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반복
이른 아침, 황궁 별관에서 열린 귀족원 회의에 참석한 이들이 제각기 모여 재잘거리느라 입이 바빴다.
소리가 품은 이야기들은 제각각이었다.
“지난주에 결혼 발표를 했던 자작은 요즘 어떻게 되었다나?”
“그 새파란 나이의 남작이 가지고 있던 상단 말일세, 지난해까지 멀쩡하더니 결국 넘어간다지?”
“오늘이 마지막 공연이라 그새 푯값이 세 배는 뛰었다던데. 하여간 내 아들놈은 기어코 한 장 구했다지 뭔가.”
그러나 별관을 가득 채운 소문은 결국 하나로 귀결되었다.
모 자작의 결혼 상대가 실은 라스페 공작가 가신 중 한 명인지라, 자작이 3황자파인 부모와 절연하고 말았다더라.
남작가에서 대대로 일구어 오던 상단이 조만간 라스페 공작가에 넘어갈 거라더라.
어젯밤, 라스페 공작이 제 약혼자와 함께 연극을 관람했다더라.
입은 각자의 소문을 떠들었으나, 결국 수십의 눈은 한곳으로 향해 왔다.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는 에드문트 라스페에게로.
“어째 평소보다 시선이 더 따갑네요. 흠흠.”
오늘따라 유독 집요해진 사람들의 시선을 두고 한스가 중얼거렸다. 옆에서 눈치도 없이 빤히 공작을 관찰하던 이들이, 한스가 사람들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지껄인 말에 시선을 피했다.
사람 같지도 않게 굴던 공작이 약혼자를 대동하고 극장까지 찾았다니, 귀가 번쩍 뜨일 만큼 흥미로운 소문이긴 하다만.
‘채신머리없게! 당사자를 앞에 두고 쑥덕거리거나 관찰하는 건 좀 심하다고 생각 안 하나? 하여간 알고 보면 귀족들이 훨씬 더 추잡하다니까.’
회의 시작을 앞두고 에드문트가 방 안을 쭉 둘러보았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빼곡히 자리를 차지한 가운데, 유독 빈자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로앙 백작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였다.
한스도 에드문트와 마찬가지로 로앙 백의 자리가 빈 것을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로앙 백작께서 어제 많이 피곤하셨나 봅니다.”
물론, 눈물을 하도 쏟아 붉어져 있던 그의 눈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아마 심하게 부었을 테니 하루가 지났어도 좀체 가라앉지를 않았을 게 뻔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안 오시지 않을까요? 저 같아도 궐석하고 말겠습니다.”
한스의 장담과는 달리, 로앙 백작은 회의 중반에 조용히 들어와 착석했다. 외젠의 눈은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조금 피곤해 보인다고만 할 정도로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시선을 느낀 건지, 외젠이 에드문트를 향해 민망한 듯 웃더니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그럼, 마조비아국 외교 사절 파견 건에 대해서는…….”
엘리아와 꼭 닮은 그의 다갈색 눈을 바라보며, 에드문트는 상념에 젖었다.
여타 귀족들은 모두 제국 역사상 첫 조약 체결을 앞둔 마조비아국에 뛰어들 생각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으나, 에드문트는 관심을 끈 지 오래였다.
어차피 마조비아국으로 떠나는 외교 사절단들은 풍랑을 만나 죽어 버릴 테고, 그 이후 세 번의 사절단 파견도 모두 실패할 걸 알고 있었기에.
<책이든 연극이든 결말을 알면 재미있을 부분도 전부 지루해질 거래. 인생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고 사는 거랑 다를 바 없다면서. 듣고 보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끝을 아는 생에 관해 이야기하던, 엘리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엘리아의 말대로 지루했다. 에드문트의 생이, 엘리아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지루하기만 했다.
에드문트는 이전의 삶을 반추해 보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복수와 엘리아, 그 두 가지에만 매몰된 채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한번 핀 꽃이, 시들지언정 다시 피기 전 꽃망울로 돌아갈 수 없듯.
‘지루하군.’
한 번 깨어난 마음도, 감정도. 다시 돌아갈 길 없음이라.
