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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대면 (11/79)

11. 대면

신께서 보좌관 한스 마이어를 만들 때 잠시 깜빡 졸기라도 하신 건지, 한스에게 막대한 재력과 고귀한 신분, 그리고 입을 다문 채 두 시간을 버티는 능력은 주지 않았다.

대신 절대 노력만으로는 길러 낼 수 없는 눈썰미를 내려 주셨으니, 이는 ‘제 밥벌이는 해 먹고 살라.’는 사려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

“어? 잠깐…….”

하늘의 뜻을 검증할 길은 없으나, 어쨌든 눈썰미라도 타고난 덕분에 한스는 골목 끝 화방으로 막 들어가려는 로앙가의 기사, 테오 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려 서행하는 마차 위에서 말이다.

“저 사람, 로앙 백작가의 기사 같은데. 끝에 있는 것도 귀족가 마차인 것 같고.”

당장 마차를 돌리라 해서 제가 본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공작가의 마차는 멈출 줄 모르고 길을 달렸다.

다섯 골목 떨어진 곳에서 모 상단과 계약을 끝마치고 나올 라스페 공작을 모시러 가는 중이니, 지체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 방금 지나친 길이 몇 번 길인가?”

“저기 화방 있던 곳 말씀하시는 거라면, 12번가입니다.”

“12번가라…… 저쪽에 귀족 나리들이 다녀갈 만한 상점이 있던가?”

“어휴, 무슨요. 여기 일대는 다 평민들 상대로 장사하는 곳입니다. 높으신 분들이 다니는 상점들은 전부 지금 가는 8번가 언저리에 몰려 있지요.”

“흐음…… 이상한데. 분명 길에 딱 귀족가 마차이다 싶은 게 서 있는 걸 봤는데.”

“뭐, 귀족 나리들 오시면 안 된다고 길 막아 장사하는 곳은 아니니까요. 호기심에 들른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 로앙가 아가씨는 취향이 꽤 특이해 보이긴 했지.”

한스가 엘리아를 본 건 겨우 한 번뿐이었지만, 제가 이래 봬도 신이 내려 준 듯 날카로운 눈썰미를 타고나지 않았던가.

질릴 정도로 많은 꽃을 가지고 로앙가에 들렀을 적, 운 티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응접실에 들어왔던 아가씨는 딱히 신분 고하를 까다롭게 따질 만한 성정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니 평민들 다니는 길에도 스스럼없이 다닐 법했고.

‘역시 내가 본 건 로앙가의 아가씨가 탄 마차였으려나? 호위 기사 중 하나가 잠시 심부름을 하는 중이었고? 크흠. 진짜라면 완전 월척인데.’

그러나 곧장 라스페 공작에게 보고하기는 망설여졌다. 아가씨가 계신 걸 확인했으면 몰라도, 그가 본 건 겨우 호위 기사로 추정되는 사람 하나뿐이었으니.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 한스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며 갈등했다.

‘그냥 닥치고 있어야 하려나?’

조금 전 12번가에서 로앙가의 마차를 본 것 같다는, 어쩌면 엘리아 아가씨가 탄 마차일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모험을 할 것인가. 그냥 잘못 봤겠거니 생각하고 입을 다물 것인가.

“벨젠 님, 조금 전에 12번가에서 한스 님이 로앙 백작가의 기사를 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고민을 강풍 앞의 편지처럼 말끔히 날려 준 건, 공작가 마부의 입이었다. 마부는 공작을 호위하는 벨젠 경의 얼굴을 보자마자 12번가에서 한스가 지껄였던 말을 고대로 옮겨다 주었다.

“12번가 말입니까.”

“예, 저는 마차에 신경 쓰느라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길가에 마차가 세워져 있는 것도 보셨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맞지만 확실하진 않습니다. 거, 공작님께서는 아직이신가 봅니다?”

