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마차 안
에드문트를 따라 서점을 나서자 엘리아의 앞에 수많은 라스페가 호위들이 사열해 인사를 올렸다. 졸지에 길 한가운데에서 기사들의 공대를 받아 주어야 했다.
“아……. 그래요, 다들 반가워요. 저택에서 본 적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은데.”
공작가에서 봤을 때는 무감하던 이들의 눈빛이 어째 하나같이 반짝거리며 엘리아를 향해 왔다.
이전까지 그들에게 자각이 없었을 뿐, 엘리아는 ‘미래의 공작 부인’이 아니던가. 가주가 제대로 엘리아를 대우하는 것처럼 보이자 그제야 자각이 들었을 테고.
‘공작 부인이라니.’
엘리아는 어색함과 더불어 민망함을 느꼈다. 단지 에드문트와 약혼했다는 이유로 대접받게 될 앞날이 그리 기꺼울 리도 없었다.
“훌륭한 호위들 덕분에 공작께서 든든하시겠네요.”
그래도 엘리아는 자신이 제법 괜찮게 공작가 가신들을 대했으리라 자부했다. 처음치고는 말이다.
“길이 협소하여 골목 끝에 마차를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벨젠 경이 호위 문제 때문이라면서 엘리아와 에드문트를 길 끝으로 안내했다. 정말이지, 모든 게 익숙지 않았다.
기사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과 나란히 걷는 에드문트, 그런 그의 옆에서도 제법 태연한 자신까지.
‘어쩌면 내 평범했던 날들이 완전히 끝나 버린 걸지도 몰라. 에드문트가 한입에 잡아먹는 바람에.’
엘리아는 에드문트 탓을 하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늘 일이 꼬인 건 명백히 제 탓도 있지 않았던가.
‘내가 그냥 외출하지 않았다면, 두 번째 화요일도 아닌데 서점에 찾아와서는 조잘대지 않았다면. 그럼 아무 일도 없었을 거잖아.’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들었다. 손 놓고만 살지 말걸. 갈 곳도, 따로 마음 나눌 사람도 없이 살지는 말 걸 그랬다는 후회라든가, 부끄러움이라든가.
‘근데 에드문트는, 정말 우연히 들른 걸까? 혹시 이미 알고 있었던 건 아니고?’
의심하려면 끝이 없고,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 일이었지만 엘리아는 의심했고, 후회했다.
‘아무래도 답답하다고 누구한테 터놓는 건, 당장은 후련해도 일만 더 꼬이는 기분이야. 지금도 벌써 후회되는걸. 닐스 씨한테 괜한 말했어.’
엘리아는 앞으로 답답한 일이 있을 때 도망칠 만한 다른 장소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음에는 아무도 없을 만한 곳에 가야겠어. 누구에게 떠벌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도 들어 줄 사람 없는 곳으로. 저택 근처에 분명 갈 만한 곳이……. 하아. 어렵다. 대체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면 어떻게 견디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려나 궁금해하던 엘리아는 무의식중에 바로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에드문트는 황궁에 갈 때의 화려한 복장 대신 진청색의 단정한 예복을 입고 있었는데, 겨울처럼 꽁꽁 싸매 입은 엘리아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가벼운 차림이었다.
옷차림도 다르거니와, 두 사람은 외적으로도 닮은 부분이 없었다.
엘리아의 백금색 머리칼은 에드문트의 짙은 색 머리칼과 대비되어 각각 낮과 밤처럼 보였고, 장신인 에드문트와는 달리 엘리아의 키는 겨우 그의 어깨에 닿는 수준이었다.
‘……정말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려나.’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 그도 쉴 때는 책을 읽을까? 제국에 100질도 채 남지 않았다는 유명 추리 소설을 읽어 본 적은?
혹은, 저처럼 도망치고 싶었던 적은 없었을까.
‘에디, 혼자 남겨졌을 때 너는 겨우 열둘이었잖아. 공작가의 모든 이들이 너 하나만 바라보며 의지하려 했을 텐데, 갑갑하진 않았어? 해서 뛰쳐나오고 싶은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애초에 엘리아는 자신이 저택을 도망 나온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에드문트라는 점은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머릿속에 자꾸 들어오는 약혼자를 떼어 내고 싶어 마차에 올랐으면서. 대체 자신이 무얼 했길래 에드문트의 관심을 끌게 된 건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으면서.
