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연극 (20/79)

20. 연극

새로운 1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 며칠 전부터 들썩이던 로앙 백작가가 역대 가장 소란스러운 날을 맞이했다.

사용인들은 해야 할 일감을 손에 잡고는 몇 번이나 창문 밖을 흘끔거렸고, 일부 사용인들은 휴가도 반납하고 저택에 나와선 꼼지락거리며 소란스러움에 보탬이 되었다.

들뜬 분위기가 저택을 가득 채운 가운데, 엘리아가 머무는 4층만은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성격 급한 데이지가 주말 사이에 엘리아의 외출 준비를 모두 끝마쳐 둔 덕분이었다.

당일이 되어서야 10여 벌의 봄옷을 꺼내 놓고 이걸 입힐까 저걸 입힐까 고민할 일도 없었음은 물론이었고, 장신구나 머리 손질할 방법까지 모두 미리 정해 둔 터라 여유가 있었다.

엘리아는 오히려 평소 공작가에 저녁을 먹으러 외출하는 날보다 여유로웠다.

“데이지, 나 아직 준비 안 해도 돼?”

되레 마음 조급해진 건 엘리아였다. 점심까지 먹었는데 데이지가 엘리아가 아침에 일어난 그대로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둘 줄이야.

머리칼은 여기저기 엉켜 있었고, 간밤에 침대에서 잠 못 들고 한참 뒤척인 흔적이 옷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탓에 엘리아는 ‘이래서야 내가 오늘 안에 사람 꼴이 될 수는 있을까?’라는 의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아가씨, 지금 단장시켜 드리면 불편한 옷 껴입은 채로 6시까지 버티셔야 할 텐데, 자신 있으세요?”

“아, 절대 불가능하지. 이제 1시 좀 넘었는데, 준비하는 것까지 합쳐서 다섯 시간을 내내 인형처럼 꼼짝하지 않고 있어야 할 거 아냐.”

“그렇죠?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계세요. 세 시간 전부터 준비하면 딱 맞을 테니까요.”

“으음…….”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다면서요. 시간 맞춰 깨워 드릴 테니 좀 주무세요. 공연 끝나고 나면 한참 늦은 시간일 텐데.”

“으으. 안 그래도 아까 누워 봤는데 잠이 안 와. 누우면 자꾸 잡생각만 들고…… 외젠은 좀 잤대?”

“그럴 리가요. 어제 자려고 누웠는데 한 시간 간격으로 찾아오셨지 뭐예요.”

외젠이 새벽 내내 데이지를 괴롭혔다는 말에 엘리아가 기함했다.

“한 시간 간격이라고? 뭐 때문에?”

“고민 상담이었죠. ‘엘리는 뭐 입힐 거냐.’, ‘너는 뭐 입고 갈 거냐.’, ‘공작이 언제 온다고 했는지 갑자기 기억이 안 난다.’, ‘잠깐 잠들었는데 엘리가 공연이 마음에 안 든다고 무대 위로 쫓아 올라가는 악몽을 꾸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일 별일 없을 거라고 말 좀 해 달라.’…….”

엘리아에 데이지까지 데리고 외출할 생각에, 외젠 역시 밤새 전전긍긍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남매 아니랄까 봐.

‘적어도 나는 혼자 앓고 말았다고! 외젠은 대체 왜 애먼 데이지를 밤중에 찾아가기까지 하며 괴롭힌 거야?’

외젠 때문에 어젯밤 잠 못 든 사람이 어디 데이지 하나뿐이겠는가. 밤새 복도를 왔다 갔다 해 댔을 백작님 때문에 같은 별관 건물을 쓰는 사용인들이 다들 잠을 설쳤으리라.

“참나. 외젠은 내가 아직 여덟 살인 줄 아나 봐. 괜한 호들갑에 데이지까지 잠 못 자서 어떻게 해?”

“그래도 한 세 시간은 잤어요. 새벽 3시 넘어갈 때쯤에는 저도 지쳐서, 그냥 문 잠그고 안 열어 드렸거든요.”

“잘했어. 오빠는 가끔 미친 사람처럼 군다니까. 그럴 때마다 자꾸 받아 주지 말고, 그냥 무시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엘리아는 외젠이 어떻게 하고 있나 걱정이 되어 3층 집무실에 찾아가 보았다. 새벽부터 결국 한잠도 못 자고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더니, 걱정으로 잠을 설쳐 눈 밑이 꺼멓게 죽어 있었다.

‘이럴 일이야? 황제 알현하러 가는 날보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잖아.’

저렇게나 호들갑 떨 줄 알았으면, 데려가지를 않았을 텐데!

엘리아는 진심으로 죽어라 고생해서 외젠의 표까지 구한 걸 후회했다. 표 하나만 줄였어도 팔이 저려서 수저 드는 것도 힘들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테니까.

“그만 좀 걱정해! 계속 그 상태면, 다시는 어디 같이 안 갈 줄 알아!”

외젠을 실컷 구박하고 다시 침실로 돌아온 엘리아는 데이지와 함께 침대에 누워 남은 시간을 보냈다.

“어쩌지? 진짜 잠이 한 톨도 안 와. 일할 때는 제발 조금만 자고 싶다고 그렇게 빌었는데.”

쪽잠이라도 잘 생각이었는데 역시나 잠은 오지 않았다. 대신 표에 적혀 있던 연극 제목을 놓고 어떤 이야기일지를 열심히 추측해 보았다.

데이지는 분명 젊은 사람들에게 먹힐 만한 달달한 사랑 이야기일 거라고 했고, 엘리아는 수도의 귀족들 발가락이나 핥아 주는 낯간지러운 영웅담일 거라 자신했다.

“궁금해 죽겠다. 결말이 어떨지 미리 알고 가고 싶은데.”

“별일이네요? 아가씨 원래 책 고를 때에도 제목만 보고 고르시잖아요.”

“고를 때는 제목만 보고 골라도, 읽을 땐 결말부터 보는데?”

“결말부터 보신다고요? 그럼 재미가 없잖아요. 주인공이 결국 사랑을 이루게 될지, 헤어진 사람들이 다시 만나게 될지. 그런 거 궁금해하면서 봐야 몰입감이 생기죠!”

“으으, 그렇게 심장 조이는 기분을 견디는 게 제일 싫어. 누가 죽게 될지, 배신자가 누구인지 미리 다 알고 보는 게 좋아.”

“세상에, 매번 그렇게 반전까지 다 확인한 다음에 보셨던 거예요? 글 쓰는 사람들이 들으면 울겠어요. 어떤 결말이 기다릴지 추측하면서 심장 조이는 기분 느끼라고 쓰는 건데. 이번 기회에, 결말 모르는 채로 보는 기분을 느껴 보세요. 재미있을 거예요.”

“그렇게는 못 해…… 진짜, 중간에 막 답답해져서 나가고 싶어지면 어떻게 하지?”

“어쩌긴요. 아가씨가 고생해서 번 돈 생각해서 참으셔야죠. 초대권이 한 장에 얼마였죠? 1분에 얼마인지 한번 계산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데이지의 제안에 엘리아가 바로 계산에 들어갔다. 데이지도 마음속으로 엘리아가 초대권을 차지하기 위해 사용한 돈이 도합 얼마였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금액이 하도 커서 손을 쓰지 않고 머릿속으로 암산하기에는 어려워 손으로 계산할까 했는데, 옆에서 엘리아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데이지, 내가 혹시 공연 중간에 나간다니 어쩌니 헛소리하면 꼭 말해 줘. 1분에 3펜이라고. 1분에 3펜이야…… 미쳤어…….”

그 후 엘리아는 데이지가 작년에 마련해 두고도 한 번도 입히지 못했던 은빛이 감도는 고전풍의 예복을 껴입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즐겨 착용하시던 황수정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단 뒤, 머리를 손질하는 동안에도 내내 읊조렸다.

“1분에 3펜. 1분에 3펜이라고…….”

그저 표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라 마구잡이로 매달렸다가, 인제 와서 몰상식한 연극 표 가격에 충격을 받은 탓이었다.

“연극 재미없기만 해 봐, 끝나자마자 극작가한테 뛰어갈 거야.”

“쫓아가서 어쩌시려고요?”

“울어야지. 제대로 힘도 들어가지 않는 두 팔로 바들바들 떨면서 옷자락에 들러붙었다가, 처량하게 바닥으로 죽 미끄러져 엎어진 채로 엉엉 울어야지. 마치 전 재산 투자했다가 파산한 몰락 귀족처럼!”

마치 연극 장면을 묘사하는 듯한 엘리아의 말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용인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니지, 아니지! 웃돈 받아먹고 표 넘겼던 자작가부터 찾아가야지. 가서는 당신네 상단이 나한테 팔아넘긴 공연이 얼마나 끝내주게 별로였는지 이야기해 준 다음에…….”

“어휴. 아가씨, 걱정 마세요. 라스페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위해 준비한 공연이잖아요? 보나 마나 엄청 재미있을 거예요.”

“맞아요. 약혼자분께서 시답잖은 공연을 고르셨겠어요?”

