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기다림
에드문트의 방문 후, 로앙가의 사용인들은 무척 들뜨고 말았다. 제대로 된 손님이 찾아온 게 대체 얼마 만의 일인지.
사용인들이야 손님이 없으면 좋은 일이겠으나, 로앙가는 그 정도가 심했다.
“예전에, 5년 전인가? 레만 자작가에서 엘리아 아가씨 찾아온 후로 처음인 것 같아.”
“맞아. 그나마 아가씨가 학술원 다니실 적에는 손님이 있었는데.”
“우리 아가씨는 학술원이 재미가 없으셨나 봐. 남들보다 일찍 졸업하신 걸 보면.”
원래라면 아직 학술원에 있을 나이였지만, 엘리아는 진작 졸업장을 받아 저택에 돌아왔다.
그 후로는 초대할 사람도, 초대받을 곳도 없이 저택에서만 지낸 게 벌써 2년째였다.
“곧 아가씨도 성년이 되실 테니 약혼자분도 자주 오시려나?”
“그렇겠지? 다음번에는 제대로 모셔야 할 텐데. 어제는 준비가 하나도 안 된 상태여서 고생했잖아.”
공작님께서 다시 로앙가에 오실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 하나가 던져지자 로앙 백작가의 사용인들이 대단히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에드문트가 찾아온 바로 다음 날, 아침부터 엘리아의 앞에 예산서 하나가 올라왔다.
“협탁을 바꿔야 한다고?”
“예, 응접실 협탁이 원체 낡아서 말입니다.”
“하나가 아닌데? 이게 다 뭐야? 1층부터 4층까지 응접실이란 응접실은 다 갈아엎으려고?”
엘리아는 당황하고 말았다. 여태 예산을 배정해 줘도 쓰질 않더니, 갑자기 왜 대공사를 벌이겠다는 건지.
“그래 뭐…… 못 쓸 정도로 낡았으면 바꿔야지. 근데 4층은 다음에 고치자. 어차피 쓰지도 않는걸?”
“예? 아니, 그게…… 그러니까…….”
“왜?”
“공작님께서 혹시 다시 오시면 4층이……. 실은, 어제 일을 계기로 응접실을 살펴봤더니 영 걸리는 게 많아서요.”
집사의 고백에 엘리아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니까, 에드문트 때문에 응접실을 고치자는 거야?”
“앞으로 종종 찾아오신다면…….”
“안 돼.”
“미리 준비를…… 예?”
“집사가 걱정할 일 절대 안 생길 테니까 신경 쓰지 마. 안 그래도 다들 일 많은 시기잖아?”
엘리아는 집사가 밤새워 작성한 예산안을 그대로 돌려주고는 밖으로 쫓아내 버렸다.
“아가씨, 혹시라도 다음에…….”
“다음은 없어. 절대로.”
다음이라니. 그런 건 없을 거고, 없어야 한다.
‘그런 미친 짓을 나더러 두 번이나 겪으라고?’
안 그래도 에드문트 때문에 잠도 설치고, 악몽까지 꿨는데!
그러나 엘리아의 속사정을 알 길 없는 사용인들은 그를 볼 때마다 눈을 반짝거리며 각오를 다지기까지 했다.
“아가씨! 저희가 다음번에는 꼭 귀한 분 실수 없이 맞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둘게요!”
“아니, 그러지 마. 안 그래도 돼.”
“저번에 너무 죄송했어요. 아무리 경황이 없다고 했지만…….”
뭐라 지적한 적도 없는데 자기반성을 하질 않나, 쉬는 시간도 반납해 가며 멀쩡한 저택 뒤적거리고, 고치고, 쓸고, 닦고…….
‘정말 다들 에드문트가 다시 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아. 내 약혼자는 에드문트 라스페란 말이야.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이건 꽃도 채 피지 않은 나무를 두고 과일주 담그겠다고 설치는 꼴이었다. 아니, 죽은 나무에 열매 맺길 기대하며 물을 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오지 않을 에드문트를 기다린다는 건 그렇게나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부디 나중에 안 온다고 속상해하지나 말아야 할 텐데.
“다들 그렇게나 손님이 궁한가? 아무나 잡아 와서 손님 대접시켜 줘야 하나.”
엘리아는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인 데이지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냥 손님이 아니고 아가씨 약혼자이셨잖아요. 다들 처음 뵙게 된 거니 호들갑 떨 수밖에요.”
“그냥 손님이 좋은 게 아니라 에드문트라서 그랬다는 거야?”
“특별하잖아요. 그리고 원래 남의 연애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는 법이죠. 그보다 아가씨, 이거 한번 입어 보세요.”
데이지는 뜬금없이 장식이 치렁치렁한 예복 하나를 꺼내 보였다.
“왜. 안 맞으면 팔려고? 하긴. 입을 일이 없긴 하지.”
“팔긴요, 아무래도 곧 입게 될 것 같아 미리 꺼냈어요. 혹시 중요한 자리가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중요한 자리?”
“에드문트 님이랑 중요한 자리 가시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맙소사. 데이지마저 바람이 들었나 보다. 엘리아는 얼굴을 찌푸리고는 곧장 뒷걸음질 쳤다.
