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모르는 이야기 2
17. 답장
다음 날, 외젠은 엘리아가 부탁한 대로 봉투를 챙겨 황궁에 있는 라스페 공작의 집무실을 찾았다.
잠시 봉투만 전하고 올 생각이라 약속 없이 들렀더니, 에드문트는 어딜 가고 그의 보좌관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로앙 백작님, 어쩐 일이십니까?”
“아, 한스 경. 라스페 공작께서는 부재중이신가?”
“오늘은 외부 일정이 없으셔서 저택에 계십니다. 저는 외교부에서 받아야 할 서류가 있어 잠시 들렀습니다.”
“그렇군. 다름이 아니라. 이거, 라스페 공작께서 내 누이에게 전해 주셨던 서류이네.”
“아, 극단 인수 보고서 말씀이시지요. 알고 있습니다. 이틀 전에 전해 드린 거로 아는데 벌써 읽으셨나 봅니다.”
“내 누이가 이런 일에는 꽤 재주가 있어서.”
집 안에서는 유치하게 아옹다옹하는 사이이지만, 그래도 남들 앞에서 흉보는 것보다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 정도로 빨리 보고서를 읽고 빡빡한 의견서를 쓰는 수준인데, 자랑할 만하지 않겠어?’
그러나 한스는 겨우 학술원을 졸업한 나이인 엘리아가 뭐 대단한 걸 써 왔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보고서에 녹인 라스페 공작의 의도를 조금이라도 눈치채 주면 좋겠지만…….
‘겨우 보고서에 슬쩍 비친 내용만 보고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뭐, 어차피 공작님도 거기까지 바라시는 건 아닐 테고.’
한스는 묵직한 봉투 안 내용보다는 전보다 알록달록해진 겉표지에 관심을 보였다.
‘뭐랄까. 되바라졌다고 해야 할지. 깜찍하다고 해야 할지. 봉투에 이렇게나 정성 들여 그림을 그려 돌려줄 줄이야. 이 허연 건 뭐지? 돼지인가. 하얀 돼지라니, 상상력이 풍부하신가 보네.’
붓을 쥐어 본 적은 없지만, 공작가 저택이며 황궁이며 값비싼 그림 천지였으니 한스도 나름 안목을 갖고 있었다.
‘전문가 솜씨라고 하기엔 너무 어설프니까, 아가씨가 직접 그려 넣은 거겠지. 뭐. 약혼자끼리 주고받는 선물인데 실력이 중요하겠어?’
붓놀림은 조야했으나, 봉투를 가득 채운 꽃이며 정체 모를 짐승들은 제법 귀여운 맛이 있었다.
“봉투가 화려해져서 돌아왔군요. 아가씨 솜씨인가 봅니다.”
“음. 제 딴에 뭐라도 선물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그 애가 워낙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아! 그, 그 하얀 건, 토끼라고 꼭 좀 말씀드리게.”
“예? 토끼도 숨어 있었던가요?”
“그 아래에 하얀 게 토끼인데…….”
외젠은 제가 그린 것도 아닌데 창피해 숨고 싶은 지경이었다. 필시 보좌관도 봉투를 보자마자 ‘웬 돼지 두 마리인가.’ 싶었을 게 분명할 테니까.
왜 하필이면 토끼를 그려서는. 차라리 저 닮은 멧돼지나 그리면 좋았을 텐데.
“엘리가 처음 그려 보는 거라 아직 손에 안 익어서……. 그래서 오해 살까 봐 말씀드리는 걸세.”
“그렇군요. 꼭 토끼 두 마리라고 전해 드리겠습니다. 공작님께서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전에 아가씨께서 선물해 주신 그림도 자주 살피시니까요.”
“아 그런가? 엘리아가 들으면 무척 기뻐하겠어. 선물하기 전에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음. 라스페 공작께서는 별일 없으시고?”
