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의미 (8/79)

8. 의미

응접실의 문이 열리자 에드문트가 일어나 직접 엘리아를 맞아 주었다.

외출이라도 다녀온 걸까. 그는 엘리아처럼 상당히 격식을 차린 모습이었다.

“…….”

공작가에는 에드문트랑 1분 이상 함께 있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라도 있는 걸까? 사용인들은 간단한 다과를 챙겨 주고는 순식간에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아직 인사도 나누지 못한 두 사람만 남았다. 어색하게 마주 서 있으려니 에드문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와 줘서 고마워, 엘리.”

“으응. 안녕 에드문트.”

간신히 인사는 했는데, 초대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진회색 조끼 차림의 에드문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문 앞에서 겨우 끌어모았던 할 말들이 다시 모래성처럼 흩어져 사라지고야 말았다.

“그게…… 그러니까. 어…….”

“엘리, 일단 앉겠어? 저녁 식사가 준비되기 전까지는 조금 시간이 있으니까.”

“응, 그래…….”

분명 외젠과 같이 왔을 때는 저렇게 길게 말한 적이 없었는데. 기껏해야 ‘앉지.’, ‘그렇군.’, ‘그래.’ 정도의 답이 전부였는걸.

물론 지금이 훨씬 정상적인 사람다웠지만, 에드문트답지는 않았다.

‘나는 왜 자꾸 에드문트가 사람처럼 구는 게 불편하게 느껴지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에드문트와 마주 보고 앉은 엘리아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4층까지 단번에 뛰어오른 것처럼 심장이 콩콩거렸다.

반면 에드문트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얄미웠다.

“…….”

한데 하고 싶었던 말이 다 어디 도망갔는지. 퍼부으려던 말이 그렇게나 많았는데 엘리아는 하나도 꺼내지 못하고 에드문트의 눈만 바라봤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린 탓에 긴장과 두려움을 숨길 줄도 몰랐다.

‘혼자 불러내는 건 아직 무리였으려나.’

에드문트의 눈에야 겁먹은 엘리아의 모습도 사랑스러웠지만, 저러다 덜컥 울어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는 모습은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한창 엘리아의 시선을 받아 주던 에드문트가 살짝 웃었다. 제가 웃어 보이면 좀 괜찮아질까 싶어서.

동그란 눈이 당장 반응을 보였다.

‘왜 웃지?’라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났다.

“엘리.”

“……응?”

“아직 내가 무서워?”

“무섭냐고? 아니 그게…… 조금?”

무섭다는 솔직한 말에 에드문트가 다시 웃었다.

화내야 할 일 아닌가? 무섭다는 게 웃긴 걸까.

속을 모르겠는 태도에 엘리아가 그만 입을 비죽거리고 말았다.

무섭다면서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가 기꺼워서 웃은 거였는데. 어린애 취급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전에 말했듯 아무것도 하지 않을게.”

“꽃, 꽃 보낸 건 그럼 뭔데. 그건 뭐였는데!”

“마음에 안 들었어?”

질문이 질문으로 돌아오자 엘리아가 멈칫했다. 겨우 말을 꺼냈나 싶었는데.

‘마음에 안 들었냐고? 속 터져서 우느라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외젠이 3층에 안 쓰는 응접실에 다 옮겨 버렸고…….’

마음에 들었든 안 들었든 간에, 일단 대충 잘 받았다고 말하고 치우면 될 일이다.

아니면, 그렇게 부담스럽고 어처구니없이 비싸면서도 동시에 실용적이지도 않은 걸 선물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화를 내든지.

한데 후자에 속하는 말을 아주 길고 장황하게 준비해 왔으면서, 엘리아는 막상 에드문트를 앞에 두고 속마음을 꺼내지 못했다.

거짓말을 하지도 못하겠고, 화를 내지도 못하겠으니 화제를 돌릴 수밖에.

“아 맞다, 나도 선물 가져왔어. 이거 내 선물인데…… 미안해. 나는 비싼 거는 준비 못 했어.”