깨닫지 못했던 고독을, 지루함을. 그리고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만 하리라.
* * *
“공작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 말입니다. 따로 자리를 옮기지 않으시겠습니까?”
두 시간 남짓 이어진 회의가 끝나자마자 외젠이 에드문트를 찾아왔다. 가까이서 보니 단순히 눈에 남은 붓기 때문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근처 응접실을 비우게 하겠습니다.”
한스가 두 사람을 회의장에서 가장 가까운 응접실로 안내해 주었다.
자리를 옮기는 동안 외젠은 평소와 달리 에드문트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았다. 전에 같았으면 시답잖은 안부 인사라도 건넸을 텐데.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어 보이는데…….’
한스가 복도로 물러가고, 이내 에드문트와 외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았다. 수심 깊은 얼굴이 두 사람 사이에 자리한 탁자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실은 엘리 때문에 말입니다.”
그가 주저하느라 달싹일 때마다, 탁자에 매달린 그림자가 함께 흔들거렸다.
“오늘 만나 뵙기로 약속을 하였다고 들었는데, 어렵게 되었습니다. 실은 엘리가, 열이 높아서 누워 있어서요.”
“……엘리가?”
“예, 뭐 심한 건 아니고. 어제 자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새벽에 갑자기 열이 오르는 바람에요. 저도 나오기 전까지 살피다 오느라 늦었습니다.”
에드문트에게서 뻗어 난 그림자는, 어두운 물감으로 칠한 흔적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입술 역시, 채색해 끼워 둔 가짜 문처럼 열릴 줄을 몰랐다.
괜찮으냐, 어디가 아파서 열이 났느냐, 의원에게는 보였느냐…….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여러 방면으로 캐물어 왔을 텐데. 그는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눈동자조차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 마치 굳어 버린 시체 같았다.
“공작님, 라스페 공작님…… 에드문트 님?”
외젠이 놀라 몇 번이나 공작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에드문트가 반응을 보여 왔다. 동공이 살짝 떨리고, 이내 외젠을 향해 입술이 열렸다.
“……그래. 알겠네. 약속은 다음으로, 미루지.”
가까스로 대꾸하긴 했으나, 에드문트는 아직 이성이 돌아오지 않아 혼란한 상태였다.
열이 높다는 말, 저택에 도착한 뒤에 아프기 시작했다는 말. 로앙 백작이 집에서 나오기 전까지도 낫지를 않았음을 짐작게 하는 말들을 겨우 하나씩 되삼켰다.
뒤늦게 손이 떨렸다. 늘 무심하던 낯빛에 공포가 스멀스멀 다가와 그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그야, 에드문트로선 제가 아끼는 사람이 아프다는 소리를 들은 게 생전 처음이었으니까.
죽어 버렸다는 말이라면 모를까. 그래서 에드문트는 제게 가장 익숙한, 죽음을 떠올렸다.
<주인님, 주인님…… 지금, 마, 마차가, 엘리아 님께서 타고 가셨던…….>
희게 질린 누군가의 목소리. 그때의 울림이 고스란히 돌아와 외젠의 말소리와 겹쳐 들렸다. 엘리아가…… 주인마님이…….
“공작님, 혹시 뒤에 일정이 없으시다면 저택에 들러 주실 수 있으신지요.”
“…….”
“옮는 병은 확실히 아니고, 종종 갑자기 열이 오르다가 며칠 앓고 마니까요. 오셔서 얼굴 보여 주시면 엘리가 기뻐할 겁니다.”
에드문트는 외젠의 얼굴에서 낯익은 흔적을 찾아보려 했다. 그저 공작인 제게 비위를 맞추고 싶어 늘여 놓는 거짓말의 증거를.
그러나, 그가 찾고자 하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제 잠들기 전까지 데이지, 아니 어제 동행했던 사용인에게 화요일에 공작님과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서 기대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해서 염치없지만, 잠시만 들러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렇게 하지.”
어렵게 꺼낸 대답에, 외젠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다.’라는 뜻 모를 말을 전해 왔다.
