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이실리스의 말에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인간은 그 일을 할 수 없다. 애초에 드래곤이 아니었다면 광역 결계도 없었다.”
“허나 폐하……!”
페트라의 주변에 있던 귀족 하나가 일어나서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그런데 자네들 영지는 괜찮나?”
베르타스의 말이 떨어졌다. 그제야 깨달은 듯한 귀족들을 보면서 베르타스가 다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광역 결계가 사라졌으니 마물이 들끓을 테고, 노리고 있던 야만족도 쳐들어올 테고, 당장 국경 근처의 영지들이 문제로군.”
상황 판단을 끝낸 귀족들이 앞다투어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다.
“폐하! 소신이 폐하께 충성을 바치겠으니 마법사를 지원해 주소서!”
“그게 무슨 말이오, 백작! 백작의 영지는 국경에 있는 것도 아니잖소! 이쪽이 더 급하오! 폐하, 이쪽이 더 급합니다!”
떠들썩하게 외치는 귀족들을 향해 시선도 주지 않은 이실리스가 그대로 몸을 돌려 본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를 따라서 움직이는 베르타스와 마법사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사들이 있었다. 귀족들도 본성 안으로 들어가려다 그 앞을 막아서는 기사들에 의해 들어갈 수 없었다.
“비켜라!”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비키래도!”
“그럴 수 없습니다.”
본성의 문을 굳건하게 지키는 기사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씩씩대던 귀족들은 어서 영지를 챙겨야 한다고 외치는 소리에 서둘러 황성을 떠났다. 새로운 라르헨의 시작이었다.
* * *
“이실리스.”
본궁의 집무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이실리스를 베르타스가 불렀다. 어딘지 씁쓸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을 눈치챈 그가 물었다.
“마음이 안 좋나?”
“아니, 아닐세. 저들도 이제 스스로를 지켜야 할 때가 온 거지.”
“귀족들에게 사병을 키울 권한을 줄 건가?”
“아니, 국경은 마법사와 기사가 책임진다. 귀족들에게 군권을 내줄 수는 없지.”
“영명하신 폐하의 판단에 그저 감탄할 따름입니다.”
베르타스가 장난스럽게 말을 꺼내자 이실리스가 그를 향해 손짓했다. 순식간에 깨끗해진 몸을 보면서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언제는 마법을 함부로 쓰지 않겠다더니.”
“이젠 상관없지. 광역 결계를 유지할 필요도 없으니 마력이 새어나갈 일도 없고.”
“보클로엠과 이베르트를 이곳에 데려온 것을 후회하나?”
“아니, 데려오지 않았어도 저들은 이곳을 찾아왔을 것이다. 차라리 이게 가장 나은 결과야.”
“왜지?”
“이베르트의 배신으로 드래곤을 사냥할 수 있었으니 라르헨의 위상이 더 높아지겠지. 드래곤을 사냥한 국가에 함부로 쳐들어올 나라는 없을 테니.”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한 이실리스의 판단력에 감탄하면서 베르타스가 손뼉을 쳤다.
“뭐 하는 겐가.”
“우리 폐하께서 너무나도 잘하고 계셔서.”
“그것은 칭찬인가 아니면 날 비꼬는 것인가.”
“칭찬이지.”
이실리스의 허리에 손을 뻗어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기게 된 이실리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게 아주 만족스럽다, 이실리스.”
“뭐가 말인가.”
“광역 결계가 없어진 것이.”
“결계가 없어진 게 만족스럽다고?”
“그래. 적어도 에리카에겐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되니까.”
“베르타스.”
그가 에리카를 언급하자 이실리스의 표정이 흐려졌다.
“페트라 라르헨이 한 짓을 들었다.”
그녀가 회피하고 있는 문제를 정확하게 짚는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페트라는 드래곤에 의해 팔을 잃었다. 술식을 그릴 수 있는 손을 잃었으니 벌은 받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제는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테니.
“그냥 내버려 둘 것은 아니지?”
“그녀는 페일러스의 어머니다. 선황의 자매가 되는 사람이고.”
“그게 어때서?”
“베르타스.”
“황족이 황위에 오르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형제 자매를 척살하는 일이다. 너는 너무 물러.”
“페일러스는 너의 친우이기도 하지 않나.”
“페일러스 때문에 나의 딸이 위험에 처한다면 나는 당연히 그를 버릴 것이다. 너는 아닌가?”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는 생각에 잠겼다. 고민은 깊어만 갔다. 여태까지 라르헨에 헌신한 페일러스를 버릴 수 없었다. 목숨만 살려달라고 부탁했던 그가 아닌가. 마법도 사용할 수 없고 그저 귀족이라는 지위만을 갖게 된 페트라가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계속 망설이는 이실리스를 향해 한숨을 내쉰 베르타스가 고개를 저었다. 유독 페일러스에게 약한 그녀였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뭐?”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폐하.”
“무슨 말을 하는 겐가.”
“귀족을 처리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마법사였던 귀족이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니 산적을 만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혹은 그동안 원한을 품었던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고요.”
싱긋 웃으며 말하는 베르타스의 얼굴이 무섭게 변했다.
