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그래도, 봄
엘리아는 에드문트가 로앙가를 방문한 지 하루가 꼬박 지난 뒤에야 일어날 수 있었다.
심리적인 영향도 있었거니와, 며칠 밤을 새우고 고생한 뒤에 긴 시간 외출까지 감당하느라 몸에 무리가 온 탓이었다.
“나 이제 괜찮다니까.”
아직 얼굴에는 발갛게 열이 남아 있었고, 움직이는 모습에도 힘이 빠져 있었으나 엘리아는 괜찮다며 고집스레 침대에서 벗어났다.
데이지의 염려에 못 이겨 다시 방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잠시나마 정원에 나가 해를 쬐기도 했고, 영지 일이 밀렸다며 집무실에 들어앉은 외젠에게 얼굴 한번 내밀어 주기도 했다.
“외젠이 전에 말한 호수 가 보고 싶은데.”
“안 돼요. 다시 열 오르면 어쩌시려고요.”
“진짜 괜찮은데. 나 멀쩡하다고.”
애교도 부리고, 고집도 부려 봤지만 결국 외출은 포기해야 했다. 잠깐 새를 못 참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더니 다시 열이 오른 탓이었다.
마침 공작가에서 온 의원이 엘리아를 진찰한 후 열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약재를 추천해 주었다.
“아가씨께서 아주 어리실 적에 제가 찾아뵌 적이 있었는데. 벌써 성년을 앞두고 계시는군요.”
“어릴 때 본 적 있다고?”
“아마 기억 못 하실 겁니다. 아마 네 살쯤 되셨을 때니까요.”
나이 지긋한 의원은 자신이 공작가에서 집사 다음으로 오래 일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자연스레 대화는 어린 엘리아가 공작가를 찾아왔을 때의 기억으로 이어졌다.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누가 보이기라도 하면 쫓아가 인사를 건네는 아이가 사랑스러워, 로앙가에서 손님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공작가의 사용인들도 괜스레 들떠 있었노라고.
엘리아는 아낌없는 칭찬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의원의 목소리에 담긴 과거의 제 모습과 비슷한 기억들을 찾아보고자 했다.
‘내가 어렸을 때 그렇게나 자주 공작가에 찾아간 줄은 몰랐네.’
의원이 말해 주지 않았으면 제가 어린 시절 가족들과 함께 공작가를 자주 찾았다는 것도, 차가워 보이는 공작가 사용인들이 실은 어린 시절 저를 반가워해 주었다는 것도 전혀 모르고 살았으리라.
‘예전 일인데, 마치 지금 환영받는 기분이야. 과거의 철없던 내가 받았을 사랑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서는 지금의 나까지 감싸 안아 주는 느낌이야.’
어린 저를 기껍게 여겨 주었다는 이야기가 싫을 리 없었다. 로앙가의 사람이 아닌, 타인이 자신을 반가워해 주었다는 이야기는 실로 오랜만이었으니까.
얼마 전 만났던 에드문트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아, 생각하니까 또 얼굴 붉어질 것 같아. 근데, 어릴 때였으면…… 에디도 저택에 있었겠지? 그때 일 기억하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려나?’
아마 어색하게 웃거나, 거짓말을 하고 넘어가려 하지 않을까. 에드문트에게는 썩 좋은 기억이 아니었을 테니까.
조막만 한 어린애가 얼마나 놀아 달라고 졸라 댔겠는가. 혹은 저를 싫어하는 걸 눈치채고 괜히 시비를 걸었을지도 모르겠다.
“에디가, 아니 공작께서 귀찮아했겠어.”
“하하. 아주 어릴 적부터 고요함을 즐길 줄 아시는 분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아가씨 오시는 날을 싫어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아가씨께서 정원 구석구석을 살피고 다니시면 창밖을 내다보시던 도련님의 시선이…….”
의원은 잠시 말을 끊고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동그랗게 뜬 눈이, 어린 시절 모습을 대번에 떠올리게 해 주었다.
그리고, 작은 여자아이를 향하던 공작가 도련님의 시선이 어떠하였는지를.
“떨어질 줄을 몰랐으니까요.”
