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의문
에드문트가 떠나고, 엘리아는 의욕이 바닥을 친다는 게 어떤 건지 절절히 실감했다.
‘꼼짝도 하기 싫다.’
저녁은 먹지 않았다. 입맛이 없다는 말로 거부했지만 실은 너무 긴장했던 나머지 저녁 먹을 힘조차 없었다.
데이지는 엘리아에게 식사를 강권하는 대신 혼자 있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괜히 한술 뜨게 했다간 꾸역꾸역 먹고선 밤새 토하고 난리가 날 게 분명했으니까.
‘이게 뭐야. 어제부터 에드문트 때문에 엉망진창이잖아. 오늘은 겨우 30분 같이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엘리아가 평생 에드문트와 대화한 시간을 다 합쳐 봐야 30분도 안 될 것 같았다.
때문에,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에드문트가 자신을 찾아온 게 꿈이 아니었다니…….
심지어 그 짧고도 영원 같던 시간 동안 에드문트가 어땠던가.
애칭을 부르고,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보고 싶었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체 왜?
에드문트의 기행이 남긴 의문들은 내내 엘리아를 괴롭혀 댔다.
책을 읽을라치면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고, 캔버스 앞에도 앉아 봤으나 점 하나 찍지 못한 채 붓을 내려야 했다.
급기야 이불을 뒤집어쓰고 처박히는 최후의 수단까지 썼다. 하나 오후의 기억은 침실 구석까지 쫓아와 엘리아를 괴롭혔다.
‘제발, 이러다 죽겠다고!’
엘리아는 상상 속 에드문트에게 항변했다. 눈앞에 있을 적에는 한 마디도 못 했으면서.
‘에드문트, 어째서야. 지금까지 나한테 한 번도…… 아니, 다른 사람한테조차 살갑게 군 적 없었잖아. 왜 오늘이었고, 어째서 나였어?’
상상 속 에드문트는 대답은커녕 엘리아를 무시했다. 상상일 뿐인데 짜증과 안도감이 동시에 치밀었다.
실로 에드문트답지 않은가. 무시하고, 무시하고, 또 무시하고.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았지. 에드문트도 기억 못 할 시절부터.’
에드문트를 처음 만난 날은, 당연히 기억나지 않는다. 두 가문이 엘리아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교류를 이어 왔으니, 아마 갓 태어난 자신을 보러 왔을지도.
채 눈도 못 뜬 엘리아를 가리키며 에드문트에게 ‘너와 결혼할 아이란다.’라고 소개했겠지.
‘그걸 듣고도 에드문트는 아무 반응 없었을 거야. 분명히.’
좀 더 컸을 땐 어땠더라. 갓 말문이 트여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다녀도 예쁨받던 네 살 때 즈음. 라스페 공작 부부가 에드문트와 백작가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엘리아는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에드문트를 열심히 쫓아다녔다.
<에디, 에디이.>
아마 인형같이 생긴 공작가 도련님이 마음에 들었으리라. 그러나 여덟 살 에드문트에게 네 살 된 엘리아는 귀찮기만 했겠지.
‘겨우 네 음절인 이름도 발음 못 해서 제멋대로 ‘에디’라고 부르며 쫓아다녔는걸. 눈치도 없이.’
왜 그런 미친 짓을 했을까? 차라리 외젠에게 목마나 태워 달라 조르는 편이 나았을 텐데.
<에디, 이거 할 줄 알아? 내가 알려 줄게. 엘리랑 같이 하자.>
<재미없어? 엘리랑 다른 거 할까?>
<에디……. 혹시 말할 줄 몰라?>
무시당하는 줄도 모르고 에드문트를 졸졸 따라다니며 말을 걸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당시 엘리아는 열심히 조르면 에드문트도 저와 어울려 줄 거라고 믿었으리라.
에드문트가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을 연 건, 떠나기 직전 마차 앞에서였다.
<로앙가 따님은, 강아지 같아.>
여덟 살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부모님을 향해 딱 그 한마디만 남기고 마차에 올라탔다.
