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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기억 (12/79)

12. 기억

라스페 공작 부부가 죽었다. 에드문트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

“도련님, 마차가 균형을 잃고 그대로 추락하여…….”

어린 에드문트에게, 수하는 공작 부부의 죽음이 제국에서 하루에 몇 번꼴로 벌어지는 마차 사고 때문이었다고 전했다.

“사고 전에 마차에 조작이 있었는가.”

“그게, 실은…….”

에드문트는 그 뻔한 거짓말에 넘어가 주지 않았다. 애초에 마차 사고라는 진부한 죽음의 뒤에 숨겨진 진실을, 라스페 공작가의 가신은 짐작하면서도 쉽게 입 밖에 낼 수 없었을 뿐임을.

에드문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죽음이라.

기어코 라스페 공작 부부를 살해하는 데 성공한 정적들에게 새삼스럽게 화가 치밀 리는 없었다. 태어난 후부터 하루하루가 죽음과의 사투로 점철되어 왔던 건 라스페 공작가나 정적들의 가문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서로의 가족이 탈 마차 바퀴에 장난질하거나, 향긋한 차에 독을 넣는 일 따위야 일상이나 진배없었다.

죽음을 바라는 가문들 간의 안부 인사나 다름없는 허술한 수법에 죽어 버리고 말았으니, 에드문트는 슬픔이나 분노에 앞서 죽어 버린 부모를 향한 미약한 혐오감을 먼저 떠올렸다.

<더는 버티기가…… 어렵구나. 이제는…….>

자식의 앞에서 삶을 포기하고 싶다고 읊조리곤 했던 나약한 부모를 향하여 내어 줄 슬픔은 애초에 가진 적도 없었다.

까맣게 변한 은 식기를 멍하니 바라보곤 하던 에드문트의 부모는, 도망치지 않았던가. 바라던 대로 더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아도 되는 곳을 향해서.

이제 더는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애쓸 필요가 없어졌으니…….

웃었을까.

마지막 순간에, 남겨질 자식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아마도, 그저 다가온 안식에 기뻐하느라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으리라.

* * *

장례식은 화려하고, 동시에 음산했다. 같은 마차를 타고 가던 중 함께 변고를 당한 로앙 백작 부부의 시신이, 라스페 공작 부부의 시신과 나란히 누워 마지막으로 세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남겨진 사람들이 한곳에 모인 가운데, 울음은 오직 한쪽에서만 서럽게 들려왔다. 다정하던 로앙 백작 부부를 그리워하는 사용인들의 서러운 울음.

“저리 어린 분들만 남기고 떠나는 길이, 어찌 편하실까요.”

“다른 사람에게 화 한번 끼친 적 없는 분들이셨는데.”

진심이 담긴 눈물이 땅을 적시는 소리. 그 아득한 울림이 마치 땅에 줄을 그어 둔 듯, 에드문트의 반대편에서만 요란했다.

라스페가의 사람들은 죽음과 사투를 벌이느라 지쳐, 슬퍼할 기력조차 남지 않은 채 조용히 슬픔을 삭였다. 누가 들을까 두려운 듯 한탄 같은 눈물만 조용히 흘릴 뿐이었다.

공작 부부는 지난주 식탁에 올라온 독을 마시고 죽을 수도 있었다. 잠자리에 날아든 서슬 퍼런 암기에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 끊이지 않는 죽음의 위협을 사용인들의 목숨과 맞바꿔 지나쳐 왔으면서, 마차 사고 따위로 죽어 버리다니.

공작 부부의 목숨을 겨우 며칠 더 연명시켜 보겠다고 희생한 동료들의 얼굴이, 라스페가 사람들의 가슴 속에 하나하나 맺혔다. 아롱진 한이 눈물 대신 떨어져, 소리 낮춘 슬픔과 함께 장례식을 채웠다.

