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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도피 (9/79)

9. 도피

“후우…….”

백작가 저택 3층. 외젠 로앙 백작의 집무실에 긴 한숨 소리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잔뜩 쌓인 서류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외젠의 것도, 외젠이 봐야 할 또 다른 서류를 책상 위에 쌓아 주던 보좌관도 아니었으며, 식은 차를 새로 바꾸어 주고 있던 하인이 내쉰 한숨은 당연히 아니었다.

“엘리.”

기껏 마련해 준 책상은 마다하고 진녹색 소파에 배 깔고 누워 서류를 뒤적거리던 엘리아의 한숨이었다.

뭐가 그리 마뜩잖은지, 외젠이 봐 달라 부탁한 서류를 베고 누운 채 다리를 휘적거리다가 또 한숨을 쉬어 댔다.

‘저게 또 왜 저러는 거야? 공작가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바득바득 우기더니.’

웬일로 제 발로 집무실에 찾아와서는 도와줄 일 없냐고 묻더니만, 기껏 일을 맡겨 놨더니 도와주긴커녕 서류를 베고 누워 세상 다 산 것처럼 굴기나 하고.

‘제발 치렁치렁한 옷자락이라도 펄럭대지 말든가, 한숨을 쉬지 말든가!’

안 그래도 일하기 싫어 죽겠는데, 엘리아가 얄팍한 외젠의 집중력을 자꾸 흐트러뜨렸다.

참다못한 외젠이 엘리아의 이름을 한 번 더 힘주어 불렀다.

“엘리아!”

“왜 또 불러.”

“왜 부르는지 몰라서 물어? 내가 그 노인네 같은 한숨 그만 쉬라고 했잖아.”

“뭐야, 내가 분명 잔소리 계속하면 나갈 거라고 했는데.”

“이제 겨우 두 번 했어.”

“벌써 네 번째거든? 아까 나더러 다리 휘적거리지 말라고 두 번이나 말했잖아. 그렇지, 톰? 너도 들었지?”

정리한 찻잔을 들고 슬그머니 빠져나가려던 하인 톰이 엘리아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면 은근 뒤끝 있는 외젠이 삐칠 테고, 거짓말로 외젠 편을 들자니 엘리아가 서운해할 게 분명하기에, 갈등하던 톰은 결국 제삼의 선택지를 찾아 내뺐다.

“어휴, 그…… 저는 두 분께서 중요한 일 이야기하시는 줄 알고 부러 귀담아듣지 않아서요. 잘 모르겠습니다.”

톰이 애매한 대답만 남기고 밖으로 도망쳤으니, 남은 증인은 이제 로앙가의 보좌관뿐이었다. 그는 진즉 저를 잊어 달라는 듯 서류 더미 뒤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가득 쌓인 서류도 남자의 존재감을 지워 주지 못했다. 두 남매의 시선이 동시에 보좌관 루카스에게 쏠렸다.

“루카스? 말해 봐. 네가 들은 대로, 똑똑히. 외젠 눈치 보고 거짓말 말고!”

“참나, 내가 눈치를 줬다고? 루카, 들은 대로 이야기해. 진짜 나는 괜찮으니까.”

두 남매 싸움에 끼어 저까지 곤란해지고 말았으나, 루카스에게는 다행히 하인 톰이라는 훌륭한 선례가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이 들은 진실은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저도 하필 일에 열중하느라 듣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게 다 이번 주 치 아닙니까? 그러니 두 분께서도 서로 양보하시고 다시 작업에 열중하시는…….”

“됐어! 두 번이었든 네 번이었든 간에! 좀 똑바로 앉아서 하라고! 정신 사나워 죽겠다!”

“본인 집중력이 한심한 걸 왜 내 탓을 하는 거야?”

두 사람의 싸움을 중재해 다시 책상 앞으로 데려오려던 루카스의 계획은 처참히 실패했다.

“대체 누굴 닮아 미운 짓만 골라 해 대는 거야?”

“누굴 닮았냐니. 외젠 네 피랑 내 피랑 뭐가 다른 줄 알아? 어디 욕해 봐. 그게 다 결국 본인 욕하는 거랑 뭐가 달라?”

