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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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확인

에드문트는 10년 전에나 유행했던 예복을 갖춰 입고 황궁으로 향했다. 기억과 다르지 않은 모습의 황궁이 그를 맞이했다.

고작 열아홉에 공작이 되었던 에드문트를 향한 시선마저도 그대로였다. 질투, 시기, 의심…….

하나 서른둘이면서 동시에 스물둘인 남자에게, 자신을 향해 오는 시선이란 흙바닥을 구르는 먼지와 다름없었다.

“저기 벨젠 경, 오늘 저택에 무슨 일 있었습니까? 공작님께서 기분이 퍽 좋아 보이시는데요.”

“제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이십니다만.”

“아니, 정말 평소보다 기분 좋아 보이시는데요.”

뒤에서 에드문트의 보좌관인 한스가 기사 벨젠의 떨떠름한 반응에도 자꾸만 공작님께서 기분이 좋아 보이신다고 주장했다.

실은 한스의 말대로 에드문트는 기분이 좋았다. 당연하고말고.

그의 손에 죽었던, 혹은 저들끼리 서로 죽여 댄 이들이 살아 움직이는 광경은 마치 한 편의 극을 연상케 했다.

실은 이 모든 게 엘리아를 잃고 죽어 버린 자신을 위해 준비된 한 편의 연극은 아닐까, 그런 공상까지 하게 만들었다.

‘백작가도, 다르지 않을까.’

로앙 백작가에도 그를 위한 연극이 준비되어 있을까? 그 생각을 하니 더욱 기꺼워졌다.

하나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다. 꿈일 리가 없었고, 설사 이 모든 게 꿈이라면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다.

에드문트는 눈을 떴을 때 제 앞에 놓인 현실이 엘리아가 죽은 후의 세상이라면, 주저 없이 검을 빼 들고 자신을 찌를 것이다.

돌아오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몇 번이라도.

“오셨습니까, 공작님.”

복도에 죽 늘어선 시종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에드문트는 그들 중 후작가에서 보낸 첩자가 섞여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까?

물론 예전의 일을 답습하는 것만으로도 황위는 에드문트의 사촌 누이가 차지할 것이며, 정적들은 모두 죽어 사라지리라.

하지만 에드문트는 망설였다.

‘이전과 같아질 필요는 없지.’

이제 엘리아의 삶이 전과는 달라질 테고, 에드문트의 삶 역시 달라질 텐데 죽어 버릴 사람들의 생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내일의 죽음을 오늘로 앞당기고, 다음 달의 권력을 1주일 앞당겨 쥐는 것으로도 충분하리라.

모든 것이 달라지고,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2층에 있는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호위 기사 벨젠이 문을 열어 먼저 내부를 점검했다.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 정적들을 처리하기 전까지는 늘 지켜 왔던 규칙이었는데.

‘형편없군.’

집무실마저도 서른둘의 그가 보기엔 낡고 초라하기만 했다. 황궁에서 이만한 개인 집무실을 가진 이는 겨우 서넛에 불과했으나, 에드문트는 자신이 얼마나 더 많은 걸 누릴 수 있는지 알고 있었으니 눈에 차지 않는 건 당연했다.

“한스.”

“옙.”

“지난 한 달간의 서류들 전부 가져와.”

“……예? 한 달 치를요? 결재하신 거라면…….”

“부결시킨 서류들까지 전부.”

“아, 그럼 일단 지난 1주일 치부터 가져오겠습니다.”

1주일 치만 해도 집채만 한 책상에 가득 찰 텐데, 한 달 치라니.

‘어디 보자. 1주일만 해도 서른 건쯤 될 테니까 2주일 치만 가져다 두어도 충분해 보이겠지?’

한스는 늘 그렇듯 적당히 꼼수를 부릴 생각부터 했다. 그러나 에드문트는 게으름 피울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명령을 덧붙였다.

“한 달 치. 당장. 그리고 로앙 백작 쪽에는 점심 식사 같이 하자고 전하고.”

“예, 예에에?”

벌써 4년째 보좌관으로 일해 온 한스는, 생전 처음 들어 본 명령에 애매한 의문문을 만들고 말았다.

그러건 말건, 에드문트는 태평하게 집무실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마치 남의 집무실을 보듯.

한스는 그 기묘한 광경을 바라보느라 넋을 놓고 말았다.

“한스.”

“가, 갑니다.”

당장 꺼지라는 말이나 다름없는 명령에 한스가 서둘러 집무실을 나섰다. 일단 공작이 오늘 치 서류를 보는 사이에 서둘러 로앙 백작과의 점심 약속부터 잡아야 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한스는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벨젠 경을 붙들고 하소연을 했다.

“진짜, 진짜로 아무 일 없었다고요?”

한스는 그날 내내 같은 생각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4년째인데. 내가 이래 봬도 저분 모신 게 4년 차인데. 진짜 오늘 공작님은 너무 이상하다고!’

* * *

에드문트는 한스가 끙끙대며 서류를 옮기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과거의 서류를 재검토했다. 내용을 읽는 게 아니라, 겉표지만 훑어보는 수준의 빠르기였다.

그야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결과가 크게 아쉬웠던 일들만 골라 수정하는 정도였으니 서류를 보는 속도가 빠른 건 당연했다.

하지만 한스에게는 에드문트가 마치 일하는 괴물처럼 보였다.

‘원래도 속도가 빠르긴 했지만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데. 점심 먹기도 전에 다 끝내셨잖아?’

혹시 공작께서 제국을 망하게 하려는 심보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일 처리를 어떻게 서류 한번 훑는 거로 해결한단 말인가.

한스는 서류를 나르느라 바쁜 와중에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결재가 끝난 서류를 훑어보았다.

읽기는 했나 싶을 정도로 깨끗한 모습에 ‘역시나 대충 보셨구나.’ 싶었는데 마지막 장을 보고선 생각을 바꿔야 했다.

공작이 새로 추가한 지시 사항은 구체적이면서도 깔끔한 게 흠잡을 만한 곳이 전혀 없었다.

‘이상한데. 겨우 케른텐 공국과의 무역 협상 건까지 관심 두시는 분이 아니셨는데. 심지어 케른텐은 나도 처음 들어 보는 변방이라고. 여기가 흑석 산지였어?’

이상한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한스는 오늘 무려 공작과 세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세 번이나!

인사를 올려도, 시답잖은 농담을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이었는데. 저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면서 배불뚝이 늙은이들처럼 세상 다 산 노인네 같던 게 평소 모습 아니었던가.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라고!’

한스는 로앙 백작과의 식사가 약속된 별궁의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도 찝찝함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해결된 의문은 하나도 없이 계속 쌓이고만 있다.

