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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9화. 에리카의 호위 기사(2) (160/161)

외전 9화. 에리카의 호위 기사(2)

순간적으로 무너지는 표정을 다잡을 수 없었다. 에리카가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헤난타는 표정을 관리할 수 없었다.

“왜 그러느냐.”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착잡한 그의 표정에 에리카의 가슴이 따끔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에리카는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헤난타는 그의 기분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지고한 하늘이자 주군이었으니, 감히 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 * *

라르헨의 차기 후계자가 호위 기사를 위해 중매에 나섰다는 소문이 귀족들 사이에 무성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돌고 돌아 이실리스에게까지 닿았다.

“중매라니. 라르헨의 후계자가!”

이실리스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베르타스가 옆에서 그녀를 다독였다.

“그 호위 기사와 결혼하겠다고 나서는 것보다 나은 듯한데.”

“차라리 그게 낫지!”

“무슨 소리를!”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반대했다.

“그게 낫지. 라르헨의 황가에선 후계의 반려는 후계가 원하는 자로 한다. 그것이 철칙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릴!”

이실리스가 베르타스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요즘 들어 에시르가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했더니…… 그대가 바람을 넣은 것이었나?”

“아니, 그럴 리가.”

이실리스의 말을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베르타스가 그녀를 향해 웃었다. 그 의뭉스러운 웃음을 마주한 이실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베르타스. 에시르는 욕심이 많은 아이야.”

“그건 나도 알아.”

“라르헨의 황족과는 조금 다르지. 그래, 그 아이는 나보다 그대를 더 닮았어.”

“당연한 말을. 내가 그 아이의 아버지인데 당연히 닮아야지.”

“그런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나.”

이실리스가 걱정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에시르가 가진 욕심이 에리카를 다치게 할까 두려운 것이겠지. 그러나 그녀가 모르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황위에 대한 욕심을 가진 에시르지만 그만큼 에리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에리카가 그를 싫어하는 것이 두려워 황위에 욕심이 없는 척하는 아들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나는 아이들이 피를 흘릴까 두려워.”

“누가 보면 아직도 어린 애인 줄 알겠어. 이실리스.”

“아니었나?”

“아이들이 들으면 싫어할 거야.”

“언제까지 품 안의 자식이었으면 했는데.”

“믿어줘. 우리 아이들을.”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이실리스의 어깨를 다정하게 쓸어넘긴 그가 눈을 빛냈다. 조만간 헤난타를 만나볼 필요가 있었다. 이실리스 또한 눈을 빛냈다. 에리카를 만나 그 의도를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 * *

“폐하를 뵙습니다.”

“되었다.”

에리카를 정원으로 부른 이실리스가 그녀의 뒤에 선 헤난타를 바라보았다. 제 호위 기사에 닿는 시선에 에리카가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호위 기사의 짝을 찾아주려 한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어느새 폐하에게까지 소문이 흘러 들어갔을 줄은 몰랐군요.”

“이 라르헨에 내가 모르는 것은 없지. 더구나 황족의 일을.”

이실리스는 에리카의 의도를 가늠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알고 있는 딸은 분명 저 호위 기사에게 마음이 있었다. 이대로 가면 자연스럽게 짝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이라니.

이실리스는 헤난타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었다. 처음엔 분란을 가져올 수도 있는 그의 존재가 달갑지는 않았지만 라르헨의 위치는 지금의 칼리파 제국이 노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헤난타를 받아들였다.

우스만 칼리파는 아직까지 그의 위치를 인정하지 않는 반란 분자 때문에 속을 썩고 있었다. 이 나라에 있는 헤난타를 그에게 넘긴다면 칼리파 제국의 문제가 단숨에 해결되지만 이실리스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국내가 안정되면 국외로 눈을 돌리는 것이 사막인의 특성이었으니까. 그들이 눈 돌릴 곳은 바로 라르헨. 이 풍요로운 제국이었다.

“헤난타.”

이실리스의 부름에 헤난타가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에리카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이실리스와 헤난타를 바라보았다.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할 정도로 빠져있으면서 중매는 무슨.’

살짝 미소지은 이실리스가 그에게 말했다.

“짝을 찾는다 들었다.”

“그러합니다.”

“그것은 너의 의지냐?”

“……. 전하의 의지가 저의 의지입니다.”

헤난타의 말에 이실리스가 에리카에게 시선을 던졌다.

“에리카.”

“네, 폐하.”