“야! 내가 어릴 때 너처럼 군 줄 알아? 나는 정상이었어!”

“자기가 다 키워 준 거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잘못 컸다 이거야? 그럼 다 오빠 탓이겠네!”

유치한 말싸움이 이어진 끝에,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엘리아가 기어코 몸을 일으켰다.

“야, 어디 가! 일 쌓인 거 안 보여? 네 몫은 다하고 가야지!”

“다했거든? 진작 다하고 더 도와줄까 했는데. 하필 이런 일이나 나한테 시키고!”

“뭐? 벌써 다했어? 야! 엘리! 도와준다고 왔으면 좀 더 해 주고 가!”

“아, 아가씨! 가시면 안 됩니다!”

“엘리! 나랑 루카스랑 이걸 어느 세월에 다 하냐고…… 이런 일은 또 대체 무언데! 일이 뭐가 어쨌다고!”

외젠의 목소리가 점점 애원으로 바뀌든 말든, 엘리아는 집무실을 박차고 나와 4층으로 향했다.

“아흐. 다리 아파 죽겠네.”

발바닥부터 허벅지까지 성한 곳이 없었다. 오늘 벌써 몇 번째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지…….

“아가씨, 다시 오셨어요? 이번이 세 번째인 거 아시죠?”

하인들이 모여 지내는 4층 구석방을 찾아갔더니 데이지가 친절하게도 엘리아의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4층 계단을 내려갔다 올라갔다 한 게 벌써 세 번째란다.

일어나자마자 1층 주방 구경 갔다가 도로 4층에 올라와서 책을 펼쳤고, 펼친 지 5분도 안 되어서 연무장엘 뛰쳐나갔다가 4층으로 도망쳐 왔으며, 다시 3층에 내려가 외젠의 일을 도와주는 안 하던 짓까지 해 봤는데.

그런데 전부 소용이 없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운동이나 대차게 했다는 것 말고는, 엘리아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생각이 떨어지질 않아. 진짜 미쳤나 봐…… 공작가에서 오리 요리에 무슨 약 탄 거 아냐?’

엘리아는 또 무심코 오리 요리를 떠올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리라니! 하필 왜 그딴 걸 떠올린 건지!

‘잘못돼도 아주 한참 잘못됐다고!’

사정은 이랬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필 엘리아의 눈에 들어온 게 에드문트가 주고 간 오르골이었다.

눈치도 없이 반짝반짝. 햇빛을 받아서 예쁘긴 또 얼마나 예뻐 보이던지.

‘저게 왜……. 아, 천 덮어 놨는데 바람에 날려서 떨어졌나 보네.’

저 혼자 천 밖으로 기어 나와선 존재감을 과시하는 오르골이, 에드문트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엘리아는 ‘참 실없는 생각을 한다.’라며 스스로를 꾸짖었을 뿐이었다.

찝찝한 기분으로 침실을 나왔는데, 환기한다고 복도에도 창문을 열어 두어 서늘했다.

‘오랜만에 주방에 가 볼까? 지금쯤 내일 먹을 빵 굽고 있겠지.’

화덕 앞에서 뜨끈한 온기를 쬘 생각으로 1층에 내려갔다.

한데 막상 톡톡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화덕을 보고 있자니, 주홍색 꽃이 생각나는 게 아닌가.

선물한 남자의 알쏭달쏭한 해명까지 말이다.

<네 눈을 볼 때마다, 가을에 피는 꽃을 떠올렸어.>

다른 걸 생각해야 했다. 에드문트 말고, 다른 것들 말이다. 세상에 얼마나 고찰하고 성찰해야 할 것들이 넘치는가.

엘리아는 누군가 잘난 척 써 둔 글 속으로 저를 던지고자 했다. 하여 4층 서재로 올라왔다.

한데 잡히는 대로 펼쳤는데, 하필 연애 소설이었다. 엘리아가 들여놓은 건 절대 아니었고, 아마 4층 하인 중 누군가의 것이리라.

‘다른 책들도 많은데 하필……?’

심지어 펼친 장은 주인공이 연인에게 애틋한 고백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내겐 너밖에 없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 가진 적도 없었고, 이제 가지고 싶지도 않아.>

엘리아는 무심코 읽은 고백 장면에, 마치 반만 살아 펄떡거리는 벌레를 발견한 것처럼 질색했다.