어색하게 이어지던 대화를 끝낼 요량으로, 외젠이 뻔한 안부 인사를 물었다.
이제 보좌관 한스가 ‘잘 지내십니다, 봉투는 잘 전달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 후 헤어질 일만 남아 있었다.
“…….”
한데, 외젠이 예상했던 대답이 나오기는커녕 한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어디 보자. 백작께 뭐라 대답을 해야 제일 효과적이려나?’
사실 한스가 보기에 에드문트 라스페는 절대로 잘 지내고 있지 않았다. 서점에서 ‘우연히’ 약혼자를 마주친 후, 공작은 정말로 이상해지고 말았으니까.
갑자기 로앙 백작을 불러 식사를 하더니 약속도 않고 약혼자를 찾아갔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며칠 밤을 새워도 멀쩡해 보이던 인간이, 피곤해 보이는 건 진짜 처음이었단 말이야.’
대부분의, 아니 한스와 공작가의 집사를 제외한 모두는 라스페 공작의 이상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명령을 내릴 때를 제외하고는 입을 열지 않으며, 늘 조각처럼 무표정을 유지하는 무생물 같은 존재였으니까. 일 처리 역시 여느 때와 다르지 않고, 어디 불편해 보이는 기색도 없었으니까.
자칭 신이 내려준 관찰력이 없었더라면, 아마 한스조차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피곤해 보이는 거 말고도 또 수상한 게 있었지. 요사이 검 만지신 일도 없는데 상처에 바르는 약품 냄새가 희미하게 나질 않나, 왼팔을 움직이는 것도 살짝 부자연스러우셨고.’
그리고 제일 섬뜩했던 건, 어느 날부터 저택을 가득 채운 거울 장식이었다.
<아니, 요즘 귀족가에 거울 주렁주렁 달아 두는 게 유행인가?>
<저희도 잘은 모르겠지만 집사님께서 사들이셨다던데요.>
심지어 거울 자랑이라도 하려는 건지 멀쩡한 거울이 다음 날이 되면 새로 교체되어 있기도 했다.
결국, 한스는 집사를 붙들고 한참 추궁한 끝에 전모를 알아냈다.
<……거울이 없으면 불안하신 모양입니다.>
<불, 뭐요? 공작님이 불안해하신다고요?>
<밤에, 잠을 못 주무시고…… 식사는 최소한만 하십니다. 원체 잘 챙기지 않으셨는데 요즘은 더 심해지시는 바람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럼 혹시 왼팔도, 그것도 뭐가 있었던 겁니까? 혹시 호위에 실패한 겁니까?>
<아닙니다. 그게, 공작께서 밤에 악몽을 꾸셨는지…….>
자해했다니.
1주일에 한 번꼴로 들이닥치는 암살 위협에도 상처 한번 입은 적 없었으면서.
한스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스스로 검을 들어 살을 가르고, 고통을 퍼붓고야 말게 하는 감정이란 대체 어떤 지경일지.
‘뭐……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라고. 그는 잘났지만, 어리잖아. 이제 겨우 스물둘이지. 그럼 선대 공작 부부가 죽었을 때가 열둘? 제기랄.’
제가 열둘에 어떻게 살았던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부모를 졸랐고, 학술원에서 귀족들에게 치여 사는 게 힘들다며 징징대기 일쑤였는데.
열둘, 고작 그 나이에 공작가를 홀로 짊어져야 했을 때 그는 어떻게 버텼던 걸까.
‘가족도 하나 없었던 거 아냐. 사촌인 벨레노아 백작도 영지로 피신해야 했으니까. 빌어먹을 만치 조용한 저택에서…… 여태 혼자서.’
한스는 제 주제에 공작으로 태어난 에드문트 라스페를 아낌없이 동정했다.
다시 태어날 기회를 얻는다면, 한스는 그의 외양을 닮게 태어나게 해 달라 빌지언정 그의 권력을 탐내지는 않으리라.