대비가 명확한 풍경의 중심에 에드문트가 있었다. 바람이 멈춘 들녘에서 슬픔 한 줄기 보이지 않으며, 에드문트는 그저 아무렇게나 던진 시선에 들어오는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값비싼 목관에 닿았다가, 흰 꽃 무덤을 스쳤다가…… 울음소리가 들리는 왼쪽으로도 눈을 돌려 보았다.

“엄마…… 아빠…….”

부모의 죽음을 인지나 할지 모를, 그의 어린 약혼자의 소리가 먼 곳에만 내리는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시끄럽지는 않았으나, 에드문트는 대체 왜 아이가 제 오빠의 품에 안겨 비 내리는 소리를 흉내 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물을 흘리면 이미 죽어 버린 부모가 살아 돌아오리라 믿는가. 쏟아 내고 나면, 나아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에드문트도 한 번쯤 눈물을 짜내는 시도를 해 보려 했으련만.

‘의미 없는 짓일 뿐일 텐데.’

어린 엘리아는 제 눈물도 멈추지 못하면서 외젠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며 작은 손으로 열심히 오라비의 얼굴을 훔쳐 대고 있었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의미 없이 담아내던 광경 속에서, 아이의 행동만이 유일하게 에드문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오빠, 울지 마…….”

주변에 모인 이들의 수군거림보다 멀찍이 떨어진 엘리아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푹 젖은 옷자락에 얼굴을 비비던 중 자신과 눈이 마주칠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우연이었을까. 내내 훌쩍이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에드문트와 시선이 맞닿음과 동시에 멎어 들었다.

“…….”

외젠이 품 안에서 흐느적거리는 엘리아를 곧추안으며, 잠시나마 서로를 향하던 시선은 금방 끊기고 말았다. 하나 에드문트는 눈을 돌리지 않고 엘리아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체 얼마나 울어 댄 건지, 눈물 자국을 덧칠해 댄 볼이 찢어진 캔버스처럼 벌겋게 부어 있는 게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게 마치 에드문트를 질책하는 듯했다. 엘리아의 얼굴은 마치 슬픔을 그림으로 정직하게 표현해 낸 듯 보였기에.

누군가 아이의 얼굴을 가리켜 ‘얼굴에 덧댄 저 붉은 기가 바로 슬픔이니, 당신도 마땅히 아이의 가련한 얼굴을 흉내라도 내야 한다.’라고 종용해 왔다.

죽은 부모가, 슬퍼하지 않는 그를 원망이라도 하는 건지.

에드문트는 아이의 그림 같은 모습을 흉내 내는 대신, 슬퍼하는 아이들을 두고 덧없이 떠나 버린 그들의 부모를 생각했다. 이어 제 부모의 부재를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죽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처음으로 그들의 죽음에 아쉬움을 느꼈다. 기억 속의 나약한 부모를 떠올리며 그들을 치죄했다.

‘비겁하게 살아남아선, 본인들의 나약함이 자초한 결과를 볼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스스로의 우매함을 깨닫기도 전에 죽어 버리다니. 달아나다니.’

원망한들 이미 부모는 죽었고, 열두 살의 에드문트는 혼자 남았다.

홀로 남은들, 에드문트의 생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리라.

<에드문트, 무력한 우리를 부디 용서해다오…….>

그는 늘, 기댈 곳 하나 없이 홀로 죽음과 맞서 왔으므로.

* * *

장례식이 시작되자 타인의 슬픔을 구경 온 외부인들이 라스페 공작령에 모습을 드러냈다.

공작 부부가 죽기 전, 이미 라스페 공작가는 황제로 옹립하려 했던 1황자가 급사하며 세력이 무너지던 중이었다.

한데 어린 후계만 남기고 가주 부부가 사망하기까지 했으니, 가문의 몰락을 예고하듯 방문객들의 면면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공작가의 안타까운 상실에 제국의 주인을 대리하여 애도를 표합니다.”

황실에서는 ‘황후의 병환’이라는 한결같은 핑계를 대며 대리인을 보내왔다. 체면을 살려 줄 동정심조차 아까웠는지, 황실 대리인이라던 자는 번듯한 직함도 없는 하급 귀족이었다.