하지만 이미 눈으로 읽은 글귀가 머리에 콕 박힌 뒤였고…….

<내겐 너밖에 없어, 엘리아.>

에드문트의 목소리가 책 속의 남자 대신 고백을 읊어 댔다. 마치 엘리아가 아는 목소리가 에드문트 하나인 것처럼.

오로지 에드문트의 목소리만으로.

도망치듯 뛰어 내려간 연무장에서는 또 어땠던가. 평소에는 텅 비어 있던 연무장에는 그날따라 하인들이 가득했다.

<아가씨,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저희는 그러니까, 상하기 전에 말려 둬야 해서…….>

당황한 사용인들의 모습에 이상한 낌새를 느낄 틈도 없이, 엘리아는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마주해야 했다.

주홍빛이 넘실거리는 연무장을.

풀 한 포기 없이 멀끔해야 할 연무장에 흐드러진 꽃이라니. 대관절 어디가 엘리아의 눈을 떠올리게 한다는지 모를 주홍빛 꽃이라니.

그야말로 기막힌 우연이 엘리아에게 선물한 총체적 불운이었다.

엘리아는 다시 만난 에드문트의 흔적에 질겁해서는 저택을 향해 내달렸다.

<아가씨, 오늘 왜 이렇게 바쁘세요? 어디 가시는데요?>

‘어디 가느냐고? 제집에 있을 에드문트한테서 도망 다니는 중인데!’

다행히 엘리아는 제가 미쳤다는 말을 떠들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침실? 아니, 거긴 오르골이…… 서재는 아까 갔다가 왔잖아. 그럼 남은 게 어디지? 응접실?’

응접실은…… 에드문트가 다녀갔던 곳이었으니 절대로 안 됐다. 엘리아는 마지막 피난처가 될 화실로 향했다.

물론 화실 문손잡이를 열고, 그리다 만 풍경화 앞에 앉자마자 먼저 칠해 놓은 하늘색이…….

푸른 꽃을 선물했을 때,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으니.

엘리아는 붓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제가 선물한 그림을 쥔 채로 굳어 있던 에드문트가 떠오르는 바람에.

눈동자에 푸른 꽃이 비치던 모습, 떨어질 줄 모르는 시선에 느꼈던 아득한 기분이 시간을 짓치고 현실의 엘리아를 찾아온 까닭에.

그게 끝이어야 했다. 화실을 나와 3층에 있는 외젠의 집무실이 마지막이 될 줄 알았다.

<외젠, 내가 일 좀 도와줘?>

<네가 웬일이냐? 설마 도와준다고 하고선 또 속 터지는 소리만 하다 가려고?>

<그럼 나 간다?>

<아니, 엘리! 안 돼, 제발 일단 좀 앉아 봐. 응? 루카스, 아까 숫자 다시 맞춰 봐야 한다고 했던 이번 달 결산 자료랑 다음 분기 예산안 짜 놓은 거 엘리아에게 보라고 하자.>

그러나 외젠이 대신 봐 달라고 던져 준 서류에는 한 문단에 세 번꼴로 ‘라스페 공작가’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로앙가가 라스페가에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의존 중인 탓에 이번 달 결산 자료에도, 다음 분기 예산안마저 에드문트의 가문 명을 품고 있더라.

‘누가 좀 도와줘. 제발…….’

누구도 엘리아의 앞에서 에드문트 라스페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거늘.

에드문트가 저를 찾아오거나 부담스러운 선물과 함께 초대장을 보낸 일도 없었는데.

엘리아 혼자 뭐에 홀려서는 자꾸 에드문트를 떠올렸다. 맹세코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여기 있으면 안 되겠어. 이러다 머릿속에 에드문트밖에 안 남을 것 같아. 바보가 되어 버릴 것 같아. 어디라도 나가야겠어.’

왜 저택을 나가 버릴 생각을 못 한 건지. 진작 생각했으면 계단 오르내리는 생고생 안 했을 텐데.

“데이지, 나 마차 좀 불러 줘.”

“예? 어딜 가시려고요?”