엘리아는 집사가 옮겨 준 선물을 에드문트에게 건넸다. 반듯하게 생긴 남자에게 천으로 대충 휘감은 선물을 안겨 주려니 마음이 찝찝했다.

“고마워. 지금 열어 봐도 될까?”

“으응. 열어 봐. 근데 별거 아니니까 너무 기대하지 말고.”

엘리아는 차마 선물을 확인하는 에드문트의 표정을 볼 수 없어 고개를 떨궜다.

‘그냥 외젠이 말한 대로 적당히 보석이나 책 같은 거나 선물할 걸 그랬어.’

‘오빠 말 좀 들을걸.’이라는 생전 해 본 적 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후회해 봐야 이미 늦었고, 떨군 시선 너머로 포장이랍시고 감아 둔 천이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그게 뭐냐면, 그러니까…….”

지금쯤 선물의 정체를 확인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급히 아무 말이나 주워 던졌다. 무슨 반응을 보일지 무섭기만 해서.

“시간이 없어서…… 근데 나 학술원에서 나름 잘 그린다고 칭찬 많이 받았거든? 외젠만큼은 아닌데, 외젠이 워낙 잘 그리잖아. 그리고 외젠도 나한테 가끔은 잘했다고 해. 색감 같은 거 나쁘지 않다고.”

에드문트를 위해 준비한 건, 엘리아가 직접 그린 그림이었다.

직접 번 돈도 없으면서 값비싼 걸 준비해 봐야 우스울 것 같아서, 엘리아가 나름 머리를 굴려 생각해 낸 선물이었다.

근데 막상 에드문트 앞에서 보이니 왜 이리 창피한지. 너무 어린애 같은 선물인가 싶고, 제가 그려 봤자 얼마나 잘 그린다고 공작한테 선물로 직접 그린 그림을 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후회가 되었다.

사용인들이 잘 그렸다며 다들 칭찬해 주긴 했지만 그 애들은 엘리아가 앞구르기를 해도 ‘어쩜 우리 아가씨 자세 정말 훌륭하시다.’라며 칭찬할 애들이니 객관성이 한참 떨어지지 않는가.

‘복도에 그림들 보니까 전부 유명하고 비싼 거던데. 눈에 찰 리도 없을 테고.’

한참이 지나도 에드문트는 말이 없었다. 엘리아는 차츰 초조해졌다.

‘에디, 제발…… 왜 아무 말도 안 해? 막상 입 다문 걸 보니까 갑갑해 죽겠네. 설마 꽃 선물 어땠느냐는 말에 대답 안 했다고 복수하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없는 용기를 긁어모아 고개를 완전히 들어 봤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선물한 그림을 양손에 쥐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살아 있지 않은 것처럼.

‘왜……?’

그의 굳은 모습에, 엘리아마저 함께 그림처럼 멈추어 버렸다.

* * *

‘전에, 본 적이 있는데.’

캔버스를 가득 채운 푸른 꽃을, 분명 에드문트는 본 적이 있었다.

<예, 이것도 마님께서 그리신 건데 복도에 장식하고 싶다 하셔서요.>

결혼 후, 엘리아는 취미로 그린다는 그림으로 공작가 복도를 채웠다. 몇 년 지나니 더는 걸 자리가 없다며 에드문트의 집무실에 걸어 두기까지 했다.

‘집무실에는 세 점이 걸려 있었던가.’

에드문트는 어렵지 않게 걸려 있던 그림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중 푸른색 꽃이 가득한 그림도 있었다.

<왜 푸른색이냐고?>

공작가의 상징이 푸른 사슴이라서일 줄 알았는데. 엘리아는 아름다운 꽃 한 무더기를 그려 놓고는 에드문트의 눈동자를 가리켰다.

에드문트의 눈동자가 푸른색이라, 닮은 꽃을 그려 봤다고.

‘꽃이라니…….’

