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이실리스의 일탈(4)
베르타스의 생각이 맞았다. 이실리스는 도적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결심했다. 이 영지에 존재하는 도적들을 뿌리 뽑고 베르타스와 함께 수도로 돌아가겠다고. 몸이 떨어져 있으니 베르타스가 딴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녀에게 접근했을 리는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채는 것을 느꼈을 때, 마법을 사용하여 저항할 수도 있었으나 그냥 그들에게 잡힌 이유가 그것이었다. 근거지를 찾아가서 모조리 잡아 감옥에 처넣겠다. 베르타스를 얼른 수도로 올리겠다는 사심도 섞여 있었다.
말을 타고 달리던 남자들은 어느 외진 통나무집 앞에 이실리스를 내려놓았다.
“아가씨, 뭐 잡혀왔지만, 너무 걱정 말아요. 우리 두목,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두목?”
“그래요. 두목.”
도적단의 두목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소리는 처음 들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에 이실리스가 눈썹을 움찔하려는 찰나 그녀의 뒤에서 밝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잡아왔어?”
“네.”
“귀족인지 어떻게 알아?”
“딱 봐도 귀족같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이실리스를 잡아 온 남자의 말에 도적 두목이라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네. 얼굴 하얗고 일도 못 하게 생긴 얼굴, 거기다…….”
빙글거리던 여자가 그녀의 손을 잡아채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굳은살 하나 없는 손까지.”
이실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일도 못 하게 생긴 얼굴이라니. 이실리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여자는 그녀의 얼굴을 품평하듯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그 무례한 태도에 안 그래도 좋지 않던 기분이 바닥에 처박혔다.
“귀족이면 됐어. 어느 집안 영애지?”
도적단의 두목이 그녀에게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이실리스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
“뭐라고?”
“베루스 공작가.”
지금 당장 생각나는 귀족의 이름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녀를 지척에서 모시는 사람들은 모두 마법사들이었으며 마법사들은 귀족인지 귀족이 아닌지 중요하지 않았다. 귀족 명부를 달달 외우고 있는 그녀였는데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엔 베루스 공작만 생각났는지.
“…… 공작가에 딸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생각보다 제국의 귀족가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는 두목의 말에 이실리스는 흠칫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단순한 도적이 아니었다는 소리군.’
배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귀족, 고위 귀족이. 그게 아니라면 다른 나라의 황족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이 영지가 우스만의 칼리파 제국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이실리스가 머리를 굴렸다.
“혼외 자녀라 그렇다.”
“혼외 자녀? 사실 확인을 해보면 되겠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여자가 이실리스의 손에 있는 반지를 빼내려 했다. 마법이 걸려있는 반지가 꼼짝도 하지 않자 여자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 되는 마법 무구를 가지고 있다면 평범한 집안은 아니겠네.”
“…….”
“신분이 증명될만한 것을 내놔.”
여자의 말에 이실리스가 잠시 주춤했다. 무엇을 내어놓아도 그녀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저들에게 황제의 패를 내보일 수는 없으니. 고민하던 그녀가 주머니에서 패를 하나 꺼냈다. 제국의 귀족을 증명하는 패였다.
“뭐야, 다른 귀족들이랑 색이 다른데?”
“공작가라더니 다른가 보지.”
대어를 낚았다고 말하는 도적들의 말을 들으면서 이실리스는 생각에 잠겼다. 제국의 귀족들을 납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것도 약자인 귀족 영애들만을 상대로 납치를 벌였다는 소리. 제국의 귀족이라면 딸이 납치되었다는 치명적인 소문이 돌기 전에 일을 해결하려고 했을 터.
울며 겨자 먹기로 몸값을 보냈을 것이 뻔했다. 딸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을까 두려웠던 귀족들은 아마 딸이 진실을 말해도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고 집안에 가둬두었겠지. 그래서 그녀에게 고한 자가 아무도 없었을 거라 확신했다.
생각에 빠진 이실리스를 빤히 바라보던 여자는 그녀를 끌고 온 남자들에게 명령했다.
“저쪽에 가둬. 손대지 마. 귀한 인질이니까.”
몸값을 많이 받아내려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여자의 말에 실소가 나올 뻔했다. 제국의 황제를 물건 취급하는 여자라니. 24시간 동안 시약의 효과가 유지되는데 벌써 4시간이 지났다. 내일 저녁이 되어서 정체가 밝혀지기 전에 이 모든 일을 해결하고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다.
이실리스를 끌고 간 남자가 통나무집의 문을 열고는 그녀를 밀어 넣었다. 그 안에 갇힌 그녀는 밖에 있는 사람들의 말이 들리자 바로 마력을 일으켰다.
“자금은?”