“에디가 나를?”
“먼저 다가가는 게 익숙지 않으신 탓에 본인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셨을 뿐이지요.”
“그랬다면, 정말 그랬다면 좋을 텐데.”
적막한 저택에서 외로웠을 아이가, 가끔은 어린 자신의 바보 같은 모습에 웃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마저도 없었다면 공작가의 어린 도련님은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너무 미워하지 말 걸 그랬지. 무서워하지 말 걸 그랬어.’
엘리아는 남자가 지나왔을 시간을 자꾸만 제 어린 시절과 겹쳐 보았다.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겪은 모든 비극을 동일하게 겪었으나, 엘리아를 버티게 해 준 모든 위로와 다정함은 결코 누려 본 적 없었다.
누군가는 그의 타고난 지위와 재산이 다른 모든 비극을 상쇄해 준다고 믿을지도 모르겠다.
하나 엘리아는 제국의 공작으로 태어난 업보라고 치부해 버리고 넘어가기에는, 그가 버텨 온 삶이 너무 가혹하지 않았느냐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가 외로움을 대가로 가진 게 무엇이던가. 누군가를 찍어 누를 수 있는 권력? 귀한 것들을 고민 없이 누리게 해 주는 재력?
과연 에드문트가 외로움을 대가로 누리는 부와 힘에 만족하여 다른 모든 것들을 필요치 않다고 여기는 사람일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존재키나 할까.
엘리아는 한때 에드문트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아 왔다. 아무것도 필요치 않을 사람. 누구도 원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치부해 왔다.
하나 당신도 결국 사람이더라.
<엘리.>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줄 줄도 알고, 예쁘다는 칭찬에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하고.
‘흉내를 내는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실은 가끔, 에디가 웃는 걸 보면…… 무언가 참아 내고, 그 위에 다른 표정을 덧씌운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으니까.’
하면 기만인가? 거짓된 웃음을, 작위적인 다정함을 약혼자를 향한 기만이라고 낙인찍어야 할까.
그럴 수는 없었다. 그에게만 완벽함을 바랄 텐가. 엘리아는 결백하던가.
‘내가, 에드문트에게 늘 진실하기만 했던가? 거짓된 마음으로 속을 감춘 적이 없었나?’
그럴 리가. 과거의 엘리아야말로 거짓으로 점철된 사람이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한 거짓말을 일삼아 왔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네게 거짓말을 하게 된다면. 그건, 네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한 거짓말이 될 거야. 진실이 아닌 건 마찬가지이겠지만…….’
네가 안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괜찮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짓말을 하게 될 테고.
나를 실제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겨 주길 바라 거짓말을 하게 될 테지.
서로의 마음을 바라는, 작은 거짓말을.
‘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가 그러하듯 에디 역시, 완벽할 수는 없을 테니까.’
다가오는 게 서툴러, 없는 다정함을 남에게 빌려 오기도 하고. 부른 적 없던 애칭을 입에 담아도 보고. 그렇게라도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우리가 완벽할 수 없는데, 서로의 마음을 바라는 작은 거짓말은 용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용서하면 안 되는 걸까.’
* * *
공작가에서 온 의원이 떠나고, 엘리아는 창가에 기대어 앉은 채 봄이 내려앉은 정원을 바라보았다.
봄이라 하면 막연히 따듯하게만 느껴지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엘리아는 겨울에나 입는 도톰한 담요를 걸치고 난 뒤에야 복도를 거닐 수 있었다.
아직 채 데워지지 않아 겨울을 닮은 서린 기온이 소름을 돋게 했더랬다.
마음도, 같은 이름을 갖고도 서늘하기만 하다가 어느 날 한껏 따뜻해진 채 불어오겠지. 마치 봄처럼. 남자의 마음처럼.
서서히 깨어나는 여자의 마음처럼.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에디. 너는 무얼 하고 있어? 해가 이렇게 따뜻한데. 혹시 집무실에만 틀어박혀 있지는 않고?’
누군가 에드문트에게 알려 주어야 할 텐데. 바깥에 봄이 찾아와서, 무척 따듯하다고.
