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에리카의 호위 기사(1)
에리카가 세상을 인지하게 된 그 순간부터 그녀는 마력과 함께 했다. 그녀는 이 라르헨 제국의 황제인 이실리스 라르헨의 딸이었으며 힐렌튼 제국의 마지막 황족인 베르타스 라르헨의 딸이자 이 제국을 이어받을 황태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한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녀의 곁에서 늘 자리를 지키던 호위 기사가 문제였다.
이름은 헤난타. 성은 없었으며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와 함께 성에 들어와 기사 교육을 받더니 날고뛴다는 다른 기사들을 누르고 가장 어린 나이에 황성의 근위기사가 된 자였다.
어린 그가 에리카의 호위 기사가 된 것은 나이 열다섯일 때였다. 그때 당시 그녀의 나이는 열하나. 그 전에 황성에서 호위를 서는 것을 몇 번 보았지만, 나이대가 비슷한 것 빼고는 접점이 없었다.
[언젠가 너에게 큰 힘이 될 거다.]
아버지인 베르타스의 말이 아니었다면 에리카는 호위 기사 따위 필요 없다며 마법으로 괴롭혔을 게 분명했다. 그런 딸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베르타스가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정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쫓아내렴.]
다정한 아버지의 울림은 에리카를 불편하게 했다. 저에겐 한없이 너그러운 아버지이지만 다른 자들에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제겐 자애로운 어머니였지만 황제인 그녀는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저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헤난타가 없을 때면 에리카는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 그런 그가 그녀에게 묘하게 냉정해진 것이 문제였다.
이제 스무 살이 된 에리카는 한창 아름다운 나이였다. 국혼 어쩌고 하는 귀족들은 모두 어머니와 아버지 선에서 차단되었다. 황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는 것 이외엔 에리카의 세계는 고요했다.
날이 갈수록 에리카는 속을 알 수 없는 아이로 자랐다. 에리카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동생인 에시르도 마찬가지였다. 남동생인 그는 에리카와 비등한 마력을 갖고 태어났지만, 황위엔 전혀 흥미가 없었다.
놀기 좋아하는 남동생이 오늘도 나가 놀다가 아버지의 손에 붙들려 들어오는 것을 창밖으로 지켜보았었다.
“황자께선 교육을 받는 것이 싫으신가 봅니다.”
옆에서 베루스 공작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리카와 에시르의 스승인 그가 하는 말에 에리카가 서탁을 두들기며 속삭였다.
“그런 것이 아니라 나와 경쟁하는 것이 싫은 것이지.”
“호오. 잘 알고 계시는군요.”
“당연한 것 아닌가. 에시르는 누가 뭐라 해도 나의 가장 큰 경쟁자인 것을.”
라르헨의 황제인 이실리스는 귀족들에게 선포했다. 에리카 이외에 다른 자를 황위에 올리지 않겠다고. 그러나 그것은 에시르가 태어나기 전의 일. 그녀의 생각이 지금도 여전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귀족들은 수군거리곤 했다.
“스승님.”
“왜 그러십니까, 전하?”
“사랑이 뭔지 압니까?”
어머니 이실리스를 생각하자, 오늘도 에시르를 따끔하게 혼낸 아버지의 눈빛이 어머니를 보고는 이내 따뜻하게 물든 것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그런 따뜻한 시선이 닿은 곳에는 늘 어머니가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말했다.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에리카의 말에 베루스 공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크게 웃었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요.”
“정말 그렇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고 있으면 늘 궁금했다. 사랑이란 도대체 뭘까. 대체 무엇이기에 라르헨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는 어머니가 늘 아버지에게 져주는지, 소드마스터로 무서울 것이 없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손짓에 까딱하지 못하는지.
그녀의 말에 뒤에서 조용히 서 있던 헤난타의 어깨가 움찔한 것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 * *
헤난타는 베르타스와 함께 황성에 들어와 사랑에 빠졌다. 작은 여자아이에게.
그 아이는 세상에 다시 없을 고귀한 이였다. 이 라르헨 제국을 이어갈 후계자이자 마법사들을 이끌게 될 차기 황제. 에리카 라르헨.
처음엔 그저 지켜줘야 하는 은인의 딸이었다. 라르헨의 황궁에 들어오기 전까지 헤난타는 늘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살았다. 베르타스를 만난 날 그를 지켜주던 어머니는 죽었고 기사들이 어머니의 유품을 가져다주었을 때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아닌 유모였다는 것을.
