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베르타스는 그 시각, 황궁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실리스를 피해 정원에서 자리를 옮기니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이렇게 내 자리가 없다니.’
이 라르헨의 황궁에 그를 위한 장소 하나 없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이실리스의 집무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을 때엔 느끼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이실리스는 어떻게 지내는지 알뤼르와 이야기를 해 보려 했으나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남은 것은 페일러스였는데 그의 소식도 알 수 없었다.
‘이곳에 들어왔다고 했는데…….’
황궁에 도착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이실리스를 만나고 별궁에 들어간 이후, 소식이 끊겼다.
“설마!”
별궁에 들어가서 보클로엠이나 이베르트를 만났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구금된 것이라면 찾아볼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이실리스는 알고 있는 것인가.”
모를 리는 없겠지. 황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그녀였으니. 베르타스는 착잡한 마음을 애써 가다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뭘 하지?”
“타르토스…… 님.”
선황의 부군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이실리스와 다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황궁 안엔 눈과 귀가 너무 많았다. 그동안 단속한다고 했지만, 아직도 그의 아래에 복속되지 않은 시종과 시녀들이 너무 많았다.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외국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너에게 좋지 않다.”
“당신이 날 걱정하는 겁니까?”
“당연히. 너와 나의 입장은 같으니.”
딸인 이실리스보다 그에게 더 가까운 기색을 보이는 타르토스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저 사람이 이실리스에게 한 행동을 보면 아버지라는 이름이 아까웠다.
그랬는데 저에게 친절한 타르토스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대하는 것이 어색한가?”
“그렇습니다.”
타르토스는 베르타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너는 또 다른 나 자신이다.”
이어지는 허심탄회한 타르토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놀란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라르헨의 자손이었으나 멀리 쫓겨나 그 혈통을 증명할 수 없는 나. 힐렌튼의 사람인 너와 같지.”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끝없는 견제를 받았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이실리스는 아무런 노력 없이 저 자리를 거머쥐었지.”
“그것은…….”
“내가 보기엔 그것은 노력도 아니고 시련도 아니다.”
그가 겪은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니 베르타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뮤르카 제국의 일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 또한 이실리스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것밖에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너를 동정한다. 나와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을.”
“동정이라니…….”
“그래서 나는 너를 아낀다. 나와 같은 운명을 타고 났기에.”
“…….”
“그렇기에 나는 너에게 관대하다. 그러니 베르타스,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도 좋다. 뒷받침은 내가 해줄 테니.”
“뒷…… 받침?”
“그래. 내가 여기 있는 동안엔.”
타르토스의 말은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었다. 이곳에 기반이 하나도 없는 베르타스로서는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무슨 일을 획책하려고 해도 늘 귀족들의 반대에 막혔다.
그를 지지해줄 귀족도, 제국민도 없는 라르헨은 생각보다 외로운 곳이었다. 의지할 데라곤 그의 딸과 이실리스뿐. 그의 수하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의지의 대상이 아니었으니.
‘나를 위해서 배경이 되어 주겠다고?’
타르토스의 말은 베르타스에게 한 줄기 빛이었다. 무언가 해보고 싶어도 시도도 못 하고 포기했던 것이 몇 번인가.
그런 그의 마음을 알고 그에게 아량을 베풀어 주겠다는 타르토스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와 닮았다고 하나 그것 때문에 그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다.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있지.”
차라리 잘 되었다. 없다고 했다면 베르타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한 그의 태도에 베르타스가 귀 기울였다.
“무엇입니까.”
“페트라 라르헨을 죽여주게.”
“네?”
“페일러스의 어머니를 죽이라고 했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굳은 얼굴의 타르토스를 향해 베르타스가 물었다. 타르토스는 아일라, 즉 선황 외엔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누군가를 죽여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이상했다.
그게 선황의 자매라는 것도.
“이실리스에 대해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했나?”
“이상한 것…… 말입니까?”
“그 아이는 생각보다 몸 쓰는 일을 하지 못해.”
“그것은 마법사이기 때문 아닙니까?”
“이성과의 잠자리에 대해서도 무지하지.”
“아…….”
베르타스는 이실리스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황족치고는 아무것도 몰랐지. 황족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성에 관련된 교육인데…….’
이실리스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그만큼 그녀에게 빠져 있었으니까.
“페트라 라르헨이 한 짓이지.”
“네?”
“아일라가 이곳의 광역 결계에 마력을 불어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잘…… 모릅니다.”
“거의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지. 매일같이 새어나가는 마력을 채우기 위해 내가 옆에 붙어있어야 하고.”
