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그대로 문을 나서는 베르타스를 향해 차마 욕은 뱉을 수 없었던 다한이 불퉁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저렇게나 보고 싶으실까.”
뻔했다. 황제 폐하를 보러 가는 것이겠지. 사랑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데 저 냉정한 남자를 저렇게 만든 것일까. 문득 그것이 궁금했다.
* * *
시간은 흐르고 흘러 라르헨도 안정기에 접어 들었다. 광역 결계가 없어지고 나서 라르헨의 제국민들은 불안에 떨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불안한 감정을 갈무리했다. 라르헨에서 살아가는 것이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실상 그들로서는 광역 결계가 사라졌다고 해서 불편함을 많이 느끼지 못했다.
전쟁으로 죽는 라르헨의 제국민들은 드물었기에, 오히려 귀족들에게 세금을 내지 못해 죽는 사람이 전쟁으로 죽는 사람보다 많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 빠르게 일상생활로 돌아왔으며 평상시와 같이 생활했다.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좋아진 것도 있었다. 귀족들이 그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광역 결계가 없어지자 영지민들의 협조가 이루어져야만 영지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르헨의 마법사들과 기사들은 더욱 바빠졌다. 제국민을 함부로 수탈하여 병력을 채우고 자산을 불리려는 귀족들을 단속하느라 하루가 멀다 하고 먼 곳으로 나다녔다. 그런 그들의 노력에 힘입어 제국민들에게 함부로 대하던 귀족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라르헨은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
“페트라 라르헨은?”
베르타스는 그의 집무실로 찾아온 타르토스를 마주하고 있었다. 선황 내외는 라르헨이 안정될 때까지 돌아가지 않는다면서 아예 황성에 눌러앉았다. 이유는 그럴싸했지만, 그것이 핑계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다. 이실리스가 없었던 기간 동안 선황 내외가 에리카의 재롱에 푹 빠졌다는 것은 황성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거의 다 되어 갑니다.”
자객을 보내기엔 페일러스의 눈치가 보였다. 들키지 않고 처리하는 방법은 단 하나 독살이었다. 페트라가 마시는 회복 포션엔 수은이 섞여 있었다. 아주 미세한 양이지만 그것을 매일 같이 마신다면 상태가 나빠지는 것은 당연했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하자 베르타스가 비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오래 버티는군.”
“누군가 듣습니다.”
“황궁에서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목숨이 어찌 될지 알 텐데 듣기는 무슨.”
라르헨의 황성은 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페트라 라르헨이 심어 놓았던 모든 시종과 시녀가 축출되었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쭙잖은 생각으로 에리카에게 접근했던 귀족들은 모두 베르타스의 검에 피를 흘렸다.
“그래도 조심해야 합니다.”
베르타스가 염려한 자는 페일러스. 그의 어머니가 베르타스로 인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 페일러스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페일러스는 페트라와 같이 있지 않고 이토르트 항구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실리스의 명령 때문이었다.
「그간 대공 페일러스가 라르헨에 기여한 바가 많은 바, 그 공을 인정하여 페트라 라르헨의 목숨을 빼앗지 않겠다. 단, 페일러스 라르헨은 지금처럼 이토르트 항구에 머무르며 페트라 라르헨과의 접촉을 금한다.」
황명은 지엄한 것.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페일러스는 이토르트 항구로 향했고, 두 번 다시 수도로 오지 않았다. 이실리스가 불러도 답하지 않는 그를 흡족하게 생각하는 타르토스였다.
“페일러스가 걱정이라면 내가 없애주지.”
“누군가 듣습니다.”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하는 베르타스에게 비죽이 웃어 보인 타르토스가 속삭였다.
“너도 원하는 것, 아닌가?”
“에리카를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그럼 너를 생각한다면?”
“페일러스가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그는 나의 형제와 같은 친우이니.”
솔직한 베르타스의 말에 타르토스가 웃었다.
“좋다. 이번엔 내가 나서주지.”
“네?”
“내가 그에게 서약의 샘물을 마시게 하겠다.”
“그 빌어먹을 샘물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까?”
“이 세상에 단 하나 남은 거지. 그렇다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 아닌가.”
“조건을 까다롭게 거셔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와 같은 일이 생기니까요.”
“명심하지.”
에리카와 에리카의 후손들도 노리지 못하게 해 주겠다고 장담하는 타르토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집무를 보고 있을 때마다 찾아오는 타르토스가 이제는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왜 또 오셨습니까.”
“에리카에게 아일라를 빼앗겼다.”
“손녀에게 그런 표현은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어쩌라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타르토스는 손녀를 둔 할아버지라기보다는 개구진 청년 같았다. 그를 보며 웃던 베르타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면 이실리스는 어디 있습니까? 오늘은 에리카와 시간을 보내겠다고 했는데요.”