그처럼 외롭고 버거운 삶을, 버텨 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니까.
‘그래도 여태 잘 버텼으면서. 갑자기 자다 일어나서 제 몸에 칼을 꽂아 넣고, 거울 없이는 제정신으로 돌아오지도 못한다고?’
대체 무엇이 그를 갑작스럽게 미치게 한 걸까?
‘후우. 뻔하지. 사랑이지. 그 공작이 사랑을 하더니, 기어코 사람 감정을 배우고 만 거겠지.’
며칠 전 공작가 집무실에서 목격한 에드문트의 모습이 결정적인 증거였다.
눈썹 찌푸리는 것 한번 제대로 본 적이 없었건만. 넋을 놓고 푸른 꽃을 바라보던 공작의 얼굴이 어떻던가. 어떤 꼴이던가.
‘생살이 짓이겨지고, 팔다리를 잡아 뜯기고. 그런 고통을 한데 뭉쳐서 잘생긴 얼굴에 밀어 넣은 것 같았단 말이지. 그게 사랑에 아파하는 게 아니고 무어냔 말이야.’
한스는 슬쩍 시선을 내려 푸른색 봉투를 바라보았다. 공작이 부재중인 집무실에서, 그는 봉투를 에드문트 삼아 물어보고자 했다.
‘공작님. 대체 왜 그 얼굴에, 그 권력까지 가졌으면서 뭘 혼자 끙끙 앓기만 하십니까? 대충 ‘보고 싶다’, ‘좋아한다’ 그런 듣기 좋은 말 몇 번 속살거려 주면 바로 넘어올 텐데요.’
설마, 에드문트가 근래 불안증을 앓는 이유가 서점 주인 때문이려나? 그 희끄무레하게 생긴 놈은 공작에게 한 입 거리도 안 되어 보이던데.
‘약혼자분께서 서점 주인에게 관심 있는 눈치도 전혀 아니었고. 어휴. 관심이 있으면 안 되지. 아주 파국도 그런 파국이 없을 텐데.’
봉투를 향해 답 없는 질문을 쏘아붙이던 한스는 그의 절반을 구성하는 오지랖이 요동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공작가의 봉투에 한스가 작성한 보고서 한 부나 넣어서 보내고는 만족하게 내버려 두는 것 또한 두고만 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처음 하는 사랑이라도 그렇지. 보고서만 달랑 보내는 게 웬 말인가! 열 살짜리끼리 하는 연애질도 이 정도는 아니리라.
‘내가 좀, 으흠. 도와 드려야 하지 않겠어? 설마 쓸데없는 짓 했다고 날 죽여 버리진 않을 거 아냐. 암. 죽지만 않으면 되지. 게다가 가만히 있다가는 내가 화병으로 죽겠거든?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하여, 공작의 충성스러운 보좌관 한스 마이어는 외젠이 에드문트의 안부를 묻자마자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짓고는 ‘이건, 정말 비밀인데…….’라는 화두를 꺼내었다.
“요즘 통, 주무시질 못하시는 것 같아서 걱정이 많습니다. 무슨 고민거리가 있으신지…….”
“고민이 있으신 것 같다고?”
“예, 어디 마음 털어놓을 만한 분이라도 있으셨으면 좋을 텐데요. 외로우신 분이 아닙니까.”
“……그렇지.”
마음씨 좋은 로앙 백작이 한스의 낚시질에 곧장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봉투를 건네받으면서 ‘두렵다.’라는 마음을 드러냈던 라스페 공작의 얼굴이 떠올라 걱정이 든 탓이었다.
“엘리아 님께서 주신 선물은 제가 잘 전달하겠습니다. 공작님이 기뻐하실 생각을 하니 한시라도 빨리 가져다 드리고 싶군요.”
“아, 그러게. 부디 공작께서 불편한 곳 없으시도록 잘 보좌해 드리고.”
“예, 물론입니다.”