그가 집무실 창문을 열어 정원을 내려다본다면 어떤 풍경을 눈에 담게 될까.
공작가의 저택을 떠올려 보자, 황량함이 엘리아의 얼굴을 찌푸리게 했다.
‘다음엔 꽃을 심어 볼까. 공작가 정원 구석에 가을꽃을 심는 거야. 값비싼 화초들 틈에서 저도 나름 꽃이라고 으스대며 피는 모습이, 어쩌면 너를 웃게 할지도 모르니까. 에디, 너를 덜 외롭게 해 줄지도 모르니까.’
달리아, 메리골드, 헬레니움…… 당신이 바라볼 새파란 정원에 어떤 꽃을 피워야 좋을까.
‘……보고 싶다.’
아, 네가 보고 싶을 줄이야.
갑작스레 찾아왔던 네가 남긴 말이 저택에 남아선, 내가 손 쓸 틈도 없이 멋대로 자라 꽃을 피웠나 봐.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렇게나 순식간에, 너를 그리워하게 되었겠어.
네가 두고 간 그리움이 얼마나 많았는지. 인사말에 실어 보내고, 편지에 담아 보내도 무수히 남아서는…….
‘보고 싶다. 뭐 하고 있을까?’
그리워하게 하는지.
너를 마음에 담지 않았던 시절까지 되새겨 가며 떠올리게 하는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었음에도 뒤돌아선 것처럼 외면했던 순간들, 스쳐 가기만 하던 시선들.
그 모든 시간을 돌려받고 싶었다. 돌아와 주질 않을 과거마저 후회하고 욕심내게 했다.
‘만약에 내가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바보같이 너를 괴롭히기만 할 말괄량이 꼬맹이를 붙들고 부탁해 볼 텐데.’
아이야. 언젠가는 너도 지독하게 외로워질 테고, 세상이 무척 두렵기만 할 텐데.
그때 네가 기댈 수 있는 게 괴물뿐이라서. 그 커다란 등에 숨어 한참을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알게 될 거라고.
무섭다고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느라 네가 몰랐을 뿐.
몰라주었을 뿐. 그는 사실 참, 외로운 사람이었음을.
서로를 바라보기에도 아까울 시간을 너는 하늘의 구름처럼 막연히 흘려보내기만 할 텐데…….
그러지 말아 달라고.
겨울이 남긴 시린 외로움을, 죽음이 남긴 까만 슬픔을 걷고 먼저 다가와 주기 전에.
이번에는 네가 먼저 다가가서 따뜻하게 품어 주라고.
* * *
다음 날 엘리아는 로앙가의 정원사에게 작은 화분 세 개를 받았다. 정원사는 가을에 옮겨 심기 위해 화분에 키우고 있던 작은 이파리들이, 물을 머금고 햇볕을 쬐어 어떤 꽃을 피워 낼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어떤 꽃이 필지 기대하면서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엘리아도 꽃 이름을 모르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정성껏 키우다가, 다음에 에드문트의 집무실에서 잘 보이는 자리에 심기로 마음먹었다.
‘나도 공작가에서 키우는 꽃나무 하나를 얻어 와서 심어 볼까? 내 침실에서 잘 보일 만한 데에다 심어 두고 생각날 때마다 보면 좋을 텐데.’
공작가에서 내어 준 것도 아닌데 엘리아는 벌써 제멋대로 받아 올 꽃나무를 심을 장소를 골라 보려 했다. 그때 데이지가 아직도 창문을 열고 바깥 구경에 여념 없는 엘리아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이제 해 지면 찬 바람 불어요.”
이마를 짚어 보니 역시나, 열이 아직 남아 있었다. 엘리아는 서늘한 체온에 얼굴을 기댔다.
“내일도 따뜻하겠지? 내일은 나가도 될까?”
“내일도 오늘만큼 날이 따뜻하다면 정원에서 산책하는 것 정도는 괜찮으시겠지만…….”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나가지 말라고?”
“다음 화요일에 실컷 놀러 다니시려면 말이죠.”
