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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어느 화요일을 위하여 (13/79)

13. 어느 화요일을 위하여

작은 서점 안에, 네 명의 사람이 만들어 낸 긴장감이 감돌았다.

떠나려던 엘리아는 갑자기 등장한 자신의 약혼자를 바라보았고, 엘리아를 붙잡아 보려던 닐스 역시 서점 안으로 들어선 공작을 바라보았다.

함께 온 공작가의 보좌관마저 서점 안으로 들어선 공작의 행동이 어쩐지 평소와 다르다는 느낌에 그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대화 한 마디 나누지 않고도 이곳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로 에드문트 라스페를 꼽은 셈이었다.

그리고 모두의 주목을 받은 공작은, 어린 닐스 튀링겐과 자신의 약혼자를 동시에 눈에 담았다.

의도하지 않아도 에드문트의 눈에는 두 사람의 모습뿐만 아니라 조금 전까지 엘리아가 앉아 있었을 소파, 그리고 높이 쌓인 책이며…… 다른 손님 하나 보이지 않는 빈 서점의 풍광이 차곡차곡 들어왔다.

엘리아를 향해 살짝 뻗은 닐스 튀링겐의 손 또한 눈에 들어온 건 당연했다.

시선을 눈치챈 닐스가 뻗다 만 자신의 손을 등 뒤로 거두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눈이 마주쳤다.

새까만 눈동자를 담은 공작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감히 자신의 약혼자에게 손을 뻗으려 했던 청년을 향한 견제도, 멸시도.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런 감정도.

닐스 튀링겐은, 엘리아를 ‘손님’으로 맞은 허름한 서점 주인일 뿐이었다. 그가 엘리아에게 한낱 동갑내기 서점 주인일 뿐인 것처럼 말이다.

‘제기랄.’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에드문트 라스페는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닐스가 엘리아를 향해 뻗은 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그럼에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빛을 유지하는 건…….

‘견제할 필요조차 없다는 거겠지.’

그럴 만도 했다. 닐스 튀링겐은 황후의 숨겨진 조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열여덟의 애새끼였을 뿐이었으니까.

글쎄, 좀 더 높은 곳을 갈망하여 노력한다면 처지가 달라질까 생각해 본 적이야 있었으나 어느 것 하나 쉬워 보이지가 않더라.

검술에 나름의 조예가 있었지만, 닐스가 출정하여 공훈을 세울 만한 전쟁은 벌어질 예정이 없었다.

중앙 권력을 욕심내어 진출하려 해 봤자 황제와 피가 섞이지 않은 그는 달리 끌어올 세력이 존재치 않는다.

그나마 가진 거라곤 황후가 애지중지하다 못해 제국 변방에 숨겨 자라도록 한 조카라는 꼬리표인데, 그게 언제까지 닐스의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되레 황후라는 이모님의 지위가 내게 독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르지. 두 분 사이에 자식을 보아 내가 차기 황제의 사촌쯤 되는 지위를 가지지 않는 한은.’

닐스는 제 주제를 알았다. 더 높은 곳에서 권력을 누리고 싶다는 야망은 당연히 있었으나, 현실은 그를 시작도 하기 전에 좌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니까.

침묵하고 더 욕심부리지 않는 쪽이 현명한 선택이 되리라 믿었다.

만족스러운 삶은 아니지만, 딱히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잘못된 선택으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쪽보다는 나으니까.

한데, 엘리아를 차지한 에드문트 라스페는 어떻던가.

그의 부모가 일찍 사고로 세상을 떠나 혈혈단신이 되었으나, 라스페 공작가는 오히려 공작 부부가 살아 있던 시절보다 확장된 세력을 과시하는 중이었다.

<지난번 황성 연회 때 만취한 크라우제 후작이 제대로 말실수를 했다지? 별 볼 일 없는 제 사위 대신 라스페 공작이 제 편이었어야 한다고.>

<제 손자뻘 되는 정적을 평소에 얼마나 탐을 내 왔으면.>

<공작이 그 크라우제 후작이 말실수하게 할 만큼 보통내기가 아니라 이거지.>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크라우제 후작마저 그를 탐낼 지경이었으니.