막상 자신을 혼란케 한 당사자를 만나니, 눈에 보이지 않았을 적에 느꼈던 불안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되레 딴생각만 스멀스멀 들었다.
물어보면 그는 뭐라고 대답할까.
‘도망치고 싶을 때, 너는 어느 장소를 가장 먼저 떠올릴까.’
엘리아는 바로 옆에 있는 에드문트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은 않고, 혼자 속으로 질문하고 그가 할 법한 대답을 상상하기만 했다.
‘눈썹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대답하겠지. 아마 갑갑함 따위 느껴 본 적이 없다거나…… 왜 자신이 나가야 하냐고 되묻는다거나.’
취미를 즐기며 속을 다스린다는 평범한 대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엘리아는 에드문트가 할 만한 여가 활동을 떠올려 보았다. 커다란 흑마를 타는 모습이라든가, 그 위에서 검을 휘두르는 장면은 상상이었음에도 제법 잘 어울렸다.
‘에드문트가 검술에 소질이 있다고 듣긴 했는데. 뭐……. 모를 일이지. 공작쯤 되면 뭐든 잘해야 한다는 환상에 젖은 사람들이 멋대로 지어낸 말일지도 모르잖아? 근데 검에는 소질 없는 에드문트라니. 좀 웃기긴 하다.’
엘리아는 옷 안에 감춰진 에드문트의 체격을 대략 짐작해 보며, 검을 든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체격이 좋으니 검 폭이 작아 찌르기에 적합한 검보다는, 자신은 들지도 못할 만큼 육중한 양손 검이 어울릴 것 같았다.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설마, 진짜로 검에는 소질이 없는 거 아냐?’
엘리아는 한번 그려 보았다. 외젠의 허접한 공격에 검을 떨구고 마는 에드문트라.
당황하는 표정을 본 적은 없으니 상상 속에서도 볼 수 없었고, 대신 떨어진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에드문트의 모습을 짐작해 보았다.
‘……세상에. 너무 웃기잖아. 어쩌지? 티 내면 이상해 보일 텐데.’
꾹 참아 보려 했지만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급기야 엘리아는 ‘크흡’ 하고 바보 같은 웃음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에드문트가 고개를 돌려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준비되지 않은 채 눈이 마주친 엘리아가 흠칫 놀란 티를 내고 말았다.
“흠, 흐흠. 에드문트, 음…… 잘 지냈어?”
저를 향해 온 얼굴에 엘리아는 대뜸 인사를 던졌다. 급히 둘러댈 만한 말이 인사뿐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아직 인사도 안 해서. 그게 갑자기 생각나서.”
어색한 인사말 뒤에 어린애 같은 변명이 뒤따라 왔다. 책방 앞에서 기사들을 대면할 때는 어색함이 없었거늘.
유독 제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엘리아를 위해 에드문트는 내뱉고 싶은 수많은 말 중 적당한 것을 골랐다.
“오랜만이야, 엘리.”
보고 싶었다는 말, 너를 끊임없이 생각했노라는 고백 대신 에드문트의 입에서 나온 건 그저 단순한 감상이었다.
덕분에 그는 엘리아가 당황하거나 경계하는 모습 대신 자신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살짝 오므리는 표정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아, 우리 오랜만이던가?”
“며칠 얼굴 보지 못했으니까. 이렇게나마 얼굴을 보게 되었네.”
“으음…… 그래. 이렇게 말이지. 정말 우연이지?”
엘리아가 끝말을 살짝 올려 의구심을 표현했다. 책방에서 한스가 떠들어 대며 변명한 게 아무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예고 없는 방문과 선물, 초대에 이제 미행까지 했다고 생각하려나.’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의심을 이해했다. 엘리아에게는 ‘에드문트가 엘리아의 행적을 쫓아다니다가 우연을 가장하여 다가왔다.’라는 쪽의 해명이 훨씬 더 설득력 있을 테니.
