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시험
“엘리! 얘는 또 어디 있어?”
서점에서 에드문트를 만난 지 1주일째 되던 날이었다. 황궁에서 돌아온 외젠이 다짜고짜 엘리아부터 찾아 댔다.
‘또 와서 무슨 잔소리를 하려고 저렇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담.’
잠시 후, 서재 문을 열고 들어온 외젠이 바닥을 뒹구는 엘리아를 보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옆에 의자며 소파까지 종류별로 다 갖춰져 있는데, 대체 왜 매번 바닥을 뒹구는 건지 그로선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엘리, 제발 좀! 왜 매번 볼 때마다 그렇게…….”
“바닥에 배 깔고 누워 있냐고? 바로 앉아서 책 읽으면 집중이 안 된다니까. 이렇게 봐야 글씨가 눈에 쏙쏙 들어와. 편하기도 편하고. 이거 봐.”
퍼질러 있던 엘리아가 몸을 반만 일으켜 제가 깔고 누운 쿠션을 보여 주었다.
“데이지가 책 읽을 때 쓰라고 새로 만들어 줬는데, 지인짜 편해. 먼지도 하나도 안 타서 옷도 안 더러워지니까 데이지도 좋고, 나도 좋고. 알았지?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물어봐!”
“내가 진짜 왜 누워서 보는지 궁금해서 물었겠어? 똑바로 앉으라는 거잖아!”
“으휴, 대체 왜 황궁에서 오자마자 다짜고짜 쫓아와서는 잔소리를 하는 거야?”
알았다고 하면 될 걸 엘리아는 반항으로 일갈했고, 다음에 이야기하면 될 일을 그냥 넘기지 못했으니. 두 남매는 얼굴 본 지 겨우 몇 분 만에 싸움을 시작했다.
“네가 매일 그렇게 누워 있는데 잔소리가 안 나오겠어?”
“오빠가 나 맨날 보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너 나중에 공작 부인 돼서도 그렇게 누워서 뒹굴 거야? 어? 그럼 라스페가에서 뭐라 하겠냐고!”
“여, 여기서 그 이야기가 왜 나와!”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하라고!”
“그, 결혼 이야기 같은 거 말고! 다른 거! 결혼 이야기 아닌 거!”
평소 같았으면 ‘그렇게 걱정되면 오빠가 라스페 공작 부인을 하든가!’라면서 쏘아붙였을 엘리아인데. 왜인지 얼굴이 시뻘게져선 우물쭈물하기만 했다.
‘쟤가 웬일이지? 이제 좀 철들 때가 돼서 그런가?’
구시렁대면서도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 하는 모습에, 외젠은 감격하고 말았다. 입 아프게 잔소리한 게 드디어 효과를 보는가 싶어서 말이다.
외젠은 목소리를 누그러뜨린 채 다시 동생을 불렀다.
“엘리.”
“왜. 똑바로 앉았잖아. 잔소리쟁이.”
“나도 잔소리하기 싫으니까 제발 좀 안 하게 해 줘라. 응? 고치려는 연습이라도 좀 해 봐.”
“알았어. 알았다고…… 그래서 왜 온 건데? 황궁에서 오자마자 나한테 잔소리하고 싶어서 쫓아 올라온 건 아닐 거 아냐.”
“……이거. 라스페 공작이 네게 전해 주라고 하더라.”
외젠이 잠시 뜸을 들이다 내민 건, 큼지막한 푸른 봉투였다.
“나한테 주는 거라고? 에디가?”
“또, 또 제멋대로 부르지. 남들 들으면 흉본다. 하다못해 에드문트라고 부르든지.”
“남들 있을 땐 꼬박꼬박 에드문트라고 부른다고. 근데 이거 뭔데?”
외젠이 건넨 봉투에는 공작가의 화려한 인장이 그려져 있었다. 받자마자 열어 보니 꽤 두툼한 두께의 서류가 들어 있었다.
엘리아는 입구를 조금 더 벌려 서류 첫 장을 살펴보았다. 딱딱한 서체로 적힌 제목이 보였다.
“이거 무슨 보고서 같은데?”
“그래. 네가 공작에게 서류 읽는 거 좋아한다고 얘기 들었다면서 가져다주더라.”
외젠의 말에 엘리아는 1주일 전 나눈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서류를 책 삼아 읽는 걸 좋아하긴 좋아하는데. 내가 말했었다고?’
눈썹을 잔뜩 찌푸려 가며 고민한 끝에 떠올린 건, 스쳐 지나가듯 던진 한마디였다.
<일 처리 하다 보면 시시콜콜한 것까지 읽게 되더라고. 은근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아서 시답잖은 책보다 훨씬 더…….>
‘겨우 그 한마디였는데.’
엘리아는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서 봉투만 만지작거렸다. 다행히 외젠은 엘리아가 당황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이번에 라스페가에서 극단 인수 건을 앞두고 작성한 보고서인데, 관심 있으면 읽고 의견 주면 좋겠다고 하던데.”
“뭐? 그냥 읽어 보라고 주는 게 아니라 의견을 달라고 했다고?”
엘리아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외젠의 설명에 몇 번이나 되묻고, 또 되물었다.
“왜? 대체 왜 나한테?”
실은 외젠 역시 학술원 좀 일찍 졸업한 게 전부인 엘리아에게 보고서 자문을 맡기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오늘 낮에 있었던 외젠과 라스페 공작의 대화는, 늘 그렇듯 일방적일 뿐이었으니까.
다만 조금 달랐던 건…….
<로앙 백, 자네 동생을 저택에만 가둬 놓을 생각인가?>
<그건, 엘리 그 아이가 아직…….>
<나는 약혼자를 계속 백치 취급하고 싶지는 않네.>
<백치 취급이라니요. 로앙가는 그저 엘리가 조금이라도 안전하길 바랄 뿐입니다.>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 외출이라지? 그 외에는 익숙한 사용인들과 저택에 틀어박혀 있기만 하고. 그렇게 몇 년이고 살도록 방치할 생각인가?>
라스페 공작의 말은 신랄했으며, 외젠은 달리 변명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방치’라는 말은 더없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외젠은 엘리아가 저택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걸 내버려 두기만 했으니까.
