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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148/161)

147화.

절반이 넘는 마력을 심장에 보관하고 있던 보클로엠은 기사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드래곤의 피가 황궁을 뒤덮었고, 이실리스의 공격 마법이 보클로엠을 향해 뿌려졌다. 아무렇지 않게 마력을 사용하여 방어하던 보클로엠이 당황한 움직임을 보였다.

“마법사들은 공격 마법을 시전하라!”

이실리스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마력을 일으키는 라르헨의 마법사들이었다. 끊임없이 떨어지던 화염은 줄어들어서 더 이상 결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결계를 없애지 말라느니 하는 귀족들의 헛소리가 들렸지만, 마법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 마법을 시전했다.

“갈라진 틈을 노려라!”

마법사들의 공격 마법이 그 틈을 노리고 쏟아졌다. 이실리스도 쉬지 않고 공격 마법을 쏘았지만, 드래곤을 쓰러트릴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이 존재를 없앨 수 있는가. 자신이 배웠던 모든 것과 익혔던 모든 것을 떠올렸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실리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환한 빛무리가 드래곤의 목을 향해 튀어 오르고 있었다. 베르타스가 오라를 일으킨 검을 쥐고 보클로엠에게 뛰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베르타스…….”

살아있었다니. 베르타스의 모습 뒤로 마력을 갈무리하는 아일라와 타르토스의 모습도 보였다.

“어머니, 아버지.”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을 숨기지 않으며 이실리스의 시선이 베르타스를 향해 움직였다.

강력한 오라를 두른 베르타스의 검이 보클로엠의 목을 내려쳤다. 갈라진 틈을 정확하게 노린 그의 검날에 보클로엠의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넘어지는 거대한 몸체에 황궁의 별궁이 무너져 내렸다. 마법사들이 날아올라서 보클로엠의 목에 화염 마법을 날렸다.

“태워야 한다, 다시 붙지 못하게!”

기사들도 달려가 횃불을 가져왔다. 장작을 던지는 기사들과 화염 마법을 퍼붓는 마법사들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속삭였다.

“별거 아닌 존재였구나.”

혼자서 해결하려고 할 때는 그렇게 커 보였던 존재가 여럿이 힘을 합치니 별것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실리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 * *

베르타스는 눈앞에 쏟아지는 화염을 그대로 맞을 뻔했다. 그의 앞에 나타난 타르토스가 보호 마법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를 돌아보며 웃는 타르토스의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감사합니다.”

“약속이나 잊지 말아라.”

멀리서 달려오는 아일라를 보면서 타르토스가 그에게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아일라가 들으면 안 되는 말을 한 것처럼.

“저 존재를 없애야 해.”

“아일라.”

가까이 다가온 선황이 베르타스를 향해 말했다. 격노한 그녀가 베르타스를 향해 뭐라 입을 열려 하자 타르토스가 선황의 이름을 불렀다.

“저 존재가 제국의 해가 될 거다. 지금은 광역 결계를 가져가는 것으로 끝났지만 드래곤은 본디 탐욕스러운 존재.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니 없애라.”

“아일라.”

“그러니 없애 다오.”

“그것은 우리가 강요해선 안 돼.”

타르토스의 말에도 선황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베르타스가 죽은 것으로 판단한 이실리스가 보클로엠을 향해 몸을 날리는 것이 보였다. 그가 검을 움켜쥐고 뛰어들 준비를 하자 타르토스가 그의 어깨를 잡고 속삭였다.

“드래곤의 약한 부분은 목이지. 가장 좋은 것은 드래곤의 목을 잘라버리는 것. 근력 강화 마법을 걸어주지.”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내 딸에게 진 빚을 갚는 것으로 하지.”

베르타스에게 근력 강화 마법을 사용한 타르토스가 다시 부유 마법을 일으켰다. 베르타스가 뛰어오르자 그에게 마력을 사용하여 더 높게 띄워주었다. 공중으로 솟구친 베르타스는 타르토스를 향해 감사의 의미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제 저 드래곤을 죽여야 했다. 

‘촤아악!’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베르타스의 검이 단숨에 휘둘러졌다. 드래곤의 거대한 몸이 별궁으로 쓰러지고 그것의 머리가 낭자한 피를 흩뿌리며 귀족들의 앞으로 떨어졌다.

“으아아악!”

“이게 뭐야!”

제대로 피도 보지 않은 자들이었다. 국경에서 다른 나라가 침입할 때마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하던 자들이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을 향해 비소를 던진 베르타스가 피범벅이 된 몸으로 이실리스를 향해 걸었다.

머리는 다 헝클어지고 여기저기 옷이 찢어졌지만 환한 웃음을 제게 보이는 그녀가 아름다워 그도 환하게 웃었다.

“베르타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달려와 안기는 이가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까.

손에 피가 가득하여 끌어안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실리스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면서 속삭였다.

“죽은 줄 알았다.”

“죽지 않았어.”

“알아, 아는데…….”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의 어깨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앞섶이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낀 베르타스가 조심스럽게 이실리스의 등을 쓸었다.

“괜찮아.”

“네가 죽은 줄 알았다.”

“안 죽었다니까.”

“죽은 줄 알았다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이실리스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그 순간, 뒤에서 비통한 외침이 들려왔다.

“보클로엠!”

이베르트의 목소리였다. 보클로엠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것인지 이베르트의 몸이 손끝부터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베르타스의 품에 얼굴을 기댄 이실리스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베르타스는 고스란히 보았다.