비록 진실은 아니었으나 그런 부류의 음습한 꼴이 에드문트와 무척 잘 어울리지 않는가.
그래도 해명해 보이고 싶었다. 에드문트는 제 앞에서 변명을 떠들어 대던 인간들의 심경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 역시 두려웠으리라. 거짓을 뒤집어써 소중한 것들을…… 돈과 명예, 신뢰를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던 탓에.
변명해 왔으리라.
그는 약자의 입장에 내몰리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변명에 담겨 있던 절박함을.
“근처에 계약 때문에 들렀어. 내 보좌관이 우연히 네가 여기 있는 걸 알게 되었고.”
“보좌관이라면 아까 한스 경 말이지? 저 사람 되게 특이한 것 같아. 전에, 그…… 저택에 왔을 때는 굉장히 딱딱한 문어체를 썼는데 오늘은 되게 쾌활한 사람처럼 굴더라.”
“그래. 한스 경이 로앙가의 호위 기사를 서점 밖에서 목격했다고 하던데.”
“아, 내가 호위로 같이 와 준 테오 경에게 뭐 좀 부탁했거든. 여기 길 끝에 화방이 있는데, 수도에서 화구 가격이 제일 합리적이야. 다른 데는 같은 성분인데 포장만 그럴듯하게 팔아서…….”
엘리아가 오늘 구매한 화구에 관해 설명하던 중, 길가에 세워 둔 로앙가의 마차를 지나친 걸 깨닫고 멈추어 섰다.
“에디, 잠깐만. 나, 타고 갈 마차 저기에 있어. 나 로앙가에서 마차 타고 왔어. 그리고 금방 나갔다 온다고 해서 가 봐야 해.”
이만 가 보겠다는 짧은 한마디가 뭐가 이렇게 어려운지. 머릿속에 말해야 하는 문장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단편적인 단어 하나하나가 뒤죽박죽되어 떠올랐다.
‘가야 해.’, ‘마차.’, ‘지나 왔어.’, ‘저택에서 사람들이 기다려.’, ‘이만 가 볼게.’…….
엘리아가 어떻게든 제대로 순서를 맞춰서 이야기를 해 보려 했지만 노력할수록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에드문트는 더듬거리는 엘리아를 두고 웃지 않았다. 속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내색하지 않는 점만큼은 참 고마웠다.
“엘리, 로앙가 저택까지 내가 타고 온 마차로 데려다줄게.”
“또 데려다주겠다고? 에디 네 일은? 나 그렇게 신경 안 써 줘도 돼.”
“끝내고 왔어.”
“정말…… 이야?”
“정말이야. 일 끝나고 나오면서 보좌관에게 네가 근처에 있다는 보고를 받았어. 만약에 네가 아직 가지 않았으면 로앙가까지 데려다줘도 될지 물어볼 생각으로 온 것뿐이고.”
“알았어. 믿을게. 우연히 보좌관이 테오 경을 발견한 덕분에…… 일 끝나고 왔다고…….”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자신의 말을 여전히 의심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더 이상의 무의미한 설득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럼, 괜찮지? 저택 앞까지만.”
대신 엘리아가 자신의 권유를 받아들일까 고민하도록 했다.
‘으, 어쩌지. 또 거절하려 하면 혼자 보내기 겁난다느니 하려나? 게다가 나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거절하고 혼자 가 버리면, 여기 있는 수하들이 다 에드문트를 불쌍하게 생각할 게 뻔하잖아.’
약혼자에게 거절당하고 가신들에게 동정받는 에드문트라니. 생각만 해도 마음이 불편했다.
“알았어. 대신 오늘만이야.”
엘리아는 지난번과 똑같은 대꾸로 에드문트의 청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거절하고 집에 갔다간 아마 밤새도록 생각날 테니까.
“고마워, 엘리.”
죄책감을 느끼기 싫다는 이기적인 마음에 승낙한 것뿐인데 뭐가 고맙다는 건지.
‘고마워할 필요 하나도 없는데.’
옷자락 안이 따끔거렸다. 엘리아는 그게 죄책감 때문에 생긴 통증이라고 여겼다.
달리 다른 일로 마음이 따끔거려 본 경험이 없었기에.