에드문트는 늘 엘리아의 눈동자를 보고 주홍빛 꽃을 떠올려 왔지만, 자신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폭풍우 치는 밤처럼 어둡기만 한 눈동자에 아름다움이 있을 리 없는데.

남자의 눈동자를 거울 삼아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여자가 착각한 거였을 텐데.

“에디,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거면 다음에 다른 거 줄게.”

말도 없이 그림만 뚫어져라 보는 에드문트의 모습에 엘리아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건 그림인데, 왜 엘리아가 샅샅이 관찰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지.

당장 그림을 챙겨 천으로 덮어 버리고 싶었다. 천 자락 뒤에 숨어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아니, 좋아서.”

“응? 좋다고? 정말?”

“선물. 받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고마워. 기뻐.”

겨우 그림 한 장인데. 에드문트는 마치 귀한 보석이라도 받은 듯 엘리아에게 기쁘다고 말했다. 그 모습이 무척 생경했다.

기괴하다는 감상보다는 ‘저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처음이겠구나, 약혼자한테 선물 받은 거. 에드문트도 오늘이 처음인 거야. 너도 그럼 나처럼 이상한 기분을 느끼려나? 살갑게 굴던 적 없던 약혼자가 직접 그린 그림을 들고 와서…… 얘가 왜 이러나 싶으려나?’

궁금했지만, 에드문트가 표현한 건 의심이 아닌 기쁨뿐이었다.

“정말 기뻐, 엘리.”

생각지 못한 반응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행히 에드문트의 시선은 아직 그림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기에, 엘리아는 부끄러움이 몰고 온 열을 식힐 겸 그림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에드문트의 시선은 아직 그림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거…… 가운데에 제일 큰 거는 패랭이꽃이야. 구석에 둥그런 건 수국이고, 밑에 깔아 둔 건 물망초인데 원래 그렇게 큰 꽃은 아냐. 내 마음대로 크게 그렸어.”

“푸른색 꽃을 좋아해?”

“아니,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고…… 왜 푸른색 꽃을 그렸는지 궁금해서 그래?”

사실 별 의미는 없었다. 재주 부릴 만한 게 그림뿐이었고, 꽃을 선물 받았으니 꽃 그림을 그리면 되겠다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꿈에 나오던 괴물을 그려서는, ‘너 때문에 내가 맨날 이놈 나오는 악몽을 꾼다.’라고 말해 주고야 싶었다만. 그럼 너무 유치하잖은가.

‘열여덟이나 되어서 아직도 괴물에 쫓기는 꿈이나 꾸는가 생각할 거 아냐. 게다가 에드문트가 나더러 괴물 꿈 꾸라고 윽박지른 것도 아닌데.’

하여 엘리아는 거짓도 아니고, 완전히 진실도 아닌 대꾸를 했다.

“네가 꽃을 줬잖아. 그리고 푸른색인 건, 네 눈동자 색이라서…….”

엘리아는 에드문트의 눈동자 이야기를 꺼내면서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느끼곤 했으니까.

“그…… 지금도 밝은 데서 보면 푸른색 보이는데. 아! 물론 사슴 생각도 했어. 공작가의 상징 말이야. 1층 응접실에는 푸른 사슴 그림이 있던데, 여기에는 없네? 음…… 에디? 왜 또 말이 없어.”

엘리아의 재촉을 듣고도 에드문트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기억 속 목소리가 그를 예고도 없이 껴안는 바람에.

<에드문트 당신 눈을 닮았잖아. 이렇게 계속 보면, 당신 눈 안에 하늘이 있어. 어릴 때는 푸른색이 좀 더 선명했던 것 같은데……. 이제 당신도 나이 드는가 보네.>

혼란스럽다. 잃어버린 여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어린 엘리아의 모습이.

다른 듯 같은 말로 에드문트를 휘젓는 두 명의 여자가 겹쳐진다.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입을 열면 당장 사랑한다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래도 에드문트는 죽음보다 더 아득한 고통을 견뎠다.