“데이지, 다른 애들은 모르니까 그렇다 쳐도 너는 그러면 안 되지!”
“제가 뭘요?”
“에드문트 말이야! 다른 애들은 우리가 그냥 남들 같은 약혼자 사이인 줄 알겠지만 너는 알잖아!”
엘리아가 공식적으로 에드문트와 약혼한 게 열두 살. 한창 학술원에 있던 시절이었다.
제가 약혼했다고 떠들고 다닌 것도 아니었는데 얼마나 소문이 빠르던지. 다음 날 해가 뜨기 무섭게 사람들이 찾아왔다.
<언제부터 알고 지낸 건가요?>
<에드문트 님 말이에요. 엘리아 님께는 다정하시겠지요?>
이후에는 질리도록 비슷한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마다 엘리아는 적당한 침묵과 거짓말로 처신해야 했고.
진실을 말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제삼자에게 엘리아와 에드문트의 관계는 로앙가의 명운을 가늠하는 지표였으니까.
그런 이유로, 엘리아와 에드문트가 남보다 못한 사이임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로앙가에는 엘리아와 외젠, 그리고 데이지까지 단 세 명뿐.
사용인들에게도 에드문트는 아주 평범한 약혼자일 뿐이었다.
‘여태까지는 문제없었지만…… 이제라도 알려 줘야 하나?’
하지만 엘리아가 제 입으로 ‘에드문트와 나는 남보다 못한 사이.’라고 공언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자랑도 아니잖은가.
“어제 공작님 표정도 그렇고 분위기가 왠지 다른 사람 같기도 한 게……. 이제 아가씨 대하는 태도도 달라질 것 같던데요.”
“그냥 어제 딱 하루 이상하게 굴고 싶었나 보지. 여하튼, 이건 입을 일 없으니 팔아 버려.”
엘리아는 데이지가 꺼낸 화려한 예복을 입지 않겠다고 반항했다.
하나 데이지가 누구던가. 엘리아가 태어났을 때부터 자매처럼, 부모처럼 돌보아 온 사람인데.
“아가씨, ‘귀족의 의무란, 불편한 옷을 감수하고 아름답게 꾸밈에 있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미쳤어? 그거 귀족들이 허례허식에 빠져 영지민들 수탈한다고 고발하는 글이잖아!”
“권위와 지배의 정당성은 타 집단과의 차별과 선망에서 기인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잖아요? 말하자면 사치스러운 예복은 귀족의 필수품이라는 거죠.”
당장 귀족 모욕죄로 잡혀갈 소리를 교묘하게 비튼 데이지의 말에, 엘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데이지, 제발 여기서 내 뒤치다꺼리하지 말고 학술원을 가. 가면 같이 토론하자고 쫓아다닐 늙은이들 천지일 테니까.”
“아가씨 두고 제가 가긴 어딜 가겠어요.”
엘리아는 결국 ‘귀족이라면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하는’ 치렁치렁한 옷을 입어야 했다.
“살이 그새 또 빠지셨네. 겨우 두 달 전에 잰 치수 따라서 맞춘 건데.”
기껏 입은 예복은 어찌나 컸는지, 어깨며 허리가 전부 헐렁해 수선이 많이 필요해 보였다.
“에드문트 때문이야.”
“우리 아가씨 어쩜 좋아요. 약혼자 때문에 마음고생 심하셔서.”
“알면 나한테 좀 잘해.”
“제가 애들한테 말 잘해 둘게요. 아가씨 앞에서 너무 내색하지 말라고.”
“불러다 입단속시키려고? 됐어. 괜히 눈치 주면 더 뒷이야기만 많아질 것 같아. 못 하게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잖아?”
엘리아는 아침부터 저택이 어떤 꼴인지 눈으로 확인했으면서, 안일하게 생각하고 말았다.
‘설마 오래가겠어? 처음이라 호들갑인 거겠지. 안 온다는 거 확인하면 금방 포기하고말고.’
옷 정리가 끝나지 않은 데이지 옆에서 수다나 떨며, 엘리아는 폭풍처럼 흘러간 오전을 보상받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 * *
저녁을 들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 에드문트 때문에 전날부터 굶었던 엘리아가 식당을 찾았다.
“아가씨, 지금 식사하시려고요?”
아가씨가 제 발로 식당을 찾은 게 오랜만이라, 주방에서 일하던 사용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세라는 바빠? 아니, 부르지 마. 나 그냥 저녁 겸해서 허기만 면할 거야.”
“네에, 주방장님은 잠시 집사님이랑 이야기 중이세요. 소화 잘되는 거로 챙겨 드릴게요.”
엘리아가 요구한 건 겨우 묽은 스튜 한 접시였으니, 필요한 사람은 당연히 많지 않았다.
한데 오늘따라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은지.
“다들 여기 꼭 있어야 하니? 저녁 안 먹었어?”
엘리아의 물음에 다섯 명의 주방 사람들이 멋쩍게 웃었다.
‘뭐지? 얘들 수상한데.’
무슨 작당을 하려고 하냐며 추궁하려 했는데, 하필 스튜가 차려진 탓에 미뤄지고 말았다.