<로앙 백작, 두려운가? 겨우 서류 하나일 뿐인데.>
<……예, 두렵습니다.>
그러니 거절하려고 했다. 엘리아는 아직 어리고, 외젠이 보호해야 할 동생이라는 변명을 덧붙여 가며 공작이 내민 푸른 봉투를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안에 든 게 무엇이든지 주변에서 엘리아를 흔드는 대신, 그저 지금 이대로 살게 하는 편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적어도 다시 무너지는 걸 보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라고 믿었기에.
<나도, 두렵네.>
남자가 자신의 눈동자를 닮아 짙고 무거운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면. 외젠은 엘리아와 자신을 위해 거절했으리라.
하나 결국 외젠은 에드문트가 제게 드러낸 최초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두려움이라니. 그 에드문트 라스페가, 어린 엘리아 로앙을 두고 두려움을 느낀다니.
<두렵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겠지. 복수도, 그리고 내가 갈망하는 미래도.>
엘리아를 향하던 무감한 눈에 언제부터 감정이 스미었던가. 엘리아가 대체 어떻게 그를 약하게 만들었는가.
<엘리아가 조금 더 낯선 세상에 관심을 두길 바라서 준비한 거니 전해 주게.>
그의 속내도, 변화하게 된 계기도 알 수 없었으나 공작을, 믿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푸른 봉투를 옆에 낀 채 저택으로 돌아온 외젠은, 자신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에드문트의 의도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느라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문화 산업이잖아. 문화 산업. 요즘 그 분야는 네 또래 젊은 귀족들 입소문을 타야 흥하니까, 너같이 젊은 사람들 의견을 듣고 싶은 거겠지.”
“에디도 젊은데. 스물둘인데.”
“그야 라스페 공작은…… 아니, 왜 나한테 따지는 거야?”
“따지는 게 아니고 뭐 들은 거 있나 싶어서 물어보는 거잖아.”
“정식 의뢰도 아니고, 그냥 네가 좋아한다니까 읽어나 보라는 의미겠지. 어차피 너도 손해 볼 거 없잖아.”
“……진짜 그냥 참고용으로만 보려고. 그러려고 줬다는 거지?”
“그렇대도. 일단 해 봐. 정 못하겠으면 내가 돌려주고 올 테니까.”
“그래. 뭐, 알았어. 일단 해 볼게.”
“그래. 부담 가지지 말고.”
외젠은 엘리아가 자문 일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듣자마자 추가 질문을 피해 3층으로 도망가 버렸다.
혼자 남은 엘리아는 탁자 위에 푹 엎어져서는 푸른색의 봉투를 바라보았다.
겉면에 그려진 라스페가의 문양은 아름다웠지만, 엘리아는 자꾸 마음이 불편해졌다.
‘대체 왜 상징이 푸른색 사슴인 거야?’
엘리아는 제 마음이 불편한 걸 푸른색 사슴 탓으로 돌렸다. 아름답기는 했지만, 하늘 높이 뻗은 뿔부터 바닥을 디딘 발굽까지 푸른색으로만 채색된 사슴은 너무 차가운 느낌만 주질 않는가.
마치 라스페 공작가의 서늘한 공기를 차곡차곡 겹쳐서 만든 것만 같았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따듯한 느낌이 들면 좋겠는데.’
봉투를 두고 한참 고민하던 엘리아는 서재를 나가 곧장 복도 끝에 있는 화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흥건하게 고여 있던 물감 냄새가 엘리아를 반겼다. 간밤에 비가 내려 환기를 시키지 못한 탓이었다.
묵직한 향에 코를 찡그리며, 엘리아는 빈 삼각대 위에 봉투를 올려 두고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마침 불어온 봄바람은 물감이 튀어 얼룩덜룩한 방 안을 휘감아 달렸다.
“후우…….”
들어온 봄바람에 엘리아의 머리칼이 춤을 추었다. 덕분에 고민으로 눅눅해진 머릿속이 함께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남은 눅눅함까지 한숨에 실어 보낸 뒤, 눈을 감고 청량한 바람이 스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귀에 감기는 바람 소리가, 감은 눈꺼풀 위에 한 장의 수채화를 그려 냈다.
하늘 높은 곳을 스치는 바람은 구름을 닮아 새하얀 색을 뿌렸고, 가장 낮은 땅에 임하는 봄바람이 땅을 닮아 어두운 밤을 흩뿌렸다.
대비되는 두 색채가 어우러져, 마치 누군가의 모습을 뭉그러뜨린 모습이 드러났다.
푸른 하늘에 홀로 높은 구름 같더니, 기꺼이 제가 발 디딜 땅을 내어 줄 줄도 아는 남자와 닮아 보이더라.
화실의 갑갑한 공기가 모두 떠난 뒤 눈을 뜬 엘리아는 다시 창문을 닫아걸고 삼각대 앞으로 돌아왔다.
‘일단 봉투부터 다시 확인해 볼까? 보기엔 괜찮을 것 같던데.’
봉투를 손으로 짚어 보니 겉면에 물감 몇 번 덧칠한다고 찢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미안해요. 이름 모르는 라스페가의 화가님.’
엘리아는 우선 봉투에 라스페가의 푸른 사슴을 그려 넣었을 화가에게 마음속으로 사과를 전했다. 그러곤 1주일 전 구입했던 물감을 아낌없이 팔레트에 덜어 냈다.
여름 초원에서 꺾어 온 녹색. 햇살에 잘 익은 과실을 흉내 낸 붉은색과 밤하늘에 뜬 달을 꾹꾹 눌러 담아낸 노란색.
그리고 달리아, 메리골드, 헬레니움…… 남자가 엘리아의 눈을 볼 때마다 떠올렸다는 가을꽃에서 빌려 온, 주홍색.