견딜 수밖에 없었다.

‘울었잖아, 엘리. 겨우 내가 보고 싶다는 말로 다가간 것도 감당하지 못해서 바스러졌잖아. 그렇게나 연약한 네가,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사랑을. 집착을 견뎌 낼 수 있을 리가 없어.’

“에드문트, 에디? 왜 그래. 응?”

목소리가 이지러졌다. 순간 착각하기를, 스물둘이던가. 혹은 너를 잃었던 서른둘이던가.

‘엘리아, 나를 재촉하지 마. 눈동자로도 충분해. 두려워 뒷걸음질 치다가 멈춰 서고…… 무섭다고 하면서 나를 바라보는 네 눈동자 하나면 충분해. 지금으로선.’

에드문트는 캔버스를 세게 쥔 채 현실을 일깨우려고 했다. 아직 정제되지 않은 캔버스 속 붓질에 겨우 이성을 찾았다.

“에디, 에디. 어디 아파? 너 왜 그러는 거야. 나 무서워지려고 해, 에디.”

“엘리.”

“아, 놀랐잖아.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야. 일부러 나 놀리려고 그런 거야?”

“나도 네 눈동자를 생각했어.”

“……내 눈동자?”

그림에서 떨어진 에드문트의 눈동자가 그제야 엘리아를 향해 왔다. 말투는 다정한데, 눈빛은 어쩐지 차가웠다.

딱 엘리아가 감당할 만큼만 상냥했다.

그 안에 다른 감정이 섞여 있는데, 다른 감정들과 섞여서 엘리아가 알아낼 수가 없었다.

“네 눈을 볼 때마다 가을에 피는 꽃을 떠올렸어. 달리아. 메리골드. 헬레니움…… 주홍색 꽃들. 그래서 보냈어. 네게도 보여 주고 싶어서.”

에드문트의 말이 끝나자 엘리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다행히 에드문트는 아직 엘리아의 그림을 들고 있었다.

해서 견딜 수 있었다.

손을 뻗어 억지로 턱을 쥐고, 벌어진 입술을 삼키고, 길게 훑어 올라가 눈가를 씹는 짐승 같은 짓을 참아 낼 수 있었다.

한데, 다음번에도 견딜 수 있을까. 그때도 참아 낼 수 있을까?

자신은 없지만…… 인내해야지. 당장 엘리아가 자신을 끔찍하게 여기길 원하는 게 아닌 이상은.

‘그러니 네가 감당도 하지 못할 사랑을, 벌써부터 구걸하게 만들지는 마.’

가을이 오기 전까지는, 꽃이 피기 전까지는.

내가 견뎌 볼 생각이니까.

* * *

“고마워. 집무실에 걸어 두고 자주 살필게.”

에드문트는 선물 받은 그림이 마음에 든다더니 집무실에 걸겠다고 했다. 엉겁결에 엘리아는 에드문트의 집무실까지 따라나서 직접 그림 걸 자리를 봐 주었다.

황송하게도 몇 해 전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화가의 작품을 떼어 낸 자리에 엘리아의 그림이 걸렸다.

<이거 다리에 그림 맞지? 네 책상 자리에서 제일 잘 보이겠다. 걸 거면 여기가 좋겠어.>

농담한답시고 집무실에서 가장 비싸 보이는 그림을 지목했던 건데.

<음? 에디, 갑자기 집사는 왜? 설마 지금 걸겠다고?>

정말 에드문트가 1,800골드짜리 그림을 치워 낸 자리에 엘리아의 그림을 걸 줄이야.

유명한 작품을 밀어내고 걸린 제 그림은 아무리 봐도 볼품이 없었다. 색감도 엉망이고, 붓질도 엉성하기 짝이 없었고.

아마 며칠 걸어 두다가 다시 원래 있던 그림으로 바꿔 놓지 않을까. 혹은, 존재감을 상실한 채 모두에게 잊히고 말지도.