함께 외출 준비를 돕던 사용인들이 라스페 공작의 안목을 믿으시라며 엘리아를 달래 주고 나서야 ‘1분에 3펜’이라는 엘리아의 중얼거림이 멎었다.

옆머리를 촘촘히 땋아 주고 있던 데이지가 입을 다물고는 또 다른 고민에 빠진 엘리아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시려나 짐작해 보았다.

옹그린 입술과 찌푸린 이마를 보아하니 공연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어떻게 참고 견뎌야 할지 대안을 고민하는 듯했다.

‘어차피, 옆에 나란히 앉아 계실 분 의식하느라 공연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텐데.’

데이지는 자신의 열여덟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숨소리가 크게 들릴까 봐 편히 쉬지도 못하고, 살짝 움직일 때마다 닿아 오는 체온에 흠칫거리고.

그렇게 긴장하고 있다가 옆에서 말이라도 붙여 오면 깜짝 놀라서 어쩔 줄 몰라 엉망진창으로 대답하고, 후회하고.

그래도 지나고 나면, 함께했던 시간이라고 애틋하기만 하지 않았던가.

엘리아도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귀족과 평민으로 나뉘었던 것이 아니었으니까.

데이지의 사랑스러운 아가씨에게도 다르지 않으리라.

적어도, 사랑만큼은 평등하게 아름다우리라.

* * *

단장을 마친 엘리아와 데이지, 그리고 외젠이 공작가의 마차가 도착하기로 한 6시를 앞두고 저택 앞에 모였다.

때가 벌써 4월인데 저녁이라 그런지 공기는 겨울을 앞둔 가을처럼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엘리아는 한껏 꾸민 게 무색하게도 데이지가 걸쳐 준 숄로 온몸을 싸맨 탓에 통통한 토끼 한 마리가 되고 말았다.

“으. 이 숄 뭐야? 너무 무거워.”

“마차 오기 전까지는 그대로 두르고 계셔요. 감기 걸리시면 또 한참 고생하시잖아요.”

로앙가의 저택 밖은 사용인 대다수가 나와 있어 유례없이 어수선했다. 엘리아는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사용인들을 졸졸 쫓아다니며 무얼 하느라고 바쁜지 구경을 하거나, 긴장한 로앙가 기사들을 찾아가 ‘얼굴 좀 풀라.’고 챙기기도 했다.

“데이지, 테오 경 봤어? 저렇게 긴장하는 거 처음 봐.”

엘리아가 데이지 곁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부동자세를 유지하는 테오 경을 가리켰다. 그는 일전에 호위 일로 공작에게 지적을 받은 것 때문에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공작가에서 오는데 실수할까 봐 신경이 많이 쓰이나 봐요.”

“테오 경은 지금도 충분히 잘해 주고 있는데. 대체 어느 귀족가 호위 기사가 남의 집안 기사들 눈치 보며 일하냐고. 아마 내색은 안 해도 충분히 힘들 거고…… 여러모로 미안해 죽겠네.”

“다녀오시거든 테오 경에게 고생 많았다고 꼭 말해 주세요.”

“음. 좋아. 지금도 얘기하고, 다녀와서 또 말해 줘야지.”

엘리아는 생각난 김에 곧장 테오 경에게 달려가서 등을 팡팡 두들겨 줬다.

테오 경은 갑옷 너머로 통통거리는 진동을 만들어 내는 아가씨의 손길에 겨우 얼굴을 풀고 미소 지었다.

“테오, 고생시켜서 미안해.”

“아닙니다. 오늘은 꼭 공작가 기사들에게 흠 잡히지 않도록, 그동안 갈고닦아 둔 실력에 숨어 있던 잠재력까지 몽땅 끌어낼 겁니다.”

“하하. 그거 읽었구나, 전에 추천해준 ‘한계의 역설’.”

“예, 드디어 다 읽었습니다. 초반부는 어려웠는데, 뒤에는 예시가 많아서 괜찮더라고요. 몇 구절 외워서 애들 다그치는 데 잘 써먹고 있습니다.”

“그래? 유용했다고 하니 기쁘네. 다른 책도 추천해 줄까? 같은 작가는 아닌데 문체가 비슷해. 예시 드는 걸 좋아하는데 실제 주변 사람들이 겪은 일들을 끌어와서 굉장히…….”

엘리아는 첫 외출을 앞두고 느끼는 불안감을 떨쳐 볼 겸 한참 책 이야기를 했다.

테오 경을 붙들고 1장의 서문부터 이어지는 내용을 줄줄이 읊어 주던 중, 저택 정문에서부터 죽 이어진 길을 살피고 있던 병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라스페 공작가 마차 들어옵니다!”

저택 앞에 나와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엘리아도 곧은 길 끝으로 시선을 돌려 공작가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길을 가득 메운 공작가의 마차와 호위 인력이 순식간에 저택 앞까지 다가왔다. 커다란 마차 두 대를 에워싼 공작가의 호위 기사들을 바라보며, 엘리아는 위압감마저 느꼈다.

저렇게나 커다란 마차에, 저렇게나 많은 호위 인력들이라니.

수십의 기사들이 로앙가의 좁은 정원 앞에 일제히 사열한 뒤에야, 공작가의 기사 벨젠 경이 라스페 공작이 탄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치 저택의 정문처럼 커다란 문이 열리자, 에드문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아, 가서 인사부터 드리고…… 엘리?”

“아가씨, 왜 그러세요?”

외젠과 데이지의 채근에도, 엘리아는 바닥에 못 박힌 것처럼 굳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이상하지. 얼굴을 보면 이번에는 상냥하게 인사 건넬 생각이었는데. 또 에드문트 앞이라고 정작 해야 할 말은 하나도 전하지 못할까 봐, 어제부터 연습까지 해 두었는데.

에디, 와 줘서 고마워.

내 고집을 받아 주어서, 함께 극장에 동행해 주어서 기뻐.

오늘 연극 기대된다.

……기대된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을 못 걸겠어. 대체 왜, 왜 이렇게 낯설지?’

저녁놀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쫓아 올라가니 진회색의 예복을 갖춰 입은 남자가 보였다.

선물한 그림을 소중하게 받아 들던 커다란 손, ‘엘리’라는 애칭을 불러 주는 옅은 색의 입술. 죽 뻗은 코 양쪽으로 자리한 어둑한 눈동자.

아름답고도, 서늘하던 푸른빛.

분명 10여 년을 보아 온 약혼자의 모습이었거늘.

엘리아는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못한 채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곧게 향해 오는 시선도, 이내 살짝 미소 짓는 얼굴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무엇이 달라진 걸까.

“엘리.”

굳어 있는 여자를 두고 남자가, 먼저 이름을 불렀다.

엘리. 엘리아. 나의 약혼자. 내가 잃었던 사랑. 나를 다시 찾아와 준 여자.

새하얀 숄을 두르고 머리를 곱게 땋아 내린 모습이 황홀하여서. 아름다워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자각하자니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

멀어지려고 하면 그만큼 다가가면 될 테니까. 아니, 그저 더 멀어지지만 말아 달라고 무릎 꿇어 애원하리라.

당신의 얼굴 훔쳐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나마 허락해 달라고 빌고야 말리라.

허락받은 먼발치에서, 닿아 본 적 없는 어린 여자의 따듯함을 그리워하리라.

이름을 부르며, 사랑을 구걸하며.

“엘리아.”

그래도, 다가와 주면 좋을 텐데. 이름을 부르면 여자가 남자에게 찾아오고. 여자가, 기꺼이 곁에 있고자 할 남자의 이름을 불러 준다면 좋을 텐데.

단 한 걸음만.

단 한 번만.

남자는 평생을 그 한 번을 위해 살 수 있을 텐데.

“……에디, 에드문트.”

드디어 이름이 불린 남자가, 견디지 못하고 먼저 한 걸음 내디뎠다. 한 걸음만으로 만족해야 하거늘,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열망에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왼발이 땅에 닿으면 오른발이, 오른발이 한 걸음 앞을 디디면 다시 왼발이.

그렇게 한 걸음씩 욕심낸 에드문트가 드디어 엘리아의 앞에 멈추어 섰다.

엘리아가 다가올 단 한 걸음을 남겨 둔 채.

“와 줘서, 그…… 내가,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다가온 여자가 아름다워서, 보고 싶었다는 말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에드문트는 왼손을 꾹 눌러 쥐었다.

겨우 상처가 아문 팔에서 아릿한 통증이 온몸을 훑어 왔다.

꿈이 아님을, 현실임을 알려 주는 통증을 느끼고 난 뒤에야 대답할 수 있었다.

“보고 싶었어. 나도 정말로, 네가 그리웠어.”

* * *

로앙가 저택 앞에서 인사를 나눈 네 사람은 공연장으로 출발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둘로 갈라졌다.

엘리아는 에드문트가 타고 온 마차에, 데이지는 외젠과 함께 공작가에서 따로 끌고 온 빈 마차에 탑승했다. 딱히 미리 이야기는 없었으나, 응당 그렇게 갈라 마차에 올라야만 했다.

두 가문의 가주가 마차 한 대에 탑승했다가 나란히 죽어 버리는 일이, 두 번씩이나 일어나길 원하지는 않았으니까.

