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다루는 자들이 헛된 생각을 갖지 않도록 감시해라.”
“명심하겠습니다.”
마법사들에게 간단한 지시를 마친 이실리스가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집무실 앞에 서자 문이 벌컥 열리고 알뤼르가 나왔다.
“폐하. 안 오시는 줄 알고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왔으니 됐지 않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이실리스를 따라 알뤼르가 움직였다.
“귀족들의 동태는 어떻지?”
“생각하신 그대로입니다. 당황하고, 당황하고 또 당황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광역 결계가 주는 편안함에 물들어 버린 그들이 영지를 공격하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벌써 마법사부대를 요청하는 귀족들이 있습니다.”
“이유는? 다른 제국에서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왜 마법사를 요청하지?”
“두렵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제정신이 아닌 자들이 많군.”
이실리스가 차게 웃으면서 알뤼르가 건넨 서류를 읽었다. 전부 보충 병력을 요청하는 귀족들의 서신이었다. 이들의 요구대로 군사를 보내면 라르헨의 요충지를 지킬 병력이 부족하다.
“불허한다.”
“명 받듭니다.”
“다른 안건은?”
“여기 있습니다.”
알뤼르가 내민 서류를 천천히 읽는 이실리스의 등 뒤로 따뜻한 햇볕이 내렸다.
* * *
베르타스는 이실리스가 침실을 벗어나자마자 외출할 의복으로 차려입었다. 이실리스에겐 조금 더 쉰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많은 날이었다. 침실의 문을 열고 나서는 베르타스의 눈앞에 다한이 나타났다.
“늦으셨습니다.”
“그렇게 빙글거려도 상관없다.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니.”
“재미가 없습니다. 각하.”
“재미있으라고 한 것이 아니야. 어떻게 되었지?”
“각하의 말대로 뒤에 사람을 붙였습니다.”
다한에게 그가 명령한 것은 단 하나, 페트라 라르헨의 뒤를 밟으라는 것이었다. 혼잡한 틈을 타 페트라는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의 뒤를 밟아 기어이 있는 곳을 찾아낸 다한이었다.
“경의 능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군.”
“각하께서 자리를 비운 동안 저도 놀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씨익 웃으면서 말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을 상대할 때도 그랬다. 그의 기사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라르헨을 지키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잘해주었네.”
“이제 우리는 이곳 사람 아닙니까.”
이번 사건으로 인해 힐렌튼에서 라르헨으로 넘어온 기사들의 입지가 더욱 공고해졌다. 마법을 중요시하는 라르헨에 제대로 섞일 수나 있을까 염려했었는데 드래곤의 공격으로 인하여 오히려 기사 양성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라르헨 사람들이었다.
그뿐이랴. 라르헨의 광역 결계가 사라지자 마법사를 요청하는 귀족들이 늘었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으로 될 수 있는 마법사의 수는 한정적이었다. 수석 마법사인 알뤼르가 보낼 수 없다 답하자 베르타스에게 사람들이 찾아왔다.
“국부, 기사를 양성해 주시오!”
이실리스가 마련해 준 집무실에 들어와 방해하는 귀족들이 마뜩잖았다. 가뜩이나 바쁜데 이런 일로 사람을 찾아와서 귀찮게 구는 저들에게 한마디 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그가 싸늘한 눈을 들어 찾아온 귀족들에게 말했다.
“지금이야 불안하겠지. 허나, 아직 그 어떤 영지도 야만족의 침략이나 타 제국의 침입이 있었다는 소릴 듣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렇게 닦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동안 너무 편히 살았으니 이제 그 대가를 치를 때도 되지 않았나?”
베르타스의 말에 발끈한 귀족들이 소리높여 항의했다.
“편하게 살았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그렇소! 국부께서 말을 너무 함부로 하셨소!”
“어서 사과하시오!”
귀족들의 외침이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뭘 하든 불평이고 불만만 늘어놓는 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실리스가 베푼 호의에 기대어 살던 자들이었다. 하나를 내놓으면 열을 더 내놓으라고 말할 것이 분명했다.
‘저런 쓰레기들에게 도움은 무슨…….’
기사들을 파견한다고 해도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돌아올 것이 뻔했다. 베르타스는 아끼는 기사들이 그런 꼴을 당하는 것을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편하게 산 것이 아니라고?”
“그렇소이다! 우리도 나름…….”
“나름?”
“그렇소만…….”
어깨 위로 넘실대는 베르타스의 오라에 항의하던 귀족들이 얼어붙었다. 얼마 전, 그가 드래곤을 베었다는 사실이 기억난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드래곤을 사냥한 자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불평하면서. 그 사실을 눈치챈 귀족들이 몸을 사렸으나 이미 늦었다.
“그대들 중, 단 한 명이라도 타국에서 라르헨에 쳐들어왔을 때 나선 자가 있나?”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대들 중, 단 한 명이라도 타국에서 라르헨에 쳐들어왔을 때 그들을 물리친 황제 폐하께 감사하다 말한 사람은 있나?”
“국경을 수호하는 것은 폐하의 의무…….”
“그렇다면 귀족들의 의무는 무엇인가?”
앞으로 나선 한 귀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르타스가 물었다.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광역 결계를 유지하는 황제에게 감사하다 말을 전한 자가 있나?”