“그 여자는 골골대면서 죽을 생각도 않는군. 확 죽어 버리기나 할 것이지.”

에드문트의 사촌 누이, 벨레노아 백작이 뒤돌아선 황제의 ‘대리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후에도 구색 맞추기에 급급한 대리인을 보내 조의를 표한 수많은 귀족가를 향해 벨레노아 백작이 쉴 틈 없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래도 속이 풀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욕설 몇 번에 풀어질 거였다면, 벨레노아가 급사한 제 부친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문드러질 일도 없었을 테니까.

시시한 조문객들이 다가와 로앙 남매를 위로하고, 에드문트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길 몇 차례.

조용하던 장례식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누군가 조문객들의 이목을 끌며 다가왔다.

“라스페 공자.”

사람들 사이로 화려한 예복을 갖춰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세.”

에드문트는 제게 조의를 표하는 노인을 앞에 두고도 아무런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곁에 있던 벨레노아가 에드문트의 몫까지 분노하며 이를 갈았다.

“크라우제 후작, 낯짝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다니.”

“동시대를 살아온 가문의 수장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는데 마땅히 얼굴을 비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벨레노아 백작.”

후작의 얼굴에는 장례식에 어울리지 않는 만족감마저 서려 있었다.

바라던 대로 라스페 공작 부부를 살해한 데다가, 공작가의 유일한 아군이었던 로앙가 부부까지 치워 버렸으니 당연히 기쁘기 그지없음이라.

‘마차가 출발한 후에, 저택에 크라우제 후작의 세력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침입한 흔적을 발견했다고 했지.’

증거는 희박하며, 복수할 수단은 잃어버렸다. 따라서 어린 에드문트, 그리고 변방에서 겨우 목숨 부지하게 된 벨레노아 백작은 3황자의 장인, 크라우제 후작을 마주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로앙 백작가에 라스페 공작가까지 변고를 당하고 말았으니……. 남은 가문들이라도 황실에 충성을 바치고, 제국을 위해 한데 힘을 모아야 함이 마땅하지.”

늙은 크라우제 후작은 엄연히 후계가 살아 있는 로앙 백작가와 라스페 공작가를 이미 멸문한 가문 취급하며 혀를 찼다.

에드문트는 그가 조롱에 섞은 암시를 읽어 냈다.

<황실에 충성을 바치고 한데 힘을 모아야…….>

‘황제가 황위를 아우인 3황자에게 넘기기로 마음먹었나 보군. 드디어.’

굳이 크라우제 후작이 으스대며 에드문트에게 알려 주지 않아도, 황제와 3황자의 결탁은 충분히 이쪽에서 예상 가능한 결과였다.

에드문트가 알고 싶은 건 그 시점이었다. 황제와 3황자가 손을 잡은 건 자신들의 형제인 1황자를 살해하는 흉사를 꾸몄을 때부터였을까. 혹은, 라스페 공작 부부와 로앙 백작 부부를 살해한 것이 그들의 첫 공동 작업이었을까.

당장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에드문트는 이제 겨우 열두 살이었으며, 제 부모처럼 허망하게 죽어 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후작께서도, 살아남은 이들을 잘 보살피셔야겠습니다.”

에드문트가 희미하게 웃었다. 부모의 장례식에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서.

“사위인 3황자께서 근래 외지에 오가는 일이 많으시다 하던데. 마차 사고란 언제 어디서 일어나게 될지 모를 만치 흔한 일이며…….”

뒷짐 진 에드문트의 손이 평안한 그의 심장 박동에 맞추어 허공을 두드렸다.

툭, 툭, 툭. 어째 고장 난 마차 바퀴 구르는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사람을 순식간에 집어삼키고 말 테니 말입니다.”

* * *

후작이 위세를 뽐내듯 데려온 가신들을 이끌고 떠나자, 어수선했던 장례식장이 다시 차분해졌다.