공작가의 집무실을 떠나는 로앙 백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스는 확신했다.
로앙 백작은 저택에 돌아가는 대로 공작의 약혼자에게 ‘듣자 하니, 라스페 공작이 요즘 고민 탓에 잠을 못 잔다는 것 같다더라.’라고 전해 주리라.
‘그 아가씨가 어디 보통이던가? 봉투에 예쁘게 그림까지 그려서 보내 주신 분인데. 걱정을 안 하실 리가 없지. 고민 때문에 잠 못 든단 소식 들으면 어떻게 반응하실까 기대되는걸.’
한스는 주인 없는 책상 위에 올려 둔 푸른 봉투를 바라보았다.
외롭게 서 있는 푸른 사슴 주변을 꼼꼼히 에워싼 주홍빛 꽃은 마치 사슴이 토해 낸 피처럼 보이다가도, 또 어떻게 보면 겨울을 녹여 보려 불붙여 둔 들판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렴 뭐 어떤가. 핏물이든, 불길이든. 라스페 공작은 식은 자신의 마음을 풀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사양하지 않을 텐데.
엘리아 로앙이 전해 주는 것이라면, 피를 토하게 할 독이라도 아낌없이 삼키고 말리라.
‘근데 이게 토끼라고? 돼지 아니었어? 이렇게 생긴 토끼가 있는 건가. 아님 내가 아는 토끼를 아가씨가 이렇게 만들고 만 걸까.’
다리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하얀 솜뭉치 두 마리는, 공작가에 도착한 뒤에야 조금은 토끼 같아 보이더라.
* * *
“…….”
알록달록해진 푸른 봉투를 전해 받은 에드문트의 반응은, 한스가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봉투를 손에 쥔 채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에드문트의 모습은, 마치 아무도 없는 집무실에서 홀로 푸른색의 그림을 응시하던 때와 꼭 닮아 있었다.
온몸에 밀랍을 발라 굳혀 놓은 것만 같았다. 그래, 마치 시체처럼 말이다.
“……엘리아가, 그렸다고?”
“예, 아가씨께서 직접, 그리셨다고 합니다. 아! 여기 밑에 하얀 애들 둘은 토끼라더군요. 로앙 백작께서 꼭 토끼를 그린 거라 전해 달라고 부탁하시더군요.”
한스는 친절하게도 봉투의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었다.
“여기, 이 위쪽에 귀를 계속 보고 있으면 토끼 같아 보이긴 하던데요.”
좀 웃으시라고 한 말이었건만. 공작의 얼굴은 도통 풀어질 줄을 몰랐다.
‘토끼고 나발이고, 붓 들고 그림 그린 사람 생각하느라고 정신 못 차리시는 거겠지.’
저 잘난 낯짝만 아니었다면, 아마 참으로 한심해 보였을 텐데. 겨우 그림 하나에 넋을 놓아 버린 공작의 얼굴은 참으로 조각 같기만 했다.
한참 기다린 끝에, 공작이 겨우 봉투 겉면을 살피는 걸 그만두고는 안에 든 서류 두 부를 꺼냈다.
하나는 공작의 명령에 따라 한스가 작성했던 보고서였고, 다른 하나는 엘리아가 사각거렸을 의견서였는데 보고서 못지않게 두꺼웠다.
당장은 읽을 생각이 없는지, 공작은 꺼내 든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공작이 봉투 안까지 확인했으니, 이제 남은 건 한스의 넘치는 오지랖을 보이는 것뿐이었다.
“답례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며칠 만에 저렇게 두꺼운 의견서에, 봉투에 그림까지 그려 보내 주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오면서 몇 가지 후보를 생각해 보았는데 말입니다.”
공작이 고개를 살짝 들어 한스를 바라보았다. 들어 줄 테니 ‘계속 이야기해 봐.’라는 의미였다.
