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에리카의 호위 기사(3)
에리카는 제 뒤에서 저벅저벅 걷는 헤난타의 걸음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일인데 오늘에야 그의 걸음이 들리다니. 그만큼 그녀의 감정이 예민해져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연회장에 도착하자 시종장이 외쳤다.
“제국의 후계자 드십니다!”
연회장에 들어서니 이미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지고한 황좌에 앉아 그녀를 반겼고 아버지는 그 옆자리에 남동생은 그 옆에 앉아있었다. 어머니의 비어있는 옆자리를 찾아가 앉자 연회가 시작되었고 그 후엔 일사천리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연회의 시작을 여는 춤을 춘 후, 에리카에게 맡긴다며 연회장을 떠났고 에시르는 제게 춤을 권하는 한 영애를 따라 홀로 나가더니 그대로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료한 나머지 주위를 둘러보던 찰나, 어떤 영애와 눈이 마주쳤다. 생김이 익숙하여 유심히 보았는데 그 영애였다. 헤난타의 옆자리에 앉고 싶다 청혼서를 보낸 여인 중 하나.
“제국의 후계를 뵙습니다.”
나비처럼 사뿐히 다가와 인사하더니 그녀의 뒤를 흘끔거렸다.
“무슨 일인가.”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신 헤난타 경께 춤을 청하고자 왔습니다.”
에리카의 시선이 뒤에 있는 헤난타에게 향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서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에리카가 가장 싫어하는 헤난타의 얼굴 중 하나였다.
“아, 내가 무심하였군. 다녀오게 경.”
그녀의 말에 앞으로 나서서 영애를 에스코트하는 헤난타의 얼굴이 빛났다. 그녀가 사랑하는 금발이 그의 허리 부근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회장 한가운데서 춤을 추는 영애와 헤난타를 향한 에리카의 시선이 움직이지 않았다.
앞으로 황제가 될 것이 분명한 에리카의 뒤를 지키는 헤난타는 이대로 간다면 근위대장의 직분에 오를 예정이었다. 그 자리는 황제의 곁을 지키는 자리였으며 성공이 보장된 자리였다.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영애들은 눈에 불을 켜고 헤난타를 차지하려 했다. 한 영애와의 춤이 끝나자 다음 영애가 그에게 춤을 신청했고 헤난타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녀의 곁에 돌아오지 못했다.
에리카의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좁아든 미간은 그녀의 심기가 불편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본래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무슨 일이냐면서 다가와 묻는 헤난타가 있었는데 그는 저 아래서 다른 영애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지나가던 시녀를 불러 술을 한잔 마셨다. 한잔 넘어간 술은 두 잔이 되었고 종래엔 셀 수 없었다. 그녀의 곁에 잔이 쌓이자 에시르가 다가와서 그녀를 말렸다.
“너무 많이 드셨습니다. 누님.”
“술기운이야 마력으로 날려 버리면 그만인 것을.”
실제로 그러했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그녀의 정신은 또렷해졌다. 헤난타의 금빛 머리카락이 그녀의 눈에서 반짝였다. 연회장의 빛에 반사된 그 머리카락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홀린 듯이 헤난타의 뒤를 쫓는 시선을 확인한 에시르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누님.”
“왜 부르느냐.”
“호위 기사는 안 됩니다.”
“뭐가 말이지?”
“누님의 옆자리에 앉을 사람으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에시르의 말에 에리카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느릿하게 돌아간 시선에 에시르는 흠칫했지만 제 의견을 고집했다.
“그는 누님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황실의 충복 아닙니까, 그러니…….”
“에시르 라르헨.”
“저자가 누님을 홀린 것입니다. 누님과 어울리지 않아요!”
에리카의 나지막한 부름에도 에시르는 말을 뱉었다.
“홀렸다, 라.”
“얼굴만 번듯한 자가 제국의 후계를 홀리고 우롱하였으니 벌을 내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겁니다.”
무엇이 그리 분한지 분노에 찬 얼굴로 말하는 에시르에게 에리카가 손짓했다. 그녀의 손짓을 알아챈 그가 몸을 가까이 대자 에리카가 몸을 숙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동생아, 그것은 내가 결정할 일이란다.”
“누님!”
“네가 아닌, 내가.”
에시르의 말을 듣자 확실해졌다. 가슴 부근이 불편했던 이유가. 저 아래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헤난타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 한 자락이었지만 분명 그에게 내준 것이 틀림없었다.
“가 보거라.”
때아닌 동생과의 설전에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된 것이 느껴졌다. 희미하게 웃으며 에시르에게 축객령을 내리자 살짝 입술을 깨문 그가 그녀에게 인사하고 물러났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에리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으로 보아 저를 주시하고 있던 헤난타가 따라오는 것이 분명했다.
“전하.”
아니나 다를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왜 연회를 더 즐기지 않고.”
“무슨 일이십니까.”