설움을 토하다 지친 로앙가의 사용인들, 그리고 두 남매의 울음마저 희미해지는 바람에 네 구의 시신 앞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가 시간을 따라 찾아온 침묵의 의미를 알았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에드문트.”

“예, 백작.”

“어찌 생각하나.”

“좀 더 기다리셔야겠습니다.”

“네가 성년이 될 때까지 말이지. 나더러 서른다섯에 관을 쓰려던 목표는 포기하라는 거군.”

“어차피 기다리셔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공작가를 이어받을 때까지는.”

벨레노아 백작의 부친인 1황자가 에드문트의 조부의 원조를 받아 황위에 오를 날이, 아침에 해가 뜨듯 당연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나 2황자는 기어코 제 친형인 1황자를 밀어내고 황위를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반동으로 벨레노아는 부친을 잃었고, 라스페는 황제를 잃었다.

그 후로 오래도록 복수를 기다려 왔으나…….

“그보다 더 기다려야 되지 않겠느냐.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는데. 황제는 아직도 제가 정당한 황위 계승자였던 것처럼 건방을 떨어 대고, 3황자는 장인인 크라우제 후작에게 들러붙어 힘을 키우고 있는 와중에 네 부모까지 죽고 말았으니.”

“하나 황제에게는 여전히 자식이 없고, 황위를 이을 누이께선 살아 있지 않습니까.”

에드문트는 그저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짚어 주었을 뿐이다. 하나, 그의 나이 많은 사촌 누이는 위안을 얻었다.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부모를 잃은 에드문트일진대. 저는 그저 다시 밑바닥에서부터 황위를 향해 기어 올라가야 할 뿐인데도.

벨레노아는 에드문트의 위로에 힘입어 각오를 다졌다.

“에드문트, 언젠가는 저 안에 그들이 가장 아끼는 자의 시체를 전시하자.”

비명횡사한 아버지, 제 것이었어야 할 황위, 자신을 지켜 주던 수많은 가신의 목숨.

그리고 유일하게 변절하지 않았던 라스페 공작 부부와 로앙 백작 부부의 죽음.

벨레노아는 그 모든 것들을 만회하고자 했다. 복수를 원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말입니까.”

“그래. 그보다 더 완벽한 복수란 존재치 않을 테니까.”

사촌 누이가 들먹인 ‘완벽’이라는 단어가 에드문트를 유혹했다.

에드문트는 결코 죽어 버린 부모의 복수를 열망한 적은 없었으나, 완벽한 복수를 위해 사는 삶이 어떨지 상상해 보니…….

“예. 완벽한 복수를 위해서라면.”

나쁘지 않았다. 슬퍼할 수 없으니, 대신 그는 복수하고자 했다.

* * *

화려한 목관에 저를 조롱하던 크라우제 후작의 시체를. 그리고 황후가 가장 아끼던 조카, 닐스 튀링겐의 시체를 나란히 줄 세운 건…….

에드문트가 엘리아와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난 뒤였다.

기다림은 길었으나, 황제와 크라우제 후작을 향한 복수는 허망할 정도로 간단했다.

에드문트를 비롯한 공작가의 가신들 모두 계획이 실현되기도 전에 이미 성공을 직감했다.

“황후의 조카는?”

“닐스 튀링겐 자작은 계획대로 오늘 밤 연회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크라우제 후작의 참석도 확인하였습니다. 준비는 완벽합니다.”

“그래.”

“공작님, 한데…… 정말로, 알리지 않으실 겁니까? 엘리아 님 역시 후작과 황제의 손에 부모를 잃으셨으니 이번 일은 주인마님의 복수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에드문트는 한스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 로앙 백작과 이야기가 끝난 일이었다.

<엘리는…… 이미 한 번 부모님의 죽음 탓에 삶이 망가져야 했습니다. 부모님도 모자라 엘리마저도 잃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로 말입니다. 한데, 이제 와 부모님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엘리가 다시 그때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와 같은 날 부모를 잃은 남자가 무릎 꿇어 애원했다. 제 모든 걸 줄 테니, 부디 지켜 달라고.

