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어둠
닐스 튀링겐이 정체를 숨기고 수도에서 머무는 저택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부유한 평민들이 모여 산다는 주거 지구에 도착하니, 근방의 건물 안에서 닐스를 감시하고 있던 수하들이 에드문트를 맞이했다.
길가로 난 2층 창문의 짙은 색 커튼을 걷자 마차 한 대가 보였다.
“방금 들어갔습니다. 확인 중에 있으나 황후로 추정됩니다.”
“전에는 한 번도 누가 찾아온 적이 없었나.”
“네,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닐스 튀링겐이 여태 황후와 튀링겐 자작가에서 붙여 준 호위까지 따돌리고 숨은 곳인지라, 누군가 찾아온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기사 랄프 경의 설명을 들으며, 에드문트는 창밖의 상황을 주시했다. 마차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종류였고, 호위하는 기사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영지에 처박혀 살고 있을 줄 알았던 조카아이가 수도에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황후가, 준비도 없이 급히 찾아왔으리라.
“황제에게 말하지 않고 나왔겠군.”
“예, 황제가 알았다면 저렇게 허술한 호위로 나돌아 다니게 하진 않았겠지요. 평소에도 감금 수준으로 싸고도니 말입니다.”
황후를 향한 황제의 집착은 가히 광증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한미한 튀링겐 자작가의 여자를 우연히 만나 약혼자를 미련 없이 버렸으며, 오직 제 사랑을 보호할 권력을 얻겠다고 친형인 1황자를 해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였다.
심지어 둘 중 어느 쪽의 문제인지 몰라도 결혼한 지 10여 년이 지나서도 아이가 생기지 않은 터라, 재가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왔으나 황제는 결국 사랑을 택하였다.
<후계는 필요치 않다. 다신 황후의 앞에서 경망하게 굴지 말도록.>
후계자가 없는 황제의 지위가, 처지가 어디까지 내몰리게 될지를 알면서도.
결국, 사랑이 그를 죽이고 말 거란 걸 알면서도.
에드문트는 이전 생에서는 이해하지 못했던 황제의 광적인 사랑을 이해해 보고자 했다.
아니, 미친 건 저도 다를 바가 없었다. 에드문트는 벨레노아의 즉위식 때 마주했던 황제의 죽어 가는 얼굴을 떠올렸다.
시체 같던 얼굴을 기억해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에드문트는, 매일 새벽 거울에서 같은 얼굴을 보아 왔으므로.
“공작님,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수하 중 하나가 속삭였다. 아마도 본래의 에드문트였다면 가장 먼저 그 계획을 떠올렸으리라.
상처 하나 없을 황후의 몸에 검을 꽂아 넣을 수도 있을 테고, 납치하여 황제의 마음을 꺼멓게 죽어 버리게 해 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당장 목을 잘라 예쁘게 포장하여 3황자에게 보내 주는 방법도 있다.
전의 생에서 했던 일을 살짝 비틀어, 이번에는 닐스 튀링겐이 약에 미쳐서 황후를 죽였다고 모함해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에드문트는 선택할 수 없었다.
제가 만든 죽음이 엘리아가 바라봐 주는 눈동자에, 이름을 불러야 할 입술에, 닿지 못하는 손에 묻어서 떨어지질 않을까 봐.
하여 죽음을 마주하면 무너지는 여자를, 만나러 갈 수 없게 될까 봐. 영원히 닿지를 못해 괴로워하면서도 죽지도 못할까 봐.
두려워서 선택을 미루기만 했다.
“아니…… 아직은.”
그리고 언제까지라 함은…….
아마도 죽어서까지도.
* * *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에드문트의 눈에 익은 작은 체구의 여자와 젊은 청년이 길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황후와 그의 조카, 닐스 튀링겐이었다.
에드문트가 있는 2층 창가에서는 걱정이 가득 묻어나 있는 황후의 얼굴도, 입술을 말아 문 어린 닐스의 모습도 또렷하게 보였다. 안에서 이야기가 채 끝나지 않았는지, 두 사람은 마차 앞에서도 한창 실랑이를 벌였다.
“아래층에 세 명이 매복 중입니다. 대화 내용을 파악하는 대로…….”
“서점.”
“예?”
“서점 이야기를 하는군. 팔아라. 네 아버지가 그리운 건 알지만. 수도는 아직 위험하다고 몇 번을 이야기하나.”
“독순술을 하시는 겁니까? 여기서 보이십니까?”
“튀링겐의 입은 가려져서 안 보이는군.”
주로 황후가 얼굴을 굳히며 닐스에게 말을 쏟아 내고, 닐스는 중간중간 고개를 떨구거나 외면하는 식의 행동을 보였다.
두 사람이 뻔한 이야기나 지껄이는 덕분에, 에드문트가 그들의 입 모양을 보고 내용을 추정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대부분 서점에 관한 것들이었다. 에드문트는 보고서의 내용을 떠올리며 그들의 대화를 주시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닐스 튀링겐의 부친이 죽기 전 인수하여 유산으로 남긴 것으로 보입니다. 수년째 방치되어 있었지만, 증언에 따르면 3년 전부터 닐스 튀링겐이 관리를 맡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먼저 죽은 부친의 유산이었지만, 이제는 단순히 부친을 추억하기 위해 서점을 지키는 게 아니었으리라.
“서점은 손 떼라. 수도는…….”
‘수도는 아직 네게 위험하다고 몇 번을, 대체 몇 번을 더 말해야 하니.’
황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분명 떨리고 있었다. 당장 쓰러질 듯 가녀린 몸이 풍랑을 맞은 배처럼 휘청였으니까.