“아가씨이.”
엘리아가 접시를 비우기 무섭게, 눈치를 살살 보던 주방 사용인 하나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저희 궁금한 게 있는데요.”
엘리아는 반짝거리는 사용인들의 눈빛만으로도 무슨 이야기가 나오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안 돼. 물어보지 마. 그럴 일 없을 테니까.”
“어떤 차를 즐겨 드시는지라도요…… 안 될까요? 전에 내어 드린 거 손도 안 대셨다고 해서요. 저희가 너무 죄송해서…… 아가씨 중요한 손님이었는데.”
다섯의 사용인들이 동시에 눈치를 보니 엘리아는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마음 약해진 것과 별개로, 엘리아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몰라. 나도 걔가 뭐 좋아하는지 진짜 모른단 말이야…….’
할 수 없이 엘리아는 꼼수를 써야 했다.
“그…… 공작께서 본인 기호품이 외부에 발설되는 걸 극도로 꺼리시거든? 그러니까 못 알려 줘.”
순진한 사용인들은 아가씨의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그 틈에 엘리아는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왔다.
‘당분간 침실에만 처박혀 있어야겠어.’
그러나 엘리아는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복병을 만나고 말았다.
“아가씨! 식당 다녀오는 길이세요?”
부재중이었던 주방장 세라였다. 어쩌나. 주방장은 기호품 발설 어쩌고 하는 말로는 못 속이는데.
“마침 여쭐 게 있는데요. 혹시 공작님께서 저녁 식사를 하시게 되면…….”
“오리.”
“오리요?”
“그래. 공작가 말이야, 오리에 아주 환장하더라. 나 갈 때마다 오리 요리 주더라고.”
여태 잘 참았던 엘리아는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대체 왜 내가 이 고생을 해야 해? 어째서!’
왜겠는가. 이게 다 에드문트 라스페의 미친 짓 때문이지.
“그럼 조만간 저녁 식사로 오리 요리를…….”
“세라, 잘 들어. 오늘 이후로 식탁에 오리 비슷한 애라도 올라오잖아? 그럼 나 굶을 거야. 사흘 내리 굶을 거라고!”
엘리아는 어린애 같은 협박을 남기고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흰 옷자락을 펄럭이며 뛰어가는 게, 꼭 고양이 피해 도망가는 오리 같았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호통에 놀란 세라는 질문할 때를 놓치고 말았다.
“오리 비슷한 애면, 닭도 포함이려나? 어쩌지. 내일 닭구이 하려고 손질 다 해 놨는데…….”
* * *
‘좋아. 집사랑 주방장한테 한 소리 해 뒀으니, 이제 에드문트 운운하는 사람 더는 없겠지?’
침실로 돌아온 엘리아는 이젠 어제의 일도, 에드문트도 모두 잊고 평화를 되찾길 바랐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적이 등장했으니…….
“엘리, 엘리아!”
저택에 막 도착한 엘리아의 오빠, 로앙 백작이었다.
“뭐야? 귀족원 정례 회의 때문에 내일까지 집에 안 온다며!”
“식사 시간 틈타서 온 거라 바로 돌아가야 해. 그것보다 어제 공작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말하기 싫다니까! 궁금하면 에드문트한테 가서 물어보든가!”
“뭐? 네가 말해 주면 되잖아! 나도 알아야 할 거 아냐!”
“후우……. 좋아, 외젠. 어디 한 번만 더 물어봐. 그럼 내일 위조 파혼서 만들어서 황궁이랑 라스페 공작가랑 신문사 두 곳에 보내 버릴 거야. 알았지?”
“엘리, 너 진짜!”
“나 문서 위조죄로 잡혀가고 망신당하는 꼴 보고 싶으면 어제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보든가!”
엘리아는 더없이 강경했다. 절대로, 죽어도 제 입으로 ‘에드문트가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왔대.’라고 말하긴 싫었으니까.
떠올리기만 해도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말로 하겠는가?
게다가 설령 엘리아가 진실을 말해 준다 한들, 외젠이 믿어 주겠는가? 거짓말하지 말라고 핀잔이나 줄 텐데.
“엘리, 알겠으니까 혹시 에드문트가 다시 오거든…….”
“안 와! 안 온다고!”
외젠은 황궁으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에드문트 운운하며 엘리아의 신경을 긁었다.
“이게 대체 무슨 고생이람.”
외젠이 떠나고, 지친 엘리아는 침대까지 가지도 못하고 소파에 널브러졌다.
‘하루 내내 에드문트 온다는 이야기 들었더니, 나까지 이상해지는 기분이야. 이러다 진짜 에드문트가 올 것만 같다고.’
사용인들의 기대 탓에 이제는 엘리아도 에드문트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하긴. 미친 짓을 처음 저지르는 건 어려워도, 두 번째는 어렵지 않을 테니까…….’
엘리아는 부디 에드문트가 미친 짓을 벌이지 않기를 바라며 잠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엘리아는 진심으로 에드문트가 다시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보고 싶다고 말했으면서 보러 오지 않는 남자를, 내내 생각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에드문트의 의도대로, 홀로 쉼 없이 그를 떠올리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말이다.