<부디 엘리아를…… 그 아이를, 보호해 주십시오. 제 하나뿐인 가족이고, 이제 공작님의 유일한 가족이 되지 않습니까.>

로앙 백작은 단 한 번도 제 누이를 사랑해 달라 한 적 없었다. 이루지 못할 소망은 바라지 않겠다는 듯.

다만 지켜 주기를 바랐다. 누이가 당장은 행복하지 못할지라도, 언젠가 스스로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하여.

에드문트의 곁에서, 무사히 살아남기를 바랐다.

로앙 백작의 간곡한 부탁을 수용하여,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앞에서 진실을 숨기기로 했다.

엘리아만 모르는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자 했다.

* * *

그날 밤, 엘리아는 평소보다 더 집요한 에드문트의 괴롭힘에 투덜대다 잠들었다.

열기가 남은 침실을 나선 에드문트는 집무실에서 한스의 보고를 전해 받았다.

“공작님, 오늘 새벽 닐스 튀링겐이…… 크라우제 후작을 살해한 뒤 자진하여 현장에서 사망하였음을 확인했습니다.”

보좌관의 목소리로, 에드문트는 복수를 달성했음을 확인했다.

닐스 튀링겐은 공작가에서 억지로 주입한 환각제에 미쳐, 마침 함께 자리하고 있던 크라우제 후작을 살해하였다.

이어 정신이 돌아올 틈도 없이 과량 주입된 환각제가 이끄는 대로 제 몸에 칼을 박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환각제가 상성이 맞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니, 너무 잘 맞았다고 해야겠지요.”

닐스 튀링겐이 환각제에 중독되어 사람 구실 못 하는 결과 정도만 예상했거늘, 자진하여 죽어 버렸다니. 라스페가로서는 예상외의 결과를 거둔 셈이었다.

“복수를, 축하드립니다.”

크라우제 후작은 사위를 황제로 옹립하겠다는 야심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3황자는, 장인을 잃음으로써 그토록 갈구하던 황위를 지척에 두고 추락하였다.

황후는, 하나뿐인 자식처럼 아껴 온 조카의 죽음에 기어코 정신을 놓아 버렸으며…….

황후를 지극히 사랑하던 황제 역시 제 아내가 망가져 가는 모습에 권력을 유지할 의지를 잃어버렸다.

모두가 공평하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 에드문트의, 완벽한 복수를 위하여.

“공작님, 황제가 벨레노아 백작의 승계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황위 양위 의사를 밝혀 왔습니다.”

수일 뒤, 황제가 직접 피 묻은 왕관을 벨레노아 백작의 머리 위에 얹어 주었다. 엘리아와 함께 즉위식에 참석한 에드문트는 죽어 가는 황제의 꼴을 보고 조소했다.

권력에 취해 기고만장하던 한때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황제는 황위를 마치 자신의 피골을 빨아먹는 악귀 취급하며 손에서 떼어 내기 급급해했다.

그깟 사랑 따위에 권력을 포기해 버리는 모습에 에드문트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부모를 잃고, 수많은 삶을 거두어 가면서까지 열망했던 황위였으나, 누군가에게는 겨우 사랑 따위에 순위가 밀려 내팽개쳐진다는 걸 확인하는 건 참으로 불쾌한 일이었다.

하여 완벽한 복수의 결말 앞에서, 에드문트는 기이한 불쾌감만을 느꼈다.

“축하해, 에드문트. 당신은 염원을 이루었네.”

에드문트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축하 인사를 건네는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살짝 지워진 화장 너머로 채 가리지 못한 붉은 기가 눈가에 남아 있었다.

‘울었던 건가.’

에드문트가 손을 내어 눈 아래를 짚자, 엘리아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서늘한 손길이 붉은 흔적에 닿는 걸 말없이 받아 주었다.

전날 밤, 에드문트는 벨레노아의 즉위식을 앞두고 느낀 정체 모를 갑갑함을 감당하지 못하고 엘리아에게 풀어냈다. 힘겨워하는 여자에게, 막무가내로 파고들었다.