점심 약속도 마찬가지. 매번 만나 달라고 청해 오는 쪽은 백작이었고, 그마저 공작은 바쁘다는 핑계로 세 번에 한 번 겨우 만나 주곤 했는데.

먼저 점심 식사를 제안하다니…….

“정말 별일이네요.”

상냥한 로앙 백작가의 사람들은 ‘공작님께서 오늘 뭔가 다르다.’라는 한스의 의견에 동의해 주었다.

“그래도 좋은 일 아닌가요? 공작님께서 늘 홀로 식사하시느라 한스 경께서 외로우셨을 텐데요.”

그러나 태평한 로앙가 사람들답게 반응은 다정하기만 할 뿐, 한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니.

‘내 감에 의하면,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란 말이야……!’

엘리아의 오빠인 외젠 로앙 백작 역시 전례 없는 식사 초대에도 의아해하기보다는 기뻐하기 바빴다.

‘생각해 보니 라스페 공작에게 식사 초대를 받는 건 처음인걸?’

라스페 공작을 흠모하던 많은 이들이 그의 곁을 맴돌다가 제풀에 나가 떨어졌으나, 로앙 백작은 끈기 있게 그의 곁을 지켜 왔다.

당연히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공작의 태도에 상처 입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외젠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라스페 공작은 외젠이 작위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준, 유일한 은인이었으니까.

아무리 공작가에서 로앙가를 우군으로 남기려는 속내가 있었다고는 해도, 로앙가가 에드문트에게 큰 빚을 진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니 자꾸 신경이 쓰여서.’

둘 다 부모를 잃었고, 그나마 제겐 엘리아라도 있었지만 라스페 공작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가족처럼 대해 주고 싶었다.

<에드문트는 홀로 잘나신 늑대고, 우리는 서로 엉겨 붙어 땅 밑에 사는 토끼 가족인데. 대체 누가 누굴 연민해?>

엘리아는 쓸모없는 생각을 한다며 혀를 찼지만. 그래도…… 공작도, 가끔은 외롭지 않을까.

그도 결국은 사람인데.

‘언젠가는 마음 열어 주리라 기대하긴 했지만, 이렇게 식사 초대를 받는 날이 오다니.’

외젠은 벌써 저택에 돌아가서 엘리아에게 자랑할 생각에 들떴다. 엘리아가 들으면 분명 꿈꿨냐며 의심부터 하겠지.

들뜬 바람에 외젠은 조금 성급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예컨대, 엘리아와 에드문트가 좀 더 가까워진다거나 하는 일 말이다.

‘어차피 서로가 아니면 혼맥 이을 곳도 없으니 결국 공작은 엘리와 결혼하게 될 테고, 하나뿐인 가족이 되면 아무리 공작이라도 정이 들겠지. 좋아, 다음 주에도 엘리아를 끌고 공작가에 가 볼까.’

외젠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에드문트를 마주했다. 상대는 여전히 감정 하나 드러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불편하지 않았다.

“어제 저택에 찾아뵙고 저녁까지 얻어먹었는데 이렇게 식사 자리에까지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새삼스럽군. 머지않아 가족이 될 사이인데.”

“아…… 그렇지요. 그렇고말고요.”

이번에는 로앙 백작마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에드문트가 먼저 약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건 처음이었으니까.

‘어제 엘리를 공작가에 데려간 게 효과가 있었나? 근데 그냥 평범한 자리였고,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었는데. 어제는 뭐가 달랐던 거지?’

로앙 백작이 전채 요리로 나온 새우를 꾹꾹 씹으며 혹시 제 누이동생이 최근 달라진 점이 있나 따져 보기 시작했다.

‘사용인들이 오늘 아가씨가 정말 예쁘지 않냐며 추켜세우긴 했지. 평소 모습 생각하면 사람 꼴이긴 했는데…… 그 애가 특별나게 예뻐졌던가?’

미안하지만 오라비가 보기에는 전혀 아니었다.

‘어떤 정신 나간 오라비가 자기 누이가 예쁘다는 생각을 하겠어?’

외젠은 설사 엘리아가 푸아티에가 막내딸처럼 생겼다고 해도 ‘그냥 사람 꼴은 했네.’ 하는 생각이나 하고 말리라 확신했다.

‘그나마 엘리 걔가 예쁘게 보일 때는 먹을 때인데. 귀찮다고 챙겨 먹진 않아도 차려 주면 오물오물 잘 먹긴 하니까. 어제 저녁 식사도 나는 결국 남겼는데, 걔는 후식까지 다 먹었고. 실은 잘 먹는 사람이 이상형이었을지도…….’

두 사람의 식사는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가끔 로앙 백작의 식기가 접시를 살짝 스치는 소리가 들릴 뿐.

대화가 없으니 로앙 백작은 후식이 나올 때까지 어제와 오늘의 공작을 다르게 만든 계기가 무엇일까를 추론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엘리가 어제 잘한 일이라고는 오리 요리를 다 먹어 치운 것뿐인데.’

“로앙 백작.”

“역시…… 아니, 죄송합니다. 말씀하시지요.”

시답잖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로앙 백작이 갑작스러운 에드문트의 목소리에 허둥댔다.

“오늘 일정이 끝나면 잠시 로앙가에 들를까 하는데.”

“로…… 저희 로앙가를 말입니까? 저야 물론 공작님께서 오신다면 영광으로 알고 모시겠으나, 안타깝게도 제가 오늘…….”

“자네는 바쁜 일 보게. 나는 내 약혼자에게 용무가 있으니.”

에드문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쨍그랑’ 하고 후식용 수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 식당에 있던 사람 중 누구도 그 소음에 놀라지 않았다.

이미 공작이 ‘약혼자’를 언급한 데에 너무 놀란 나머지, 더는 놀랄 겨를이 없었으므로.

“통보가 늦어 약속 없이 찾아가는 셈이니, 무례를 사과할 겸 선물을 가져가고 싶은데. 자네 누이가 특별히 좋아할 만한 선물이 있는가.”

에드문트는 열여덟 엘리아의 취향은 알지 못했다. 스물여덟 시절 엘리아의 취향은 알았지만, 그마저도 공작가의 지출 명세서를 보고 간접적으로 파악한 수준이다.

매달 빠지지 않고 이름이 올라오는 구두 가게, 공작 부인의 간식으로 올리기 위해 정기 계약한 케이크 가게, 매해 결혼기념일마다 엘리아가 직접 초청하던 음악가…….

그 외에는 없었다. 상실감에 죽어 버릴 만큼 사랑했는데도, 정작 가벼운 선물 하나 떠올리지도 못할 만큼 에드문트는 무지했다.

그래도 초조하지는 않았다. 이제 그에게는 돌려받은 시간이 있었으므로.

“엘리가 좋아할 만한 게, 책이랑…… 으음, 그 애가 돈 말고 달리 좋아하는 게 있던……? 아, 아닙니다. 제 말은 그러니까, 엘리가 돈을 밝힌다는 게 아니라. 그 애가 워낙 금전 감각이 좋아서!”