어린 엘리아도 그게 귀엽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귀엽다고 생각했다면 조금이라도 예쁜 목소리로 말했을 테니까.
<미안하네. 아이가 번잡한 걸 싫어해서……. 악의는 없을 걸세.>
라스페 공작이 제 부모님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을 거고.
손님이 떠난 후, 오빠 외젠이 엘리아가 착각이라도 할 성싶었는지 쐐기를 박아 주었다.
<엘리 이 바보야, 네가 귀찮게 해서 공자께서 짜증 난 거잖아.>
<내가 짜증 나? 강아지 같다는 게 짜증 난다는 거야?>
<그래. 너더러 눈치 없이 엉겨 붙는 강아지 같다고 한 거라고.>
자존심 상한 엘리아는 그 후로 에드문트를 쫓아다니지 않았다. 대신 진짜 집 지키는 개처럼 굴었다.
<너, 너 왜 우리 집 자꾸 와?>
에드문트에게 멀찍이 떨어져 침입자 대하듯 으르렁거렸다.
물론 그런다고 엘리아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아마 시끄러운 옆집 강아지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다행히 학술원에 진학한 에드문트는 더는 백작가에 오지 않았다. 엘리아는 제게 우호적이지 않은 남자애를 금방 잊어버렸다.
다시 만난 건, 부모님의 장례식 때였다. 엘리아가 여덟 살, 에드문트가 열두 살이던 해.
<엘리, 부모님께서…… 그러니까, 하늘에…….>
오빠 외젠은 어떻게든 부모님의 죽음을 이해시키려 했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또래보다 영특했던 엘리아는 이미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돌아가셔서, 이제 다시는 못 보는 거야?>
<그래. 다시는……. 엘리, 이제 우리 둘이서 살아야 해.>
죽음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남들만큼 괴로워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언제 오느냐며 투정 부리는 대신 오빠의 품에 안겨 온종일 울었고, 결국 혼절하고 말았다. 어린 몸으로 감당하기 벅찼던 슬픔에 휘몰려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에드문트는 어땠던가. 나란히 놓인 네 개의 관 앞에서, 로앙가의 남매와 달리 에드문트는 얼마나 무심해 보이던지.
그는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라스페 공작 부부와 로앙 백작 부부를 함께 기리는 장례식이었건만, 에드문트는 마치 타인의 장례식에 참석한 듯 평온해 보였다.
<조부를 빼닮았다더니. 독하기도 하지.>
<감정이 없다는 소문이…….>
엘리아는 눈물로 엉망이 된 외젠의 얼굴을 닦아 주면서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었다. 흐르는 눈물을 겨우 끊어 내고는, 에드문트를 바라보았다.
어리고 불쌍한 로앙가의 남매.
홀로 남은 라스페가의 도련님.
전자가 초라할수록 후자에게선 비현실적인 기품이 느껴졌다. 열두 살 나이에도 어른들 못지않게 큰 키, 검은 예복을 갖춰 입은 소년은 그저 아름답기만 했다.
아름다워서 끔찍했다. 엘리아는 에드문트가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내일 에드문트와 만날 거야. 소송 때문에 상의할 게 있어서.>
두 가문에 비극이 닥친 이후에도 인연은 계속되었다.
성년이 되지 않은 열다섯 살 외젠은 친척들로부터 가문을 지켜야 했고, 유일한 우군은 열두 살의 에드문트뿐이었던 탓에.
백작위 승계권을 놓고 벌어진 재판, 인정도 염치도 던져 버린 치졸한 여론전, 엘리아를 키워 주겠다는 그럴듯한 회유와 압박을 견디게 해 준 것 역시 에드문트의 조언뿐이었다.
그는 로앙의 구원자였다.
또한,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제 겨우 열다섯이라니.>
<크라우제 후작이 저 어린 도련님한테 밀릴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소년은 아름다운 청년으로 성장했고, 멸문할 거라 점쳐졌던 공작가는 에드문트의 강력한 세력으로 발돋움했다.