그의 웃음을 보고 속이 울렁거렸다. 구역질이 나는 건지, 두려움이 북받쳐 이러는 건지.
에드문트는 아무것도 몰라서, 막연히 고통을 삼키기만 해야 했다.
‘감사하다니. 대체 뭐가 고맙다는 건지.’
응접실에는 그가 원망해야 할 사람뿐인데.
“엘리가 무척 기뻐할 겁니다.”
단 하나 남아 있던 혈육마저 집어삼키고 말았던 남자에게, 대체 무엇이 고맙다는 건지.
* * *
두 대의 마차가 로앙가 저택 앞에 멈추어 섰다. 로앙 백작이 먼저 내려, 그를 맞아 주러 온 집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스페 공작님이 오셨습니까?”
“응, 말씀드렸더니 바로 승낙하시더군. 데이지는?”
“아까 1층에 잠시 내려온 걸 봤는데…… 아, 저기 오는군요.”
내내 4층 침실을 지키고 있다가 잠시 내려왔던 데이지가 외젠이 도착한 걸 보고 밖으로 나왔다.
굳이 나오지 말라고 손짓으로 만류했는데, 데이지는 빨리 오라는 걸로 잘못 알아듣고 도도도 뛰어왔다.
“굳이 안 나와도 된다는 말이었는데. 엘리는 좀 어때?”
“어휴. 외젠 님 나가신 뒤에 겨우 잠드셨어요. 이번에는 약도 잘 안 들어서요. 그래도 한잠 주무시고 나면 괜찮아지실 테니…….”
“약이 안 든다고.”
공작이 함께 왔다는 소식을 미처 듣지 못한 데이지가 외젠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질겁해서 꺅, 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외젠이 급히 나서 휘청거리는 데이지를 붙잡아 주었다.
“데이지, 괜찮아? 미안. 내가 공작께서 오셨다는 말부터 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공작님. 데이지가 어제부터 내내 엘리아 곁을 지키느라 경황이 없었을 겁니다.”
뒤늦게 목소리의 주인이 라스페 공작임을 확인한 데이지가 급히 외젠의 품을 빠져나와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당황하여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약이 안 들었다고 한 말은 열 내리는 약이 효과가 좀 늦게 나타났다는 뜻이었습니다. 원래 아가씨 몸 상태에 따라 빨리 듣기도 하고 시간이 좀 걸리기도 합니다.”
“……알겠다. 자고 있다고 하니, 나는 가 보지.”
“예? 저, 저 공작님!”
고개를 숙이고 있던 데이지가 또 놀란 소리를 내며 공작을 불러 세웠다.
‘아니, 기껏 오셔선 얼굴도 안 보고 가신다니?’
여태 말 한 마디 붙여 본 적 없으니 공작 대하는 게 어려울 법도 한데, 데이지는 엘리아 생각만으로도 벅찬 나머지 예의이니 공작이니 하는 건 잠시 안중에 없었다.
“잠시 얼굴이라도 보고 가심이……. 아가씨께서 열도 내렸으니 일어나실지도 모르고요.”
“그러시지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두 사람의 성화에 결국 에드문트는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켜보고 있던 한스는 제가 끼어들 틈을 재고 있다가 또 김이 새 버려서는 터덜터덜 공작을 따라 걸었다.
‘어째, 엘리아 아가씨가 야무지게 구는 데다가, 로앙 백작에 젊은 유모까지 끼어드는 탓에 내가 낄 곳이 점점 줄어드는 기분인걸.’
그의 마음도 모르고, 외젠과 데이지는 기뻐하며 에드문트를 4층으로 이끌었다.
엘리아가 아픈 탓인지 늘 활기가 돌던 저택은 잠든 듯 몹시 차분했다.
‘백작가가 아니라, 라스페가 저택으로 돌아온 기분이 드는걸.’
지난번 먼저 웃으며 말을 걸어오던 사용인들도 에드문트와 한스를 보고 조용히 묵례할 뿐이었다.
어린 아가씨 하나가 이렇게까지 온 집안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다니.
