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변화
“우리 아가씨 어쩜 좋아. 옷이 문제가 아니라 씻으셔야겠어요. 물 받아 올게요.”
흙바닥에 한참 앉아 있느라 거지꼴이 된 엘리아가 4층으로 돌아오자, 데이지는 잠시 말문을 잃고 말았다.
놀랄 만도 했다. 갑자기 뛰쳐나가는가 싶더니 어릴 때도 보이지 않던 흙투성이 꼴이 되어 왔으니.
시무룩해져 돌아온 엘리아를 위해, 데이지는 대체 무슨 일이냐며 추궁하는 대신 목욕물에 말려 둔 꽃을 한가득 뿌려 기분을 맞춰 주었다.
“그때 받은 꽃이 아직도 남아 있어? 이렇게 한 번에 많이씩 써도 되나?”
“아마 따로 말려 둔 꽃이랑 합치면 가을까지 쓰고도 남을걸요? 워낙 많았어야죠.”
욕조에 넘실거리는 말린 꽃에서는 생화만큼 짙은 향이 나오진 않았지만, 은은한 꽃향기와 노을 진 호수처럼 넘실거리는 색이 어우러져 엘리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 주었다.
‘나중에 꽃이 다 떨어지면 아쉬워서 어쩌지? 정원에 미리 가을에 필 꽃 좀 심어 두라고 할까.’
엘리아는 동실동실 떠다니는 꽃잎을 손으로 톡톡 건드려 가며, 머릿속으로는 끌어올 예산이 있을지를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1년 내내 목욕물에 띄울 꽃을 거둘 만큼의 묘목을 셈해 보자니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커다란 금액이었다.
제가 그쯤 사치는 해도 되지 않을까 싶으면서, 한편으로는 목욕 몇 번이면 책 한 권이고 한 달이면 4층 사용인 한 달 치 급여는 되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래도 유지비랑, 정원사 고생할 것까지 따지면 비용이 만만찮겠지? 그냥 에디가 준 거 아껴 쓸까 봐. 기분만 낼 거라면 오늘 띄운 거에 절반도 필요 없으니까.’
결국 엘리아는 욕심 대신 현실을 선택했다. 어차피 목욕물에 꽃잎 하나 띄워 놓지 않고도 여태 잘만 씻고 살지 않았는가.
에드문트가 선물로 수천 송이씩이나 되는 꽃을 보내지 않았다면, 엘리아는 묘목값을 따져 보며 사치하고 싶은 마음은 꿈도 꾸지 않았으리라.
‘돈만 비싸고 쓸모없는 선물 줬다고 투정 부렸는데. 미안하네.’
그가 선물한 작은 사치를 만끽하며, 엘리아는 에드문트를 생각했다.
봉투를 받아 들고 한참을 보았다는 에드문트의 표정은, 어땠을까.
좋아했으려나. 아니면 엘리아가 꽃 선물을 받았을 때처럼, 의미를 몰라 한참을 고민했을까.
‘편지라도 쓸걸.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보좌관이 준 봉투가 하나 더 있었는데 뭔지 물어볼 생각도 못 했네. 어쩌지? 아냐. 진정하자. 열어 보면 뭔지 알겠지. 목욕 끝나고 바로 확인해 봐야지.’
아낌없이 뿌려 둔 꽃이 예뻐서 평소보다 오래 들어앉아 있을 생각이었는데.
엘리아는 고민하다가 데이지가 두고 간 모래시계를 딱 두 번만 더 돌리고 일어나기로 다짐했다.
따듯한 목욕물에 푹 젖은 꽃잎도, 모래시계가 사르륵 떨어지며 알려 주는 시간도 아까웠지만 엘리아는 마음먹은 시간이 되자마자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탁자 위에 얌전히 놓인 푸른색 봉투가 목욕을 마치고 발갛게 상기된 엘리아를 맞이했다.
일렁거리는 푸른빛에 지나간 일이 떠올라 또 후회하고 말았다.