‘닐스, 나는 널 지키기 위해서 이러는 거야. 2년만 더 지나면 3황자의 승계 구도가 명확해질 거라 하셨어. 그때 크라우제 후작이 널 책임지고 사교계에 자리 잡게 해 준다고 약속했고. 알았니? 겨우 몇 년이야. 그러니까 제발, 돌아가렴. 안전한 곳에서 기다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절절한 애정과 답답한 심경이 드러났다. 에드문트가 익히 알던 황후의 감정이었고, 실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애정이었다.
제 친자식도 아니고, 나이 차 나는 자매가 낳은 아이일 뿐인데. 제 아이인 양 착각이라도 하는 걸까.
황제에게 받아먹는 애정이 넘쳐서, 어딘가에 흘려보내 주지 않으면 감당이 되질 않기라도 하는 걸까.
닐스의 대꾸가 제법 길어지는지 황후는 입을 꾹 다문 채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문트도 침묵 속에서 기다림을 이어 갔다.
잠시, 바람이 불어 열어 둔 창문 안쪽을 가려 주고 있던 천이 휘날렸다. 깜짝 놀란 수하가 혹시 에드문트의 얼굴이 드러날까 봐 팔을 뻗어 천 자락을 잡아챘다. 그 바람에 다시 입을 열던 황후의 얼굴을 잠시 가리고 말았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황후의 입술이 가장 처음 읊은 건…….
‘엘리아 로앙이 탐이 나니? 꼭, 그 아이여야만 하는 거니?’
연인의 이름이었다. 에드문트의.
정적의 입에서 나온 엘리아의 이름에 에드문트가 차게 웃었다.
서점에서, 엘리아를 향해 뻗던 닐스 튀링겐의 손을 떠올렸다. 그 꼴을 보고 에드문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양 굴었다.
이미 제 여자라는 자만심 때문도 아니었고, 닐스 튀링겐에 아무 분노도 느끼지 않았을 리도 없다.
그에게 검이 있었으면 허공에 남은 여자의 흔적이라도 쥐려 애쓰던 팔을 잘라 냈을 것이고, 다시는 감히 바라보지 못하도록 눈을 도려냈으리라.
하나 엘리아가 옆에 있었기에. 저를 두려워하는 여자를 앞에 두고, 같잖게 구는 인간을 물어뜯을 수는 없었기에.
<내 말은, 화요일에 내가 서점에 오거든…….>
저택으로 향하던 마차 안에서, 엘리아가 에드문트의 이름을 부르며 다음번의 화요일을 약속해 주었기에 남자의 죽음을 저 멀리 미뤄 둘 수 있었다.
미뤄 놓고는 오직 엘리아에 대해서만 생각하느라 들끓던 분노를 지워 낼 수도 있었다.
하여 에드문트는 그의 치기 어린 마음을 관조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네가 보고 싶을 거야.>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조금은, 빼앗기지 않으리라 확신해도 되지 않을까.
이제는 그래도 되지 않을까.
황후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에드문트는 황후의 붉은 입술이 읊어 대는 말들을 따라 읽었다.
엘리아, 로앙 백작, 그리고 에드문트 라스페 자신의 이름.
“라스페 공작이 무너지면, 결국 로앙도 무너질 거다. 반역자의 가족이 될 여자를, 가문을 잃은 귀족을 품겠다 해도 나는 말리지 않겠다.”
‘다만 기다릴 줄을 알아야 한단다. 모든 사랑이 처음 다가왔던 만큼의 아름다움을 간직하지는 않아. 네가 애타게 바라던 사랑이 1주일, 한 달 만에 스러질 수도 있을 테고…….’
“맙소사, 저 미친 인간이 지금 대로변에서 못 하는 말이 없군요.”
에드문트가 황후의 말을 곱씹는 사이, 가신들은 그가 소리 내 읊은 황후의 말을 듣고는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라스페 공작과 로앙 백작에게 반역의 죄를 뒤집어씌우겠다는 소리를 저렇게나 열린 장소에서 당당하게 지껄이다니.
하나 에드문트는 그런 황후의 말에 딱히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계획이 고작 공작가를 반역자로 몰아가려는 것임에 기꺼워했다.
“반역으로 몰아넣는 건, 최후의 수단이지.”
“예, 황제와 3황자파의 크라우제 후작이 최후의 수단까지 염두에 둘 정도로 내몰렸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걸 저 인간이 우리 앞에서 떠드는 걸 알면, 후작이 참으로 속이 쓰리겠습니다.”
분한 마음에 이를 갈던 한스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서 두 세력 간에 오가는 ‘경고’의 수위가 높아지는 낌새였다. 찻잔에 독을 푸는 행위를 넘어서서, 가문의 식솔들을 하나둘씩 잡아먹는 형국에까지 이르지 않았던가.
‘자신감이 넘쳐 도발하려 드는 건 줄 알았는데. 공작님 말씀처럼 절박해진 탓에 계란으로 바위를 치받는 중일지도. 그렇다면 이쪽에서야 환영이지.’
밖에서는 여전히 황후가 제 조카를 붙들고 설득 아닌 설득을 하려 들었다. 엘리아 로앙을 향한 닐스의 마음을 알면서도, 네 사랑을 막지 않겠다는 달콤한 소리를 하면서.
차마 황후 본인과 자신의 남편이, 그들의 목숨을 보전해 줄 3황자 세력이 네가 사랑한 여자의 가족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진실을 전하지는 못한 채.
지독한 진실을 전해 원망받고 싶지가 않다는 비겁한 이유로, 그저 한때의 사랑으로 치부하고 넘어가 주기만을 바라면서.
