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방문
엘리아가 탄 마차가 멈춘 곳은 한적한 상점가 골목이었다. 귀족가의 마차가 자주 멈춰 서는 골목은 아닌지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씩 마차에 닿았다 떨어졌다.
엘리아는 제가 탄 마차가 잡화상이 즐비한 골목에 완전히 어우러질 때까지 기다린 뒤에야 문을 열고 내렸다.
“아가씨, 싣고 온 책 전부 지금 꺼내면 될까요?”
“응, 부탁해 테오 경. 다 갖다가 팔아 버릴 생각이니까.”
“벌써 이 많은 걸 다 보셨어요? 저는 전에 추천해 주신 책도 아직 붙들고 있는데.”
“테오 경은 바쁘잖아. 나야 시간도 많고.”
호위로 온 로앙가의 기사 테오와 마부가 마차에 싣고 온 책 열두 권을 품에 안아 들었다. 엘리아도 그들이 품에 안은 책을 하나씩 걷어 와 짐을 덜어 주었다.
책을 든 세 사람이 나란히 골목길을 걸었다.
‘매번 같은 요일에 오다가 다른 날에 왔더니 분위기가 다르네.’
희뿌옇게 먼지가 낀 유리창 너머로 공예품이 가득 보이는 상점은 오늘 휴일이었고, 엘리아가 들르는 날마다 과일 상자를 한가득 쌓아 놓던 청과물 상점 앞도 멀끔하기만 했다. 마치 다른 길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다음에는 그냥 평소 오던 날 와야지. 공예품 상점에 불 꺼져 있으니 너무 음산하잖아. 과일 상자에서 단내가 폴폴 나는 거 좋았는데, 없으니 허전하고.’
상점 몇 개를 더 지나 간판도 없는 서점 앞에 도착했다. 양손 바쁜 기사와 마부 대신, 엘리아가 직접 서점 문을 죽 밀었다.
다행히 서점은 익숙한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훅 들이치는 공기에 엘리아가 저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렸다. 로앙가의 서재와는 사뭇 다른 향이었다.
먼지 냄새가 더 많이 섞여 있고, 벌레 막는 데 좋다는 향나무 향이 짙게 섞여 있었다.
“여전히 손님 하나 없네요. 아가씨가 발길 끊으시면 망하겠어요.”
테오 경이 평소처럼 들고 온 책을 문가에 있는 협탁에 차곡차곡 쌓아 주었다. 손님은커녕 주인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엘리아의 일행은 다들 신경 쓰지 않았다.
“저는 먼저 마차에 가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책을 내려 둔 마부가 먼저 서점을 빠져나갔다. 엘리아는 마부와는 달리 나갈 기미가 없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테오 경, 나 시간 걸리니까 마커스랑 가서 잠깐 눈이라도 붙여.”
“그럴 수는 없죠. 명색이 호위로 왔는데요.”
“새삼스럽게 무슨. 어차피 테오 경 아니라도 지켜볼 눈 많은데.”
“그래도 오늘은 여기 남아 있겠습니다. 게으른 서점 주인 대신 손님맞이라도 하지요, 뭐.”
“누가 게으른 주인이라는 거야?”
서점 주인이 뒤늦게 책장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아의 또래쯤 되어 보이는 얼굴은 서점 주인이라기보다는 갓 취직한 직원 쪽이 더 어울렸다.
물론, 배곯아 본 적 한번 없을 뽀얀 얼굴은 직원이라고 하기에도 좀체 어울리지 않았지만.
“닐스 씨, 우리 기사가 뭐 못 할 소리 했어? 게으르다고 한 소리 들어도 싸. 손님이 온 걸 알았으면 와서 맞이해야지. 얼굴만 보이는 게 무슨 예의야. 그래서 장사 돼?”
“안 보인다고 험담한 손님을 내가 뭐하러? 그리고 손님 대접이 받고 싶으면 8번가나 가라고. 이런 구석에 처박혀 있는 서점에 오지 말고.”
“기껏 망할까 봐 걱정해 줘도 못되게 굴지. 그렇게 성격 나쁜 티 안 내도 못된 거 알아.”
“왜 왔어? 욕하러?”
“왜 왔겠어. 책 팔러 왔지. 어쩜 이렇게 재미없는 책만 줄줄이 들여놨던 거야?”
“네 취향이 별로인 걸 왜 책 탓을 해.”
서점 주인의 까칠한 응대에 테오는 불편함을 느꼈다. 청년의 무례함을 지적하고 싶었으나 상대의 신분을 알지 못하니…… 괜히 나섰다가는 엘리아를 곤혹스럽게 만들지도 몰랐다.
‘귀족 자제인 것 같긴 한데. 대체 뭐 한다고 이런 상점가 골목 구석에서 책 장사를 하는 건지. 그냥 취미 생활이려나.’
테오는 엘리아 아가씨를 따라 여러 번 서점을 찾아왔으나 서점 주인이 닐스라는 고아한 이름을 가졌으며, 홀로 서점을 운영한다는 것 말고는 아는 바가 없었다.
<닐스 씨? 걱정하지 마. 신분은 확실한 사람이니까.>
엘리아 아가씨께서 상관하지 말라고 선을 그었으니, 더 추궁할 길도 요원했고.
“일부러 안 팔리는 것만 골라 놓았던 거 아니고? 물론 내용 안 읽고 골라 간 내 책임도 있기야 한데, 들여놓은 주인 책임도 있지 않겠어? 없다고 하면 진짜 양심 없는 거지.”
엘리아의 투정에 피식 웃은 청년이 책장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짙은 색 셔츠 차림의 닐스는 테오 경과 체격이 비슷할 정도였다. 기사가 아니라면 무척 아깝다 싶은 몸이었다.