<봉투 전해 줬는데, 그 한스라는 보좌관이 그러더라. 라스페 공작이 요사이 잠을 못 잔다고.>
봉투를 전해 주고 돌아온 외젠이 가져온 에드문트의 소식에, 엘리아는 무척 당황했었다.
‘나 진짜…… 여태 에드문트는 잠도 안 자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봐. 그렇지 않고서야 잠을 못 잔다는 이야기가 이렇게 충격적으로 느껴질 리가 없잖아.’
이전 같았음 에드문트가 잠을 못 잔다는 외젠의 말에 ‘그럼 가서 자장가라도 불러 주든지.’라고 대충 대꾸해 주었을 텐데.
<왜? 어디가 안 좋대? 공작가에 무슨 일이 있대? 외젠이 또 귀찮게 굴었지! 왜 바쁜 사람 귀찮게 했어!>
이야기를 듣는 순간 걱정이 폭우처럼 쏟아진 탓에, 엘리아는 애꿎은 외젠을 붙들고 짜증까지 내고 말았다.
뒤늦게 ‘내가 좀 과했네, 미안.’이라는 사과를 던져 준 엘리아는 씩씩거리는 외젠은 무시하고서 고민에 빠졌다.
‘보좌관이 외젠한테 토로할 정도면 그냥 하루 이틀 잠 못 잔 수준이 아니라는 거잖아. 몸이 아픈가? 아님 악몽이라도 꾸는가?’
에드문트가 대체 어떤 상태인지 알고 싶었지만, 공작가에서 엘리아에게 그의 상태를 알려 줄 의무는 없었다. 게다가 어설프게 아는 체를 했다간, 말 옮긴 보좌관이 곤욕을 치를 수도 있었다.
‘너무 많이 샀다고 하면서 불면증 치료에 쓰는 차를 보낼까? 아닌데. 이미 알았으니 모르는 척하지도 못하겠고. 우연을 가장해 도움 줄 방법 없으려나? 내가 만약에 잠을 잘 자지 못하여서 힘들어하면 어떤 게 도움이 될까.’
엘리아의 고민을 해결해 준 건, 뜻밖의 사람들이었다. 제게는 너무 익숙해서, 특별히 고려하지도 못했던 것들.
<아가씨, 좋은 꿈 꾸세요.>
어둑한 밤이 되면, 저택을 초로 밝혀 주는 사용인들이 엘리아에게 건네는 인사.
‘공작가 저택에, 에디더러 좋은 꿈 꾸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을까?’
엘리아는 값비싼 가구로 채워 놓았음에도 을씨년스럽던 공작가 저택을 떠올렸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신이야 없었지만, 엘리아는 때마침 찾아온 공작가의 보좌관에게 전하고자 했다.
‘이맘때면 오라버니는 일이 많아 피곤해서 되레 잠 못 드는 날이 많던데. 라스페 공작은 어떠신가요? 에디한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좋은 꿈 꾸라고 인사 전해 주세요. 아냐, 좋은 꿈 꾸길 바란다고…… 전해 주세요?’
3층 응접실로 내려가는 동안, 엘리아는 끊임없이 말을 고쳐 가며 읊조렸다.
편지로 써서 보내기에도 너무 새삼스러운 인사말을. 고작 한마디 인사일 뿐이나, 에드문트에게 위안이 되어 주길 바라며.
‘아무도 에디한테 그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어휴. 근데 생각만 하면 뭐해. 공연 초대권 일에 정신 팔려서 결국 전하지도 못했는데.’
엘리아는 진즉 열어 보았던 봉투를 한참 만지작거리다 옆으로 밀어냈다. 아래쪽에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두 번째 봉투가 모습을 드러냈다.
초대권이 들어 있던 봉투와 달리, 엘리아가 미처 확인하지 않은 다른 봉투에는 노란색과 주홍색을 섞어 무늬를 낸 밀랍 인장이 붙어 있었다.