하여 무지한 청년은 제가 뛰어들려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모른 채 열망했다. 황후를 붙잡고, 애탄 마음을 드러냈다.
에드문트의 눈에 남자의 절박한 목소리가 보였다.
“다음 주 화요일. 서점을…… 마지막으로. 애원하는군.”
‘제발, 클로디 님. 단 하루만, 하루만 주십시오. 다음 주 화요일에 찾아오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평소처럼 얼굴 한번 보는 거로…….’
“어리석군요. 황후가 절대 용납 못 할 텐데. 저 멍청한 남자가 감히 로앙가 아가씨에게 연정을 품은 것도 알고 있으니…… 저라면 허락 안 합니다. 당장 마차에 집어넣어서 튀링겐 영지에 내다 버리고 오지요.”
“어리석게도, 결국 허락할 거다.”
에드문트가 왜 이전의 생에서 굳이 황후나 황제가 아닌, 닐스 튀링겐을 희생양으로 삼았겠는가.
그의 예상대로. 황후는 결국 자식처럼 아끼는 닐스에게 모질게 굴지 못해 고개를 주억거려 주고 말았다.
“하, 참.”
한스를 비롯한 가신들이 모두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엄연히 약혼자가 있는 여자를, 가망도 없는 사랑을 하겠다는데 그 어리석은 모습을 기어코 외면하지를 못하다니.
무의미한 기다림을 허락하다니.
“황후가 출발하려는군요. 저희도 슬슬 이동해야겠습니다.”
“잠깐.”
철수하기 위해 자리를 뜨려던 수하들을 제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여태 창문을 가리고 있던 천을 직접 손으로 잡아 걷어 내기까지 하였다.
“주인님, 위험…….”
놀란 기사가 에드문트에게 다가가는 순간, 공작이 쥐고 있던 천 자락에서 우두둑 뜯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남자, 분명히…….’
여태 마부석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남자가 마차 문을 열어 주기 위해 다가왔다. 겨우 몇 발짝 걸어 나오는 데에도 걸음걸이가 특이하다는 게 확연히 보였다.
절뚝거리는 모습에 뜻 모를 기시감을 느끼던 에드문트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눈에서 불이 붙었다. 새까맣게 타올랐다.
“그때, 비 오던 날…….”
에드문트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의 기억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비가 무겁게 내리던 날. 스물여덟의 엘리아가 에드문트를 떠나던 날.
부서진 마차와 함께, 엉망이 된 엘리아의 시신과 함께.
다리를 절던 마부도 함께 돌아왔던가?
“공작님? 라스페 님!”
시체가 있었던가. 죽었던가.
<에디, 네가 보고 싶을 거야. 내일도. 그다음 날에도.>
엘리의 목소리가 기억 속 세찬 빗소리에 씻겨 희미해졌다.
에드문트는 사랑을 집어삼킨 빗줄기를 향해 물었다.
과거의 삶에서 엘리아 로앙이 죽은 건, 정말로 단순한 마차 사고 때문이었나?
* * *
공작가에 돌아온 에드문트는 스스로를 지하 석실에 처박았다. 누구도 감히 온기 하나 없는 시린 공간에서 에드문트를 빼 오지 못하고, 그가 자해하는 꼴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에드문트는, 제가 스스로를 벌주고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10년 후의 과거에서나, 10년 전의 현실에서나. 석실은 어느 한 곳 변함이 없었다.
짙은 석벽 사이사이에 박힌 대리석 조각상들이 중앙을, 에드문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그 영속성이 에드문트의 기억에 불을 지펴 왔다. 쉴 새 없이 타올라 그를 재 가루로 만들어 내고는 남은 흔적까지 집어삼키려 다시 불을 지폈다.
끔찍한 고통은, 끝없이 반복되었다.
‘엘리아.’
석실에 있던, 살아 있는 엘리아를 흉내 내던 시신이 어땠던가. 몇 번이나 떠올려 고통 속에 빠져 놓고도 에드문트는 또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눈앞에 다시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손을 뻗으면 당장이라도 온기를 빼앗긴 시체가 닿을 것처럼, 생생하였다.
‘왜 너를 이곳에 두었던 걸까. 따듯하게 품어 주지도 못하고, 이렇게나 추운 곳에 방치했던 걸까.’
그때는 생각지 못했다. 그저 죽은 여자를 앞에 두고 붙잡지 않은 걸, 손에서 놓쳤던 순간을 후회하기만 했다.
어리석게도. 이기적이게도.
여자의 죽음의 순간을 짚어 볼 생각은 하질 못했다.
그는 끝까지 잔인하였으니. 여자의 죽음마저 제멋대로 삼켜 버리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 치부했더랬다.
하여 오직 제 생각만 했다. 사랑을 줄 수 없음에 괴로워했을 뿐이었다.
‘얼마나 괴로웠을지, 두려웠을지. 왜 생각해 보질 못했을까.’
괴물이라서?
그가 모든 걸 집어삼키기만 하는 괴물이었기에 사랑하는 이의 죽음마저 그렇게 심상하게 흘려보냈던가.
‘괴물이었구나. 너는 불길이라고 했지만, 엘리아. 나는 괴물이었어.’
팔이 찢겨 나갔을 때, 두 다리가 짓이겨졌을 때, 너는 살아 있었을까. 하여 너를 죽이고야 말았을 모든 고통을 홀로 감내해야 했을까.
비명을, 질렀을까.
<아파, 에디. 에드문트…….>
들어 본 적 없는 여자의 비명이 에드문트를 쥐어뜯었다. 환상이 고통이 되어 온몸을 앓게 했다.