‘아니면, 다들 걸어 놨다는 것도 새까맣게 잊어버리려나. 그래서 몇 년 뒤에 내가 여기 살게 되거든 쌓인 먼지를 털어 주게 되려나.’

엘리아는 거울을 보듯 한참 동안 자신이 그린 푸른 꽃을 바라보았다.

그런 엘리아의 모습이 에드문트의 기억을 자극했다. 자꾸, 지나온 미래와 혼동하게 했다.

그때는 엘리아를 앞에 두고 어떻게 견뎠던 건지.

여자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더라면, 떠날 걸 미리 알았더라면…….

그저 곁에 있는 거로만 만족하지 않았을 텐데.

“엘리.”

몇 번 부른 적도 없던 엘리아의 애칭이 이제는 익숙하게 입 밖으로 나왔다. 엘리아도 적응했는지, 전처럼 흠칫 놀라는 대신 자연스럽게 그림에서 시선을 떼어 고개를 돌려 주었다.

푸른 꽃 옆에 선 엘리아의 모습에 갈증이 일었다.

‘못 견디겠으면 부르지나 말아야 할 텐데.’

그러나 눈을 감고 시선을 돌릴라치면 시신으로 돌아가 버릴까 봐, 고통을 견디며 눈에 담는 편이 차라리 나은 것 같아서 자꾸만 부르고 말았다.

닿을 수는 없어도, 눈으로나마 욕망하고 싶어서.

“이제 식사 준비가 끝났을 텐데. 내려갈까?”

“아. 응…… 그래.”

에드문트의 뒤를 졸졸 따라 1층 식당가로 가는 길에, 엘리아는 아까는 긴장하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던 복도를 찬찬히 살폈다.

‘통일성이라곤 하나도 없네. 보통 저택에 걸어 두는 그림에는 가주의 취향이 묻어나기 마련인데.’

어느 건 세밀한 점묘화이고, 또 어떤 건 평론이 극과 극을 달리는 문제작인지라, 걸린 그림만으로는 도저히 에드문트의 취향을 알 수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비싼 그림’이 취향이라고 보아야 할지.

‘어차피 사용인들이 알아서 장식한 거겠지. 어휴. 너무 인간미 없다. 이런 데서 혼자 살다간 있던 감정도 말라 죽겠네. 원래 공작가 분위기가 대대로 이런 식이었으려나?’

기억 속 공작 부부를 떠올려 봤다. 워낙 오래전이고, 사실 엘리아가 말 섞을 일이 없었으니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그들이 살아 있을 적에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사람 사는 느낌이 나지 않았을까.

이렇게나 죽은 집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에디는 저택에서 하루에 한 마디는 하려나? 전에 왔던 한스라는 보좌관이랑 일 이야기 하고…… 그 정도이겠지?’

부모 형제도 없고, 사교 모임 나간다는 말도 들어 본 적 없었으니 에디와 교류하는 사람이라곤 외젠뿐이었다.

‘사교라면 나도 별반 다를 거 없긴 하지. 학술원에서 어울리던 애들은 먼저 졸업하면서 전부 소식 끊겼고, 어차피 라스페가 파벌에 속한 애들도 많지 않았으니까.’

친구 없고, 친인척들과도 모두 절연한 걸 생각하면 엘리아와 에드문트의 처지는 비슷했다.

‘우리 둘이 나쁜 의미로나마 참 잘 어울리네.’

그래도 엘리아에게는 외젠이 있었고, 외젠과 친남매처럼 커 온 데이지가 있었다.

게다가 가족처럼 지내는 사용인들이 있었으니, 백작가에서 엘리아와 외젠은 외로울 틈이 없었다.

<아가씨, 무슨 책 보세요?>

엘리아가 응접실에서 책을 펴고 뒤적거리고 있으면 어느새 한가한 사용인들이 곁에 모여 적막한 공간을 채웠다.

