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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초대 (7/79)

7. 초대

“엘리, 꼭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물론, 거절하는 것보다는 승낙하는 쪽이 좋기야 하지만.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갈 필요는 없어.”

“맞아요. 아가씨 혼자 찾아가는 건 부담스럽다고 해도 되고…….”

에드문트의 선물을 받은 엘리아가 응접실에서 운 흔적을 가득 끌어안고 나오자, 외젠과 데이지는 큰 충격에 빠졌다.

당장 공작의 선물을 다른 곳으로 치워 주었고, 라스페 공작가에서 정식으로 보내온 초대장을 거절해도 된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오죽 한심해 보였으면,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는 말까지 꺼내는 건지.’

가고 싶지 않았으나, 가야만 했다. 엘리아는 제가 가지 않았을 때 벌어질 후폭풍이 더 두려웠다.

만나러 가지 않는다면, 엘리아는 버릴 수 없어 저택 어딘가에 모셔 두었을 꽃을 떠올리며 끙끙 앓아야 하리라.

죄 없는 꽃을 떠올리며 ‘무슨 의미일까.’라는 답 없는 질문만 하다가 꽃처럼 말라 버릴지도 모른다.

‘약혼자한테 선물 받고 엉엉 울고,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앓다 죽을 애는 세상에 나밖에 없을 거야. 이런 바보 같은 처지에 몰린 애는 나 하나뿐일 거라고.’

이게 다 에드문트 그 나쁜 놈 때문이고.

일부러 속 답답해하다가 말라 죽으라고 꽃 보낸 거 아닐까?

답답함이 도져 죽지 않으려면 에드문트를 만나러 가야 했다. 대체 왜 하필 가을꽃이어야 했냐고 물어보고 말리라.

파는 꽃 중에 가을꽃이 제일 비싸서 산 걸까?

‘설마 내가 좋아해서? 아님 내 생일이 가을이라서? 아니겠지. 그걸 기억이나 하겠어?’

엘리아는 책을 뒤져 ‘가을꽃’에 담긴 의미를 찾아보기까지 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암만 고민해 봐야 에드문트가 정답을 콕 집어 알려 주지 않는 한 모를 일이었다.

“갈 거야. 답장 보낼 테니 전해 줘. 근데 나 초대장 받으면 매번 거절 답장만 써 왔지, 간다는 답은 써 본 적 없어서 걱정되네. 집사한테 물어봐야겠다.”

“엘리아, 정말 가겠다고? 괜찮겠어?”

“걱정 마, 외젠. 나 죽이겠다고 독을 보내온 것도 아닌데. 겨우 꽃이었는걸?”

독도 아닌 선물을 보고 운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니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엘리아가 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저런 걸 에드문트한테 받을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해서 놀랐을 뿐이야.”

“아가씨…….”

“답례 선물이 문제네. 저 꽃 못해도 100골드는 될 텐데. 그래도 로앙가 형편 알 테니까 금액대 비슷하게 안 맞춰 줘도 이해해 주겠지?”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오빠 외젠, 그리고 데이지를 향해 애써 태연하게 굴었다. 하나 눈물이 흐르며 남기고 간 붉은 흔적이 엘리아의 노력을 자꾸 무로 돌려 버렸다.

두 사람의 표정에 ‘우리 엘리가 걱정할까 봐 괜찮은 척하는구나.’라는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들은 불쌍한 자식을 보는 부모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린애 취급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부모가 죽고 난 뒤 오빠와 데이지가 엘리아의 부모가 되었고, 엘리아는 그들의 자식이 되지 않았던가.

하나, 시간을 먹고 자란 아이가 부모의 품을 떠나야 하듯 엘리아도 안온한 품에 위안 받고 싶은 마음을 뿌리치고 기어코 벗어나려 했다.

언젠가는 엘리아도 혼자가 되어야 하니까. 죽음이 예고도 없이 모두를 데려가선 엘리아를 혼자 남겨 둘지 모르니까.

그러니 기대지 않고 버티는 일에 미리 익숙해져야 했다.

“괜찮다니까? 데이지, 전에 봤던 치렁치렁한 옷 말이야. 이번에 그거 수선해서 입고 가면 되겠다. 그렇지?”

아픈 속을 토해 내는 대신 괜찮은 척을, 혼자 버티는 데 익숙해져야지.

상실감에 다시 무너지지 않도록.

혼자가 되어도, 버틸 수 있도록.

* * *

엘리아가 라스페 공작가에 답신을 보낸 지 사흘째 되던 날.

“황제가 탄 마차라고 해도 믿겠는데?”

겨우 저녁 한 끼 먹으러 가는 로앙가의 아가씨를 위해, 공작가에서는 호위대와 함께 6인승의 화려한 마차를 보내왔다.

“정말로? 나 저거 타고 가야 하는 거야……?”