‘체격도 그렇고, 자세도…… 역시 검 쓰는 사람일 텐데. 대체 왜 서점 주인 자리를 꿰차고 있는지.’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서점에 틀어박혀 있는 건 괴로울 정도로 좀이 쑤실 텐데.
“어디, 대체 뭔 책을 도로 가져와서 생떼 부리는지 봐야겠네.”
닐스의 이죽거리는 말투에 테오 경이 나름 경고를 한답시고 미간에 잔뜩 힘을 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청년은 기사가 저를 견제하고 있는 걸 눈치채고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치기 어린 자만심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래도 한 권은 건졌나 보네. 전에 열세 권 들고 가지 않았나?”
“그거라도 없었으면 와서 서점 다 엎었어. 매입가는 저번처럼 해 줄 거지? 엄청나게 조심조심 봐서 새 거나 다름없어. 진짜로.”
“웃기네. 바닥에 드러누워서 뒤적거렸을 거면서. 여기 두 권은 1할 덜 쳐서 계산할 거야. 전에 네가 억지 부려서 깎아 줬잖아.”
“자그마치 열세 권을 한 번에 사 갔는데, 그거 좀 깎아 준 거로 생색이야? 당신 그러다 아주 부자 되겠다?”
엘리아가 골라 갔던 책은 하나같이 사람들이 찾지 않는 종류라, 중고로 매입해도 금방 되팔릴 가능성이 희박했다.
“솔직히, 안 팔릴 책 도로 사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냐?”
결국, 매입가는 서점 주인의 뜻대로 결정되었다. 책 가격이 하나같이 비싸 몇 푼이라도 아껴 보려던 엘리아가 입을 비죽거렸다.
“그럼 열 권은 저번이랑 같은 매입가로, 두 권은 치사하게 1할씩 제하면 합이 1골드 35펜이네. 나중에 계산하기 귀찮아지니까 이따가 내가 살 책값에서 그냥 2골드 빼 줘. 응? 빼 줄 거지?”
“65펜이나 빼 달라고?”
“안 된다고 할 거야? 나만 한 단골이 어디 있다고.”
“뭐, 여기 손님도 아닌데 자리 차지하고 있는 기사더러 나가라고 해 주면 15펜 할인해 주지.”
“……25펜.”
“10펜.”
“15펜이야. 15펜! 테오 경, 잠깐 요 길 끝에 있는 화방에 가서 내가 매일 사 가는 물감 다섯 개씩 사다 줄래? 매입가 꼭 확인하고!”
엘리아는 나가 있으라는 딱딱한 축객령 대신 핑계 섞인 부탁을 건네었다.
정말로 15펜이라도 아끼려고 저를 내쫓겠다는 건지, 아니면 두 사람 사이에 따로 할 말이 있는 건지…….
전자가 오히려 테오 경이 아는 아가씨답기는 했다. 그러나 둘만 내버려 두고 나갈 생각에, 어느 쪽이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알겠습니다. 화방에 다녀온 뒤에는 서점 앞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책을 들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응, 고마워.”
테오 경은 아가씨의 표정을 보고 차마 남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그는 금화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건네받고 서점을 나섰다.
문에 걸어 둔 작은 금속 종이 요란하게 울리며 기사가 남겨 둔 빈자리를 차지했다.
“새로 들어온 책은 어디서부터 보면 돼?”
“오른쪽에 있는 게 전부야. 위에 거는 예약된 거니 탐내지 마.”
“예약 손님도 받아?”
“손님이 너밖에 없는 줄 알아?”
“그런 줄 알았지. 다른 귀족들은 다들 8번가에 간다고 하길래. 네가 들여오는 책은 평민들한테 인기 있을 만한 것도 아니잖아? 평민 손님들이 있기는 해?”
“가끔 와서 깔짝거리고 가는 놈들 있어. 요즘은 평민 학교에서도 이것저것 가르치는 모양이지.”
“음. 잘됐네.”
하위 계층에서 글을 깨치고 지식을 습득하는 게 귀족들에게 좋은 일은 아니다. 오히려 경계하는 귀족들이 다수이지.
하나 엘리아는 귀족답지 않게 잘됐다는 한마디만 하고 넘길 뿐이다.
‘하여간, 특이하다니까.’
닐스는 협탁에 쌓인 열두 권의 책들을 옮긴 뒤,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시야를 가리는 것 하나 없이 책장 앞에 선 엘리아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벌써 책 구경에 푹 빠져선, 엘리아는 닐스의 시선이 저를 향하는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 시집도 있네. 삽화도 좀 있으려나?”
적막한 공간에 엘리아의 혼잣말이 책을 한 권씩 훑었다. 어느 책 앞에서는 입을 살짝 벌려 반가워하고, 옆에 있는 책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을 샐쭉 내밀기도 하고.
그 모습이 마치 무대 위에서 홀로 독백하는 광경을 연상케 했다.
닐스는 옆에서 새로 들여온 책을 한 권씩 설명해 주는 대신, 멀찍이 떨어져 앉아 홀로 엘리아의 모습을 독점했다.
겨우 돈 몇 푼에 기사를 쫓아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아가 귀족 아가씨답지 않게 돈 몇 푼에 흔들리고 마는 성격이라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어쩌면, 내가 불편해하는 걸 알고 쉽게 져 준 걸지도 모르지.’
툴툴대도 속 깊은 여자이고, 저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 정도 자신감은 가져도 되지 않을까?
‘근데 덥지도 않나. 다들 3월이라고 하면 날이 추워도 봄옷 꺼내 입느라 바쁠 텐데. 옷에 관심이 있을 것 같은 성격은 아니다만.’
날씨가 다 풀리지는 않았어도 이제 봄인데, 엘리아의 차림은 마치 한겨울에 외출 나온 아이처럼 꽁꽁 싸매어 있었다.