‘몸을 파고들 수많은 고통을 자각하기도 전에 눈을 감았어야 할 텐데.’
뒤늦은 기도가 유효할 리 없었으니, 죄책감으로 돌아와 더 끔찍한 상상을 되풀이하게 했다. 아마도 현실이었을 엘리아의 고통을 스스로 느끼도록 했다.
살을 찢을 때의 고통이 어땠더라. 독을 삼켰을 때 몸이 굳어지던 감각이 어땠더라.
제가 느껴 본 모든 고통을 한꺼번에 불러 스스로를 죽이고, 또 죽였다. 그래도 성에 찰 리가 없었다. 여자가 느꼈을 아픔의 그림자조차 되지 못하였다.
‘내가 겨우 검을 찔러 스스로를 상처 낸 것 따위로, 그따위 고통으로 너를 돌려받을 생각을 했다니. 너를 극악한 고통 속으로 밀어 놓고는, 도망쳤다니.’
벌이었는데. 너를 죽게 한 나에게 내려진 징벌이었는데.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으면 죽을 때까지 고통을 껴안고 있어야 했는데.
‘너를, 이렇게나 추운 곳에 버려두고 나를 죽이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텅 빈 석실을 바라보며 에드문트는 스스로의 죄를 고백했다.
결코 씻기지 않을 죄를. 들어 줄 리 없는 사람을 향해.
* * *
꼬박 한나절이 지나고 나서야 한스가 지하 석실을 찾아왔다.
“찾았습니다.”
“……살아 있나.”
“예, 명하신 대로. 사지 멀쩡하게.”
그동안 석실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라스페 공작의 꼴은, 시체나 다름없었다. 퍼렇게 죽은 입술, 꺼멓게 죽은 눈동자, 하도 쥐어뜯어 피 칠갑이 된 손등.
말라붙은 피. 죽음.
황후의 마차를 끌던 마부를 눈으로 확인했던 순간부터 죽어 버린 것 같더니.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죽은 듯한 꼴이었다.
‘대체 왜 저러시는 거냐고.’
당장이라도 마부를 붙잡아 죽이겠다며 밖으로 나가려던 공작을 네 명의 기사가 간신히 뜯어말렸다. 사지에 한 명씩 매달렸음에도 도저히 막아설 길이 없어서, 아래층에 있던 벨젠 경까지 합세한 뒤에야 라스페 공작을 붙들 수 있었다.
한스가 보기에는 공작가의 주인을 진정시키는 게 아니라, 숫제 제어 불가능해 날뛰는 맹수를 제압하는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바닥에 처박힌 꼴이 되어서도 공작은 계속 발버둥 쳤다. 그 비참한 꼴을 보다 못한 한스가 악다구니를 썼다.
<아, 젠장! 가십시오! 가서 당장 죽여 버리고 오시든지요! 한데 마차는 이미 한참 전에 떠났단 말입니다! 그걸 쫓아가시겠다고요? 쫓아가서, 죽이면! 제길, 목격자가 한두 놈들이 아닐 텐데! 세상천지 인간들이 전부 공작께서 대낮에 웬 마부 하나 죽인 걸 다 목격하고 떠들어 댈 거고! 그럼 엘리아 아가씨도 아시게 되겠지요!>
에드문트를 저지하려다 바닥을 나뒹굴었던 한스의 목소리는, 절반도 채 명확지 않았다. 에드문트의 귀에 닿은 단어는 고작 하나뿐이었다.
엘리아, 그 죽어서라도 갖고 싶었던 이름 하나뿐.
<엘리아 아가씨를, 그깟 연극에 나온 죽음에 앓아누우신 분을 숨넘어가게 만들고 싶으신 거라면, 그런 거라면! 가서 죽여 버리십쇼! 마음대로 하십쇼!>
무심코 엘리아를 들먹인 건, 다행히 효과가 좋았다. 너무 효과가 좋아서 끔찍할 정도였다.
잡히는 대로 쥐어뜯고, 심지어 짐승처럼 뜯어 물기까지 하던 공작이 순식간에 멈추더라. 마치 도살된 짐승처럼.
그제야 한스가 깨달았다.
‘미쳐 버렸구나.’
제 주인이 미쳐 버리고야 말았음을.
과연 엘리아 아가씨가 저 남자를 사랑해 낼 수 있을까? 사랑이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그래 봤자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망가진 인간까지 되살릴 수 있을까.
‘사랑이 사람을 죽인다는 건 들어 보았지만. 견디게 해 준다는 건 들어 보았지만. 살리는 게 가능할까. 아무리 사랑이라도 망가진 건, 고칠 수 없을 텐데.’
한스는 그때의 에드문트를 떠올렸고, 석실에서 다시 만난 에드문트를 바라보았다.
이미 끝까지 망가져 버려, 겨우 사랑 따위로는 도무지 살려 낼 수가 없을 것 같더라.
* * *
“에드문트 님,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실핏줄이 터진 눈이 천천히 한스를 향해 왔다. 움직임은 마치 굳은 석상을 억지로 밀어 보이듯 기괴하였다.
지하 석실은 한겨울 들판만큼이나 추웠으니, 온종일 이곳에 처박혀 있었던 에드문트의 몸이 굳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옷이라도 벗어 덮어 드려야…… 아, 제길. 내가 왜?’
도통 마음이 일지 않았다. 제멋대로 죽어 버린 공작에게 화가 나서. 연민이 들다 못해, 안쓰러운 꼴에 너무 화가 치밀어서 동정 한 푼 건네고 싶지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멱살을 쥐고 정신을 차리라며 욕을 퍼부은 뒤 로앙가에 던져 주고 싶었다.
