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눈물
“우셨던 것 같던데요.”
수도 근교에 자리한 공작가의 영지. 엘리아에게 선물을 전하느라 한발 늦게 도착한 보좌관 한스는 에드문트에게 보고를 올리는 중이었다.
그가 4년째 공작을 보좌하면서 맡았던 일 중에 가장 단순하면서도…… 중요도로 치면 아마 최고위에 있는 일에 대해서.
“선물을 보시기 전에 말입니다. 전에 두 분이 만나셨던 응접실에서 뵈었는데, 이미 눈가에 운 흔적이 있었습니다.”
한스는 투철한 직무 의식에 오지랖을 곁들여, 제가 본 엘리아의 모습을 상세히 고해바쳤다.
물론 선택적으로. 선물을 보고 공포에 질렸다는 말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오면서 슬쩍 로앙 백작님을 떠봤는데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더군요. 그러니 틀림없습니다.”
한스가 덧붙인 말에 공작의 잘생긴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오, 맙소사…….’
한스는 몇 번이나 눈을 끔벅거리며 헛것을 보는 게 아님을 확인했다.
저택 사용인 다섯이 침입자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에도 아무 반응 없었으면서.
아침상에 독이 범벅된 음식이 올라왔더라는 소식을 듣고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으면서.
‘겨우, 울었던 것 같다는 말에 저런 표정이라니. 반응이라니…….’
설마. 진짜 사랑이라니. 저 에드문트 라스페가?
물론 누구나 생에 한 번쯤은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일을 겪는 게 당연하다. 하나 다른 이도 아닌 라스페 공작이, 그것도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
‘하룻밤 새에 갑자기 관심도 없던 약혼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그가 정말 로앙가의 아가씨를 사랑해서 ‘울었다’는 소리에 반응한 거라면, 지금쯤 한스는 로앙가 사용인들과 두 번쯤은 정분나야 마땅했다.
‘그리고 우리 공작님은 약혼자가 왜 울었을지 짐작이나 할까? 본인이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 자각은 있으려나?’
한스는 알았다. 어린 아가씨께서는 공작의 이상 행각에 혼란에 빠졌다는 걸.
<이, 이게 뭐야? 이게 다 무슨……?>
아름다운 꽃 선물을 보고도 감탄사가 아닌 옅은 공포가 먼저 튀어나오지 않았던가.
<세상에. 이게 다 공작님께서 우리 아가씨한테 보내온 선물이라고요?>
<너무 예뻐요. 아가씨께서 정말 좋아하시겠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용인들에게는 그저 감동적인 선물로 보였겠지만, 엘리아에게는 절대로 아니었으리라.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니, 남자가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쯤은 진작 알았겠지.
그러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당사자도 아닌 한스조차 머리 아플 지경인데.
‘어휴. 나는 모르겠다. 사랑 때문에 살인도 나는 세상인데. 사람 죽이고 다니는 새끼들도 사랑이 어쩌고저쩌고 떠들고 다닐 수 있는데.’
에드문트의 이상 행각에 일일이 반응해 봐야 제 손해였으니, 한스는 적당히 타협하기로 했다.
‘세상에 치여 사느라 여태까지 자각하지 못하다가, 뭔 계기로 터진 걸지도 모르지. 아무렴 어때. 내가 공작의 사랑을 받는 약혼자도 아닌데.’
한스는 잠시 동했던 오지랖을 내던지고 일에만 충실하고자 했다.
“초대장은 엘리아 아가씨께 직접 전해 드렸고, 별도로 로앙 백작께도 아가씨만 따로 초대하고자 한다고 이야기 전하긴 했습니다.”
초대장 이야기를 하려니 에드문트에게는 차마 전하지 못할 엘리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넋이 나간 채로 손을 뻗던 모습이라든가…….
<미쳤…… 나 봐. 미쳤…….>
입술만 겨우 달싹이던 모습이라든가. 소리는 안 났는데, 모를 수가 없는 단어였다.
“초대 승낙 여부는 아가씨가 직접 전할 테니 백작은 일정만 알고 있겠다 하더군요.”
당연한 소리였지만, 한스는 혹시 공작이 ‘당연히 내가 초대했으니 거부할 리 없다.’라고 생각할까 싶어서 사족을 덧붙였다.