그 때문에 드러난 거라곤 겨우 얼굴, 그리고 모자 밖으로 살짝 삐져나온 금발이 전부였다. 뽀얀 손도 긴 옷자락 속에 숨어 보는 닐스까지 답답하게 만들었다.
짓궂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소리를 죽여 뒤로 다가가, 머리칼을 숨겨 둔 모자를 잡아당기면. 곧게 뻗어 내려오는 목선을 가린 천을 끌러 낸다면.
숨통이 좀 트일 텐데.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이 답답한 기분이, 조금은 풀어질지도.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닐스는 치미는 마음을 억눌렀다. 너무 욕심부리지는 말아야지.
늘 미리 약속을 잡고 정해진 날에만 들르는 여자였다. 매달 둘째 주의 화요일. 오후 두 시부터 한 시간. 몇 년 동안 한 번도 바뀌지 않은 규칙.
로앙가에서 외출을 제한하는 건가 싶었는데, 딱히 그런 눈치는 없었다. 그냥 규칙적인 걸 좋아하는 여자인가 싶었다.
책 고르는 취향도, 닐스를 대하는 태도도 어느 하나 변치 않고 한결같은 것처럼.
그래도 한 번쯤은, 저 보겠다고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닐스는 늘 기다렸다. 예고 없이 떨어지는 비처럼 오진 않을까 기대한 적이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매달 둘째 주의 화요일이 아니면 와 줄 리 없건만, 닐스는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했다.
매일 오후 한 시부터 세 시까지, 닐스는 오지 않을 엘리아를 위해 서점에 사람을 받지 않았다.
제가 생각해도 참 한심한 짓거리였는데. 어째 습관이 되어 죽 유지하다 보니 나름 장점도 많았다.
조용한 서점에서 혼자 있으면, 엘리아가 남기고 간 흔적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기에.
‘게다가, 결국 염원을 이루기도 했고.’
만약 엘리아가 오늘처럼 닐스의 서점에 찾아왔다면, 그때 하필 손님이 우글거리고 있었다면 다시는 약속 없이 찾아오지 않으려 했으리라.
말은 안 해도 사람들 눈을 피해 서점을 찾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턱을 괴고 엘리아의 옆얼굴을 지켜보려니 가는 시간이 아쉬웠다. 엘리아의 예고 없는 방문이 하루만 더 늦었으면 좋았을 텐데. 새 책이 오는 날은 하필 오늘 저녁이었다.
‘일부러 쟤 아니면 찾는 사람도 없는 학술원 논문이나 경제지 따위를 잔뜩 주문해 놓았는데.’
엘리아가 좋아할 만한 책이 많지 않았던 까닭에 엘리아는 순식간에, 물론 닐스의 기준으로 얼마 안 돼서 책장 한 면을 전부 훑었다.
“닐스 씨, 나 다 골랐어. 책 꺼내 줄래?”
마음에 드는 책이 보일 때마다 하나씩 접었을 손가락을 보니 엘리아는 일곱 권을 고른 모양이었다.
닐스가 천천히 엘리아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책장 앞으로 다 오기도 전에 엘리아가 두 번째 칸의 책을 가리켰다.
“여기, ‘북서부 설화 모음’. 전에 이 저자 책 읽었던 것 같아.”
“그리고 또?”
“위에서 세 번째 칸에 체르바 경이 쓴 논문이랑 그 오른쪽 것도 같이 꺼내 줘.”
닐스는 엘리아가 짚은 책을 하나씩 꺼내 주었다. 처음 왔을 때 닐스가 책을 꺼내 주었더니 지금까지도 엘리아는 제 손으로 책을 꺼내지 않았다.
닐스에게는 행운이었다. 엘리아가 바로 옆에서 책을 고른 이유나 어떤 내용이 있을지에 대한 추측을 말하는 걸 들을 수 있으니까.
제목만 두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걸 듣고 있자면, 마치 엘리아가 옆에서 저를 위해 책을 읽어 주는 기분도 들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응, 전부 일곱 권 맞지? 계산해 줘. 당신이 매입해 주는 책값 빼고 남은 돈 주면 되는 거지?”
“그래. 저기서 기다려.”
엘리아는 닐스가 앉아 있던 소파로 향했다. 이제 닐스가 일곱 권의 책에 가격을 매기고, 엘리아가 돈을 지불하고 나면 그는 다시 서점에 혼자 남게 된다.
다음번 방문은 언제일지 생각하면서, 또 한 번의 예고 없는 방문을 기대해도 될까?
아니면 다음 달의 두 번째 화요일이 올 때까지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할까.
“엘리아.”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열여덟의 닐스는 가지 말라느니, 조금 더 저와 있어 달라느니 하는 말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딱 열여덟만큼 자존심 셌고, 열여덟만큼 소심했으니까.
“그래서, 왜 온 건데? 정말 책 때문이라고?”
마치 엘리아의 속을 다 안다는 듯, 거들먹거리며 떠보는 말이나 던졌다. 엘리아가 덥석 물어 주길 바라며.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제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라며.
“그…… 뭐 다른 건 아니고. 그냥 바람 쐬러 나왔는데.”
“뭐 고민이라도 있나 보지?”
“고민은 무슨. 그냥, 봄이잖아.”
“한겨울처럼 껴입고 왔으면서, 오던 봄도 네 꼴 보고 도망가겠다.”
“씨이. 누군 좋아서 이렇게 입은 줄 알아?”
닐스의 말에 엘리아가 반항하듯 모자를 훅 벗어 던졌다. 덕분에 빗질만 겨우 해 놓은 금발이 엘리아의 어깨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마치 바람이 휘적거려 흔들리는 꽃잎처럼.
잠시, 숨을 멈추고 바라볼 만큼 아름다워서…….
“어휴. 정말 내 신세도 박복하지. 얘기 나눌 사람이 겨우 당신 하나뿐이라니.”