꽃을 그리겠다고 물감을 꺼내면 들판에서 이른 봄꽃을 한 아름 꺾어다 주었고, 백작인 외젠에게도 어려워 않고 다가가 조잘조잘 얘기를 건네기도 했다.

한데 에드문트에게는 필요하지 않았던 걸까. 가끔 외젠이 찾아와서 일 이야기나 하고, 억지로 끌려온 엘리아가 식사하고 가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걸까.

‘집사가 그랬지. 에드문트가 조용한 걸 좋아한다고. 사람이 곁에 있는 걸 싫어하니까 사용인들을 전부 눈에 띄지 않도록 교육해 왔겠지. 혼자 살다 보면 사람이 그리워질 법도 한데.’

앞서 걷는 에드문트를 바라보았다. 다섯의 호위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으나, 마치 혼자인 것처럼 보였다.

‘에드문트, 너는 원래 그렇게 태어난 거야? 아니면 사람들의 괴롭힘에 지쳐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거야?’

엘리아는 익숙한 식탁에 앉아 은을 입힌 수저를 들어 올렸다. 상한 자국 하나 없는 둥근 곡선 위로 엘리아의 얼굴이 비쳤다.

‘눈동자…… 그냥 갈색인데. 어딜 봐서 가을꽃이라는 거지? 그냥 내가 눈에서 푸른색을 봤다는 말을 듣고 똑같이 따라 한 거려나.’

대체 왜 꽃을 그만큼 준 건지가 궁금해서 여기까지 각오하고 쫓아온 건데. 정작 답을 들었는데도 엘리아는 에드문트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알아내겠다고 찾아온 건데, 기껏 와서는 에드문트가 여전히 이상하다는 것만 확인하고…… 또 오리 요리나 먹고.’

에드문트가 저를 보는 줄도 모르고 엘리아는 얼굴이 비치는 곳마다 자신의 눈동자를 확인했다.

어스름히 보이는 눈동자는 역시나 평범한 갈색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바삭하게 구운 오리고기에 가까운 색.

잘 구운 오리를 평소처럼 큼지막하게 잘라 한입 가득 삼켰다. 어차피 보는 눈은 에드문트뿐이고, 그는 엘리아의 식사 예절을 한 번도 지적한 적이 없었으니까.

‘오리는 이제 지겹다고 말했지만 맛은 좋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내가 세라한테 이제 오리든 닭이든 마음대로 하라고 말을 했던가? 오늘 가면 곧장 말해 줘야겠네. 내친김에 만들어 달라고도 하고.’

어쩌면 다음번에 공작가에 왔는데 오리고기가 나오지 않으면 서운해질지도.

익숙해진 것들이 바뀌면, 엘리아는 또 에드문트가 찾아왔을 때처럼 겁먹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게 좋아지고, 변화가 두려워지고……. 내가 어쩌다 이렇게 겁쟁이가 된 거지? 체념한 채 저택에서만 보낸 시간이 너무 길었던 걸까.’

대화 한번 없이 묵묵히 식사를 들던 엘리아는 마지막 한 조각을 삼켰다. 새것처럼 반짝반짝한 빈 접시만 남았다.

“엘리, 음식은 입에 맞아?”

“어, 어! 응, 맛있어. 맛있으니까 매번 와서 다 먹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또 놀라고 말았다. 여태 한 번도 안 물어봤으면서…….

‘하긴. 나도 한 번도 말한 적 없기는 마찬가지였지. 맛있다고 말한 적도, 오리가 지겹다고 말한 적도 없었고.’

어렸을 땐 에드문트가 무서웠고, 무서움이 덜해진 뒤에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말을 붙이긴커녕, 눈 마주치는 거로 할 일 다 했다고 자만했고.

전부, 달라지는 걸까.

그저 다음 날 아침이 찾아오면 말라 버릴 흔적이 아니라, 너는 내일도 내게 다르게 굴려나.

‘그래도 너무 빨리 바뀌는 건 싫어. 원래 있던 것들이 다 죽어 버리는 것 같단 말이야.’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변하기를 바랐다. 오늘 정도가 딱 좋았다.