* * *
사흘이 지났다.
에드문트가 엘리아에게 보고 싶다고 말한 게 사흘 전.
그가 약속도 없이 찾아온 것 역시 사흘 전의 일.
그 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저택 사람들이 다소 들뜨고, 참다못한 엘리아가 한 소리 하고…… 그런 소소한 사건을 제외하면.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에드문트가 연락도 없이 찾아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집사와 주방장도 더는 미리 준비해야 한다며 엘리아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들, 잊은 건 아니었다. 사라지지 않고 남은 에드문트의 흔적들은 엘리아를 피해 숨어 버렸을 뿐.
이를테면 아가씨가 오실 리 없는 3층 계단 구석이라든가, 그곳에 삼삼오오 모인 하인들의 대화 속이라든가.
“루아, 전에 공작님과 동행했던 하인 말이야. 이름이 한스라고 했나? 혹시 기억나?”
“하인이었어? 입은 옷 다 엄청 비싸 보이길래 보좌관쯤 되는 줄 알았는데.”
“라스페 공작가 정도면 데리고 다니는 하인 옷에도 돈을 많이 쓰겠지. 위신이 달린 일인데.”
“어려운 말 쓴다고 다 데이지처럼 되는 줄 알아? 그리고 하인이든 뭐든, 그 사람 별로였어.”
“맞아. 그 한스란 사람, 1층에 공작님 안 계실 적에 엄청 거들먹거리더라. 근데 메리 너, 그 사람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지?”
추궁이나 다름없는 반응에 메리가 괜히 눈치를 살폈다.
“그냥……. 얼굴은 나쁘지 않던데.”
“겨우 그 얼굴에 만족하려고 뼈 빠지게 일하니? 그리고 얼굴만 보고 잡으면 나중에 고생한댔어. 인품을 봐야지!”
“내 안목이 뭐가 어때서? 다음에 다시 보고 이야기하자고.”
“근데 공작님은 언제 또 오시려나?”
“그러게. 이번에는 약속을……. 어? 아가씨, 거기서 뭐 하세요?”
“아,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쉬는 시간을 틈타 수다를 떨던 사용인들의 눈에 들어온 건, 어정쩡한 자세로 계단에 기대어 있던 엘리아 아가씨였다.
“혹시 필요한 거 있으세요? 저희가 도와 드릴게요!”
사용인들은 엘리아가 자신들의 수다를 듣고 있었다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그저 아가씨가 부탁할 게 있어 찾아온 줄로만 알았다.
“아무 일 없고 나는, 나는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어.”
엘리아는 민망함에 서둘러 침실로 도망쳐 왔다. 어차피 사용인들이 숨어서 대화하고 있던 것도 아니고, 지나가다 우연히 들었을 뿐인데.
‘멍청아, 왜 그렇게 더듬거리면서 대꾸한 거야!’
평소 같았으면 오히려 제가 먼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 해?’라며 냉큼 끼어들었을 텐데.
지레 찔려서 허둥지둥하는 꼴을 보이다니. 망신이 따로 없다.
‘하필 공작이니 보좌관이니 하는 소리가 들려서 나도 모르게…….’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끙끙거려도 도통 진정이 되질 않았다. 다른 생각이라도 떠올려 잊어버리려 했다.
<공작님은 언제 또 오시려나?>
한데 기껏 떠올린 생각은 훔쳐 온 대화의 한 토막이었다.
맙소사. 이게 아닌데.
저택이 조용하길래 다들 잊은 줄로만 알았다. 에드문트의 흔적은 며칠 전 내린 비에 다 씻겨 나갔겠거니 생각했다.
……저 혼자, 혼자서만 잊지를 못하고 끙끙 앓는 줄 알았는데. 남들도 그를 생각했다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다행은 무슨 다행이야. 미치겠네. 대체 왜 잊히질 않는 거야……!’
분명 에드문트는 다른 흑심이 있어 저택으로 온 것이리라. 예를 들자면 엘리아를 괴롭히고 싶었다든지, 약혼자 핑계를 대고 찾아와 로앙가를 들쑤시고 싶었다든지.
그러니 보고 싶었다는 말 따위, 거짓말이었을 텐데.
<엘리, 보고 싶었어.>
떨쳐 낼 수가 없는 건 왜일까.
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남자를 자꾸 기다리게 되는 건 어째서일까.
‘기다린다니. 대체 왜?’
엘리아는 스스로 느끼는 감정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제 감정이니 부정할 수도 없었다.
혹시 에드문트가 남긴 광기가 제게 옮겨 붙은 건 아닐까? 그가 준 겉옷에 저주라도 걸려 있던 건 아니고?
말도 안 되는 생각임을 알면서도 엘리아는 두 손으로 제 어깨를 꾹 쥐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데 에드문트의 겉옷을 걸치고 있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보고 싶다는 말도, 찾아온 일도. 그건 그냥 다시 일어나지 않을 이변이었을 뿐인데.’
에드문트가 무슨 의도로 엘리아를 보고 싶다고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물어보지 않고서야 정답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엘리아는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고도 했고, 엉터리 추리를 해 보다가 포기했다.