남은 말하느냐 마느냐로 머리 터지게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기껏 머리 쓴 게 의미 없어진 한스가 살짝 기분 나쁜 티를 드러내며 대충 대답했다.

“공작님께서는 시간이 더 걸리는 모양입니다. 한데 12번가에 마차라면, 로앙가의 아가씨일 가능성이 크겠군요.”

“예? 그거 확실합니까?”

“평소에는 한 달에 한 번 화요일만 12번가에 나오시는 거로 알고 있지만, 로앙 백작께는 들은 바가 없었으니 아마 엘리아 님이 맞을 겁니다.”

“아니, 그것참 좋은 소식이긴 한데. 벨젠 경께서 화요일이니, 12번가이니 그런 건 어째 아십니까?”

“엘리아 님께서 자주 찾으시는 서점이 12번가에 있습니다.”

“예에?”

벨젠 경의 대답에 한스는 ‘당신이 어째 로앙가의 아가씨가 다니는 서점까지 아느냐.’라는 의혹 어린 표정을 지었다.

졸지에 한스에게 엘리아 뒤꽁무니 쫓아다니는 사람 취급받게 된 벨젠 경이 서둘러 변명했다.

“로앙가에는 호위 업무에 능숙한 이들이 적은 탓에 라스페가의 호위들이 인원을 채워 주고 있습니다. 당연히 호위 업무에 관한 보고도 올라오니 저도 로앙가분들의 기본적인 행적은 알고 있습니다.”

“아…… 그러면 지금도?”

“예, 아마 지금도 라스페가의 호위들이 있을 겁니다.”

“흐음. 그러면 급히 확인해 줄 수 있습니까? 지금 12번가에 엘리아 아가씨께서 오셨는지 말입니다.”

“확인이야 가능합니다만, 무엇 때문인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그야, 공작님께 보고드리려고 그러지요.”

한스의 대답에 이번에는 벨젠 경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한스가 대체 왜 공작에게 엘리아의 행적을 보고하려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어리둥절한 기색을 눈치챈 한스가 바로 거들먹거리며 혀를 찼다.

“하이고. 보십쇼, 벨젠 님. 우리 공작님께서 쉬이 외출하시는 분이 아니고, 엘리아 아가씨께서도 화요일? 뭐 그때만 나오시는 게 사실이라면 오늘 이렇게 두 분이 동시에 모인 건 그야말로 하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하. 한스 님께서 중매쟁이 노릇을 하시려나 봅니다.”

“중매쟁이라니, 엄연히 약혼으로 인연이 있는 분들인데. 그냥 각자 갈 길 가시라고 저희가 손 놓고 있으면 오히려 근무 태만 아닙니까. 근무 태만!”

마부의 첨언에 과한 반응을 보이며 떵떵거리는 한스의 고집에, 벨젠 경은 어쩔 수 없이 12번가에 수하를 보냈다.

“엘리아 님이 맞다고 합니다.”

잠시 뒤 벨젠이 보낸 수하가 돌아와서 ‘로앙가의 아가씨가 늘 다니는 서점에 홀로 계신다.’라는 말을 전해 왔다.

“혼자 계신다는 말입니까. 하면 로앙가의 기사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까?”

“함께 서점에 동행하였다가 아가씨가 심부름을 시켜 잠시 화방에 가 있다고 합니다.”

“……로앙가의 기사들과 따로 한번 이야기를 나누어야겠습니다.”

수하의 대답에 벨젠 경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괜히 옆에 선 죄 없는 한스까지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역시, 불세출의 기사라는 말이 소문만은 아니었나 보다.

“아, 거 내가 또 궁금한 게 있는데, 아가씨께서 서점에 들어가신 지 얼마나 되었답니까? 공작님께 근방에 아가씨가 계신다고 말씀드리기도 전에 엘리아 님께서 먼저 용무를 보고 가 버리시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12번가에 다녀온 수하가 거기까지는 알아 오지 않은 모양인지 벨젠 경의 눈치를 살폈다.

