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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147/161)

146화.

“안 됩니다!”

강단 있게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하고 바라봤더니 페트라 라르헨이었다.

‘하긴 결계가 없어지면 가장 힘든 것은 귀족들이지.’

광역 결계가 사라지는 순간 귀족들은 그들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각자의 영지로 떠나야 했다. 이제 더는 수도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 수 없었다.

[안 된다?]

“그렇습니다! 그 결계는 라르헨의……!”

[버러지 주제에 말이 많구나.]

드래곤은 본디 인간에게 자애로운 존재가 아니다. 라르헨에 광역 결계를 세워준 보클로엠이 이상한 드래곤이었다. 보클로엠의 마력이 페트라를 향했고, 순식간에 그녀의 오른팔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아아악!”

주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귀족들이 주춤주춤 움직여 페트라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혹시 드래곤의 분노가 자신들을 향할까 두려워서.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고통스러워하는 페트라를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오른팔을 당했으니 앞으로 그녀가 마법을 쓰기란 요원해 보였다.

‘마법사라는 것을 알고 오른팔을 일부러 못 쓰게 한 거겠지.’

드래곤이 페트라의 몸에 흐르고 있는 마력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감히 드래곤 앞에 나선 인간에 대한 본보기를 그녀를 통해 보인 것이 분명했다.

“폐하 어떻게 해 주십시오.”

“방금 보지 않았나? 내 마력이 통하지 않는 것을.”

“국부께서 드래곤을 잡을 수 있다고…….”

“닥쳐라.”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에게 속삭인 말을 들은 귀족이 입을 열자 이실리스가 서둘러 그 입을 막았다. 당황하여 고개를 숙이는 귀족을 서늘한 눈으로 응시한 그녀가 다시 보클로엠을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귀족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절대 나서지 말게 베르타스.”

“이실리스.”

“절대로. 난 그대를 잃고 싶지 않아.”

보클로엠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말하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늘 그랬다.

아닌 듯하면서 저를 챙기는 그녀가 좋았다. 손안의 검을 힘있게 쥔 베르타스가 몸을 낮추려는 찰나였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자가 있었다.

“기다리게.”

그의 움직임을 눈치챈 타르토스였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위를 향해 눈짓하는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보클로엠이 위용을 드러내며 서 있는 그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드래곤의 몸에서 뿜어지는 붉은 마력은 점점 짙어졌고 눈도 뜰 수 없는 환한 빛과 함께 결계는 사라졌다.

“안 돼!”

선황이 사라지는 결계를 보고 처절하게 외쳤지만, 방도가 없었다. 휘청이는 그녀를 부축하는 타르토스도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사라졌군.”

허탈한 이실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는 거였나.”

거의 평생을 결계를 지켜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이실리스로서는 결계가 없어진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보클로엠이 울부짖었다.

[이베르트 네가 감히!]

부유 마법으로 하늘에 떠 있던 이베르트가 술식을 만드는 것이 보였다. 별궁을 감싸고 있던 마법진이 그와 공명하여 사슬처럼 움직이며 새로운 마법진을 만들어내는 것이 보였다.

“폐하!”

알뤼르가 이실리스를 부르는 것이 들렸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베르트는 왜 저런 짓을 하는 것이며 보클로엠은 왜 저렇게나 당황하는 것일까.

가만히 있으라며 알뤼르에게 손짓한 이실리스의 시야로 검은 마력이 솟구쳐 올랐다.

“이것은…….!”

“폐하,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입니다.”

이베르트가 만들어 낸 것은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이었다. 보클로엠의 붉은 마력은 검은 마력에 휘감겨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드래곤의 수호 기사가 왜 보클로엠을 가두려 한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이실리스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보클로엠. 당신이 나와의 서약을 깨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하진 않았을 겁니다.”

[오해다!]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의 서약은 당신에게 많이 기울어 있으니 저라도 그 추를 맞춰야겠습니다.”

손을 움직여 술식을 마무리하려는 이베르트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베르타스의 옷깃을 잡았다. 손에 은밀하게 마력을 모으고 있는 이실리스에게 베르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기회야.’

지금 이베르트와 보클로엠을 처리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 수 있었다. 마력을 차지한 보클로엠이 라르헨을 노리지 말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이베르트의 손에서 술식이 거의 완성되고 있었다. 술식이 완벽해지면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은 그녀가 힘쓰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기운을 갖게 된다.

‘그렇게 둘 수는 없어.’

결계까지 거둬들인 보클로엠의 마력을 흡수한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은 그녀도 그 힘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움직임을 보일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뮤르카 제국에서 뼈저리게 느낀 이실리스였다. 저 마법진이 어떤 의도로 사용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완성하게 둘 수 없었다.

“마력이 충돌하게 되면 순간적인 틈이 생긴다.”

“그 틈을 노리지.”

베르타스가 냉큼 그녀의 말을 받으면서 속삭였다. 저 높은 하늘에서 몸부림치던 보클로엠의 몸집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이베르트가 마지막 술식을 위해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이실리스가 날아오르면서 이베르트의 술식을 향해 손에 모아두었던 마력을 쏘아 보냈다.

“크악!”

그녀의 강력한 마력이 무방비 상태의 이베르트를 감쌌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베르트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강력한 기사이기도 한 그를 포박한 것은 라르헨의 마법사들이었다.

땅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베르타스는 검에 오라를 모아 보클로엠의 눈동자를 향해 쏘아 보냈다. 쏘아 보낸 오라가 눈동자에 닿기도 전에 베르타스는 드래곤의 가장 약한 부분인 심장으로 뛰어올랐다.

