 경이 난색을 표해 왔다.
게다가 얼마 전 공작가의 사람들로부터 서점 주인의 정체를 듣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모를 엘리아를 혼자 둘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대신 인원을 최소화해서…… 제가 곁에서 호위하겠습니다.”
“응, 어쩔 수 없지.”
엘리아도 테오에게 부담될 부탁인 줄 알았기에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문 열어 드리겠습니다.”
테오 경의 손에 밀려난 문이 귀에 익은 소리를 내었다.
고요한 서점 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가는 광경을 잠시 지켜본 뒤, 서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점 문이 열리자, 평소 먼저 나와 인사 한번 건네는 법 없던 서점 주인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안녕, 닐스 씨.”
엘리아의 인사에 닐스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대꾸해 주었다. 건들거리던 모습도 사라져, 그는 조금 경직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서점은 고요했다. 엘리아는 며칠 전 자신이 따로 편지를 보내 부탁한 덕택이라고 생각했으리라.
‘네가 몰라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언젠가는 고백하고 싶었는데.’
실은, 네가 찾아오는 이 서점은 오로지 너를 위해 존재해 왔다고. 늘 엘리아를 위해 서점을 비워 고요함 속에서 너를 기다려 왔다고.
“잠시, 내부를 확인하겠습니다.”
“……그러시든가.”
평소 눈에 보이는 곳만 대강 살폈던 테오 경은 정해진 규정대로 서점 안을 꼼꼼히 뒤져 다른 사람이 없음을 확인했다. 닐스는 그 모습에 눈썹을 살짝 찌푸리긴 했지만 빈정거리지는 않았다.
‘어쩐지 오늘 이상하게 구는데.’
테오 경은 닐스가 평소 같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닐스는 엘리아야말로 평소와 무척 다르다고 생각했다.
닐스는 엘리아의 변화를 고작 인사 한 번 나눌 짧은 사이에 자각하고 말았다.
‘늘 한결같던 여자였는데.’
분위기가 달라졌고, 자신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달라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닐스 씨 당신이야말로 무슨 일 있어 보이는데. 잠을 못 잤어?”
“나도, 그…… 일 없었어.”
본래 서로 긴말 오고 가지 않는 사이였으나, 닐스는 뚝뚝 끊어지는 엘리아의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가냘픈 목선을 고스란히 드러낸 모습이, 몸의 곡선을 세세하게 드러내 주는 여린 빛의 옷감이 나풀거리는 모습이 오늘따라 유독 아름다웠던 탓에.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만큼 닐스는 지독한 상실감에 앓아야 했다.
<튀링겐과 로앙이라니, 닐스! 대체 왜 그 여자인 거니? 왜 하필 적대해야 할 가문의 여자를…….>
결코, 자신의 사랑이 이루어질 리 없음을 깨달았으니. 아름다운 여자를 눈앞에 두고도 괴롭기만 했다.
“책 구경 좀 할게. 아, 테오 경이 같이 있어도 되지?”
“조용히 있겠다고 한다면 뭐.”
“고마워.”
엘리아는 곧장 신간을 따로 모아 두는 책장으로 향하지 않고 서점 안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곤 생전 눈길 한 번 준 적 없던 소설책 앞에 멈추어 섰다.
책등에 쓰인 제목은 하나같이 누구의 연애이니, 결혼이니 하는 사랑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연애 소설들이, 엘리아의 앞에 있는 커다란 책장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뒤에 있는 책장 반절까지 넘어가 있었다.
“이렇게나 많네. 사랑 이야기만 지겨울 때까지 하는 책이.”
“겨우 그 정도뿐일까.”
“그럼? 더 많다면, 이 서점 안을 꽉 채울 만큼 많으려나?”
“세상 사람들 수만큼 있겠지. 다들 사랑을 하니까.”
늘 그리워했던 엘리아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하여 닐스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사랑 하나씩 품고 있다고. 하여, 나 역시 다를 바 없다는 고백을 섞었다.
“그렇겠네. 사랑에 허락이나 자격 같은 게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근데 왜 이렇게 어려울까? 세상 모든 사람 수만큼 흔한 게 사랑인데. 어렵게 느껴지는 게 이상해.”
“사랑이 어렵다고?”
“깨닫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시작하는 것도…… 이어 가는 것조차.”