“쯧. 로앙 백작, 누이를 끼고 사는 것도 이제 몇 년 남지 않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서로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에드문트는 로앙 백작이 대답을 내놓지 못하자 답지 않게도 잔소리를 했다.

‘잠깐, 이게 무슨. 지금 나 엘리아 취향 모른다고 혼난 건가? 아니! 남매끼리 서로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는 게 오히려 정상 아닌가? 엘리 걔는 아마 내 생일이 언제인지도 모를 텐데!’

로앙 백작은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으나 ‘공작께서 형제자매 없이 자라셔서 뭘 모르시나 봅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잖은가. 그냥 얌전히 죄송하다고나 해야지.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이만 일어나지.”

“진짜, 진짜 엘리아에게 가시는……. 예, 살펴 가시지요. 모시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공작은 평소대로 제 할 말만 남기고 훌쩍 일어나 버렸다.

홀로 남은 백작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공작의 질책을 곱씹었다.

‘아,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다 싶더니!’

<제 누이와 함께 살게 될 날도 이제 몇 년 남지 않았을 텐데, 지금부터라도 서로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어제 공작에게 한 말이었잖아……?’

* * *

라스페 공작의 충직한 보좌관 한스는 공작이 왜 이상해졌는가 하는 답도 없는 고민은 그만두었다.

‘될 대로 되라지. 내가 고민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잖아. 외출이나 즐겨야지. 그러고 보니 이 시간에 나오는 게 대체 얼마 만이야?’

매일 새벽같이 황궁에 가서 해 질 때까지 보는 거라곤 서류, 지긋지긋한 수하들 얼굴과 잘생기든 말든 한스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작의 얼굴뿐이었는데. 햇살 좋은 시간에 황궁을 나와 로앙 백작가에 가다니.

‘세상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마부석조차 흔들림 없는 공작가 마차에 앉아 있으려니, 세상이 전부 아름답게 보였다. 심지어 오늘 외출의 목적조차도.

‘약혼자를 무작정 찾아가는 공작님이라니. 낭만적이잖아? 물론 그 공작님이 에드문트 라스페인 탓에 낭만성이 반절은 죽어 버리고 말았지만.’

여태 없는 듯 살더니 약혼자는 갑자기 왜 찾으시는 건지, 당연히 한스로서는 이유를 몰랐으나 알 게 뭐인가. 공작이 오늘 좀 미쳤나 보지.

미쳐서 그런 거라면 부디 내일도 정상 아니셨으면 좋겠는데.

하늘마저 한스를 도우려는지 마침 외출하기에도 딱 좋은 날씨였다.

그는 오늘 새로 산 2번가 의상실 외투를 입고 온 자신을 아낌없이 칭찬했다. 길거리의 아가씨들이 죄다 제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물론 다들 보기 드문 ‘라스페 공작가’의 마차를 구경하는 거겠지만, 착각은 자유라 하지 않던가. 그리고 정말로, 겸사겸사 마부석에 앉은 잘생긴 보좌관도 구경할 수도 있고.

‘운명이 뭐 별거겠어? 어느 날, 마부석의 남자를 잊지 못한 아가씨가 공작가에 편지 한 통 보내는 걸 시작으로…….’

“한스, 마차 세워.”

마부석 쪽으로 난 창문으로 공작의 명령이 들려왔다.

이크, 한참 공상에 빠져 있던 한스가 급히 공작의 명령을 전했다. 숙련된 마부는 갑작스러운 명령에도 매끄럽게 마차를 세웠다.

“어딜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이 주변엔 아무것도 없는데요.”

잽싸게 마차 문을 열며 한스는 어차피 답변도 못 받을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라도 입 안 열면 오셨습니까, 가시렵니까 딱 두 마디밖에 못 한다고.’

예상대로 호위 기사와 함께 마차에서 내린 에드문트는 대꾸 한 마디 없었다. 그는 곧장 간판도 없는 낡은 상점 하나를 향해 걸었다.

한스는 공작을 따라 싸구려 유리가 끼워진 상점 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에드문트가 찾아온 곳이 오르골 상점임을 알게 되었다.

‘오르골? 에이, 설마. 여기 뭐, 그런 거겠지. 공작가 비밀 접선지라든가.’

한스는 요전 날 읽은 추리 소설을 떠올리며 흔해 빠진 오르골 상점 문을 열었다. 하나 그의 기대와 달리, 내부는 평범한 오르골 가게였다.

낡은 태가 물씬 나는 상점 전경에 실망하기도 잠시, 먼지 쌓인 선반 위에 진열된 오르골은 문외한인 한스가 보기에도 싸구려 상품은 아니었다.

“공작님, 설마 선물 사러 오신 겁니까? 로앙가 아가씨가 오르골을 좋아하시나 보지요?”

“글쎄.”

“거, 제가 보기엔 오르골도 독특해서 기억에 남긴 하겠지만……. 이왕이면 5번가 보석상이 낫지 않을까요? 보석이야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사랑받는 선물 아니겠습니까. 마침 요즘 북동부의 자수정이 유행이라고 들었습니다.”

“레만 자작령의 자수정 말이군.”

에드문트는 한스가 젠체하는 걸 대충 들어 주면서 상점을 둘러봤다.

‘오르골을 좋아하던가?’

모르겠다. 저도 선물을 해야 할 때면 유행한다는 보석이나 안겨 주었지, 따로 고민해서 산 선물을 건넨 적은 없었다.

애초에 공작이 이곳을 찾은 건, 엘리아를 위한 선물을 고르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시험해 볼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열대를 한 바퀴 둘러본 에드문트가 중앙에 따로 장식해 둔 제품을 보고는 주인을 불러냈다.

“이것들 둘, 복제품이 있는가.”

갑자기 찾아온 고위 귀족에 긴장한 상점 주인이 공작이 가리킨 상품을 확인했다.

‘역시 귀족들은 보는 눈이 다른가? 오자마자 이걸 고르다니.’

공작이 고른 두 개의 상품은 주인이 필생의 노력으로 만든 역작이었다. 재료마저 어렵게 구한 흑단목이었으니, 황제 폐하의 앞에 내어 보이기에도 부끄럽지 않으리라 자부했다.

“아닙니다. 두 제품 모두 복제품은커녕, 제가 장장 5년에 걸쳐 만든 것이라…… 억만금을 주셔도 똑같이는 못 만듭니다.”

자신감과는 별개로 공작의 눈빛에 겁먹은 주인이 쥐어짜듯 대답했다. 이윽고 침 삼키는 소리가 울릴 정도의 적막이 찾아왔다.

“그…… 움직이는 모습도 한번 보시겠습니까?”