마치 ‘봉투에 그린 그림 잘 봤어.’라고 인사를 전하는 것만 같았다.
밀랍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열자, 봉투에 딱 맞게 재단한 빳빳한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일전에 에드문트가 보낸 초대장과 같은 종이였다.
‘화요일에 만나자고 했더니, 아예 초대장까지 만들어 보낸 걸까?’
심호흡을 몇 번 한 뒤에 종이를 뒤집었다.
산을 그려 내는 붓질처럼, 길고 유려한 선으로 이루어진 서체가 드러났다.
에드문트의 필체였다.
‘엘리아 로앙에게’라고 적힌 첫 문장은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한 번도 그의 글씨를 본 적이 없었으니, 남자가 마치 그림 같은 글을 적는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리고…….
<봉투를 전해 받은 날, 꿈을 꾸었어.
네가 보내 준 선물에 있는 풍경과 닮아서 꿈을 꾸는 내내 따뜻했어.
고마워, 엘리. 화요일이 올 때까지 나를 행복하게 해 주어서.
너의 하루도 내 꿈처럼, 따뜻하기를.>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여자의 마음을 알아준 남자 때문에.
조금 울고 말았다.
슬픔도, 서러움도 섞이지 않아 맑은 눈물이었다.
* * *
잠자리를 봐 주러 침실에 온 데이지에게, 엘리아는 한스에게 받은 공연 초대장 이야기를 했다.
“세 장인데, 라스페 공작님은 가지 않으신다고요?”
“어떻게 생각해. 이상하지?”
“이상하네요. 공연을 안 좋아하시는가.”
“보좌관 말로는, 가고 싶은데 딱 그날만 시간이 안 되어서 못 오는 거라던데.”
“흐음.”
“웃기지. 라스페 공작한테 도저히 뺄 수 없는 약속이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렇죠. 원하실 때 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분이시니까.”
“내 말이! 그래서 계속 캐물었는데, 뻔뻔하더라 그 보좌관. 보고서 쓴 거 봤을 때부터 알아봤어. 전에 메리가 그 사람한테 관심 있다고 했다며? 고집 세고 뻔뻔한데 좀 웃긴 사람 같다고 좀 말해 줘야겠다.”
“메리요? 그 애는 벌써 공작가 보좌관은 잊어버렸을걸요. 7번가 청과상 청년이랑 요즘 잘되고 있거든요. 주말에 외출 나간다고 벌써 신나서 난리예요.”
엘리아는 데이지에게서 요즘 연애하느라 바쁜 사용인들 이야기를 들었다. 다들 얼마나 야무지게 만나고 다니는지, 데이지의 이야기가 끝날 줄을 몰랐다.
“이틀에 한 번이나 만난대? 진짜 부지런하네. 그럼 나중에는 더 갈 데도 없겠다.”
“만나서 얼굴 보고, 직접 목소리 듣는 게 중요한 거니까요. 카페에 앉아 온종일 얼굴만 보아도 좋고. 고루한 회화 전시회에 가서 손잡고 화랑을 거닐어도 좋을 테고요. 평민들끼리는요, 그냥 중앙 상점가 분수대에 걸터앉아 있기만 할 때도 있어요.”
“분수대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뭘 해도 좋을 테니까요. 그저 만나서 좋고,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좋고.”
“으음. 그냥 만난다는 게 중요한 건가?”
“그럼요. 장소가 어디인지, 만나서 할 만한 게 없다든지 그런 게 중요하겠어요?”
데이지의 말을 들은 엘리아는, 상상해 보았다. 예쁘게 차려입은 데이지, 그리고 처음 가 보는 공연장이 낯설 자신. 마찬가지로 긴장해 있을 외젠.
공연은 재미있을까?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엘리아는 지쳐 잠들어 버리고, 외젠은 데이지의 긴 감상을 듣고만 있다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에 허겁지겁 답을 떠올려 보려 애쓰겠지.