아직은 때가 일러 짙게 피지 않은 색을.
* * *
늦은 저녁, 외젠이 일을 마치고 식당으로 내려가니 커다란 식탁에는 겨우 한 사람을 위한 식사만 준비되어 있었다.
“엘리아는 또 저녁 거르겠대? 억지로라도 앉혀 놓으면 먹으니 일단 꼬드겨서 내려오게 하라니까.”
전채 요리를 올리던 톰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엘리아 아가씨는 바쁜 일이 있으셔서 4층에 식사 따로 올려 드렸다고 합니다.”
“바쁘다고? 아, 그 봉투? 참나. 식당에 내려올 시간도 없을 정도로 벌써 집중하고 있단 말이야?”
“네, 도통 붓을 놓지를 않으셔서 데이지 씨가 일일이 챙겨 드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어? 뭐라고? 붓?”
“예, 봉투에 그림 그리시는 거요.”
“봉투에 그림을 그린다고? 무슨 봉투, 대체 왜?”
외젠이 추궁하듯 목소리를 높이자 시중들던 톰이 멈칫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대체 뭔지 감이 오질 않았다.
“공작가에서 일감을 받으셨다고 하셨다던데요? 저는 전해 들은 것뿐이라 자세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일감? 일감을 받았다고 봉투에 그림을 그려? 엘리 이것이, 설마 뭐 사고 칠…… 잠깐 나 좀 올라가 봐야겠다.”
외젠은 식기를 내팽개치고는 황급히 계단을 올랐다. 머릿속에는 공작가 문양 위에 흉한 낙서를 하는 엘리아라든가, 봉투에 커다랗게 ‘반송’이라는 글씨를 쓰고는 공작가에 보내겠다고 고집부릴 엘리아의 모습이 차례차례 스쳐 지나갔다.
모두 외젠의 기준으로는 엘리아가 충분히 저지를 짓이었다.
“어머, 외젠 님. 오늘 벌써 두 번째 올라오시는 거네요. 식사 벌써 마치셨어요?”
“데이지! 엘리, 엘리 어디 갔어? 설마 벌써 보냈어?”
“보내다니요? 아가씨 지금 화실에 계셔요. 식사는 다 하셨고요. 샌드위치를 세 개나 갖고 왔는데 그걸 다 드셨지 뭐예요? 하도 잘 드시길래 저도 모르게 너무 많이 드린 거…… 어디 가세요?”
외젠은 데이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실을 향해 냅다 뛰어갔다.
“엘리! 너 아무리 이해가 안 가도 봉투에 그러면 어떻게 하냐고!”
문을 밀어젖히자마자 한 소리 퍼부었는데, 엘리아의 반응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잔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받아쳤을 텐데.
“엘리?”
등을 보이고 앉아 있던 엘리아가 고개를 돌리자 비스듬히 보인 옆얼굴에, 외젠의 심장이 덜컥 주저앉고 말았다.
‘설마, 눈물…… 울었나?’
등불 너머로 보이는 엘리아의 얼굴은 찌푸린 채였고, 붉은 기가 얼룩덜룩 묻어 있었다.
“엘리아, 왜 그래. 응?”
“……외젠이야?”
문가에서 굳어 있던 외젠은 엘리아의 입이 떨어지고 나서야 화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짧은 사이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봉투 안에 다른 게 있었나? 설마 엘리아를 방치하지 말라는 게 다른 의미였나?’
그의 조급한 움직임에 화구를 가득 쌓아 둔 보관함이 엎어졌다. 값비싼 화구가 바닥을 구르는 소음에 엘리아가 깜짝 놀라자, 외젠의 걸음이 더욱 급해졌다.
“엘리, 무슨 일인데. 나한테 얘기해 봐. 응? 아니면 데이지 불러 줄까? 데이지한테 말할래?”
“뭐? 잠깐, 외젠. 그게 아니고…….”
“말해 봐. 응? 너무 부담스러워서 그랬던 거야? 괜찮아. 내가 가서 이야기할게. 너한테 건네줬다는 말 안 하고 그냥 너한테 보이기도 전에 도로 갖고 왔다고 할 테니까.”
“외젠! 제발 진정 좀 해. 응?”
보다 못한 엘리아가 외젠의 손을 찾아 쥐었다. 서로의 떨림이 만나고 나서야 두 사람의 당혹감이 사그라들었다.
“나 안 울었어. 응? 봐 봐. 얼굴 보이지?”
“너, 그러면 여기 얼굴은 왜 이런 건데.”
“내 얼굴이 뭐가 어떤데? 아, 좀!”
엘리아의 손을 떨쳐 낸 외젠이 곧장 얼굴을 쥐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화를 내려고 했는데…….
외젠이 바닥에 주저앉고 만 게 먼저였다. 힘없이 미끄러지는 오빠를 지탱해 보려 했지만 덩달아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 놀랐잖아. 이거 얼굴, 이것 때문에 너 우는 줄 알고. 대체 그림 그리는데 물감이 왜 얼굴에 묻냐고 너는…….”
엘리아가 그제야 얼굴에 덕지덕지 남은 물감을 깨닫고 지워 보려 했지만, 손에 닿을 때마다 더 넓게 번지기만 했다.
“바보야. 그게 그런다고 지워지겠냐?”
“씨이…… 안 그래도 속상해 죽겠는데 왜 와서 구박하는 거야.”
“속상하다고? 뭐가 속상한데.”
외젠의 물음에 엘리아의 눈이 팔딱거리는 심장처럼 흔들렸다. ‘말을 할까, 하지 말까?’ 갈등하는 마음은 입술을 잡아 무는 행동으로 드러났다.
“또, 또. 물지 말랬지.”
잔소리에 입을 비죽인 엘리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요란스럽게 뜸을 들인 끝에야, 엘리아가 화실에 들어온 후 내내 끌어안고 있었던 고민을 토로했다.
“그게, 토끼가…….”
“어? 뭐라고?”