상점 주인은 어떻게든 귀족 나리에게 인정받고 싶어 용기를 냈다.

허락도, 거부도 내비치지 않는 에드문트의 표정에 주저하던 가게 주인이 그가 고른 오르골 중 하나를 꺼내 태엽을 감았다. 매일 하는 일인데도 손이 떨렸다.

태엽을 감으니 어린아이들이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 접하는 가곡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손바닥만 한 오르골 위에서, 꽃을 품에 안은 소녀가 강아지와 뱅글뱅글 돌며 춤을 추었다.

“오…….”

아름다웠다. 보석이나 사러 가자고 했던 한스마저 청량한 음과 세밀한 움직임에 감탄을 뱉을 정도로.

에드문트도 만족했다. 기억 속 오르골과 같은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대로였다면 2년 후, 제작자에게 부와 영예를 가져다주었겠지.’

에드문트가 스물네 살 때, 남부 공국에서 온 유명 극작가가 우연히 들른 상점에서 오르골 두 개를 구매했다. 이후 그는 연인이었던 모 극단 배우에게 청혼하며, ‘자신의 영감의 원천’이라는 찬사와 함께 구매했던 오르골 두 개를 선물하였다.

그 사실이 알려지며 귀족들이 상점 주인을 찾아와 앞다투어 오르골을 주문해 엄청난 돈을 거머쥐게 되었는데…….

이제 그 두 개의 오르골은, 에드문트의 손에 넘어갔다.

오르골 상점의 주인은, 본래 그의 것이었던 행운을 잃고 허름한 상점을 지키게 될까.

연인에게 줄 청혼 선물을 잃게 된 극작가는 사랑을 지킬 수 있을까.

에드문트의 손에서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까.

시간이 알려 줄 것이리라.

“이 두 개로 하지.”

태엽이 다 돌아간 오르골이 서서히 멈추었다.

에드문트가 바꾼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 * *

오르골은 품질에 비해 포장이 영 형편없었다. 한스는 또 오지랖을 포기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포장을 고쳐 보라고 상점 주인을 채근하다가 폭발해 공작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여기, 여기 잠시만 계십시오! 제가 이래 봬도 라스페 공작가의 4년 차 보좌관인데! 그 꼴을 한 상자 들고 가시게는 못 둡니다!”

한스는 건너편의 공단 상점에서 무려 1골드나 주고 값비싼 천을 끊어 왔다. 그러곤 마차 안에서 직접 포장을 했다.

천을 감싼 뒤 상점에서 공짜로 얻은 끈을 묶은 게 전부였지만, 완성작은 꽤 그럴듯했다.

“에헴. 어떠십니까. 제가 집무실 밖에서도 제법 쓸모가 많습니다.”

마차는 칭찬받고 싶어 몸부림치는 보좌관과 에드문트, 그리고 과묵한 기사를 태운 채 출발했다. 목적지인 로앙 백작가는 상점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마차가 남쪽으로 난 길을 죽 내달리자 주변 풍광이 바뀌어 새싹이 돋아 푸릇한 평원이 펼쳐졌다.

“와. 근교 생활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겠는데.”

복작복작한 수도 상점가에 익숙한 한스가 고즈넉한 길을 바라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내 곧게 뻗은 길 끝에 로앙 백작가 저택이 보였다.

‘왠지 앞으로 이 길을 자주 찾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걸.’

* * *

에드문트가 로앙 백작가에 가는 건 지난 생의 결혼식 이후 처음이었다. 그보다 더 과거에는 두 가문의 어른들이 살아 계셨을 적에 들렀던 게 전부였고.

딱히 기억에 남을 정도로 화려한 저택은 아니었다. 저택 곳곳에 세월을 이기지 못한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나마 봐 줄 만하던 정원도 아직 때가 일러 을씨년스러웠다.

마차에서 내린 에드문트는 볼 것 없는 정원을 뒤로한 채 저택 4층을 바라보았다. 결혼식을 올리고, 제국 관습에 따라 이곳 4층에 있는 엘리아의 침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결혼식에 참석한 이들은 에드문트에게 ‘혹여 아내가 울더라도 결혼이 싫어서 그런 건 아닐 테니 잘 달래 줘라.’라는 참견을 해 댔다.

그러나 엘리아는 울지 않았고, 그저 껴입은 결혼 예복이 불편하다고 투덜대는 게 전부였다. 괜한 투정이 아니었던 게, 과한 치장 탓에 장신구를 덜어 내는 데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조심, 조심해…… 요. 찢어지면…… 어머니가 입었던 예복이란 말이에요.>

엘리아는 그날 처음으로 에드문트에게 공대를 했다.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제 마음대로 ‘오늘부터’라고 다짐한 모양이었다.

어색해서, 아니…… 에드문트가 조잘조잘 이야기나 할 여유를 모조리 빼앗은 탓에 기껏 몇 번 입에 담은 게 전부였지만.

에드문트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사이, 로앙가의 집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예? 아, 아가씨께 용무가 있으시다고요?”

“공작님께서 황궁에서 로앙 백작님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아직 전달이 안 된 모양이군.”

“예, 달리 오신다는 소식은 듣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로앙 백작은 뜻밖의 소식에 당황해서 저택에 에드문트가 방문할 거라는 소식을 전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경황이 없었겠지. 그래. 나 같아도 놀라 나자빠지느라 허둥댔을 테니까.’

집사에게 상황을 설명한 한스는 황궁에 있던 백작가 사람들의 실수를 관대하게 넘어가 주었다. 에드문트에게는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었고.

백작가 사람들이 당황한 건, 그저 아랫것들의 사정일 뿐이니까.

“죄송합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셨는데 저희가 부족한 모습을 보이게 되어…….”

그의 권세를 증명해 주듯, 백작가에서는 선약 없이 찾아온 공작님께 되레 준비가 부족하다며 사과하기에 바빴다.

“공작께서는 잠시 이야기만 나누다 가실 예정이네.”

“예, 예. 그럼 저희가 잠시…… 두 분 이야기 나누실 만한 장소를 준비하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지.”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한 로앙 백작가의 집사가 공작에게 양해를 구한 뒤,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을 불러 모았다. 하필 오늘 저택을 방문해 올 상인들이나 하급 귀족들이 많아 공작을 다른 곳으로 모셔야 했다.

“오늘은 외부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4층으로 모셔야겠어요.”

“그래요, 4층은 데이지 씨가 관리를 잘해 두었을 테니까요. 문제는 엘리아 아가씨인데…….”

한스는 문틈으로 로앙가 사용인들의 수선스러운 대화를 엿듣던 중, 흘끔대는 시선을 발견했다.

공작가의 사람들이었다면 감히 들여다볼 생각을 못 했을 텐데, 이곳 사용인들은 에드문트를 향해 경계심이 아닌 천진한 호기심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아마 가주의 성품을 닮은 탓이겠지.