“거의 다 확보되었습니다.”
“좋아. 이제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네.”
“그렇습니다.”
“그분의 아들은 찾았나?”
“아직입니다. 이곳에 있다는 말만 들었지…….”
갑자기 도적들이 쳐들어온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이제야 확실해졌다. 돈을 모아 무언가를 획책하고자 한 일이었다. 그녀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이유도 그녀의 몸값을 많이 받아내기 위함이었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찾으면 그 사람을 데리고 칼리파로 넘어갈 생각으로 보였다.
‘어디서 온 자들이지?’
궁금해졌다. 입고 있는 옷으로 봐서 라르헨 제국민처럼 보였지만 특유의 억양을 숨길 수는 없었다. 칼리파 제국의 사람들이 확실했는데 문제는 그 제국의 사람들이 대체 이곳에서 꾸밀 일이 무엇인가.
‘라르헨에 쳐들어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우스만 칼리파와 친교를 맺은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몇 번 라르헨에 다녀간 그는 올 때마다 에리카를 자신의 아들과 맺어주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실리스가 국혼을 선포하고 베르타스를 국부로 맞아들이자 우스만은 더는 거절하지 않고 칼리파 제국의 황제가 정해 준 짝과 국혼을 올렸다.
이제 기어 다니는 아들을 이야기하면서 국혼을 맺자는 소리에 베르타스가 헛소리로 일축했었다.
‘아.’
잊고 있던 베르타스가 떠오르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는 나를 구하러 올 것인가. 구하러 온다 해도 문제였다. 그녀가 누구인 줄 알고 구하러 온단 말인가. 구하러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 반,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반이었다. 이실리스는 도적단의 배후를 알아본 후, 이곳을 탈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 * *
“각하.”
다한 경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온몸에서 넘실거리는 오라를 숨기지 않은 채 분노를 표출하는 베르타스를 보면서 다한은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실리스가 납치되었다.”
“네?”
난데없이 라르헨의 황제가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인가. 다한은 황당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진지한 베르타스의 표정에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대체 누가…….”
“도적단.”
“도적단이요?”
다한의 놀란 말에 베르타스는 땅에 박았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대로 검을 들어올린 그가 기사단에게 명령했다.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찾는다.”
“알겠습니다!”
“도적단이 향한 방향은 이 영지의 북쪽 외곽이었다. 그 근처부터 샅샅이 뒤진다.”
“명을 받듭니다!”
힐렌튼 제국에서부터 베르타스를 따라온 기사들이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사들을 놀란 눈으로 바라본 영지민들이 베르타스의 험악한 기세에 고개를 돌렸다.
“누구든 저들의 위치를 제보하는 자가 있다면 천금을 내리겠다.”
그의 말에 영지민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서로 눈치를 보느라 앞서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베르타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도적들에게 협조한 자는 그 자리에서 사형이다.”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음산했다. 도적단이 영지민들에게 끼친 피해도 상당했기에 망설이던 그들이 기사들에게 하나씩 다가가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내부인은 아니로군.’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여는 것으로 보아 내부인의 소행은 아니었다. 이실리스를 데려간 자들이 라르헨의 제국민이 아니라면 더 큰 일이었다. 제국의 황제를 손에 넣은 외국인이라니. 그들이 어떻게 그녀에게 위해를 가할지 알 수 없었기에 베르타스는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감출 수 없었다.
“각하! 이 소년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자그마한 아이를 끌고 온 기사가 그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베르타스의 눈치를 보던 소년은 그 자리에서 그의 가까이에 다가섰다.
“그, 얼마 전에 이 시장 근처에 외국인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봤어요.”
“외국인?”
“네. 옷은 라르헨의 옷을 입었지만 억양이 달랐어요.”
아이의 말에 베르타스의 눈빛이 변했다. 다한도 아이의 말에 숨겨진 심각성을 인지하고 아이에게로 몸을 숙였다.
“칼리파 제국의 억양이었어요.”
“너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저, 그, 제 아버지가 칼리파 제국의 사람이라 가끔 국경을 넘어서 오셔서.”
“국경을 넘어온다?”
“네. 사정이 있어서 칼리파 제국에서는 살 수 없다고 어머니가 그렇게 이야기하셨어요.”
뭔가 복잡한 가정사가 얽힌 듯한 아이의 말에 베르타스는 다시 아이에게 물었다.
“그 외국인들은 어디로 갔지?”
베르타스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아이가 그에게 입술을 달싹였다.
“저…… 저랑 어머니는 보호해 주시는 거죠?”
“당연한 것을.”
“이 마을의 북쪽으로 계속 걸어가면 작은 통나무집이 하나 있어요.”
아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르타스는 달렸다.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