한참 초조하게 기다린 끝에 들린 단어는 사람 100명을 불러다 모아 두었어도 한 명도 떠올릴 수 없었을 법한 단어였다.
‘아니, 울지만 않았지 당장 죽을상이던 애가 갑자기 웬 토끼 타령을 하는 거야?’
외젠은 당연히 제가 잘못 들었겠거니 생각했다.
“엘리, 다시 말해 봐. 방금 토끼라고 했어?”
“응, 토끼 때문에…… 아! 외젠, 나 토끼 한 마리만 그려 주면 안 돼?”
“무슨 소리야. 토끼를 갑자기 왜, 왜 그려 달라는 건데.”
“내가 여기에 토끼를 그리려고 했는데 연습해 봐도 예쁘게 못 그리겠어. 애들한테 어떻게 보이는지 물어봤는데 다들 멧돼지 그린 거냐고 묻잖아.”
엘리아가 가리킨 캔버스에는 정체불명의 갈색 동물이 한가득 그려져 있었다.
세밀한 묘사에는 영 재주가 없다는 건 알았지만, 정말 아무리 봐도 토끼는커녕 살이 통통한 멧돼지처럼 보이는 동물들이 하얀 캔버스 위를 뛰어놀고 있었다.
“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여기다 좀 그려 줘. 그럼 내가 보고 연습해서 그릴게.”
“토끼를 연습해서 어디에다 그리려고? 너 설마, 공작가에서 준 봉투에다가 멧돼, 아니…… 토끼랑 뭐 그런 거 그리려고 하는 거야?”
“응, 이미 그렸는데? 아직 꽃이랑 풀밖에 못 그렸지만.”
엘리아는 바닥에서 일어나 푸른색 봉투를 올려 둔 삼각대를 보여 주었다.
“이거야. 보여?”
삼각대 위에 얌전히 놓인 봉투에는 푸른 사슴 주변으로 갖가지 꽃들이 그려져 있었다. 붉은색이나 노란색이 조금씩 보이긴 했지만, 대부분 물감 통에서 갓 덜어 낸 선명한 주황색이었다.
“엘리, 이거…….”
“잠깐만, 외젠. 나도 알아. 다른 가문 문양 훼손하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알거든? 근데 도저히 그냥 못 놔두겠더란 말이야. 봉투가 너무, 파란색이라서.”
“뭐?”
“너무 새파랗잖아. 그래서 조금 따듯해 보이라고 꽃만 몇 개 그릴 생각이었어. 근데 막상 그렸더니 꽃만 있어서 그런가 너무 촌스럽길래, 토끼라도 그려 볼까 했는데 너무 그리기 어렵잖아. 심지어 다시 보니까 푸른색이 주황색이랑 하나도 어울리질 않고…….”
두 색이 어울리지 않더라는 엘리아의 목소리에는 푸른색만큼이나 선명한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외젠은 엘리아의 서운한 마음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짐작해 보고자 했다.
엘리아에게 있어 푸른색은, 에드문트 라스페를 의미하리라. 사람 같게 보였던 적이 없었다며 두려워하던 약혼자를 표현한 색.
그리고 차가운 푸른빛을 감싸 녹여 줄 주홍빛은……. 그때의 꽃에서 빌려 온 걸까? 아니면 엘리아 자신을 상징하는 걸까.
‘아, 그래서 네가 속상해하는구나. 푸른색이 주황색과 어우러지지 않는 게, 꼭 너와 라스페 공작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낙인찍는 것만 같아서.’
어리기만 하여 부서질 것만 같던 네가.
사랑을 하는구나. 어우러지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휘몰아치는 감정에 아파하며.
사랑을 배워, 변하려 하는구나.
* * *
외젠은 관자놀이께를 찔러 오는 시큼한 감정을 애써 털어 내고, 엘리아의 붓이 닿았던 봉투를 살폈다. 제법 많은 꽃을 꾹꾹 눌러 담아낸 게, 열심히 그린 티가 났다.
붓도 겨우 손에 쥐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커 버렸는지.
“괜찮아. 안 이상해. 푸른색이랑 주황색이잖아.”
“정말 안 이상해?”
“그래. 네가 조합해서 써 본 일이 없어서 좀 어색할 뿐이지 자꾸 보면 금방 적응할걸?”
“근데 왜 현실에 없는 풍경을 억지로 구겨 넣은 것처럼 보일까?”
“현실에 없긴, 무슨. 내가 보기엔 딱 호수 전경 그린 풍경화 같은데?”
“호수?”
“우리 저택 뒤편에 있는 호수 말이야. 가을이 깊어지면 호수 주변에 갈대가 익어서 딱 이런 색이 나오거든.”
“그래? 나는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우리 어릴 적에는 자주 갔었어. 아주 어렸을 때.”
엘리아는 외젠이 말하는 ‘어릴 때’라는 게,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적이라는 뜻임을 알았다.
벌써 몇 년이 지난 일인데. 아직 두 남매는 어머니, 아버지라는 단어조차 꺼내질 못하고 돌려 말해야 했다.
얼마나 더 지나야 먹먹함이 걷히고 담담하게 부모님을 추억할 수 있을까? 떠올릴 때 눈물 보이지 않게 된 것이 겨우 몇 년 전의 일이었으니, 아마 한참을 더 기다려야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구나. 예전에 나도 이런 비슷한 걸 봤구나? 기억을 못 해서, 아직 낯설어서 어색해 보인다는 거지?”
“그래. 자꾸 보면 금방 익숙해질 거야. 네 멧돼지 그림도, 자꾸 보다 보니 살이 찐 토끼 같아 보이는 것처럼.”
“아, 정말! 괜히 보여 줬어. 그냥 숨겨 놓을걸.”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정말. 여기 구석에 있는 건 못되게 생긴 게, 혹시 거울 보고 그렸어?”
외젠의 놀림에 엘리아가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입을 비죽였다.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엘리아를 보고, 그제야 외젠이 구석에 있는 의자 하나를 끌어와서는 자리를 잡았다.