“흠흠. 저는 4층으로 선물만 옮겨 드리고 이곳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마차를 지키고 있을 공작가의 기사가 들었다면 ‘호위 규칙에 어긋난다.’라며 한 소리 했겠지만, 한스는 두 남녀 사이에 자신이 끼는 상황은 절대 원하지 않았다.

‘1층에서 보좌관님 소리 들으며 대접받는 쪽이 훨씬 좋고말고.’

복도에는 아직도 로앙가 사용인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사가 4층의 응접실 상태가 어떤지 묻는 사이, 멀리서는 여러 명의 사용인이 아가씨 이름을 부르며 바쁘게 뛰어다녔다.

“어떻게 해, 엘리아 아가씨께서도 모르셨을 텐데.”

“데이지는 응접실 확인 때문에, 일단 우리끼리라도 찾아!”

“주방에 안 계셔! 서재 확인해 본 거 맞아?”

“아가씨! 엘리아 아가씨!”

응접실 내의 볼품없는 장식물에 시선을 두고 있던 에드문트가 문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으음. 소란스러운데, 잠깐이라도 문을 닫아 둘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멀어지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엘리아의 이름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는 이름마저 달콤하다니.

게다가 아직은 이름뿐인 엘리아가, 이곳 4층에서 밤새 들었던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것 같았다.

<에드…… 에디, 에디.>

환청이라니. 에드문트는 이 모든 것이 우습고 생경했다.

‘한 번 죽어 버린 탓에 미치고 말았는지도.’

* * *

“그럼 저는 1층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한스는 오르골을 4층 응접실에 옮겨다 주고는 먼저 자리를 피했다. 로앙가의 사용인들도 에드문트 앞에 차를 한 잔 내오고는 전부 밖으로 나갔다.

에드문트는 한 번도 온 적 없는 낯선 공간에서 엘리아가 오기를 기다렸다.

적막한 응접실과는 달리, 엘리아의 침실이 있는 4층 복도는 사용인들의 목소리로 소란했다. 자신을 누가 찾아왔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엘리아는 저택 어딘가에 틀어박혀 있는 모양이었다.

‘열여덟. 열여덟의 봄이라…….’

에드문트는 기억 속 어린 엘리아를 떠올려 보았다. 이혼 서류를 내던지던 사랑하는 여자와는 얼마나 다른 모습이던가.

살이 영 붙지 않던 얼굴에는 아직 젖살이 남아 있겠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던 그때처럼, 에드문트를 똑바로 바라봐 주려나.

해가 지날수록 더욱 아름다워져서는 스물여덟이 되거든 또다시 에드문트를 버리고 도망가려고 할까.

그래도 에드문트는 괜찮으리라.

엘리아가 사랑해 주지 않아도 에드문트는 괜찮으리라.

‘다시 나를 떠나려 하면 붙잡으면 되고,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엘리아의 소중한 사람을 인질로 삼아 속박하는 비열한 짓도 개의치 않으리라.

혹은, 네가 떠나면 내가 죽어 버리겠노라며 여린 심장에 대고 죄책감을 불어넣는 치졸한 방법을 쓰게 될지도.

그러니 사랑해 주지 않는들 아무렇지도 않으리라.

다만, 에드문트가 열여덟 살의 엘리아를 사랑할 수 있을지는…… 좀처럼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저택에까지 쫓아와 놓곤, 이제 와서.

다시 만난 엘리아는 에드문트가 사랑한 여자와는 다를지도 모른다. 죽음이 그를 벌주기 위해 여자를 바꾸어 놓았을 수도 있다.

목소리는 소음으로, 시선은 아무 욕망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다면.

설령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한들, 사랑하지 못하게 될지도.

‘혹은, 서른둘의 내가 어린 너를 바꿔 버리고 말지도 모르지.’

채 피지도 않은 여자를 제 욕심으로 더럽혀, 사랑하던 여자와는 다른 모습으로 자라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을까.’

괜찮을 리 없다. 사랑했던 여자를 열여덟의 소녀에게서 찾아내지 못한다면.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건, 엘리아를 잃었던 과거의 세상과 다를 게 없으니까.

‘사랑받지 못하는 건 상관없어. 그러나 엘리아, 너를 사랑할 수 없게 된다면 나는 그따위 세상은 필요하지 않아. 차라리…….’

어쩌면 에드문트는 엘리아를 되찾기 위해 수십, 수백 번을 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더 고통스러운 곳에 검을 찔러 넣으면 사랑하는 여자가 다시 돌아와 줄까 싶은 비이성적인 희망을 품고, 고통을 끝없이 반복하리라.

하나 결국 깨닫고 말겠지. 신에게 여자를 돌려받기 위해 바칠 공물은 정결하고 아름다워야 하거늘, 그가 바칠 수 있는 건 음습한 마음만 남아 더럽혀진 몸뿐이라 결코 보답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너를 되찾지 못한 채, 돌려받을 방법조차 사라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실체도 없는 두려움이 이성을 갉아 먹으려 들었다.

‘엘리아, 차라리 예전처럼 열여덟 살의 너를 방치하는 편이 좋을까.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면서 기다려야만 할까.’

나를 포기하기 직전까지 인내하다가 끝내 너를 옭아매어…… 절대로 도망칠 수 없도록 하는 건 어떨까.

“…….”

그는 조용해진 응접실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아직 엘리아가 들어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에드문트는 갈등했다. 도망친다느니, 자존심이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이라도 떠날까. 저택을 나가서 과거를 답습할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 다르게 살아서 이번에는 네가 나를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면…….’

아. 그러나 문이 열리고 새파란 천을 두른 엘리아가 들어옴과 동시에.

“에드문트.”

에드문트는 다시 스물두 살로 돌아갔고, 열여덟 살의 엘리아의 두 눈을 욕망하게 되었다.

같은 사람을 다시 사랑하고 말았다.

변하지 않은 곧은 시선을, 사랑하고야 말았다.

* * *

엘리아가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응접실 문을 열자, 정말 그곳에 에드문트 라스페가 있었다.

제국의 젊은 공작. 잘난 머리와 흉내 낼 수조차 없는 추진력, 잔혹함을 갖춘 라스페 가문의 주인. 홀로 살아남은 고고한 늑대.

그리고 엘리아의 약혼자. 그가 먼저 엘리아를 버리지 않는 한 결혼하게 될 남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온 거야?”

사용인들의 빗질에 쥐어뜯긴 머리가 아팠다. 그렇다고 에드문트의 앞에서 아픈 부위를 주물럭댈 수는 없으니 엘리아는 애꿎은 숄만 꾹 쥐었다.

