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선택
<에디. 나는, 당신이 지긋지긋해.>
서른둘의 에드문트가 어린 엘리아 로앙을 바라보았다.
모진 말을 뱉으면서도 저를 라스페 공작이 아닌 제멋대로 붙인 애칭으로 부르는 열여덟의 소녀를.
지긋지긋하다는 말이 에드문트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수십 번, 수백 번을 홀로 외롭게 읊조려 보았다.
그 말소리에 담긴 속내가 어찌 되었건 엘리아의 목소리라는 이유만으로 지극히 황홀했던 탓에.
에드문트는 제게 독인 줄을 알면서도 자꾸만 꺼내어 보고 입술을 대어 보았다.
<지긋지긋해.>
아직 앳된 모습을 제외한다면, 기억 속에 박제해 둔 순간과 어느 하나 다르지 않았다.
살짝 흘러내려 이마를 가린 금빛 머리칼, 외출할 때마다 즐겨 입던 적갈색의 외투, 유모가 선물로 주었다며 한시도 떼지 않던 귀걸이.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마른 입술, 나를 떠나겠다고 밀어내는 눈빛, 원망 어린 시선까지.
홀로 남은 에드문트가 감당해야만 했던 순간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시는 당신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야. 당신은 혼자 남겨질 거고, 영원히 나를 잃게 되겠지.>
돌려받았다고 생각했다. 죽어 버린 여자를 다시 손에 넣을 기회를 얻어, 기뻐했다.
한데 어째서 이별이 반복되는 걸까? 왜 나를 떠나, 또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겠다고 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아마 겨우 그가 죽어 버리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던 걸지도.
나의 시체를 대가로 돌려받기에, 너는 너무나도 아름다웠으니까.
“엘리아, 가지 마. 제발.”
붙들어 보려 했지만 붙잡을 방법도 여전히 모르겠다. 네가 나를 떠날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잃은 후에야 후회했고 다시 돌려받은 너를, 다시는 놓지 않으려 했고…… 누군가에게 빼앗길 리도 없으리라 자신했다.
과거의 나는 무엇이든 손에 넣고야 말았고, 너마저. 내가 잠시나마 너를 가져 보았지 않았던가.
<부르지 마. 당신의 것이 아니야.>
어린 목소리가 나를 밀어냈다. 상냥하지 않고, 그저 서늘하여 날카로운 말이 상처 입어 본 적 없는 심장에 박혔다.
고통을 느꼈다. 싸늘하게 식어 죽어 버릴 때까지 멈추지 않을 피를 흘렸다.
그러나 엘리아는 살가죽 안에서 피를 흘리는 심장을 외면한 채, 다시 한 번 검을 박아 넣고자 했다. 죽을 때까지 괴로워하길 바라는 듯.
<나는 당신의 것이 아니야.>
<그래. 엘리아 로앙은, 에드문트 라스페의 것이 아니지.>
죽어 버렸던 남자조차 되살아나서, 에드문트를 깨닫게 했다.
인정해야 했다.
“……그래. 너는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이 없었지.”
엘리아는 라스페 공작의 여자였으며, 에드문트의 아내라는 호칭으로 불려 왔지만 정작 에드문트는 한 번도 엘리아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열여덟의 엘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부모를 잃은 뒤 목숨을 끊어 버리려 했다던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지, 8년간의 결혼 생활이 엘리아를 어떻게 좀먹어선 기어코 도망치게 했는지. 에드문트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무것도.
한때는 너를 위해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대신 네게 세상의 모든 걸 안겨 주었으니…….
충분하리라 자만해 왔는데.
“그래도, 엘리아. 말해 줘. 한때나마 나를 사랑했다고.”
에드문트의 애원에, 어린 엘리아는 다시 스물여덟 살로 돌아갔다. 표정 없는 얼굴을 에드문트가 익숙하게 바라보았다.
여전히 사랑스럽기만 하여, 원망할 수는 없었다.
<사랑했어. 사랑했는데, 더는 견뎌 낼 수가 없어.>
한 번도 꿈꿔 본 적 없는, 사랑이라는 말.
이미 시간에 휩쓸려 멀리 떠나가 버렸으니, 에드문트는 차라리 부정해 보려 했다.
혹시 내가 만들어 낸 환상은 아니었던가. 사랑했다던 당신의 마지막 말은, 실은 나를 상처 주기 위한 거짓은 아니었을까.
<그럴 리가. 에디, 당신은 상처 받지 않잖아.>
남자의 의문에 여자가 차갑게 일갈했다.
한 번도 상처를 내보인 적 없던 남자를 향해, 아낌없는 비난을 담아.
* * *
에드문트는 라스페가의 어둑한 집무실에서 눈을 떴다. 창문 너머에서 다가온 희미한 새벽빛이 에드문트의 눈앞에 놓인 물건들을 하나씩 짚어 보였다.
간밤에 비워 냈던 여러 병의 독주. 읽다 만 보고서. 스물두 살의 그를 반사하는 작은 거울.
거울 속 초췌한 자신의 모습까지.