<고마워요, 한스 경. 선물 공연 표로 골라 준 거, 한스 경일 테죠?>
그러나 한스는 아가씨에게 들었던 감사 인사를 떠올리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아파하시면 같이 슬퍼하고, 행복하시면 같이 기뻐하고. 그럴 가치가 있는 분이지.’
여기 로앙가에서 아가씨와 어울려 지내던 사람들은 모두 엘리아의 상냥함을 한 번씩 겪어 보았을 테니까.
한스는 이번만큼은 진지하게 임해 기도했다. 공작님을 위해서가 아닌, 오직 어린 아가씨가 아프지 않기를 바라며.
* * *
4층에 다다른 에드문트가 외젠과 데이지의 안내를 받아 복도를 죽 거닐었다.
무작정 찾아와 엘리아를 만났던 응접실을 지나쳐, 엉성한 붓질로 그려 낸 그림이 가득한 복도 풍경이 생경했다.
겨우 세 번째. 그마저도 전에는 관심 한번 주질 않아서 기억에 남지도 않은 풍경이었다.
‘만일 약속을 잡고 왔다면 과거의 여느 때처럼 복도에 내걸어 둔 그림을 하나하나 짚으며 무얼 그린 건지, 그리면서 어디가 제일 어려웠는지를 알려 주었을까.’
그때의 기억을 곱씹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라스페 공작 부인이었던 엘리아를 떠올리는 대신, 에드문트는 어제의 기억을 되새겼다.
<에디, 에드문트. 네가 보고 싶을 거야. 내일도. 그다음 날에도…….>
보고 싶을 거라는 말들. 그를 위해 흘리던 눈물.
속이 갑갑했다.
언제부터였더라. 엘리아를 떠올릴 때,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던 게.
언제부터였더라.
“아가씨, 라스페 공작님께서 오셨어요.”
먼저 침실에 들어선 데이지의 목소리가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문 앞에 멈추어 선 에드문트의 시야에, 옅은 녹빛의 융단과 흰 천을 여러 겹 두른 침대가 보였다.
들어오셔도 괜찮다는 말소리가 에드문트를 안으로 이끌었다.
침대맡에 서 있던 데이지가 비켜서자, 엘리아가 보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힘겹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문트는 그대로 자리에서 멈추어 버리고 말았다.
‘석실이…….’
어째서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드는 건지. 왜, 헤어 나올 수 없는 건지.
잠시 물러서 있던 외젠과 데이지에게는 핏기가 빠진 듯 창백해진 에드문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에 잠식되어 흔들리는 동공 역시.
오로지 그 혼자서 스스로의 공포를 느끼고, 감당해야 했다. 그는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오른손으로 팔을 짚었다.
그리고, 쥐어뜯으려는 순간.
“……디. 에디……?”
목소리가, 그를 구원했다.
“엘리아.”
“으응…… 왔네…… 나…… 인…….”
에드문트가 융단을 짓쳐 걸어 엘리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열이 아직 남아 파리한 눈가. 하룻밤 새 푹 꺼진 듯 보이는 얼굴. 붉은 기가 감도는 뺨. 버석한 입술.
아픔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이었으나 에드문트는 안도하고 말았다.
석실에서 보았던, 깨끗하게 정돈된 스물여덟의 얼굴이 아니었음에. 깊이 안도하고 말았다.
“……안해 ……에디.”
띄엄띄엄 들리는 엘리아의 목소리를 위해, 에드문트는 기꺼이 침대맡에 무릎을 꿇었다. 올려다보기가 버거웠던 엘리아가 가까워진 에드문트의 얼굴이 기뻐 미소 지었다.
“에디, 미안해.”
미안하다는 뜻 모를 말에, 심장이 철렁였다. 무심하게 넘기지를 못하고 묻고 말았다. 대체 왜.
“왜,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네가.”
죄를 지은 건 나인데. 너를 아프게 한 것도, 죽음으로 달아나게 한 것도. 사랑을 집어삼키고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았던 것도.
‘전부 나였는데…….’
에드문트는 열여덟의 엘리아에게, 스물여덟의 엘리아를 향해 하지 못했던 말까지 담아 물었다.
“우리 약속했는데……. 나 때문에. 못 가서. 나도 많이 기다렸는데…….”