엘리아는 툴툴거리면서도 부탁하는 처지니 잠자코 새 캔버스를 꺼내서 외젠의 앞에 놓아 주었다.
“여기, 중앙에다가 그려 줄 테니까 보고 연습해.”
“응, 여기 갈색 만들어 놨어.”
“갈색 말고. 검은색, 파란색이랑 흰색. 세 가지 덜어 줘.”
“왜? 나 토끼 그릴 건데. 토끼는 갈색이잖아.”
“북부 산악 지대에는 흰 토끼도 있어. 나도 그림으로만 봤지만.”
“흰 토끼를 그리려고?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흰색이 들어가면 훨씬 보기 나을 거야. 애초에 네가 색을 너무 적게 썼잖아. 다양하게 써야지 잘 어우러지지.”
외젠은 엘리아가 덜어 준 물감을 섞어 봉투와 같은 푸른색을 만들어 캔버스 위에 발랐다. 푸른 바탕색이 대강 마르자, 흰색을 찍어 낸 붓으로 순식간에 토끼 한 마리를 그려 냈다.
“아하하. 귀엽다. 하나만 더 그려 주면 안 돼? 뒷발로만 서서, 오른쪽 흘끔 보고 있는 거로. 사슴 다리 아래쪽에 그리고 싶어.”
“두 다리로 서 있고 몸통은 정면, 얼굴은 오른쪽?”
“응, 좋아. 여기다 그려야겠다. 더 그리면 너무 과할 테니까. 두 마리면 괜찮겠지?”
엘리아는 외젠이 그려 준 토끼를 보고 서너 번 연습한 끝에, 사슴의 아래쪽에 토실한 흰 토끼 두 마리를 그려 넣었다.
“어때?”
“괜찮은데. 멀리서 봐 봐.”
제가 그려 넣은 토끼 두 마리를 뚫어져라 보던 엘리아는, 외젠의 말대로 멀찍이 떨어져서 전체적인 모습을 확인했다.
“흐음…….”
“꽃이 밑에 너무 몰려 있어서 중심이 안 맞는 것 같아서 그렇지?”
“맞아. 그런 것 같아. 사슴이 무거워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쩌지. 위에도 뭘 더 그려 넣어야 하려나? 근데 위에 꽃이 둥둥 떠다니면 이상할 것 같아.”
“지금도 괜찮은데. 정 신경 쓰이면 데이지한테 새라도 그려 달라고 해. 작은 거로, 여기 뿔 위에 앉아 있게.”
“아! 그럼 내가 데이지 불러올게.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 알았지?”
엘리아는 외젠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당장 문밖으로 뛰어가서 큰 소리로 데이지를 불렀다. 복도 밖에서 서성이고 있던 데이지가 금방 화실로 찾아왔다.
“뿔 위에 앉는 모양으로 그리신다고요? 글쎄요…… 적당한 새가 당장 생각이 안 나는데요.”
“그냥 뱁새같이 작은 거 그리면 귀여울 것 같은데.”
“뱁새…… 는 농민의 상징이고, 사슴의 뿔은 권위의 상징이잖아요. 자칫 잘못하면 그림이 라스페 공작가의 권위를 짓누르고 군림한 민중들의 모습을 묘사한 거라고 오해받지 않을까요?”
“와. 데이지 너 지금 진짜 음모론자 같아.”
결국 사슴뿔 위에 새를 얹어 보자는 외젠의 제안은 기각되었다. 엘리아는 무사히 토끼를 그려 넣은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지금도 충분히 예뻐요. 토끼가 두 마리나 있어서 사슴이 덜 외로워 보이는걸요?”
데이지의 칭찬을 들은 엘리아는 기쁜 마음에 토끼 두 마리에게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두 사람 앞에서 말하면 아홉 살이냐고 놀릴 게 뻔하니까, 속으로만 이름 붙이고 말았지만.
“이제 네 오라비 저녁 먹으러 가도 되지?”
“저녁 여태 안 먹고 뭐 했어? 어서 가. 주방 사람들 기다리겠네.”
“너 때문에 못 먹고 쫓아왔잖아. 너 때문에. 그리고 엘리 너, 말 나온 김에 한마디 해야겠다. 식사 시간 되면 내려올 생각을 해야지. 애도 아니고 아직도 데이지가 너 쫓아다니면서 식사 챙겨야겠어?”
“안 먹겠다는데 데이지가 주는 거라 먹은 거라고!”
“그러니까, 안 먹지를 말라니까? 주면 먹을 거면서 자꾸 안 먹겠다고 하니까 데이지가 널 쫓아다니면서 챙기게 되잖아!”
두 남매가 어찌 사이좋게 시간을 보내다 헤어지나 싶었는데, 다시 평소로 돌아가선 잔소리와 항변을 반복했다.
데이지는 저를 잊고 그새 싸워 대는 남매에게 굳이 자신의 존재감을 발산하는 대신 다소 목소리가 커진 대화를 구경만 했다.
‘어차피 끼어 봤자…….’
누군가의 편을 들어 주지 않은 채 사이가 좋은지 나쁜지 모를 남매의 대화를 구경만 했다.
“가서 일이나 해! 보나 마나 엄청 밀려서 루카스 고생시키고 있을 거면서!”
나가는 순간까지 제가 그림 그리는 걸 도와주었다며 생색내는 외젠 때문에, 잠시나마 사이가 좋았던 남매는 원수들 헤어지듯 훅 돌아섰다.
그가 떠난 뒤, 엘리아는 잠시 봉투 위의 물감이 마르길 기다리며 데이지와 수다를 떨었다.
“어후. 아까 샌드위치 너무 많이 먹었어.”
“잘 드셔야지요. 겨울에 너무 추워서 집에만 계셨잖아요. 체력 많이 떨어져서, 봄부터는 많이 드시고 많이 움직이셔야 해요.”
“그거 왠지 집돼지 키우는 데에도 통용되는 말 같은데. 우리 돼지 많이 먹고 많이 움직여서 건강해져라, 그러는 것 같아.”
