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이실리스의 일탈(3)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는 것을 느낀 이실리스는 손안에 마력을 일으키다가 얼굴을 확인하고 마력을 내리눌렀다.
“이실리스!”
반가움을 가득 담아 외친 남자는 베르타스였다. 그의 얼굴을 본 이실리스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길 수 없었다.
베르타스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화들짝 놀라 잡았던 손을 팽개치듯 놓고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생각났다. 자신이 외양을 바꾸는 시약을 삼킨 것을.
시약의 기한은 24시간. 그 시간 동안 그녀가 이실리스라는 사실을 베르타스가 알긴 힘들었다.
‘어떻게든 알아봤어야지.’
속에서 불퉁한 말이 넘쳐 흘렀지만, 입 밖으로 내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자꾸 제 얼굴을 흘깃흘깃 바라보는 베르타스의 모습에 묘한 감정이 치솟았다. 저 자신에게 하는 질투라니. 황당한 일이었지만 이실리스는 자신을 질투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베르타스의 시선을 사로잡은 시약을 마신 저 자신에게.
“괜찮……아요.”
또다시 튀어나올 뻔한 고압적인 말을 가까스로 삼키며 말했다. 베르타스의 눈썹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정중하게 그녀를 향해 말했다.
“정말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네, 그럼…….”
“이곳이 처음이신 거 같은데, 실례가 안 된다면 안내해 드려도 될까요?”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의 입매가 굳었다. 그녀를 향해 말하는 베르타스의 얼굴에 그 어떤 의심도 드러나지 않아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지금 이 말이 그가 한 말이 맞는가.’
베르타스는 그녀를 향해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귀족 영애를 에스코트하는 듯한 그의 손에 이실리스는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 외엔 관심도 보이지 않던 남자가 여자에게 새로운 관심을 내보이다니. 그런데 그게 외양을 바꾼 저라니. 화를 낼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지.’
베르타스를 속인다는 죄책감도 들었지만, 그가 어떤 생각으로 제게 손을 내밀었는지 알고 싶었다. 정말로 여자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후자이길 바라지만 전자라면 저는 어찌해야 하나. 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가 망설이자 베르타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일행이 있어 그럽니까?”
“아니, 아닙…… 아니에요.”
이실리스가 손을 뻗어 그의 손 위에 올렸다. 반지 낀 그녀의 손이 곱게 그의 손 위로 올라가자 그 손등에 입술을 내려 입을 맞춘 그가 빙긋 웃었다.
“내 이름은 베르라고 합니다. 아가씨.”
“이리스입니다.”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베르타스가 어떤 의도로 저에게 이런 제안을 했는지, 그 의도가 여성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반대쪽 손에 힘을 주었다. 생각에 빠진 이실리스는 그것을 확인한 베르타스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베르타스는 알 수 없는 여자가 그의 손을 잡은 순간 깨달았다. 이실리스가 확실하다는 것을. 이실리스는 알지 못하겠지만 소드마스터의 존재 맹세는 맹약자와 접촉하는 순간 그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손가락에 곱게 자리한 반지는 그가 선물한 것이 확실했다.
‘표정이 굳었군.’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아주 조그마한 표정 변화였지만 이실리스를 늘 곁에서 지켜본 베르타스는 확신했다. 지금 이실리스는 기분이 아주, 아주 좋지 않았다. 저를 오해해서 생긴 변화에 마음이 쓰였지만 베르타스는 그녀의 오해를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그녀가 이곳에 외유를 나온 이유를 알아야겠다. 그를 보기 위해서 왔다면 곧장 영주의 성으로 오면 될 것인데 왜 이런 시장에 나와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지 그게 궁금했다. 더구나 그녀는 그의 얼굴을 눈치챘을 텐데 먼저 아는 척하지 않은 것도 베르타스는 섭섭했다. 모습을 바꾼 채,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이실리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기대를 품고 이곳에 나온 것은 아니기를 빌어.
베르타스의 생각이 어떠하든 이실리스는 말이 없었다. 가만히 그의 옆에서 거리를 걷는 그녀의 굳은 얼굴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손에 들린 꽃 한 송이가 애처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의 손안에 있는 꽃을 눈치챈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밀파르 꽃이군요.”
그의 말에 그녀가 그와 눈을 마주했다. 시리기만 한 푸른색 눈동자는 이실리스의 본래 눈동자 색인 군청색 눈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이질적이었다.
“아는 꽃인가……요?”
어설픈 존대에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생각해보니 그녀와 이토르트 항구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아주 귀한 집의 여식인 듯했던 이실리스. 처음 데이트했던 선술집. 그때도 그녀는 저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길게 뻗은 목은 한없이 고고했으며 곧은 눈동자는 신념을 품고 있었다.