두 사람은 금세 라스페가의 마차 앞에 도착했다. 마차 앞에는 왜인지 함께 왔던 테오 경이 잔뜩 긴장한 채로 서 있었다.
“테오 경, 혹시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 아닙니다, 아가씨.”
테오 경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으나 거짓말하는 중이라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 있었다.
‘아니긴 뭐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 저렇게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는 모습은 처음 보는데.’
엘리아는 거짓말이 서툰 기사를 향해 ‘이따 나랑 얘기 좀 해.’라는 의미의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라스페가의 사용인을 바라보았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중년 남자는 얼굴에 팬 자글자글한 주름마저도 푸근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아가씨. 라스페가의 마부인 가스톤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상냥한 엘리아의 인사말에 남자가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10여 년 동안 모셔 온 사람이라고는 에드문트 하나뿐이었으니, 이렇듯 다정한 대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마부는 기꺼이 마차 문을 열고 엘리아가 먼저 올라탈 수 있도록 손을 받쳐 주었다. 굳은살이 마구잡이로 박여 있는 마부의 손을 짚고 마차에 오르자, 뒤이어 에드문트가 올라왔다.
먼저 자리를 잡고 앉은 엘리아는 눈을 바삐 굴려 가며 마차 안을 살폈다. 창틀에 있는 장식이라든가, 나무 바닥 무늬까지.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에디, 밖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이 마차 내가 전에 탔던 마차랑 같은 거야?”
“응, 전에 네가 공작가에 왔을 때 탄 것과 같은 마차야.”
“아. 에디 혹시 그러면 이거 네가, 그…… 좋아하는 마차야?”
오늘은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지, 엘리아는 에드문트가 완전히 마차에 타지 않았는데도 질문거리를 쏟아 냈다.
대답에 앞서 에드문트가 마차 안으로 완전히 들어선 바람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한껏 좁혀졌다.
일전에는 마차 안으로 들어선 에드문트를 보고 놀라서는 바짝 굳어 버리더니,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선 에드문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적응한 건지, 다른 일을 생각하느라 경황이 없어서…… 놀라지도 않는 건지.’
엘리아의 태도는 에드문트가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될 수준이었는데, 정작 에드문트는 쉽게 마음을 놓지를 못했다.
가졌다고 생각하면 순식간에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탓에.
“그게, 그러니까 왜 물어보느냐면, 특이하다 싶어서 말이야. 나도 몰랐는데, 대다수 가문에서는 마차를 열 몇 대씩 갖고 있더라고. 매번 타는 마차가 겹치는 일이 거의 없도록 하는 건데, 그래야 귀족으로서의 위신을 지킬 수 있다나.”
“라스페가에서는 마차를 여러 대 두고 있지는 않아. 이것 말고는 예비용의 마차 두 대가 전부야.”
“어? 공작가인데 마차가 왜 그렇게 적어? 로앙가는 가난뱅이인데도 마차가 다섯 대 있는데. 딱히 위신이니 뭐니 신경 써서 마련한 것도 아니고 그냥 필요한 걸 하나씩 마련하다 보니까 어디 보자……. 몇 대 있더라?”
엘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가락을 꼽아 가며 로앙가의 마차를 세어 보았다.
“2인승 한 대랑, 4인승 두 대랑…… 조금 낡은 것도 있긴 한데, 합치면 다섯 대네. 이것도 다른 가문에 비해서는 너무 적다고 집사가 아쉬워하는데.”
“어차피 마차를 이용할 사람이 나 하나뿐이고, 관리하기가 번거롭다는 문제도 있어서.”
“마차 관리가 번거로워? 아, 바퀴 손질하고 수리하는 문제 말이지?”
“그보다는, 이를테면.”
반대편에 앉아 있던 에드문트가 상체를 살짝 숙이더니, 굳게 닫혀 있는 창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엘리아였으면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야 겨우 닿을 창문 덮개에 새하얀 장갑을 낀 에드문트의 손이 금방 닿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착시 때문에 엘리아의 코앞까지 다가온 것처럼 느껴지던 순간…….
“꺄악!”
엘리아의 비명이 높게 울렸다. 마차를 울리는 거센 충격과 뒤섞인 채로.