“나는 그동안 저 여자가 너에게 한 짓을 들었고, 우리 딸에게 한 짓을 들었다. 절대 살려 보낼 수 없어.”
“베르타스.”
“네가 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하겠다. 우리 고고하신 폐하께서 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이 베르타스 라르헨이 딸과 부인을 위해서 하겠다.”
“…….”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를 부인이라 칭하는 베르타스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페일러스에게 뭐라 말을 해야 하는가.’
친애하는 사촌은 저만을 믿고 있을 텐데. 다시 생각에 잠기는 얼굴을 빤히 보던 베르타스가 그녀의 얼굴을 잡았다. 저를 직시하는 이실리스의 군청색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그가 속삭였다.
“설마 지금 다른 남자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폐하?”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페일러스를 생각하신 게 아니라고요?”
“아니, 그것은…… 흣!”
저를 향해 말하는 이실리스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녀와 말하지 않은 기간은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동안도 그리웠다. 저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그리웠고 함께하던 모든 것이 그리웠다. 왜 화를 냈을까.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입안을 타고 넘어오는 뜨거운 열기를 느끼면서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의 몸을 움켜쥐었다.
“베르타스, 여기는 집무실……!”
“제가 좀 급합니다. 폐하.”
“잠깐……!”
그의 힘에 밀려 집무실 책상에 몸을 기댈 수밖에 없었다. 닿아온 몸이 뜨거웠다.
* * *
눈을 깜박이는 이실리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베르타스의 벗은 상체였다. 탄탄하게 짜인 근육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가 어제의 기억을 떠올렸다. 집무실에서 시작된 것은 침실에 와서야 끝났다.
곤하게 자는 베르타스의 얼굴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찌뿌둥한 몸을 마력을 사용하여 회복시킨 이실리스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주무십시오, 폐하.”
“자는 것이 아니었나?”
“자는 겁니다.”
눈도 뜨지 않고 말한 베르타스가 그녀를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강하게 제 몸을 옥죄는 강한 힘에 이실리스가 몸에 힘을 풀었다.
“주무시죠.”
“할 일이 많아.”
“아니, 우린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야, 이실리스.”
“베르타스.”
“자자고.”
계속 눈을 감고 있는 그를 향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은 이실리스도 눈을 감았다.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햇볕이 그녀를 감싸자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베르타스의 말대로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이실리스는 의자에 앉아 저를 바라보고 있는 베르타스와 마주했다.
“왜…….”
“잘 자더군.”
그렇게 자는 것이 보기 좋았다고 말하는 베르타스를 향해 웃었다. 오랜만에 편히 잤다. 그녀가 원했던 휴식이었다.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녀를 찾는 누구도 없는 그런 잠. 아주 오랜만이었다.
“이제 뭘 할 거지?”
“정무를 봐야지.”
“조금 더 쉬는 게 좋겠어, 이실리스.”
걱정하는 베르타스에게 이실리스가 손짓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 그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국부께서 걱정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이젠 일을 할 시간이라네.”
“그렇습니까, 폐하?”
“그러니 지금은 이것으로 참아주게.”
“그럼 다음을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달이 구름에 걸릴 때쯤에.”
“알겠습니다.”
흡족하게 웃는 베르타스에게 미소를 보인 이실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그녀의 옆에 서서 직접 옷을 정리하는 그를 보는 것이 즐거웠다. 거울 앞에 앉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옆에 있는 빗을 들어 천천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는 베르타스의 눈빛이 진지해 보였다.
‘무엇을 생각하기에 저리 진지한 눈을 하는지.’
궁금했다. 베르타스는 저의 머리를 매만지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베르타스.”
부름에도 답하지 않고 계속 진지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 머리카락을 빗던 베르타스가 그녀가 아무런 말이 없자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고 있지?”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친 이실리스에게 묻는 그의 목소리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서려 있었다.
“너무 열심히 내 머리카락을 만지는 거 같아서.”
“아…… 싫었나?”
“아니, 그게 아니고…….”
“아니고?”
“시녀들 외에 누군가 내 머리카락을 빗겨 준 것은 처음이라 그랬네.”
“에리카에겐 많이 해줬어.”
“아이가 아닌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
당연한 것 아니냐는 베르타스의 말에 절로 입이 다물렸다. 애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저 머리카락을 맡긴 채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즐겁다는 듯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긴 베르타스가 이젠 머리칼을 땋아 올렸다.
“이게 대체…….”
“왜, 별로인가?”
“아니, 이건 어떻게…….”
“에리카에게 해주면서 배웠지.”
뿌듯하게 웃는 베르타스를 향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자리에서 일어날 뿐.
“잘 다녀오시죠, 폐하.”
“그대는?”
“저는 조금 후에 가렵니다.”
잠시 더 빈둥대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베르타스를 바라보다 침실을 나섰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성장을 갖추고 나온 그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폐하, 그 옷과 머리카락은…….”
“신경 쓰지 말라.”
앞서 걷는 그녀의 뒤를 따르던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수석 마법사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디에 있나.”
“집무실에 계십니다.”
“드래곤의 심장과 이그나르도의 마력석은 어찌 됐지?”
“마탑에서 연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