사람들은 에드문트 라스페를 두고 ‘가장 낮은 신분으로 태어났어도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왔을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라스페 공작이 한낱 서점 주인일 뿐인 닐스 튀링겐을 견제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며, 실제 견제 비슷한 시선이 닿지도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시선을 떼지 않는 그의 태도가 이상했다. 시선의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아…… 하하. 이것 참 대단한 우연이지 않습니까? 제가 마침 공작님을 모시러 근처로 향하던 중에 우리 로앙가 기사님이 눈에 딱 들어온 덕분에! 아가씨께서 이렇게 운명처럼 공작님과 한날한시에 외출하셨구나, 그걸 제가 딱 깨달았지요. 하여 이 미천한 보좌관이 고집 내세워 공작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서점 안을 휩쓴 기이한 분위기를 감지한 한스가 수습에 나섰다. 그는 단지 공작을 약혼자와 만나게 해 주고 싶었을 뿐이지, 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되는 현장에 끼어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귀족들의 치정 관계란 사교계에서 거들먹거리며 떠들기엔 무척 매력적인 이야깃거리였으나, 그 소문의 당사자 중 하나가 한스가 모시는 상관이 되면 대단히 애석한 일이 될 게 분명하다.

‘그야…… 여기 있는 셋이 얽히기라도 했다가는 누군지도 모를 저 청년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가며 끝날 게 뻔하잖아? 게다가 뒤처리는 또 내 몫일 테고. 어휴, 생각만 해도 안 될 일이고말고.’

다행히 호들갑스러운 한스의 변명은 금세 엘리아의 관심을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래요? 정말 우연이네요. 나 평소에 밖에 나온 적이 잘 없는데.”

“그러니 우연이고, 또 운명이지요! 하하. 자, 공간이 다소 비좁은데…… 혹시 아가씨께서 볼일 다 보셨다면, 자리 옮기시는 게 어떤지요? 두 분께서 또 이렇게나 ‘운명처럼’ 만나셨으니 말입니다.”

“아니, 일단 그, 잠깐만요. 밖에 테오 경 있지요? 우리 가문의 기사요. 실은 내가 책값을 아직 안 냈는데 돈이 테오 경에게 있어서요.”

“그런 일이라면 전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으흠. 이쪽에 쌓여 있는 게 아가씨께서 구매하신 책인가 봅니다. 어휴. 취향이 대단히 고급스러우십니다. 자, 서점에 남은 일들은 제가 전부 처리하고 뒤따르겠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한스의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엘리아가 떠밀리듯 서점을 나섰다. 황송하게도 에드문트가 직접 엘리아를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작별 인사를 하기에는 어색한 분위기였던지라, 대신 닐스를 보며 눈인사만 슬쩍 건네었다.

“잘 가, 엘리.”

치기 어린 청년은 눈앞에 약혼자가 있는데도 여자의 애칭을 불러 가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엘리아는 그를 향해 애매한 미소를 보여 주곤 서점 밖으로 떠났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그냥 어색하게 웃고 마는 모습이, 참으로 엘리아다웠다.

그리고 두 사람의 묘한 태도를 본 한스가 곧장 눈을 빛냈다. 잠시 억눌러 두었던 그의 오지랖이 건수를 만나 요동쳤다.

‘흐응…… 아가씨 애칭을 부른다고? 이거, 그냥 서점 주인이 아닌가 본데. 정말 삼각관계 아니야? 그럼 안 되지. 절대 안 되고말고!’

그는 주제도 모르고 헛꿈을 꾸는 청년을 말려 줄 사람이 바로 한스 마이어, 자신뿐이라고 믿었다.

‘크흡. 미안하다. 그래도 이게 다 당신 살리려고 하는 짓이라고. 절대 내가 괜한 심술부리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니라니깐?’

엘리아가 떠나며 남긴 흔적이 종소리가 되어 문가에 울렸다. 한스는 문 닫힌 소리가 완전히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정제된 표정을 짓고는 몸을 휙 돌렸다.

“에헴.”

헛기침을 해서 주의를 끌자, 서점 청년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한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고, 눈빛에 찔려 죽겠네.’

제법 날이 서려 있었지만, 4년째 공작의 눈빛을 감당해 온 한스에게는 그저 햇병아리의 몸부림일 뿐이었다.

에드문트 대신 귀족들 접대를 도맡아 온 한스는 먼저 익숙하게 서점 청년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었다.

‘어디 보자, 옷이며 구두까지 고급이시군. 기성품은 절대 아니고, 하면 귀족가 자제가 틀림없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란 말이야? 이거 아주아주 수상하네.’

한스는 엘리아가 드나들던 서점의 주인의 정체를 가늠해 보려 애썼다. 아마 저택에 가면 대략 신원을 파악해 둔 자료가 마련되어 있겠지만, 제 안목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지를 파악해 보는 여흥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라스페 공작님의 보좌관, 한스 마이어라고 합니다. 서점 주인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서점 문 닫을 생각이니 이만 나가 주시지, 한스 씨.”