지금은 이실리스가 돌아와서 조금 나아졌다고 말하는 타르토스의 말에 뼈가 있었다.
“딸을 돌봐야 하는 황제와 부군이 황태녀를 돌보지 않으면 누가 돌보았을 것 같나?”
“그거야 황실의 제일 어른이…… 설마!”
“그렇지. 페트라가 돌보았다.”
페트라 라르헨은 이실리스에게 일부러 검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강력한 마력을 타고난 마법사이니 검술을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그 실상은 달랐다.
황족을 낳을 귀한 몸이니 하나의 상처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성에 관련된 교육도…….”
“일부러 하지 않았지. 황족이 그쪽으로 눈을 뜨게 되면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특히 황족의 후사라면 후계가 될 수 있는 라르헨이었으니.”
“이럴 수가.”
“저들이 이실리스의 짝으로 내정했던 자는 사이르카 후작. 그 이후의 일은 자네가 알고 있겠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한 것이란 말인가. 황실을 휘두르고 황족을 휘두르려고 했던 저들의 행태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면 에리카도…….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렇기에 내가 모든 일을 획책하였지.”
“그 일 때문에 이실리스의 미움을 산 것은 아십니까?”
“그거야 뭐. 나는 그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상관없다.”
웃으며 말하는 타르토스의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한 베르타스가 쓰게 웃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까.”
“라르헨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황족들에게 벌어지던 일이지. 광역 결계를 지키는 것 외에 황족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귀족들이 제 잇속을 챙기는 것은 아주 빈번했어. 특히, 아일라의 치세가 그게 가장 컸지.”
그것이 꼴 보기 싫었던 이실리스가 황위에 앉자마자 귀족들을 척살했던 것은 그들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그러니 이실리스를 두려워하면서도 얼른 치워 버리고 싶어한다는 것이 귀족들이라고 타르토스가 설명했다.
“이럴 수가.”
타르토스의 입에서 나오는 놀라운 말에 베르타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실리스가 저 보클로엠을 이리 데리고 왔을 때 반대하지 않았다.”
“보클로엠을 아십니까?”
“당연하지 않나. 나 또한 뮤르카 제국의 신전에서 탈출한 몸.”
“그렇다면…….”
“저 보클로엠이 라르헨의 광역 결계를 없애주길 바란다. 두 번 다시 귀족들이 황족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허나 이실리스는…….”
“그 아이는 허상에 사로잡힌 걸세. 어릴 적부터 페일라와 귀족들이 떠들어댄 책임감에 대한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었어. 광역 결계를 유지한다면 제국민들은 보호받겠지. 그러나 그 보호는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야. 귀족들에게도 해당된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 직위를 누리는 것이다. 황족의 희생을 등에 업고.”
입술을 짓씹고 튀어나온 그의 말에 베르타스도 동의했다. 이 제국의 귀족들은 정말 하는 것이 없었다. 국경을 수호하는 것도 아니고 마법사들처럼 제국에 부를 가져다줄 무언가를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는데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내가 자네의 배경이 되어 줄 테니, 저 페트라 라르헨을 죽여.”
“……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생각은 하지 말지. 그게 기사 아닌가.”
“당신은 나의 주군이 아닙니다.”
“이실리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그녀의 뜻이 아닙니다.”
“너는 이실리스의 검이 아닌 반려다. 그 정도 판단은 할 수 있을 텐데?”
베르타스의 손으로 꼭 페트라 라르헨을 없애야겠다는 타르토스의 말에 궁금증이 일었다.
“꼭 제 손으로 없애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내 손으로 없애고 싶지만 안 되니, 너의 손이라도 빌려야지. 너 또한 라르헨의 국부이니 나를 대신한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나.”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타르토스를 향해 베르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뒷공작을 펼치는 귀족들을 언젠가 손보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기회가 왔으니 놓치지 않는다.
‘딸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군.’
페트라가 벌였던 모든 일을 훼방 놓은 것이 타르토스의 계략이라는 것을 깨달은 베르타스가 그를 향해 물었다.
“이실리스에겐 말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뭐 하러.”
말하면 황제인 그녀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냐고 덧붙이는 타르토스의 어조엔 애정이 넘쳐났다.
‘진즉 저런 애정을 보였다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그와 이실리스의 관계도 조금 달라질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대답은?”
“하겠습니다.”
“좋아.”
그때였다.
“콰르릉! 쾅! 쾅!”
황궁이 강하게 흔들렸고 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던 타르토스의 말이 떨어졌다.
“시작됐군.”