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이실리스의 일탈(2)
“오늘입니다.”
다한은 앞뒤 없는 베르타스의 말을 알아듣고 냉큼 대답했다.
한 나라와 맞닿은 국경에 도착해서 베르타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우스만의 행적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칼리파 제국과 국경이 맞닿은 곳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쪽을 의심하는 것이 당연했다. 칼리파 제국에 있던 첩자의 연락을 기다렸고 마침내 우스만 칼리파가 이쪽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렇다면 나가봐야겠군.”
“안 됩니다, 각하.”
“다한 경.”
“이거 서류 다 처리하고 가십시오.”
이를 악물고 말하는 다한을 빤히 바라보던 베르타스가 웃었다.
“자네가 하지.”
“안 합니다. 저는 기사지 보좌관이 아닙니다.”
“이젠 내 보좌관 아니었나?”
“싫습니다!”
“다녀오지.”
다한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르타스는 집무실의 창으로 뛰어내렸다. 2층 높이의 집무실에서 뛰어내린 베르타스를 놀란 눈으로 뒤쫓은 다한은 어느새 저 멀리 뛰어가고 있는 그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저렇게 싫으신가.”
업무를 처리하라는 것은 핑계였다. 국경의 이 도시는 영주의 착복으로 인해 이미 썩을 대로 썩어 있었고 그 모든 것을 도려내느라 귀환이 늦어지는 것이었다.
물론 도적을 모두 소탕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국경의 수비대가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르타스는 사재를 털었고 나중에 회수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대들은 라르헨의 국경을 지키는 군사이니 몸을 아껴야 한다.]
베르타스의 그 말에 감동한 병사들과 기사들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것도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라르헨의 국부인 그가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밤에 우연을 가장하여 찾아드는 여자들이 생겼다는 것도 그에게 커다란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라르헨의 국법상 국부에게서 생긴 혼외자는 황실의 핏줄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오로지 황제의 핏줄만이 황족으로 인정받는 것이었는데도 베르타스를 노리고 침실에 접근하는 여자들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주변의 돈 많은 상인과 한미한 가문의 귀족들이 연회를 핑계 삼아 딸을 소개하는 것을 본 다한은 웃었다.
‘아직 각하의 성격을 모르니 그렇게 하는 거겠지.’
어찌 보면 다행이라고 해야 했다. 그의 침실 근처에서 우연인 척 유혹하는 여자들은 있었으나 그의 침실에 들어선 여자는 없었으니. 침실 안에 발을 들인 순간 그의 칼에 죽임을 당했을 터인데 그런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받은 제 상사를 알고 있었기에 다한은 날 듯이 나가는 베르타스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아무 일도 없겠지.”
소드마스터이지만 걱정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제 수하의 걱정이 어떻든 성문을 나선 베르타스는 후련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나오는 바람에 제대로 된 옷을 챙길 수 없어 시장에서 급하게 로브를 구했다. 얼굴을 가린 그가 여유를 만끽하며 시장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우스만 칼리파를 찾겠다는 것은 핑계였다. 그놈이 여기 오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었다. 칼리파 제국이 도적들의 뒷배라는 게 사실이 아니어도 수틀리면 증거야 만들면 그만이었다. 우스만 칼리파를 향한 베르타스의 분노는 깊고도 깊었다.
“조금 나아졌군.”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일자리가 없는 부랑자들이 즐비하던 거리는 어느새 말끔해졌고 사람들의 얼굴이 밝았다. 영주가 착복한 재산을 풀어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고 영지민들의 세금을 감면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그의 전권으로 한 일이었지만 베르타스는 이실리스의 이름을 앞세웠고 그녀의 명성은 드높아졌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고 베르타스의 입에 미소가 번졌다. 그 언젠가 힐렌튼에서 느꼈던 그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제국민들과 비슷한 도시. 비슷한 나라. 이제는 나의 나라가 된 라르헨. 라르헨이 조금씩 발전하는 것을 보는 것이 그의 행복이었다.
발전한 나라를 보고 웃는 이실리스의 미소를 보는 것 또한 그의 기쁨이었다. 이실리스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떠나온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지만 이렇게 사무치도록 그리운 것은 내가 그녀에게 빠져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녀가 나의 심장을 쥐고 있기 때문인가.’
어느 쪽이든 같았기에 베르타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베르타스는 사람들을 다시 지켜보며 어두워지기 시작한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이곳은 제국의 수도보다도 더 늦게 해가 지는 국경 지역이었다. 그래서인지 어쩐지 이국에서 오는 낯선 설렘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순식간에 하얀 손이 눈에 들어왔고 이실리스가 늘 끼고 다니는 반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청혼할 때 사용한 반지였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감추지 못하고 그가 여자의 손을 잡았다.