* * *
‘손…… 장갑을 꼈네.’
엘리아는 에드문트가 손에 낀 장갑에 시선을 빼앗기는 바람에 그가 무슨 행동을 취하려는지 짐작조차 하지 않았다.
한겨울에도 장갑을 낀 모습은 보인 적 없었으니, 특별한 옷차림이 필요한 때에나 어울릴 두꺼운 장갑이 신경 쓰이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이상하지. 아까 길에서 봤을 때 에디가 장갑을 끼고 있었던가? 아니었는데. 잘못 본 건가? 게다가 웬 장갑이지? 추워서? 그럼 옷이나 좀 따듯하게 입을 것이지. 나는 이렇게 껴입고 와도 장갑을 낄 생각은…….’
엘리아의 태평한 생각은 갑자기 덮쳐 온 굉음에 끊기고 말았다.
“꺄악!”
에드문트의 손이 예고 없이 창문 덮개를 강하게 내리치자, 쇳덩이가 내리찍는 소리와 함께 촘촘한 창살이 나타났다.
이내 대로 한복판을 달리던 마차가 바로 멈추어 섰다. 급정거에 대비하지 못한 엘리아가 휘청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
“뭐, 뭐야? 방금 뭐가…….”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바깥에서 조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마차 문이 열렸다. 무장한 기사들 여럿을 뒤에 이끌고 나타난 건 라스페가의 기사, 벨젠 경이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마차가 신나게 달리고 있지 않았던가? 대체 얼마나 반응이 빨라야 저렇게 곧바로 마차 문 앞에 사열할 수가 있는 건지.
사소한 궁금증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바람에 엘리아는 놀란 표정 그대로 굳어서 마차 안을 들여다보는 벨젠 경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아무 일 없다. 잠깐 안전장치를 시험해 본 거니까.”
“예, 바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마차에 들어온 벨젠 경이 바닥을 뒹구는 창문 덮개를 치우고, 보안 장치로 보이는 창살을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엘리아는 왠지 제가 사고 친 기분이 드는 바람에 다리까지 접어 올려 스스로를 마차 좌석 안에 깊이 눌러 버렸다. 그 모습이 꼭 제 꼬리를 끌어안고 구석에 숨은 다람쥐를 떠올리게 했다.
벨젠 경이 조금 큰 동작을 취할 때마다 움찔거리는 모습이 실로 가엾기 그지없었다.
“다른 곳은 이상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네에. 고마워요…….”
아직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도 않았으면서, 엘리아는 어떻게든 목소리를 쥐어짜 벨젠 경에게 대꾸해 주었다.
“흐아. 후우…….”
기사가 나가고 난 뒤에야 엘리아는 심호흡을 억지로 반복하며 잔뜩 긴장한 몸을 풀어 냈다.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혀 있을 정도였지만, 다행히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나니 한결 좋아졌다.
“에디, 나 엄청 놀랐잖아……! 저런 게 있다는 건 듣기는 했는데…….”
“……괜찮아?”
“다, 다음부터는 미리 말 좀 해 주고. 나 정말, 생각도 못 했단 말이야.”
너무 놀랐던 탓에 에드문트에게 대체 왜 그랬냐고 화를 낼 겨를이 없었다. 설마 일부러 자신을 놀렸겠는가 싶기도 했고.
‘그렇잖아. 에디 저 표정…… 저게 연기면 너무 소름 끼치는걸.’
맞은편에 보이는 에드문트의 표정은 웃음기 하나 없었다. 엘리아가 퍽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놀란 모습을 보였는데도 말이다.
외젠이었으면 진작 배 잡고 낄낄거렸을 텐데.
늘 큰 변화 없던 에드문트의 반듯한 얼굴이 창백해진 걸 보아, 엘리아가 놀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맙소사. 여태 엘리아가 본 에드문트의 얼굴 중 가장 안쓰러워 보이는 꼴이었다. 찌푸린 것도 아니고, 얼굴색이 변한 것이니 의심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 내가 놀랄 거라고 생각도 못 하는 게 에디 너답지.’
역시나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예상했던 말로 사과했다.
“미안해, 엘리. 네가 놀랄 줄은 몰랐어.”
