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모르는 이야기 1
1. 이야기의 시작
엘리아 로앙. 열아홉 성년을 앞둔 로앙 백작가의 귀족 아가씨.
재미없는 학술원은 진작 졸업하고, 남들처럼 졸업장 들고 황실 일자리를 찾아 기웃거릴 의지는 바람에 펄펄 날려 보냈으니.
“흐아암.”
하는 일이라곤 뒹굴뒹굴하고, 뒹굴뒹굴하고, 뒹굴뒹굴하는 게 전부인 인생.
하나뿐인 오빠 로앙 백작은 오늘도 새벽부터 황궁에 갔고, 저택의 사용인들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한창 분주한 시간.
4층의 아늑한 침실에서 막 잠을 깬 엘리아는 일어날 생각도 않고 하품만 했다.
“아가씨, 이제 다 주무셨지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의 아가씨를 챙기는 건 엘리아를 어릴 때부터 키워 준 사용인 데이지뿐.
데이지는 아직 잠이 덜 깬 엘리아에게 세숫물을 가져다주며 늦은 하루의 시작을 도왔다.
“아가씨, 어제 공작가에 가셨던 이야기 정말 안 해 주실 거예요?”
물기가 남은 얼굴을 들기가 무섭게 데이지가 수건을 건네며 어제 일을 캐물었다.
“하아. 대체 그걸 왜 매번 물어보는 거야?”
“그야, 모처럼 약혼자분 만나러 간다고 하셔서 저희가 있는 힘껏 꾸며 드렸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보고 평가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 내가 기뻐하기만 하면 그만 아니야?”
“제삼자의 이야기도 가끔은 듣고 싶은걸요. 비판은 겸허하게, 칭찬은 수줍게 받아들여 더 나은 다음을 준비해야죠.”
“어휴. 내가 말로 너를 어떻게 이겨.”
사실 엘리아에게 어제 일이란 그다지 떠올리고 싶은 기억이 아니었다. 어제는 일찍 귀가한 오빠, 외젠의 고집 때문에 억지로 공작가에 다녀와야 했으니까.
그 때문에 엘리아는 어제 계획했던 일정을 모조리 취소해야만 하지 않았던가.
물론 일정이라고 함은 아껴 둔 책이나 읽으며 뒹굴뒹굴하는 게 전부였다만.
한데 제 일상을 망친 외출이 데이지에게는 지루한 일상에 내려온 한 줄기 빛처럼, 마른 정원을 적시는 가랑비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데이지, 대체 몇 번이나 같은 대답을 해 줘야 포기할 거야? 아무것도 없었어. 네가 골라 준 치렁치렁한 옷 입고, 그…… 무슨 구두였지?”
“‘세르지앙’의 남부식 구두요.”
“그래. 세르지앙인지 뭔지 하는 구두를 신고 공작가에 갔지. 당연히 환영 인사 따위 없었고, 차나 홀짝이며 아무도 관심 안 가지는 외젠의 수다를 듣는 척해야 했다고.”
엘리아는 어제 마신 공작가의 차가 아직도 입 안을 굴러다니는 기분에 얼굴을 찌푸렸다.
“게다가 저녁으로 또 뭐 나온 줄 알아?”
“설마요.”
“설마는 무슨. 또 지긋지긋한 오리가 나왔어. 공작가 주방장이 오리랑 원수졌나 봐. 아니면 나랑 오리를 원수지간 만들려는 건가?”
“으음…….”
“아! 하나 다른 거 있었는데…….”
엘리아는 기대 가득한 데이지의 눈을 보며 일부러 뜸을 들였다.
“후식으로 동부에서 새로 들여왔다는 시커먼 차를 주더라. 소화에 좋다나? 그거 마신 다음에 마차 타고 집에 왔어. 끝.”
“……정말요? 그게 끝이었어요?”
“뭘 기대했어. 공작이 내 꼴 보고 아름답다니, 못 보던 옷이니 하며 말이라도 걸었을 것 같아?”
“그렇지만, 아가씨 진짜 예뻤는걸요?”
갑작스러운 외출 소식에도 사용인들이 죽을힘을 다한 덕에, 엘리아는 제법 괜찮은 차림으로 공작가에 갈 수 있었다.