투덜거리는 엘리아의 목소리가 희미해지고 말았다. 지척에 있는데도, 마치 꿈처럼 아스라이 멀어지는 듯했다.
손에 쥐면 봄처럼 따스할 머리칼. 겨우 그 하나에 넋을, 잃는 바람에.
* * *
엘리아는 머릿속을 자꾸 울리는 목소리를 피해 달아나고 싶었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풍경에 의미 부여를 하고야 마는 머리를 비워 내고 싶었다.
‘달랐잖아, 평소랑 같은 게 하나도 없었잖아.’
어제 같은 오늘을 누리고 살았던 엘리아에게, 누군가의 생각으로 꽉 찬 하루를 보내는 일은 낯설고 버겁기만 했다.
하여 엘리아는 도망쳤다.
주홍빛이 넘실대는 주방으로부터, 햇볕 아래에 핀 꽃 무더기로부터, 얼룩덜룩한 푸른 물감으로부터.
태엽을 감지 않은 오르골이 연주하는, 남자의 목소리로부터.
‘더 있다가는 숨이 막혔을 거야, 정말 속이 터져 죽어 버렸을 거라고.’
도망치고 외면하는 것만은 낯설지 않았으니 엘리아는 에드문트의 흔적을 피해 달아났다.
여덟 살의 엘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저택을 가득 메우고 있던 어머니의, 아버지의 흔적을 감당하지 못해 옷장 안으로 피했을 때처럼.
하나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쉼 없이 떠오르는 생각은 두고 온 것도 아닌데, 겨우 장소가 바뀐 거로 생각이 사라져 버릴 리가 없는데!
<엘리, 이제 아무것도 없어. 데이지랑 내가 다 치웠어. 그러니까 제발 나와 줘.>
외젠이 어린 엘리아를 위해 벽에 걸린 아버지의 그림을, 어머니의 초상화를 모두 치워 버렸을 때 엘리아가 부모를 그리워하는 걸 멈출 수 있었던가?
<미안해, 엘리. 어떻게든 가려 보려고 했는데 사라지질 않아서…….>
그림을 떼어 내고 남은 빈 자리가 오히려 두 남매를 아프게 하기만 했거늘.
‘지워지지도 않을 걸, 사라지게 해 달라고 내내 빌었지.’
그러니 엘리아가 서점에 도착해서까지 에드문트를 생각한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당연하기까지 했다.
잊고 싶다는 소망,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 모두 바보 같은 짓일 뿐이었다.
결국 엘리아는 자신의 기억과 싸우는 걸 포기하고 머리에서 떠올려 주는 대로 에드문트를 생각했다.
책장 한 면을 가득 채운 책을 보며, 엘리아는 에드문트의 집무실에 어떤 책이 있었는지 기억해 보려고 했다.
10년 전에 인기를 끌었던 추리 소설의 후속편을 발견하고는, 그는 어떤 책을 좋아할까 궁금해하기도 했고.
‘에드문트도 쉬는 날에는 독서를 하려나? 이런 추리 소설이라면 읽을 것 같은데.’
닐스가 엘리아를 바라보고, 엘리아가 책을 눈으로 짚는 동안…….
머릿속에는 에드문트가 있었다. 제멋대로 찾아와 떠나지도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기억은, 마치 잡초 같아. 심을 생각도 없었는데 아무렇게나 정원에 침입해 뿌리 내리고, 제멋대로 꽃을 피우고…… 뽑아내려고 해도 사라지질 않고.’
기껏 힘들여 뽑아내 본들 빈 자리에 거짓말처럼 다시 싹이 돋아 정원사를 괴롭히는, 기억은 잡초와 다를 바 없었다.
차라리 잡초도 키우던 꽃이라고 치고 제멋대로 자라게 포기하고 싶어질 정도로 끈질기게, 사라지질 않았다.
죽어 버리지 않는 한, 잊지도 못하겠지. 정원에 불을 지르듯 콱 죽어 버리면 마음도 기억도 다 사라지겠지만 살아 있는 한 떨쳐낼 수 없겠지.
‘죽는다니, 애처럼 울기야 했지만 죽어 버릴 정도는 아니잖아. 그건 너무 한심하잖아.’
에드문트가 이상하게 행동하고, 자꾸 그의 이상 행동을 떠올리는 자신이 짜증 났으나 죽어서까지 도망치고 싶던가?
그럴 리가. 저를 먼지 쌓인 그림 취급할 적에도 이대로 그냥 결혼하겠거니 체념하고 살아왔는데.
‘하물며, 괴물 같던 남자가 이제는 제법 사람 같아 보이기까지 하는걸! 이제 에디가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라고.’
엘리아는 이제 완전한 망각이 불가능함을 절절히 깨달았다.
그러니 도망쳐 온 서점에서 남자를 잘라 내는 대신, 해답을 구하고자 했다.
‘내가 에드문트에게 의미가 있었다면, 대체 언제부터? 그럼 여태까지는 왜 나를 다른 사람들처럼 무시했는데?’
시작점은 도대체 어디였을까? 구름 한 점 없던 여름날 정원이었을까, 데이지가 입혀 준 푸른 예복을 입고 오리 요리를 먹은 날이었을까.
아니면 처음으로 땋은 머리를 하고 에드문트와 저녁을 먹었던 겨울날이었을까…….
과거를 되짚을수록 답답해졌다. 엘리아에게는 에드문트의 마음을 추측해 볼 그럴듯한 후보조차 없었다.
결과에는 원인이 있어야 한다. 꽃이 활짝 피어날 수 있었던 건, 따뜻한 햇볕과 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에드문트를 무서워하게 된 건, 그가 슬픔 한 조각 내비치지 않은 채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엘리아가 자신의 약혼자를 괴물이라 여기지 않게 된 건…….
