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이실리스의 일탈(1)
이실리스는 서류를 넘기다 며칠째 비어있는 국부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마법사 부대가 가면 편하게 움직였을 텐데 마법 결계가 없어지고 나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결계가 없어진 후, 선황 부부는 아직 반역의 무리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궁에 눌러앉아 그녀의 딸을 끼고돌았다.
라르헨 제국이 보호된다는 보장이 없어서 한 곳에 마물이 쳐들어오면 다른 쪽에 쳐들어올 수도 있었기에 황제와 국부 중 누군가는 황궁을 지켜야 했다. 황성을 지키는 쪽은 대부분 이실리스였고 그녀를 두고 출정하는 쪽은 베르타스였다.
그렇게 제국을 지키기 위해 잦은 출정을 하는 베르타스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졌지만 이실리스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늘 위험한 곳으로 떠나는 그를 보는 마음이 편할 리가 있을까.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번에도 베르타스는 황성에 이틀도 머무르지 못하고 다시 출정했다.
“흠.”
군부를 개편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와 베르타스에게 기댄 권력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녀와 베르타스가 없을 때였다. 이 모든 일을 그녀의 딸이 해내야 한다는 것.
‘에리카가 할 수 있을지.’
에리카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문제는 에리카의 옆에 설 사람. 그 사람이 베르타스만큼 무력이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니 고민은 깊어졌고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을 때도 이실리스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는 그녀를 이상하게 생각한 호위 마법사가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을 때도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폐하?”
“무슨 일인가.”
“밤이 늦었습니다. 이만 침소에 드심이…….”
“아, 내 알아서 하지.”
그녀의 거절에 바로 허리를 숙이고 나가는 마법사를 바라보던 이실리스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읽어야 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베르타스가 보고 싶다는 것을.
창밖에 달이 환하게 빛났지만, 그녀의 마음은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자리를 비운 적이 없기에 더욱더 그러했다.
‘잠시 다녀오는 것도.’
괜찮겠지. 베르타스가 출정한 곳은 그녀도 얼마 전에 다녀왔던 곳이었으니 좌표는 이미 기억하고 있었다.
‘하필 그곳에 도적이 나타날 줄이야.’
우스만이 있는 칼리파 제국의 국경인지라 그녀가 움직인다면 제국 간의 분쟁이 생길 확률이 높았지만 안 들키면 그만인 것을. 일탈하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던 그녀였는데 어느새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도 많이 없었기에 길어야 일주일이나 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일정을 가늠하던 그녀가 밤늦은 시간, 베루스 공작을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부리나케 달려온 공작이 집무실에 들어서자 이실리스가 웃었다.
“뭘 그리 서둘러 왔나.”
“폐하께서 이 늦은 밤에 찾으시니 일이 있을까 하여 그렇습니다. 늙은이를 이렇게 당황하게 하시다니.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장난스러운 공작의 말에 이실리스가 마주 웃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베루스 공작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잠시 외유를 다녀오려고 하네.”
“외유요?”
잠시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베루스 공작이 알듯 말듯 한 표정으로 웃었다. 괜히 민망해진 이실리스가 고개를 피하자 베루스 공작은 아예 환하게 웃어버렸다.
“잠시 다녀오겠네.”
“알겠습니다.”
“선황께 잘 말해주게. 에리카에게도.”
“황태녀님께서 우실 겁니다.”
“그건 나도 알아.”
베르타스를 사랑하는 에리카였다. 때로는 이실리스가 질투 날 정도로 그를 따르는 아이였다. 아마 베르타스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면 에리카는 그가 없이 자랐을 터. 그게 미안하여 이실리스는 에리카에게 더 잘하려고 노력했다.
“다녀오십시오.”
제게 허리를 숙이는 베루스 공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굽혔던 허리를 펴면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연로한 신하이나 황제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도 중죄. 이렇게나마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던 일이 사라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라르헨의 복이지요.”
“고맙네.”
“감읍할 따름입니다.”
베루스 공작의 말에 이실리스가 가볍게 손짓했다. 집무실을 나서는 신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실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저었다. 마법으로 로브를 걸치고 손에 머리카락의 색깔과 눈동자 색을 바꿔주는 시약을 챙겨 들었다. 불법이지만 라르헨은 그녀의 제국. 그녀가 만든 이 시약의 존재는 아무도 알 수 없었으니.
대충 준비를 끝낸 그녀가 시약을 삼키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붉었던 머리카락은 금발로 변했고 군청색 눈동자는 새파란 하늘색으로 변했다. 생김새도 약간 변했다. 라르헨의 사람들이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흔한 얼굴이었다.