“후우……. 그래, 이제 괜찮아. 진짜로 괜찮아. 에디 너도 덩달아 같이 놀랐나 보다.”
“설명하는 것보다 한번 보여 주는 쪽이 나을 것 같았어.”
“그래. 그랬구나. 아하하……. 덕분에 확실히 알았네. 전에 처음 탔을 때 벨젠 경에게 창문 열면 안 되냐고 물어봤더니 위험하다고 했는데.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거든? 이래서 안 된다고 했구나. 공작가 마차 창문에는 전부 다 저런 게 있어?”
“바닥과 천장, 문에도 비슷한 장치가 있어. 어느 방향이든 일정 이상의 충격이 오면 바로 장치가 작동돼. 매번 작동을 확인해야 하니까 마차 수를 최소화하는 거야. 바닥에는 자세히 보면…….”
엘리아가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에드문트는 마차 곳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숨겨진 장치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다시 놀라고 만 엘리아가 손사래를 치며 에드문트를 만류했다.
“잠깐, 잠깐! 에디, 그거 기밀이잖아. 나한테 알려 주면 안 되는 거! 나는 괜찮아. 혼자 탈 때는 좀 조심해야겠지만, 으음.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거잖아? 맞지?”
저번에는 엘리아가 들고 간 선물을 확인하지도 않고 바로 전달하게 하더니, 이번에는 안전을 위해 비밀리에 설치해 두었을 장치들까지 알려 주려 하다니.
“이런 것들 전부 호위 기사들이 목숨 바쳐 지켜 내는 비밀이잖아? 그러니까 나 안 알려 줘도 돼.”
“괜찮아. 엘리 네겐, 뭐든지.”
기껏 저를 걱정해서 사양했더니, 다정한 말이 마치 자기 차례인 양 기어 나와 엘리아의 걱정을 끊어 냈다.
괜찮다니. 엘리아가 뭐든 괜찮다는 에드문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알려져도 상관이 없을 정보라서 엘리아에게 말해 주는 걸지도 모른다. 또는, 엘리아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고 배신할지를 시험한다거나.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경로를 추적하려 든다거나.
‘어휴 이런 피해망상은 그만하자. 너무 바보 같잖아.’
왜냐하면, 엘리아는 이제 에드문트에게 의미가 있는 사람이니까.
더는 에드문트가 자신을 농락한다거나, 시험하리라 의심할 수는 없었다.
물론 엘리아가 갑자기 에드문트의 진짜 심경을 이해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엘리아를 향한 에드문트의 마음은, 어린 소녀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진심이야, 엘리.”
절박했으니까.
‘엘리 너를 잃고 스스로 껴안은 죽음이든, 너에 의해 껴안게 될 죽음이든. 내겐 별반 다르지 않아. 네가 원하면 나는, 얼마든지 네 손 아래에서 죽어 버릴 수도 있어.’
누군가의 이해와 동정을 구할 생각조차 포기할 만큼 아득했으니까.
다만 엘리아는 에드문트에게 의미 있는, 아마도 특별해진 자신의 처지에 서서히 적응하고자 했다.
적응이라 할지, 괴물에게 삼켜지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지.
‘그러니까, 나라서 괜찮다는 말인 거지? 나 때문에 위험해져도 괜찮다는 그런 의미인 거야?’
엘리아에게만큼은 여전히 푸른 기가 남아 있는 듯 보이는 눈동자를 향해, 물어보았다.
정말로 내가 네게 특별하냐고.
“에디.”
푸른 꽃이 대답했다. 시선을 맞춰 옴으로써.
네가 특별하다고. 보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담고, 너 하나를 만나겠다고 찾아올 만큼.
‘그럼 얼마나……? 내가 너한테 어느 정도인 거야?’
이내 적응하게 했다. 엘리아가 푸른 꽃을 향해 호기심을 느껴, 기어코 스스로 손을 뻗도록 유혹하고야 말았다.
“오늘은, 너무 놀라서. 대신, 다음에 보여 줄래? 마차에 있는 장치들 말이야.”
“물론.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음. 그때는 놀라게 하지는 말고 미리 알려 주면 좋겠어. 알았지?”