“후우…….”
한숨과 함께 입에 남은 술기운이 밖으로 번져 나왔다. 꿈에서 깨어나서 마주한 스물두 살의 얼굴에 그는 안도했다.
그의 스물두 살에 엘리아는 죽지 않았다. 비록 손 닿는 곳에 있어 주지는 않으나, 로앙가의 안락한 침실에서 곤히 잠들어 있으리라.
에드문트는 잠든 엘리아의 모습을 상상하며 술잔에 손을 뻗었다. 넘칠 때까지 부은 독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말라붙어 있던 식도를 타고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고 나서야, 그는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제정신…… 지금 그의 꼴을 두고 제정신이라는 단어를 써도 될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닐스 튀링겐을 목격하고, 사랑으로 말미암은 공포를 최초로 실감한 날 이후 에드문트는 내내 같은 꿈에 시달렸다.
죽음으로 돌려받은 엘리아에게 또다시 버려지고, 붙잡지 못한 채 영영 잃어버리고야 마는 악몽이었다.
멀쩡한 정신으로 견뎌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지하 석실에는 여전히 팔다리가 바스러져 돌아왔던 엘리아의 시신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엘리아는 죽었던가? 떠났던가? 아니면, 아직 살아 있는 채로 그를 원망하는가.
에드문트가 있는 현실이 어디 즈음이고, 죽음이 어디까지 그의 삶을 되돌려 주었는지 깨달을 수가 없었다. 하여 에드문트는 악몽에서 깨어나고 나면 확인해야만 했다.
자신의 새로운 현실에 엘리아가 살아 있음을, 어떻게든 자각해 낼 때까지.
* * *
첫날에는 벽에 걸려 있던 장식용 검을 집어 들었다. 팔목에 박힌 단검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 그리고 사색이 되어 달려온 집사를 보고서야 그는 자신이 스물두 살로 되돌아 왔음을 깨달았다.
<주인님, 상처가 심합니다. 제발, 의원에게 보이지 않으시려거든 안정이라도 취하셔야 합니다.>
박아 넣은 검을 빼낸 뒤 붕대를 감아 준 집사가 애걸했으나, 에드문트는 팔목에 남은 통증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움직일 때마다 그의 여자가 살아 있음을 내내 각인시켜 주는 통증에 중독될 것 같았다.
둘째 날에는 악몽에서 깨어나자마자 지하 석실로 향했다. 떠나 버린 엘리아가 시체가 되어 에드문트에게 돌아와 주었던 곳으로.
중앙 석실의 문을 열자 싸늘하게 식어 있던 엘리아의 시체는 흔적조차 보이질 않았다.
‘누군가 데려간 거라면, 돌려받아야…….’
하지만 망상에 사로잡혀, 석실에 가득한 장식용 검 하나를 빼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을 박아 넣기 직전, 이미 한 번 상처를 내 붕대를 감아 둔 팔목을 발견하고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안도했다.
엘리아가 살아있음에. 그의 사랑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에.
다음 날에는, 팔목에 매달린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다. 자는 사이 저도 모르게 쥐어뜯은 팔목에는 피가 흥건했다.
끔찍한 통증 속에서 에드문트는 어떻게든 엘리아의 흔적을 찾으려 노력했다.
텅 빈 복도를 걸어 집무실로 향했다. 이별을 통보했던 엘리아의 흔적을 찾아보려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모진 말을 안겨 주던 여자는 어디로 가고, 푸른색의 꽃들이 에드문트를 맞이했다. 엘리아가 선물한 그림이 그에게 인사했다.
<네가 꽃을 줬잖아. 그리고 푸른색인 건, 네 눈동자 색이니까.>
<당신 눈을 닮았잖아. 이렇게 계속 보면, 당신 눈 안에 하늘이 있어.>
그는 이제는 붓질 하나하나까지 외울 수 있는 푸른색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다소 서툰 붓놀림이 피워 낸 푸른색의 꽃들이 에드문트를 실감케 했다.
열여덟의 엘리아가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엘리.”
집무실의 차가운 융단에 툭, 툭 비가 떨어졌다.
“엘리아.”
엘리아에 목마른 에드문트를, 잠시나마 적시었다.
* * *
그날, 정신을 차린 에드문트는 집사를 시켜 집 안 곳곳에 거울을 마련해 두도록 했다. 이성이 끊어질 것 같을 때면 그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되뇌었다.
아직, 제 사랑이 갈 곳을 잃지 않았음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나흘째 되던 날부터는 석실을 찾아가거나 자해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거울 몇 개가 깨지는 일이 있긴 했지만 그리 큰일은 아니었다.
거울을 깨트리고, 몸에 깊은 상처를 새겨 넣어서라도 빨리 현실을 자각하는 편이 나았다.
엘리아를 영영 잃고 말았다고 착각하여 죽어 버리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대체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해야 하는 걸까?
지금 심경으로는, 눈앞에 두고도 몇 번이고 의심할 것만 같았다.