‘음…… 알아서들 잘하시네.’

혹시나 마차 한 대에 우르르 탈까 봐 미리 ‘어쩌고저쩌고해서 두 분씩 나누어 타셔야 합니다.’라고 지껄일 준비를 하고 있던 한스는 약간의 상실감을 앓았다.

참견할 틈이 보이질 않다니. 이러다 앞으로 한스가 오지랖 부릴 일도 사라지는 건 아닐까?

‘에이 설마. 공작님 아직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지. 그렇고말고. 지금 이 순간만 해도, 이 한스 마이어가 없었으면 가능이나 했겠어?’

앞장선 에드문트가 먼저 마차에 오르고, 이어 엘리아가 커다란 공작가의 마차에 몸을 실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벨젠 경. 땋은 머리 무척 잘 어울리네요.”

“감사합니다.”

머리를 곱게 땋은 벨젠 경이 엘리아가 마차에 편히 오를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주었다.

딱히 기사들과 손을 맞댈 일이 없어서 몰랐는데, 조경석처럼 거칠고 딱딱할 줄 알았던 벨젠 경의 손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엘리아는 낯선 감각이 남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손 곳곳에 잉크가 덕지덕지 스며 훤한 곳에서 내놓기에는 못내 부끄러웠다. 마차에 앉자마자 손을 옷소매 아래에 숨겼다.

‘장갑을 끼고 올 걸 그랬지. 에디처럼. 그러고 보니 에디는 오늘도 장갑을 꼈으려나.’

“로앙 백작도 탑승하셨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기사의 언질에 이어 문이 닫혔다. 엘리아가 뒤늦게 ‘고마워요.’라고 감사 인사를 전했지만, 문이 성급하게 닫히는 바람에 겨우 건넨 인사말도 함께 마차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뻘쭘해지고 만 엘리아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자 시야 끝자락에 에드문트의 진회색 예복이 걸려 왔다.

‘에디가 저런 색 예복 입은 건 처음 보네. 마차 안이 어두워서 흑갈색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색함을 벗어 내고자, 엘리아는 가장 먼저 들어온 그의 다리를 시작으로 조금씩 반질반질한 옷감을 따라 올라갔다.

그러다가 얼굴까지로는 차마 올라가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 내려온 엘리아의 두 눈이 다리에 올려 둔 에드문트의 손에 내려앉았다. 오늘도 흰색 장갑으로 맨살을 숨긴 채였다.

마치 예전부터 남이 낀 장갑에 참으로 관심이 많았던 사람인 척, 엘리아는 그의 장갑만 눈이 빠져라 바라보았다.

‘창피해서 얼굴을 못 보겠어…….’

준비한 말을 전한다는 게, 엘리아는 그만 보고 싶다는 말을 불쑥 꺼내고야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엘리아의 목소리가 겨우 입술 밖에 톡 튀어나올 정도로만 작았던 터라 에드문트만 간신히 들었으리라는 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리웠다는 두 사람의 고백은 비록 바람에 흩어지고야 말았으나, 해가 저무는 하늘 아래 마주 보고 선 두 남녀의 모습을 숨겨 주는 건 어느 것도 없었으니까.

여자가 남자를 바라보는 표정이,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훤히 드러난 탓에, 어떤 뜻을 담았을지 짐작하는 건 누구에게도 어렵지 않았으리라.

‘왜 하필 그 말이 튀어나와서 눈을 못 마주치겠네. 전에 에디한테 들은 말이라 그랬던 건가? 뭐야. 앵무새도 아니고…….’

왜 하필 보고 싶다는 말이었을까. 함께 공연을 보게 될 날을 무척 기다리긴 하였으나 엘리아는 에드문트를 애타게 보고 싶어 한 적은 없었는데.

……아니었던가. 보고 싶었던가.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그는 어떤 색의 옷을 입을지 상상해 보았으니까. 어쩌면 보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 엘리아는 어쩌면 에드문트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싶어 생각해 본 날도 있었다.

‘너도 혹시 빈 시간에 나를 생각해 본 건 아니었을까.’

늘 집에만 있는 약혼자가 문득 궁금해져서는, 혹시 외롭지는 않은지. 시린 봄바람에 추워하지는 않을지.

그런 사소한 의문이 찬찬히 빈 마음을 채우다가 기어코 넘쳐흘러, 그리움이 되어 흘렀던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무작정 엘리아를 찾아왔던 건 아닐까.

편지를 보내는 대신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인사를 전하는 대신에.

“엘리, 몸은 괜찮아?”

“으, 으응? 괜찮아. 괜찮지. 요즘 아픈 일 없는데.”

제 손끝을 빤히 바라보던 엘리아에게 불쑥 말을 걸었더니 캄캄한 마차에서도 도드라지는 엘리아의 눈동자가 그를 향해 왔다.

혹시 저를 계속 피하려는가 싶어 초조해하던 에드문트가 그제야 자식을 옥죄던 불안감에서 벗어났다. 그 잠깐을 못 참고, 자꾸만 재촉하고야 마는 스스로의 어설픈 자제심을 반성해야 했지만.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어. 로앙 백작이 걱정할 정도였다고.”

그새 외젠이 에드문트에게 쪼르르 달려가 ‘엘리아가 표 한 장 값 벌겠다고 설치는 중이다.’라고 전한 모양이었다.

창피함이 다시 몰려와 엘리아의 양 볼을 발갛게 데웠다. 엘리아에겐 며칠 밤을 새워야 겨우 벌 수 있는 돈이었으나, 에드문트에게는 아마 장갑 한 짝 가격도 되지 않을 푼돈이었을 테니까.

“나는, 정말 괜찮았어. 재미있었거든. 물론 마지막 날에는 팔이 좀 아팠고, 가끔 외젠이 구경 와서 놀려서. 그래서 투정을 좀 부리긴 했어. 그래도 즐거웠어. 그러니까…… 고마워 에디, 오늘 같이 와 줘서. 바쁜 일이 많을 텐데.”

“나야말로 고마워. 초대해 주어서.”

“음…… 음. 공연 재미있을 것 같아. 그치? 나는 오늘 처음이야. 연극 보는 거. 에디는?”

“어릴 적에는 몇 번 갔었어.”

“그래? 원래 라스페 공작가도 극장을 갖고 있었던 거야?”

“어릴 때 다니던 곳은 공작가 소유의 극장은 아니었어.”

에드문트의 잔잔한 목소리에, 살짝씩 떨리던 엘리아의 목소리도 조금씩 차분해져 갔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바짝 긴장해 있던 자세도 제법 풀어져서 나중에는 바닥에 살짝 닿는 다리를 살랑거리기도 했다.

“대신 벨레노아가에서 공연장을 가지고 있었어. 그곳에 세 번 정도 간 적 있어.”

“벨레노아 백작가라면…… 사촌 누이 되는 분이시지? 에디 네가 준 보고서에서 읽었던 것 같아. 10년 전까지만 해도 트롱프 뢰이유 극장이 벨레노아 백작님의 부친이셨던 1황자 전하 소유였다고. 거기서 공연을 봤던 거야?”

“응, 기억하고 있구나.”

“겨우 며칠 전에 읽었던 건데 당연히 기억나지. 음, 근데 10년 전이라면…… 아니, 아니야. 미안. 그러니까…….”

단둘이 있는 마차에 얼마나 착실히 적응했는지, 엘리아는 그만 무심코 떠올린 추측을 그대로 떠들어 댈 뻔했다.

‘맙소사. 실수할 뻔했어.’

엘리아가 급히 다른 이야기를 꺼내 보려고 했으나 이미 10년 전이니 하는 소리를 다 지껄인 뒤였다.

에드문트가 엘리아가 뒤이어서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을지 짐작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10년 전, 공작 부부의 사고사가 벨레노아 백작가에까지 영향을 미친 게 아니었냐는 물음이었음을.

“괜찮아, 엘리. 당시에 벨레노아가에 빚이 좀 있었어. 그때는 공작가에서 원조할 사정이 못 되었고. 겨우 극장이었고, 저택이 넘어가는 정도는 아니었으니 문제없었어.”

“그래도, 1황자 전하께서 뢰이유 극장을 무척 좋아하셨다고 들어서. 미안해, 에디. 괜히 내가 속상할 이야기 꺼내서…….”

에드문트에게는 낯선 이야기였다. 이미 죽은 1황자의 취향에까지 관심 두는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1황자가 좋아하던 공연장이었으니, 튀링겐가에 빼앗겼을 때 나도 슬퍼했으리라 짐작하는 걸까.’

에드문트는 슬프지 않았다. 사촌 누이가 쫓겨나가듯 수도를 떠나던 날, 부러 길을 빙 둘러 빼앗긴 공연장을 지나치면서 눈물 몇 방울 떨구는 모습까지 보았음에도.

슬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안타깝지도 않았다.

하나 엘리아에게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모습은,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낳아 준 부모조차도 에드문트의 무감한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언젠가 누이가 꼭 되찾고 싶으시다 하시면 도와 드려야지.”

엘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걸 보니, 아마 나쁘지 않은 대답이었나 보다.