‘그래. 차라리 없었던 일이라 생각하자.’
에드문트가 엘리아에게 ‘보고 싶다.’라고 말한 걸 들은 사람은 그와 자신뿐. 공유되지 않은 사실을 존재하지 않는 거짓으로 만드는 건 너무나 간단하다.
에드문트가 다시는 미친 짓을 벌이지 않고, 엘리아가 그날의 일을 잊는다면.
기억이, 죽어 버린다면.
다음 만남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다시 만난 에드문트는 전처럼 엘리아를 무시하리라.
마치 엘리아가 느낀 애정이 착각이었다는 듯, 서늘한 표정으로 눈만 겨우 마주쳐 주리라.
‘나는, 그럼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오히려 에드문트가 원래대로 돌아왔구나 하며 안도하겠지.’
익숙한 예전의 삶을, 사용인들에게도 거리낌 없이 내뱉었던 처지를 새삼스럽게 되새겼다.
에드문트에게 아무것도 아닌 엘리아. 바보같이 계단을 굴러 죽어 버렸다는 소식 정도가 들리지 않고서야, 절대로 엘리아를 찾아올 리가 없는 가짜 연인.
그런 자신의 처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던 과거를.
‘나는 에드문트에게 겨우 약혼자일 뿐이야. 라스페 공작가의 정략상 필요한 존재. 기껏 살린 로앙가를 3황자 측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한 수단…… 그뿐이잖아.’
그러나 예전으로 돌아가려 애쓰는 엘리아를, 뒷걸음치려는 마음이 남자의 목소리에 붙잡혔다.
<엘리, 도망가지 마.>
태엽을 감지 않은 오르골에서 음악이 흐르는 듯했다.
엘리아에게, 자꾸만 에드문트를 만난 일이 현실임을 자각하게 했다.
‘도망가는 게 아니야. 과거로 도망가려는 게 아니야.’
에드문트가 선물한 오르골을 향해 항변했다. 실재했던 그를 앞에 두고 변명했던 때처럼. 겨우 입술만 달싹여 고백하고 말았다.
도망친 적은 없었노라고.
‘나는 에드문트 너를 이해해 보려고 했어. 성년이 되기 전까지, 남은 기한 동안이라도 너를 알아 가려고 했어. 그래도 너는 늘 나를 무시하기만 했잖아.’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피하지 말아 줘. 아무것도 하지 않아. 네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게.>
‘정말로 보고 싶었다는 말, 나는 그게 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네가 알려 줘야 할 거 아니야.’
사흘.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고 했으면서, 에드문트는 사흘 동안 소식 한번 전하질 않았다.
‘애틋하게 여겨 줄 것처럼 다가오더니, 나를 다시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버리는 거야?’
에드문트의 미친 짓 덕분에 엘리아는 생전 처음으로 그가 보고 싶어졌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너무나 궁금해서. 만나서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미워서.
한데 보고 싶다고 속살거려 놓곤, 얼굴을 내비치기는커녕 편지 한 통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엘리아가 에드문트를 찾아갈 수는 없었다. 엘리아가 무슨 이유로 에드문트를 찾아가느냔 말이다.
‘선물 받은 오르골에 대한 답례? 애초에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준 건데 사과에 답례하는 건 웃기잖아.’
그렇다고 ‘에드문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서 보고 싶다.’라고 솔직하게 말한다면 남들에게는 미친 짓으로만 보일 테고.
마치 엘리아가 자신을 찾아온 에드문트를 두고 ‘얘가 미쳤나 봐.’라고 생각한 것처럼.
‘그랬다간 내가 에드문트의 껍데기에 홀려서 쫓아다니는 사람들이랑 똑같은 취급을 받게 될 텐데. 죽어도 싫어. 그건 진짜 죽어도 싫다고.’
엘리아의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에드문트의 이상 행동의 진실을 밝혀낼 방법은 요원해 보였다.
이대로 답답해서 죽어 버리는 거 아닐까? 엘리아는 혼자 속을 한참 끓이느라 어쩔 줄을 몰랐다.
에드문트가 로앙가에 찾아오지 않아서 짜증이 나다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에드문트 탓에 화가 나다니!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더니 진짜 아무것도 안 하려는 거야? 사람 놀리고 모른 척하겠다는 거냐고!’
짜증이 난 나머지 애꿎은 오르골에 화를 퍼부었다.
물론, 비싸 보이는 오르골을 함부로 다루거나 하진 않았다. 그냥 굴러다니는 천으로 오르골을 가려 버렸을 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안 보이는 것도 아니니 되레 짜증이 났다.
마치 에드문트 같았다.
갑자기 찾아와서, 반대로 오질 않아서 짜증 나는 게 꼭 제 약혼자 같았다.
* * *
그날 오후, 무려 닷새 만에 외젠 로앙 백작이 황궁 숙식 생활을 끝내고 돌아왔다. 장장 닷새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각종 회의에 참석했다는 오라버니 꼴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평소 같았음 이틀이면 끝났을 텐데, 두 배나 걸렸어. 웬 미친 인간이 반년 전 안건까지 긁어다가 올리는 바람에!”