속삭이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닐스에게 닿아 왔다. 마치 그를 불러내는 것 같길래, 조금 더 엘리아에게 다가갔다.
절대 가깝다 싶다 느끼지는 않을 정도로. 겨우 한 공간에 머문다 여겨질 정도로만.
“사랑이 시작하는 것도, 깨닫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울 리가. 그냥, 전부 한순간에 몰아닥쳐 올 텐데.”
“……그래?”
“그렇더라.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깨닫기도 전에 받아들이게 하던데.”
애탄 감정이 섞인 대답을 하자, 엘리아의 눈이 그의 말을 한 자 한 자 곱씹듯 느리게 깜박였다.
갈증이 일었다. 닐스는 여자의 눈동자가 가까이서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저히, 가깝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가 기껏 용기 내 좁힌 거리는 겨우 몇 걸음.
엘리아와 닐스는 서로를 향해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만큼 떨어져 있었다.
아니, 어쩌면 닿을 수 있을지도.
애원해 볼까. 제발 단 한 번만 닿아 보고 싶다고.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을 네게 구걸해 볼까.
“닐스 씨는……. 그때 말이야. 사랑이 한순간에 몰아닥쳤을 때 어떤 기분이었어?”
남자는 홀로 간절해 달싹이는 손을 뒤로 숨겨야만 했다.
“당황스럽고, 화가 나고. 그러지는 않았어?”
무참히 떨릴 목소리 대신, 서글픈 미소로.
실은 당황스러웠다고. 화가 나기도 했다고. 열여섯의 닐스 튀링겐은, 아무것도 모른 채 만났던 엘리아 로앙이 안겨다 준 사랑에 속절없이 휘말려야만 했으니까.
그러나 당황하여서, 어려운 줄도 몰랐다고.
“당황스러웠지만, 스스로에게 화가 치밀기도 했지만……. 그래도 견딜 수 있었어. 행복했으니까.”
갑자기 찾아온 사랑에 어쩔 줄 몰랐고, 혼자 흠뻑 젖어 헤어 나오지 못해 때로는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 까닭은,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너를 기억하며 화요일을 기다리던 하루하루가, 행복했으니까.’
* * *
“나 책 다 골랐는데. 꺼내는 거 좀 도와줄래?”
책장을 살피던 엘리아가 닐스를 불렀다. 지난달의 화요일과 다름없는 목소리여서, 닐스도 평소처럼 엘리아를 대할 수 있었다.
“이거랑…… 여기 끝에 있는 거 맞아?”
“응, 고마워.”
손을 뻗어 엘리아가 고른 책 두 권을 꺼내 주었다. 닐스는 이 순간을 절대 잊을 수 없도록 기억에 꾹꾹 눌러 새겼다.
옷자락에 잠시 스치던 머리칼. 살짝 올라간 입꼬리. 어둑한 서점 안을 비추는 눈동자. 목소리.
이별을 이루는 모든 순간을.
책값을 불러 작은 동전을 받아 들고, 두툼한 책 두 권을 건네어 주자…….
마침내 끝이 다가왔다.
‘조금만. 제발 조금만 더…….’
닐스는 당장이라도 바닥에 저를 처박고 애원하고 싶었다. 떠나지 말라고.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너를 보게 해 달라고.
철없는 욕심인 걸 알지만, 알면서도 끊어 낼 수가 없노라고. 아무것도 모를 너를, 아무것도 모르게 묶어 둔 채 붙잡고 싶노라고. 떠나보내야 하는 걸 알면서도.
네가 떠나고, 너를 떠나보내고도 남을 사랑이 나를 아프게 할 내일을 생각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잠깐만. 엘리아, 전에 놓고 간 거 챙겨 놨어. 이거.”
닐스가 욕심을 부려 떠나려는 시간을 붙들겠다고 꺼낸 건, 엘리아가 지난번 두고 간 모자였다.
실은, 돌려 달라는 말을 해도 본 적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그냥 제가 간직할 생각이었다.
엘리아가 여태 반납한 책들과 마찬가지로. 차마 손에서 떼어 낼 수가 없었기에.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서 어디에도 보내지 않고 간직하려고 했다.
하나 순간의 욕심이, 남자를 후회케 할 걸 알면서도 움직이게 했다. 이별을 조금이라도 늘리고 싶어서 여자가 두고 갔던 모자를 건네게 했다.
