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이실리스의 일탈(5)
다한이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냉큼 말 위에 올라탔다. 뒤늦게 영주의 성에 있던 마법사들이 도착했지만 그들에게 설명할 시간도 아까웠다. 베르타스가 선두에서 말을 달렸고 다한도 아이를 기사에게 맡기고 그의 뒤를 따랐다.
* * *
‘기다릴 것이냐, 아니면 먼저 나설 것이냐.’
이실리스는 잠시 고민했다. 베르타스의 성격상 그녀를 구하러 올 것이 뻔했다. 호감을 느낀 여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도적이 나타나 영지민을 납치했으니 구하러 오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래도 갑갑하고 고민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실리스는 그가 시장에서 그녀에게 보인 관심을 애써 떨쳐버리며 통나무집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내부가 황량했다.
안쪽에 침대가 있었지만 더러워서 눕고 싶지도 않았다. 황족인 이실리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허름한 곳이었다. 이제 저들의 목적을 알아냈으니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만 남았다. 마력을 일으켜 모두 잡고 싶었지만, 대화를 들은 이상 기다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분의 아들이라.’
내 제국. 나의 라르헨에서 자금을 확보하여 그분의 아들을 데리고 뭘 하려는 것인지 알아야겠다.
‘감히 라르헨의 돈을 빼돌릴 생각을 하다니.’
제국의 귀족들에게서 빼앗은 돈은 그녀에게 바쳐질 세금이었다. 귀족들이 그 세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제국민들을 수탈할 것이 뻔했고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제국민들이 가난해 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결계가 없어지고 나서 라르헨의 많은 것이 변했다. 이전 같았으면 이렇게 국경 지대에 도적이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라르헨의 황성에서 파견한 마법사들이 곳곳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결계가 사라지고 새로운 방어 체계를 구축하는 동안 빈틈이 생겼다. 그동안 국경의 영주들은 사병을 만들지 않았고 적들의 침입에 쉽게 노출되었다.
결계가 사라지자 제국의 문제점이 눈에 보였다. 이실리스와 베르타스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국경의 군사 체제였지만 아직도 멀었다.
‘이렇게 세금을 착복하는 영주가 있으니 원.’
그녀가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 다시 제국의 전역에 마법사들을 파견하겠다는 이실리스의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그녀의 눈과 귀가 되어줄 마법사들이 필요했다.
“나와!”
아까 이실리스를 잡은 도적의 무리 중 한 사람이 문을 벌컥 열고 그녀에게 외쳤다.
‘베루스 공작가는 이곳에서 적어도 일주일이 걸리는 거리. 그런데 이렇게 빨리 연락이 왔다고?’
저들에게 마법 무구가 있다는 가정을 하지 못했다. 화가 난듯한 목소리를 들으니 그녀의 정체가 들통난 것 같았다. 험상궂은 남자들이 두목의 뒤에서 기세등등하게 서 있었다. 분노 가득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
“베루스 공작가엔 너 같은 딸은 없다고 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렇게 되면 베르타스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었다.
“잘못 알았을 것 같은데.”
“진짜 네 정체가 뭐냐!”
두목이 그녀의 목 바로 아래에 칼을 들이밀었다. 그 가소로운 행동에 이실리스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웃어?”
그녀의 미소를 보고 화가 난 두목이 칼을 휘두르려 할 때였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베르타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로 기사들이 도착했다.
‘젠장! 기사단이잖아. 여길 어떻게 알고 왔지?’
두목의 얼굴이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다.
이실리스의 목에 겨눠진 검을 확인한 베르타스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검을 거둬라. 너희는 도망칠 수 없다.”
“글쎄 도망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두고 봐야 알지.”
두목이 이실리스의 몸을 끌어당기고는 가까이에서 위협하기에 불편한 장검을 재빠르게 버리고 숨겨진 단검을 꺼내 이실리스의 목에 바싹 들이댔다.
그 모습을 본 베르타스의 눈빛이 변했다. 차게 가라앉은 눈빛을 본 도적들은 흠칫 몸을 굳혔다. 소드마스터에게서 흘러나온 기운을 느낀 도적들은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몸에 상처라도 나면 너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이 여자가 중요한 듯해서 더 놔줄 수 없겠는걸.”
베르타스를 조롱하는 두목의 말에 이실리스는 조용히 마력을 거두었다. 그가 오기 전엔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마력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그가 도착했으니 이대로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찾은 것인지 알고 싶었다. 저 베르타스는 대체 어떤 마음을 갖고 그녀를 찾은 걸까. 낯선 여자에 대한 호기심? 아니면 애정? 그도 아니라면 영지민들을 괴롭히는 도적들에 대한 분노?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지만, 어느 것도 답이 아니었다. 답은 베르타스가 제일 처음 던진 말에 있었다.