긴장한 상황에서도 엘리아는 응접실 문을 꼭 닫아 버리는 걸 잊지 않았다. 밖에서 누군가 우연히라도 대화를 주워듣는 건 절대로 원치 않았으니까.

“에드문트, 왜 찾아왔냐니까? 외젠은 황궁에 있는데. 듣자 하니 찾아오기로 선약한 일도…….”

“엘리아, 엘리.”

“……뭐?”

엘리아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설마 다짜고짜 용건이나 말하고 꺼질 줄 알았던 에드문트의 입에서 자신의 애칭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심지어, 엘리아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평소와 전혀 달랐다. 본래 에드문트의 목소리는 평범한 인사말을 해도 얼어붙은 호수처럼 서늘하지 않았던가.

들을 때마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아서, 철들고 난 후로는 그에게 말 한번 붙이지 않았는데.

‘다정하다니…… 말도 안 돼.’

절대로 에드문트와 어우러질 법한 표현이 아니었다. 한데 믿을 수 없게도 조금 전 에드문트의 목소리는 분명 다정하게 들렸다.

대체 왜?

‘어제까지만 해도 나를 흰 옷에 앉은 먼지 취급했잖아. 외젠이 식사 자리에서 몇 번이나 내 이야기를 꺼내도 한번 쳐다보는 법도 없이 내내 무시했으면서!’

이제 와 제게 관심을 보이는 에드문트의 이상 행각에, 경계심이 이는 건 당연했다. 숄을 쥔 엘리아의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내가 외젠 없는 로앙가에서는 주인인데! 쭈그러져 있을 수만은 없지. 풀 뜯어 먹고 사는 토끼도 이빨이 있다고.’

물리기 전에 먼저 콱 물어 버리고 도망가리라.

복도로 도망가서는 ‘공작님 가신단다! 빨리 배웅해 드려!’라고 외치고는 침실에 숨어 버려야지.

무모한 짓을 하려면 스스로에게 망설일 시간을 주어선 안 된다. 엘리아는 곧장 입을 열어, 풀이나 뜯는 데 쓸 법한 이를 드러냈다.

“뭐야, 당신…… 아니 에드문트. 왜 갑자기 찾아와선 징그럽게 내 어릴 때 애칭을 불러?”

“네가 좋아했잖아, 엘리.”

그러나 기껏 징그럽다는 말까지 들먹여 가며 쌀쌀맞게 밀어냈는데도 에드문트는 되레 엘리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원래 제 약혼자가 남 눈치 안 보는 인간이긴 했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뭐라는 거야. 여태 한 번도 부른 적 없었으면서 이제 와서 내가 좋아하는 애칭이니까 불러 주겠다는 거야?’

‘엘리’라는 애칭은커녕, 자신을 ‘엘리아’라고 부른 적조차 손에 꼽을 만큼 적었으면서! 이름 부른 적이 없었을 지경으로 관심이 없었으면서!

“엘리.”

맙소사.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엘리아는 혀를 깨물고 말았다.

게다가 어느새 에드문트가 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맹세코 이렇게 가까웠던 건 처음이었다.

세 걸음 앞까지 다가온 장신의 몸도, 다정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목소리와 시선을 옭아매는 눈동자까지.

평소에 비할 바 없이 가까워진 모습에 엘리아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푸른색이 살짝 감도는 짙은 색 눈동자가 엘리아를 더욱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붙잡았다.

‘말도 안 되잖아.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나 착각일 리도 없었다. 엘리아는 당황했지만, 사고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으니까. 모르는 척도 불가능했다.

다정한 목소리로 애칭을 부르고, 당장이라도 사랑을 속삭일 것처럼 시선을 맞대어 오는 모습이…….

‘사랑하는’ 약혼자를 대하는 모습이었다는 걸.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훌륭한 연인처럼 굴고 있음을,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연기, 연기하는 걸 거야.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는데, 그거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잖아. 아니라면…….’

엘리아는 에드문트가 연기에도 탁월한 재주가 있겠거니 생각하려 했다. 아니면 돌아 버렸다거나.

‘그래. 그쪽이 훨씬 더 설득력 있네. 여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살더니 기어코 돌아 버린 거지. 아, 맙소사…….’

그렇다면 큰 문제다. 지금 엘리아는 혼자서 미친 에드문트를 상대하고 있는 셈이니까!

‘미쳐 버린 에드문트라니, 나 여기 있으면 안 되겠어. 당장…… 어떻게 빠져나가지?’

한번은 물어뜯고선 도망가려던 엘리아는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당장이라도 도망가야 했다.

다리는 누가 붙잡은 듯 움직이지 않았고, 시선에 붙잡힌 눈동자는 숨이 막힐 정도라 피할 수도 없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도망쳐야 했다.

지금 눈앞의 에드문트는 완벽하게 미친 사람으로 보였으니까.

엘리아의 입장에서, 에드문트는 조금 전까지 정원에 있다가 갑자기 저택 4층으로 뛰어들어 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계단을 디뎌 1층부터 천천히 다가왔으면,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남들처럼 차근차근 단계를 밟았다면 ‘냉혈인 같더니 사람 같은 구석도 있었구나.’라며 홀랑 넘어갔을 가능성도 있고.

데이지가 매일 찬양해 마지않는 사랑이란 감정에, 엘리아도 조금씩 젖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나, 에드문트는 계단을 이용하지 않았다. 서로를 조금씩 의식하다가 천천히 알아가고 결국 사랑에 이르는 평범한 과정을 모두 생략해 버렸다.

대신 그는 1층에서 곧장 4층으로 뛰어오르는 미친 짓거리를 벌였다.

‘아니, 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2, 3층을 무시하고 1층에서 4층으로 올라오는 건 무슨 짓거리야! 애초에 불가능한 거잖아!’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으니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결국 엘리아는 약혼자를 앞에 두고선 비이성적인 공포에 빠지고 말았다. 미친놈에게서 도망쳐 다시 현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에드문트.”

하여 엘리아는 남자를 도발하기로 했다. 차라리 그가 품에서 검을 꺼내 엘리아에게 휘두르길 바라며.

“갑자기 왜, 너 설마 돌았어?”

애칭을 부르며 사랑하는 것처럼 구는 것보다 훨씬 ‘에드문트다운’ 행동을 보여 주기를 바랐기에.

“아니면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해서 복수하려는 거야? 나 너한테 잘못한 거 없고, 그러니까 미친 짓은 그만하고…… 왜 찾아왔는지나 말해 봐.”

웃으라고 한 말이 아닌데 에드문트는 마치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어 보였다. 처음이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표정도, 나지막한 웃음소리도. 전부 처음이었다. 에드문트가 저렇게 해사하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숨이, 막힐 것 같아.’

남자의 외양이 아름답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라질 줄 모르는 공포심 탓일까. 엘리아는 에드문트의 웃는 모습에 숨이 막혀 왔다.