“우리 아가씨, 많이 드시고 많이 움직여서 건강해지세요. 아셨죠?”
키우는 새끼 돼지 어르듯 말하자, 엘리아는 기꺼이 못생긴 돼지 흉내를 내 주었다. 물감으로 꽃을 가득 피운 화실에, 데이지가 만든 웃음소리가 바람처럼 일렁였다.
“데이지.”
“네에, 아가씨.”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럼요. 본인이 제일 잘 아시면서. 로앙가에서 하시는 일이랑 별반 다르지 않잖아요?”
“그거야 내 돈 들어가는 일이고. 이게 좋겠다, 저게 좋겠다 사람들 앞에서 입만 살아서 떠드는 거였는데.”
“전에 아가씨가 쓴 글에 반해서 쫓아온 사람도 있었잖아요. 어느 가문이었죠?”
“그 사람들은 에드문트가 아니잖아.”
엘리아로서는 잘난 그에게 제가 쓴 보고서를 보여야 하는 점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전에 외젠이 알려 줬는데, 에디는 다섯 번 읽어도 이해 안 가던 걸 그냥 앞부분만 보고 다 파악하더래. 읽지도 않은 결론까지 다 파악해서 틀린 것까지 잡아내고.”
“부담스러우세요?”
“안 그러겠어? 어떤 느낌이냐면, ‘태생과 인지의 부조화’를 읽고 그 저자 앞에서 잘난 척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 기분이야.”
“그 고아한 책을 완독해 준 것만으로도 저자는 기뻐할 거예요. 그리고 아가씨의 해석을 듣고 나면 명석함에 감격할 테고요.”
“너는 나를 너무 오냐오냐해 가며 키워.”
“그러게요. 아가씨가 덜 예쁘셨으면 저도 좀 엄하게 대했을 텐데요.”
“내가 예뻐서 잘해 주는 거면, 외젠한테는 왜 잘해 줘? 외젠은 안 예쁘잖아.”
“그래서 제가 아가씨한테 제일 잘하잖아요.”
데이지의 귓속말에 엘리아가 소리 높여 웃었다. 배냇짓하며 웃던 옛 모습이 그대로 남은 얼굴에, 데이지는 애틋함을 한가득 표현했다.
두 팔로 꼭 안아 주고, 볼을 비비어 간질여 주고.
제가 가진 것 전부 드릴 테니, 부디 행복하시라 빌어 주고.
“아가씨, 그냥 낯설어서 불안한 거지 잘하실 거예요. 만약에 아가씨가 걱정한 대로 공작께서 아가씨 얕보거든요, 가서 한 소리 해 주면 되지요.”
“뭐라고 해?”
“정말 미안해 에디, 잘난 네가 하면 될 일을 내가 괜히 시간 낭비하면서 해 주고 말았네.”
자신과 똑같은 어투에, 엘리아는 목을 젖히고 웃어 대다가 그만 의자가 뒤집히고 말았다.
“아가씨 머리에 혹 나면 라스페 공작가에 피해 보상금 청구해야겠어요.”
샌드위치를 세 개나 먹은 배가 아플 만큼 웃으며, 엘리아는 불안을 훌훌 털어 낼 수 있었다.
* * *
“흐아암…….”
엘리아는 복도를 걸어 침실로 가는 짧은 길에서 무려 세 번이나 하품을 했다. 물감이 마른 봉투가 버석거리며 하품 소리에 참견해 댔다.
“피곤하시면 주무시고 내일 하셔요. 언제까지 달란 말도 없었던 것 같던데요.”
“그랬다간 꿈자리만 불편해질 것 같아.”
피곤했지만, 봉투 안에 있는 보고서를 읽지도 않고 잠들려고 해 봐야 마음만 불편할 게 뻔했다.
“늦게 주무실 거면 마실 거라도 좀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야. 나 그냥 한 번 보고 바로 잘 테니까 먼저 들어가. 좋은 꿈 꿔, 데이지.”
“아가씨도요. 행복한 꿈 꾸세요.”
홀로 침실에 들어온 엘리아는 침실 구석에 밀어 둔 탁자에 자리를 잡고 봉투를 열었다.
두꺼운 보고서 한 부를 꺼낸 뒤, 혹시 다른 건 더 없나 봉투를 크게 벌려 뒤적였으나 안은 비어 있었다.
‘어휴. 에디……. 이런 거 보낼 때는 쪽지라도 한 장 껴서 보내야 하는 거 아니야? 보고서만 달랑 보내면 어떻게 해.’
무슨 학술원 과제처럼 보고서 한 부만 던져 준 걸 보고 엘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이 달라지길 기대하는 거려나.
‘약혼자한테 좋아할 것 같다고 보고서를 보내 주는 건 에디밖에 없을 거야. 뭐, 이런 거 읽는 걸 좋아하는 귀족도 나 하나뿐일 테지만.’
외젠은 엘리아가 심심하다며 보고서 따위를 들추어 볼 때마다 ‘대체 어느 부분이 재밌다는 거야?’라고 핀잔을 주곤 했다.
그래도 엘리아에겐 다른 사람의 감정이 너무 묻어난 글보다는 건조한 서체의 논문이나 보고서가 훨씬 취향에 맞았다.
투자 자문이니, 가치 평가이니 하는 딱딱한 내용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사람이 쓴 글이지 않은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성자의 성격과 감정이 삐져나온 흔적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물론 머리 아프긴 해도, 일이라고 생각 않고 읽으면 재밌는데. 추리 소설 같잖아?’
잘 나가다가 결론에서 힘이 훅 빠지는 글은 아마 방어적인 사람일 거라 짐작할 수 있고, 특정 지역을 설명할 때 부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걸 보면 ‘여기에서 험한 일 당한 적 있나 보다.’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고.
공작가의 보고서 역시, 푸른색 사슴에 겁을 먹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재미있었다.