“오. 갑자기 말입니까? 우리 공작님의 ‘약혼자’께서 나가시자마자 문을 닫는다니…… 심지어 책값 받을 생각도 안 하시고.”

“다음에 엘리아에게 받으면 되니까 당신이 상관할 일 아니야.”

때마침 라스페가의 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선 한스에게 출발해야 함을 알렸다. 한스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높이 쌓아 올린 일곱 권의 책을 품에 안은 뒤 작별을 고했다.

서로의 안녕이나 비는 살가운 인사는 단연코 아니었다.

“글쎄요, 다음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는데. 뭐, 책값이 아쉽게 되면 라스페가에 서신을 넣어 주십시오. 공작님께서 ‘약혼자’의 책값쯤이야 아까워하실 분이 아니시니까 말입니다.”

약혼자라는 말에 일일이 반응하여 이를 가는 청년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내가 요즘 일 멈추면 죽는 병에 걸린 공작한테 내내 시달렸더니 나도 모르게 화가 대단히 쌓였었나 보네.’

불쌍한 청년을 두고 조금만 더 놀리고 싶었지만, 이제 나가 봐야 할 시간이었다.

“그럼 이만 가 보지요. 요즘 서점가가 불경기라던데. 장사 잘되시길 빌겠습니다, 어린 사장님.”

* * *

이죽거리던 공작가의 보좌관마저 사라지고, 닐스는 홀로 텅 빈 서점에 남았다.

아침에 잠시 불을 때 훈기가 남아 있던 서점 안에는, 여러 번 여닫친 문 너머에서 들어온 한기가 불청객처럼 밀려들어 와 서늘해지고 말았다.

공허함을 느끼는 닐스의 심경에 실로 어울리는 냉기였다.

“제기랄…… 빌어먹을.”

닐스의 입에서 욕설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절반은 갑자기 엘리아에게 관심을 보였다더니 서점에까지 나타난 에드문트 라스페를 향한 것이었으며…….

“멍청한 새끼. 정신 나간 새끼.”

절반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배려하겠다고 지껄였으면서 정작 엘리아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도망치고 싶게 만들었던 어리석은 닐스 튀링겐을 향하여.

‘여태껏 잘 견뎌 왔는데.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어째서 충분하지 않게 된 걸까. 왜 더 욕심내고야 만 걸까. 어리석었다. 후회되었다.

정말로 어쩌면, 다음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렇게나 갑작스럽고, 순식간에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니.’

그러나 어린 청년이 무지했을 뿐, 이별도 사랑만큼이나 갑작스러운 것이 당연했다.

서른둘의 에드문트에게, 엘리아의 사랑이 갑작스럽게 떠났던 것처럼.

열여덟의 엘리아에게, 에드문트의 애정이 갑작스레 찾아온 것처럼.

닐스에게도 평등하게. 그리고 예고 없이, 견뎌 낼 준비도 하지 못하게 갑자기 떠나가서는…….

“빌어먹을.”

흔적만 남기고 말았다.

이를테면, 소파 위에 살그머니 남은 여자의 체온이라든가. 어여쁜 손가락으로 한 장 한 장 짚으며 읽었을 책 열두 권이라든가.

채 줍지 못하고 떠난, 모자.

부르고 나서야 너무 성급했음을 후회하게 하는…….

“엘리……. 엘리아.”

애칭이라든가. 혹은 더는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름이라든가.

그렇지만 이미 시작된 기다림을 멈추는 방법을 모르는 까닭에, 애틋한 사랑에 아파하는 남자는 결국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말리라.

후회하는 것도, 잊어버리는 것도 너무나 버거운 나머지 어제의 기다림을 오늘도 내일도 이어 가 일직선을 그리리라.

남겨진 책을 이불 삼아 덮고, 두고 간 체온을 애써 훑어본 다음에 다시 기다려야 하겠지.

화요일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멍청한 새끼, 왜. 왜 잘 가라고 한 거야. 다시 와 달라고 해야 했는데. 또 만나자고 해야 했는데. 어째서. 잘 가라는 멍청한 인사말을 건네서는…….’

마지막 어느 화요일에 다다르고 나서야 멈추는 법을 알게 되겠지. 다음이 없었음을 확인하게 되겠지.

그렇게 기다리겠지. 오늘을 후회하면서. 외롭게, 애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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