<에드문트…….>

한데 엘리아는 평소보다 더 버거워하면서도 좀체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낭창한 팔로 그의 목을 힘껏 그러안고 눈물을 보였을 뿐.

그때의 흔적인 줄로만 알았다.

추모의 눈물인 줄 알았더라면, 죄책감을 비롯한…… 여러 감정이 뒤얽혀 만든 흔적인 줄 알았더라면.

눈물이라도 닦아 주었을 텐데.

멀찍이 바라보며 감상할 줄만 알았던 눈물을, 닦아 주었을지도.

* * *

완벽한 복수를 거머쥔 뒤, 다시 스물두 살로 돌아온 에드문트는 혼란에 빠졌다.

‘튀링겐의 자식과 엘리아가 언제부터…… 대체 무슨 이유로.’

열여덟 살의 엘리아가 닐스 튀링겐과 교류했다는 사실을, 예전의 그는 알지 못했다.

닐스 튀링겐은 성년이 되기 전까지 변방에서 자라 왔으며, 사교계에 등장해 수도 귀족들의 앞에 존재를 드러낸 건 에드문트가 엘리아와 결혼한 뒤의 일이었으니까.

공작가에서 닐스 튀링겐을 눈여겨보게 된 것, 그 쓸모를 가늠해 본 것 역시 엘리아와 결혼한 이후의 일이었고.

‘성년 전부터 이미 두 사람이 교류해 왔다면 그 뒤로 인연이 끊어진 건 단순히 결혼 때문이었던 건가. 아니면…….’

어느 것부터 붙잡고 되짚어 봐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근방의 화방을 가끔 방문했지. 그때는 이미 닐스 튀링겐이 수도에서 알려진 뒤이니 서점과는 관련성이 사라진 뒤였겠지만 이전에 화방을 방문하던 중 우연히 서점을 찾게 된 걸까.’

닐스 튀링겐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행적을 샅샅이 뒤졌던 에드문트조차, 그가 상점가 구석에서 서점을 경영했음을 알지 못했다.

엘리아도, 아마 몰랐으리라.

곁에 서 있는 서점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우연이 만들어 낸 비극 곁에…….

‘비극이라.’

에드문트는 저도 모르게 떠올린 감상적인 표현에 불쾌함을 느꼈다.

분명 엘리아에게는 비극이리라. 타인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연상하는 스스로가 참으로 생경하기는 했으나, 아마 틀리진 않았으리라.

한데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이름 뒤에 또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엘리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닐스 튀링겐과 교류해 왔다면.

그건, 에드문트 라스페에게도 비극이던가.

혼란스러웠다.

‘엘리아에게는 비극이겠지만. 나에겐 그저 과거의 반복일 뿐인데.’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을, 에드문트는 그저 유예하고자 했다. 그에게는 엘리아 곁에 선 남자를 대하는 문제가 더 시급했으므로.

<엘리가 다시 망가질지도 모릅니다, 공작님. 부디 엘리아에게는 비밀로…….>

마치 저주처럼 남았던 로앙 백작의 애원이 떠올랐다. 그가 남긴 말 한마디가 에드문트가 움직이는 규칙이 되었던 시절과 함께.

침묵, 거짓, 기만.

<북부에 간다고요? 아무것도 없는 곳을…… 게다가 수도에 온 지 겨우 며칠 지났는데. 대체 뭘 하는 거예요?>

어차피 그런 약속이 없었다 한들 에드문트는 침묵했으리라. 그가 한 일은, 전부 다 더럽고 음습한 일들뿐이었으니까.

만약, 외젠의 부탁을 외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신의 남편이 얼마나 극악한 인간인지를 말했더라면. 그러나 실은 나의 더러운 행위들이 모두 완벽한 복수를 향하고 있다고 고백했다면.