이내 모두가 그를 경외하였으니, 에드문트는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 속 연인이 되었다. 외양이며 소유한 권력이며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하나 수많은 이들이 그의 곁을 탐했음에도, 결국 남자를 차지한 건 로앙가의 어린 아가씨였다.
무사히 백작이 된 외젠이 먼저 에드문트의 동의를 구했고, 에드문트는 거부 의사를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약혼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약혼이 성립되었다. 엘리아의 의사와 관계없이.
<엘리아, 그가 어떤 사람이든 우리를 구원한 건 변하지 않아.>
외젠은 누이에게 미안해하면서도, 애원하고 설득하고자 했다.
<그가 우리를 살렸어. 그리고 어린 너는 모르겠지만…… 로앙가에는 달리 선택지가 없어. 그렇다고 너를 한미한 가문이나 평민에게 보내고 싶지는 않아. 절대로.>
로앙가로서는 선택지가 없었다. 황위 계승 문제 때문이었다.
제국의 현 황제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여태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었다.
하여 다음 대의 황제 후보는 죽은 1황자가 남긴 딸, 혹은 황제의 동생인 3황자. 둘 중 한 명.
두 세력 간의 황권 다툼을 앞두고 귀족들도 두 파로 나뉘었다. 당연히 혼인도 파벌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니 엘리아에게 에드문트가, 에드문트에게도 엘리아가 유일했다. 사랑에 눈멀어 가문을 뛰쳐나가는 미친 짓거리를 벌일 예정이 아니고서야.
<고작 로앙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운도 좋지.>
약혼이 알려지자 모두 엘리아를 시기했다. 로앙가의 여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완벽한 제국의 공작을 거머쥔 ‘운 좋은 귀족’이라면서.
그러나 동의할 수 없었다. 엘리아는 사랑도, 권력도, 에드문트도 원하지 않았으니까.
<엘리, 공작가가 가진 것이 네 것이 될 거야. 그래도 싫어?>
<나는 공작 부인 같은 건 필요 없어, 외젠……. 에드문트는 사람 같은 적이 없었단 말이야. 사람같이 굴지를 않잖아.>
<드러내지 않을 뿐이야. 적이 너무 많으니까. 약한 모습을 보이면 당장 그를 물어뜯으려 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러니 우리가 이해해 줘야지.>
외젠의 애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죽음이 데려가지 않은, 엘리아의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
<엘리, 네가 성년이 되어서도…… 그때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나도 더 욕심부리지는 않을게. 그러니까 노력해 줄 수는 없을까?>
성년이 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노력해 달라는 부탁을 못 이긴 척 승낙했다.
‘노력하면 사랑할 수 있게 될까? 아니면 에드문트에게 가서 내가 제발 너를 사랑하게 해 달라고 빌어야 하나?’
애원해 봐도 통할 것 같지 않아서, 대신 엘리아가 에드문트를 이해해 보려 했다. 외젠의 말대로 같은 처지이니, 동질감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아, 안녕. 에드문트.>
눈을 마주치며 인사했고,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기도 했다. 반응 한번 없는 남자에게 매번 친절한 척 굴려니 고역이 따로 없었다.
외젠은 에드문트가 감정을 숨기는 거라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엘리아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그에게는 애초에 숨길 감정이 없어서, 드러나지 않는 거라고.
‘그나마 나 하나만 무시하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에드문트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무심했다. 부모의 주검을 앞에 두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그날처럼. 참 한결같기도 하지.
‘나라면 너처럼 굴지 않았을 거야. 아무것도 못 느껴도, 사람인 척 굴었을 거야.’
옆에서 우는 사람들을 흉내 내 눈물 짜내고, 앞에서 억지로 웃는 약혼자에게 같이 웃는 척해 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
‘에디, 네가 그 꼴을 하고 살면 사람들이 너를 무서워하리라는 것쯤은 알잖아. 내가 너를 무서워하는 것도 알고 있을 거면서.’
엘리아는 에드문트를 이해할 수가 없었고, 납득할 수 없는 그의 행동은 엘리아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언젠가부터, 엘리아는 그를 만나고 온 날이면 꼭 같은 악몽을 꾸었다.