<집사가 물어보길래, 네가 좋아했던 것 같았다고 이야기해 주었어.>
대답 한마디가 원인이 되어 준 덕분이었고.
그러니 에드문트가 엘리아에게 다가오게 된 데에도 분명 원인이 있어야 옳다.
‘나는 남들과 뭐가 달라서 네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었던 거야?’
한데 대체 무얼 했다고. 엘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피해 다니기만 바빴는데.
‘선물을 준 적도 없고, 어제는 무얼 하고 시간을 보냈냐고 물어본 적도 없었잖아. 편지조차 써 본 적 없었는데.’
매해 부모가 죽은 날이 돌아올 때는 또 어땠는가. 엘리아는 혼자 저택에 있을 약혼자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외젠과 부둥켜안고 저들끼리만 슬픔을 다독였을 뿐.
‘나는 네가 혼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왜 사람같이 굴지 않느냐고 속으로 화를 내기만 했는데.’
엘리아는 지금껏 자신이 나름 노력해 왔다고 자부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자를 방치해 두고, 눈으로만 관찰했으면서.
<외젠. 나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어. 대꾸 한마디 없는 인간한테 인사하고, 눈 마주치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얼마나 허무한 일인데.>
겨우 인사 한번 건네고 으스댄 게 전부였다. 그전까지는 스스로가 대견하기까지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어린애가 상점 간판 한 글자 읽고 글자를 깨쳤다고 자랑한 꼴이나 진배없었다.
‘그 황량한 저택도 여태 견뎌 왔으면서. 견디다 못해 기어코 외로워진 걸까? 그래서 가족이 될 내게 지금이라도 다가오려는 걸까?’
말 못 하고 속으로 끙끙 앓으면서도, 엘리아는 적어도 겉으로는 내비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 마음을, 답답한 속을 누군가에게 드러내는 방법조차 알지 못해서.
“그래서, 진짜 왜 온 건데? 정말 책 때문이라고?”
근데 저 눈치 없는 서점 주인이 엘리아를 쿡쿡 찔렀다. 심란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걸 눈치챘으면, 책이나 보며 마음 정리하고 돌아가게 내버려 두면 좋을 텐데.
마치 자신이 속마음을 전부 꿰뚫어 봤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엘리아를 추궁했다.
“뭐 고민이라도 있나 보지?”
만약 오늘이 에드문트가 처음 저택에 찾아온 다음 날이었다면, 엘리아는 외젠의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닐스를 두고 엉엉 울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엘리아는 에드문트의 낯선 행동에 훌륭하게 적응하여, 울어 재끼는 대신 입을 열고 조잘거리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말하고 싶다. 내 약혼자가 갑자기 관심을 보이는데 계기를 모르겠다고.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저 혼자 갑자기 변해서는 숨 돌릴 틈도 안 주고 나한테 다가온다고.’
솔직히 엘리아가 고민을 털어 둘 곳이 달리 어디 있겠는가. 그나마 닐스가 엘리아에게 유일한 말 상대인걸.
나누는 대화라곤 기껏해야 알맹이 없는 잡담이 전부이긴 했지만.
<있잖아, 닐스 씨. 내가 어제 오빠가 절대 건들지 말라고 한 화구를 몰래 쓰다가 망가뜨렸거든. 이걸 자진신고를 해야 할까, 아니면 평생 비밀로 숨겨야 할까?>
<화구 부서진 건 어디에 숨길 건데?>
<안 쓰는 화구 모아 둔 구석에. 울 오빠는 절대 못 찾을걸?>
<그럼 무조건 비밀로 해야지.>
엘리아가 속으로 말을 해도 될까 갈등하는 줄도 모르고 닐스는 옷차림 지적이나 하며 엘리아의 속을 긁었다.
열 받아서 모자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는데, 어찌나 후련한지.
겨우 모자 하나 벗어 던졌다고 이렇게나 해방감이 드는데 속을 터놓으면 얼마나 후련할까?
엘리아는 정말, 잠시만이라도 후련해지고 싶었다.
‘쟤랑 에드문트에 관한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진짜 어이없는 상황이긴 한데…… 대충 나 아닌 척하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발설의 욕구를 견디지 못한 엘리아가 벗어 낸 모자를 꾹 눌러 잡고 입을 열었다. 데이지가 찬장 위에 숨겨 둔 사탕을 몰래 꺼내 먹을 때 느꼈던 감각이 엘리아를 스쳐 지나갔다.
나쁜 일을 저지를 때에나 느낄 수 있는 짜릿한 전율이었다.
“있잖아. 그게…… 이건 내 친구 이야기인데.”
닐스를 향해 목소리를 내며, 엘리아는 나름 훌륭하게 첫 소절을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하나 닐스는 어김없이 엘리아의 거짓말을 끊어 냈다.
“너 친구 없잖아.”
“아, 진짜. 못됐어! 이럴 땐 좀 속는 척하고 들어 주면 안 돼?”
입이 댓 발 나온 엘리아가 그를 쏘아보았다. 괜히 닐스에게 털어놓을 생각을 했나 하고 후회가 들었다.
닐스 역시 마찬가지로, 성격 못 죽이고 엘리아에게 쏘아붙인 스스로의 입방정에 후회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후회했을지는…….
“미안.”
늘 뾰족하기만 하던 남자애의 답지 않은 사과가 정답을 말해 주었다.
엘리아가 연한 갈색 눈동자를 커다랗게 키워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웬 사과?
‘뭐지? 나도 모르게 좀 과하게 짜증 냈던가?’
덕분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
“아, 미안하다니까.”
“그…… 렇게까지 미안해할 거 없는데. 근데 나 친구 없는 거 아니거든?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그리고 닐스 씨도 친구 없잖아.”
“그래. 그렇다 쳐.”