죽은 내 부모, 황위를 잃은 사촌 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 번 망가지고 말아서…….>

어린 너를 망가뜨렸다던 자들을 향해 복수했다고. 내 삶이 오직 너를 위해서 움직였다는 유치한 자긍심을 드러냈다면.

<공작님, 아…… 아닙니다. 마님께서 계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괜찮아, 한스. 에드문트한테 바쁜 일 있는 거 아냐?>

<아닙니다. 이건, 공작님께서 나중에 따로 확인하셔도 문제없는 서류라서요. 두 분 시간 방해하지 않도록 저는 잠시 뒤에 오겠습니다.>

수하가 뒤로 숨긴 서류 몇 장에, 내가 말하지 않은 북부 일정 속에 너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나의 악행이 낱낱이 드러나 있음을 알려 주었더라면.

망가졌을까?

한 달에 한 번, 결혼 전의 너는 오늘처럼 서점을 방문해 네가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미안. 책 이야기 재미없지? 근데 내가 습관이 되어서. 책 펼치기 전에 어떤 책일지 상상해 보고 데이지에게 이야기하던 게 습관으로 남아서.>

가끔은 활자 이야기가 아닌 다른 감정을 나누기도 했을 터인데.

그런 네게 닐스 튀링겐을 이용하여 크라우제 후작을, 그리고 황제를 무너뜨렸다고 자랑처럼 지껄였으면…….

<……축하해, 에드문트. 당신은 염원을 이루었네.>

이해받을 수 있었을까.

‘닐스 튀링겐이 죽고, 황제를 끌어내렸을 때. 라스페가 마침내 권력을 차지했을 때. 그때 엘리아 네가 흘렸던 눈물은, 어떤 의미였는지.’

에드문트가 묻지 않았고, 엘리아가 말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스물여덟의 엘리아가 떠나고, 죽어 버렸으니.

10년을 되짚어 돌아온 에드문트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누구도 몰랐던 닐스 튀링겐의 행적, 그 곁에서 발견된 열여덟의 엘리아에게.

알려야 할까.

실은 그가 황후가 끔찍이 사랑하는 조카라고.

황제와 황후, 그리고 크라우제 후작 일파가 네 부모를 살해했노라고.

엘리아 네 주변 사람들이 전부 그동안 거짓말을 해 왔기를, 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했을 너의 부모는 살해당했노라고.

불운을 탓하며 그저 슬픔을 삭였을 테지만 실은 네 부모의 원수가 버젓이 살아 네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고.

‘이번에는 네게 부모를 앗아 간 마차 사고의 진범을 알려 주고, 닐스 튀링겐을 이용하여 복수를 완성하겠다고 밝혀야 하는 건가.’

혹시나 진실을 밝혔다가 외젠의 우려대로 엘리아가 망가져 버린다면?

물론 에드문트는 얼마든지 망가진 여자를 끌어안고, 평생 사랑할 자신이 있었지만…….

‘곁에 두고 너를 사랑할 수는 있겠지만, 너는 다시는 피어나 주질 않겠지.’

에드문트는 이제 제 욕망과는 별개로 엘리아의 삶을 생각해야 했다.

만일의 가능성, 소유를 넘어 사랑받고 싶다는 허황된 꿈을 품지 않았던가. 복수를, 황위를, 사촌 누이를. 전부 포기해서라도 네가 망가지지 않도록 지켜야 할 텐데.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버릴 각오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나, 버린다고 엘리아가 저를 사랑해 줄지는 알 수 없었다.

복수도, 권력도 이루지 못하여 쓸모없어진 남자를 떠나려 할지도 모른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에드문트는 아득함과 동시에 피로를 느꼈다.

‘아니, 이건…… 그래.’

두려움이구나. 내가 너를 앓아, 두려움을 느끼는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만신창이가 되었던 황제와 황후처럼 될까 봐 두려워서는…….’

나약해지는구나. 멍청해지다 못해, 사랑에 먹혀 이미 무너지고 있구나.

‘엘리아. 어쩌면 이번에는 네가, 나를 집어삼키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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