가슴이 꽉 막혀 체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억지로 꿀떡꿀떡 삼켜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엘리, 보고 싶었어.”

아, 이번에는 심장이…….

“너는 아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해 못 하겠어. 보고 싶었다니, 우리 어제 봤잖아. 응?’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엘리아를 벽에 걸고 잊어버린 그림처럼 무시했으면서. 어째서 자기 멋대로 어제를 없었던 거로 치려는 걸까.

항변하고 싶었으나, 굳은 입에서는 가는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지 않기를 바랐다. 또 무슨 소리가 나와 저를 기겁하게 할까 싶어 두려워서, 엘리아는 남자의 눈을 향해 애원했다.

‘에드문트, 제발. 조금만 천천히. 천천히…….’

그러나 입으로 뱉지 못한 애원은 통하지 않았으니.

“네가 보고 싶었어. 너무나도.”

에드문트가 쏟아 낸 마음을, 받아 낼 수밖에 없었다.

* * *

‘내가, 보고 싶었다고?’

심장이 뛰었다. 엘리아는 영문도 모른 채 잘게 떨었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뛰는 이유가 공포 때문인지, 아니면 남자의 애절한 목소리와 눈빛 탓인지…….

사랑을 모르는 엘리아는 구분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인지 모르겠어. 내 마음인데도, 내 감정인데도 모르겠어.’

에드문트가 마구잡이로 퍼부은 감정에 그저 혼절할 것만 같았다.

에드문트는 기다렸지만, 엘리아가 진정하는 데에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차라리 엘리아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엘리.”

“어, 어?”

“네게 줄 선물을 가져왔는데.”

“뭐?”

믿기지 않는 상황에 허덕이던 엘리아에게, 에드문트는 선물을 준비했다는 말을 꺼냈다.

‘아. 에드문트가 선물을…….’

더 놀랄 기력도 없던 엘리아는 그저 에드문트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대체 에드문트가 왜 선물을 주겠다는 건지는 생각해 보려 하지도 않았다.

에드문트가 가리킨 곳을 보니, 화려한 공단으로 포장한 상자 두 개가 있었다. 솜씨 좋게 맨 리본이 가장 먼저 엘리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괜찮다면 직접 풀어 보겠어?”

엘리아는 그의 말에 또 깜짝 놀란 토끼 꼴이 되었다. 그의 어투가, 너무나도 정중했던 탓이었다.

‘괜찮다면? 지금 나한테 말한 거 맞지?’

분명 황제조차 에드문트에게 저런 대우를 받은 적 없을 텐데.

“그…… 지금 나더러 풀어 보라고? 미안한데 내가 지금 손이 모자라서…… 나중에 열어 보면 안 돼?”

도대체 무얼 선물하려는 건지 궁금했지만, 양손으로 쥔 숄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한쪽 손이라도 떼었다간 당장 푸른색 숄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거적때기처럼 보일 실내복을 가려야 한다는 사실 따위야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엘리아에게 숄은, 유일한 방패막이었다.

‘하아. 데이지 말 안 들었으면 어쩔 뻔했어. 정말 이거 없었으면, 진짜 에드문트 앞에서 가죽 벗겨진 토끼 꼴이었을 텐데.’

지금도 충분히, 엘리아는 에드문트의 눈빛에 갇힌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자신을 한입에 꿀떡 삼킬 것 같았다.

“미안해. 나중에, 나중에 꼭 열어 볼게. 그…… 내 선물이라고 했지? 하하…… 뭔지 참 궁금하네.”

엘리아는 최대한 긴장하지 않은 척을 하며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제가 들어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한데 거절을 통보받은 남자의 눈이 별안간 엘리아의 눈동자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더니…….

“에, 에드문트. 지금 뭐 하는 거야?”

에드문트가 엘리아의 앞에서 입고 있던 예복의 단추를 하나씩 푸르기 시작했다.

“잠깐만, 잠깐만! 에디! 미쳤어? 너 미쳤냐고!”

엘리아는 처음 보는 광경에 기겁해서 에드문트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불러 댔다. 자신이 그를 어릴 적 대하듯 ‘에디’라고 불렀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엘리아의 노력에도 단추를 하나씩 열어젖히는 에드문트의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조급함도 망설임도 없는, 여상한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겉옷을 벗는 평범한 행위였거늘, 행위자가 미친 걸로 의심되는 에드문트이기 때문이었을까?

에드문트는 마치 엘리아를 잡아먹기 전 몸풀기 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뭐, 뭐 하려는 건데!”

한데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를 높이면서도, 정작 엘리아는 에드문트의 행동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두려움 탓이라고 변명하기에는 염치가 없었다. 어느새 두렵다는 감정은 희미해지고 말았으니까. 아마 에드문트가 마지막 단추를 풀어 낼 때였을까.

구김 없는 흰 셔츠와 짙은 색 조끼가 완전히 드러날 때, 엘리아는 화를 내던 것도 잊고 말았다.

‘맙소사. 나까지 미쳤나 봐.’

엘리아가 겨우 정신을 차릴 때 즈음, 에드문트는 벗어 낸 겉옷을 들고 엘리아에게 다가왔다. 그의 몸이 엘리아의 위로 그림자를 만들자 엘리아가 반사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잠시나마 푸른빛을 띠던 에드문트의 눈이 짙어졌다.

“엘리, 도망가지 마.”

“도망, 도망이 아니라……. 네가 무섭게 굴잖아. 갑자기 찾아와서 안 하던 짓을 하고 있잖아.”

“피하지 말아 줘. 아무것도 하지 않아. 네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게.”

“그, 그거 뒤에 혹시 생략된 말이 있는 거 아니야? ‘지금은’이라든지 ‘오늘은’이라든지.”

겁먹어 바짝 움츠렸으면서도 꼬박꼬박 대꾸하는 모습에 에드문트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그러더니 벗은 외투를 엘리아의 어깨 위에 둘러 주었다.

손이 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겉옷에 남은 남자의 체온이 엘리아의 몸에 닿자, 마치 직접 살을 맞댄 기분이 들었다.

묘한 기분이 드는 것도 잠시, 주렁주렁 달린 장식 때문에 무거운 겉옷이 어깨를 짓눌렀다. 엘리아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으으…….”

“불편해?”

“으응. 엄청 무거워. 이런 걸 어떻게 입고 다니는 거야?”

“그래도 숄을 붙들고 있는 것보다는 네가 편할 것 같아서.”

“아, 그래서 벗은 거였어?”

에드문트가 말한 대로 그가 벗어 준 겉옷이 엘리아를 한 바퀴 두르고도 넉넉할 정도로 커서, 굳이 숄을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으음…… 잠깐만.”

옷을 건네준 에드문트가 눈치껏 한 걸음 물러났다. 그제야 엘리아는 에드문트가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었는지를 실감했다.