에드문트는 안도했다. ‘괜찮다.’라는 기괴한 대답을 하지 않고도 엘리를 웃게 할 수 있었으니까.

사실 죽기 전, 에드문트는 튀링겐가에서 극장을 압류하여 누이의 품에 안겨 주었다. 그가 오래전 흘린 눈물을 기억하고 한 일은 당연 아니었다.

그저, 빼앗겼던 모든 것들을 다시 돌려받고 나니 그중 수도 외곽의 대형 극장도 포함되어 있었을 뿐.

<에드문트, 네가 나를 구원하는구나. 수도를 떠나던 날 분노로 절반이 타들어 가 겨우 남은 절반만으로 살아 숨 쉬던 나를.>

돌이켜 보니 누이가 제게 그런 말을 하기는 했다. 어쩌면 그때의 감사 인사 속에는 ‘죽은 아비가 아끼던 극장을 다시 돌려받게 해 주어 고맙다.’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을지도.

‘적어도 황제가 된 당신은 행복했겠군.’

이전의 삶에서 누이는 황제의 자리에 올라 빼앗겼던 모든 것들을 돌려받았으니,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를 황제로 만든 에드문트는 엘리아를 잃고 말았지만.

‘엘리아를 위해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완벽한 복수. 겨우, 그딴 걸 좇다가 엘리아를 잃었던 거였음을. 엘리아에겐 하등 상관없었을 무가치한 결말을 위해 10년이란 시간을 허비했음을.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모든 게 그저 자신의 자기만족을 위한 허상이자, 착각이었음을.

‘내가, 너를…….’

일순 시야가 까맣게 죽어 가려 했다. 한때는 생소했으며,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혼란에 빠지려는 순간.

그는 손을 힘껏 말아 쥐었다. 두꺼운 장갑에 기대어 홀로 버텼다.

“에디, 있잖아.”

여린 약혼자의 목소리마저 에드문트에게는 감내해야만 할 자극이었다. 다행히도 그는 제법 잘 참아 보았다.

“혹시 정말 나중에라도 극장을 돌려 드릴 생각이면 말이야. 그때 나도 보태도 될까? 트롱프 뢰이유가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음…… 어디 보자.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아마 앞줄에 의자 다섯 개 살 돈은 벌 수 있으려나?”

괜히 옛날이야기를 꺼내게 한 게 미안해서, 엘리아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실없는 소리를 했다. 이어 맞춘 듯 어우러진 미소가 뒤따르자, 마주 보고 있던 에드문트도 엘리아를 따라 웃었다.

잔잔한 미소가 허공에 파문을 그려, 엘리아를 톡톡 두드렸다. 간질거리는 마음에 입술이 벌어졌다.

“에디, 요즘 자주 웃는 것 같아.”

마음마저 열려, 감정이 혀처럼 빼꼼 고개 내밀었다.

“그래?”

끝을 살짝 올렸으나 여전히 단조로운 대답이 들려왔다. 차마 기만했음을 고백할 수는 없어 망설인 탓이었다.

‘내게, 너를 충족시킬 따듯함이 존재할 리가 없으니. 너는 그저 내게 속아 착각하는 거겠지.’

남자의 미소는 그저 흉내에 불과했다. 그는 거울이 되어 엘리아의 미소를 비춰 낼 뿐이었다.

하나 여자는 한결같더라.

‘이제는 전처럼 차가워 보이지가 않아.’

제 따듯한 미소를 거울에 비쳤음을 몰랐고, 새파란 눈동자에 핀 꽃이 실은 자신이 피운 꽃인 줄도 몰라서는.

“응,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그…… 요즘 많이들 바쁠 때잖아? 외젠도 요즘 잠을 설친다고 하더라. 그래서 너는 어떻게 지내려나, 걱정했어.”

다정하게 굴었다. 그럼 또 남자는 여자를 흉내 내 다정함을 돌려주었다. 거울처럼. 적어도 에드문트는 스스로를 마음을 담지 못하는 거울이라 여겼다.

“고마워. 덕분에 잘 지냈어. 네가 보내 준 그림 덕분에 좋은 꿈도 꾸었고.”

“그…… 랬구나. 다행이다. 다행이야.”

얼굴을 붉히느라, 또 부끄러워하다가도 돌려받은 말을 찬찬히 곱씹어 보느라 엘리아의 작은 입이 꼭 다물렸다.

에드문트는 어느 쪽이든 좋았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네는 모습도, 앞에 앉은 자신을 의식하여 입술만 달싹이는 모습도.

꿈인가 싶었다.

꿈이라면 아무렴 어떤가 싶기도 했다.

‘만약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으면 될 테니까.’

고통에 겨운 현실에 억지로 깨어나야 한다면 몇 번이고 다시 잠들면 될 테니.

그러니 부디, 밤에는 오늘의 꿈을 꿀 수 있기를. 꿈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기를.

* * *

마차가 수도 번화가에 들어서며 속도가 한껏 느려졌다.

“밖이 소란스럽네. 그러고 보니 나 이 시간에 번화가 나온 거 정말 오랜만이야.”

엘리아가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낯선 소음에 불안한 듯 보여, 에드문트는 오늘 보게 될 공연 이야기를 꺼내 관심을 돌리도록 했다.

“최근 투자 일로 눈여겨보고 있는 극작가의 작품이야.”

“아, 남부에서는 이미 꽤 성공한 사람이라며? 원래 소설가였대. 데이지가 알려 줬어. 나는 소설은 잘 안 봐서 몰랐거든. 근데 혹시 공연명 들었어? 아니, 당연히 알고 있겠구나. 되게 특이한 제목이지 않아?”

엘리아는 ‘죽음, 그리고 다음 날’이라는 원제목 대신, 한스의 입김이 들어간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꽃이 피나니’라는 새 제목이 적힌 표를 살랑거렸다.

“요즘은 이렇게 긴 제목이 유행인가? 이거 봐. 제목 때문에 표가 여백도 부족할 정도로 꽉 차 버렸잖아.”

에드문트가 겨우 한마디 꺼냈을 뿐인데, 엘리아는 극의 제목으로 서두를 열어 낮에 데이지와 나누었던 연극 내용에 대한 추측으로까지 수다를 이어 갔다.

“데이지는 분명 진한 연애 이야기일 거라며 기대 중인데, 내 생각에는 정의감만 넘치는 귀족이 불쌍한 자들 구제한답시고 돈 뿌리는 이야기일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해?”

“‘봄을 기다리는’이라는 표현은 굶주림을 견디는 도입부를, ‘꽃이 핀다’라는 건 귀족들이 선심 쓰듯 뿌린 돈으로 사람들 형편이 아주 약간 좋아지는 결말을 의미할 것 같지 않아? 그런 이야기가 요즘 수도 귀족들에게 잘 통한다더라고.”

지극히 그가 알던 엘리아다운 추측을 들은 에드문트가 살짝 미소를 보였다.

남자의 잔잔한 미소는 만개한 꽃을 연상케 했다. 희미한 바람에도 휘청거리는 자신과는 달리 곧게 뻗은 가지로 홀로 선 푸른 작약이요, 하늘을 닮은 델피니움이었다.

너는 먼저 핀 꽃이라, 겨우 작은 꽃봉오리 맺은 들꽃이 그저 어려 보이진 않을까. 귀한 자리에 어울릴 만큼 화려해 내가 초라해 보이진 않으려나.

내가 만개한 꽃으로 휘청이지 않을 때까지, 먼저 져 버리지 않고 나를 기다려 주려나.

엘리아는 어린애처럼 들뜨고 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짐짓 차분해진 어투로 에드문트에게 말을 건네었다.

“에디는 어떻게 생각해? 혹시 어떤 내용인지 들었어?”

“나도 제목만 들었어. 보좌관 말로는 나쁘지 않다고 하던데.”

“보좌관이면 그 한스라는 사람 말이지? 아, 어쩌지. 나 결말이 너무 궁금해서…… 한스 경 아까 저택에서는 봤는데, 혹시 우리랑 같이 극장 가는 중이려나?”

“우리가 탄 마차 마부석에 앉아 있을 거야. 결말을 미리 듣고 싶어서 그래?”

“아직 모르겠어. 에디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결말부터 보는 걸 좋아하는데, 데이지는 책이든 연극이든 결말을 알면 재미있을 부분도 전부 지루해질 거래. 인생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고 사는 거랑 다를 바 없다면서. 듣고 보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엘리아를 위해 에드문트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궁금하면 보좌관에게 확인해 봐. 다들 행복한 채로 끝나는지 정도는, 연극을 즐기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 거야.”

“아. 행복한 결말인지, 비극으로 끝나는지만?”

“결국, 중요한 건 마지막에 행복을 거머쥐었는지가 될 테니까. 아파하고, 상실을 겪을지라도.”

그는 대답에 지독한 진심을 담았다. 몇 번을 죽게 된들, 제 삶의 마지막 문장에 엘리아의 이름이 적혀 있다면 충분하다 여길 남자였기에.

엘리.

오늘 네가 내게 선물해 준 행복한 시간, 어쩌면 애정일지도 모르는 따스함. 나 하나를 위해 울리는 목소리. 피할 곳 없는 마차 안에서, 피할 줄을 모르는 네 미소.