익명의 발의자가 누구일지는 추호도 모른 채, 외젠은 평소 안 쓰던 욕설까지 뱉었다.
그 꼴이 퍽 불쌍해 보여서, 엘리아는 귀가한 외젠을 한번 꼭 안아 주었다. 그의 옷에는 잠을 쫓느라 질리도록 마셨을 차향이 듬뿍 배어 있었다.
“엘리, 있잖아. 정말로……. 정말로 말하기 싫어?”
기회라고 여긴 외젠이 다시 공작을 만난 이야기를 궁금해했다. 원망을 가득 담은 눈빛을 쏘아 보내자, 외젠은 눈꼬리를 축 내리곤 상심한 척했다.
피로가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 덕인지 표정은 평소보다 훨씬 더 호소력 있었다.
“걱정되니까 그러지. 그날 공작이 먼저 점심 식사에 초대하더니, 다짜고짜 너를 만나러 가겠다고 했단 말이야. 그때만 해도 나도 모르는 새 너랑 공작 사이에 관계 진전이 있었나 싶었는데.”
일정 때문에 저택에 찾아가 보지도 못하고, 황궁에 붙잡힌 채로 얼마나 마음 졸였던가.
“그런데 정작 엘리 네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려 주질 않잖아. 그러니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 그럴 리야 없지만, 혹시 네게 겁박이라도 했을까 봐서…….”
외젠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견딜 수가 없어서 엘리는 눈을 꾹 감아 버렸다.
그리고 결국 토해 내고 말았다.
그날 에드문트가 제게 버리고 간 감정을. 엘리아를 사흘 내내 괴롭힌 목소리를.
“보고 싶었다고 하더라.”
“……뭐?”
“내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더라.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선물도 줬고.”
말하고 말았다.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그때의 기억을, 혼자 껴안고 있기가 너무 버거운 나머지.
“거짓말 아니야. 근데 오빠가 안 믿을 거…… 알아. 왜냐면, 여태까지 에드문트한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외젠에게 고백하고야 말았다.
입으로 지껄였더니 생각보다 꼴이 더 한심했다. 이상하지. 예전에는 전혀 이런 적 없었는데.
‘공작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데이지에게 백번 말해 봐야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에, 엘리. 잠깐만…… 너 울어?”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 답답한걸. 뜻 모를 설움이 왈칵 솟구치는데 대체 어떻게 견디란 말인지.
엘리아는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침실로 도망쳐 버렸다.
외젠은 엘리아의 눈물에 너무 놀란 나머지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했고.
‘머릿속을 씻어 내고 싶어.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깨끗하게 비워 버리고 싶어.’
눈물 자국을 아득바득 닦아 낸 엘리아는 수건에 얼굴을 묻은 채 간절히 빌었다.
기억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전부 다일 필요도 없었고 그냥, 사흘 전 기억 한 토막만 깔끔하게 도려내는 거면 충분할 텐데.
하나 이미 콱 박힌 그때의 기억이 태엽을 감아 주지도 않았는데 연주를 시작했다. 찾아오지 않는 에드문트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그에게서 도망친 적은 없었다. 없었는데, 이제는 달아나고 싶었다.
‘에디, 제발 부탁이야. 부탁이니까…….’
그러나 아무리 도망쳐도 자꾸만 쫓아오는 목소리가, 시선이.
화나게 했고, 애원케 했다.
‘제발,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아…….’
* * *
“엘리아. 엘리! 문 좀 열어 봐. 응?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제발, 엘리!”
뒤늦게 엘리아를 쫓아 올라온 외젠이 잠긴 침실 문을 두드리며 호소했다.
‘이게 대체…….’
공작이 저택에 혼자 있던 애를 겁이라도 준 건지, 보고 싶었다는 말은 또 뭔지.
혼란스러웠지만 외젠은 일단 잠긴 문을 여는 게 급했다.
‘얘가 또 처박혀서 혼자 울려고……. 며칠 동안 나오지도 않으려는 거 아니야?’
덜컥 겁이 났다. 엘리아가 방에 틀어박혀 몇 날 며칠 울기만 하던 시절로 돌아가 버리는 건 아닌가 싶어서.
“엘리. 제발, 제발…….”
먼저 떠난 부모 곁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던 어린 엘리아가 떠올라 속이 새까맣게 탔다.
“문 열어. 응? 미안해. 내가 너 괜찮은지만 보려는 거니까. 절대로 아무것도 안 물어볼 테니까…….”
절박함이 소리가 되어 재차 문을 두드렸다. 커지는 그의 불안감을 닮아, 문 두드리는 소리도 점점 높아져 갔다.
그러더니, 마치 숨이 끊어지듯 소리가 멎었다.
“뭐? 지금 손님이 문제가 아니라고! 엘리아랑 이야기를…… 잠깐, 뭐라고?”
엘리아에게 애원하던 외젠은 사용인의 말을 듣더니 갈등 끝에 문 앞을 떠났다.
곧 발소리가 희미해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하아…….”
침실로 도망쳤던 엘리아는 외젠이 떠났음을 소리로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다. 힘들어.’
소매로 연신 남은 눈물을 훔치니 울컥했던 감정이 함께 벗겨지고 피곤함이 남았다.