공연이 재미있어도, 재미있지 않아도. 엘리아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시에 엘리아는 에드문트의 모습을 짐작해 보았다. 엘리아에겐 고심해 준비했다는 초대권을 보내 주고는, 혼자 주말을 보내겠다는 남자를.
‘저택에서 혼자 바쁜 일과 씨름하며 보내려고? 아니면 너를 흠모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게 될까.’
엘리아는 행복할 텐데. 에드문트는, 괜찮을까.
“역시 이상해. 엄청 이상하다고.”
엘리아는 혼자 계속 ‘이상하다.’라고 중얼거리더니, 걸터앉아 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어디 가세요?”
데이지가 영문 모른 채 따라 일어나기도 전에, 엘리아는 저벅저벅 걸어 침실을 나가 버렸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잠옷을 휘적거리며 도착한 곳은 어둑한 4층 서재였다. 복도에서 들어오는 빛에만 의지해서 서재 책장을 살피자, 뒤따라온 데이지가 급히 근처에 등불 하나를 켜 주었다.
“아가씨, 뭐 찾으세요?”
“편지 왔던 거. 나한테 왔던 것들 어디 있어?”
“편지요?”
“응, 편지. 혹시 버렸어?”
“아니요. 잠시만요. 일단 학술원에서 왔던 건 여기에 따로 모아 두고 있거든요.”
데이지가 책장 가장 아래쪽에 둔 상자를 꺼냈다. 안에는 투박한 봉투 여럿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엘리아가 졸업한 학술원에서 꾸준히 보내오는 편지들이었다.
넉 달 치를 하나도 열어 보지 않아서 전부 밀랍 봉인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엘리아가 상자 안을 뒤적거리는 사이 데이지는 등불을 더 켜서 서재를 완전히 밝혀 주었다.
“엘리 아가씨, 이 밤중에 무얼 하시려고요?”
엘리아는 밀랍을 떼어 내는 게 귀찮아서 그냥 봉투 위쪽을 손으로 죽 찢어 버렸다. 안에 든 편지까지 찢어졌지만, 내용을 확인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단숨에 첫 번째 편지를 읽어 내린 엘리아가 다음 봉투를 열어 똑같이 윗부분을 찢었다.
그러곤 결의에 차서 대답했다.
“돈 벌려고. 데이지, 나 돈 필요해.”
상자 앞에 선 채로 서른 통의 편지를 읽느라 바쁜 엘리아를 두고, 데이지는 생각했다.
‘사랑이네.’
사랑이라고.
‘저게 사랑이 아니면, 세상의 사랑은 다 죽은 거야.’
어린 아가씨에게 드디어 사랑이 찾아왔노라고.
34화. 변화 (2)
나흘 뒤. 엘리아는 침실에 둔 탁자에 앉아 봉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도착한 속달용 우편 봉투였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작은 봉투 칼로 우편물을 열었다. 안에서 엘리아가 꺼낸 건, 네 장의 초대장이었다.
길이 잘 들어 매끄러운 탁자 위에 초대장을 가지런히 올려 보았다. 커다란 액자 속에 장식한 그림처럼 보였다.
며칠 내내 이 순간을 그려 왔는데. 벅차오르는 환희보다는 안도감, 그리고 잔잔한 충족감이 엘리아의 목표 달성을 축하해 주었다.
‘포기하지 않길 잘했어. 정말 다행이야. 정말로.’
에드문트가 보좌관을 통해 단 세 장의 공연 초대장을 보내왔을 때, 엘리아는 그가 ‘바빠서 못 온다.’라는 말이 틀림없이 변명일 뿐이라 생각했다.
에드문트가 엘리아의 취향에 맞춰 주느라 내키지 않을 공연을 골랐을지도 몰랐고, 공연을 관람하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에도 엘리아는 에드문트를 위한 초대권을 구하기로 했다. 제 힘으로 말이다.