또한 그가 얼마나 커다랗고, 그에 반해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를 두 명 뭉쳐 놔도 에드문트보다 작을 것 같네.’

실없는 생각을 하니 긴장이 조금 풀렸다. 엘리아는 조심조심 움직여 그가 둘러 준 겉옷에 팔을 꿰었다.

커다란 옷에 파묻힌 꼴이, 아마 밀밭에 선 허수아비 같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은편에 선 남자가 자신이 벗어 준 옷에 파묻힌 엘리아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 줄은 모르고선.

“…….”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엘리아를 대하고 있었으나, 에드문트는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서른둘이었던 그가 스물두 살인 채 깨어난 게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체감상 에드문트는 고작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엘리아의 시신을 두고 절망했던 셈이었다.

“어휴. 무거워서 입기도…… 힘드네.”

영원히 돌려받지 못할 줄 알았던 여자가, 제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란.

얼마나 황홀한지. 동시에 또 얼마나 갈증이 이는지.

그토록 갈망하던 여자를 눈앞에 두고도 이성을 잃지 않다니. 실은 스스로도 어떻게 버텨 내는 중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선물 바로 열어 보라고 외투까지 빌려준 거라 이거지. 대체 뭐길래?”

엘리아는 무거운 옷 탓에 뒤뚱거리며 선물이 놓인 탁자에 다가갔다.

‘이상한 선물이기만 해 봐.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열기 전에 추측해 보려 한들 겉으로 드러난 모양으로는 정체를 가늠할 길이 없었다.

선물을 받아 본 적도 없고, 에드문트에게 무언가 바란 적도 없으니 예상 범위도 너무 광범위했으니까.

예쁜 리본에 마음속으로 작별을 고한 후, 양 끝을 잡고 죽 당겼다. 그러자, 꽃이 피듯 천이 사르르 미끄러지며 투박한 나무 상자가 나왔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잡아 열자…….

‘세상에, 이게……. 이게 뭐야?’

상자 안을 확인한 엘리아는 굳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뒤돌아선 데다가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으니, 에드문트는 기갈을 느꼈다.

엘리아를 붙잡아 자신을 향하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가까스로 삼키고, 대신 이름을 불렀다.

“엘리.”

어린 엘리아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집착을 숨기고, 다정한 약혼자 흉내를 내면서.

“혹시 선물이 네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다른 것도 준비할게. 반나절 안에 백작가로 보내 줄 수 있어.”

“……어? 뭐라고?”

“선물 말이야.”

엘리아는 선물을 바라보느라 에드문트가 한 말의 일부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뒤늦게야 그가 선물의 감상을 물었음을 깨달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예뻐서. 이런 선물 처음 받아 보는데…… 이거 오르골 맞지?”

“맞아. ‘에우리아의 춤곡’이 연주되는 오르골이야.”

“이걸, 이걸 정말 나한테 준다고? 엄청, 귀한 것 같은데…….”

엘리아는 상자 안에 든 것이 오르골이라는 확인을 받고도 믿지 못했다.

한 올 한 올 조각한 소녀의 머리칼, 바람에 나풀거리는 옷자락과 알알이 보석을 박아 표현한 꽃다발, 그리고 앞발을 든 채 폴짝 뛰어오른 강아지까지.

‘이게 오르골이면, 내가 여태 본 건 오르골이 아니었나 봐.’

값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공예품이었다.

“……고마워. 이거 주려고 온 거구나. 혹시 공작가에 들어온 선물이야?”

“네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정말로.”

확신을 담은 목소리에 엘리아는 다시 혼절할 것만 같았다. 왜 갑자기 보고 싶었냐고 물어볼까 했지만, 감당할 수 없을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아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설마 사랑일 리는 없었다.

‘사랑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남자가 선물과 함께 남기고 간 마음이, 보석처럼 반짝이다가 지저분한 재 가루만 남기고 사라져 버릴 사랑일 리가.

어제의 무관심이, 전조도 없이 사랑으로 변했을 리가 없으니까.

* * *

<보고 싶어서, 그리고 네가 좋아해 주지 않을까 싶어서 산 거야.>

에드문트는 몇 번이나 보고 싶어 왔을 뿐이라고 말한 뒤에야 저택을 떠났다.

‘정말로 그냥 선물만 주고 가 버렸어. 파혼서나 던져 주고 가 버릴 줄 알았는데.’

무심하던 어제의 남자를 바꾼 건 대체 뭐였을까.

엘리아는 약혼자가 준 겉옷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응접실에 서 있었다.

그 와중에 백작가 사용인들은 공작이 떠난 응접실에 찾아와선 엘리아가 입은 남성용 예복, 그리고 아름다운 오르골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사랑이야, 어쩜 좋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얼음 같다던 공작님께서 우리 아가씨한테 푹 빠질 줄이야!”

왜,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거야?

“제가 뭐랬어요. 아가씨의 사랑이 찾아왔다고 말했잖아요.”

데이지. 너 어제 공작이 내게 어떻게 굴었는지 들었잖아. 근데 어떻게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어?

사랑이 원래 그래? 예고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짓이나 벌이는 게 사랑이었던 거야?

“이럴 게 아니라, 당장 내일 아가씨 입으실 옷이랑…….”

“……다들 일 없어? 여기 몰려 있지 말고 얼른 가, 얼른!”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엘리아가 사용인들을 훌훌 내쫓아 버렸다. 하인들은 부끄러운 게 분명한 아가씨를 위해 선뜻 응접실을 비워 주었다.

그러나 데이지는 곧장 나가 버리는 대신 엘리아를 불렀다.

“아가씨.”

“……왜.”

“그 옷 계속 입고 있으실…….”

“악! 아니야, 아니라고!”

엘리아는 몸에 붙은 벌레를 떼어 내듯 에드문트의 옷을 벗어 던졌다. 하마터면 이 무거운 걸 내내 껴입고 있을 뻔했다.

“…….”

“데이지, 아무 말도 하지 마.”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데이지는 엘리아의 협박에 입을 다물어 주는 대신 의미심장한 눈빛을 남기고 떠났다.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에 엘리아는 미칠 지경이었다.

‘나만, 나만 모르는 거야? 에드문트가 대체 왜 갑자기 저러는지, 나만 이해가 안 되는 거야?’

* * *

엘리아의 열여덟 삶에, 사랑을 확인한 에드문트가 억지로 태엽을 돌려 감았다.

오르골 위의 어여쁜 인형이, 에드문트의 손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자는 태엽이 멈출 때까지 춤을 추어야겠지. 남자의 손바닥 위에 있는 줄도 모르고.

어쩔 수 없다. 여자가 모르는 이야기를,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돌아왔으니까.

당분간은 여자가 휩쓸리고, 속아 넘어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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