‘이번에 외젠 일 끝나거든 다 같이 공연 보러 가자고 해 볼까? 데이지도 좋아할 텐데.’
여태 공연이라고는 학술원에서 초청한 극단의 연극 몇 편 본 게 전부였는데, 보고서를 읽다 보니 한 번쯤 봐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침 보고서에 최근 인기 있는 연극이 예시로 적혀 있어서, 엘리아는 그중 마음에 드는 제목을 따로 옮겨 적었다.
‘그나저나 보고서 진짜 자세하게도 써 두었네. 이거 쓴 사람 분명 수다쟁이일 거야. 말하는 걸 좋아하니까 이렇게 보고서도 잘 쓰는 거 아니겠어?’
수다 좋아하는 거로는 엘리아도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데, 작성자도 아마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서 자체는 간결하고 보기 좋은데, 주석이…… 본문보다도 더 많은 것 같네.’
랑케가의 극단이 주인공 성별을 바꿔 올린 공연으로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느니, 원작자와의 소송에 휘말리는 바람에 반년간 영업 정지를 당했다느니.
내용 자체는 흥미롭기는 했지만, 보고서 주석에 꼭 넣어야 할 정보는 절대로 아니었다.
‘마치 본인이 아는 걸 자랑하고 싶어서 주석에다가 몽땅 넣은 느낌이야.’
깨알 같은 크기의 글씨로 적은 주석을 따라 읽다 보니 어느새 탁자 위에 둔 초가 바닥을 보였다. 엘리아는 여분의 초를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으으. 허리 아파.”
매번 엎드린 자세로만 살다가 오후 내내 그림 그렸지, 또 탁자에 앉아 보고서 읽었지. 이러다 내일 되면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거 아닐까?
‘역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니까.’
초를 새로 바꾼 뒤 다시 자리로 돌아온 엘리아는 보고서를 들고 바닥에 엎드렸다. 그제야 욱신거리던 허리에 통증이 줄어들었다.
문화계 산업 전반에 관해 설명해 놓은 앞부분에 이어, 뒷장부터는 매물로 나오거나 협상을 통해 인수가 가능한 극단 후보들이 죽 이어져 있었다.
한 줄 한 줄 읽던 엘리아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공작가에서 사들일 극단 후보라는 게, 전부 남작가나 자작가 소유라 격에 맞지 않았다.
‘슐체 남작가랑 바이스 자작가…… 바이스 자작 후계는 그냥 취미에 쓰려고 인수했나? 3년 동안 올린 극이 전부 다 본인 극본인데, 전부 다 적자잖아. 우리 가문이었으면 당장 파산했을 텐데.’
그나마 봐 줄 만한 후보군이라고는 요즘 보석으로 돈 꽤 번다는 레만 자작가나, 튀링겐 자작가 소유 극단 정도였다.
‘튀링겐…… 여긴 10년 전에 극단을 세 개나 인수했네. 전부 다 다른 귀족가에서 헐값에 사들인 거라지만 세 개나 가지고 있다니, 운영은 제대로 되는 건가.’
엘리아는 자작가 소유의 극단 세 곳의 이름 위에 나란히 적힌 주석 번호를 따라갔다. 역시, 임금 체불 논란이니 하는 시답잖은 극단에 붙을 만한 문젯거리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다른 극단들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중 하나를 인수하겠다니. 에드문트는 자선 사업이라도 벌일 생각인 걸까?
‘게다가 왜 하필 극단이고, 하필이면 후보가…….’
바닥에 엎드려 있던 엘리아는 고개를 들어 창가에 가지런히 놓아 둔 오르골을 바라보았다.
강아지와 춤을 추는 소녀, 그리고 등 뒤에 책을 한 권 숨긴 소년 중 엘리아는 마침 짙은 색 머리칼을 가진 소년에게 시선을 두었다.
‘에드문트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엘리아가 누운 위치에서는 소년이 등 뒤로 숨긴 책이 보이질 않았다.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소년이 뒤로 감추고 있는 책등이 무슨 색인지 궁금할 때면, 엘리아는 언제든지 소년을 등 돌리게 해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 에드문트가 제게 말하지 않고 감쳐 둔 속내는, 그리 쉽게 알아낼 수가 없었다.
에드문트는 오르골 위에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는 소년이 아니니까. 엘리아가 그의 뒷모습을 보려고 다가가더라도 그는 쉽게 엘리아를 피해 달아날 수 있을 테니까.
‘책이 무슨 색이었더라.’
오르골 위의 남자아이가 들고 있던 책이 어떤 색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 궁금하면 몸을 일으켜 직접 오르골을 살펴볼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저 다 망해 가는 극단들을 인수하겠다는 보고서가 담겨 있던 봉투처럼, 푸른색이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에디 네가, 차라리 한 권의 책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럼 온종일 기억을 헤집어 가며 네 흔적을 좇는 대신, 글을 읽었을 거야.’
엘리아는 남자를 적은 글을 곱씹고 또 곱씹어 읽으며, 에드문트가 어떤 사람인지를 배웠으리라.
‘만약 너를 샅샅이 적은 보고서라면, 주석으로나마 내 이야기도 적혀 있겠지? 내가 네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약혼자에게 보고서의 자문을 구하는 속내는 무엇인지…… 내가 궁금한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모두 적혀 있겠지. 아마도.’
까만 밤이 드리워진 시간, 엘리아는 한참 동안 잠 못 든 채 보고서에 매달렸다.
그의 이름 한 자 적히지 않은 글 속에서, 에드문트를 애타게 찾아 가면서.
* * *
다음 날 저녁, 아침 일찍 근교로 외출했던 외젠이 저택에 돌아왔더니 웬일로 엘리아가 1층에서 그를 맞아 주었다.
“엘리 네가 이제야 오라비가 너 먹여 살리느라 고생하는 줄 깨달았나 봐?”
왜 안 하던 짓을 하는가 싶으면서도 내심 반가워했는데, 알고 보니 엘리아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뭐래. 이거, 에드문트한테 갖다 주라고.”