“백금발에 향유도 안 발랐는데 바른 것처럼 찰랑거렸고요.”
“안 발랐어? 몰랐네.”
“외출복도요. 작년에는 커서 못 입었는데 어제는 딱 맞아서 정말 잘 어울리셨어요.”
데이지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엘리아가 얼마나 예뻤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데이지의 유난스러운 칭찬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래. 물론 네 덕에 내가 어제 좀 예뻤는데, 공작에게는 아무 소용 없다니까? 요새 사교계를 휘젓고 다니는 푸아티에가 막내딸이 들이대도 안 먹힐 텐데.”
“아가씨도 예뻐요! 아니, 아가씨가 더 예쁘죠!”
“데이지, 너 푸아티에가 막내딸 본 적 없잖아.”
귀족 아가씨께서 제 입으로 지껄이기엔 참으로 비통한 이야기였으나, 엘리아는 망설임 없이 데이지에게 현실을 알려 주었다.
에드문트 라스페. 라스페 공작가의 가주이며, 차차기쯤 제국의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남자.
모두가 흠모하는 공작님께서는 엘리아의 약혼자였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엘리아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다고 말이다.
‘뭐 어때. 관심 없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인데.’
엘리아도 어릴 때부터 공작에게 관심 한 톨 없었다. 한마디로 남보다도 못한 사이인걸?
물론 오빠 외젠 앞에서 이런 말을 하면 펄쩍 뛰겠지만.
사실 이미 몇 번이나 이야기했고.
<남보다 못한 사이라니? 라스페 공작이 우리 남매를 챙겨 주지 않았으면 로앙 백작가가 어떻게 되었겠어? 너랑 나랑 길바닥에 나앉아야 했을 거라고!>
외젠의 잔소리는 늘 짧게 끝나질 않고, 라스페 공작의 찬양으로까지 이어지곤 했다.
<그렇게나 에드문트가 좋으면 나 대신 결혼하는 건 어때?>
엘리아는 그의 공작 찬양이 지긋지긋한 나머지 안 해도 될 말로 말싸움을 벌이곤 했고.
“데이지, 여하튼 이제 포기해. 아마 내가 공작가에 파혼서를 보낸다든가…… 아니지. 파혼서 보내 봤자 그런가 보다 하고 말걸? 적어도 내가 계단에서 굴러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 한, 저택에 찾아오거나 하는 일도…….”
“아가씨이!”
“어휴. 데이지, 오늘 진짜 목소리 크다. 아침 뭐 먹었어? 나도 좀 같이 먹자.”
죽는단 소리에 기겁한 데이지가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불의의 사건으로 엘리아의 부모님인 로앙 백작 부부가 사망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이곳 사용인들은 늘 엘리아의 앞에서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엘리아가 농담이랍시고 죽느니 하는 소리를 하는 것마저도 기겁했고.
엘리아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부러 죽음을 하찮게 취급한다는 걸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가씨, 결국 라스페 공작님께선 아가씨랑 결혼하시게 될 거잖아요? 지금이야 워낙 바쁘셔서 사랑에 관심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는 아가씨한테 푹 빠질 거라고요.”
“으으. 데이지, 거기 담요 좀 줘 봐. 나 갑자기 막 여기 소름 돋았어. 어디서 말도 안 되게 찬 바람 부나 봐.”
“부끄러워하시긴!”
“내가 사랑 타령 듣고 부끄러워하는 걸 알면 좀 자제해 줄래?”
“이제 곧 성년이신데 아직도 사랑이 부끄러우시면 어떻게 해요.”
겨우 일곱 살 많은 데이지가 엘리아를 한참 어린애 취급했다.
고작 사랑 이야기에 열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랑 따위, 알 게 뭐람.’
그게 얼마나 대단하든 간에 마차 사고 한 번이면 콱 죽어 버리고 말 건데. 죽으면 사라질 텐데.
“데이지, 나 다 씻었으니까 이제 가서 네 사랑이나 찾아.”
“아침 드셔야지요.”
“귀찮아. 서재에서 책이나 읽을 테니까 네 사랑 찾거든 불러.”
“안 돼요, 아가씨! 어떻게 그 꼴, 아니 그 차림으로 나가시려고요. 이거라도 좀 걸치고 다니세요.”