“저기, 그게 그것이…….”

“…….”

“……아가씨께서 언제쯤 나오실 건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상사를 자꾸 쳐다본다고 묻고 온 적 없는 대답이 생각날 턱이 없을 터였다. 불쌍한 수하는 결국 12번가까지 한 번 더 왕복해야 했다.

다시 돌아온 수하는 덥지 않은 날씨에도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12번가까지는 마차로도 한참 먼 곳인데, 거기까지 지체 않고 뛰어갔다 와야 했으니 부디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바랄 수밖에.

“후우…… 호위 서고 있는 이들 말로는 앞으로 2, 30분은 더 서점에 계실 것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간 김에 서점 앞 경계를 더 신경 써 달라고도 부탁했습니다. 다행히 서점은 이 시간대에는 손님을 받지 않아 주인 외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하에게 꼬박꼬박 존대하며 대꾸해 준 벨젠 경, 그리고 얄미운 보좌관이 더는 요구할 게 없어 보이자 그가 서둘러 자리를 떴다.

“공작께서 일을 마무리하실 때가 다 되었겠군요. 먼저 들어가서 모셔 오도록 하겠습니다.”

벨젠은 한스와 둘만 남게 되자 묻지도 않은 소리를 남기고선 에드문트가 있는 건물로 들어가 버렸다.

모두 벨젠 경이 한스의 수다를 피하고자 자리를 옮겼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한스조차도 말이다.

‘하여간, 성격하고는. 공작님이고 밑에 기사님이고, 어째 저래 대화 나누고 서로 알아 가는 걸 불편해하신대?’

말 상대를 잃은 한스가 구시렁거리며 다른 대화 상대를 찾아보려 했다. 각자 할 일이 있는 마부와 남은 호위 기사들이 부리나케 한스의 시선을 피했다.

졸지에 묵언 수행이나 하게 된 한스는 건물 문이 열리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잠깐만, 설마 벨젠 경이 들어가서 홀랑 엘리아 아가씨 이야기를 하진 않았겠지? 젠장, 먼저 발견한 건 나란 말이야!’

사실 한스가 한 거라곤 달리는 마차 위에서 로앙가 기사를 발견했던 것뿐. 마부와 벨젠 경, 그리고 고생한 수하의 공도 분명 있었거늘.

‘어차피 내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전부 무의미했던 거잖아?’

한스는 무조건 로앙가 기사를 가장 먼저 발견했던 제 업적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고 믿었다. 12번가까지 두 번을 왕복한 수하가 알았으면 속이 뒤집힐 소리였다.

어서 공작에게 제 업적을 드러내고 싶어진 한스가 애타게 공작을 기다렸다. 마침내 공작이 나왔을 때는 초조함에 떨어 댄 다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크흠! 공작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보좌관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인사치레는 모두 집어치우고, 한스는 제 용무부터 들이밀었다.

어차피 수만 골드를 벌어들일 계약이든, 별궁에 숨어 있던 크라우제 후작의 쥐새끼들을 처리하는 일이든 공작이 주도한 일은 백이면 백 성공 길만 내달리지 않았던가.

그러니 한스가 ‘일은 잘 마무리하셨느냐.’, 뭐 그런 시시한 일까지 관심 가질 필요는 없었다.

에드문트는 제가 나오기에 바쁘게 말을 거는 한스를 쳐다봤다. 공작의 무심한 표정을 보며 한스는 벨젠이 자신의 업적을 채 가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게 말입니다, 제가 이곳에 공작님을 모시러 오던 길에 뭘 봤는지 아십니까?”

한스는 라스페 공작 무서운 줄 모르고 대단히 뜸을 들여 가며 지껄여 댔다. 감히 공작이 무서워 누구도 시도해 본 적 없는 짓이었다.