분수에 맞지 않은 것을 탐낸 어리석은 자의 최후였다.

겨우 진정된 이실리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위험한 일은 하지 말아라.”

“나의 황제께서도 그렇게 하신다면.”

“약속하지.”

“그렇다면 나도 약속하지.”

이실리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베르타스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섭섭했던 마음은 모두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애정으로 가득 채웠다.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 황제가 부군을 끌어안고 있으니 귀족들도 마법사들도 기사들도 그 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보다 못한 알뤼르가 나서서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아, 알뤼르.”

그녀의 눈가가 붉어진 것을 알뤼르도 보았지만 베르타스의 날카로운 눈빛에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손을 들어 눈가를 닦은 그녀는 순식간에 근엄한 황제의 얼굴로 돌아왔다.

“무슨 일인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이 산더미입니다.”

“알았네.”

알뤼르의 말에 뒤를 돌아보니 많은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오겠네.”

“함께 가지.”

“이제 화는 다 풀렸나?”

“지엄한 황제에게 화를 내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십니까, 폐하.”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말하는 베르타스를 보니 웃음만 흘러나왔다. 평화로웠던 시간은 잠시, 이제 득달같이 달려들려는 저 승냥이 떼들을 향해 걸음을 옮겨야 할 때였다.

“마법사 1개 대대는 나의 부름에 답하라!”

“하명하소서!”

이실리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법사들이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다.

“드래곤의 사체는 중요한 연구자료이니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분리하여 마탑으로 가지고 가라.”

“명 받듭니다!”

그녀의 명령을 들은 마법사들이 날아갔다.

“알뤼르!”

“네, 폐하.”

“나라의 광역 결계가 드래곤에 의해 사라졌음을 라르헨 전역에 알려라.”

“명 받듭니다.”

알뤼르가 이동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드래곤의 심장을 마법으로 끌어당겼다. 그 옆에서 검게 물들어 있는 이그나르도의 마력석도 함께 끌어당겼다.

“그것은…….”

“드래곤의 마력의 근원이라 불리는 드래곤의 심장이지. 보클로엠이 이그나르도의 흑마법에 약한 이유가 있었군.”

이실리스가 심장의 깨진 부분을 베르타스에게 보였다. 깨진 심장 사이에서 희미한 마력이 계속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마 보클로엠은 라르헨의 광역 결계에서 마력을 끌어다 이 심장을 복구하려고 했던 거 같군.”

그러다가 죽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삼켰다. 마법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본 이실리스가 황궁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거기 서세요!”

페트라 라르헨이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일국의 황제에게 하는 말치고 버릇이 없군.”

“나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나는 선황의 자매가 아닙니까.”

이실리스의 싸늘한 말이 떨어졌으나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녀에게 대꾸하는 페트라의 말을 흘려들었다. 할 말이 있으면 더 해보라는 듯 이실리스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저 드래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다 폐하 탓이 아닙니까!”

페트라의 말에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이런 여자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라르헨에 어떤 일이 생기면 교묘하게 이실리스를 탓하는 그녀의 화술에 속아 넘어간 귀족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그럼 어쩌라는 겁니까. 저 드래곤을 막기라도 해야 했다는 겁니까? 온 제국이 불탔을 텐데?”

“황제라면 그렇게 하셔야지요!”

“헛소리를.”

황제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니. 그런 헛소리가 어디 있는가. 보클로엠을 막았다면 라르헨 곳곳을 헤집고 다닐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뒷수습은 모두 이실리스와 마법사들의 차지. 그냥 별궁 하나 무너지고 끝난 지금의 상황이 훨씬 나았다.

“라르헨이 쑥대밭이 되는 것보다 이 상황이 훨씬 나은 것을!”

“광역 결계는 어쩔 생각입니까!”

“뭘 어쩌라는 거지? 결계는 없어졌다.”

“다시 세우셔야 할 것 아닙니까!”

페트라의 말에 이실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당연하게 요구하는 저들의 태도에 신물이 올라왔다. 역겹기 그지없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잘난 그대들이 세우게.”

“뭐라 하셨습니까?”

“그렇게 잘난 그대들이 세우라고 했네.”

“폐하!”

“닥쳐라!”

이실리스의 분노가 황궁을 뒤덮었다.

“그대들은 지금까지 무엇을 했지? 귀족이라는 자들이 영지민을 제대로 돌보기를 했나, 아니면 전쟁에 나가서 공을 세우기를 했나. 하는 일이라고는 세금을 거두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 것이 다야!”

“그 세금을 거두어서 폐하께 바치지 않았습니까? 설마 폐하께서는 그 세금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그 세금을 과하게 걷어 횡령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귀족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횡령에 대한 죄는 곧 치죄할 것이다.”

“폐하! 광역 결계를……!”

“닥치라고 하지 않았느냐! 광역 결계는 드래곤이 세운 것! 나라를 건국한 건국 황제를 도와 결계를 세운 드래곤이 그 결계에서 마력을 회수했다. 회수된 마력은 돌아오지 못했고 마법진은 이미 부서졌다. 광역 결계의 중심인 기본 결계가 사라진 이상 더는 내가 마력을 쏟아부어도 광역 결계를 세울 수 없다. 광역 결계를 세우라고 했느냐? 너희들이 말하는 대로 그게 그렇게 쉽게 세워지는 것이면 다른 나라에서는 왜 그것을 세우지 못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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