“왜. 나 얼어 죽을까 봐?”
“방문객들이 아가씨 보고선 백작가 사용인들은 수준이 형편없어서 귀한 분들 챙기지도 않는다고 흉보면 어째요?”
“음. 내 건강이 아니라 네 위신을 들먹이면서 나를 강제하려 들다니. 참 괜찮은 설득이었어.”
“그럼 이거 두르세요. 어휴. 역시 푸른색이 잘 어울리신다니까. 백작가 문양이 이런 청아한 푸른색이었으면 아가씨한테 자주 입혀 드릴 수 있었을 텐데.”
데이지는 끝끝내 엘리아에게 숄을 둘러 주고서야 사용한 수건과 세숫물을 챙겨 나갔다.
‘하여간 유난은. 방문객이라 해 봤자 늘 보던 사람들이고, 4층에는 오지도 않을 텐데. 그리고 누가 좀 보면 어때서…….’
엘리아는 어린애 같은 반항심으로 거울을 살펴봤다.
흰옷은 구겨 놓은 종이처럼 엉망이었고, 자는 사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가슴팍의 단추는 죽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이파리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그래. 갈아입으라고 성화 부리지 않은 게 어디야. 데이지는 참 나를 잘 안다니까.’
살짝 죄책감을 느낀 엘리아는 데이지가 준 푸른빛 숄을 단단히 둘러 입고 침실을 나섰다.
오늘도 무료하고 평화로운 하루가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며.
* * *
“후우…….”
서재 바닥을 뒹굴던 엘리아가 읽던 책을 덮으며 한숨을 흘렸다.
‘왜 이렇게 안 읽히지? 이러다가 아껴 둔 열세 권 중에 겨우 한 권 건지게 생겼네.’
평소보다 글이 안 읽히길래 엘리아는 날씨 탓을 해 보려고 했다. 일어났을 때부터 몸이 찌뿌둥했으니, 날이 흐린 탓일까 싶어서.
한데 창문 밖을 보니 잠시 서늘하던 아침과는 달리 화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날씨 탓도 아니고, 오늘은 그냥 독서하는 날이 아닌가.’
이럴 때는 차라리 차나 한잔 마시고 엎어져 낮잠이나 자는 편이 나으리라.
“아가씨! 엘리아 아가씨!”
엘리아가 대충 제가 어지른 흔적을 정리할 때였다. 밖에서 누군가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언뜻 잘못 들으면 불이 났다는 말로 착각할 정도로 다급했다.
“아가씨 여기! 여기 계신다!”
엘리아가 아직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저택 사용인들이 서재 문을 벌컥 열고 찾아와선 자기들끼리 호들갑을 떨었다.
영문 모를 상황에 엘리아가 책을 쥔 채로 눈을 끔뻑거렸다.
“아가씨! 어떻게 해요! 어째요!”
“일단 책, 책 주세요! 아니 머리 대체 무슨 일이세요?”
“누구 빗 없어? 어쩜 좋아.”
몰려 들어온 하인 다섯이 아침보다도 엉망이 된 엘리아의 꼴을 보며 세상 무너진 듯 절망했다. 평소에는 얌전한 하인들의 낯선 모습에 엘리아까지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아니, 누가 말 좀 해 봐. 무슨 일인데?”
그때, 데이지가 서재에 들이닥치더니 활짝 열려 있던 문을 부서져라 닫았다.
“다들 문 열고 소리 지르면 어떻게 해, 밖에 다 들렸단 말이야!”
엘리아는 그나마 말이 통할 상대가 왔나 싶어 안도했지만, 사실 데이지의 상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가씨! 얼른 나가셔야 해요. 옷은, 세상에. 숄이라도 빨리 두르시고…… 잠깐만 좀 참으세요. 빗질하면 괜찮아질 거예요.”
“데이지, 무슨 일인데! 그리고 내가 네 사랑 찾은 거 아니면 나 찾아오지 말라고…… 으윽.”
엘리아의 질문은 빗을 든 하인들의 손길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들은 앞, 뒤, 옆으로 각자 자리를 잡고선 엘리아의 머리칼에 사정없이 빗을 휘둘렀다.