처음에는 에드문트가 준 초대권 좌석 양 옆자리를 노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올해 최고의 기대작이라는 공연 표를, 그것도 원하는 자리를 콕 집어서 구하는 일이 쉬울 리 만무했다.
<값을 부르지도 않았다고?>
<예, 억만금을 줘도 안 팔 거라고 말입니다. 확인해 보니 아가씨가 찾으시는 자리는 특히나 웃돈이 어마어마하게 붙을 만큼 인기가 좋아서요.>
엘리아는 거래하는 상단을 통해 표를 딱 한 장 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다른 일자의 표를 새로 구하는 게 쉽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침 다리외가 상단에서 표를 다량 확보해 두었더군요. 현재 가격 협상 진행 중인 표가 열여섯 장이라고 합니다.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네 좌석 연석도 가능하고요. 한데 가격이…….>
로앙가의 형편을 잘 아는 상단주가 한참 머뭇거린 후에야 가격을 알려 주었다.
엘리아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해 주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러려니 듣고 넘어갈 수준이 아니었다.
<한 장…… 그게 한 장 가격이라고? 네 장 합친 가격이 아니라?>
<예에, 이미 두 달 전에 매진된 데다가 공연 일자가 가까워지면서 가격이 좀…… 많이 올랐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엘리아가 가진 표가 위치며 날짜가 좋아 꽤 비싸게 팔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선물을 판다는 게 무척 속상했지만, 눈물을 머금고 세 장의 표로 종잣돈을 마련하기로 했다.
<네 자리 연석 구할 만한 곳은 그쪽뿐이라는 거지?>
<예, 두 자리는 어렵지 않지만 네 자리 연석으로 구하시려면 다리외뿐입니다.>
<후우. 본인들도 알겠지, 네 자리 연석 구하려면 선택지가 자기들뿐이란 거. 협상에 불리할 수도 있으니까 두 명씩 다른 이름으로 예약 걸자. 알았지?>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아서 엘리아가 협상을 유리하게 몰아가는 방법은 겨우 그뿐이었다.
‘좋게 생각하자. 돈만 충분하면 구할 수 있는 표가 있다는 게 어디야?’
구매는 상단에 맡겼으니, 이제 엘리아가 돈을 마련할 차례였다. 부족한 돈을 메우기 위해, 엘리아는 졸업한 지 2년 만에 학술원에 연락을 넣었다.
<아가씨, 학술원에서 무슨 책 같은 걸 어마어마하게 주던데요?>
졸업생들에게 소개해 주는 일감을 전부 제게 보내 달라고 전하게 했더니, 로앙가 사용인이 어마어마한 양의 서적을 안고 돌아왔다.
<기다려 봐. 여기서 시간 대비 보수 형편없는 것들은 바로 돌려줘야 하니까.>
엘리아는 서류 더미에서 해 봤자 푼돈만 떨어질 일감을 골라 도로 학술원에 보낸 뒤, 알짜배기만 챙겨 침실로 옮기도록 했다.
고대어 번역, 고등반 수업 교재 제작, 논문 필사…….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엘리아는 일감을 가득 쌓아 둔 탁자에 앉자마자 쉬지 않고 펜을 놀렸다.
잠도 못 자고 꼬박 나흘을 매달려 일하느라 몸 여기저기가 비명을 질렀음은 물론이요, 마지막 고대어 번역은 창피할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산더미 같은 일감을 기한 내에 해치운 엘리아를 좋게 봐준 학술원에서 제값을 치러 주어, 무사히 네 장의 표를 구할 수 있었다.
<아가씨…… 저 안 가도 돼요. 정말로요. 이러다 쓰러지시겠어요.>
<그래. 우리 안 가도 되니까 그냥 표 두 장만 딱 구해서 가라니까? 어차피 남녀 사이에 끼어서 눈치만 보게 될 텐데.>
데이지와 외젠이 직접 돈을 벌어 표를 마련하겠다는 엘리아를 만류하려 했다. 엘리아는 이틀째 되는 날에는 펜을 쥐는 손가락이 너무 아파서 마음이 흔들렸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에드문트가 동행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만큼, 엘리아는 데이지와 외젠도 함께해 주길 바랐으니까.