그럼 더욱 망가져서, 아주 죽어 버리지 않을까?
“평범한 마부가 아니었습니다. 황후가 탄 마차를 끌던 절름발이 남자, 알고 보니 튀링겐 영지와 접해 있는 남작가의 막내더군요.”
“……페소 남작가, 올리버 페소. 올리버…….”
에드문트는 굳은 손으로 한스가 휘갈겨 쓴 보고서를 넘겨 남자의 이름을 찾았다.
동시에 제 이전 생의 기억을 뒤져 공작가에서 일했던 마부의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올리버. 성은 없고, 죽기 1년 전에…….”
“예? 방금 말씀드렸듯이 페소 남작가의 사람인데요.”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이야기해.”
“아, 예…… 그. 튀링겐 자작가와는 오래전부터 주종 관계에 놓여 있던 가문이라 황후와 친분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친분 정도가 아니었지요. 본래는 가문 간에 결혼까지 염두에 둔 모양이었습니다. 여자가 우연히 만난 2황자와 결혼하여,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면 말이지요.”
“혼약이 깨지고도, 남자가 계속 황후와 관계를 유지해 온 건가?”
“그랬다면 황제가 가만두질 않았겠지요. 다만, 친우라는 이름으로 몇 번 황성에 초대받긴 했더군요. 황후 쪽에서는 사심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나 확실하진 않고, 올리버 페소 쪽에서 사심이 있었느냐? 그건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일방적으로 관계가 끊어졌다고, 남자의 사랑이 멈추었을 리는 없다. 눈 녹듯 사라졌을 리가.
도리어 지독한 후회와 갈망만 남기고 썩어 들어갔겠지.
그러면서도 ‘어릴 적 친우’라는 이유로 환영해 주는 황후에게, 뻔뻔하게 얼굴을 내밀었으리라. 속으로는 삿된 마음을 품은 채로.
“튀링겐 자작가가 황제의 인척 가문으로 부상하며, 별 볼 일 없던 페소 남작가도 꽤 덕을 본 듯합니다.”
한스는 에드문트에게 책을 읽어 주듯 보고서에 적었던 내용을 그대로 읊었다.
“본래는 학술원도 겨우 졸업할 형편이었는데, 튀링겐가의 원조를 받고 사업을 크게 벌였더군요. 기본기가 있었는지 꽤 잘 되고 있습니다. 평판은…… 머리가 비상하고, 반반하게 생긴지라 혼담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부 거절했지만요.”
에드문트는 한스의 설명을 들으며 동시에 종이를 넘겼다. 버려지고도 차마 버릴 수 없었을 남자의 문드러진 사랑이, 그곳에 새겨져 있었다.
<미혼. 사업을 핑계로 1년에 서너 차례 수도를 방문.>
“조카가 수도에 머무르는 중임을 알게 된 황후가, 황궁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던 중……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했겠군.”
“예, 흔적을 못 쫓도록 수를 많이 썼더군요.”
“어느 정도라 보는가.”
“인질로서의 이용 가치를 물으시는 거라면 아마…….”
“아니, 그 남자의 역량. 가령 정체를 숨기고 공작가에 침입해 온다든가.”
한스는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금이라도 빨리 이 음침한 공간을 빠져나가고 싶어 성실히 대답했다.
몇백 년 전 지어졌을 석실은 한기도 한기였지만 사방에 조각된 석상들이 내려다보는 게,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라스페 공작이 서 있는 자리에는 피 웅덩이처럼 보이는 시커먼 자국도 있었다. 그 위에 먼지가 뒤덮인 모습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뭐 이를테면, 어제처럼 마부 행세하며 공작가에 잠입해서 수작을 부리는 식의 역량이 있느냐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보좌관의 확신 어린 말에, 에드문트는 또 한 번 무너져 내렸다.
올리버 페소는 사랑하는 사람이 마주한 절망에, 기어코 복수를 꿈꾸었겠지.
신분을 감추고 공작가의 마부를 자처하여 들어와서는 숨죽여 기다렸으리라.
복수를 위해. 비 오는 날, 마차에 죽음을 싣고 달리기 위해.
“황성에서 황후를 몰래 빼돌려 나와서 닐스 튀링겐에게 데려다준 경로를 되짚어 보니 보통이 아니더군요. 애초에, 닐스 튀링겐을 발견해 황후에게 알린 것도 올리버 그자였으니까요.”
“관련 내용은 올리버 페소를 고문해서 알아냈나.”
“하지 않았습니다. 명 받은 대로 멀쩡하게 살려 두어야 했고…… 어차피 입 열지 않으리라 판단했습니다. 자진하지 못하도록 처치한 후 지하 감옥에 데려다 두었습니다.”
“흔적은.”
“저희 쪽 흔적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뒤져 보니 도박 빚이 좀 있더군요. 열 배로 불려 퍼뜨려서, 그쪽 일하는 놈들인 척 위장하여 데려왔습니다. 소문이 나더라도 도박 빚 때문에 쥐도 새도 없이 사라진 놈 취급받을 겁니다. 하지만,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아니, 그대로 묻어.”
“공작님, 어째서 묻으라 하십니까. 기회입니다. 심약해 빠진 황후가, 절대로 멀쩡하게 버틸 리 없습니다. 아시잖습니까.”
“…….”
“엘리아 아가씨 때문입니까?”
적막한 공간에 보고서를 넘기는 소리만 울렸다. 급히 만드느라 한스가 입으로 떠든 것 말고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으므로 에드문트의 손 안에서 휘날리던 보고서는 금방 끝을 드러냈다.