‘저러다 언젠가는 혀를 자르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주변에 산재한 공작가의 수하들이 한마음으로 한스 마이어의 혀를 걱정해 주었다.

함께 나온 벨젠 경조차 한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눈을 찌푸렸다.

‘근래 공작께서 약혼자분을 자주 찾으시기는 했지. 그렇지만 저렇게까지 유난 떨 일인가.’

공작을 향한 충성심과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 말고는 무엇에도 관심 없는 벨젠 경은, 대체 한스가 왜 저렇게까지 로앙가 아가씨 일로 호들갑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예상되는 반응이야 무시, 혹은 ‘그렇군.’이라는 짧은 대답일 뿐인데.

벨젠 경을 비롯하여 한스가 무슨 말을 꺼낼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공작 몰래 한숨을 쉬었다.

“마차를 타고 지나오려는데, 로앙가 호위 기사가 스쳐 지나가지 않겠습니까. 길에는 로앙가의 마차까지 있었고요.”

오직 한스만이 에드문트의 반응을 정확히 예견하였다.

“……마차라고?”

에드문트의 반문에 한스를 제외한 모두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공작님께서 지금 보좌관 말에 대꾸하신 건가?

“예, 그렇습니다. 확인해 보니 엘리아 아가씨가 타고 오신 마차라고 하더군요. 때마침 12번가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서점에 계신다고 합니다.”

그 순간 남자가 보인 표정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한스는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다는 게 어떤 건지를 알게 되었다.

한스가 원한 건 약간의 당황, 그리고 반가움과 설렘 같은 그런 감정들이었으나.

‘저걸, 저 표정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아마도 그를 날이 새파란 칼로 찌르지 않는 한, 불러일으킬 수 없을…….

“엘리아가, 12번가에?”

에드문트의 표정은, 짙은 어둠이었다.

* * *

8번가 상단 건물 앞. 한스의 보고를 들은 에드문트가 표정을 굳히자 수십여 명에 달하는 공작가의 무리에 긴장이 감돌았다.

“벨젠, 언제부터였나.”

“백작가에서 호위를 위한 인력을 요청한 게 엘리아 아가씨가 학술원에서 돌아오신 직후였고, 그때부터 서점을 왕래하셨습니다.”

벨젠 경은 엘리아가 2년 전부터 12번가의 서점을 방문했다고 고했다.

“호위는?”

“외출 때마다 아가씨께 알리지 않고 저희 쪽 사람들이 지켜보는 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알리지 않았다고.”

“예, 저희 측 사람들이 눈에 띄어 좋을 게 없다는 판단에 밀착 호위는 하지 않아 왔습니다.”

벨젠의 보고에 에드문트는 공작가 호위 인력 일부가 로앙가에 배속되어 왔음을 떠올렸다.

그 2년여 동안 로앙가 두 남매의 행적이 자신에게 보고서로 올라왔음은 당연했으리라.

하나 에드문트는 꼬박꼬박 올라왔을 보고서를 한 번도 펼쳐 보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는 불필요한 행위는 애초에 무시하는 쪽이었으니까. 에드문트가 엘리아의 행적에 대해 살피기 시작한 건, 엘리아가 공작 부인이 된 후의 일이었다.

스무 살의 엘리아가, 12번가에 있는 서점을 한 번이라도 간 적이 있었던가.

‘분명 주변이 안정된 후, 화구를 구입한다며 근처에 찾아갔다는 보고를 받기는 했지.’

하지만 서점이라니.

<세상에. 나 여기 침실로 삼아서 살까 봐. 책이 정말 끝도 없네.>

결혼한 후 공작가의 서고를 보여 주자, 엘리아는 당분간 책 살 돈 아껴서 좋다며 기뻐하고는 틈만 나면 서고에 틀어박혀 있곤 했다.

상점가의 서점을 이용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고.