열여덟의 엘리아가 대답했다. 스물둘의 남자에게. 에드문트 라스페에게.
당신을 기다리는 날이 있었노라고. 에드문트가 부재하던 시간이 아쉬워 기억에서나마 끌어온 남자와 시간을 보낸 적 있었노라고.
“다시 기다릴게. 언제까지나 기다릴게.”
겨우 약속 깨서 미안하다는 말이었는데, 진지한 투의 답이 돌아오자 엘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금방…… 아마 내일이면. 나아. 그러니까…… 응?”
“그래.”
“걱정하지 말고…… 지금 에디, 표정…… 안 좋아 보여. 그러지 마. 나…….”
약 기운이 남아 잠이 오는지 엘리아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더니, 다시 눈을 뜨고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에드문트를 위하여.
“웃는 게 좋은데. 응……?”
또, 또다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희미한 너의 얼굴이 보이는 미소에 압도되어서는.
“네가 원하면 얼마든지 웃을게. 그러니까 엘리, 아프지 말아 줘.”
“응…… 아픈 거 이제…… 아니고. 졸려서. 졸려…….”
“잠들 때까지, 여기 있을게.”
“왜, 나…… 보고 싶어서……? 나 얼굴…….”
“예뻐.”
“나보다…….”
네가 훨씬 예쁜데. 그렇게 웃으니까. 에디 네가, 훨씬 예쁜데.
잠에 취한 엘리아가 생각한 말을 웅얼거리다가 눈을 감았다. 이내 곤히 잠든 숨소리가 들려왔다.
기억 속 그대로였다. 제 곁에 누워 한참 웅얼거리다가 잠들었던, 그때처럼.
“잘 자, 엘리.”
그때는 한 번도 전하지 못한 인사를 몇 번이고 건네었다. 잠이 든 모습을 바라보며, 여태 전한 적 없었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서.
좋은 꿈 꾸기를.
아프지 않기를.
* * *
엘리가 잠든 모습을 지켜보던 에드문트는 한참 뒤에야 무릎을 꿇고 있던 다리를 펴고 일어났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데이지가 살그머니 다가와, 엘리아가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 올려 주었다. 그러곤 소리 대신 눈짓으로 침대 옆 협탁을 가리켰다.
쓰다 만 편지지 몇 장이 놓여 있었다.
“아가씨께서 공작님께 쓰던 중에 잠드셨어요.”
에드문트는 편지지를 들지 않고 협탁에 놓인 채로 적힌 글을 읽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탓에 삐쭉빼쭉해진 글씨로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에드문트에게.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바보같이 어제 연극 본다고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오늘 조금 아파서 누워 있어. 연극 이야기도 하고, 함께 가고 싶은 곳도 있었는데 정말 아쉽다. 며칠 뒤면 금방 나을 거야. 다음 주 화요일에는 꼭 만나자. 엘리아가.
추신. 혹시 바쁘지 않으면. 그리고 네가 괜찮으면…….>
채 끝맺지 못한 편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데이지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가져가셔요. 제가 전해 드렸다고 말씀드릴게요.”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드문트가 장갑 낀 손으로 데이지가 내민 봉투를 받아 들었다.
편지를 살짝 접어 봉투에 넣고, 마지막으로 엘리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지하의 석관이 겹쳐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평온하게 잠든, 열여덟 소녀가 있었을 뿐.
“잘 챙겨 주게.”
“예,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편지를 겉옷 주머니에 챙겨 넣은 에드문트가 문을 향해 걸어 나서자, 외젠이 먼저 앞서 나가 문을 열어 주었다.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흔적이 가득한 복도를 천천히 걸어 나갔다. 왠지 멀어질수록,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돌아서서 문을 열어젖히고 싶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바라만 보며 곁을 지키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다 잠시 눈을 떠 주면 바라는 대로 웃어 주고, 어떻게든 웃게 할 이야기를 쥐어짜 건네 보고. 전에는 하지 못했던 말들, 좋은 꿈을 꾸었는지 물어보고.
또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다 나으면 가고 싶은 곳이 있는지. 그런 말들을 건네고 싶을 뿐이었다.