그 어느 것도 영원하리라 기대하지는 않아. 다시 잃을지도 모르고, 그중 일부만 남아 날 견디게 할지도 모르지.

그래도 나의 사랑, 내 생의 끝에는 네가 있기를.

다시 한 번 내게 죽음이 찾아올 때, 그때엔 내가 이불처럼 덮고 따뜻하게 잠들 수 있는 사랑이 있기를.

그리하여 너를 만나는 꿈을 꾸며…… 마지막 잠을 청할 수 있기를.

* * *

공작가의 마차 두 대가 극장 앞에 멈추어 서자, 주변을 오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귀한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베르디에 자작 부부가 호들갑스럽게 마차에서 내린 에드문트 공작을 환영했다.

“라스페 님, 저희 베르디에가에게 이렇게 공작님을 모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은…….”

젊은 자작 부부의 선망 어린 눈빛에 에드문트는 피로를 느꼈으며, 엘리아는 그저 낯설어하기만 했다.

‘에드문트에게 추종자가 많다는 건 들어 봤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저렇게 열렬한 눈빛이라니.’

에드문트를 향하는 타인의 집요한 시선에, 엘리아는 불편함마저 느꼈다. 그는 여태 홀로 저런 질척하고도 부담스러운 시선을 견뎌 왔던 걸까.

“엘리, 들어가자.”

“아, 응.”

안타깝게도 에드문트는 자작 부부가 준비한 인사말의 반의반도 들어 주질 않고 극장으로 향했다.

타인을 매정할 정도로 무시하는 태도는, 엘리아가 그간 알고 있던 에드문트의 모습이었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는 엘리아와 외젠을 향해서도 늘 저런 식이지 않았던가.

아쉬움이 그렁그렁 맺힌 자작 부부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엘리아를 비롯한 일행이 에드문트를 졸졸 쫓아 걸었다. 슬쩍 뒤를 돌아봤더니 보좌관 한스가 베르디에 자작 부부의 접대를 대신 받아 주고 있었다.

“예, 공작님께서 두 분 환대에 무척 기뻐하셨을 겁니다. 그럼요. 제가 두 분께서 큰 고생하셨다고 말씀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네? 아닙니다. 단지 마차를 타고 오시느라 조금 피곤하실 테니까요…….”

베르디에 자작가가 공작과 로앙 백작 사람들을 손님으로 받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 치하하는 말이라도 직접 해 주면 좋으련만.

에드문트는 사람들의 시선이 시끄럽게 몰린 극장 정문을 지나치기에만 바빴다. 미리 정문에서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던 공작가의 호위가 문을 열어 주었다.

호위 기사들에게 자리를 빼앗긴 극장 고용인들은 고개를 납죽 조아린 채 공작과 그의 일행을 흘끔거리기에 바빴다.

수도 귀족들조차 보기 힘들다는 라스페 공작이, 약혼자까지 대동하고서 극장을 찾아오다니. 이보다 더한 구경거리도 없었다.

‘에드문트는 아무렇지도 않나 봐.’

자꾸 제게 메다꽂히는 시선이 불편했는데, 함께 걷는 에드문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엘리아는 에드문트를 흉내 내 보려고 했다. 낯선 상황에 살짝 움츠러든 어깨를 펴고 햇빛처럼 따가운 시선을 감내코자 했다.

‘에디 너도, 처음에는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늘을 찾아 도망치듯 발걸음 옮기며 엘리아는 에드문트를 바라보았다.

‘네가 괜찮아 보이듯, 나도 괜찮아질까.’

혹시 겨우 겉으로만 괜찮아 보이게 되는 건 아닐까. 그리고 너도, 실은 이 모든 불편함이 괜찮지 않음에도 견디고 있는 걸지도.

* * *

극장 입구를 코앞에 두고, 외젠은 잠시 걸음을 늦춰 주변을 흘끔거렸다.

대다수의 관심이 에드문트를 향해 있으나, 간혹 다른 곳을 흘끔거리는 이들도 보였다.

바짝 쫓아 걷는 제 누이라든가, 제 본래 나이보다 많아 보이고 싶어 머리칼을 바짝 틀어 올린 데이지라든가.

“저기 공작의 약혼자라는 여자 말고, 그 뒤에 있는 여자는 누구지?”

“그러게. 백작가 사람이려나?”

공작의 위세가 두려워 입 다물고 있던 구경꾼들이 에드문트가 지나가기가 무섭게 수군거리자, 외젠은 결국 걸음을 완전히 멈추었다.

그러곤 제가 생일 선물이랍시고 몇 년 전 안겨 주었던 예복을 입은 여자를 불러 세웠다.

“……데이지.”

“…….”

“그, 잠깐만 데이지.”

“예, 백작님.”

“……무슨,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다고.”

엘리아가 혹시 옷자락을 밟아 넘어질까 노심초사하며 살피던 데이지가 외젠을 돌아보았다.

“데이지, 뭐 해? 우리 먼저 들어간다?”

“예, 잠깐 백작님께서 부르셔서요. 바로 따라갈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아가씨.”

고개를 갸웃거리던 엘리아가 에드문트와 먼저 극장 안으로 향했다. 공작과 엘리아를 위한 호위 인원들도 먼저 줄줄이 입장하여, 남은 건 절반의 호위 인력과 두 사람뿐이었다.

“백작님, 왜 그러세요?”

“잡고 가라고.”

말 꺼내자마자 얼굴이 붉어졌으면서, 외젠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데이지를 향해 제 팔 한쪽을 내밀었다.

“팔 잡고 들어가라고. 그래야 멍청한 놈들이 어쩌니저쩌니 들러붙는 일 안 생기지.”

“저한테요, 아니면 백작님한테요?”

“둘 다지, 알면서 왜 물어.”

“저는 그렇다 쳐도, 백작님한테 누가 붙을까 봐 걱정하시는 거라고요?”

그런 일이 언제 있으셨다고. 약 올리는 말까지 덧붙이면서도 어쨌든 데이지는 외젠이 내민 팔에 손을 올렸다.

이미 함께 여기저기 다니며 자주 해 왔던 일이라, 두 사람의 행동에는 어색함 한 톨 묻어나지 않았다.

“저거 봐. 백작의 연인인가 본데?”

“그런 소문이 있었던가? 아직 결혼 상대는커녕 약혼자도 없다는 건 듣기야 했는데.”

오랜만의 외출에 신경 써 차려입은 터라, 누가 말하지 않으면 데이지는 영락없는 ‘로앙 백작의 정체 불명한 연인’처럼 보였다.

아마 며칠 내로 ‘로앙 백작에게 그간 숨겨 두었던 연인이 있다더라.’라는 소문이 퍼지리라. 그럼 잠시나마 외젠을 귀찮게 하는 아가씨들이 사라지겠지.

물론, 외젠이 며칠 전부터 염려하는 대로 데이지가 낯선 이들에게 첫눈에 반했다느니 하는 말이 적힌 ‘청혼서’를 받을 일도 없을 테고 말이다.

“이렇게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나네요.”

팔을 겹친 채 걸음 옮기던 데이지가 작게 웃으며 옛이야기를 꺼냈다. 외젠은 마침 같은 생각을 떠올리던 중이었다.

“그래. 데이지 네 열여덟 생일 때. 엘리아 잠든 틈에 우리 둘이 도망 나왔잖아. 그냥 산책이나 하려다가 충동적으로 공연장까지 들어갔고.”

뭐 하나 쉽지 않은 때였는데, 간간이 그런 소중한 추억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

서로가, 곁에 있었기에.

“외젠 님, 저 사실 그때 본 공연 내용 하나도 기억 안 나지 뭐예요.”

“나도 그래. 뭐…… 피곤했을 테니까.”

“네, 그때는 늘 정신없었을 때였으니까요.”

추억을 더듬으며 공연장에 들어서자, 등불을 아낌없이 밝혀 낮처럼 환한 공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자리에 앉아 있던 엘리아는 공연장 구경에 푹 빠져 입까지 살짝 벌리고 있었다. 겁을 먹어선 바짝 얼어 있을 줄 알았는데.

“외젠 님, 아가씨 말이에요. 오늘 유난히 아름답지 않으세요?”

“또 그 소리. 며칠 전에 푸아티에가 차남한테 정말 물어봤는데, 그러더라. 주변에서 암만 제 누이 예쁘다 해도, 제가 보기엔 그냥 고집 센 어린애라고.”

“가족이라도 예뻐 보일 수도 있는 거죠.”

“안 그래. 절대 안 그래.”

극장 안은 이미 좌석 대부분이 채워져 있었으나, 사람 소리를 하나씩 눌러 지워 낸 듯 고요했다. 데이지와 외젠의 대화도 속삭임이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낮아져야 했다.

‘백작님’이라는 어색한 호칭으로 외젠의 시선을 끄는 대신, 데이지는 그의 팔에 올린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러면, 저는요? 저는 가족이 아닌데.”

“……뭐?”

“저 오늘 어때 보여요?”

