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이실리스의 일탈(6)
영주의 성으로 돌아온 이실리스는 베르타스의 보고를 들었다. 처음부터 마물이 등장했다는 영주의 서찰은 거짓이었고 도적을 상대하기 위해서 그들을 불렀다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물었다.
“지난 보고를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상황이 심각했나?”
“도적보다 영주의 수탈이 심각했지.”
“흠, 하긴.”
귀족 영애들을 납치해서 자금을 확보하던 도적들이 영주민들을 건드릴 리 없었다. 이실리스의 손짓에 베르타스를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이 모두 물러가자 그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뭔가 들은 게 있나, 그대?”
의자에 앉은 그녀의 앞에 베르타스가 다가섰다. 이실리스의 턱을 들어 올려 천천히 입술을 내리려던 베르타스가 그녀의 입술에 바로 닿기 직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이실리스가 입술을 열었다.
“왜 그러지?”
“이 모습을 보니 그대가 아닌 것 같아서 입 맞추기가 어렵군.”
“뭐?”
그의 말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생김새는 시약으로 변화한 것뿐인데 얼굴이 다르다고 입술도 닿지 못하겠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소리인가.
“그대를 두고 바람피는 기분이야.”
“뭐라고?”
황당한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제가 그대에게 입을 맞춰도 되겠습니까, 폐하?”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는 그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어깨로 흘러내린 금발을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녀를 휘감는 열기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고 그 안에 담긴 뜨거운 것이 흘러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은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차올랐고 그 기분 좋은 저릿한 느낌에 이실리스는 눈을 감았다. 살짝 입술을 깨문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금발은 안 어울려.”
“그대의 취향이 아닌 건가?”
“내 취향은 군청색 눈동자에 붉은색 머리카락이지.”
“그거 참, 라르헨의 황제와 똑같은 색이로군.”
이실리스의 입술을 붉은 혀로 핥은 그가 입술이 맞닿은 채로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그러니 폐하, 오늘은 제 침소에 찾아 주시렵니까?”
“이곳은 침소가 없지 않나.”
“그렇다면 제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베르타스 잠시……!”
그녀의 몸을 쥐는 그의 손길에 이실리스의 머릿속은 하얗게 물들었고 이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 * *
베르타스는 지쳐 잠든 이실리스를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터라 몰아붙인 것이 문제였나.’
밤부터 시작된 정사는 아침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마저도 부족했다. 베르타스는 헤아릴 수 없는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늘 이실리스가 부족했고 늘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체력이 너무 약해.’
이실리스가 들었다면 기함할 말이었지만 베르타스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력으로 몸을 회복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휴식이 필요했기에 그는 원 없이 이실리스를 안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늘 허덕였다.
황궁에 있을 때엔 시녀들과 시종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때로는 짐승같이 그녀를 몰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음날이 되면 어김없이 이실리스는 정무를 보러 나가야 했으니까.
황제의 일상은 생각보다 바빴다. 하루 종일 서류를 보거나 마법사들이 개발한 마법 무구를 들여다보고 가끔 시간이 나면 에리카의 수업을 지켜보는 그녀는 침실로 돌아와서 죽은 듯이 잠들었다. 피곤한 그녀를 깨울 수도 없었고 나는 네가 고프다고 그리 말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참았던 그의 욕망이 어젯밤,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폭발했다. 숨길 수 없는 갈증을 퍼부은 그는 만족스러웠다. 배부른 사자처럼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지쳐 잠든 이실리스를 끌어안았다.
“사랑해.”
어떻게 이 마음을 다 전할 수 있을까. 베르타스는 욕망으로 점철된 속내를 애써 내리누르면서 그녀의 어깨에 입술을 내렸다. 몸 곳곳에 붉은 흔적은 모두 그가 새긴 것이었다. 만족스러웠다. 새하얀 피부에 남은 순흔은 그녀가 제 여자라는 표식과도 같았으니까.
라르헨과 이실리스를 나눠야 한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타고나길 황제로 태어난 그녀는 절대 황위를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제국에 쓰는 시간을 아까워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러니 양보하는 수밖에.
‘가끔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이걸로 만족했다. 이실리스와 처음 만났던 그 밤을 떠올린 베르타스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였다. 잠에서 깰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실리스의 몸 곳곳을 입술로 지분거리면서 욕구를 내리눌렀다.
“그만…….”