나중에 약혼자분께서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 그 불똥이 제게 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
보고가 끝났음에도 공작은 아까와는 달리 반응이 없었다. 잠깐 찌푸렸던 얼굴도 본래대로 돌아왔고.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모양인지 딱히 들고 있는 서류를 향해 시선이 가 있지도 않았고.
‘궁금하단 말이야.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한 건 궁금한 거고. 주인을 닮아 인간미 한 조각 느껴지지 않는, 집무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한스는 이만 가 보겠다며 허락을 구했다.
“그…… 더 드릴 말씀이 없는데요. 이만 물러가 봐도 되겠습니까?”
“내일, 그동안 관리인들이 작성한 보고서 전부 올려.”
“전부 말씀입니까? 그…….”
“아침까지, 전부.”
한스는 일에 미친 것같이 구는 공작이 원망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영지에 도착한 지 겨우 몇 시간 되었다고 또 일이라니…….
‘대체 왜 저러는 거야? 황성에서는 반년 전 안건까지 퍼부어서 정례 회의를 뒤집어 놓더니만!’
안건 발의자가 익명 처리되어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공작은 정말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
이틀이면 끝날 귀족원 회의가 길어진 건 전부 에드문트 때문이었으니까.
‘젠장, 내일까지 전부 올리려면 저택에 있는 일손 다 동원해도 겨우 새벽에 끝날 텐데. 나 이러다 정말 결혼도 못 하고 일만 하다 죽어 버리는 거 아닐까.’
공작에게 물어보면 대답해 주었을 텐데. 10년 후 한스의 꼴이 어땠는지 말이다.
물론, 한스가 ‘10년 후에 제가 어떻든가요?’라고 묻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위에서 받은 일감을 아랫사람들에게 화풀이하듯 던져 주러 가기 바빴을 뿐.
* * *
한스가 떠난 후에도 에드문트는 집무실 책상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수하가 전한 엘리아의 흔적이 그를 끊임없이 상념에 잠기게 했다.
<우셨던 것 같던데요. 선물을 보시기 전에…….>
울었다면, 그건 에드문트 때문이었다. 엘리아에게 다정하기만 할 로앙가 저택에서 달리 울 일은 없었을 테니까.
갑작스러웠을 에드문트의 방문이 아니고서야 엘리아가 번민할 이유는 없었을 테니.
울리고야 말았으니 후회해야 하나. 혹은 기뻐해야 할까.
모르겠다.
단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죽었던 엘리아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는데.
열여덟의 엘리아를 본 순간…….
<왜…… 온 거야?>
갈망하고야 말았다.
<보고 싶었어.>
선물에 모자라 때 이른 감정까지 쏟아 낸 건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인정하건대, 답지 않게 굴고 말았다.
그러나 열망 어린 충동은 순식간에 소유욕으로 변질되고 말았으니…….
‘내가 떠나 있어도 생각하기를, 만나지 못할 시간에조차 나를 떠올리길 원했어.’
엘리아가 혼자 답 없는 고민을 하면서라도 저를 생각하기를 바랐다.
다만 변명하자면, 울릴 생각까지는 없었다. 뜸을 들인 뒤 보낸 선물이 도착하기도 전에 눈물 흘리게 할 생각은 없었다.
엘리아의 눈물을 예측하지 못한 에드문트에게도 나름의 사정은 있다.
‘……열여덟의 너는, 내게 아무 감정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름 엘리아에 관해서는 주제 파악을 잘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찾아가도, 충동을 이기지 못해 보고 싶었다고 고백한들…….
무관심만이 내가 받을 전부일 줄 알았는데.
“울었다고, 네가.”
소리 내 지껄여 봐도 그다지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기억 속 엘리아의 우는 모습이라도 떠올려 보았다.
이유는 다양했으나, 엘리아의 우는 모습은 늘 한결같았다. 박제된 동물처럼 굳어서는 이내 눈물이 빗물처럼 떨어지곤 했다.
그때 에드문트는 어떻게 반응했던가.
<에드문트, 잠깐. 잠깐만…….>
자신의 품 안에서 울 때는 짐승처럼 전부 받아 마셨으며…….
한 걸음 떨어져 있을 적에는 바라만 보았다. 다른 이들이 에드문트보다 먼저 눈물을 닦아 주어 그가 나설 기회는 없었으니.
에드문트가 없는 동안, 열여덟 엘리아가 흘렸다는 눈물의 의미는 뭐였을까.