“집무를 보겠다며 집무실로 갔지.”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손을 흔드는 타르토스를 뒤로 하고 베르타스는 이실리스가 있을 집무실로 향했다. 가는 길에 정원을 가로지르는 것이 빨라 정원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이실리스가 마법처럼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실리스.”
“베르타스.”
“왜 여기에…….”
“그대가 보고 싶어서.”
저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는 차오르는 기쁨을 숨길 수 없었다. 얼굴에 만연한 웃음을 숨기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는 이실리스가 아름다웠다. 찬란한 햇빛이 비추는 그녀의 얼굴은 감히 그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빛나고 있었다. 가만히 손을 뻗어 그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에 얼굴을 내맡긴 채 웃고 있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그도 따라 웃었다. 서늘한 바람이 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고 둘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
“그…….”
서로 웃으면서 먼저 말하라 재촉했다. 베르타스의 양보를 받은 이실리스가 그에게 살며시 속삭였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뭘…… 말이지?”
“내 곁에 있어 줘서.”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황제인 내 곁에 국부로서 자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게 라르헨의 제국민이 아닌 힐렌튼의 사람이라면 더욱 그랬겠지. 그랬는데도 내 곁에서 함께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네.”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래도 힘들었을 거야. 그대가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내가 너무 살피지 못해 미안하네.”
어색한 표정을 짓는 이실리스를 바라보던 베르타스가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긴 이실리스가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두근대는 심장 박동이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베르타스의 심장은 아직도, 여전히 그녀를 향해 세차게 뛰고 있었다.
“사랑해.”
“베르타스.”
“사랑하고 있다. 이실리스. 앞으로도 그리고 영원히 너만을 사랑할 거야.”
“에리카가 들으면 섭섭할 소릴 하는군.”
그의 입에서 나온 사랑 고백이 쑥스러웠던 이실리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르타스가 다시 말했다.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의 이 마음을.”
그의 목소리에 절절한 애정이 묻어있어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베르타스는 늘 그랬다. 그녀가 생각하지도 못한 사랑을, 그리고 애정을 퍼부었다. 이런 사랑을 받아 본 것은 처음이라 이실리스는 그에게 무슨 말을 들려줘야 할지 몰랐다. 그가 원하고 있는 말은 알고 있었으나 그 짧은 세 단어로 그녀의 마음을 모두 표현하기엔 부족함을 느꼈다.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가만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나의 여인. 이실리스 라르헨.”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주는 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는 저를 안다면 베르타스는 아마 다시 말하겠지. 사랑한다고. 그럼 또 그녀는 답을 하지 못하고. 그의 사랑에 답하기엔 자신의 사랑이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아 이실리스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베르타스는 아마 원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자유롭게 그에게 사랑을 표현하기를.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던 이실리스 라르헨은 이제 없었다. 나라를 다스릴 때 신하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게 되었고, 베르타스의 말을 경청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알 수 있었다. 베르타스는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기다렸던 거였다. 서툰 제가 그 마음을 표현해 주기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더 많이 아껴주고 더 많은 애정을 보여주기를 기다렸던 것이었다.
저를 내려다보는 베르타스의 눈을 마주한 이실리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
“나도 사랑해.”
“앞으로는 그 말을 더 많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폐하.”
“그리하겠네.”
그녀의 답을 들은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의 몸을 번쩍 들어 높이 올렸다. 어릴 적의 기억처럼 이실리스가 하늘을 바라보며 웃었다. 오랜만에 바라본 하늘은 베르타스와 봤던 그때처럼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구름은 파란 하늘 위를 흘러가고 있었고 그것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있는 지금, 이 순간이 제일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도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실리스.”
“베르타스.”
내려다보는 이실리스를 바라보는 베르타스의 눈동자엔 숨길 수 없는 욕망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땅에 내려주지 않고 여전히 들어 올려 안고 있는 그의 얼굴에 키스의 비를 내리면서 이실리스가 낮게 속삭였다.
“사랑해.”
“나도.”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어.”
“에리카가 들으면 섭섭해하겠군.”
조금 전, 그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는 베르타스에게 다시 입술을 내렸다. 그녀의 입술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그의 열기가 천천히 그녀의 입안을 유영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키스는 그녀를 포근하게 감쌌고, 둘의 입맞춤을 목격한 황궁의 사람들은 서둘러 몸을 돌렸다.
햇볕은 따뜻했고, 바람은 서늘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고, 그 사람과 사랑을 속삭이는 이 순간은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이었다. 베르타스와 이실리스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 걷고, 함께 울고, 함께 행복하고, 함께 살아갈 터였다.
남편은 필요 없습니다. -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