저를 살갑게 애칭으로 부르는 목소리도, 주홍빛 눈동자에 고스란히 비치는 자신의 모습도 마치 꿈만 같아서 실재한다고 믿기가 어려웠다.
‘그래. 아직…… 살아 있는 게 맞는지 제대로 확인해 본 적이 없었으니. 목소리를 듣고, 웃어 주는 얼굴을 보았으나 그게 전부였으니까.’
그가 엘리아의 가는 목덜미에 입술을 대어 맥박을 확인해 본 적이 있던가? 낭창한 허리에 팔을 둘러 살아 있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온기를 느낀 적은?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달큼한 숨을, 집어삼켜 본 적도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럼에도 그가 확인을 위해 손을 뻗는 대신 두꺼운 장갑으로 살갗을 숨기고 견디는 이유는…….
‘모르겠어. 네가 어디까지 견뎌 줄 수 있는지를.’
엘리아에 대해서, 가져 본 적 없는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반년.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엘리아가 성년이 되고, 정식으로 약혼을 하게 되면 결혼까지는 고작 반년이면 충분했다. 그때까지 엘리아가 제게 찬찬히 적응하게 하고는 사랑이든, 동정이든 뭐든 받아 낼 생각이었건만.
그러나 시간은 에드문트의 편이 아니었음을. 그는 스스로가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부서져 가루가 되어 날리는 거울 조각들이, 푸른색의 그림 앞에만 푹 꺼져 볼품없어지고 만 융단이, 팔을 움직일 때마다 신경을 긁는 통증이 그 증거였다.
엘리아가 채 준비되기도 전에, 견고한 척해 대던 에드문트의 인내가 먼저 허물어져 엘리아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너도, 나도 견디지 못할 텐데.’
끌어안고, 입 맞추고, 애원하고…… 이내 버거울 감정을 억지로 삼키게 하고는, 배 속을 헤집어 제대로 품고 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려 들 텐데.
과연 엘리아가 그 모든 행위를 견딜 수 있을까? 에드문트가 엘리아의 눈물을 보고 멈출 수 있을까? 퍼붓던 사랑을 도중에 접어 없었던 것처럼 다시 뒤에 감추는 게 가능할까.
그럼 엘리아가 다시 안도하여 에드문트에게 웃어 주게 될까. 지금 당장 그 답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알아야 했다. 엘리아가 어디까지 저를 감당해 줄 수 있는지.
‘내가 전과 같은 방법으로 닐스 튀링겐을 살해하고도 나를 떠나지 않을지. 혹은 다시 너를 잃게 될지.’
에드문트는 간밤에 읽다 만 보고서를 들어 올렸다. 닐스 튀링겐에 관한 탐문 보고서였다.
<에드문트 님, 그 닐스라는 서점 주인 말입니다. 아무래도 신원이 수상하니 다시 조사해 보겠습니다.>
<…….>
<공작님, 혹시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됐다. 서점의 남자는 튀링겐 자작가 소유의 별장부터 뒤져 그간의 행적을 확인하도록.>
<튀링겐이라니, 설마 그 남자 튀링겐가 사람이었던 겁니까?>
<수도에 근거지가 있는지, 황후 쪽 움직임까지.>
<……예,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이전의 삶에서 에드문트가 읽었던 보고서에서는 단 한 줄로 기록되어 있던 그의 젊은 시절이, 수십 장의 보고서가 되어 돌아와 있었다. 취향, 습관, 행적…… 예상되는 행동 양식까지. 남자에 대한 모든 정보가 그 속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닐스 튀링겐을 두고 에드문트는 선택할 수가 없었다. 엘리아가 어떻게 반응해 올지 짐작할 수 없었으므로.
‘어떻게 해야 너를 알아낼 수 있을까.’
엘리아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라고 할까. 로앙가에 사람을 심어 사람들과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요즘 그리고 있는 건 무엇인지, 서점에서 가져온 책은 얼마나 읽었는지.
가끔은 에드문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긴 하는지.
하나하나 글로 전해 받으면 너를 이해할 수 있을까.
에드문트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엘리아가 알게 된다면 배신감을 느낄 방법으로 다가가면 될까.
아니면…….
‘감당도 못 할 너를 다시 만나 의미 없는 척 말을 건네고, 고통을 삼킨 채 미소를 지어 보이며 네가 한 발짝 더 다가와 주는 모습을 지켜볼까. 내가 좀 더 괴롭고, 네게는 좀 더 익숙할 방법으로.’
다가가면 될까. 그럼 너를 알게 되어 마침내, 가질 수 있을까.
* * *
엘리아가 서점에서 에드문트를 만난 지 1주일이 지난, 4월의 어느 날.
“나한테 주는 거라고? 에디가?”
엘리아에게 빳빳한 서류 봉투 하나가 전해져 왔다.
“이거 무슨 보고서 같은데?”
그건 아직 아무것도 모를 엘리아를 위해 에드문트가 준비한,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었다.
다만 결말이 적힌 마지막 장은 비어 있던 탓에,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이제 막 제목을 읽기 시작한 여자도.
지금껏 책장을 넘겨 오던…… 남자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