“로앙 백작, 잠시.”
저택 밖으로 나온 에드문트는, 잠시 배웅을 나온 로앙가의 사람들을 물리게 했다.
외젠이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사이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있을 저택 4층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심장이 죄어 오는 기분이 들었다.
“엘리 때문에 그러시는 거지요?”
사람을 모두 물러가게 한 외젠이 먼저 아는 체를 해 왔다. 에드문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혹시 저택에서 무슨 일이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와서 무얼 먹었는지, 전날 입었던 옷에 수상한 흔적이 남지는 않았는지를.
외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오래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엘리는 부모님 돌아가시고, 몇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질 않았습니다. 겨우 숨만 쉬었지. 억지로 먹이면 토하는데 안 먹으면 죽을 것 같기에 지칠 때까지 붙들고 다시 먹이고…… 옷장에 숨어서 내내 울기만 하려는 걸 끌어내서 말도 붙여 보고, 다 같이 붙들고 울어도 보고. 그렇게 꾸역꾸역 살았습니다.”
마음 여린 남자의 눈이 금방 젖었다. 손으로 꼽자면 두 손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이었기에. 어제인가 싶을 정도로 선명하던 과거이기에.
슬픔 역시 그대로 남아 있어서.
“사는 것 같지 않게 살더니 어느 날, 갑자기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더군요.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저흰 그저 나아진 것만으로도 기뻐서 안심하고 말았습니다.”
두 가문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에드문트에게, 외젠은 그때의 일을 상세하게 알리진 않았다. 그저 엘리아가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몇 번 하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약으로 고칠 수 있는 병도 아니고, 에드문트가 도와줄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이후에는, 앓고 지나간 증세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 전하질 않았다. 그러니 에드문트는 여태껏 자세한 내막을 알 길이 없었다.
누구의 잘못인가.
침묵한 오라비의 탓인가. 외면한 남편의 탓인가.
아픈 아이의 탓이려나.
그것도 아니면, 죽어 버린 부모의 탓인가.
“다 괜찮아진 줄 알았습니다. 정원을 뛰어다니고, 뭐든 가리지 않고 꼬박꼬박 씹어 삼키고. 말괄량이 짓도 해 가며 예쁜 모습만 보여 주길래, 괜찮아진 줄로만 알았습니다.”
엘리아가 쾌차했다고 생각한 외젠은 부모의 무덤 앞에 눈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 아픈 세상에 저 혼자 남겨 두지 않아 정말로 고맙다고.
아이가 당신들의 죽음을 극복하게 해 주어 고맙다고. 너무 이른 감사 인사를 전했더랬다.
“몇 개월 뒤, 집사의 아내가 노환으로 사망해서 엘리아도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제법 의젓하게 위로를 건넬 줄도 알길래 이제 괜찮아졌구나 안심했는데…… 다음 날 열이 치솟더니 사흘을 꼬박 앓더군요.”
열여섯의 외젠이, 데이지가. 아픈 아이를 붙들고 할 수 있는 일이란 차라리 자신들을 고통케 해 달라며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그 이후에는, 종종 저런 식입니다. 거래하던 상단 주인이 사고로 죽었을 때, 얼굴 몇 번 본 적 없는 친척의 부고 소식이 들렸을 때.”
에드문트는 이제야 엘리아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엘리아의 죽음 앞에서 무너졌듯, 엘리아도 죽음의 앞에서 무너진다는 걸. 어쩌면 제 곁의 모든 죽음 앞에서.
“지금은 많이 좋아지긴 했습니다. 두 달 전에도 사용인의 가족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어쩌다 엘리아의 귀에 들어갔는데, 그땐 아무렇지 않았으니까요.”
<나도 모르겠어. 딱히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아닌데. 어떨 때는 앓고, 어떨 때는 그냥 넘어가는 게 나도 이해가 안 되네.>
“어제도 공연 내용이 생각할 것도 많았고, 재미있었다면서 나중에 극본을 꼭 구하고 싶다고까지 하기에 앓아누울 거라고는 예상하질 못했습니다.”