유품 사이에 빼곡히 쓰인 서찰은 절절했다. 그는 칼리파 제국의 황태자였던 사람의 아들이었으며 제국의 정당한 후계자였다. 지금의 황제는 그의 작은 아버지였고 그의 아버지는 황위에서 밀려난 황제의 형이었다.
그의 혈통을 두려워한 황제가 그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황태자의 자리에 있는 우스만 칼리파가 그의 사촌 형이었고 황제는 아버지의 형제였다.
단 한 번도 따뜻한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태어나면서부터 없었고 어머니로 알았던 유모는 그에게 늘 거리를 두었으니까. 그런 그에게 서슴없이 다가온 그녀, 에리카.
그가 에리카를 정식으로 만났을 때는 그녀가 열한 살이 되었을 때였다. 호위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칭얼대던 그녀는 그가 자리에 나타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황족의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고귀한 눈빛을 받은 헤난타는 생각했다. 저런 사람이 날 때부터 황족이라고 불리는 것이라고. 그와 같이 거리에서 구른 반쪽짜리 황족이 아니라.
그녀의 다정함이 좋았다. 하나뿐인 호위 기사라고 챙겨주는 것이 좋았다. 그녀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겠지만 그가 선배들에게 불려가서 대련이랍시고 두들겨 맞은 날, 그녀가 보기 흉하다며 던져 준 상처를 치료하는 연고는 아직도 그의 품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그녀는 그의 일상에 스며들었다. 때론 생각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그녀는 라르헨을 이어받을 사람이었기에 감히 그가 탐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 감정을 자각한 것은 그가 스물두 살의 일. 그 이후 헤난타는 에리카에게 서서히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에리카가 눈치챘다.
“헤난타.”
“부르셨습니까, 전하.”
“무슨 일이 있나?”
“예?”
그녀의 물음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좁아드는 미간마저 사랑스러웠다. 되돌려 받을 수 없는 마음은 피지도 못하고 사그라들었는데 이 순간에도 사랑스러운 그녀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니, 아니라면 다행이고.”
더는 묻지 않겠다는 듯 서류로 시선을 돌린 에리카의 뒤를 지켰다. 헤난타의 꿈은 그녀의 뒤를 평생 지키는 것이었다. 옆자리는 감히 넘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그가 제 감정을 숨기고 마음을 죽일 때였다. 그의 마음을 눈치챈 에시르가 그를 따로 불러내었다.
“누님에게서 떨어져라.”
“저하.”
“누님은 네가 넘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나가.”
그의 말에 헤난타는 고개를 숙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라르헨의 유일무이한 황자는 강력한 마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감각도 탁월했다. 어린 나이에도 그가 인정받는 이유였다.
그런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으며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에리카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늘 그 대상에서 논외였다.
멀리서 이야기를 나누는 둘을 본 에리카가 손짓하자 에시르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행여나 누님의 귀에 헛소리가 들어가지 않았으면 해.”
그땐 내가 널 죽일 수도 있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는 에시르는 권태로움이 특징인 라르헨의 황족과는 달랐다. 그는 베르타스의 피를 짙게 타고났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스스로도 속일 수 있는 자. 그게 바로 힐렌튼의 핏줄이었다.
에리카의 손짓에 다가선 헤난타가 그녀의 뒤에 섰다. 고개를 뒤로 젖혀 그를 올려다보는 에리카의 눈동자는 티 없이 맑았다. 하얀 목이 눈에 들어오자 헤난타는 눈을 감았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유혹을 참기 위한 방법이었다.
“에시르가 무슨 말을 했지?”
“별다른 말을 하진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표정이 안 좋은데?”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에도 헤난타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고요하게 지켜보던 에리카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그가 몸을 뒤로 빼려고 했으나 마력으로 그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에리카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나의 호위 기사는 비밀도 많지.”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하는 금발을 매만지면서 속삭였다. 라르헨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색이지만 황족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금빛 머리카락은 에리카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가끔 그녀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의 옅은 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헤난타의 머리카락은 그 이후 늘 장발을 고수했다.
“올해 나이가 몇이지?”
“스물넷입니다. 전하.”
헤난타의 답을 들은 에리카는 잠시 생각했다. 표정의 변화가 없는 에리카에게선 어떤 생각도 읽히지 않았다. 그녀의 조그마한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헤난타의 어두워지는 표정을 확인한 에리카가 다시 그를 향해 말했다.
“내가 너무 무심하였다. 나의 기사에게도 짝을 만날 시간을 줘야 했던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