에드문트는 그런 간단한 말조차 입으로 지껄이는 법이 없었다. 그저 아랫것들이 알아서 눈치를 보고 입을 열든가 다물든가 알아서 해야 했다.
‘설마 약혼자한테도 저러시려나?’
모르겠다. 두 분이 대화하는 걸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있나.
“공연 관련해서 보고서 자문도 구했으니, 함께 공연을 관람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요즘 공연들이, 보석값 저리 가라 할 만큼 푯값이 상상을 초월하더군요.”
한스가 머리를 쥐어짜 낸 끝에 떠올린 선물은, 바로 공연 관람이었다. 우연한 만남의 뒤에 약속된 일정이 뒤따라야 함은 당연하지 않은가.
“적당한 걸 찾아봤는데, 이번 주말부터 베르디에가 소유의 극장에서 하는 공연이 괜찮겠더군요. 남부 공국에서 지난해에 석 달 치 공연을 전부 매진시킨 극작가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번 작품도 모두 매진이고요.”
어차피 공작이 원한다면 당장 내일 새 공연 일정을 편성하는 것도 가능할 테니, 매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스는 최근 공작에게 올린 서류 중, 남부 공국 출신의 극작가에 대한 조사 보고서까지 찾아 공작의 앞에 꺼내 주었다.
보고서 첫 장을 넘기자, 화가가 그린 극작가 트루아 파앵의 초상화가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었다.
곱게 땋은 머리칼, 40대로는 보이지 않는 앳된 얼굴.
그는 4년 후, 수도 상점가에서 구입한 오르골 두 개로 극단 배우에게 청혼할 예정이었던 극작가였다.
이제는 귀에 익은, 하나 결코 만난 적 없는 극작가의 초상화 앞에서 에드문트는 과거이자 미래를 생각했다.
또한, 과거이자 그의 현재를 생각했다. 그의 이전 생에서 남부 출신의 극작가 트루아 파앵은 그저 신문 한편에 존재하는 이름일 뿐이었다.
‘이맘때쯤 수도에서 초연작을 올렸을 줄은 몰랐군.’
그가 트루아 파앵을 알게 된 건, 오르골이라는 꽤 검소한 청혼 선물로 유명해진 뒤였다. 당연히 그 이전의 행적에는 무지했다.
예정되었던 과거가 반복되었나.
아니면, 전에 없던 다른 현실이 그를 찾아왔는가.
“한스.”
“예, 공작님.”
“벨젠 경과 함께 베르디에가에서 공연을 올릴 극장을 확인하도록.”
“알겠습니다. 공연 내용과 호위에도 문제가 없도록 미리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표는 세 장, 초대 손님 확인해서 3황자 세력과 겹치는 일 없도록.”
“예, 베르디에 자작가이니 그 점에서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세 장이라면 동행하실 다른 한 분은 누구이신지요?”
한스는 대체 어떤 운수 없는 새끼가 남녀 사이에 끼어 공연 관람에 동행할지 궁금하였다. 설마 그게 저는 아니기를 바라며.
‘오. 어쩌면, 서점 주인을 초대할 생각이실지도. 그럼 거의 막장 소설급 전개인데. 풋사랑에 빠진 소년, 어느 날 푸른색 초대장을 받아 공연장을 찾았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다름 아닌 사랑스러운 금발의 소녀와, 소녀의 약혼자……!’
마침 최근 치정 사건을 다룬 소설을 탐독 중이던 한스가 감히 공작을 두고 공상을 펼쳤다.
‘검 없이 사람 찔러 죽여 버리기엔 더없이 좋은 방법이잖아? 아니지. 그 철부지 도련님이 미쳐서 검을 뽑아 들면…….’
살짝 흥분한 한스가 머릿속에서 공작과 서점 꼬맹이가 칼부림을 벌이는 광경을 상상하는 차에, 에드문트가 극작가의 보고서를 닫음으로써 한스의 상상력을 끊어 냈다.
“로앙 백작과 엘리아, 그리고 그의 유모가 동행할 거다.”