외젠은 공연 표를 건넸던 에드문트가 혹여 죄책감을 느낄까 싶어 첨언했다. 어차피 공연 내용을 미리 들었어도, 엘리아가 고집을 부렸을 거라고.
본인은 무조건 괜찮다며 고집을 부렸을 텐데, 엘리아가 평소에는 뭐든 심드렁하다가도 한번 고집을 부리면 아무도 못 이긴다고.
“그래도 내가 성급하게 굴었던 것 같군.”
“아닙니다. 엘리가, 요 며칠 내내 얼마나 웃으며 다녔는지 모릅니다. 매일 방바닥에 누…… 그, 서재에서 책이나 들여다보던 아이였는데요. 공작님 덕분에 엘리가 좋아지는 게 보여서, 감사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것이 아니라 어색하기만 한 감사 인사를 받아 주고, 에드문트는 공작가의 마차에 올랐다.
뒤이어 한스가 에드문트의 맞은편에 착석하자 마차가 공작가를 향해 출발했다.
“로앙가 집사에게 라스페가의 주치의가 찾아올 거라고 말해 두었습니다. 금방 나으실 테지만, 진찰 한번 받아 두셔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수고했다.”
생각도 못 한 공작의 대꾸를 들은 한스의 표정에 죄책감이 비쳤다.
“죄송합니다. 제가 공연한 참견을 하는 바람에, 아가씨께도 따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들은 것도 없으면서, 한스는 눈치껏 공연 내용이 엘리아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이미 짐작을 한 모양이었다. 전에 극단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엘리아의 공포증 이야기가 얼핏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으니.
그러나 에드문트는 죄책감 어린 사과에 조소했다.
“어차피 내가 계획하던 일이었어.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고.”
그리고 실패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외젠의 말로는 엘리아는 나아지는 중이었다. 모든 죽음에 일일이 반응하지는 않으며, 앓아눕는 기간도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과거에는 앓는 모습을 보인 적 없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에드문트와 결혼한 이후 엘리아의 모습을 떠올리자면, 꽤 많은 장례식을 겪었음에도 엘리아가 며칠 앓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시간이 흐르면 신체적으로 드러나는 건 나아지겠지만…….’
열병을 앓는 식으로 아파하지는 않더라도 정신적인 충격은, 어쩌면 내내 지속되는 걸지도 모른다. 그게 내내 쌓였을 텐데, 에드문트는 그저 지나쳐 버렸을 테고.
‘끔찍했겠지. 내내 죽음을 불러오던 내 모습이, 내게 붙어 있던 죽음이.’
벨레노아 백작이 황제가 되었을 때 즈음, 에드문트의 악명은 정점을 찍었다.
닐스 튀링겐과 크라우제 후작을 죽여 끝을 맺지 않았더라면, 그보다 수배는 더 많은 사람을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죽여야 했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두르고 다니는 남자를 남편으로 두고, 엘리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에드문트, 오늘도 많이 바빠요? 조심히 다녀와요.>
모르는 척해 보려고 한 걸까. 용서해 보려고 한 걸까.
<당신을 사랑했어. 사랑했는데…….>
사랑해 보려 했을까. 나를, 내가 이끌던 죽음마저.
<당신은 불길이야. 모두 집어삼켜 버려. 내 사랑마저 집어삼켜 버리곤…….>
에드문트는 내내 기억 속 엘리아에게 물었다.
‘내가, 당신을 대체 얼마나 아프게 했던 건지.’
고통스러웠다. 나를 황홀케 한 어제의 네 모습으로 아무리 지워 봐도, 잊으려 해 봐도…… 도저히 잊히질 않아. 벗어날 수가 없어.
네가 아무리 따듯한 꿈을 빌어 주어도. 아무리 나를 보듬어 주어도.
“공작님!”
마차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드문트가 곧장 마차를 세우도록 하자, 다 멈추기도 전에 기사가 급히 마차 문을 열었다.
“공작님, 랄프 코흐입니다. 목표물의, 닐스 튀링겐의 상황이 급변하여…….”
자꾸만, 너무나도 추웠던 지하의 석실이 떠오르는 바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