1층의 중앙 좌석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걸음 소리가, 마치 외젠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곗바늘 소리처럼 울려 그를 재촉했다.

“네가, 왜 가족이 아니야…….”

약간의 원망이 담긴 목소리가 데이지에게 속삭여 왔다.

가족이 아님을, 남이라 스스로를 칭하는 데이지를 향한 원망이었을까.

아니면 겨우 가족이라는 말로 여자를 포용해야 하는 현실을 향한 원망이었을까.

그래도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적어도 엘리아가 보기에는, 그 어떤 모습보다 아름다웠다.

“에디, 있잖아.”

엘리아가 제 왼쪽에 앉은 에드문트를 불렀다. 그의 시선이 저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을 향해 있을 줄만 알고.

단 한 번도, 엘리아에게서 떨어진 적이 없는 줄도 모르고는.

“아까 한스 경이, 오늘 연극 행복하게 끝난다고 했잖아.”

“그랬지.”

“정말 행복하게 끝나면 좋겠다.”

그 순간, 여자는 연극의 끝을 말하는 척 아끼는 사람들의 행복을 빌었다.

“그럴 거야.”

그리고 남자는, 여자의 행복을 빌었다.

“끝은 행복할 거야. 무척.”

죽음처럼, 꿈처럼 까만 어둠 속에서 무대를 가리던 막이 오르고, 요란한 박수 소리가 울렸다.

연극이 시작되었다.

엘리아의 눈동자가, 무대 위로 걸어 들어갔다.

* * *

관객들로 가득한 극장 안, 사람들의 훌쩍임이 창문 밖 빗소리처럼 희미하게 울렸다. 엘리아 역시 발갛게 열 올라온 눈을 꾹꾹 눌러 가며 연극을 쫓았다.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꽃이 피나니’라는 제목대로, 무대 위 세상을 사는 이들은 모두 시린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곧 꽃이 피는 봄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하나 엘리아가 보기에, 꽃이 피는 봄은 요원한 듯 보였다.

어둑한 무대에 가득한 슬픔이, 피어나야 할 꽃을 말려 바스러지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낯선 나라에 오게 된 여자가 생면부지의 기사를 만나고,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 티격태격하며 서로에 대해 알아 가는 내용이 주를 이루던 전반부까지는 괜찮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엘리아는 주로 두 배우의 대화 위주로 진행되는 극을 지켜보면서, 가끔 양옆에 앉은 에드문트와 데이지의 반응을 살필 정도로 여유로웠다.

왼쪽에 앉은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시선을 느낄 때면 매번 눈을 마주쳐 살짝 미소 지었다. 다정한 미소가 ‘재미있게 보고 있어.’라고 대답해 주는 것 같아 기뻤다.

엘리아의 오른쪽에 앉은 데이지는 극에 빠져 엘리아가 저를 바라보는 줄도 눈치채지 못했다. 집중해 벌어진 입술은 무대 위에서 큰 소리가 날 때마다 움찔거렸다.

그리고 외젠은 뒤늦게 긴장이 풀린 탓에 꾸벅꾸벅 졸다가 초반부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도통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나올 때마다 데이지에게 귀엣말했다.

<데이지, 저 여자는 왜 말을 못 하는 건데? 다른 나라 사람이야?>

<저 잿빛 머리 남자 이름이 뭐라고? 저 여자는 아직 남자 이름 모르는 거지?>

처음 몇 번은 알려 주던 데이지는 외젠의 질문이 그칠 줄 모르자 ‘차라리 그냥 주무시는 건 어때요?’라고 대답해 그를 삐치게 하고 말았다.

그대로 잔잔한 분위기가 죽 이어지는 듯하더니, 중반부를 지나자 겨우 마음을 확인한 연인을 향해 폭풍이 다가왔다.

강물이 세차게 휘몰아치는 소리, 동풍이 집어삼킬 듯 달려오는 소리가 음악으로 표현되어 극장을 가득 메웠다. 겪은 적 없는 위협적인 소음에, 엘리아가 몸을 바짝 굳혔다.

하나 차마 누군가에게 두려움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그저 제 옷자락만 세게 쥐었다.

‘소리에 밀려나 버릴 것 같아.’

당장이라도 한쪽 다리가 부서져 저를 바닥에 밀어낼 의자에 앉은 기분이 들었다.

“제발, 제발 나를 밀어내지 마. 조금만 더 허락해 줘.”

무대 위의 남자는 폭풍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지, 아니면 외면하고 싶은 건지 그저 여자의 앞에 무릎 꿇고 애원했다.

마치 엘리아처럼 옷자락만 겨우 붙들고 버텨 온 여자에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상대에게…….

남자는 대체 무얼 요구하는 걸까.

엘리아는 무대 위 작은 침대에 걸터앉은 여자가 되어, 의자 뒤로 몸을 깊게 눌러 회피했다.

남자가 무얼 요구하든, 여자가 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원하는 대로 허락해 줄 수 없으니, 도망칠 수밖에.

‘말도 통하지 않고, 겨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가 무섭지 않아?’

하늘을 울리는 소리, 땅을 흔드는 울림이 반복되며 엘리아의 물음에 동조했다.

‘나는, 아마 무서웠을 거야. 네가 가진 건 겨우 이름 하나뿐이라 남자가 너에 대해 아는 것도, 고작 이름 하나뿐인데. 사랑이 있을 리가 없잖아.’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남자에게 여자가 알려 줄 수 있는 건 오직 이름뿐.

언어가 통하지 않는 여자에게 낯선 남자가 알려 준 것 역시 오직 이름뿐.

사랑이 고작 이름 몇 자 타고 서로에게 닿았을 리 없을 텐데.

‘착각일 테고, 실은 지독한 외로움을 해소하고 싶다는 이기심일 텐데. 누구든 붙들어 살아남고 싶은 절박함만 있을 뿐인 텐데.’

엘리아의 염원에도, 무대 위의 여자는 결국 무릎 꿇은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무 뜻을 전하지 못하는 타인의 언어에, 상처 입은 얼굴에 닿은 서늘한 체온에 위안 받고 말았기 때문이리라.

“아윈, 아윈…….”

두 사람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같지 않은 체온이 맞닿아 서로를 달구고.

그것만으로 충분하기도, 충분치 않기도 했다. 여느 평범한 남녀처럼 손을 맞잡고는 이름 하나에 마음을 실어 보내 허락을 구하더라.

기어코 입술이 닿는 순간, 엘리아는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대체 왜. 사랑이 무어라고. 폭풍우가 불면 모두 사라지고 말 텐데. 죽음의 앞에서, 가장 먼저 스러지고 말 텐데.’

뜻대로 흘러가지를 않는 극에 답답함을 느낀 나머지, 엘리아는 여린 눈꺼풀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눈을 감아 버린 뒤에도, 연극은 계속되었다. 어린 시절 엘리아가 옷장 안에 숨어 세상을 잊어 보려 했을 때처럼.

저 없이 흐르던 세상을 닮아, 무대 위의 시간도 엘리아를 기다려 주지 않고 흘러갔다.

흘러감에도, 결코 서두르지 않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 또 불안한 소리가 들리는데.’

사랑을 확인한 연인들의 뒤로, 가깝게 다가온 폭풍이 몰아쳤다. 분명 사람이 깎고 칠을 해 만든 악기가 낸 소리였는데…….

눈을 감은 엘리아에게는 동풍이 부는 소리처럼 들렸다. 거센 강물이 흐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처럼, 엘리아의 귓가에 맺혀 불안감을 들쑤셨다.

‘아마 휩쓸리고 말았겠지.’

하나 폭풍우 소리를 들은 엘리아가 슬며시 눈을 떴을 때, 사랑은 아직도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서로를 보며 수줍게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던 엘리아는 무대를 피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왼쪽으로 달아난 엘리아의 얼굴이 에드문트를 툭, 두드렸다.

“…….”

인기척에 바로 눈을 마주쳐 온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엘리아에게 가깝게 다가왔다.

데이지와 다정히 귓속말을 나누던 외젠의 모습을 흉내 내었다.

검푸른 에드문트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가까워져 오자, 엘리아는 어둑한 조명 너머로 남자의 눈동자가 선명해짐을 느꼈다.

눈동자에는 푸른색과 검은색, 그리고 눈처럼 새하얀 점이 무수히 찍혀 있었다.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푸르기만 할 줄 알았어. 한 가지 색으로 붉을 줄 알았는데.’

창백한 피부와 대조적인 입술은 하도 붉어서, 붉은색으로 가득 적신 붓이 단 한 번 스쳐 만들었을 줄 알았는데. 무수한 색이 그곳에 서려 있더라.

타닥타닥 소리 내며 불길을 내는 화덕 속처럼 붉기도 하고, 또 무대에서 넘어온 빛을 받은 왼쪽은 주홍빛이 감돌기도 했다.

“엘리.”

눈동자에, 입술에 시선을 빼앗긴 찰나의 순간, 그리고 이름이 불린 순간.

‘아, 소리가…….’

음악이 멈추었다. 오직 엘리아에게만. 무대를 죽 둘러앉은 음악가들의 손에서는 점점 폭풍우가 고조되어 극장 전체를 휘몰아쳤지만 닿아 오질 않았다.