<시끄러워.>
새파란 괴물이 엉엉 우는 엘리아가 시끄럽다고, 멍청한 강아지 같다며 화를 내곤 잡아먹으려 하는 꿈이었다.
엘리아는 필사적으로 도망갔지만, 두고 온 오빠가 생각나 돌아가는 바람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파란 괴물의 입 안은 춥고, 무서웠다.
‘왜 하필 파란색 괴물이었을까. 책에 나오는 괴물은 다 검정이나 빨강인데.’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여느 때처럼 외젠의 손에 끌려 공작가에 갔던 날,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에 괴물의 색이 있었다. 푸른색. 겨울 호수에서 빌려 온 시린 물빛. 맑고 청아한 빛깔.
에드문트의 눈동자 안에, 괴물의 푸른색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름다운데 무서워. 무서운데도 아름답고…….’
어느 쪽이 옳은 감상인지는 모르겠다. 아름답다는 감상을 두려움으로 착각한 건지, 두려움을 경외심으로 착각한 건지.
<안녕, 에드문트.>
답을 알 수 없어서, 엘리아는 무서움을 꾹 참고 에드문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 있는 게 정말 저를 잡아먹을 괴물인지 직접 확인하고자 했다.
인사말에는 대답이 없었고, 오가는 대화도 전무했으나 그는 적어도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엘리아가 무례인 걸 알면서도 시선을 맞추면, 에드문트의 시선도 잠시나마 엘리아를 향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 나를 잡아먹을 리가. 잡아먹을 만큼 관심이 있을 리가 없지. 이쪽에서 잡아먹어 달라고 납죽 엎드려도 무시할 텐데.’
두려움은 조금씩 옅어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에드문트는 여전히 사람 같지 않았으나, 엘리아를 잡아먹을 괴물 같지도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궁금하다. 에디,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거야? 혼자 어떻게 가족들의 죽음을 버텼어?’
남자의 눈에서 괴물을 찾는 건 관두었다. 대신 엘리아는 미술품을 감상하듯 에드문트의 눈을 바라보곤 했다. 깊은 호수의 바닥을 헤아려 보려 했다.
이제 남은 기간은 고작 두 계절. 봄이 지나고 여름을 보내면 가을이 된다. 엘리아가 외젠과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던 성년이 되는 계절이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줄 알았어. 너는 어제처럼 나를 무시하고, 내일도 무시당하는 날이 계속될 줄로만 알았어.’
이불 속이 답답해진 엘리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침대에서 잘 보이는 협탁에, 오르골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왼쪽에는 꽃다발을 안은 소녀가, 오른쪽에는 등 뒤로 책 한 권을 숨긴 소년이 있었다.
태엽을 감으면 소녀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출 테고, 소년은 소녀의 춤을 바라보며 언제쯤 뒤에 숨긴 책을 건네줄까 고민하리라.
‘에디, 너는 사람 같지가 않았잖아. 그런데 왜 오늘은 사람같이 굴었던 거야? 보고 싶었다는 말은 진심이었어?’
<엘리, 보고 싶었어. 너는 아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내가 이해 못 하리라 생각했으면서 보고 싶었다고 한 이유가 뭐야? 여태 꼭꼭 숨겨 둔 감정을 이제야 내게 보여 주려는 거야?’
목소리에 담겨 있던 애정을, 눈동자에 비치던 감정을 떠올려 봤다. 착각이 아니었나, 혹시 거짓은 아니었을까.
<네가 보고 싶었어. 너무나도.>
‘혹시, 가진 적 없는 감정을 가진 척 흉내 내는 건 아니고?’
그날, 엘리아는 다시 괴물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푸른색의 괴물은 엘리아를 잡아먹으려 하는 대신 책 한 권을 건네주었다. 책을 펼쳤더니 그곳에는 보고 싶다는 마음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엘리아는 괴물의 말을 읽을 수가 없었다.
보고 싶다는 괴물의 마음은, 당연히 읽을 수가 없었다.
내용이 참 궁금했는데…… 괴물이 쓴 책이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