‘12번가에 있는 서점에, 한 달에 한 번. 그렇게나 자주 다녔으면서 결혼 후에는 한 번도 찾지 않은 건가.’

공작가 서고의 책이면 충분했던 걸까. 혹은…….

<……당분간 로앙가에도 가지 않으려고요. 혹시 모르잖아요? 내가 간다는 소식에 그쪽에서 백작가에까지 장난질할지도 모르는걸.>

스스로 가두었나.

내가 사방에 뿌린 죽음에, 당신이 위협을 느껴서 갈 수 없었던 걸까.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보느라 에드문트가 굳어 움직이지 않았고, 덩달아 그의 수하들도 멈춰 선 채 에드문트를 바라보았다.

아마 다들 놀랄 거라고, 그래도 자신은 예상하는 바가 있어 놀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한스조차.

‘이거…… 생각보다 공작님 반응이 센데? 설마 아가씨가 어디 다니시는지 몰랐던 건가?’

한스야 몰랐다 해도, 공작이라면 당연히 파악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뒷조사 같은 건 취향이 아니셨던 건지.

“아직 서점에 계실 겁니다. 마침 바로 근처이니 잠시 들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

“아휴, 무얼 망설이십니까? 미행한 것도 아니고, 일 때문에 들른 곳 근처에 마침 약혼자분께서 외출하신 게 아닙니까. 이럴 때는 모른 척 쌩하니 가 버리는 게 더 이상하기만 합니다.”

한스는 공작의 미세한 표정 변화만 보고도 그가 망설인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니 참견하기 좋아하는 한스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공작을 조르다시피 굴며 설득에 나섰다.

“나중에라도 알게 되시면 그분께서 얼마나 서운해하시겠습니까? ‘혹시 일부러 피하신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속상해하실지도 모르지요.”

에드문트는 죽어도 할 말은 하고 죽겠다며 옆에서 떠들어 대던 10년 후 한스의 모습을, 눈앞의 젊은 청년의 모습과 겹쳐 보았다.

엘리아도 아니고, 다른 이를 두고 상념에 젖다니. 에드문트로서는 여태껏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행동이었다.

엘리아를 만나러 가 보라며 재촉하는 수하의 보고에도, 말이 떨어지지 않아 재차 얼굴을 찌푸리게 되는 행동 역시 처음 겪는 일이었다.

‘피곤하군.’

서른둘의 에드문트는 모처럼 피로를 느꼈다. 스물두 살 시절로 돌아온 뒤 무엇이든 지루할 정도로 쉽기만 했거늘.

몇 년 내로 가치가 폭등할 상단을 인수하는 것도, 전쟁으로 수요가 폭증할 물자를 미리 독점할 방법을 찾아내는 일도…….

자그마치 10년 앞을 내다보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에드문트에게는 그 무엇도 어렵거나 불확실하지 않았다.

지난 삶에서 무수히 많은 피를 흘려 이뤘던 복수가, 허망할 정도로 쉽게 에드문트의 손에 쥐어질 전망이었다.

이제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불확실한 건, 엘리아 하나뿐이었다.

‘무슨 반응을 보일 건지 짐작되질 않는데.’

죽음도 불사한 마음이었으니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을 리 없었다. 매 순간을 함께 해도 그리울 여자인데, 찾아가고 싶지 않을 리 없다.

한데 다가가자니 엘리아의 반응을 예상할 수가 없었다.

주홍빛 눈에 담긴 감정은 불확실해져만 가는데, 제 감정만 더욱 확고해지고 말았으니.

언젠가 시들어 버릴 꽃인 줄 알면서, 갈망하게 되는 마음만 선명해졌다.

언제쯤 꽃이 피어 줄는지는…… 엘리아의 마음이 저를 향해 줄지는 막연하기만 하거늘.

잠시나마 엘리아의 얼굴에 드러난 꽃망울이 자신을 향해 피어 주기나 할 건지, 영영 닫힌 채 그대로 시들어 버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여 망설였다. 다가가도 될지를.