공포심 탓이었을까? 갑자기 다가온 약혼자가 끔찍했던 걸까. 그를 두려워하던 다른 이들처럼.
‘너도 다른 이들처럼 내게 공포를 느낀 걸까.’
전에는 엘리아가 에드문트의 앞에서 겁먹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비록 엘리아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에드문트의 눈을 바라봐 주었지만, 겨우 그뿐이었다.
엘리아의 주홍빛 눈동자는 아름다웠으나 무심했다. 하여 에드문트는 눈동자에서 그 어떤 감정도 읽어 낸 적이 없었다.
한데 다시 만난 열여덟의 엘리아는 어땠는가.
<도망이 아니라……. 네가 무섭게 굴잖아.>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던 모습도, 두려움을 표현하는 눈동자도 너무나 낯설었다.
그래도 에드문트는 엘리아를 향해 웃을 수 있었다. 진심으로.
무섭다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 약혼자가 어여쁘기만 해서. 도망가지 말라고 붙잡는 말에 곧장 멈춰 준 여자가 사랑스러워서.
그 순간 다시 깨닫고 말았다. 엘리아가 저를 사랑해 줄 필요는 없다고. 싫다고 거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거라고.
“…….”
에드문트는 책상 위에 올려 둔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엘리아에게 보내기 위해 골라 두었던 가을꽃, 달리아였다.
<꽃 이름? 에디 네가 모르는 게 있을 줄은 몰랐어. 이거 달리아야. 다른 것도 알려 줄까?>
결혼 첫해에, 네가 가을을 기다리며 정원 한가득 심었던 꽃.
<이건 헬레니움. 동그란 건 메리골드. 거베라도 있어. 여름부터 꽃이 핀다고 해서 일찍 심었는데 이제야 피었지 뭐야.>
만개한 꽃이 손가락에 스칠 때마다 단내를 풍겼다. 향기롭고, 아름다웠다.
평범한 사랑이, 어떤 모습일지는 안다. 이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답겠지. 결코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해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으나.
죽음이 제 이성까지 빼앗아 간 걸까. 자꾸 어리석은 망상이 치밀어 그를 충동질했다.
네 눈에 나를 향하는 사랑이 비치면 어떤 모습일지, 단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황홀할 텐데.
하여 다정한 척 애칭을 불렀고, 직접 고른 꽃을 보내기도 했다. 다른 연인들은 그렇게들 하길래.
남을 흉내 내 애절함을 토로하면, 아름다운 두 눈에 한 번쯤은 깃들어 주지 않으려나. 사랑이…….
잠깐이나마 나를 향해 주지는 않을까 싶어서.
그렇지만 엘리아, 어차피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어. 사랑이 아름답다고 한들…….
<정원에 들어가던 예산은 절반으로 줄일 거예요.>
<이제 꽃은 심지 않을 건가?>
<어차피 아름다운 건 잠시뿐이잖아요. 결국, 다 시들어 버릴 텐데. 그러니 더는 필요 없어요.>
‘영원하지는 않을 테니까.’
꽃잎을 겨우 스치던 에드문트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만개한 달리아 꽃을 세게 쥐었다. 주홍빛의 꽃잎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에드문트는 떨어진 꽃잎조차 욕심내 쥐었다.
‘엘리아 너를 잃지만 않으면 괜찮아. 어차피 네가 아무리 내게 귀한 사랑을 퍼부어 주었는데도 소용없었으니까.’
<에드문트, 너를 사랑했어. 사랑했는데…….>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네가 나를 사랑해 줄 필요는 없어. 체념하고, 내게 익숙해지기만 하면 충분해.’
어차피 영원한 건 없고, 결국 엘리아조차 에드문트의 곁에서 시들어 버릴 테니…….
그는 시들 꽃을 향해 영원을 갈망할 것이며, 동시에 욕심을 이기지 못해 탐하고 말리라.
둘 중 하나가 망가지게 되더라도.
* * *
“에드문트 님, 엘리아 아가씨께서 답을 보내 주셨습니다.”
며칠 뒤, 초대장의 답신이 도착했다. 짧은 답장 속에 별다른 의미가 없음을 알면서도, 아는데도…….
엘리아의 단정한 글씨가 다시금 에드문트를 갈망케 했다.
가질 수 없는, 영원할 리 없는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