“사실인 걸 뭘 그렇다 쳐?”
“고민 얘기나 해 봐. 네 ‘다른’ 친구들한테 털어놓을 거 아니면.”
닐스는 다시 평소와 다름없는 얄미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본인 성격 나쁘다는 사실을 굳이 다시 상기시켜 주다니.
“후우…… 그게, 그러니까. 내 얘기야. 내 얘기. 뭐냐면, 내가 아는 사람이 말이야. 나한테 요즘 평소랑 다르게 굴거든?”
“아는 사람? 누가.”
“말 끊지 말고 먼저 들어 봐. 그 사람이 말이야. 원래 나를 막……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해 왔거든? 근데 나는 그 사람이 나를 무시해도 그러려니 했어.”
엘리아의 손가락이 모자를 쥐었다 펴는 모습이 닐스의 시선을 끌었다. 떠나지 않은 목소리만도 충분했는데, 가는 손가락이 자꾸만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원래 성격이 다른 사람한테 살갑고 다정하고…… 막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 오히려 막 무시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기만 하지.”
“흐음. 그랬는데?”
닐스는 심드렁한 척 대꾸했지만, 속으로는 대체 엘리아가 누구 때문에 고민하는 건지 추측해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누구길래 매년 지키던 규칙마저 깨고 서점에 달려와 고민거리랍시고 이야기를 털어놓는 거지? 가족은 아닌 것 같은데.’
어린 닐스는 엘리아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보다 그를 고민케 할 정도로 영향력을 가진 자가 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어 애가 탔다.
“근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나한테 막 잘해 줘. 갑자기 말이야.”
‘잘해 준다.’라는 여상한 단어로 뭉쳐 표현했으나, 엘리아는 자신을 대했던 에드문트의 모습을 떠올리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낯간지러운 말들, 목소리, 아기자기한 선물이 새삼스럽게 엘리아를 부끄럽게 했다.
닐스에게는, 질투심을 느끼게 했다.
‘아무것도 안 하다가 갑자기 잘해 줬다고? 대체 누구길래…… 얼굴까지 붉히고?’
“당신이 들어도 진짜 이상하지? 그래서 처음에는 장난치는 줄 알았거든. 안 믿었단 말이야. 근데, 거짓말이 아닌 걸 알고 나니 어이가 없는 거야. 화까지 났다니까? 여태 나 무시했는데, 갑자기 자기가 나랑 무슨 일이라도 겪었던 것처럼 구는데.”
“뭘 어떻게 잘해 줬는데.”
구체적인 예시를 묻는 말에 엘리아는 천진하게 손가락까지 펼쳐 ‘아는 사람’이 제게 잘해 준 일들을 하나씩 짚어 댔다.
“어떻게 했냐고? 음 예를 들면…….”
제 속마음을 털어 내느라 정신이 없어서 닐스의 목소리가 전보다 낮아진 건 눈치채지도 못한 채.
한숨을 쉴 때마다 사락거리는 자신의 머리칼에 남자의 한층 더 집요해진 시선이 따라붙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일단은, 평소에는 부르지도 않던 이름을 애칭으로 부르고.”
“애칭?”
“응, 어릴 때 좋아하지 않았느냐면서 이제 와서 애칭으로 부르더라. 내 이름도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네 애칭이 뭔데.”
“내 애칭? 별거 아니고 그냥 다른 집이랑 똑같이 뒤에 몇 글자 떼서 부르는 거지 뭐.”
“그럼, 엘리?”
“맞아.”
“……엘리.”
닐스가 확인을 구하듯 한 번 더 엘리아의 애칭을 읊었다.
이상하다, 겨우 이름일 뿐이었는데.
“엘리라고 부르는구나.”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잡초 같은 기억이 하나 더 새겨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왜였을까.
“으응, 엘리 맞아.”
“누가 지어 준 건데?”
“어? 글쎄. 아마도 부모님이…….”
“부모님이 왜? 갑자기 말을 하다가 말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꼬박꼬박 대꾸하던 엘리아가 돌연 무심코 뱉은 부모님 이야기에 퍽 당황하고 말았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을 때마다 백금발이 어지러이 춤을 추었다.
흐트러지는 머리칼에 닐스는, 다가가 보려 하지도 못한 채 거절당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부모를 잃은 건 꽤 어렸을 때라고 했으니 저렇게 입에 담고 놀랄 정도로 극복 못 했을 리는 없고. 그냥 나는 부모 이야기까지 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라는 건가.’
닐스는 문득 든 자괴감에 뒷짐 진 손을 꾹 쥐었다.
엘리아를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면 늘 오늘 같은 일이 벌어졌다. 어쩌면 아무 뜻도 없을 말에 일일이 마음을 쓰고 며칠 동안 곱씹어 괴로워했다.
남들에겐 하등 의미 없을 작은 몸짓과 말 한마디에도 사사건건 의미를 부여해 가슴 아파하는 스스로가 참으로 비참했다.
비참하다 여기면서도, 벗어나지를 못했다.
생각을 멈출 길이 없어 결국 그리움도…… 괴로움도. 늘 닐스의 곁에 바짝 붙어 떨어지지 않곤 했다.
“또. 애칭 말고도, 어떤 식으로 괴롭힌 건데.”
“아, 그리고 선물도 줬어. 그 사람한테 선물 받은 거 처음이었어. 물론 나도 준 적 없으니까, 여태까지 선물 한번 준 적 없었다고 욕하는 거는 절대 아니거든?”
“처음이었다고?”
“그래. 처음으로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준 거였는데 그게 너무 낯설었어. 원래 사과도 안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갑자기 찾아오고, 미안하다고 선물까지 줬다고? 이상하네.”
“그렇지! 이상하지!”