“약속할게.”
“그리고, 이야기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에디 너도 알겠지만, 나 평소에는 서점에 한 달에 한 번씩만 가잖아. 그러니까…… 그게 매달 두 번째 화요일이고, 라스페가에 저녁 먹으러 가는 것 말고는 그게 내 유일한 외출이잖아?”
엘리아는 마치 에드문트가 당연히 자신의 외출을 알고 있으리라 가정하고 말했다. 혹시 엘리아가 아직 자신을 의심하느라 떠보려는 걸까 싶었지만, 눈동자가 너무 맑았던 탓에 의심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차피…… 정말로 엘리아가 에드문트를 의심하여 묻는 말이라 해도 괜찮았다. 에드문트는 아무렇지도 않아야 했으니까.
의심도, 경멸도. 엘리아가 제게 주는 거라면 무엇이든 순순히 받아 삼켜야만 했다.
이미 한 번 겪었던 죽음이라 할지라도.
“어……? 에디, 듣고 있어?”
“응, 듣고 있어.”
“설마 몰랐어? 서점 말이야.”
순간, 에드문트의 손 아래에서 ‘뚝’ 하는 소음이 들려왔다. 주먹을 쥐어짠 탓에 두꺼운 장갑의 실밥이 터지고야 말았다.
‘서점의 일을 모르고 있었냐고?’
설마 몰랐느냐는 말, 그리고 서점이라는 단어가 뒤섞여 심상치 않은 뜻을 내비치려는 듯 굴었다.
닐스 튀링겐이라든가. 부모의 마차 사고라든가.
‘설마, 엘리아가 이미 튀링겐의 정체를…….’
생각과 동시에 에드문트는 마차가 크게 덜걱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진동 하나 느껴질 리 만무했으나, 적어도 그에게 시야가 뒤집히는 듯한 감각은 현실이었다.
“아, 미안해 에디. 나는 당연히 네가 알고 있을 줄 알았어.”
엘리아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분명 현실이었다.
“내가 외출할 때마다 라스페가의 호위가 항상 동행하잖아? 그래서 화요일마다 서점에 온다는 것도 에디 네가 다 알고 있는 줄 알았지 뭐야.”
다행히 엘리아에게서는 에드문트가 우려했던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새카맣게 잠겼던 시야가 밝아지며, 그제야 저를 바라보는 엘리아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에드문트는 두려움에 집어삼켜져 이성을 잃을 뻔한 순간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다행히 처음 겪은 혼란은 강렬했지만, 순식간에 에드문트를 지나쳐 갔다. 엘리아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짧은 순간 동안만 존재했을 뿐이었다.
“호위 일, 알고 있었구나.”
다행히 목소리도 어색하지 않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이상했더라면 엘리아의 표정이 바뀌었을 테니까.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엘리아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모습,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마음도, 평온한 감정까지. 뭐든 가감 없이 에드문트에게 보여 주었으니.
덕분에 타인에게 둔감한 그조차 엘리아의 감정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음? 당연하지. 오늘 아침에만 해도 공작가 호위 인력 대금 지급 건을 처리하고 왔는걸? 아, 오해하면 안 돼. 깎아 달라고 대금 이야기 꺼내는 거 절대 아니야! 나도 염치가 있지. 공작가에 신세 지는 게 그거 말고도 수십 건인데…….”
“오해하지 않을게. 걱정하지 마, 엘리.”
“진짜지? 아! 근데 말이야, 에디. 내가 라스페가에 호위 인력을 신세 지고 있다는 거 아는 게 놀랄 일이야? 혹시 외젠이 나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한다고 막 뒷말이라도 했어?”
“아니야. 따로 말한 적이 없어서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흐음…… 정말로?”
“응, 그리고 너와 로앙 백작의 행적은 보고가 올라오기는 하지만 따로 들춰 본 적은 없어.”
“아, 그렇구나. 하긴, 에디는 바쁠 테니까. 나야 오빠가 하는 일 중에 몇 건만 도와주니까 일 처리 하다 보면 시시콜콜한 것까지 읽게 되더라고. 은근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아서 시답잖은 책보다 훨씬 더…… 아, 이게 아니고 내가 원래 하려던 말은 그러니깐.”