<다 같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내 욕심이잖아. 게다가 에드문트가 준 표까지 팔아 버렸는걸? 공작가의 가신들이 고생해서 구했을 텐데, 내가 맘대로 팔았다는 걸 알면 서운할 거야. 이렇게라도 해야 참작이 되지.>
잠시 쉬는 엘리아의 손을 꾹꾹 눌러 풀어 주던 데이지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격했다.
궂은일 한번 안 한 손으로 돈을 벌어 제 몫까지 챙겨 주었으니, 데이지는 백작가에 남아 두 남매와 함께 고생한 시간을 모두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 * *
엘리아는 나란히 둔 네 장의 표를 잠시 감상하다가, 데이지를 불러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공작님께서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정말 에디가 좋아하려나?”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아가씨께서 쉬운 길 고르지 않고, 정성 쏟아 구한 선물이잖아요. 혹시 제대로 기뻐하지 않으시면 저한테 꼭 알려 주세요. 복수해 드릴게요.”
“에디는 공작인데. 어떻게 복수하려고?”
“아주 치졸하고 구질구질해서 남들한테 당했다고 하소연도 못 하고 속만 끓이게 해 드려야죠. 너무 끔찍해서 저도 웬만하면 하고 싶지 않은 방법으로요.”
“나도. 만약에 에디가 가기 싫다고 하거나 막, 그러면. 복수해야지. 아주 치졸하고 구질구질하게.”
“어떻게 하실 건데요?”
“공작가 저택 앞에 누워서 에디 이름 외치면서 울 거야. 엄청 서럽게. 다들 내 꼴 보고 망측한 소문 만들어서 퍼트리게.”
“음. 아가씨 방법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놓아야 할 것 같아요. 복수는 자신이 희생하지 않고도 상대를 무너뜨려야 하는 법이라고요. 그러니까 혹시나, 아주 혹시나 복수할 일 있으면 우선 제 방법을 쓰기로 해요.”
엘리아는 데이지의 복수법이란 게 뭘지 궁금했지만, 그는 ‘모르시는 편이 나을 거예요.’라며 끝까지 알려 주지 않았다.
데이지 고집에 조른다고 알려 줄 것 같지도 않아서, 엘리아는 대신 에드문트의 몫의 초대장을 보낼 방법을 생각했다.
‘일단 편지를 쓰고……. 최대한 빨리 보내 주고 싶은데. 어떻게 보내야 제일 일찍 도착하고, 돈도 적게 들려나.’
에드문트에게 빨리 자신이 구한 초대권을 보여 주고 싶긴 했지만, 며칠 잠 못 자서 초췌한 꼴로 공작가에 찾아간다든지, 한 시간은 꼬박 필사해야 벌 수 있는 돈을 써서 편지를 보내는 낭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고심한 엘리아는 직접 만든 봉투에 편지 한 통과 초대권을 넣어 저택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밖에 나갔더니 햇빛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테오 경, 나 부탁이 있는데.”
“예, 아가씨. 어디 외출하시려고요?”
“아니, 있잖아. 우리 저택에…… 공작가의 호위 인력들 있잖아. 상주하는 사람들 있지? 혹시 한 명만 불러 줄 수 있어?”
“공작가 호위를요?”
뜬금없는 아가씨의 부탁에 테오 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순순히 공작가의 사람 한 명을 불러 주었다.
잠시 후 적갈색 머리를 높이 묶은 기사가 엘리아를 찾아왔다.
“라스페 공작가의 기사 메리 틀르주입니다.”
엘리아는 요즘 연애에 푹 빠져 있는 2층 사용인과 동명인 기사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막상 사람들 앞에 꺼내어 보이니 살짝 비뚤게 붙은 봉투가 괜스레 부끄러웠다. 남들은 신경도 쓰지 않을 걸 알면서도 말이다.