“원하지 않는 일을 강요하는 것은 라르헨의 황족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그것은…….”

“그러나 네가 원한다면 내가 연회를 열어주마.”

“네?”

에리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이실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의 짝을 찾는 연회를 열어주겠다. 성대하게.”

“폐하, 그것은…….”

“가보거라.”

더는 듣지 않겠다는 이실리스의 태도에 헤난타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에리카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찻잔을 내려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에리카를 바라보던 이실리스가 다시 축객령을 내렸다.

“가보아라.”

“……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에리카와 헤난타에게 폭탄을 던진 이실리스가 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 미소를 뒤로 한 채 에리카와 헤난타는 황제궁을 빠져나갔다.

“폐하께서 왜 저러시는지 아나?”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에리카가 헤난타에게 물었다.

“전하께서 모르는 일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의 대답에 에리카는 고민에 빠졌다. 그녀의 나이 스물. 헤난타의 나이 스물넷. 둘 다 혼인 적령기를 놓쳤다. 에리카야 황족이니 상관없었지만 헤난타가 걱정이었다. 그래서 짝을 찾아주고자 한 것인데 올라오는 영애들의 이름과 신상명세를 살펴봐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가장 좋은 것은 헤난타에게 묻는 것이었지만 그는 그럴 때마다 곤란한 눈빛으로 대답을 피했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볼 때마다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시큰했다. 처음엔 병이 있나 싶어 황의를 찾았지만, 지극히 정상이라는 소리를 듣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연회라.”

오랜만의 연회였다. 이실리스의 말대로 연회가 열린다면 신년회 이후 치장에 굶주려 있던 영애들을 위한 큰 축제가 될 것이 뻔했다.

에리카는 알지 못했지만 헤난타는 귀족 영애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라르헨에서 황족은 가장 시선을 끄는 사람들인데 그들을 지척에서 지키는 호위 기사 또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특히, 헤난타는 모든 여성에게 친절한 것으로 유명했다.

으슥한 곳에서 추행당할 뻔한 영애를 구해준 일로 그의 명성은 더욱 드높아졌다. 황자인 에시르를 보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기에 자연히 관심은 헤난타에게 쏠렸다. 그런 그를 위해 황제가 연회를 연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제국의 보석상과 의상실은 밀려드는 영애들로 인해 때아닌 호황을 이루었다.

* * *

연회 당일. 황궁은 몰려드는 귀족들을 맞이하느라 분주했는데 유독 조용한 곳이 있었다. 바로 에리카의 궁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무엇이 말입니까, 전하?”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에리카를 치장하던 시녀가 물었다. 황족의 혼잣말은 듣고도 모른 척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오랜만의 연회에 들뜬 시녀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에리카의 서늘한 시선이 그녀를 향하자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되었다.”

밖에서 호위를 서고 있을 헤난타에게 생각이 닿자 나온 말이었다. 요즘 에리카는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했다. 그가 다른 영애들에게 웃어주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는 호위 기사를 빼앗길 것 같아 두려워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쓸데없는 생각이 깊어지는 듯해 뻗어나가는 생각을 멈추었다. 

에리카가 안에서 치장을 받으며 고심하는 그 순간, 헤난타는 밖에서 베르타스와 마주하고 있었다.

“에리카는 안에 있나?”

“그렇습니다.”

“헤난타.”

“네, 국부.”

갑자기 저를 부르는 베르타스를 향해 헤난타가 대답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접어라.”

제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듯 말하는 그에게 헤난타는 다른 답을 할 수 없었다.

“꿈꿔 본 적 없습니다.”

“그렇다면 되었다.”

베르타스의 말이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헤집었지만, 그는 헤난타의 은인이었다. 베르타스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런 것을 누리며 살 수 없었다. 길거리를 떠돌던 소년이 황궁에 들어와 한 나라의 후계자를 지척에서 모시는 호위 기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다 베르타스 덕분이었다.

헤난타는 그 은혜를 잊지 않았다. 감히 은인의 딸을 탐하는 배은망덕한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두워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베르타스는 에리카의 방에 들어서지 않고 황제궁으로 몸을 돌렸다. 에리카가 방에서 나올 때까지 헤난타의 어둡고 서늘한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가지.”

“모시겠습니다.”

에리카가 나와 그에게 말하자 그제야 입가에 미미한 웃음을 만들었다. 이제 제 주군이 원하는 대로 제 옆에 설 사람을 찾으러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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