일찍 나와서 마차를 기다리고 있던 엘리아가 표정 관리도 하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아가씨를 배웅하러 나온 사용인들도 놀란 건 마찬가지.

제국을 전부 뒤져 봐도 로앙가 저택 앞에 멈춰 선 것보다 더 화려한 마차는 찾아볼 수 없으리라.

“공작님을 모시는 기사, 벨젠 바우어입니다.”

심지어 호위대를 이끌고 마차에 딸려 온 수행원은, 무려 공작가의 최정예 기사 벨젠 경이었다.

당혹스러웠지만, 이미 온 사람한테 부담스러우니 가 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저 공작의 배려에 감사하다는 인사로 속내를 감추어야만 했다.

“엘리, 잘 다녀오고……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사고 치지 말고. 응?”

“사고 치고 오라고?”

“좀…… 너 혼자 보낼 생각에 나는 어제저녁부터 못 먹었다고.”

어째 정신적인 압박에 취약한 건 남매가 똑같아서는, 엘리아가 에드문트 때문에 고생한 것처럼 외젠은 엘리아가 공작가에 가는 날이 가까워지자 위장병에 시달렸다.

어린 누이가 마냥 안쓰러워서만은 아니었다.

‘저게, 얌전한 척 굴고는 가서 작정하고 사고 칠까 봐 그러지. 파혼서 숨겨 가는 거 아니야?’

엘리아는 만사 의욕 없이 살다가도 가끔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독단으로 밀어붙이는 일이 많았다.

외젠에게는 말도 없이 몇 년 앞당겨 학술원을 졸업하질 않나, 여행을 다녀와야겠다고 편지 한 통만 남기고 몇 달 동안 소식이 끊긴 일이 있질 않나.

<어디 갔는지 뭘 궁금해해. 이미 멀쩡하게 다녀왔는데.>

대체 어딜 다녀왔냐고 캐물으니 입을 꾹 다물어 버리길래, 외젠도 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어디 다친 데 없이 돌아왔으니 다행이라고만 생각하기로 했다.

“진짜 사고 치지 말고.”

“외젠, 한 번만 더 이야기하면 작정하고 사고 칠 거야. 걱정하지 말고 밀린 일이나 하고 있어.”

외젠과 엘리아는 다정한 척 붙어서 입씨름을 했다. 그래도 외젠은 엘리아가 직접 공작가 마차에 오르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아가씨, 다녀오세요!”

추운 것도 잊고 우르르 몰려나온 사용인들이 엘리아를 태워 떠나는 마차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치 먼 길 떠나는 아가씨를 배웅하는 것처럼 요란스러웠다.

“데이지, 쟤 아무래도 너 닮아 가는 것 같다. 네가 키워서 그런 게 틀림없어.”

“예, 여러모로 제가 잘 돌보아 드렸죠.”

“바로 그거 말이야. 뻔뻔하게 구는 거, 딱 쟤랑 너랑 똑같아. 너 닮아서 엘리가 클수록 살은 안 붙고 뻔뻔함만 느는 것 같다니까?”

죄 없는 데이지에게 괜히 투덜댄 백작은 일이 한가득 쌓인 집무실로 향했다. 다른 사용인들도 떠나는 마차를 뒤로하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데이지만이 홀로, 저택 앞으로 죽 곧은 길을 바라보았다.

‘우실 일은 없으면 좋겠는데.’

화가 나셨다면 같이 욕을 해 주고, 기쁜 일을 안고 오시면 축하해 드리고. 서운한 일이 있었다고 고백해 오시면 다른 사람이 채워 주지 않아 빈 마음을 채워 드릴 수 있는데.

엘리아가 울면 어쩔 줄을 모르겠는걸. 10년도 넘게 돌봐 드렸거늘 아직도 눈물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점처럼 작아져 금세 보이지 않게 된 마차에 대고 소원을 빌었다.

어린 아가씨, 혹시 아프셔야 한다면…… 부디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아프게 해 달라고.

* * *

‘호위받는 게 아니라, 무슨 벌서는 기분이야.’

공작가로 가는 마차 안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위압감 넘치는 기사와 마주 보고 앉아 있으려니 얼마나 긴장이 되던지.

엘리아는 기사에게 흠 잡히고 싶지는 않았기에, 누워도 될 정도로 커다란 마차에서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하루 중 절반은 누워 보내던 엘리아에게는 고문이 따로 없었다.

‘허리 아파. 답답해…… 창문도 못 열게 하고. 열지도 않을 걸 왜 만들어 놨어? 열면 좀 어떻다고. 어차피 마차 사방에 기사들 있을 건데, 너무 과잉 대응 아닌가.’

출발하자마자 창문에 손을 대었다가 제지를 당했다. 대신 벨젠 경에게 말이라도 걸어 보려 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호위에 방해되니까 말 걸지 말라고 할지도 모르잖아. 그냥 입 다물고 있자.’