“내가 달리 갈 데가 어디 있어.”

“어머, 아가씨 오늘 약속 있으셨던 거예요? 저희가…….”

옹기종기 모여 있던 하인들이 외출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거렸다. 놀란 엘리아가 급히 부정어부터 뱉어 냈다.

“아니야. 거기 아니라고.”

“거기가 어딘데요?”

사용인들은 그저 엘리아가 약속이 있겠거니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아무도 ‘에드문트 라스페’라는 이름은 꺼내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냥 평소 가던 데 가려는 거야. 그러니까 아니야. 아니라고.”

수습할수록 엉망이 되는 기분에 결국 엘리아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보다 못한 데이지가 지원에 나섰다.

“상점가 말씀하시는 거죠? 잠시만요. 루델, 아가씨 상점가 가실 거니까 4인승 마차 준비하라고 해. 나머지는 아가씨 옷 중에 오늘 날씨에 괜찮을 거 몇 벌 챙겨 와 보자.”

데이지는 엘리아의 외출 채비를 위해 사용인들을 재촉했다. 엘리아도 그중 한 명에게 서재에 있는 책 중에 미리 빼 두었던 열두 권을 마차에 실어 달라고 부탁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침실로 가려는데, 데이지가 사람 없는 틈을 타서 속삭였다.

“아가씨, 그 서점 가시려고요?”

“응, 책 볼 게 없고…… 그래서.”

“깜짝 놀라겠어요. 아가씨 가는 날 아닌데도 찾아가면.”

“그러게. 날도 아닌데 왜 왔냐고 쫓겨나는 거 아닌지 몰라.”

“그럴 리가요. 단골이신데.”

학술원을 졸업한 이후부터 들락거리기 시작한 서점은 엘리아 또래의 귀족가 후계 소유였다. 몇 년째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중인데, 고정적인 방문일 외에 찾아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거 완전 에드문트랑 똑같이 구는…… 아 맙소사. 그만 좀 생각해 바보야. 생각할 게 에드문트밖에 없어? 저택에서 시달린 것만으로 충분하잖아. 제발 서점에까지 에드문트 생각을 끌고 들어가지는 말자!’

엘리아는 데이지가 꽁꽁 싸매 주는 대로 입고 뒤뚱거리며 마차에 올라탔다. 어쩐지 마차가 좁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난번 얻어 탄 공작가의 마차 때문이었다.

커다란 공작가 마차를 떠올리려니, 상념은 자연스레 에드문트와 나눴던 대화까지 뻗어 나가려고 했다.

<엘리.>

맙소사. 엘리아는 기어코 제 뺨을 찰싹 때려 버렸다. 생각 같아선 있는 힘껏, 정신 차릴 때까지 때리고 싶었지만 제 몸뚱이 때리는 거랍시고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벌게진 볼을 병 주고 약 주듯 쓰다듬으며 애써 다른 생각을 해 보려 했다.

‘기껏 외출까지 나왔으니 서점 생각이나 하자. 좋아, 일단 가거든 전에 들여놓았던 책은 왜 하나같이 엉터리였냐고 한마디 해 줘야지.’

엘리아는 맞은편 자리에 다리를 뻗어 올렸다. 만약 공작가의 마차만큼 넓었다면 가당치도 않은 자세였다.

그렇다고 공작가의 마차가 그립지는 않았다, 샘이 날 것도 없고.

엘리아는 아무런 방해 없이 마차 옆에 난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시원한 바람이 안으로 휘몰아쳤다.

‘서점 가면, 그 성격 까칠한 애가 눈치채려나? 내가 달리 갈 곳 없어서 저 찾아온 거 알면 신나서 비꼴 텐데.’

놀림당할 거 생각하니 벌써 열이 받았다. 물론 엘리아도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겠지만.

‘하아. 갈 곳이 서점뿐이라니. 학술원 애들이랑 연락 끊지 말걸. 이제라도 다시 연락 넣어 볼까? 베르디에가 친척 애라든가…….’

저택에서 주렁주렁 매달고 온 생각을 하나씩 길에 던지며, 엘리아는 상점가로 향했다.

부디, 어딘가 에드문트 생각하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도피처가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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