에드문트를 향한 소심한 험담에 누군가 장단을 맞춰 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험담의 대상이 에드문트라는 건 닐스에게 비밀이었지만.
‘이상하네.’라는 짧은 추임새 하나 넣어 주는 것만으로도 답답하게 막혀 있던 속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뒤에서 모여서 남 욕을 하나 봐. 학술원에서 애들끼리 시답잖게 남의 흉보는 거 바보 같다고 생각했는데.’
발설의 유혹에 굴복했더니 후련함이 보상처럼 찾아왔다. 엘리아는 조금 흥분하고 말았다.
“그리고 또 엄청 비싼 선물을 보내왔어. 보석도 아닌데 보석만큼 비싼 거. 왜 줬냐니까 그냥 생각나서 줬대.”
“생각나서 줬다고? 무슨 생각인지는 말 안 하고?”
“어, 음…… 그게…… 나를 보고 떠올렸다고…….”
신이 나서 꽃을 받은 이야기까지 구구절절 하려던 엘리아가 당황해서 멈칫거렸다.
‘그냥 있었던 일을 말하려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부끄럽지?’
어째 에드문트가 벌였던 이상한 행각을 입으로 떠들자니, 마치 연애 소설을 소리 내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낯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연애 소설이라니. 엘리아 로앙과 에드문트 라스페가?
“…….”
엘리아가 얼굴을 살짝 내리고 말을 얼버무리는 모습을 보며 닐스가 얼굴을 굳혔다.
애써 자신의 시선을 피하겠다고 내린 얼굴에, ‘잘해 준다.’라고 고백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붉은 기가 맴돌고 있었다.
닐스는 엘리아의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읽어 내곤 뒷짐 진 손을 다시 한 번 꽉 쥐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쥔 손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설마. 그를 말하는 건가.’
엘리아가 말하는 ‘아는 사람’의 정체를 추측해 낸 닐스는 화가 치미는 걸 느꼈다. 자신에겐 내내 지켜보는 것만 허락된 여자에게 그가 전조도 없이 다가가 혼란케 했다니.
무시하면 그만일 그 사람의 행동에, 엘리아가 휘둘렸다니.
‘여태껏 방치해 온 주제에, 이제 와서 휘두르려 한다고.’
아직 다가가지도 못했는데, 마치 자신을 엘리아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겠다는 듯 다가온다니.
“불쾌했겠네.”
“응?”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불쑥 찾아오고, 미안하다는 핑계로 부담스러운 선물이나 줬다며.”
“그 뭐, 부담스럽긴 했지. 근데 불쾌했다기보다는, 이 사람이 왜 나한테 이러는지 궁금해서 죽을 것 같았어.”
“원하지 않은 선물을 무작정 밀어붙이는 거, 큰 실례라고 생각 안 해?”
“어? 음. 물론 싫다고 표현하는 사람한테 계속 억지로 주려고 하면, 그건 잘못된 행동이지.”
싫다고 의사 표현을 하는데도 찾아오고, 선물을 주는 건 분명 옳지 않다. 그러나 엘리아의 사례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엘리아는 에드문트에게 약속 없이 찾아오지 말라고 말한 적이 없었고, 선물 같은 거 주지 말라고 밀어낸 적도 없었으니까.
그저 서로 무시했을 뿐.
‘그렇게 치면 오히려 외젠이 에드문트한테 그동안 실수해 왔던 거 아닌가? 다섯 번에 한 번꼴로 거절당하면서 포기도 모르고 매번 에드문트한테 같이 점심 먹자, 공작가에 찾아가도 되느냐며 질척거려 왔잖아.’
그뿐인가. 꼬박꼬박 돈까지 빌려다 쓰고. 여태 빌린 돈 갚으려면 엘리아와 외젠은 아마 죽을 때까지 일만 해야 할 게 분명했다.
‘심지어 약혼도 우리 쪽에서 매달려서 한 거였잖아? 그야말로 나랑 외젠이 살겠다고 에드문트에게 기생하는 거나 진배없는데.’
마음 한구석에다 처박아 둔 에드문트를 향한 양심에 통증을 느꼈다. 아무래도 엘리아는 남 뒷말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는 듯했다.
“근데 닐스 씨,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갑자기 안 그러던 사람이 태도가 달라졌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거야. 어때? 닐스 씨는 사람이 계기도 없이 바뀌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계기도 없이 관심을 두고, 방치해 두더니 사랑하는 게 가능할까?
닐스가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다면, 아마 알려 줄 수 있었으리라.
때로는 원인이 없어 보이는 결과도 존재한다는 걸. 믿기 어렵겠지만……. 자신도 직접 겪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고.
엘리아를 처음 만난 날에도, 사랑을 깨달은 날에도. 그에게는 아무런 징조도 없었다.
대체 무엇이 그가 엘리아를 사랑하게 했는지, 또 하염없이 기다리게 했던 건지.
사랑을 앓고서도 계기를 알 수 없어, 닐스는 여태껏 아파하고 있음에 결국 그는 이해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말았다고.
애초에 사랑에, 기다림에 계기가 그렇게나 중요한 거냐고 제멋대로 수긍하고 말았노라고.
“그러게. 내 생각에도 그 사람이 충분히 경솔하게 굴었다는 생각이 드네.”
‘나도 모르게 너를 사랑하고야 말았다.’라고, 서툰 고백을 할 용기는 없었지만.
닐스는 무어라도 전하고 싶었다. 전하지 않으면 또 약속된 날에만 겨우 얼굴 한번 볼 수 있는 여자를 기다리다 미쳐 버릴 게 분명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제가 버틸 수 있는 만큼만 담아내고, 넘쳐흐르는 마음을 뱉어 내고자 했다.
사랑이,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엘리.”
두 사람이 잠시 입을 다문 채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만약, 나였다면.”