거울을 보고 대충 고개를 끄덕인 이실리스가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곧 밝은 빛과 함께 그녀의 몸이 사라졌다.
* * *
베르타스는 힐렌튼의 국경이자 칼리파 제국의 국경인 다잔트 지역에 발이 묶여 있었다. 마물이 등장했다는 소리에 와 보았는데 마물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도적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점조직으로 움직이는 도적 떼들의 행동에 머리가 아팠다.
‘마물은 어디를 가고.’
첫 보고에서 마물이 등장했다는 서찰을 받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랬는데 사실이 아니었다니. 이곳의 영주를 추궁했지만 되려 영주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의 기사단으로는 저 도적들을 없앨 수 없습니다. 우리도 라르헨의 제국민이 아닙니까, 제발 도와주십시오.]
황제에게 올라가는 서찰을 속여서 쓴 것도 모자라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영주의 태도에 칼을 휘두르려는 베르타스를 다한이 말렸다. 그러나 겨우 목숨을 부지한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안하무인으로 나오는 영주에게 베르타스는 결국, 칼을 휘둘러 그의 팔을 잘라버렸다.
그를 따라 출정 나온 마법사들이 황급히 영주의 팔을 붙였지만 제 팔이 잘린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영주는 그 자리에서 드러누웠고 사실상 이곳의 치안과 모든 일은 베르타스가 해결하게 되었다. 그게 그의 귀환이 늦어진 이유였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군.”
거짓말에 속아 이런 변방까지 온 것도 모자라 멍청한 영주 때문에 발이 묶여 있는 것도 화가 나는데 거기다 도적도 제대로 소탕하지 못했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베르타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주 안으로 일을 해결하여 수도로 환궁하고자 마음먹었다.
“너무 화내지 마시죠.”
“화를 내다니, 내가?”
“아니면 말고요.”
어째 점점 더 능글맞은 성격으로 변한 다한은 베르타스의 옆에서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솔직히 폐하를 못 보셔서 그런 거 아닙니까.”
옆에서 들려온 다한의 목소리에 베르타스가 피식 웃었다. 제 마음을 꿰뚫고 있는 수하는 때로 불편했다.
“모른척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어떻게 모른척합니까? 여기 온 첫날부터 빨리 해결하고 가야 한다고 한 건 각하셨습니다.”
베르타스가 라르헨의 국부가 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다한은 아직도 각하라는 호칭을 고수했다. 국부에게 특별한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그 이유였지만 전에 부르던 게 편하다면서 호칭을 고치지 않는 다한이었다.
“내가 그랬나.”
“그러셨습니다.”
단호한 다한의 말에 베르타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맞다. 그가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이실리스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었다. 그녀와 떨어진 시간 동안 힘들었기에 더는 이실리스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서글프게도 라르헨을 보호하던 결계가 드래곤과 한 인간의 탐욕에 의해 없어졌고 그 후폭풍은 고스란히 베르타스와 이실리스에게 돌아왔다.
“망할 드래곤.”
마법 결계를 없애고 싶었던 것은 베르타스의 염원이었다. 이실리스가 그것이 없어짐으로써 자유로워졌고 조금 더 행복해졌다고 믿었다. 결계를 없앤 것은 너무 잘한 일이었으나 제가 바빠진 것이 문제였다. 그와 같이 이실리스도.
“그래도 다행이지 않습니까, 덕분에 기사들의 입지가 올라갔습니다.”
“라르헨의 특수성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것을.”
마법사들의 나라인 라르헨은 기사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마법 결계로 인해 마물들은 라르헨에 침략하지 못했고 다른 제국들도 마찬가지였다. 국경을 쳐들어오는 것은 가능했으나 그 싸움에서 이길 방법이 거의 없었다. 철옹성이었던 라르헨의 결계가 무너지자 인접한 국경의 제국과 왕국에서 호시탐탐 라르헨의 땅을 노렸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이실리스가 보낸 마법사 대대의 위력에 무릎 꿇은 제국이 대부분이었다. 그 제국 중 칼리파 제국은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지만 우스만 칼리파는 라르헨의 결계가 없어지자마자 가장 먼저 화친을 주장하는 친서를 보낸 사람이었다.
“운도 좋은 놈.”
그게 아니었다면 당장 쳐들어갔을 텐데. 베르타스는 아직도 이실리스에게 거짓을 말했던 우스만을 잊지 않았다. 언제고 갚아주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때마침 칼리파 제국과 인접한 국경이었으니 조금쯤 수를 써도 나쁘지 않겠지.
“다한 경. 우스만 칼리파가 언제 도착한다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