‘상처가 나면 죽인다라.’
베르타스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 온 걸까. 이실리스는 그게 진실로 궁금했다.
“각하!”
뒤에서 다한이 베르타스를 향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영문모를 표정을 지은 다한이 베르타스의 귓가에 뭐라 속삭였다. 궁금한 나머지 엿듣는 마력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모든 대화를 마친 베르타스와 다한이 도적에게 소리쳤다.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실리스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목숨만은 살려준다니. 숨만 붙어 있으면 뭐든지 하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두목에게 붙들려 있는 이실리스를 바라보던 베르타스가 그녀에게 눈짓했다. 그 눈짓을 눈치챈 이실리스가 재빨리 단검을 든 두목의 팔을 쳐내며 옆으로 몸을 피했고 그녀가 있던 자리에 베르타스의 오라가 내리꽂혔다.
“큭!”
소드마스터의 오라를 정면으로 맞은 두목의 팔이 날아갔다.
“이런 아쉽게 됐군. 목을 날리려고 했는데 말이야.”
차가운 베르타스의 말에 섞인 조롱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당황한 도적단의 두목이 기사단을 향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온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괜찮나?”
“아, 난…….”
아무 문제 없다는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가 웃었다. 다행이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에 안도가 섞여 있었다.
“다행이야 이실리스.”
“뭐?”
“다행이라고 그대.”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술을 내리는 베르타스의 눈동자에 기쁨이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 날 선 기세를 보이던 사내는 어디 가고 그녀의 앞에서 순한 양처럼 돌변한 그를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선물한 반지를 끼고 있잖아, 그대.”
베르타스가 말할 때까지 이실리스는 그가 반지를 한눈에 알아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흔하디흔한 디자인의 반지였다. 다만 이실리스가 낀 반지에 마법이 걸려있다는 걸 제외하면 말이다.
소유자가 아니면 뺄 수 없는 반지.
영원히 너를 놓지 않겠다는 베르타스의 욕심이 담긴 물건이었다. 자신이 선물한 반지를 한눈에 알아챈 그의 눈썰미에 이실리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녀가 보기에 액세서리는 다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황제인 그녀에게 귀한 것은 차고 넘쳤고 베르타스가 선물한 것이라 늘 끼고 다녔지만 단지 그뿐.
그가 선물한 것이 아니었다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터. 마력을 운용하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손가락에 무언가를 끼고 다니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리고 소드마스터의 존재 맹세를 우습게 보는군.”
“아, 그랬지.”
이실리스가 웃었다. 손을 잡자마자 그녀라는 것을 알았겠지. 소드마스터의 존재 맹세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베르타스를 향했던 의심이 눈 녹듯이 사라지자 이젠 도적을 해결할 때였다. 그녀의 허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던 베르타스가 머리 위에서 속삭였다.
“그건 그렇고, 여기까지 웬일이지?”
“귀환하는 날이 멀어져서 말이야.”
“그래서?”
“…….”
“보고 싶었다고?”
“그래.”
그녀의 입에서 나온 자그마한 목소리에 베르타스가 환하게 웃었다. 세상에 그녀밖에 없다는 듯 기쁘게 웃는 그를 보니 이실리스의 얼굴이 괜히 붉게 달아올랐다.
전쟁터를 쥐락펴락하던 베르타스의 기사들을 일개 도적단이 이길 리 만무했다. 단, 일개 도적단이 맞다면.
시간이 흘러도 마무리 되지 않는 상황에서 다한이 베르타스에게 다가왔다.
“각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일반적인 도적이 아닙니다. 사용하는 검술을 보십시오.”
다한의 말에 베르타스의 눈이 돌아갔다. 이실리스의 시선도 그들을 향했다. 고군분투하는 기사들을 본 이실리스가 가볍게 손짓했다.
“그대.”
베르타스의 만류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일 이후로 베르타스는 이실리스가 마력을 사용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언제 또 그녀의 마력을 노리는 무리들이 나타날지 모를 일이니까.
그의 걱정에도 이실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력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었고 도적단은 허공 위에 떠올랐다.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허공에 둥둥 뜨게 만든 이실리스가 베르타스를 향해 웃었다.
고고한 그의 황제는 곧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기사들과 도적단의 커다란 눈동자가 그들을 향했고 베르타스는 이실리스의 앞에 무릎 꿇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의 말에 놀란 기사들이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상처 투성이인 기사단을 본 이실리스가 다시 마력을 움직였고 순식간에 상처가 치유되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웃은 그녀가 베르타스를 향해 말했다.
“영주 성이 어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