난간에 기대자 시원한 바람이 에리카의 머리칼을 흩트렸다. 갑갑함을 훑어 주는 듯한 그 시원함을 느끼며 시선을 두지 않고 묻자 헤난타가 망토를 풀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전혀 춥지 않았지만 그의 호의를 받아들인 에리카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헤난타.”
“네, 전하.”
“결혼을 원하느냐.”
“제 뜻은 전하의 뜻과 같습니다.”
충성스러운 신하의 답은 언제나 같았다. 그의 마음을 가늠할 길이 없었다. 무릎 꿇은 그를 바라보던 에리카가 헤난타를 향해 말했다.
“하지 말라.”
“네?”
“내가 원하지 않으니 하지 말라.”
잠시 말이 없는 헤난타의 표정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진의가 뭔지 가늠하는 듯한 그 얼굴에 에리카가 그에게 손짓했다. 일어선 그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내가 싫다. 그러니 하지 말라.”
“전하.”
장난스럽게 말하는 에리카를 바라보며 무너진 헤난타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안고 있는 듯한 그 표정에 에리카의 마음이 흔들렸다. 본디 그에게 결혼하지 말라 이르고 시간을 두려고 했는데 말해야 하나. 에리카의 입술이 달싹이려는 순간 헤난타가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다.
“제게 이러지 마십시오.”
“뭐?”
“저는 전하의 충복이요 신실한 신하이나, 이것만은 못하겠습니다.”
“못하겠다?”
“전하가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겠으나 결혼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헤난타의 말에 에리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저는, 당신의 신하인 제가…….”
“말하지 말라.”
에리카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헤난타의 얼굴과 언제나 그녀를 쫓던 그의 두 눈동자. 그 안에 담긴 열기 그리고 미소. 그녀를 향해 온기를 품은 그 시선을 기억해 낸 에리카가 그에게 눈을 돌렸다.
그녀의 호위 기사는 불안을 품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얕게 깨무는 것으로 보아 말을 꺼낸 것을 후회하는 듯했다. 잠시 제 위치를 내려놓은 그녀가 헤난타를 향해 물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가?”
“전하.”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냐고 물었다. 답하라.”
심장 부근에 손을 댄 그가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충성스러운 기사가 감히 주군을 마음에 품었으니 벌을 주십시오.”
“벌을 달라?”
“그러합니다. 전하.”
헤난타의 말에 황당함이 밀려들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저와 같은 마음인 듯한데 저런 태도라니. 어찌하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 저 충성스러운 기사가 그녀에게 품은 마음에 답할 수 있을까. 잠시 그의 금빛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에리카가 물었다.
“설마 그대, 그 이유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은 것인가?”
돌아오는 답은 없었지만 곤란한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아주 머나먼 기억이었다. 그녀와 그가 아직은 어렸을 적의 기억. 언제부터인가 머리카락을 기르는 헤난타에게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그가 그녀에게 답했다.
[마음에 품은 분이 제 머리카락을 좋아하십니다.]
그때는 웃으며 넘어갔던 그 기억을 끄집어낸 에리카가 허탈하게 웃었다.
“하!”
이런 발칙한 자를 보았나. 대체 몇 년을 내 곁에서 그 마음을 숨기며 지냈단 말인가. 충직한 신하인 그의 모습을 알고 있던 에리카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랬군, 그랬던 거였어.”
에리카의 혼잣말에 헤난타는 눈을 감았다.
‘이제 나를 버리실 일만 남았구나.’
감히 이 나라의 후계를 향해 음심을 품은 자를 계속 곁에 두시진 않을 테니까.
“고개를 들라.”
주군의 부름에 헤난타는 거부하지 못하고 숙었던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제 앞에 성큼 다가온 에리카가 헤난타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이 제 얼굴에 닿자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감출 길이 없었다.
“심장이 뛰는군.”
“전하.”
“기다려라.”
이실리스를 닮은 군청색 눈동자가 그를 사로잡았다. 눈과 눈이 마주한 찰나, 헤난타는 그의 입술을 훑고 지나가는 부드러운 것에 당황했다. 꾹 다물린 그의 입술이 열리지 않자 그녀가 명했다.
“입술을 열라, 그대.”
“전하.”
“열라 하였다.”
에리카가 헤난타의 저절로 벌어지는 입술을 집어삼켰다. 열기와 열기가 서로 얽혔지만 솟구치는 갈증을 해소하긴 어려웠다. 제가 물고 빨아 붉어진 헤난타의 입술을 살짝 혀로 훑고 떨어진 에리카가 입을 열었다.
“아직은 국부의 자리를 약속할 수 없다.”
“괜찮습니다.”
“수많은 귀족이 너를 반대할 거다. 어쩌면 폐하와 국부 그리고 내 동생도.”
“괜찮습니다.”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내 마음 한 자락뿐이다. 그래도 괜찮느냐.”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일어나라, 내가 너를 허한다.”
에리카의 말에 일어선 헤난타는 그녀의 뒤에 시립했다.
“너는 나의 마음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 될 것이니.”
그녀의 말에 헤난타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두 사람의 은밀한 말을 축복이라도 하듯 둘의 머리 위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