엘리아는 얌전히 창문을 닫은 뒤 약을 챙겨 먹고, 탁자 앞에 반듯하게 앉아 책을 펼쳤다. 창밖 풍경이 아쉽지만 괜히 욕심부리다가 정작 중요한 날에 아프면 억울할 테니까.
쓰디쓴 약을 상에 올려 주면 얼굴을 살짝 찌푸리다가도 결국 꾹꾹 씹어 삼키고, 감기 도진다고 목이며 어깨 위로 두꺼운 겉옷을 둘러 주면 평소처럼 훅 털어 내고 도망가려 하다가도 마음을 고쳐먹고 꾸역꾸역 덮고 다니고.
그런 엘리아의 모습에 데이지와 외젠은 복잡한 심경을 느끼고 말았다.
“저게 벌써 다 커서 어른 흉내야.”
“몇 달 지나면 어른이신걸요. 남들은 저 나이 대에 벌써 결혼하기도 하는데요 뭘.”
“언제 적 이야기를 해? 요즘은 늦게 가는 게 평범한 거라고.”
“보내 드릴 생각 하니 벌써 아쉽고, 그러세요?”
놀리듯 물었지만 데이지 역시 같은 기분이었다. 헤어질 생각을 하면 당장 눈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날은 아마, 로앙가의 사람들이 전부 눈물 마르도록 울지 않을까.
“가도 돼.”
“갑자기 어디를요?”
“공작가 말이야. 나중에 엘리 결혼하거든. 난 괜찮으니까.”
“음. 저도 괜찮은데, 로앙 백작가가 괜찮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있을까 봐요.”
“너는 가끔 나를 너무, 엘리보다 더 모자란 애 취급한다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정말 어떨 때는 손이 더 많이 간다 싶을 때가 있거든요.”
혼자만의 생각에 골똘한 엘리아는 이제 스러질 것 같던 여덟 살 아이가 아니었다.
열여덟, 그리고 곧 열아홉. 여전히 버거워하고 아파하기도 하지만 전부 다 훌훌 털어 내고 꿋꿋하게 살아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손님 오실 거라는 이야기는, 아가씨한테 아직 안 하셨어요?”
“응, 아직. 이야기해 주기가 그래. 저쪽에서 몇 시에 온다는 소리도 없고. 걱정도 되고.”
“앓으신 지 얼마 안 되셨으니까요. 정 걱정되시면 조금 더 미루는 것도 고려해 보세요.”
“아냐. 미룰 수는 없지. 공작가에서도 이 정도면 충분히 기다려 준 거고. 더 미룰 수도 없어. 그리고…… 믿어야지. 두려워도.”
“그렇지요. 엘리아 아가씨를 믿어 드려야지요. 일단 사람 온다는 이야기부터 저녁에 알려 드리는 게 어때요?”
“그래. 오늘 저녁에. 근데, 데이지.”
열린 문 틈으로 함께 엘리아의 모습을 살피던 외젠이 대뜸 데이지를 불렀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더니 역시나, 그가 데이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며칠 또 일에 치인 탓에 멀끔해야 할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데이지는 익숙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늘도 피곤해 보이시네. 저걸 다 손으로 훌훌 쫓아 드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저는 팔 아픈 것도 잊고 그의 곁에서 내내 손을 휘적거려 줄 텐데.
“정말 안 갈 거야? 공작가에…….”
“아마도요?”
“‘아마도’는 또 뭐야? 간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누가 저더러 ‘가지 마.’라고 말해 주면, 안 간다고 마음 굳힐지도 모르죠.”
“…….”
데이지의 대답에 외젠의 입술이 들썩이다가 결국 다물렸다.
아마도 데이지가 조금 더 기다려 주어야 하는 모양이다.
한참이 지나서야 듣게 되어도. 기다릴 수 있으리라.
한때는 마음이 변해 버릴까 봐 두려웠고, 사랑이 먼저 불쑥 떠나 버릴까 두려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단단해지는 마음 덕분에 안심할 수 있으니.
기다릴 수 있었다. 기다리는 것쯤이야. 어려울 것도 없으니까.
자식처럼 키워 낸 아이가 씩씩하게 자라 준 것처럼, 사랑도 지나온 세월만큼 굳건해져 버티게 해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