“크와아앙!”

눈동자를 다친 보클로엠이 분노의 포효를 내뱉었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진동하는 그 소리에 귀족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보클로엠의 목 안에 붉은 기운이 뭉치는 것을 목격한 이실리스가 강력한 보호 마법을 일으키면서 베르타스를 향해 외쳤다.

“베르타스! 브레스가 완성되기 전에 쳐야 한다!”

라르헨의 마법사들도 이실리스를 따라 보호 마법의 술식을 외웠다. 그녀의 뒤에서 마력을 일으키는 마법사들은 황궁 전체를 감싸는 보호 마법을 완성했다.

“황궁을 감싸면 어쩌자는 거냐!”

“우리보고 다 죽으라는 거냐!”

항의하는 귀족들을 향해 이실리스가 일갈했다.

“이곳에서 일이 생긴다면 제국민은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폐하!”

아우성치는 귀족들에게 싸늘한 미소를 던진 이실리스가 베르타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심장을 찌르려다 실패한 그는 다시 뛰어올라 보클로엠의 목을 노렸다.

“제발.”

드래곤은 마력으로 공격할 수 없다. 그것은 불문율과도 같았다. 모든 것은 베르타스와 같은 기사들에게 달렸다.

뒤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베르타스의 기사 중 검을 사용하는 자들은 베르타스의 뒤를 따라 검을 휘둘렀다. 태산 같은 위용을 자랑하던 보클로엠의 몸에 하나씩 실금이 생기는 것이 보였다.

“이실리스! 날!”

베르타스가 그녀를 향해 외치자 이실리스는 마력을 일으켜 그를 하늘 위로 날렸다. 순식간에 보클로엠의 머리 바로 아래에 위치하게 된 베르타스가 오라를 불어 넣은 검으로 목을 꿰뚫었다.

검에 의해 갈라진 틈 사이로 밝은 빛이 쏟아졌다. 차마 완성되지 못한 브레스가 터져 나오면서 강력한 화염이 쏟아져 내렸다.

“결계를 펼쳐라!”

베르타스에게 쏟아지는 화염을 막으려고 이실리스가 재빨리 마력을 쏘아 보냈다. 그녀가 일으키는 마력의 흐름을 따라 마법사들도 마력을 움직였다. 허나, 그녀의 마력이 베르타스에게 채 닫기도 전에 화염이 그를 뒤엎어버렸다.

“베르타스!”

이실리스의 찢어지는 비명이 황궁을 울렸다. 하늘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화염을 막기 위해 분주히 마력을 쏘던 마법사들이 비명에 놀라서 바라보았지만, 황제의 체면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이실리스는 그대로 날아올랐다. 그녀의 몸 위로 쏟아져 내리는 화염을 하나하나 마력으로 쳐내면서 이실리스가 무너지려는 보클로엠을 경멸이 담긴 시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만두지 않겠다.’

드래곤이기에 존중했다. 그녀의 마력을 빼앗았어도 용서했다. 마력의 시초라고 불리는 그들에게 예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과한 요구를 했어도 들어줬다. 그것이 그녀의 배려였다. 그랬는데 보클로엠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녀가 베푼 호의와 존중을 하나도 깨닫지 못한 채 혜안을 잃어버린 보클로엠의 눈동자엔 숨길 수 없는 분노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죽여야 해.’

보클로엠은 이실리스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았다.

해할 수도 만류할 수도 있었지만, 존중해야 했고 방도와 명분이 없으니 결계를 거둬가도록 그냥 두었다. 그러나 저렇게 멍청해진 채로 이용만 당하는 분노에 찬 드래곤을 세상에 내어놓았다간 큰일이 날 터였다. 더구나,

‘나의 베르타스를……!’

베르타스가 갈라놓은 틈을 목격한 이실리스의 시린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리고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가 편 그녀는 그 사이로 마력을 밀어 넣었다.

“크아아아!”

보클로엠의 입에서 인간이 아닌 것의 외침이 쏟아졌다. 밀어 넣은 그녀의 마력은 보클로엠의 몸 안에서 몸부림쳤다.

이실리스의 마력을 흡수하여 없애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아직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그나르도의 마법진에 묶인 보클로엠은 그녀의 마력을 흡수할 수 없었다.

“죽어라.”

그녀의 입에서 싸늘한 말이 튀어나왔다. 상처 나지 않은 보클로엠의 반대쪽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나를 죽이려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분노에 찬 보클로엠의 목소리가 하늘과 땅을 울렸다. 그 기세에 움찔했던 베르타스의 기사들이 다시 칼을 들었다.

보클로엠의 몸 안을 휘젓던 이실리스의 마력이 보클로엠의 심장에 닿았다. 마력의 원천이라 불리는 드래곤의 심장에 그녀의 마력이 닿자 이실리스의 마력을 흡수하기 위해 심장의 마력이 움직였다.

“지금!”

이실리스의 외침에 따라서 베르타스의 기사들이 검을 날렸다. 그녀의 마력이 다시 보클로엠의 목 아래에 갈라진 틈으로 빠져나왔고 그 마력을 노리던 보클로엠의 심장도 함께 빠져나왔다.

심장이 나오는 그 순간, 보클로엠의 눈이 커졌다. 본디 드래곤의 심장은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드래곤이 자유자재로 마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렇기에 몸 밖으로 끄집어내 보관할 수도 있었다. 그런 심장이었지만 지금 빠져나와서는 안 되었다. 심장은 보클로엠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기에 바로 공격을 받으면 안 될 터!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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