“이거, 괜찮으면 그…… 라스페 공작께 전해 줄래요? 되도록 오늘…… 혹시 일이 너무 바쁘면…….”
“잠시 뒤에 교대 시간에 맞춰 공작가로 돌아가는 인원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봉투만 전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혹시 따로 전하실 말이 있으시면 함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제안에 엘리아는 기사들을 세워 둔 채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전할 말? 뭐라고 전해야 하지? 부담 갖지 말라고? 아니, 부담 가지란 소리로 들릴 텐데. 꼭 오라는 말도 강요로 들릴 테고…….’
당장 준비한 말은 없는데, 그렇다고 에드문트가 ‘따로 전하신 말은 없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해가 살짝 더 기울어질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엘리아가 용기 내 전한 말은…….
“아! 그, 공작님께 전해 줘요. 그러니까, 제가 ‘따듯한 꿈 꾸길 바란다.’라고 인사 전한다고요.”
채 전하지 못했던 인사.
보내지 못해 내내 품고 있느라 더 따듯해지고, 간절해진.
남자를 위한 기도였다.
* * *
발갛게 물든 얼굴로 보낸 엘리아의 전언은 몇 시간 뒤 공작가에 도착했다. 봄바람을 닮은 연두색의 봉투와 함께.
“월요일 일정을 모두 조정하겠습니다. 베르디에가에도 연락 넣어 월요일 공연에 각별히 신경 쓰라고 지시하고…….”
집무실에서 함께 엘리아가 보낸 소식을 전해 들은 한스가 에드문트가 명하지 않은, 그러나 그가 지시해야 마땅한 명령을 읊었다.
“좌석은 굳이 바꾸시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가씨께서 직접 구하신 표이니까요. 만약 벨젠 경께서 호위에 지장 있다고 투덜대거든, 까짓것 앞줄 전부 비워 버리면 되지요.”
에드문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가겠다, 그래도 가지 않겠다.’ 그런 말 없이, 오직 손에 들린 편지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한스는 그가 편지는 한 글자도 읽지 못하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저 제게 찾아온 약혼자의 말을 머릿속에서 읊조려 보느라.
그래서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으리라.
한스는 그 당황과 침묵을 승낙으로 받아들이고는,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만 남긴 채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에드문트는 홀로 생각해야 했다. 이해가 되질 않았고,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어째서. 어째서였을까.
‘전부 나를 위해서였을 뿐인데.’
엘리아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어,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를 시킬 생각이었다.
튀링겐 자작가가 황후의 권력을 등에 업고 벌여 온 파렴치한 일들을 우연인 척 보여 주면서, 공작가의 잔혹한 복수를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미리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한데 제게 돌아온 건, 자신을 위해 준비했다는 선물.
그리고 편지 한 통.
<에디. 약속한 화요일이 오기 전에, 우리가 한 번 더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 공연 재미있을 것 같아. 바쁘지 않다면 꼭 와 줘.>
다정한 인사말까지.
<따듯한 꿈 꾸길 바란다, 그렇게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만나고 싶다는,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해 본 적 없었던 말이었다.
그날, 따뜻한 꿈을 꾸지는 못했다. 비록 상냥한 인사말을 전해 받고도 잠들지조차 못했으나…….
괜찮았다. 정말로 괜찮았다.
에드문트는 그저 꾹꾹 눌러쓴 편지를 바라보고, 손으로 가끔 쓸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잠들지 못한 채로 내일이 와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너는 따듯하기를.’
하나 여자에게만큼은 따뜻한 꿈이 찾아가기를 바랐다. 월요일까지, 아니 오래도록.
하루도 춥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 * *
펜을 들어 처음으로 자신의 글을 적은 여자가.
여자가 뒤바꾼 책의 첫 장을 펼친 남자가.
같은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두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으로 다가올, 약속된 만남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