엘리아는 본인이 에드문트를 벼랑 끝으로 밀어 버렸다가 다시 끌어 올려 줬다는 걸 모른 채, 제가 할 말만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에는 수다스럽다는 인상이 강했다. 에드문트는 아주 어렸을 적에도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으니, 그의 부모조차 대답 없을 에드문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에디, 나랑 같이 놀자. 응?>
포기하지 않고 에드문트를 쫓아다니며 같이 놀자고 졸랐던 아이는 엘리아가 유일했더랬다.
‘그래. 당신은 결혼 직후만 하더라도 어릴 때처럼 곧잘 말을 걸어왔지.’
<에디, 정원에 왜 꽃이 하나도 없어? 혹시 꽃이 싫거나 해서 일부러 안 심은 게 아니라면, 내가 맘대로 심어도 될까? 일단 염두에 두고 있는 꽃은…….>
<3층에 빈방이 하나 있던데, 당신이 안 쓰면 내가 써도 될까? 써도 되지요? 지금 화실로 쓰는 방이 햇빛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옮기고 싶어서.>
<에드문트, 나 3층 서재에서 진짜 오래된 책 한 권 찾았는데…… 음. 아니야, 바쁜가 보네. 다음에 이야기할게.>
그러다가 엘리아가 완전히 입을 다물게 된 게, 아마도…….
<또 장례식에요? 피곤해서 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
닐스 튀링겐이 죽었을 때 즈음이었으리라.
다시 튀링겐의 이름을 떠올리자 얕은 두통이 느껴졌다. 분명 앞으로 수십 번은 곱씹어 봐야 할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그 어떤 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엘리아 하나만 눈에 담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으니까.
“그…… 러니까 말이야. 다음에, 또 갑자기 만나는 것보다 차라리 약속을 잡는 게…… 그래서 내 말은, 화요일에 내가 서점에 오거든…….”
긴장감이 혀를 굳게 하고, 굳은 혀가 만들어 낸 소리가 다시 저를 부끄럽게 해 긴장케 하고. 악순환에 빠진 엘리아가 허우적대었다.
그러나 창피를 당할지언정 포기하려 하지는 않았다.
한번 결심한 마음이, 흔들릴 줄 모르고 에드문트를 향했다.
“네가 공작님이잖아? 호위 기사들도 저렇게나 많은데 나 때문에 네가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하고 그러면 번거로울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정말로.”
“알겠어, 엘리.”
답지 않게 버벅거리기만 하느라 엘리아의 얼굴이 울상이 되자, 에드문트가 나섰다.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뻗어 나오고 말았다.
고통스러웠다.
지척에 있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발갛게 오른 여자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니. 살짝 떨리는 손을 잡고, 저를 받아 달라고 애원한 뒤에…… 허락받은 가장 여린 곳에 흔적을 박아 넣을 수가 없다니.
식을 줄을 모르고 계속 붉어진 채 선명한 귓불에 속삭일 수조차 없음이.
혹시나 닿을까 봐 두꺼운 장갑 안으로 살갗을 숨긴 채, 작위적인 웃음만 흘려야 한다니. 겨우 억누른 열망이 목소리에 섞여 나왔음을 자각해 긴장하는 꼴이나 보여야 한다니.
엘리아.
“다음 달 두 번째 화요일에, 네가 괜찮다고 하면 서점에 데리러 올게.”
다음 달의 두 번째 화요일을, 지나 보내고…….
“그리고 엘리 네가 괜찮다면, 그다음 달의 화요일도.”
몇 번의 화요일을 넘겨야, 가을이 올까.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네가 점점 나에게 다가오는데, 나는 더는 견디기 버거워져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어.
에드문트는 죽여 버렸던 닐스 튀링겐을 두고 다시 선택해야 한다는 것도, 복수가 아닌 치기 어린 질투심에 청년을 해치고자 하는 충동마저도 잠시 미뤄 두고 말았다.
꽃망울이 움튼 3월이 지나가고.
4월. 시린 봄바람을 버텨 낸 생명을 위해 따듯한 햇살이 내리쬐는 시기.
엘리아가 성년이 되기까지, 반년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