그러면 그렇지. 엘리아는 외젠이 전해 주었던 푸른 봉투를 들이밀었다. 미소 띠려고 움직이던 눈썹이 웃다 만 표정만 남긴 채 멈추었다.
“대체 뭘 넣었길래 이렇게 무거워?”
알록달록해진 봉투는 외젠이 전날 받아 올 때보다 배는 더 무거워져 있었다. 안을 살피니, 라스페 공작이 준 보고서와 함께 엘리아가 새로 넣은 종이 뭉치가 꽉 차 들어가 있었다.
“이걸 뭐, 나 지금 막 왔는데 공작가까지 가서 주고 오라고?”
“아니. 당장 갖다 주라는 게 아니고, 좀 가지고 있어 달라고. 갖고 있으려니까 신경 쓰여서 자꾸 보다가 수정하고, 또 수정하다 보니 벌써 세 번이나 새로 옮겨 썼단 말이야.”
“이걸 하루 동안 세 번을 옮겨 적었다고? 서기 애들은 어쩌고!”
“수정하면서 옮겨 적느라 내가 적어야 했단 말이야. 알았지? 이제 종이도 아깝고, 팔도 끊어질 것 같아서 그냥 줘 버릴래.”
엘리아의 손을 보니 정말 군데군데 빨갛게 눌린 자국이며 까만 잉크 자국까지 뒤섞여 얼룩덜룩했다.
“어휴. 알았어. 내가 갖고 있다가 전해 줄게. 저녁이나 먹자.”
“피곤해서 입맛 없어.”
“좀, 때 되면 먹어!”
외젠은 글을 쓴다고 점심도 걸렀을 게 뻔한 엘리아를 억지로 끌고 식당부터 향했다.
주방에서 엘리아에게 먹일 저녁거리를 챙기고 있던 데이지가 잘 되었다며 두 사람 몫의 저녁을 직접 차려 주었다.
“근데 엘리, 저 봉투 말이야. 그냥 네가 직접 가져다주면 되잖아.”
“그럼 이상해지잖아. 어차피 내일 황궁에서 볼 테니까 전해 줘.”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에디가 나한테 직접 와서 준 게 아니었고……. 게다가 어차피 화요일에 얼굴 보기로 했단 말이야. 하여튼, 직접 가서 주는 건 이상해.”
직접 가져다주라는 말에 얼굴까지 붉히며 거절하는 엘리아의 모습에 외젠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음이 있어 보이더니만, 그럼 한 번이라도 더 얼굴 보겠다고 찾아가는 게 맞지 않나?’
대체 어느 부분이 이상하다는 거냐고 재차 물었더니 엘리아는 ‘몰라! 나도 모른다고!’라고 되레 성질을 부리고는 식당을 나가 버렸다.
외젠은 엘리아를 잡아 앉히려다가 후식만 빼고 말끔히 비운 접시를 보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먹지도 않고 뛰쳐나갔으면 한 소리 하려 했더니. 후우. 안 먹는다더니 그 많은 걸 다 먹었네.’
도로 자리에 앉은 외젠이 제 몫의 오리 구이를 꾸역꾸역 삼켰다. 분명 엘리아 앞에 놓였던 오리에 비하면 작은 양이었는데 벌써 배가 불러 왔다.
“입맛에 안 맞으세요?”
“너무 많아서 그래.”
옆에서 함께 식사하던 데이지가 도통 줄지 않는 오리를 보고 걱정하자, 내내 깨작거리던 외젠이 억지로 한 입 잘라 꾸역꾸역 삼켰다.
“데이지, 근데 네가 보기에도 엘리가 더 이상하지 않아? 그냥 가서 얼굴 보고, 이야기 나누고 그러면 좋을 텐데. 뭐가 싫어서 빼는 거야?”
아까의 대화를 곱씹던 외젠이 새삼스레 억울함을 느끼곤 호소했다. 그러나 데이지는 ‘그러게요.’라는 상냥한 동조 대신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쩜, 연애 안 해 본 티가 이렇게나 심하게 나시니…… 결혼은 어떻게 하시려고.”
“뭐라고? 설마 나 말하는 거 아니지? 엘리아 두고 하는 말이지?”
“저는 없는 분 두고 뒷말하는 사람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그럼 나 말하는 거라고? 참나. 그깟 연애 뭐라고. 나도, 나도 좋아하고 뭐 그런 상대 정도는 있거든?”
저를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 취급하는 데이지의 태도에 외젠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항변했다. 안 하는 것뿐이지 못하는 게 절대 아니라면서.
하나 그런 외젠의 태도에 데이지는 아까보다도 더 큰 한숨 소리를 냈다.
“후우, 외젠 님. 짝사랑은 연애가 아녜요. 그냥 짝사랑이지요.”
“……뭐?”
“그냥 그렇다고요. 아침부터 외부 일정 소화하시느라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 저는 먼저 올라가서 3층 식구들한테 목욕 준비해 두라고 전할게요. 아, 저 후식에 손 안 댔어요. 외젠 님이 좋아하시는 거잖아요.”
엘리아에 이어 데이지마저 식당을 나서, 외젠은 아직 손도 대지 않은 후식 세 개와 함께 덩그러니 남겨졌다.
‘아니, 내가 뭘! 뭘 잘못했는데?’
견과류를 듬뿍 넣어 구운 케이크를 두고 고민해 보던 외젠은 그냥 두 사람을 이해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데이지와 엘리아가 남기고 간 후식까지 제 앞으로 끌어다 한 줄로 늘여 놓으니, 아무렴 뭐 어떤가 싶었다.
‘내가 고민해서 뭐해. 어차피 잘난 저들끼리 알아서 하겠지. 나는 그냥, 이대로 살란다. 이대로도 충분하니까.’
연애고 뭐고, 외젠은 데이지가 양보해 준 케이크 조각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입에서 녹아내리는 단맛이나 사랑이나 딱히 별다른 차이는 없는 듯하여서.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