마지막으로 데이지가 침실에서 급히 챙겨 온 화장품을 엘리아의 입술에 얹어 주었다.
“잠깐, 그건 또 뭔데? 지금 이게 다 뭐야?”
“아가씨, 시간 없어요. 이제 올라오셨을 거란 말이에요. 그분께서 오셨다고요!”
이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데이지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엘리아는 불길한 감각에 휩싸였다.
늘 차분한 데이지가 유일하게 간식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구는 때가 있었는데, 그건…….
“아가씨의 사랑이 찾아오셨다고요.”
저 빌어먹을 사랑 타령할 때, 그때뿐인데.
* * *
사용인들의 노력으로 엘리아의 머리가 거지꼴을 면하는 데 성공하자, 다시 차분해진 그들이 푸른색 숄을 둘러 주었다.
“아가씨, 지금 입으신 실내복요.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빨래 통에 한 달 동안 처박혀 있던 걸 급하게 뒤집어 입은 것 같아요.”
데이지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바닥에서 제대로 뒹군 탓에, 새하얀 실내복은 아침보다 더 엉망진창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귀찮다고 숄 내던지시면 안 돼요. 아셨죠?”
데이지의 신신당부에 엘리아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곤 숄을 한 번 더 추슬러 잡았다.
“저기, 역시 그거 아닐까? 아무리 에드문트라고 해도 파혼서는 직접 주고 싶었던 거지.”
“절대로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아가씨가 직접 공작님 표정을 보셨어야 했는데!”
“표정? 에드문트가 무슨 표정을 지었다고?”
“가서 직접 확인해 보세요. 자, 얼른요.”
“데이지.”
“예, 아가씨.”
“같이 가 주면 안 될까?”
“……응접실까지 같이 가 드릴게요.”
“고마워. 나 진짜 만나기 싫단 말이야. 대체 왜 찾아왔는지도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사랑이 찾아왔다는 황당한 소리와 함께 데이지가 전한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공작님께서 분명히 아가씨께 용무가 있어 찾아오신 거라고 하셨는걸요?>
공작이 ‘약혼자’를 만나고 싶어서 약속도 없이 찾아왔다니.
1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기대한 적도 없었고!
‘누가 나 놀리려고 거짓말하는 거 아냐?’
엘리아와 라스페 공작의 약혼은 온 제국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다 쓰러져 가는 백작가와 제국 제일의 가문 간의 혼사였으니, 다들 낭만적이니 하는 소리로 퍼뜨리길 주저치 않았다.
한데, 낭만이라는 치장을 걷어 내고 나면 남는 게 무엇이던가. 서로에게 감정이 한 톨도 없는 정략혼뿐이었다.
‘외젠이 여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에드문트가 여자였거나 여동생이라도 있었으면…….’
공작에게는 누이가 없고, 로앙가에는 엘리아가 유일한 여자인 탓에 두 사람의 약혼은 필연과도 같았다. 심지어 나이도 얼추 비슷했으니, 모두 로앙가에 천운이라고 여겼다.
하나 적어도 열여덟 엘리아에겐 비극이었다. 엘리아는 공작을 사랑하는 자신을, 공작에게 사랑받는 자신을 상상해 본 적도 없었으니까.
“아가씨, 잘하고 오세요!”
딱 응접실 앞까지만 같이 와 준 데이지가 엘리아의 행운을 빌어 주었다. 엘리아는 졸지에 시험을 치르러 가는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에드문트는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하여간 공작이 문제였다.
에드문트가 아니었다면 어제 공작가에 끌려가지 않았을 테고, 그럼 오늘처럼 귀한 책을 심드렁하게 보는 일도 없었을 거고, 불편한 심경으로 응접실 문을 붙잡고 있지도 않았을 텐데!
‘……그래 뭐, 설마 잡아먹겠어? 그만한 관심도 없을 텐데.’
엘리아는 눈을 질끈 감고선 응접실 문을 열어젖혔다. 방 안을 메우던 차 향기, 그리고 낯설면서도 익숙한 남자의 존재감이 엘리아를 맞이했다.
이후, 엘리아는 몇 번이나 이날을 다시 떠올려야 했다.
‘대체 그날, 공작은 왜 그랬던 걸까?’라는 의문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