또 말이 없었다. 이리저리 눈치만 보는 귀족들의 행태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귀족의 의무도 모르는 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렇게 멍청한 자들이 라르헨의 귀족이라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제국이 돌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 광역 결계와 이실리스의 힘이었다.
‘그 아래에서 놀고먹어 놓고 이제 와서 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귀족이라면 응당 황제를 모시고 황제를 대신해 제국민을 지켜야 하는 자들인데 그런 것은 하나도 하지 않고 보호해달라 아우성이니 이실리스의 피곤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저들이 일반 제국민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누리고 있는 특권에 비해 제대로 된 의무를 행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조만간 귀족들의 작위를 박탈할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았다.
“돌아가게. 내가 자네들에게 해 줄 것은 없는 것 같군.”
“국부께서 우리에게 이럴 수는 없소!”
“왜 없지?”
“우리는 라르헨의 귀족이오!”
“그런데?”
베르타스의 말에 귀족들의 입이 다물렸다.
“그런데 어쩌라는 것인가. 귀족인데? 귀족이 귀족다워야 대접을 하는 것이지. 여기 와서 이렇게 말을 늘어놓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럴 것이 아니라 영지로 내려가서 영토를 지켜야 하지 않나? 그대들을 믿고 따르는 영지민들은 어쩌고 여기 와 있는 거지?”
“그것은……!”
“결계도 없어진 마당에 스스로의 땅은 스스로가 지켜야 할 것 아닌가. 영지전이라도 일어나면 어쩌려고 여기 와 있는 거지?”
옆의 영지가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영주인 귀족은 영지전을 열어 영지를 확장할 수 있었다. 물론 황제의 허락이 있어야 하지만 이실리스가 허락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귀족들의 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그 정도는 당연한 것이니까.
영지의 크기가 너무 커지지만 않는다면 적당한 영지전은 귀족들을 견제하기에 적격이었다. 광역 결계가 없어진 지금 귀족들은 더는 사이좋게 지낼 수 없다. 그 점을 정확하게 파악한 베르타스의 말에 귀족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와…….”
입을 떡 벌리고 손뼉을 치는 다한을 보면서 베르타스가 차갑게 웃었다.
“힐렌튼에서 자주 있던 일이 아닌가.”
“그랬죠. 그런데 이 꼴을 라르헨에서 또 보네요.”
“그럴 수밖에 없지. 이제 라르헨도 다른 제국과 똑같은 위치에 있으니.”
아직 광역 결계가 사라졌다는 소식은 라르헨의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각 나라의 첩자들이 있으니 결계의 소멸은 당연히 퍼질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광역 결계가 없어진 라르헨을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건드리겠지.’
그리고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라르헨을 건드린 것은 실수라는 것을.
광역 결계가 사라졌다고 해서 라르헨의 저력인 마법사 부대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라르헨은 어느 제국보다도 압도적으로 마법사의 수가 많았다. 이실리스를 필두로 한 마법사 대대는 그 어떤 기사단보다 강력하다.
‘드래곤만 아니었다면 마법의 한계를 몰랐겠지.’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힐렌튼에서 온 기사들이 설 자리도 없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마법사들에게 괄시당하면서 살았을 것이 뻔했다.
‘다행이군.’
모든 것은 베르타스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 라르헨의 광역 결계가 사라진 것도, 그의 기사들이 라르헨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던 것도 모두 보클로엠 덕분.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모든 것을 이루게 해 준 보클로엠은 그의 손에 죽었다.
‘아니, 아니지.’
엄밀히 말하자면 이베르트의 손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베르트가 보클로엠을 구속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도 이실리스도 보클로엠을 죽일 수 없었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군.”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아닐세.”
옆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다한 경이 물었지만 베르타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곳을 빠져나간 귀족들도, 이베르트도 그리고 베르타스도 사람이기에 욕심내고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불문율이었다.
깨지지 않는 법칙과도 같은 그 욕망의 논리. 그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베르타스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실리스보다 강한 힘을 지녔다면 어떠했을까.
“그래도 난 그녀와 사랑에 빠졌겠지.”
“네?”
“아니, 아니야.”
자꾸 혼잣말하는 그에게 의문을 표하는 다한의 물음을 귀로 흘리면서 베르타스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결론은 단 하나였다. 그가 어떤 모습, 어떤 상황에 있었더라도 이실리스를 만났다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녀에게 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나의…… 태양.’
붉게 빛나는 태양과 같은 그녀는 그가 닿을 수 없는 보석과도 같았다. 그랬는데 그 태양을 손에 쥐었고, 차지했으며, 아이를 얻었다. 더없는 행복이었다. 이실리스를 생각하자 그녀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베르타스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각하.”
“난 가봐야겠어.”
“방금 왔는데 어딜 가신다고 하십니까.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고요.”
“급한 것은 자네가 처리하게.”
한숨을 내쉰 다한이 다시 베르타스를 향해 불만을 보였다.
“라르헨으로 돌아오신 지 이제 겨우 며칠 안 되지 않으셨습니까. 그동안 제가 한 일을 보세요. 엄청나다고요! 그런데 이 일을 또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돌아와서 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