“예? 예에?”
“내일 저녁까지 보낼 수 있도록 준비해.”
제 할 말을 마친 공작이 자리에 앉아 엘리아가 보낸 서류를 집어 들었다.
축객령을 내린 것과 다름없는 행동에 한스가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지금 당장 베르디에 자작가에 쳐들어가서, 공연 확인하고 싶으니 올리라고 하고…… 그사이에 공연장에서 벨젠 경이랑 호위 계획까지 짜야겠네. 젠장. 오늘 안에 가능은 하려나?’
아무리 계산해 봐도 밤을 새워야 간신히 내일 끝날 듯했다. 그러니 공작의 명령이 마음에 안 든다고 투정 부릴 시간조차 아까웠다.
‘근데, 아니. 그렇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극작가가 마음에 안 드나? 아니, 그러면 다른 공연을 찾아보라고 했어야지. 베르디에 자작가와 악연이 있나? 그럴 리가!’
베르디에 자작 부부가 공작을 흠모해서 아주 벌벌 기는 건 제 고양이도 알 정도로 유명한 사실이었다.
‘왜. 도대체 왜 함께 오붓하게 공연 보러 갈 기회를 거부하는 거냐고! 부끄럽나? 이제 와서 부끄럽다고?’
한스는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 얼굴 붉히는’ 에드문트의 모습을 상상하는 바람에 제 팔을 쥐어뜯어야 했다.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었다.
‘아, 왜! 그럼 대체 왜! 내가 떠먹여 줘도 받아 드시질 않냐고!’
공작의 답답한 행동에 한스는 당장 거품 물고 죽어 버릴 것 같은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는 게 그의 업무인 것을. 오지랖 떨 생각에 들떴던 마음은 전부 푹 꺼져 버려, 한스는 터덜터덜 벨젠 경을 찾아 복도를 걸었다.
* * *
바쁜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한스는 에드문트가 예상한 것보다 세 시간 정도 빨리 집무실을 찾아왔다.
손에 들린 건, 에드문트의 명령대로 주말 날짜로 구한 공연 표 석 장이었다.
‘어휴. 베르디에 자작은 칸막이 석도 못 만들 예산이면 애초에 극장을 짓지를 말았어야지. 그것만 아니었어도 점심 먹기도 전에 일 다 끝냈을 텐데.’
조막만 한 베르디에가 극장에는 귀족들이 으레 이용하는 박스석조차 없어, 대신 1층 좌석을 전부 새로 배치해 로앙가 사람들을 위한 관람석을 따로 마련하도록 했다.
‘권력이 좋긴 해. 남의 극장도 눈치 안 보고 전부 다 뜯어고칠 수도 있고.’
게다가 중요한 손님 모실 계획이라며 공작가에서 아낌없이 돈을 퍼부은 덕에 고작 반나절 만에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공연명이 바뀌었군.”
표 한 장을 들어 살핀 에드문트가 아는 척을 했다. 그가 어제 들었던 공연명은 분명 훨씬 담백하고 짧았는데. 새 공연명을 보아하니, 누가 고집을 부려 바꿨을지 짐작이 갔다.
“공연 내용이 제목과는 다르게 우울하지만은 않더군요. 한데 어린 아가씨께서 공연명만 보시곤 지레 놀라실까 걱정이 되어서 제가, 크흠. 재능을 좀 발휘했습니다.”
당연히 원작자도 제목을 바꾸는 데에 동의했다.
<공작님께서 자네 행적에 관심을 두고 있으신데, 참견을 좀 하자면 공작님의 가장 오래된 보좌관인 내가 보기엔 ‘죽음, 그리고 다음 날’이라는 공연명은 취향에 안 맞으실 것 같군.>
<취향에 안 맞는다고 하심은…….>
<조금 수정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거지. 이를테면 말이야…….>
공작의 취향이라는 말을 들먹이는 한스 앞에서, 원작자가 제목 변경을 거부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심지어 극작가 트루아 파앵은 한스가 제목 변경을 제안하기 직전 공작가에게서 상당한 금액을 후원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런 강요 아닌 강요였으나, 어쨌건 동의를 받아 내긴 했다.