또한, 죄책감이 들었다. 눈물을 보인 것도 모자라 도망쳐선 문까지 걸어 잠그다니.
외젠에게 못할 짓을 하고 말았지만, 엘리아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이따가 사과해야지. 에드문트가 찾아왔던 일을 다시 떠올리니 너무 열 받아서, 외젠에게까지 화내게 될까 봐 자리를 피한 거라고 해야겠다.’
잠가 둔 문에 기댄 채, 엘리아는 외젠에게 할 사과의 말을 골랐다. 마음 약한 오빠는 되레 제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겠지만.
‘……밖에 무슨 일 있나?’
기대어 있던 문이 갑자기 소음을 만나 달각거렸다. 얼굴을 틀어 귀를 대어 보니, 복도가 소란스러웠다.
엘리아의 침실이 있는 4층에서는 무척 드문 일이었다. 여기엔 겨우 제가 쓰는 서재와 응접실뿐인데.
설마 외젠이 어릴 때처럼 문을 부수어서라도 엘리아를 꺼내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걸까?
‘손님, 그래. 아까 외젠이 손님 어쩌고 이야기했잖아. 갑자기 중요한 손님이 찾아온 바람에 4층까지 바빠진 거겠지.’
엘리아는 보이지 않는 문밖 상황에 관심을 주지 않으려 했다. 괜히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고 고민해 봐야 불안감만 느껴질 테니.
‘바쁜 것 같으니 나중에 나가야겠다. 어차피 당장 얼굴 봐야 좋을 것도 없고.’
분명 운 흔적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 테니까, 괜히 복도에 서성거렸다가 데이지에게 걸리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데이지가 제 얼굴을 보고 보일 반응이야 뻔했다. 걱정하고, 또 걱정하겠지. 무슨 일이 있느냐고 궁금해하면서.
추궁당하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니까, 엘리아는 오늘만큼은 데이지를 피해 다니겠다고 결심했다.
‘문은 어쩌지? 아무리 그래도 잠가 두는 건 너무 유치해 보일 테니까…… 일단은 열어 놓자. 어차피 당장 안 올 테고.’
엘리아가 고민 끝에 잠금장치를 풀려던 차였다. 건너편에서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들겼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깜짝 놀란 엘리아가 잠금장치에서 손을 떼었다. 이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아가씨?”
목소리의 주인공은 하필 데이지였다. 외젠이 그새 일러바친 걸까? 그래서…….
“아가씨, 잠시 나와 보셔야……. 손님이 찾아와서요.”
손님이라니?
문밖에서 들리는 데이지의 목소리에 당황이 서려 있었다. 엘리아는 겨우 진정되던 차였는데.
‘밖에, 누가 찾아왔다고?’
아주 불길한 기시감이 엘리아를 꾹꾹 찔러 댔다. 날이 선 감각이 척추를 찌르는 칼날이 되어 엘리아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설마. 설마 에드문트가…….’
“아가씨, 안에 계시는 거 맞죠? 무슨 일 있으세요?”
하나 데이지가 전한 말은, 엘리아의 예상과는 달랐다.
아주 조금, 달랐다.
“라스페 공작가에서 찾아왔어요.”
* * *
“……아가씨?”
데이지는 가까스로 놀란 표정을 숨기고 엘리아를 불렀다. 문을 열고 나온 아가씨의 얼굴에 울음기가 선명한 탓이었다.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외젠 님과 이야기 중이셨는데.’
1층에서 두 사람이 인사 나누는 모습만 보았던 데이지는 영문을 몰라 당황하고 말았다.
‘또 다투셨나? 그래도 운 적은 한 번도 없으셨는데.’
엘리아는 데이지의 놀란 기색을 보며 아직 외젠이 데이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인데, 공작가가 왜?”
엘리아는 데이지가 묻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지금 상황에 괜찮으시냐는 상냥한 말을 들었다간 또 눈물이 터질지도 몰랐다.
말하고 싶지 않은 기색을 눈치챈 데이지가 서둘러 엘리아의 눈가에 닿았던 시선을 거두었다.
“아, 방금 공작가에서 찾아왔는데요. 아가씨께 드릴…….”
“데이지! 아가씨께서는?”
“나 여기 있어. 어디로 가면 되는데?”
“예? 아, 이쪽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데이지를 재촉하러 왔던 하인이 엘리아를 복도 끝 응접실로 안내했다.
아가씨의 등장에, 복작복작하던 4층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바짝 낮춘 수군거림만 공기처럼 흩어졌다.
계단 근처에는 외부에서 온 인부들이 있었고, 호기심 많은 사용인들 얼굴도 빼꼼 올라와 있었지만 엘리아는 주변을 살필 경황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괘, 괜찮을까? 아가씨 얼굴, 우신 것 같은데?’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아는 척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데이지가 다른 하인들과 상태 안 좋아 보이는 아가씨를 걱정하는 사이, 엘리아는 홀로 저벅저벅 걸어 응접실 앞에 다다랐다.
응접실은 하필 지난번 찾아온 에드문트를 만났던 장소였다. 지난번과는 달리 문이 열려 있었고, 얼굴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응접실을 막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이건 무슨 향이지?’