오로지 그에게 불린 이름 하나만 귓가에 남아 놀란 마음을 달래어 주었다.

“괜찮아?”

고작 이름일 뿐인데.

당신의 목소리라는 이유로.

“나는 괜찮아, 에드문트. 정말로.”

괜찮아지고 말았다. 다가오던 폭풍우도, 그림자 진 땅에 내려앉은 죽음마저도.

고작 이름 하나로 사랑이 전해질 리 없다 믿었건만.

‘내가 여태껏 몰라 착각했나 봐. 이름 하나만으로도, 짧은 애칭만으로도 충분한 거였나 봐.’

사랑이란 게, 아마 이런 걸까.

이게, 사랑인 걸까.

* * *

굳건한 사랑에도, 폭풍우가 몰고 온 죽음이 기어코 무대 위를 휩쓸었다.

“가지 마. 부탁이야.”

새까만 죽음으로 분장한 배우들이 무대를 헤집고 다니며 주인공의 친구를, 가족을 한 사람씩 붙잡아 무대 밖으로 데려갔다.

“제발 죽지 마. 죽이지 마.”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집어삼키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서로에게 의지하여 달아나는 것 말고는…….

“도망치자. 우리가 결코 달아날 수 없는, 죽음으로부터.”

무대 밖의 사람들이 두 사람의 무기력함에, 상실에 눈물을 흘렸다. 엘리아는 언제 잡았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에드문트의 옷자락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죽음이 만드는 발소리는, 어쩐지 들어 본 것 같은 기시감을 품고 있었다.

‘소리가…… 나무 부딪히는 소리, 바닥 구르는 소리가…….’

엘리아는 익숙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도, 사람들을 데려가는 새까만 죽음에 집중하지도 못한 채 영원을 견뎠다.

그러나 차라리 끝이 없기를 바랐다.

‘그러지 마. 그렇게 다 데려가 버리고 끝났다고 하지 마.’

여태껏 알지 못한 채 좇아왔던 결말이,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며 다가와 깨닫게 했기에.

‘죽어 버렸다고 하지 마. 제발.’

내내 궁금했던 결말이 죽음이었음을, 엘리아는 책의 마지막 단 한 장을 앞두고 확신하고 말았다. 그러니 차라리 결말이 없기를 바랐다.

마침내 하나의 죽음이 한 명씩 데리고 떠난 무대에, 마지막 죽음이 남았다.

“죽음이 오고 있어. 그래도, 괜찮아. 나 여기 있을게.”

여자가 죽음을 말하고, 수용하고.

“후회하지 않아. 너를 만나게 된 걸, 후회하지 않아.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에도.”

남자는 참회할 줄을 몰랐다. 잠시나마 사랑을 가져 보았기에.

단 하나 남은 무대 위의 죽음이, 입을 맞추며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을 지켜보았다.

“사랑해.”

연인을 배웅하는 마지막 인사가 끝나고, 무대를 가득 메우고 있던 등불이 하나씩 하나씩 꺼졌다.

“행복하길.”

남은 연인의 행복을 비는 목소리만 남기고 무대에는 완전한 어둠이 드리웠다.

‘아. 다 사라졌어.’

엘리아가 탄식했다. 엘리아가 우려한 대로 죽음이 모두 가져가 버렸다. 사랑하던 연인을 갈라놓고는, 사랑마저 앗아가 버리다니.

폭풍우가 끝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어둠을 위해 장송곡이 울렸다. 엘리아의 뺨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죽음과 함께 떠나 버리고야 만 사랑을 추모하기 위해.

끝나고야 만 사랑을 향한 작별 인사를 건네고자.

“아.”

그때, 누군가의 탄성이 음악마저 멎어 적막해진 극장을 깨웠다. 마지막 입맞춤으로 이별하던 자리에서, 야트막한 빛이 번져 나왔다. 어둠을 찢어 내어 세찬 울음을 토했다.

홀로 남은 이가 눈물을 흘리며 따뜻한 빛을 끌어안았다. 떠나간 연인처럼, 그를 마주 안아 주었다.

“당신이 떠났지만, 내게 사랑이 남았구나.”

사랑이 남아 있다는 말. 이내 당신을 그리워하며 행복하리라는 독백과 함께 막이 내려왔다.

관객들이 하나둘 일어나 빗소리를 닮은 박수 소리를 흩뿌렸다. 엘리아는 비를 내리지 못한 채 땅에 박히고 말았다.

‘어째서. 죽음이…… 사랑을 데려가는 줄 알았는데.’

마차 사고에 콱 죽어 버릴 줄 알았는데. 높은 계단을 억지로 구르면 함께 사라지는 줄 알았는데.

‘왜. 사랑이 무엇이길래. 폭풍우 앞에서도 버티고 만 거야. 정말로, 죽음마저 이겨 낼 수 있는 거야?’

박수 소리가 멎어, 연극이 끝을 고했다.

엘리아에게는 사랑이 남았다.

겨우 자각한, 그러나 아직은 어렵기만 한.

사랑이 여운이 되어 남고야 말았다.

* * *

극장에서 나오니 해가 한참 저문 밤이었다. 다들 얼마나 울었는지, 붉은 기가 남은 얼굴을 그림자에 숨기느라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엘리아도, 데이지도 서로 살짝 부은 눈가를 확인하고선 웃음을 흘렸다.

“잘 참았는데, 등불이 꺼지기 시작할 때 결국 눈물 터지고 말았지 뭐예요. 아가씨는요?”

“나는 중간중간 울었어. 극작가가 ‘여기서 울어야 합니다!’라고 써 놓은 듯한 부분마다 알차게.”

예상치 못한 연극 내용 때문에 데이지와 외젠이 한마음으로 걱정했으나, 다행히 엘리아는 괜찮아 보였다.

‘죽는 게 뭐 어떻다고.’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는 뒤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앓던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주무실 때 곁에 있어야겠다.’

데이지는 새 손수건을 꺼내 눈물 흘린 흔적이 희미하게 남은 엘리아의 얼굴을 살펴 주었다.

“데이지, 나보단 외젠이 더 문제인 것 같은데. 외젠 얼굴 어떻게 해. 빨리 마차에 타는 게 낫겠어.”

“어쩜 좋아요. 내일 황궁에 가셔야 하는데.”

초반부는 피곤해서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외젠은 후반부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엘리아라도 같이 펑펑 울었으면 좀 나았을 텐데, 네 명이 모이고 보니 외젠만큼 운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라스페 공작은 심지어, 공연을 본 건지 의심될 정도로 멀끔한 모습이었다. 공작이 울었다면, 그건 또 그거대로 이상하게 보이긴 했으리라.

돌아가는 길에도 엘리아는 에드문트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어후. 이 마차는 다 좋은데, 너무 높아.’

공작가 마차는 에드문트에게 맞춰 제작한 탓에 엘리아가 혼자 오르기에는 턱없이 높았다. 마차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네가 감히 날 타겠다고?’라고 비웃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 이번에도 엘리아가 도움을 청하기 전에 보좌관 한스가 쫓아 나와 마차에 오르는 걸 도와주었다. 벨젠 경보다 큼지막하지만, 굳은살이 박이지 않아 매끈한 손이 엘리아의 손을 받쳐 주었다.

엘리아는 한스의 손을 짚고는 마차에 바로 오르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스 경.”

“예, 엘리아 아가씨.”

“왜 사기 쳤어요?”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한스는 곧장 엘리아의 속내를 알아채고 웃었다.

“사기라뇨. 제 말대로 행복하게 끝나지 않았습니까.”

“죽어 버렸잖아요!”

“죽었지만, 사랑을 남기고 떠났으니까요. 결국엔 행복해졌을 겁니다.”

“남은 사랑 때문에요?”

“그렇지요. 사랑이 다시 버티게 해 줄 테니까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죽음보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삶보다도 행복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것도…….”

“그런 삶을 사는 사람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는 죽음도 있으니까요.”

“너무 상대적인 행복이잖아요.”

“어차피 절대적인 행복이란 건 없지 않겠습니까.”

엘리아의 투정 어린 물음에도 한스는 막힘없이 답해 주었다. 이어 ‘공작님께서 기다리십니다.’라고 덧붙이자, 엘리아가 엉성하게 잡고 있던 한스의 손을 다시 꾹 눌러 잡았다.

“아, 깜박할 뻔했네. 고마워요, 한스 경.”

막 마차에 발을 디딘 엘리아가 다시 얼굴을 그에게로 돌렸다. 그러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에드문트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이야기했다.

“선물 공연 표로 골라 준 거, 한스 경일 테죠? 내겐 아직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재미있었어요.”

엘리아가 완전히 마차에 오른 뒤, 에드문트는 한스를 바라보았다.

“…….”