그가 한스에게 보고서를 되돌려 주었다. 하나 답은 없었다.
한스에게 굳이 대답해 줄 필요가 없었기에, 에드문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정말로, 아가씨한테 들킬까 봐 두려워하는 거라고? 본인이 사람 죽여 가며 살아남는 꼴을 알아채고, 혐오하기라도 할까 봐?’
엘리아가 알아챌 가능성이야 있었다. 공작가에 되돌아온 보고서나 평범한 듯한 대화에서 엘리아는 또래답지 않은 통찰력을 보였으니까.
‘세상 돌아가는 꼴 하나도 모르고 사는 순진한 귀족인 줄 알았는데, 뭔가 알고 있으면서 숨기는 느낌이 든단 말이야. 공작님도 눈치채셨겠지. 그래서 망설이는 건가, 답지 않게.’
에드문트는 보고서를 돌려주고도 한참 동안 석실 중앙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한스가 그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가늠해 보려 했으나, 도저히 뜻을 헤아릴 수 없었다.
기껏해야 죽음, 그 하나뿐이었다.
석실을 가득 메운 한기에 손가락이 곱아들고 나서야 석상처럼 굳어 있던 에드문트가 움직였다. 그는 벽에 조각된 석상 중 하나가 치켜들고 있던 장식용 검을 빼 들었다.
그 모습에, 한스는 에드문트가 당장 제게 검을 휘두를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당장 어디든지 검을 쑤셔 박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으니, 누가 겁먹지 않으랴.
“……으읏.”
기겁한 한스는 급히 뒷걸음질 치다가 반대편에 서 있던 조각상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하필 뾰족한 부분에 찔려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다행히 공작은 그의 멍청한 꼴을 등진 채 새 지시를 내렸다.
“남자를 끌고 올 때 이용한 인간들, 마저 처리해. 아무도 남기지 마라.”
“……예, 예에.”
에드문트는 그대로 석실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한스는 몇 명인지, 어떤 얼굴을 한 사람인지도 모를 이들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에드문트가 차라리 반가웠다.
‘근데 공작가에 멀쩡한 검 천지인데 왜 하필 저런 걸, 하필 시체들이랑 같이 방 쓰던 검을 챙겨 가는 거야?’
한스가 들고 있는 작은 등불이 에드문트의 근처에 닿자, 검 손잡이 언저리에 시커먼 녹물 같은 게 보였다. 석실 바닥에 있던 오래된 얼룩과 비슷해 보였다.
정체 모를 흔적에 소름이 끼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왜일까.’
왜 자꾸, 아까 석실에서 본 시커먼 자국이 잊히지를 않는 걸까.
사람의 피일 게 분명한 흔적이 그를 집어삼킬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 * *
핏물이 굳어 남은 빈 석실에는 다시 시린 한기만 남고 말았다.
기괴한 소리가 울리며 철문이 닫혔다.
다시 죽음을 기다리느라 침묵하였다.
* * *
저택 별관에 마련해 둔 지하 감옥에, 사지가 결박된 남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에드문트는 그가 갇힌 감옥에 들어선 뒤, 수하들을 모두 나가게 했다.
“공작님, 계단 근처에서라도 대기하겠습니다.”
다들 에드문트의 명령에 평생 불복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순순히 지하 감옥에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에드문트가 마부를 발견하고는 마치 착란에 빠진 사람처럼 날뛰었던 게 고작 하루 전이었으니까.
“결박을 해 두었지만,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저 하나라도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벨젠 경마저 에드문트를 혼자 내버려 두려 하지 않았다. 하나 에드문트의 서슬 퍼런 눈빛에 모두 두려움만 안고 지하 감옥을 나서야 했다.
‘제기랄…….’
한스도, 다른 기사들도. 모두 다르지 않은 감정을 끌어안은 채 계단을 올랐다.
남자가 살아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공통의 두려움이, 사람들과 함께 지상으로 떠나갔다.
“…….”
황후의 마부로 위장했던 올리버 페소와 단둘이 남은 에드문트는, 검을 바닥에 내려 두고 찬찬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
사지 중 어느 것 하나 부러지거나 떨어져 나간 곳은 없었으나, 그다지 멀쩡한 꼴도 아니었다.
제법 반반했을 얼굴은 피멍이 가득했고, 자진하지 못하게 한답시고 이를 뽑아 그 속에 솜뭉치를 욱여넣어 두어 턱 주변이 일그러져 있었다.
공포심을 조장할 생각이었는지, 눈마저 두꺼운 천으로 가려져 있던 터라 살짝씩 들썩이는 가슴께만이 남자가 살아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으으.”
새카만 돌바닥을 디뎌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남자가 반응을 보였다. 결박된 팔이 들썩거리더니, 가려진 눈으로 볼 수도 없으면서 소리 나는 방향을 향해 얼굴을 천천히 돌려 왔다.
<오늘부터 공작님과 마님을 모실, 올리버라고 합니다.>
에드문트는 기꺼이 허리를 굽혀 눈을 가린 천을 벗겨 냈다. 공포에 질린 남자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에드문트의 기억대로, 녹색이었다.
“커흑, 흐윽…….”
남자의 입에 물려 있던 천마저 잡아 빼자, 고여 있던 피가 타액에 섞여 쏟아졌다.
에드문트의 발치에까지 지저분한 체액이 흘러왔으나, 피하지 않았다. 그저 남자의 너덜거리는 얼굴을 기억 속 모습과 대조해 보기에 바빴다.