곧은 눈동자가 베르타스를 향했을 때, 온몸에 흘렀던 전율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녀와 마주했던 순간, 그의 사위는 고요해졌고 오로지 이실리스만이 그의 세계에 존재했던 그 순간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첫눈에 반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실리스는 그의 운명이자 영혼의 반려였다는 것을.
“사막의 꽃은 때론 독을 품고 있습니다. 레이디. 그러니 손에서 놓는 게 어떨는지요.”
베르타스는 자신의 다정한 목소리에 살짝 흔들린 표정을 보인 그녀를 보며 빙긋 웃었다.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 귀여웠다. 결혼반지를 손에 끼고 외유를 나온 황제라니. 그 황제의 부군이 설마 그들의 결혼반지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아, 그럴지도.’
생각해보면 이실리스는 묘한 곳에서 순진했다. 그것이 아직 때 묻지 않은 황족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베르타스는 지난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아직도 소녀 같기만 한 그의 태양은 그의 말에 꽃을 마력으로 흩날렸다. 한 송이의 꽃에서 꽃잎이 퍼져나가는 아름다움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마법사였군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반응하길 바라면서. 제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이실리스는 어떻게 나올까. 화를 낼까, 아니면 얼굴을 붉힐까. 어느 쪽이든 아름다운 그녀였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의 곁에 그녀가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마력석이 빛나는 시장의 저녁. 은은한 그 빛에 반사된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이렇게 보니 본래 얼굴과 닮은 듯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절대 이실리스의 얼굴을 알아채지 못할 터였다. 눈동자 색과 머리카락 색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라르헨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지. 그들의 황제가 저잣거리에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을 바꾸고 나와 돌아다니며 민심을 살핀다는 것을.
“마법사를 처음 보나?”
이젠 정체를 숨기지 않기로 했는지 눈에 옅은 화를 품은 그녀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안에 품은 한기를 생각하니 더는 모른 척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더 지난다면 그녀는 용서하지 않겠지. 베르타스가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 진실을 말하려 할 때였다.
“도적 떼다!”
영주의 성에서 멀리 떨어진 시장이었기에 도적 떼가 간혹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오늘 같은 날 등장할 줄이야. 베르타스의 얼굴은 순식간에 피를 머금은 기사의 그것으로 변했고 칼을 빼 들었다.
앞에서 몰려오는 도적 떼들을 처리하려는 그 순간, 뒤쪽에서 말을 타고 갑자기 나타난 도적이 그의 곁에 서 있던 이실리스의 허리를 잡아채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오라를 일으켜 날렸지만 날랜 도적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앞에서 오던 도적들마저도 베르타스가 이실리스 쪽을 신경 쓰는 사이 재빨리 흩어져 달아나버렸다.
도적이 이실리스를 데리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베르타스가 분노하여 땅에 검을 내려쳤다. 오라가 실린 검은 검 손잡이의 바로 직전까지 땅에 박혔으며 몸에서 오라가 넘실거렸다.
마력을 가진 이실리스였으니 아무 생각 없이 붙잡혀 가진 않았겠지만 걱정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감히 그의 곁에 있는 그녀를 납치하다니. 도적들의 근거지를 알아내려고 일부러 잡혀 간듯한 이실리스의 태도에도 베르타스는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그러다 또 마력을 잃으면 어쩌려고.’
한번 잃었으니 두 번 잃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녀의 마력을 노린 누군가가 저지른 일일 수도 있었다. 암담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갔다. 마지막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뮤르카 제국에서의 그녀가 떠올랐고 밀랍같이 굳은 표정에서 서늘함이 넘쳐흘렀다.
베르타스의 얼굴을 본 영지민들이 당황하여 그를 향해 살짝 무릎을 굽혔다. 황족에게 하는 예를 표해야 하는지 아닌지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소란에 뒤로 넘어간 후드를 다시 올릴 생각도 하지 않은 그가 주변에 있는 사람 중 말을 탄 사람에게 손짓했다.
“너.”
“네, 네.”
당황한 남자가 베르타스의 앞에 주춤주춤 다가섰다.
“당장 영주 성으로 가서 전해라. 베르타스 라르헨이 기사단을 불렀다고.”
“알, 알겠습니다.”
흡사 마물이 머문다는 저 깊은 암흑 속에서 튀어나온 악마의 목소리가 저러할까. 분노를 짙게 품은 낮은 목소리에 겁먹은 영지민들이 몸을 사렸다. 놀란 다한 경이 기사단을 이끌고 그 자리에 올 때까지 베르타스는 그대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