딱히 에드문트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그는 공작이 저와 굳이 눈을 마주친 것을 두고 ‘엘리아가 마지막에 네게 뭐라고 했는지 빨리 말하라.’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흠흠. 비밀입니다. 비밀. 비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고생했다 치하해 주셨노라 하면 될 것을, 한스는 괜히 심술부리듯 입을 다물었다. 그런 한스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공작은 작게 코웃음을 치고는 마차에 훌쩍 올랐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매번 고맙다는 인사말을 덧붙여 주는 어린 아가씨를 향해 웃어 준 뒤, 한스가 마차의 문을 닫았다. 그사이 출발 준비를 끝낸 기사들은 한스가 마부석에 올라타는 걸 확인하고 바로 길을 열었다.

연극이 막 끝나 사람들로 분주하던 극장 앞 대로가 활짝 열려 공작가의 마차를 배웅했다.

* * *

마차는 시간이 늦어 한산해진 상점가에 접어들었다. 극장으로 향하던 때와 달리, 엘리아와 에드문트가 탄 마차 안은 삐거덕대는 소음 하나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에드문트는 한스에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걸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어 버린 엘리아의 모습에 불안함을 느꼈다.

‘아직 무리였던 걸까.’

고작 실제의 삶을 흉내 내 그럴듯하게 지어 낸 이야기일 뿐인데. 눈앞에서 펼쳐진 가짜 죽음에 혹시 충격을 받은 건가.

에드문트가, 조급함에 실수하고 만 걸까.

한번 시작한 불안감은 멈출 줄 모르고 온몸을 훑었다. 가벼운 옷자락만 닿았을 뿐인 왼팔의 상처에 다시 통증이 일려 했다.

“에디.”

“……응, 엘리.”

대답이 조금 늦었다. 이름이 불리는 순간 모든 사고가 멈추어 버린 탓에.

“공연 어땠어? 음. 나는…… 하하. 내가 생각한 거랑 다른 이야기여서 처음에는 놀랐지 뭐야. 분명 지방에서 갓 상경한 극작가가, 돈 많은 귀족이 좋아할 이야기를 써서 올렸을 거라고 믿었는데. 극작가한테 미안하네. 근데 재미있었어. 음악도 좋았고. 구성도…….”

엘리아는 드문드문 남은 기억을 꺼내 고요하던 마차 안을 채웠다.

종이꽃을 한가득 뿌려 꽃밭을 표현한 걸 보며 어떤 감상을 느꼈는지, 언어를 배우는 여자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인사를 했을 때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에드문트는 조곤조곤한 엘리아의 목소리가 그려 내는 공연 장면을 함께 되새겼다.

몇 장면은 기억에 없어 엘리아의 표현만으로 상상해 내야 했다.

대부분 시간을 무대 대신 엘리아를 바라보는 데 쓴 탓에. 머릿속에 남은 장면은 많지 않았다.

천둥처럼 울리는 타악기의 굉음에 깜짝 놀라던 모습, 낯선 곳에서 설움을 토하다 눈물을 떨구던 무대 속 여자의 모습에 함께 눈물을 흘리던 모습.

그러다가 가끔 자신을 향해 오던 눈. 야속하게 다시 떠나 버리던 엘리아의 눈동자.

선명한 건 모두 엘리아에 관한 기억뿐이었다.

“한스 경은 행복한 결말이라고 했는데. 나는 잘 모르겠어. 사랑이…… 함께 있어 주었다는 게.”

에드문트의 앞에서 사랑 이야기를 꺼내려니 부끄러웠다.

더듬거리는 말소리에 묻어난 부끄러움을 부디 눈치채지 못하면 좋겠는데.

혹여 눈치채더라도, 아직은 모른 척해 주길 빌었다.

“그…… 사랑이 말이야. 그게 죽어도 남아 있을까? 남아 있으면, 어떻게든 행복해질 수 있을까.”

사랑이 그렇게나 강인한 걸까. 마차 사고는 사랑하던 부모를 데려가 버렸고, 그 이후에도 수십 번의 죽음이 예고도 없이 찾아와 엘리아가 아끼던 사람들을 슬프게 만들었는데.

궁금했다. 정말로, 죽음마저 버티게 해 줄 수 있는 사랑이란 게 있는지.

“글쎄.”

엘리아의 물음에 에드문트는, 죽음이 찾아왔을 때를 떠올렸다. 또한, 잠에서 깰 때마다 죽고자 했던 지난 며칠의 밤을 떠올렸다.

죽어 버린 과거의 시간. 죽고자 했던 어둑한 새벽녘.

모두, 엘리아가 죽음과 손을 맞잡고 떠나 에드문트 혼자 남겨졌음을 자각했던 시간이었다.

엘리아의 사랑이 그에게 없어서, 줄 수 없는 에드문트의 사랑만 덩그러니 남겨진 탓에. 에드문트는 죽고자 했다.

‘만약, 나에게 서로를 향해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순간이 있었더라면.’

엘리아 네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과거형의 사랑만 두고 나를 떠나려 했을 때 내가 붙잡았다면.

‘한번 애원해 보기라도 했더라면 세찬 비가 내리던 날, 너를 떠나보내고도 나는 죽지 않았을까.’

한때나마 곁에서 온기를 주던 네 사랑을 기억하여 감내할 수 있었을까. 그저 너를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살아 견딜 수 있었을까.

목이 메어 왔다. 에드문트는 다시 장갑이 뜯어질 때까지 주먹을 쥐었다. 엘리아가 눈치챌 수도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그저 터져 나오는 아득한 감각을 홀로 버텨 내느라 안간힘을 썼다. 늘 혼자였던 남자에게는 힘들긴 했으나, 불가능하진 않았다.

그는 단 한 번도 혼자이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사랑과 함께 남겨진 적이 없어서, 나는 잘 모르겠어.”

그리고 사랑만 끌어안은 채 혼자 남게 된다면.

‘나는 버틸 수 없을 거야. 다시 너를 찾아가겠지.’

엘리아. 나의 사랑. 네가 없는데, 내가 살아야 할까. 어차피 견딜 수도 없을 생을 꼭 버텨야만 하나. 나는 늘 목이 마를 텐데.

너를 지척에 둔 지금, 이 순간마저 네가 그리운데. 그리워하다가 죽어 버리고 말 텐데.

“적어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보다는 괜찮겠지만. 겨우 잠시뿐이겠지. 그러니 나는 차라리 노력하겠어. 남겨지지 않도록.”

비가 적셔 낸 가을꽃을 바라보며, 에드문트가 고백했다. 애원했다.

엘리아, 나를 두고 가지 말아 줘. 나를 남기고 가지 말아 줘. 사랑도 없이, 내 사랑만 남긴 채 떠나지 말아 줘.

“다신 모두 잃고 홀로 남겨지고 싶지 않으니까. 잃지 않도록, 노력하겠어.”

사랑만 두고 떠나지도 말아 줘. 나는 괜찮을 테니까.

내가, 무엇이든 버텨 볼 테니. 견뎌 볼 테니까 나를 떠나지 말아 줘.

* * *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나지막한 목소리. 물기 하나 없이 또렷한 눈동자. 평온한 미소.

눈으로 살핀 에드문트는 달라진 곳 하나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엘리아에게 에드문트는 애절해 보였다. 상처 입은 것처럼 아파 보였다.

아마, 엘리아의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일지도.

애절한 듯 보이는 마음에 어떤 답을 주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너를,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다는 에드문트를 다독여 줄 수 있을까.

저를 비쳤던 한 줌 햇볕과 잠시 스치듯 내린 비를 머금은 들꽃이 피어나려 했다. 기다려 온 계절은 아직이라, 조금 이르긴 했지만.

먼저 핀 꽃을 홀로 외롭게 두고 싶지가 않아서.

“에디, 내일…… 내일 화요일이잖아. 우리 내일도 만나자. 만나러, 와 주지 않을래?”

톡톡 쏟아지는 빗물을 머금고 있던 주홍빛 눈동자가, 꽃잎 위에 무겁게 올라온 물방울을 견디지 못해 죽 미끄러뜨렸다.

동시에 꽃잎이 활짝 벌어지며 피어났다. 아름다운 미소가 되어.

“내일, 그리고 그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에디, 에드문트.”

사랑이 무슨 색인지. 죽음을 극복하고 남을 수 있는 게 사랑인지. 아니면 촛불처럼 새하얗게 타오르다가 사라지고 마는 게 사랑일지.

‘모르겠어. 아직은 모르겠어. 그래도 하나는 알겠어. 사라지리라는 이유만으로 너를, 혼자 내버려 둘 수가 없어. 나는, 이제 혼자 견디고 싶지가 않아.’

너무 외로웠으니까.

너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아 외로웠을 테니까.

“네가 보고 싶을 거야. 내일도. 그다음 날에도. 그러니까…….”

“만나러 갈게. 언제든지, 엘리.”

서서히 멈추어 가는 마차 안에서 에드문트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차마 닿지는 못하고, 그저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를 위해 흘린 여자의 눈물을 시선으로만 훑고, 마음으로나마 받아 마셨다.

황홀하였다.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이 순간을, 너를.

“나도 너를 늘 그리워했으니까. 허락해 준다면 만나러 갈게. 언제든지.”

* * *

엘리아의 귓가에 늘 맺혀 있던, 에드문트의 기억에 새겨져 있던 시린 바람이 멎었다. 세찬 강물이 멎었다.

죽음이, 멈추었다.

잠시나마. 시작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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