“아, 없어진 줄도 몰랐어. 닐스 씨가 챙겨 뒀었구나. 고마워.”
커다란 책을 한 팔에 끌어안은 엘리아가 다른 쪽 손을 내밀어 모자를 건네받았다.
서로를 향해 뻗은 손이, 맞닿았다. 처음으로.
“…….”
눈물이 고였고, 이내 순식간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대체 여태 어떻게 품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심장을 녹여 버릴 것 같았다.
‘말해야 해. 사실대로.’
곁을 지키고 싶었으나 제게서 멀리 떠나보내야 했으니, 그저 기억 속 짓궂은 서점 주인으로 남고 싶었다. 하지만 말해야 했다.
전부 다 말할 수는 없었으나, 그의 약혼자에게서 듣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스스로 고백하는 편이 나을 테니까.
그가 실은 튀링겐의 사람임을. 수도 어딘가에 사는 평범한 귀족이 아니라, 앞으로 권력 다툼에서 서로 검을 겨누게 될 가문의 사람이라고.
“엘리아, 고백할 게 있어. 사실 나는…….”
“닐스 씨, 나도 말할 게 있는데. 혹시 괜찮으면 내가 먼저 이야기해도 될까?”
“…….”
닐스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아직 맞닿은 채 떨어지지 않은 덕분에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그나마, 견딜 수 있었지만…….
“나, 오늘이 마지막이야. 다시는 여기에 오지 않을 거야.”
담담한 목소리에 실은 착각할 뻔했다. 그저 상냥한 말일 줄 알고 기대한 탓에 자신이 끝 모르는 현실로 추락한다는 자각이 늦었다.
‘아. 엘리아 너는, 이미…….’
닐스는 입 언저리에 꺼내 놓았던 말을 삼켜야 했다. 구태여 제 입으로 꺼낼 필요가 없는 말이었으므로.
동시에 여태 저 혼자 어리석었음을 깨닫고 말았다.
‘알고 있었구나. 나를 알고 있음에도 찾아왔던 거였구나. 내가 실은 네게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것마저, 너는 알고 있었겠구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별이 예정되어 있었거늘 어리석은 저만 모르는 채로 착각했던 거였다.
이룰 수 있는 사랑이 찾아왔다고 믿었다니.
“그동안 고마웠어. 좋은 책 많이 찾아다 주어서. 엉터리 계산법 디밀며 깎아 달라고 해서 당신 곤란하게 했던 거, 책 재미없다고 애꿎은 닐스 씨 괴롭힌 거 미안했어. 그리고…….”
엘리아가 품에 안은 책을 한 번 꾹 껴안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닐스에게는 엘리아가 제게 남아 있던 마지막 마음 한 조각까지 털어 내려는 행위처럼 보였다.
작은 서점에 닐스가 엘리아에게 전했던 마음이 떨어져 나와선 차곡차곡 쌓였다. 더는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먼지처럼.
“그리고,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왔던 것도. 미안해. 전부.”
“미안하다고 하지 마, 엘리아. 나는 정말로, 정말로…….”
미안하다는 말은 너무도 살가웠으나, 그에게 닿았을 때는 너무도 아프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밀어 보려 했다. 사과하지 말라고 애써 말했지만 이미 제 살에 빼곡히 박혀 고통스러웠다.
겨우 끝이 살짝 닿았을 뿐이던 손마저 멀어지자, 지독한 한기마저 닥쳐왔다. 너무, 너무나 추운데 춥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괴로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죽을 만큼 괴로운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흐르는 눈물마저 내버려 두었다. 제멋대로 흘러 차라리 저를 산산조각 내 주기를 바랐다.
마지막이었기에.
“내가 처음 여기 찾아왔을 때, 닐스 씨가 나한테 했던 말, 그 덕분에 바보 같은 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어. 그러니까 당신도…….”
너무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길.
원망하려 했는데, 결국 원망하지 못했으니까.
내내 미움받아 왔겠거니 여기며 자책하지 않기를. 결국, 선택은 내 몫이었으니까.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니까.
“잘 있어.”
엘리아는 마지막 인사를 위해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빼곡히 적은 편지지에 마지막으로 이름을 적어 넣듯. 또박또박.
“안녕, 닐스 튀링겐.”
서점 주인 닐스 튀링겐에게. 엘리아 로앙이 작별을 고했다.
문에 매달린 종소리가 남자를 대신해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안녕,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나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