에드문트는 엘리아를 향해 딱 지난번만큼만 웃었고, 과하지 않은 다정함을 보여 주었다. 보고 싶다느니 하는 뜬금없는 감정으로 엘리아를 몰아붙이지도 않았다.

<네 눈을 볼 때마다, 가을에 피는 꽃을 떠올렸어.>

대신 눈동자 이야기를 하긴 했는데…… 조금 부끄러웠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수천 송이의 꽃을 다짜고짜 보내온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어쩐지, 전의 충격이 너무 컸던 나머지 이 정도는 버틸 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후식으로 나온 차를 마시고, 이제 다 끝났겠거니 생각하며 일어날 때였다. 에드문트는 이번엔 바래다주겠다는 말을 꺼냈다.

“엘리, 로앙가에 데려다줄게.”

“……뭘, 해 준다고. 나를, 설마 저택까지?”

“안 될까?”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에드문트는 정말 제 ‘약혼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자 했다.

정상 범주에서는 조금, 벗어난 약혼자 말이다. 정상 범위에 딱 맞아떨어지지 못하는 점이 차라리 에드문트다웠다.

끔찍하기까지 한 건 아닌데, 그래도 안 된다고 말해야 했다. 이래서야 완전 에드문트한테 휘말리기만 하는 꼴이었다.

이미 오늘 하루 충분히 휘둘리지 않았던가. 마차에 실려 왔다가 딱히 해결된 것도 없이 떠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에디, 그게 그러니까…… 바쁘지 않아? 이러지 않아도 돼. 나 혼자 갈 수 있다고. 나 혼자 갈게.”

“혼자 보내고 싶지가 않아서.”

엘리. 나지막이 부르는 이름에 자꾸 열이 올랐다.

제가 목소리에 약했나? 아니면 에드문트가 부르는 거라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지…….

주인 마음도 모르고 자꾸 발갛게 열 오르려는 몸뚱어리가 미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 꼬집어 봐야 저만 아플 테니 빳빳한 옷자락이나 양껏 쥐었다.

“허락해 주면 안 될까.”

엘리아는 머릿속에서 자기 자신과 열심히 싸웠다.

‘안 돼…… 안 된다고 말해 엘리아. 너 바보야? 안 된다고 말도 못 해?’

한쪽에서는 당장 칼같이 잘라 내라고 윽박질렀는데, 반대편에서는 입 밖으로 나가려는 ‘안 된다.’라는 대답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허락을 구하잖아. 갑자기 찾아오는 게 아니고, 평범한 사람처럼 나한테 다가와도 되냐고 허락을 구하는 거잖아. 당연한 건데, 에드문트가 하니까 왠지 나를 배려해 주는 것같이 느껴져.’

말려들면 안 되는데. 흔들리면 안 되는데.

“밤이 늦어서 걱정되어서, 엘리. 그리고…….”

목을 한껏 꺾어야 보이는 에드문트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올라왔다. 그 처연한 얼굴에 한 번 흔들리고…….

“너를 마차에 혼자 태워 보냈다가 영영 돌아와 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나서.”

애절함을 담은 목소리에 다시 흔들려 결국, 거절할 수 없었다.

에드문트가 억지를 부린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는 의심도 들었다.

장례식 때조차 슬픔 한 조각 보이는 일이 없었으니까. 슬픔을,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알기는 하는지 의심되던 사람이었으니까.

하나 엘리아는, 자신을 회유하고자 꺼낸 에드문트의 말 한마디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아끼는 사람을 마차에 태워 보내며, 혹시 부모님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봐 겁을 내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린 바람에.

<오빠, 싫어. 가지 마. 마차 타지 마. 제발 가 버리지 마…….>

그때의 심경이 돌연 생각나니 거부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의 자신을 내치고 떠나가는 기분이 들었기에.

“알았어. 대신 오늘만이야.”