꽃을 피워 낼 수 있을까? 타오르지 않을 정도로만 햇빛을 보게 하고, 썩지 않을 만큼만 물을 뿌려 주면 된다고들 하던데. 자신도 할 수 있으려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홀로 끌어안고 엘리아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토해 내어 사랑을, 만개한 꽃을 얻어 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에드문트는 이미 한 차례 실패하지 않았던가.

<에드문트, 당신은 불길이야. 모두 집어삼켜 버려. 내 사랑마저 집어삼켜 버리곤, 되돌려 주지를 않아. 나는 타고 남은 재 가루만 끌어안아야 했어.>

그의 무심한 한마디에도 홀로 꽃을 피워 낸 여자를, 기어코 말라 버리게 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네가 감당도 못 할 사랑을 퍼부어 지치게 만들지도 모르지.’

겨우 놀라 벌어진 입술에 미칠 지경이었는데, 눈에 자꾸 담으면서도 닿고 싶은 욕망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손끝이라도 스치게 된다면, 자제할 자신이 없는데.

엘리아가 이해해 주지 않을 욕망을 홀로 견뎌 낼 수 있을까.

‘차라리 네가 나를 밀어내기만 했다면. 끔찍해하면서 뒷걸음질 쳤다면.’

분명 에드문트는 보답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보답받을 수 있을 리 없다고 체념했는데.

엘리아의 반응은 에드문트의 예상을 조금씩 벗어났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는 눈물을 보였으면서도 에드문트에게 푸른 꽃을 선물했다. 예고 없는 선물에 화를 냈지만 결국 마차 안에서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 모습이, 남들처럼 망가뜨리지 않고 한 송이 꽃을 품을 수 있을 거라 착각하게 했다.

차라리, 희망조차 품을 수 없도록 밀어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공작님, 어떻게 할까요? 지금 바로 가 보시겠습니까?”

에드문트는, 자신이 없으면서도 멍청한 희망을 강제로 끌어안고야 말았다.

피워 낼 자신도 없으면서 꽃을 갈망하고. 자제할 자신도 없으면서 다가가고.

끝내 손에 쥐어 망가뜨리고 말 꽃을 피우는 꿈을 꾸고야 만다.

“……그래. 출발하지.”

사랑이, 자꾸만 그를 멍청하게 만드는 듯했다.

* * *

에드문트가 탄 마차가 멈춰 선 곳은 그가 여태껏 한 번도 들른 적 없는 상점가 구석 골목이었다. 보좌관 한스가 떠들어 댄 대로 좁은 도로에 로앙가의 상징이 선명하게 그려진 마차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혹여 엘리아가 먼저 떠났을까 봐 조마조마했던 한스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마부가 한스의 과장된 한숨에 빙긋 웃음을 지었다.

“어휴, 다행이네. 요즘 종잡을 수가 없게 행동하셔서 한발 늦었으면 로앙가에 또 말도 없이 찾아가자고 하실까 봐 걱정했는데.”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겠군요.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가끔 보면 아주 딴사람이 되신 것 같다니까. 어휴.”

달라진 모습이 곤란하다는 식으로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어 댔지만, 아마 달라진 에드문트의 모습을 가장 반기는 사람은 한스일 것이다.

매일 저택이나 황궁에 쿡 처박혀 일이나 하던 사람이었는데. 아직 한참 멀었지만 표정도 전보다는 훨씬 알기 쉬워졌고, 지겨울 틈 없이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인적 드문 길에 귀족가 마차 두 대가 나란히 서자, 행인들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한스는 두려움 섞인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며 서점을 향해 앞장서 걸었다.

장사할 마음이 없는지 간판도 하나 없는 서점 앞, 로앙가 기사가 에드문트의 일행을 맞이했다.

“로앙가에서 엘리아 아가씨의 호위를 위해 나온 테오 위겐입니다.”