한여름처럼 짙푸른 닐스의 눈동자가 돌연 시선을 빼앗는 통에, 엘리아는 뒤늦게 그가 자신을 애칭으로 불렀음을 깨달았다.
저는 꼬박꼬박 ‘닐스 씨’라고 경칭해 주는데, 허락도 구하지 않고 애칭으로 부르다니.
‘에드문트도 그렇고, 이제는 서점 주인까지…… 요즘은 사회적 규범이 만든 순서를 지키지 않고 마음대로 넘나드는 게 유행이야? 나 모르는 사이에 그런 유행이 생긴 거야?’
엘리아가 눈을 살짝 찡그려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질투로 눈이 뒤집힌 남자에게 반응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나라면 절대로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 내가 만약에, 너를 진심으로 생각해 다가가고 싶다면. 내 욕심을 채우는 것보다 네가 불편하지 않게 배려하는 게 우선일 테니까.”
닐스가 한 걸음 다가왔다. 겨우 한 걸음이었고, 다가가지 않아도 되었을 어리석음이었다.
“혹시나 성급하게 굴어 너를 겁먹게 하지 않도록 조심할 테고. 정말로 너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말한 것처럼 할 거야.”
닐스는 스스로가 치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으로는 견제하려 들었다.
그가 불편하면, 외면해 버리라고.
얼마든지 너를 위해서 다른 사람이 되어 줄 테니까.
‘절대로, 네 약혼자처럼 굴지는 않을 테니까.’
엘리아를 혼란케 할 이가 약혼자, 라스페 공작임을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냉혹하고 오만하다 정평 난 공작의 속내는 알 수 없었지만, 당장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약혼자라는 이름으로 엘리아를 독차지하고도 멍청하게 방치해 두기만 하더니. 뒤늦게 제 약혼자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구애하려는 모양이지.’
치기 어린 질투가, 그를 눈멀게 했다.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뇌까리면서도…… 결국 같은 꼴이 되고야 말도록.
스스로의 감정을 이겨 내지 못하고 모순을 자초하고야 만 남자는 결국 후회하리라.
‘부디, 엘리아. 노력하지 마. 네 약혼자를 이해해 보겠답시고 네가 느낀 불편함을 억지로 깎아서 품어 보려고 하지 마. 이해하려 들지 마. 제발. 닿지 못할 곳으로 사라져 버리지 말아 줘.’
후회하면서도, 멈추지를 못하고 사랑할 줄만 알리라.
* * *
어린 남자가 기다리느라 곪은 속을 버텨 내지 못하고 질투를 드러내고야 말았을 때, 자신이라면 다르게 굴었을 거라며 스스로를 드러내고야 말았을 때.
‘왜……?’
엘리아는 아득한 기분을 느꼈다. 남자의 눈에 서린 감정이 질투인 줄은 몰랐으나, 평소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어째서. 왜 당신까지 나한테 이래…… 대체 왜?’
마음속에서, 대답을 듣고 싶지 않은 질문만 반복해야 했다.
사랑은 어찌나 극악한 감정인지,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던 엘리아에겐 그저 가시 돋친 꽃처럼 보였다.
아직은, 아름다운 꽃 아래에 돋친 가시만 선명하여 두렵게 느껴졌다.
‘다들 이상하게 굴어. 대체 내가 무얼 했는데. 뭘 바보처럼 남들 다 아는 걸 혼자 몰라서 바보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거냐고.’
남자의 후회와 여자의 혼란이 만든 불편한 침묵. 그 끝자락에, 엘리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닐스 씨의 조언 잘 새겨들을게. 만약에 내가 싫다고 극구 말렸는데도 강요하거든, 꼭 두들겨 패서 쫓아내 버릴 테니까. 염려 고맙고…….”
겨우 입을 떼긴 했는데 어떻게 말을 끝맺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말았다.
그냥 푸념하면 닐스가 ‘뭐 그딴 거로 속앓이하느냐.’라고 바보 취급하고 말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진지함을 넘어서 이건…….
‘무슨, 마치 고백같이 들리잖아. 저는 다르니까 기다리겠다는 말처럼…… 들리잖아.’
엘리아는 처음 타인에게 속을 풀어 낸 죗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예상치도 못한 상대에게, 예상치 못한 말이라니.
‘나 벌 받나 봐. 둘째 주 화요일도 아닌데 서점을 찾아와서. 안 하던 짓을 하는 바람에.’
평소처럼 굴지 않은 탓에, 어제 같지 않은 오늘이 다가와 엘리아를 벌주려는 걸까.
“음…… 나는 가 봐야…… 아. 책값이 얼마이려나? 아까 돈을 전부 테오 경에게 줘 버려서, 아마 문밖에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엘리아, 잠깐만.”
닐스 역시 제가 벌인 일을 어째 수습하지도 못해 애탄 기색이 완연한 목소리로 엘리아를 불렀다.
애칭을 부르던 태도에서는 한발 물러난 상태였으나, 이미 당황한 엘리아에겐 별 소용이 없었다.
불편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파 급히 일어난 엘리아가 직접 서점 문을 열려고 몸을 휙 돌렸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쥐고 있던 모자를 떨어뜨렸다는 사실도 잊고 말았다.
“어, 엄마야!”
그때, 엘리아가 당기지도 않은 문이 먼저 죽 밀려와 엘리아를 뒷걸음치게 했다. 거세게 밀린 문을 간신히 피한 엘리아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
“엘리아, 괜찮아? 지금은 손님을 받지…….”
“아이고, 죄송합니다. 정말 여기 계셨군요.”
닐스가 급히 들어오려는 사람을 제지하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기가 막힌 때에 문을 열고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건들거리는 표정의 청년, 공작가의 보좌관 한스와…….
“……에디?”
그가 모시는 공작, 엘리아의 약혼자.
“……라스페 공작?”
에드문트 라스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