* * *

마차에 올라타고서야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미 에드문트가 마차에 올라탔고, 문이 닫혀 버렸으니까.

그래도 엘리아는 갈 때만큼은 왔을 때보다 편한 자세로 앉을 수 있었다. 그는 제가 어떤 자세로 앉아 있든지 상관 안 할 테니까.

‘후우…… 몸은 편하긴 한데. 마음이 불편하니 무슨 소용이람.’

마차 안은 여전히 죽은 것들이 내는 소음만 요란하고, 살아 있는 자들은 서로를 흘끗거릴 뿐 말이 없었다.

“…….”

침묵 속에서 단둘이 있으려니 어색했는데, 에드문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하지. 평범하게 굴 생각이면 다른 면에서도 평범하게 굴라고. 네가 하고 싶은 것만 불쑥 바꾸지 말고.’

견디다 못한 엘리아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침묵하느라 굳은 혀를 애써 움직여서.

“있잖아, 에드문트.”

“응.”

하도 아무 말도 없고 미동도 하지 않길래 눈 뜨고 자는가 싶었는데 엘리아의 작은 목소리에 바로 반응을 보였다.

“……나 뭐 물어봐도 돼?”

“물론. 뭐든 물어봐.”

선뜻 나오는 대답마저 이게 뭐라고 또 긴장되는 건지. 막상 이야기하자니 차라리 말도 꺼내지 말 걸 그랬나 싶을 정도로 힘겨웠다.

심장이 마차의 규칙적인 움직임에 맞추어 세게 뛰었다. 엘리아는 제발 잠시만 진정해 주길 바라며 심장을 꾹 눌렀다.

“나 계속 궁금한 게 있었는데…… 왜 항상 내가 가면 주요리로 오리가 나와? 너 먹는 거 보면 딱히 좋아하는 거 같지도 않던데.”

엘리아의 질문에 에드문트가 눈을 접어 예쁘게 웃었다.

“내가 그렇게 이상한 질문을 했어?”

엘리아가 이상하게 생각하든 말든 에드문트는 대답 없이 더 짙어진 미소를 보여 줄 뿐이었다.

원래는 다른 요리를 내어 줄 생각이었다. 이전의 자신과는 다르게 굴어 볼 생각에. 그러나 오늘 아침 에드문트는 생각을 바꾸었다.

알고 싶었으니까.

‘너는 또 죽은 엘리아와 같은 모습을 보여 줄까. 나를 또 황홀케 할까.’

다시 그때의 네가 찾아와 줄지 궁금했기에, 집사에게 당분간은 오리 요리를 내놓으라고 말했다.

‘이렇게 금방 네 질문을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비록 엘리아의 질문은 시기도, 내용도 조금씩 달랐지만, 에드문트는 기억 속 자신의 대답을 똑같이 들려주었다.

“집사가 네가 좋아할 만한 음식이 있느냐고 물어보길래 네가 어릴 때 여기서 오리 요리를 자주 먹었고, 좋아했던 것 같았다고 이야기해 주었어.”

“아…….”

에드문트의 말이 끝나자, 눈앞에 꽃이 피었다.

그때처럼.

눈동자에서부터 흘러넘친 주홍빛이 사방을 물들여…….

‘나는, 네게 아무 의미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겨우 걸어 두고 존재를 잊은 그림인 줄로만 알았어. 내 이름이나 기억하나 싶을 정도로 에드문트 네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일 거로 생각했는데…….’

닫혀 있던 엘리아의 마음마저 피워 냈다. 겨우 살짝 벌어진 정도에 불과했으나.

‘나도 기억 못 하는 어린 시절 내 모습을 보면서…… 좋아하는가 보다,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어? 그럼 정말로…… 내가 네 눈동자를 볼 때, 너도 나를 바라봤던 거야? 내 눈동자에서 가을에 피는 꽃을 찾아낸 거야?’

아름다웠다.

‘내가 네게, 의미가 있는 사람이었어?’

실로 아름다웠다. 채 피지도 않았는데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