“이번 금요일이 첫 공연이고, 엘리아 아가씨께서는 일요일 공연을 보실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그래.”
에드문트는 화려하게 꾸민 연극 표 한 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한스에게 밀어 주었다.
한스에게 되돌아온 표가 금박을 입힌 봉투 안에 차곡차곡 들어갔다. 안주머니에 봉투를 잘 챙겨 넣은 뒤, 그는 제게 완전히 관심을 떼어 낸 공작을 바라보았다.
‘어제보다 훨씬 상태가 좋아 보이시는걸.’
표정이 없기로는 어제나 오늘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멀쩡해졌다고 하긴 어려웠고, 아픔이 조금 가신 병자의 모습 정도는 되었다.
집사에게 간밤에는 공작께서 어때 보이셨냐고 물어보면, 아마 전보다는 훨씬 좋아졌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으리라.
‘겨우 봉투 하나 전해 받는 거로 괜찮아질 거였으면 진작 연락을 하시든가, 찾아가시든가. 아가씨께선 딱히 싫어하시지도 않을 텐데. 싫다면 왜 잘 그리지도 못하면서 그림까지 그려 보냈겠어?’
모로 보나 공작이 다가가도 거절당할 리 없는 상황인데.
한스가 정말 잘릴 각오를 하고 ‘정말 안 가시렵니까?’라고 재차 물었으나, 라스페 공작은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이유를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아마 제 약혼자가 기꺼워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사랑에 빠지면 멍청해진다더니. 라스페 공작에게까지 적용되는 말인 줄이야.’
책상 위에 얌전히 놓인 푸른색 봉투며 동글동글한 글씨로 작성된 서류가 참으로 아까웠다. 아까워서 미칠 것 같았다.
한스는 어차피 미쳐 버릴 거면 차라리 할 말은 하고 미쳐 버리기로 했다.
“공작님, 편지라도 한 통 쓰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감정이니 하는 것들을 전부 다 꺼멓게 삭힌 눈동자가 한스를 향해 왔다.
그는 이제 제가 되바라진 말을 지껄인다 해도 목이 달아나지는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나 아는 것과 실지 마음은 다르기 마련이니. 에드문트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볼 때마다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본능이지 않은가.
그래도 한스 마이어, 겁이 나도 할 말은 하고 까무러치고 말리라.
“그, 제가 어쩌고저쩌고 떠드는 것보다 편지로라도 안부 인사 묻는 쪽을 훨씬 기뻐하실 겁니다. 공작님께선 이깟 공연 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선물을 받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에드문트는, 한스가 ‘선물’이라고 칭하는 것이 단순히 그가 받은 봉투와 서류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여자에게 위안 받지 않았던가.
약혼자가 전한 마음이, 푸른 사슴 주변에 피어 준 꽃이…… 남자의 두려움을 거짓말처럼 멈추게 하지 않았던가.
고작 하루였지만 에드문트는 엘리아에게 봉투를 돌려받은 어제, 악몽을 꾸지 않았다.
<에드문트.>
대신 말간 얼굴의, 열여덟인지 스물여덟인지 좀체 모를 여자가 제 이름을 불러 주는 꿈을 꾸었다.
그립고, 아득하고, 간절했으나.
적어도 그를 떠나가진 않았으니 괜찮았다.
“그냥 한 줄이면 됩니다. 재미있는 관람이 되길 바란다든가, 선물 잘 받아서 답례 전한다든가. 그런 말 있잖습니까. 평범한 연인 사이에서 그 정도 인사야 얼마든지 주고받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내키신다면 조금 더 길게…….”