‘10년이라는 세월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황후가 미쳐 버린 꼴에 같이 망가졌던 건지.’
지금의 올리버 페소는 엉망인 꼴을 감안하더라도 에드문트의 기억 속 10년 후 모습보다 훨씬 멀끔해 보였다.
“그래, 너도. 너 역시 나와 마찬가지이구나.”
“무슨,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죽이고 왔어야 했는데. 마차 사고로 죽었다 해도 다시 사지를 갈라 죽여야 했는데. 같은 사고의 희생자랍시고, 너 역시 공작가의 예우를 받았겠지.”
같이 죽은 사용인들의 시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고사로 결론이 났으니, 아마 고의로 낸 마차 사고로 엘리아를 죽음으로 몰았을 10년 후의 올리버 페소는 그저 함께 죽은 불쌍한 마부였을 뿐이리라.
그렇게 죽음과 함께 제 복수를 완성하였으리라.
“그래. 나였어도, 똑같이 했을 거야. 같은 고통을 느끼게 하고 싶었겠지. 내가 황후에게서 소중한 걸 빼앗은 것처럼, 내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고 싶었겠지. 하나 쉽게 찾을 수 없었을 테고.”
남자가 라스페 공작가의 마부로 들어온 건 황후가 미쳐 버린 후, 엘리아가 죽기 1년 전의 일이었다.
복수를 열망했을 남자는 공작가에 무사히 잠입하고도, 실행까지 1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했다.
‘확신할 수 없었겠지. 가장 소중한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를.’
아마, 공작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1년간의 망설임 끝에 남자는 결국 엘리아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왜, 엘리아였을까. 1년을 바라보고 난 뒤에야 에드문트가 여자를 사랑함을 확신한 걸까?
아니면, 도저히 괴물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지 못해서, 그래서 떠나는 여자라도 해쳐야 했던 걸까.
“나를, 나를 대체 어쩔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황후께는 아무런……!”
“죽어야지. 너도 똑같이.”
에드문트는 남자를 쳐다보지 않았다. 올리버는 돌바닥에 처박힌 채로, 감옥 문으로 걸어 나가는 라스페 공작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후에 관해 아는 정보를 토해 놓으라는 협박도, 순순히 인질이 되라는 겁박도 없었다.
누구도 저를 사람 취급하지 않고 그저 숨만 붙여 놓으면 그만인 짐승 취급을 했다.
“나를, 어떻게 할 생각……!”
공작이 바닥에 내팽개쳐 두었던 검에 다가간 순간, 올리버는 차라리 혀를 깨물려고 했다. 불행히도 납치되어 오는 중에 이가 대다수 뽑힌 터라 자진할 수도 없었다.
악에 받쳐 남은 몇 개의 이로 턱을 물었다. 채 빠지지 않은 이가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입 안에서 달랑였다.
남자는 가슴팍에 검이 꽂혀 죽는 제 최후를 상상하며 두려움에 잠식되었다.
하나, 공작은 발치에 둔 검에 곧장 손을 뻗지 않았다. 그저 한참을 내려다보더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가 손에 든 것은…….
“으, 으아……!”
올리버를 공포에 질리게 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더욱 거대하고 끔찍한, 고통을 예감케 했다.
남자가 꺽꺽대는 신음을 뱉으며 발버둥 쳤다. 에드문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피를 토하는 남자의 비명도, 살려 달라는 애원조차.
에드문트는 오직 하나만 생각했다. 엘리아. 그의 아내. 마차 사고로 죽은 줄 알았으나, 실은 복수의 제물이 되었던 여자를.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이내 비명과 함께 첫 번째 피가 튀었고, 동시에 눈물이 흘렀다.
라스페 공작의 새파란 눈동자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렀다.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고통에 바르작거리는 남자를 두고 에드문트는 신중하게 남은 곳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한데, 이상했다.
죽어야 하는데.
“악, 아악……!”
남자가 죽지를 않았다.
“아, 아아…… 사, 살려……!”
계속 비명만 지르는 탓에, 에드문트도 눈물을 멈추질 못했다. 에드문트의 팔이 완전히 멈추었는데, 올리버 페소가 죽지를 않았다.
대체 왜. 분명 제 몸에 검을 찔러 넣었을 때 자신은 등 뒤에 누운 여자를 바라볼 새도 없이 죽어 버렸거늘. 검을 내리찍는 단순한 행위에도 절명하고 말았거늘.
숨이 끊어져 돌아왔던 여자처럼 만들어 놓았는데, 남자는 도통 죽지를 않았다. 고통에 겨운 신음이 사라지지를 않았다.
“…….”
에드문트는 기다려야 했다.
아주 오랫동안.
죽어 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 * *
마침내 숨이 끊어졌을 때, 눈물도 멈추었다.
얼굴에 남은 흔적을 닦을 생각도 않고 에드문트는 뒤돌아 걸었다. 핏물 가득한 돌바닥을 걸을 때마다 딱딱한 발소리 대신 철벅거리는 소음이 울렸다.
검붉은 소리를 길게 매단 채, 죽은 남자로부터 멀어졌다.
그러나 죽음은 도통 그에게서 떨어져 나갈 줄을 모르더라. 문득 시선을 내리니…….
‘장갑이…….’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벗어 놓지를 못하는 장갑에 붉은 피가 맺혀 있었다. 너무도 붉어, 이전의 새하얀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더라.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죽음을 함께 벗겨 보려고. 그러나 장갑 아래의 손 역시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새파란 사슴과는 달리, 주홍빛 꽃을 아무리 둘러도 전부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붉은 죽음은, 그토록 끔찍하기만 했다.