놀란 여자가 그를 돌아보았고 푸른 눈동자에 얼핏 보인 머리카락은 붉은색이 아닌 금색이었다.
* * *
이실리스는 도착한 곳에서 한동안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전에 왔을 때 이곳은 한적한 들판이었는데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물씬 풍기는 허름한 건물들이 즐비한 곳으로 바뀌어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이상했다. 라르헨의 제국법상 영주 소유의 영지라도 어떤 지역을 개발하려면 황제의 허가가 필요했다. 다잔트에서 그런 보고를 받지 못했던 이실리스는 눈을 빛냈다.
결계가 사라지고 나서 첩보원으로 곳곳에 배치했던 마법사들을 불러들인 것이 문제였다. 각 지역 영주들의 위법을 보고하던 마법사들을 거두어들이자 어떻게 알았는지 여기저기서 영주들이 횡령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뤼르가 전했다.
“돌아가면 다시 파견해야겠군.”
외유를 나와 제국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한 이실리스가 마력석을 꺼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수도에서는 한밤중일 텐데, 늦은 시간에 연락했어도 멀쩡한 알뤼르였다.
“알뤼르, 국경을 수비하는 마법사들 말고 남은 인력이 얼마만큼 되지?”
-여유가 있는 숫자는 아닙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각 영지에 다시 파견해야겠다.”
-알겠습니다.
이실리스의 말에 그녀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잡아낸 알뤼르가 대답했다. 그녀의 충성스러운 수석마법사는 그녀가 돌아가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을 터. 마력석을 품에 넣은 이실리스의 걸음이 가벼웠다.
베르타스의 서신에 따르면 이곳의 사람들이 영주의 폭정과 비리로 인해 제대로 생활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생각했던 것과 분위기가 달랐다. 밝아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에 이실리스가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폐하께서?”
“그렇다니까!”
그녀에 대해 언급하는 제국민의 말이 들려오자 저도 모르게 귀 기울였다.
“그 못된 영주를 잡고 세금도 감면해 주셨다네!”
“허! 어쩐지 이번에 세금을 걷지 않더니!”
“이게 다 폐하께서 자비로우신 탓 아니겠나.”
“폐하의 부군께서도 너그러운 분이라고 들었네.”
“다 끼리끼리 만나는 것 아니겠나.”
조곤조곤 대화하는 사람들의 말에 이실리스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베르타스가 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벅차오르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제국의 황제로서 고군분투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반려가 생겼고 그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라르헨의 황제는 외로운 자리였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황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며 황제가 아닌 삶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통제된 삶을 살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지만 인간으로서 그들은 늘 외로움에 허덕였다.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줄 수 있는 반려를 만난다면 더할 나위 없었지만, 일반인들은 엄청난 마력을 지닌 마법사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느끼는 책임감과 가진 힘에서 나오는 권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베르타스를 만난 것이 행운이었지.’
그렇다. 그를 만난 것이 그녀에겐 행운이었다. 제국의 황제로서 그녀가 지닌 책임감에 어깨가 짓눌렸을 때, 베르타스를 만났고 그와 많은 것을 나누었다. 그녀의 외로움과 황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아픔을 알아봐 준 것은 베르타스가 유일했다. 적어도 이실리스는 그렇게 느꼈다.
걸어가다 문득 베르타스가 그리워졌다. 갑자기 사무치는 그리움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짙은 외로움을 느낀 이실리스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언제나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면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묻던 그는 지금 곁에 없었다. 그가 없다면 누가 나의 외로움을 알아줄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그녀가 올곧은 눈을 하고 앞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던 눈동자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제국의 황제가 나타났다.
‘마음이 약해졌군.’
좋지 않은 현상이었다. 일국의 황제라면 누구보다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는 게 필요했는데 이런 마음을 갖다니. 이실리스가 천천히 시장을 거닐면서 생각에 빠졌다. 형형색색의 마력석이 환한 빛을 뿌리기 시작한 시장의 저녁은 더운 열기를 품고 있었다. 사막 국가인 칼리파 제국과 맞닿은 곳이라 그런지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 실려 어디선가 꽃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간질였다. 라르헨에서는 흔히 맡을 수 없는 향기에 이실리스의 눈이 돌아갔다. 시선이 닿은 곳엔 사막에서 귀하다는 밀파르 꽃이 있었다. 흔히 볼 수 없는 꽃이 보이자 이실리스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십시오!”
“그 꽃, 파는 건가?”
“그렇습니다! 예쁜 아가씨가 오셨네! 귀족인가 봐요.”
칼리파 제국민처럼 보이는 남자는 이실리스를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한 송이 주게.”
상인에게서 꽃을 건네받고 대금을 치르려는 순간 그녀의 손목이 별안간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