혼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기사님에게 실례되는 행동을 하면 죄지은 기분이 들 거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깊은 호수를 닮은 침묵이 죽 이어졌다.

“엘리아 님, 도착했습니다.”

겨우 마차에서 내린 뒤에도 갑갑한 기분은 계속 들었다.

‘못해도 외젠이랑 1년에 서너 번은 왔던 곳인데. 오늘은 오빠가 없어서 그런가?’

이럴 줄 알았으면 데이지라도 데려올 걸 그랬지. 돌아가는 길에도 같은 마차를 타야 할 생각을 하니 벌써 체할 것 같았다.

오리 먹고 체하면 답도 없을 텐데.

“아가씨, 공작께서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짐은 제가 들어 드리겠습니다.”

“아 이건 라스페 공께 드릴 선물인데. 안에 확인해 봐요.”

엘리아가 공작가 집사에게 준비해 온 선물을 내밀었다. 가주에게 전하는 선물이니 당연히 샅샅이 조사한 뒤에 올릴 테니까.

그러나 집사는 그저 엘리아의 선물을 대신 들어 주기만 했다.

“선물은 곧장 응접실에 옮겨 드리겠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선물은 물론이거니와 소지품을 확인하는 절차까지 건너뛰는 건 대단한 특혜였지만, 공작가에서 딱히 선심 쓰는 티를 내지 않아 엘리아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로앙이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공작을 해칠 리 없으니까. 어휴. 미리 알았으면 포장에 신경 좀 쓸걸. 안 그래도 돈 적게 드는 선물이라 양심 찔리는데.’

평소와 달리 엘리아는 공작의 집무실 바로 옆에 붙은 2층 응접실로 안내받았다. 분위기는 1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복도에는 값비싼 그림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로앙가에도 엘리아와 외젠이 그린 그림으로 가득하긴 했지만, 분위기는 극과 극이었다.

황량함, 그리고 차가움이 저택 전체에 서려 있었다.

‘호위 말고 일하는 사람은 한 명도 안 보이네. 사람 사는 집 같지가 않아. 시중들고, 청소해 주는 사용인들 얼굴 한번 안 보고 사는 걸까?’

분명 해가 지지도 않았고, 복도는 등불을 밝혀 두어 환했는데 엘리아는 음산하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저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해 집사의 뒤쪽에 바짝 붙었다.

“……주인님께서 조용한 걸 좋아하십니다. 밖에서는 늘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으신 분이시니까요.”

적막한 분위기를 무서워하는 게 티가 났는지, 집사가 엘리아에게 변명을 했다.

“그렇구나. 하긴, 에드문트 혼자 사는 저택이니까. 손님은 좀 오시는 편인가? 친척분들은…….”

엘리아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다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고요한 복도에 제 목소리만 들리는 게 너무 어색한 탓이었다.

“아. 집사한테는 곤란할 질문이겠네요. 궁금한 거 있으면 에디, 아니 공작님께 여쭈어 볼 테니 신경 쓰지 마요.”

“감사합니다. 저쪽, 푸른색 문이 공작님의 집무실이고 오른쪽이 응접실입니다.”

집사가 가리킨 곳에는 어김없이 공작가 기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참 유난하다 싶었다.

보통은 사병들이 순찰 다니는 정도인데. 대체 얼마나 적이 많으면 저택에서도 일일이 보초를 세워 가면서 산단 말인가.

‘매일 저들한테 둘러싸여 있으면 안전하다는 느낌보다는…… 불안할 것 같은데.’

어느덧 두 사람이 응접실 앞에 다다랐다. 응접실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방 안을 향해 보고를 올렸다.

안에서 작게 대답이 들려왔다.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 에드문트의 목소리였으리라.

그제야 엘리아는 자신이 홀로 초대를 받아 에드문트를 만나러 왔다는 걸 실감했다.

‘좋아. 일단 초대해 주어서 고맙다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 준 다음에…… 뭐부터 물어보려고 했더라? 꽃. 그래. 그 꽃은 대체 뭐였냐고…… 아니지, 선물부터 주고 오빠가 전한 이야기를 다음에 해야 하나? 안부 인사는 언제 하더라?’

에드문트의 머리채라도 쥐어뜯겠다고 찾아온 건데, 제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치겠네! 오빠가 에드문트랑 대화하는 거 잘 좀 봐 둘걸. 매번 혼자 귀 막고 딴청 피웠더니 하나도 모르겠잖아.’

거울 앞에서 에드문트한테 할 말을 연습했던 건 로앙가에 통째로 두고 왔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응접실 문은 야속하게도 엘리아를 기다려 주지 않고 열리려 했다.

허튼 생각인 줄 알면서도, 엘리아는 그 안에 푸른색 괴물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다.

괴물이 또, 엘리아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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