맡아 본 적 없는 향에 엘리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응접실이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걸 보아, 안에서 흘러나오는 향이었다.
향수를 쏟아부은 듯 진한 향에 엘리아는 두통을 느꼈다. 코를 막을 생각은 못 하고, 애꿎은 옷자락을 구겼다.
“그, 엘리. 너를 찾아온 손님인데…… 공작가에서 말이야.”
응접실 문 앞에는 외젠이 엘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찌푸린 얼굴은 화가 난 건지, 혼란스러운 건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에드문트가 아니면 대체 누가 온 거야?’
외젠도, 데이지도 ‘공작이 왔다.’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니 다른 사람일 텐데. 이번에는 대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보고 싶다는 말로 저를 혼란케 했던 남자가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벌였다는 걸까.
엘리아는 호기심과 두려움에 떠밀려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겨우 참을 만해졌던 짙은 향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뒤이어 찾아온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깟 독한 향 따위야.
“이, 이게 뭐야? 이게 다 무슨……?”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공작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엘리아가 비명이나 다름없는 반응을 보였음에도, 낯선 얼굴의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응접실을 가득 채운 선물을 보낸 게, 당신의 약혼자라고.
사흘 내내 소식 한번 전하지 않았던 에드문트라고.
“공작님께서 그간 황실의 일이 매우 번다하셨습니다. 귀한 아가씨를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눌러야 했을 정도로 말입니다.”
엘리아는 그가 뭐라 떠들든 말든 충격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고, 남자는 엘리아가 듣든 말든 제가 할 말을 이었다.
“에드문트 님께서는 조금 전 귀족원 일을 마무리하셨으나……. 안타깝게도 급한 일이 생겨 곧장 영지로 내려가셨습니다.”
놀라 벌어진 입으로 짙은 향이 꾸역꾸역 파고들었다. 그래서 남자의 목소리는 잘 와닿질 않았다.
에드문트, 급한 일, 영지…….
단어로 조각조각 난 채 엘리아의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하여 공작께서 가장 신임하시는 보좌관인 저, 한스 마이어가 공작님의 분부를 받들어 아가씨께 드릴 선물을 대신 전달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선물이라고요?”
“예, 참고로 선물은 당연히 공작님께서 직접, 고르셨습니다. 쉴 틈도 없이 바쁘신 와중에 말이지요.”
한스는 제가 강조하고 싶은 단어 위주로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장장 두 시간이나 준비한 말이었는데 풀어 내는 건 겨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아쉬움을 뒤로하고, 한스는 품 안에 챙겨 온 초대장을 꺼내 내밀었다.
“공작님께서 아가씨께 드리는 초대장입니다.”
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봉투에는 공작가의 상징인 푸른색 사슴이 있었으니까.
엘리아는 푸른색 봉투를 받아 들었다. 사실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눈앞에 들이밀길래 무심코 받았을 뿐.
“그럼 저는 이만…… 아, 혹시 공작님께 전하실 말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전할 말이라니.
당장 생각나는 말이 있기는 했다. 미쳤느냐, 정신 나갔느냐, 이게 무슨 짓이냐 뭐 그런 말들.
엘리아에게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전하라고 말했을지도.
“없으시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한스는 이내 제가 몹시 바쁘다며 양해를 구하더니, 먼저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다들 그만 가서 일 봐요, 얼른!”
응접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사용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몰렸으나, 데이지의 불호령에 전부 쫓겨났다.
아가씨를 배려한답시고 응접실 문까지 굳게 닫아 준 바람에, 엘리아는 혼자가 되고 말았다.
공작이 보낸 선물과 함께, 갇히고 말았다.
“이게 대체 뭔데…….”
집사가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던 응접실의 낡은 협탁, 유행 지난 가구와 적갈색 융단까지 모조리 뒤덮은 건…….
수천 송이의 꽃이었다.
가을 정원에서나 볼 수 있는, 때 이른 주홍빛 꽃.
창밖은 분명 꽃망울도 채 맺히지 않은 봄이었거늘. 응접실에는 가을이 한가득 펼쳐져 있었다.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났던 에드문트처럼, 선물은 그를 닮아 계절을 훌쩍 앞서가 있었다.
“에디. 이게…… 대체 뭐냐고. 뭐냔 말이야.”
엘리아는 계속 ‘이게 대체 뭐냐.’는 질문을 되뇌었다.
눈이 있으니 응접실을 뒤덮은 에드문트의 선물이 ‘수천 송이의 주홍빛 꽃’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숨이 막힐 듯한 꽃향기가 없어도, 그의 선물이 계절을 한참 앞질러 핀 꽃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무슨 의미냐고. 이게 다 뭐냐고…….”
다만 엘리아가 모르는 건, 에드문트의 마음이었다.
주홍빛 꽃 수천 송이를 초대장과 보내온 의미가 짐작조차 되지 않아, 엘리아는 울고 싶었다.
목 놓아 울고 싶은 심정이 되고야 말았고, 기어코 엉엉 울고 말았다.
손에는 에드문트의 눈동자를 닮은 푸른색의 초대장을 쥔 채로.
또 엘리아만 모르는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