평범함. 에드문트는 보좌관의 입에서 나온 단어를 두고 어색함을 느꼈다.
스스로 살갗을 찢게 만들고, 고통을 안겨 주는 게 그의 사랑이었으나.
‘적어도, 타인의 눈에는 보통 사랑이 될 여지가 있다는 걸까.’
희망을 품게 했다. 자꾸만.
<다음에, 또 갑자기 만나는 것보다 차라리 약속을 잡는 게…….>
평범함을 바라고야 말게 했다. 어린 약혼자가 제게 선물한 약속처럼.
“한스.”
“옙, 죄송합니다. 저는 그럼 로앙가에 선물 전해 드리고 오겠습니다.”
이름이 불린 한스가 곧장 고개를 숙이고 납죽 엎드렸다. 오지랖 부리다가 기어코 선을 넘었는가 생각했다. 그럼 포기하고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었다.
더 깝죽거렸다가는 이 순간이 제가 누릴 수 있는 마지막이 될지도 몰랐으니까.
‘남의 연애에 끼어서 좋을 거 하나 없다더니. 역시 옛말은 틀린 거 하나 없다니까. 앞으로는 내가, 내가 주접떨며 참견 하나 봐라.’
깔끔한 사과와 자기반성까지 마친 한스가 인사를 올리고 뒤를 돌려 할 때였다.
에드문트의 책상 위에, 무언가 탁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한스는 제가 혹시 공연 표를 제대로 챙기지 않았는가 싶어 황급히 몸을 돌렸다.
한데, 라스페 공작이 책상에 올린 건…….
“이걸, 언제 준비하셨습니까?”
편지 봉투였다.
푸른색 봉투에, 평상시 쓰는 은색 밀랍 대신 진한 주홍색과 옅은 노란색을 섞은 알록달록한 밀랍으로 봉인까지 마친.
‘편지라니. 세상에. 와, 세상에.’
갑자기 등장한 편지 한 통에 한스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미리 준비하셨으면서 제가 편지 운운하는 걸 모른 척 듣고 계셨다니, 이런 면도 있으실 줄이야!
“자네가 거들먹거리며 내게 했던 충고가 꽤 도움이 되더군.”
에드문트는 아직 이마에 주름 하나 없이 창창한 모습의 한스를 바라보았다.
흰머리가 너무 많아졌다면서 ‘공작께서는 어째 나이를 안 먹으시냐.’라고 징징대던 10년 후의 보좌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가 했던 말과 함께.
<공작님, 편지라도 한 통 쓰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제가 저택에 돌아가서 마님께 ‘공작님은 무사히 도착하셨고, 아픈 곳 없으십니다.’라고 지껄이는 것보다 훨씬 기뻐하실 겁니다. 뭐 어려운 일입니까. 그냥, 제가 불러 드릴 테니 그대로 받아 적어라도 주십쇼.>
에드문트는 10여 년 전으로 돌아온 뒤에야, 한스의 제안을 수용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시험해 볼 생각이니, 함께 전해 주도록.”
“예, 제가 지체 없이 로앙가에 전하고 오겠습니다.”
편지를 소중히 품에 넣은 한스가 집무실을 나서 바로 마차를 준비하도록 했다.
4년이었다. 무려 4년 동안 뼈 빠지게 일해서, 처음으로 공작에게 인정받은 날이었다.
그게 제 본래의 업무에서 살짝 벗어난 ‘연애 조언’이었다는 점이 아쉬운 감은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조만간 한스 마이어의 보좌 능력을 인정하는 날도 오지 않겠는가.
그는 적막한 복도를 콧노래로 가득 채우며 저택을 나섰다. 아마 이 커다란 저택에서 제일 신나 있을 사람을 고르라면 단연 한스 마이어이리라.
‘쓰읍. 근데…… 내가 편지를 써 드리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던가?’
아주 사소한 의문이 들긴 했지만, 한스의 기쁜 마음을 막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