“안에는?”

“서점 주인과 엘리아 아가씨만 계십니다.”

“굳이 외부에서 경계를 서는 이유는?”

조금 전 상단 인수 계약을 체결한 에드문트를 호위한 기사는 다섯이었고, 평상시에도 에드문트는 벨젠 경을 비롯한 기사 셋 이상을 데리고 다녔다.

물론 이곳 어딘가에 라스페 공작가에서 파견한 호위 인력이 경호를 서고 있기야 할 테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경호 인력이 겨우 하나뿐이라니. 그것도 실내에 엘리아 홀로 방치해 두었고.

정적들에게 빌미를 주려고 작정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호위 인원을 늘려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문제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테오 경뿐만 아니라 벨젠 경까지 공작의 언짢은 기색을 눈치채고 납작 엎드렸다.

아무리 엘리아의 요구가 있었고 라스페가의 호위 인력이 있다는 걸 알았더라도 백작가의 아가씨를 기사 한 명이 호위하는 모습을 보인 건 명백히 치죄당해야 할 일이었다.

그동안 로앙가의 호위 인력을 관리해 왔을 라스페 공작가의 기사들까지 죄인이 되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 일은 내 로앙 백작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지, 한스.”

“옙.”

엘리아를 지척에 두고 말을 길게 할 생각은 없었다. 에드문트는 짧은 경고만 남긴 채 한스를 불렀다.

호위 일은 제 소관이 아니랍시고 혼자 당당한 한스가 부리나케 서점 문 앞으로 다가갔다.

“흠흠. 잠시 비켜 주시지요.”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테오 경이 비켜서자, 한스가 작은 종이 달린 서점 정문을 힘차게 밀어젖혔다.

금속 종이 허공에서 나풀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 엄마야.”

문 너머에서 들려온 놀란 소리는 분명 엘리아의 것이었다. 에드문트가 곧바로 반응하여 열린 문 앞으로 다가갔다.

당장, 목소리만 보이는 엘리아를 붙잡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엘리아, 괜찮아? 지금은 손님을 받지…….”

“아이고, 죄송합니다. 정말 여기 계셨군요.”

조급해진 에드문트의 마음을 잠시 멈추게 한 건,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분명 서점 안에는 엘리아와 서점 주인뿐이라고 했는데.’

평민들이나 들락거릴 작은 서점 주인 목소리에 기시감을 느끼다니.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에드문트는 한스가 절반쯤 열어젖힌 문 안으로 향했다.

퀴퀴한 책 냄새가 풍기는 작은 서점에 들어서자…….

“……에디?”

에드문트를 늘 목마르게 하는 엘리아가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가 아닌 다른 남자의 곁에서.

에드문트는 한눈에 남자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닐스. 닐스…… 튀링겐이.’

제국 황후의 하나뿐인 조카, 튀링겐 자작가의 후계자.

성년도 안 되었을 법한 어린 모습의 남자 옆에서, 엘리아가 천진하게 에드문트의 애칭을 불렀다.

“……라스페 공작?”

* * *

기억에 남아 있는 것보다 다소 앳된 남자의 목소리에, 에드문트는 다시금 피로함을 느꼈다.

실은, 두려움을 느꼈다. 느껴 본 바 없는 감각을, 피로함과 혼동하였다.

“…….”

에드문트가 라스페 공작가의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제물로 삼았던.

<공작님, 오늘 새벽 닐스 튀링겐이 크라우제 후작을 살해한 뒤 자진하여 현장에서 사망하였음을 확인했습니다.>

두고 온 과거에서 에드문트가 죽음으로 내몰았던 남자가…….

<복수를 축하드립니다.>

에드문트처럼, 그리고 엘리아처럼 죽음에서 돌아와 있었기에.

살아 있는 모습으로, 엘리아의 곁에서 에드문트를 바라보는 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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