“깼나?”
여전히 쪽쪽대는 입술을 피해 이실리스가 몸을 일으켰다.
“더 자.”
“일어나야지. 아침에 도적들을 심문하기로 하지 않았나.”
눈에 졸음이 가득한데도 애써 눈을 뜬 그녀가 손을 휘저었다. 마력이 움직이면서 그녀의 몸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마법으로 몸을 회복하는 것은 안 좋은 짓이야 이실리스.”
“이! 그대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에도 베르타스는 계속해서 입술을 내렸다. 동그란 어깨에 입술을 내렸다가 살짝 핥아 올리자 이실리스가 흠칫 떨었다. 그런 그녀의 몸이 마음에 들었다.
그를 밀어내는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심술이 난 그가 이실리스의 어깨를 깨물었다.
“흣!”
“그냥 이대로 있고 싶어.”
베르타스의 칭얼거림에 이실리스가 팔을 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잠시 그를 토닥인 그녀가 마력으로 옷을 입었다.
“이실리스.”
불퉁하게 나오는 목소리를 숨길 수 없었다. 베르타스를 달래듯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내린 그녀가 속삭였다.
“이번 외유는 일주일이야.”
“뭐라고 했지?”
깜짝 놀란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불이 흘러내리면서 베르타스의 탄탄한 상체가 보이자 이실리스의 시선이 그곳에 닿았다. 가늘고 긴 하얀 손가락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그 일주일을 도적들의 뒤를 캐는 데만 쓸 수도 있고 다른 일에 쓸 수도 있겠지.”
“다한 경!”
부드러운 그녀의 손가락을 느끼던 베르타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충 의복을 주워입고 부리나케 방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실리스가 웃었다.
“저런.”
뭐가 저리 급한지. 어차피 심문 준비가 되려면 시간이 걸릴 텐데. 마력으로 대충 옷을 정리한 이실리스가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앞을 지키던 호위 기사에게 물음을 던졌다.
“베르타스는 어딜 갔지?”
“국부께선 심문장으로 바로 가셨습니다.”
“안내하게.”
“영광입니다, 폐하.”
이실리스도 놓고 혼자서 가버렸다는 기사의 말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대체 뭘 하려고 하는 것인지.
‘설마 어젯밤처럼 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문득 든 생각에 이실리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주의 성이라고 하기엔 화려한 복도를 지나 심문장으로 향했다. 말이 심문장이지 응접실을 심문실로 바꿔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잡혀온 도적단이 응접실 한가운데에 무릎 꿇고 있었다. 저들과 접촉하는 다른 자들을 발견하려고 내버려 둔 것이었는데 베르타스가 그녀를 찾으러 온 바람에 일이 틀어졌다.
베르타스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폐하.”
뭘 그리 서둘러 나갔나 했더니 심문 준비를 마치려고 했다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운데 놓인 의자에 다가가 앉은 이실리스의 곁에 베르타스가 섰다.
“그대들이 이 라르헨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 우릴 돌려 보내줘!”
도적단의 두목이 이실리스를 향해 외쳤다. 그 가소로운 말에 이실리스의 얼굴이 굳었다.
“라르헨의 사람도 아닌 자들이 내 땅에 들어와 분란을 일으켰는데 몸 성히 돌아갈 듯싶은가?”
“우리는 일반 평민들에겐 손끝 하나 댄 적이 없다고! 부유한 귀족가를 털어먹은 게 뭐가 나빠!”
이실리스의 시선이 두목에게 고정되었다.
“그들도 이 라르헨의 사람들이지. 국가적인 분쟁을 일으키고 싶은가?”
“흥! 이곳을 보아하니 라르헨도 아직 멀었더만! 영주의 수탈에 불쌍한 영지민들이 굶고 있었는데 너는 그동안 어디서 뭘 했지?”
“무엄하다!”
두목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한이 외쳤다. 그를 손짓으로 저지했다. 베르타스의 손은 금방이라도 칼을 빼 들 것처럼 손잡이 위에 올라가 있었다.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보던 이실리스가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만류하는 그녀의 행동에도 베르타스의 굳은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할 수 없다는 듯 이실리스는 두목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너희들은 무슨 권리로 내 땅에서 귀족들의 돈을 가져갔지?”
“그건……!”
“너희가 귀족들에게 빼앗은 돈 때문에 그들이 영지민들을 수탈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