에드문트는 핏물 젖은 손에 얼굴을 묻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스스로가 너무 끔찍하여, 혐오스러워서.
‘내가…… 너를…….’
이름을 부르기가 면구하여 속으로 삭였다. 거리낌 없이, 죄를 모르는 무지한 시절의 기억을 멀찍이서 바라보았다.
이름을 부를 수 있던 순간을 곱씹기만 했다. 상상 속에서조차 황홀하던 순간을.
엘리아, 하고 이름이 불리었을 때 대답처럼 향해 오던 눈동자를 떠올렸다. 곧장 심장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그에게 찾아왔다.
하나 그리웠다. 그리웠다.
네가 너무도 그리워. 나를 불러 주었던 네가, 바라봐 주던 눈빛이. 서글프던 미소가. 또 품에 안겨 울면서도 나를 밀어내지 않던 너의 체온이.
나를 허락하던, 스물. 스물하나…… 8년의 시간 동안 나를 견뎌 주었던 네가.
죽어 버려도, 죽여 버려도 돌아오지 않을 엘리아, 네가 그리워.
너를 돌려받은 줄만 알았어.
그러나 실은 너는 내내 죽어 있었던 거야.
다시 눈을 떴을 때, 열여덟의 너를 만나 환희에 젖었을 때, 다시 사랑에 빠지고야 말았을 때.
너는 여전히 죽어 있었던 거야.
내가 너를 또 외면하고, 도망쳤을 뿐. 스물여덟의 당신은 죽었고, 결코 돌려받을 수 없었음을.
하여 엘리아. 나는 열여덟의 아름다운 소녀에게 보고 싶다는 따듯한 애정을 받아도, 여전히 네가 그립기만 하여 죽을 것 같아.
나의 사랑. 다시 죽으면 너를 만날 수 있을까. 겨우 얻은 사랑을, 나를 감싸 오던 열여덟의 소녀를 포기하면 스물여덟의 너를 돌려받을 수 있을까.
엘리아. 나를 원망하던, 기어코 떠나 버렸던 너를.
사랑했어. 정말로…….
“……사랑했는데.”
바닥에 내려 두었던 검을 집어 올렸다. 핏물이 굳어 있는 검을 억지로 검집에서 빼내었다.
분명 그의 피였다. 엘리아의 시신 앞에서 제 몸에 꽂아 넣었던, 바로 그때의 검이었으며…… 그때의 에드문트가 흘린 피였다.
이 핏자국 하나로 버텼다. 꿈이 아닐까 의심할 때마다 에드문트는 석실로 내려가 엘리아가 누워 있던 자리가 비어 있음을 확인했고, 바닥에 남은 그의 피 그리고 검집에 묻어 있던 흔적을 보고 위안을 받아 왔다.
그때처럼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본능은 그로 하여금 가장 안전한 곳을 향하게 했다. 심장. 박아 넣으면 순식간에 안식을 얻게 될 곳을.
에드문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아래로 내렸다. 어디든 좋았다. 얼마든지 아파도 괜찮았으니.
제발 돌려줘. 돌려받고 싶어. 네가 그리워. 너무나도…….
* * *
그러나 검은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울렸을 뿐, 남자의 몸에 박혀 피를 받아 내지 않았다.
대신 눈물 흘리게 했다.
죄악감에 짓눌려, 살을 에는 울음을 터뜨리게 했다.
“엘리아…….”
정말로, 사랑했는데.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데.
사랑하고 있어서. 너를 사랑하기에 나는 포기할 수가 없어. 겨우 얻은 사랑을, 이 따스함을.
포기할 수가 없어.
나를 용서해 줘. 어린 네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나를, 죽은 너를 버리고 도망쳐 왔으면서 또 다른 너에게 다가가 이름을 부르고야 만 나를 용서해 줘.
망가졌으면서. 이미 너를 잃고 무너졌음에도 멀쩡한 척을 하며 어린 네게 사랑을 갈구하는 나를, 용서해 줘.
어차피 이 모든 게 거짓임을 알아.
나는 영원히 떠나 버린 네게 사랑받을 수 없을 테니. 너를 증오케 한 내가, 스물둘의 에드문트 라스페의 자리를 빼앗아 차지하여선 평범한 사람을, 타인의 사랑을 흉내 내 애정을 구걸한들 진짜가 될 수 없음을 알아.
네 사랑마저 거짓으로 점철하여 모욕하고 있음을 알아.
열여덟의 엘리아 로앙은 자신이 스물둘의 에드문트 라스페를 사랑한다고 착각할 테지만. 사실이 아님을. 나는, 그저 사랑받으려고 남을 흉내 내는 시체일 뿐이니까.
흉내를 낼 뿐이야. 다정하지 않으면서 다정한 척을 하고, 사람이 아니면서 사람인 척을 하였어. 네가 나를 사랑해 주었으면 해서.
네 여린 살을 탐하고 싶어질 때면 선물을 보냈어.
이를 박아 넣고 싶을 때는 이름을 불렀어. 엘리, 어린 너는 모르겠지.
거짓인 줄 모르고 나를 사랑하겠지. 값비싼 사랑을 아까운 줄도 모르고 조금씩 떼어 내게 밀어 주겠지.
그래도 나는 절대로, 드러내지 않을 거야. 평생 다른 사람을 흉내 내며……. 네 사랑조차 모조리 거짓으로 만들지언정.
사랑을 받아 보고 싶어서. 너무도 탐이 나는 바람에.
평생, 구원받지 못하더라도 괜찮아.
사랑해 줘 제발. 거짓이라도.
죽음보다도 지독한 이 고통, 어떻게든 버틸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